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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칼럼/기고 기사

  • [학생명예기자 마당] "주한미군 주둔 vs 자주국방", 우리의 현실은?
    [교육연합신문=김성아 학생명예기자] 전시작전 통제권 환수 문제와 함께 우리나라에 주둔해 있는 주한미군의 필요성에 대한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최근 미국 CIA에서 발표한 국방력 순위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핵무기를 제외하고도 9위에 오르는 성과를 보였다.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이스라엘도 10위 안에 들지 못했다. 우리나라도 자주국방이 가능하지 않느냐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주한미군 주둔으로 인한 소음문제, 환경문제 등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있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라는 주장 또한 끊이지 않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주한미군 주둔으로 인한 국가 경쟁력 향상, 국가신뢰도 향상 등을 근거로 그들이 주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주한미군이 주둔하면서 맺었던 SOFA 협정은 치외법권 인정 등으로 인해 우리와 미국이 종속관계에 있다고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 후 주한미군의 범죄도 줄어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 훈련장 주변은 환경오염이 심각한 상태이다. 그것을 복원하는 비용도 대부분 우리나라가 지불하고 있다.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그들의 군사력, 이익 둘 중 어느 것 하나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받기로 한 시점에서 앞으로 주한미군의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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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6-09
  • [학생명예기자 마당] 세상을 바꾸는 힘
    [교육연합신문=송인영 학생명예기자] 나는 열여덟 해를 살아오면서 세상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끔직한 일들이 인간들로 인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허영심과 겉치레의 상징인 모피 코트를 위해 살아 있는 새끼 바다표범의 가죽을 벗기고, 아마존에 살고 있는 세렝게이루를 무참하게 짓밟아 가면서까지 숲을 개간하고, 또 자신의 뜻을 비폭력으로 일관되게 전달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때리고 죽이는 끔찍한 일들···.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세계 곳곳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반면에, 부당한 억압과 폭력에 맞대응하지도 않고 굴복하지도 않는다는 신념 아래, 위험에 처한 동물을 구하거나 파헤쳐질 상태에 놓인 숲을 온전하게 보호하고, 억울하게 침해당한 인권을 되찾기 위해 ‘비폭력 직접 행동’에 나선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들의 숭고한 저항은 위대한 것이어서 지금까지 지구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인류의 힘인지도 모른다. 비폭력주의라고 하면 우선 마하트마 간디를 잊을 수 없다. 그러나 비폭력주의의 근원은 인도 종교의 한 부류인 자이나교(敎)의 중심 사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불살생(不殺生)과 무해(無害), 즉 모든 생물을 살해하지 말며, 또 남이 살해하고 있는 것을 용인하지도 않는다는 게 그 요지이다. 이 사상에 깊이 심취한 간디는 더욱이 레프 톨스토이나 헨리 소로 등의 영향을 받고 영국 식민 정치에 대해 비폭력 저항 투쟁을 전개하여 식민지 인도의 독립 및 민족의식의 핵심으로 삼았다. 머지않은 과거의 역사 속에서 비폭력을 내세워 투쟁한 사람은 비단 간디만이 아니다. 미국 흑인 운동의 지도자 마틴 루터 킹도 간디로부터 크게 공명을 받아 비폭력 시민 불복종운동을 조직하여 세계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사회는 고정된 것이 아닌 움직이는 것이다. 움직이는 사회는 좋은 방향으로 변화할 수도 있고, 부정한 방향으로 변화할 수도 있다. 가변적인 성향을 가진 사회의 여러 문제를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로 성숙한 시민 의식일 것이다. 성숙한 시민 의식이 행동하는 양심과 더불어 비폭력 직접 행동으로 나타나면 아무리 어려운 사회 문제, 국가 문제, 인류 문제라 할지라도 쉽사리 풀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행동하는 양심’을 가진다면 뭐가 어렵겠는가. 익히 알다시피 1980년대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화를 비롯한 큰 변화의 흐름을 이끌어 냈다. 이제는 그 흐름이 늘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어져 바르게 정착하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러려면 급격하게 움직이는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행동하는 양심을 가진 멋진 지식인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고, 나아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지구를 위협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태롭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서 그런 일들을 어떻게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양심’이란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으로 나와 있다. 그것은 실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고귀한 가치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러한 양심도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하등 쓸모없는 가치일 뿐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다. 양심이 진정한 양심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오직 바른 행위로 드러날 때가 아니겠는가. 그때야 비로소 ‘행동하는 양심’이 될 것이다. 광주 문정여고 송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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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5-31
  • 5월에 제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교육연합신문=편집국] 신록의 계절 5월이다.해마다 이 무렵이면 지난 날 너희들과 함께 꿈의 교정에서 희망을 얘기하며 청춘과 사랑, 그리고 열정과 미래가 공존했던 추억들을 기억하곤 한다. 그 시절들은 5월처럼 푸르렀고, 영원히 간직될 시간들로 내 기억에 남아있다. 시간은 우리를 멀리 데려와 이 아름다운 별에서 또 하나의 봄을 맞이하게 하지만, 기억만은 그날에 머물러 우리들의 아름다운 영혼을 되새김질 하게 한다. 사랑하는 나의 제자들아 시인 노천명은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했다. 여러 개성을 가진 꽃들이 봄의 향기를 물씬 풍기며 여기저기서 여왕의 자태를 뽐내며 잘난 체를 하는 듯하다. 여왕다운 품위와 인격을 갖추어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고, 시들어가는 푸른 잎새와 주름져 패어가는 심령 가운데서 겸손함을 터득하는 이 신록의 계절, 우리들이 사랑하는 싱그러움을 가슴 깊이 안으며 몇 가지 삶의 자영분이 될 얘기들을 너희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우리들이 함께 공부하던 그 푸른 시절들을 떠올리며 읽어줬으면 좋겠다. 호주에 닉 부이치치(25세)라는 청년이 있다. 팔다리가 없는 암울한 이 청년은 인간으로서 최저의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삶을 극복하여 승리의 함성으로 다시 일어났다. 이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감동실화다.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삶에 동굴이란 없다’는 자세로 살아가야 할 이유를 우리들에게 전해 주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각 사람마다 물질의 동굴, 건강의 동굴, 경제의 동굴, 절망의 동굴, 이기주의의 동굴, 냉소의 동굴이 있다. 이를 빨리 빠져 나가려면 믿음이란 포크레인으로 동굴을 파내 터널을 뚫어야 된다. 앞뒤가 막혔다고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욥’처럼 ‘내가 가는 길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시킨 후 내가 순금 같이 나오리라’는 자세로 당당히 외치는 모습이 필요하다. 믿음은 개념이 아니라 삶이니, 팔다리가 없는 그가 희망이 없는 마음의 동굴에 갇혀 있지 않고 터널을 적극적으로 빠져나와 밝은 세상에 안겼음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한다. 또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녹화내용을 보면서 교정을 하고 수없이 연습을 하는 연습벌레였다. 골프 황제가 되기 전 타이거 우즈는 코치에게 자세 교정을 원했다. 코치는 ‘5분이면 내용을 전수할 수 있으나 2년 동안 우승을 포기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예’라고 답을 했고, 가르쳐준 폼을 가지고 2년 동안 연습에 연습을 가했다. 그는 그렇게 교정의 사투를 통해 14번 중 10번을 우승하며 성공의 월계관을 썼다. 또 푸에르토리코의 유명한 화가 루벤스는 ‘노인과 여인’이라는 명화를 남겼다. 이 작품을 보면 어떤 노인이 젊은 여인의 젖을 먹고 있는 모습이다. 그림만 놓고 보면 파렴치한 노인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그 노인은 푸에르토리코 독립 운동가였다. 그는 음식물이 전혀 공급되지 않는 상태에서 사형 날짜를 기리고 있는 극한적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이 출산 후 아버지 면회를 갔고, 자식으로서 마지막 해줄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다며 아버지에게 젖을 먹이는 장면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지 않은가? 우리는 이렇게 본질을 알면 같은 모습도 시각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새롭게 보면 인생의 구조와 틀이 달라지고, 교정(회개)이 없는 모습은 허울뿐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 자가 성공의 투구를 쓰는가를 늘 살펴보고, 본질을 꿰뚫어 봐야 한다. 자기 교정이 빠르면 빠를수록 건강이 회복되고, 축복이 회복되고, 행복이 회복되는 것을 우리는 가까이서 늘 목도하며 살고 있다. 또 하나의 이야기도 우리에게 삶의 지평을 전해주는 좋은 사례가 될 것 같아 얘기를 들려준다.재일교포 가운데 손정의란 분이 있음을 너희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야후 제펜, 소프트뱅크의 회장이며, 세계적 부호의 반열에 오른 존재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는 1981년도 소프트뱅크를 창업하면서 아르바이트생 2명을 데리고 사과상자를 얻어놓고 일장 연설을 하였다. 2명의 아르바이트생 앞에서, “나는 5년 이내 우리 회사 매출액을 10억엔, 10년 이내 100억엔, 20년 이내 1조억엔을 이룰 것이다.”고 열강을 하였다. 30년이 지난 지금 그의 회사는 2만7천억 달러 매출액을 올리고 있다. 당시 연설을 들었던 2명의 아르바이트생은 손정의 사장을 정신이상자로 생각하고 다음날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고 한다. 만약 그의 신념을 믿고 따랐다면 아마 지금쯤 회사 사장으로 재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어떤 생각을 품고 살아야 축복받는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좋은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제자들아,모든 사람들은 성공을 꿈꾼다. 그러나 성공의 월계관을 쓴 사람들은 흔치 않다. 왜 그럴까?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우리는 나아가야 할 삶의 이정표를 하나쯤 찾을 수는 있다. 성공한 이들의 공통점은 세상을 바라보는 ‘긍정의 자세’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긍정이란 에너지를 솟구치게 하고 열정을 끌어올리는 속성이 있기에, 우리의 생각을 늘 긍정의 자세에 맞추어야 한다. 나는 할 수 있다. 내 생각 속에 ‘전진’의 기어를 집어넣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춤 주춤하는 중립기어(Nuturel), 슬금슬금 뒤로 물러가려는 후진(Return)기어, 정지하는 파킹(Parking)기어가 아니고, 자동차의 추진력인 전진(Drive)기어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말이다.‘기어를 어디에다 넣느냐’가 중요하다. ‘어떤 인생의 페달을 밟느냐’가 중요하다.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을 비전, 밝음에 두고, 공회전(Nuturel)이나, 후진(Return)이 아닌, 전진과 진보의 풋풋한 역사를 기술하며 뻗어나가는(Drive)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떤 기어(생각)와 맞물려 지내느냐를 늘 염두에 두자. ‘생각이 에너지’라는 구호를 들어봤을 것이다. 창조적인 생각은 감사의 생각으로 변한다. ‘내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늘 초점을 맞추자. 콜로라도주에 400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14번의 눈사태, 수없는 폭풍우에도 잘 견디며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작은 딱정벌레에 견디지 못해 큰 거목은 쓰러지고 말았다. 이 일화에서 딱정벌레는 게으름과 나태, 염려, 자포자기, 자기부정을 뜻한다. 이런 작은 벌레 하나 이겨내지 못하는 이는 미래가 없으며,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전진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지 않는 사람은 빈수레처럼 굉음만 낸다. 여러분의 인생 자동차는 공회전만 하는 N에 있는가? 뒤로 후진하는 R에 있는가? 아니면 목표를 바라보며 무한 전진하는 D에 있는가? 아직도 전진기어를 놓지 않고 후진이나 중립기어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에게 반문해 보기 바란다. 진정 나의 제자들은, 이제라도 전진기어를 힘차게 넣고, 신념을 기지고 축복의 대로를 질주하기 진심으로 바란다. 나의 제자들아, 나는 너희들에게 언제나 희망을 전해 주고 싶다. 이 세상에 아직까지 정의가 있고 꿈이 살아있기에 우리들은 언제까지나 희망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해마다 5월이면 파릇한 새싹과 푸르름이 돋아나듯이 우리에게 절망은 한때 스쳐가는 겨울과 같은 시간일 뿐이다. 위에 예시한 몇 가지 일화들을 늘 기억해 주고, 이따금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꿋꿋하게 이겨나가는 의연함을 보여주기 바란다. 나는 나의 제자들이 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열정과 온 정성을 다해 삶을 꾸려나가는 그런 존재이기를 늘 바래본다. 오늘 다시 바라보는 5월의 하늘은 끝없이 높고 청명하다. 내가 기억하는 너희들의 밝고 고운 희망처럼 초록빛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 시간이 흘러 제자의 나이가 들만큼 들어도 나에게는 너희들이 언제나 아이처럼 보인다. 이것이 스승의 마음인가 보다. 사랑한다. 5월을 닮은 나의 아이들아, 나의 아름다운 제자들아. 박영조 인천전자마이스터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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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5-14
  • [기자수첩] 젊은 청춘아 안녕, 안녕!
    [교육연합신문=김수아 기자] 독일의 대문호인 괴테가 스물다섯이 되던 해 봄, 그는 이미 약혼자가 있는 샤로테 부프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녀를 향한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한다. ‘아 사랑하는 로테여 안녕, 안녕!’ 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베르테르는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쏘아 자살을 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사랑에 좌절한 많은 청춘들이 같은 복장을 하고 자살하게 되었다는 것에서 유래한 ‘베르테르의 효과’가 요즘 자주 언급된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청년의 이야기를 다룬 독일 문호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현실로 나온 것인가. 올해가 시작된 지 일주일이 지날 무렵 전문계고 출신의 카이스트 대학생이 자살했고, 언론들도 대서특필하고 나섰다. 언론들은 괴테의 낭만주의적인 ‘베르테르 효과’를 들고 나오면서 자살의 내면보다는 자살 자체의 초점을 맞춰 선정적 보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입시 스트레스나 좌절로 목숨을 끊는 고등학생이 한 해 줄잡아 100명이 넘지만, 카이스트처럼 보도되는 경우는 드물다. 서남표 총장은 이런 대참극 앞에서도 “미국 명문대의 자살률은 더 높다”고 말해 비난을 자초했다. 자살과 경쟁력의 함수관계에 관한 나름의 발언이었겠으나, ‘경쟁을 통한 발전’을 중시하는 서구 명문대들의 현실을 봤을때, 그의 가학성에도 명분이 아주 없지는 않다. 현재 카이스트를 대변하는 듯한 그의 발언은 “집단의 움직임은 명분 없이는 불가능 하다”란 말을 떠올리게 만든다. 2007년 서남표 총장은 취임시 교내의 학생들 사이에 경쟁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제기했고, 실제로 그런 방향의 정책을 내놓았다. 대표적인 제도가 차등등록금제이다. 카이스트 학생은 원래 등록금을 내지 않으나, 대학 측은 경쟁력 제고를 위해 정해진 기준의 학점에 이르지 않으면, 학생들에게 0.01점당 6만 원가량을 내도록 하는 정책을 실시한 것이다. 이에 학생들은 평가기준이 절대평가가 아닌 상대평가이기에 친구들과 우정을 쌓는 대신, 캠퍼스 내 무한경쟁의 환경 속으로 내몰렸다. 미필적 고의(未必的故意)란 말이 있다. 본인의 행위로 인해 어떤 범죄 결과와 발생 가능성을 인식하였음 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의 발생을 인용한 심리상태를 말한다. 이번 자살사건은 어쩌면 ‘경쟁에서 낙오하는 사람은 어쩔수 없다’는 철저한 경쟁논리가 가져온 예고된 참사일지도 모른다. 과연 이런 억압적인 교육제도 속에 방치된 것이 학생들의 잘못인가. 한국의 교육계는 학교가 만들어낸 미필적 고의가 확정적 고의(자살)로 바뀌게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학교 내에서의 적당한 경쟁은 필요하다. 학생들이 극단적인 선택에 내몰리지 않도록 하는 해결책은 대학과 학생들이 서로의 책임을 떠넘기지 않고 서로 소통하는 분위기가 우선이 되야 할것이다. 대학, 교수, 학생이 서로 상생하고 학생들의 의견을 적절히 수용한다면 문제가 극단적으로 흐르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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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4-22
  • [교육칼럼] 촌지는 있다
    [교육연합신문=편집국] 임승규 교육칼럼니스트 스승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학부모는 공포의 시간이다. 선생님에게 선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다. 국민권익위원회가 초·중·고교 학부모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문화상품권 등 유사 현금을 제공한 경험이 있는 학부모가 전체의 18.6 %를 차지했다. 선물을 고민하느니 차라리 상품권이 마음이 편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촌지(寸志)는 원래 '작은 정성' 이라는 의미이다. 촌지는 현금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교사에게 주는 모든 선물을 통칭한다. 상품권이나 명품가방 등이 더 큰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분류는 합리적이다. 재미있는 점이 있다. 교육청은 원칙적으로 촌지를 불법으로 보면서 이미 근절된 행위로 간주하고 있다. 교육청은 금품수수 및 복무규정을 근거로 '교사는 어떤 선물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세웠다. 교육청의 관점에서는 현재 촌지(선물)를 받는 사람은 없으며, 뉴스에 이슈화 되는 교사는 법을 어긴 일부일 뿐이다. 촌지는 있다. 명확한 사실을 인정하자. 그리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촌지는 사회적으로 생긴 자연스런 문화이다. 교사를 존경하는 풍토에서 작은 정성으로 촌지를 제공하는 것은 역사적 전통이기도 하다. 거절할 수 없는 촌지들이 있다. 정성어린 천마리학, 직접 캐온 나물, 돌려보내면 상할게 뻔한 순대, 김밥 같은 것들이다. 부모님 없이 손자를 키우는 할머니가 학교에 힘들게 찾아왔다."선상님 이거 하나 드셔보세요" 손자가 혹여 삐뚤게 자랄까봐 마음고생 하는 할머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 고구마를 직접 손으로 찢어서 내 입에 들이대는데 그것을 거절할 수가 있겠는가? 이런 것들을 거절하면 오히려 할머니가 상처를 받을 것이다. 실제적으로는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촌지를 받는 상황에서 뚜렷한 기준 없이 촌지받은 교사를 처벌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촌지를 없애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촌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음성적인 촌지를 양성적인 곳에서 없애기 위해 열린 공간에서 논의해야 한다. 여러 사람이 촌지 문제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촌지의 존재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해결방안을 토론해야 한다. 둘째, 기존의 촌지를 주는 사회문화적 통념을 제도의 힘을 통해 개선하는 것이다. 계몽운동을 통한 개선에는 한계가 있다. 강제성을 토대로 한 합리적인 제도가 필요하다. 해마다 스승의 날이면 오는 공문이 있다. '촌지 안 주기, 촌지 안 받기 운동! ' 고작해야 학교 앞에 플랭카드 붙이고 가정통신문을 보낸다. 학부모들은 코웃음 친다. '그래도 주면 받더라'라는 인식이 학부모들에게는 깊게 깔려 있다. 촌지가 없던 지역에서 단 한명이라도 촌지를 주는 순간, 폭발적인 영향력을 가진다. 다양한 사람이 모인 사회에서 인간의 이기심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내 아이 잘 봐주세요'하며 교사에게 금품을 건네는 학부모의 이기심은 나쁘다. 그러나 이것은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자연스런 행동이다. 모든 원인을 학부모의 이기심으로 돌려, 비난만 한다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것을 자율에 맡기니 단 한명으로 무너지는 계몽운동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현상을 고치기 위해서는 제도를 고쳐야 한다. 해마다 스승의 날이면 선물금지 가정통신문에도 불구하고 선물이 쏟아져 들어온다. 작년 나는 작은 실험을 했다. 강력한 가정통신문을 보낸 것이다. "선물은 물론 꽃 한 송이라도 가져온다면, 가정통신문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부모님 속을 썩인 죄를 물어 하루 종일 벌을 세울 겁니다. 자식을 생각하신다면 스승의 날에 아무것도 들고 오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결과는 놀라웠다. 단 한명도 선물을 가져오지 않았다. 이는 교사의 강력한 의지가 있다면, 사소한 촌지도 근절될 수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일개 한 교실에서 일어난 작은 실험에 불과하다. 교단에 정의롭고 용기있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교사도 보통사람과 똑같은 인간이다. 욕심이 있기도 하고, 의지가 약하기도 하고, 추진력이 없을 수 도 있다. 이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은 강력한 제도이다. 제도적으로 단 1원의 촌지도 금지해야 한다. 특별감시반을 일시적으로 운영하여 강제적으로 집중단속하거나, 학교에 오는 학부모가 손에 아무것도 들고 오지 못하게 강제적인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선생님에게 작은 정성으로 촌지를 주는 사회문화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다. 이 힘을 깰 수 있는 것은 강제성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제도 마련뿐이다. 학교는 '작은 선물을 가져오면 되는 곳' 이 아니라 '절대 선물을 가져오면 안 되는 곳' 으로 만들어야 한다. 군고구마를 들고 학교에 오는 할머니가 '아. 학교는 아무것도 들고 가지 않는 곳이지' 생각하며 빈손으로 오는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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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4-22
  • [교육칼럼] 징벌적 등록금제는 망국적 성과주의
    [교육연합신문=편집국] 박계승 교육칼럼리스트 최근 카이스트(KAIST) 학생들의 잇따른 자살로 인해 교육계 안팎이 술렁이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의 르네상스를 꿈꾸며 화려하게 출발한 서남표식 교육개혁이 도마에 오른 것이다. 카이스트의 무리한 개혁은 젊은 과학도들을 경쟁력 강화라는 명분 아래 사지로 몰아넣었다. 그곳엔 미래 과학의 탐구자들이 아닌 영혼을 잃어버린 학습기계만이 존재했던 것이다. 카이스트가 시행 중인 성적에 따른 징벌적 등록금제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망국적 교육방법이다. 연구하는 카이스트인을 위해 새롭게 도입된 이 제도는 미국식 성과주의의 잘못된 모방이며 반인권적, 반교육적 행위이다. 카이스트의 학생들은 성적이 '3.0'만 넘으면 모두가 전액(100%) 장학금을 받는다. 하지만 그 이하일 경우 점수에 따라 연간 최고 1500만원의 징벌적 등록금을 내야하기 때문에 성적에 대한 부담이 매우 크다. 혹자들은 미국 명문대학의 경우도 장학금 지급 성적이 '2.5' 이기 때문에 그리 가혹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평가방식에 대한 명백한 오용이다. 미국의 대학들은 학업성취도가 일정 수준 이상만 올라가면 되는 절대평가 방식이지만 카이스트는 결과에 대한 상대평가 방식이다. 한국 유수의 대학들이 카이스트와 같은 상대평가 방식을 따르는데 이는 무한경쟁을 통해 학습성과를 높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경쟁자들을 반드시 이겨야 하기에 학습결과 측면에서 보면 일면 의미있는 평가방식이지만 동료가 적이 되고 학업성취로 인한 스트레스가 자살까지 불러왔다면 이는 결코 올바른 교육방법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징벌적 등록금제는 결과만을 중시하는 한국교육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학습자들을 성적순으로 세우고 그것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현실에서 창의적 능력을 발휘하기란 매우 어렵다. 더욱이 결과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양심적인 행위를 죄의식 없이 행하도록 조장하는 꼴이 된다. 전과목 영어수업도 문제다. 영어수업이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면 이는 궁색한 변명일 뿐이다. 글로벌세계에서 영어가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써 매우 유용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교과목을 영어로 수업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우린 필리핀처럼 영어를 제2 공용어로 하지 않는다. 당연히 수업의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교수자의 설명을 학습자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강의 내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하는데 이 때문에 교과교육이 아닌 영어교육이 되고 만다. 민족적 정체성 혼란 또한 야기될 수 있다. 언어는 정신을 지배한다. 한족에 흡수된 만주족의 예를 보라. 일제치하에서 조선어학회가 모진 탄압을 무릎쓰고 우리말을 지키고자 한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영어수업은 단순히 실용적 가치만을 두고 행할 일이 아니다. 성과지상주의가 만들어낸 작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람 중심의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선조들은 교육을 백년지계(百年之計)라 하여 오랜 시간을 두고 행했다. 단기간의 지식 전수가 아닌 지혜로운 인간의 양성에 초점을 두고 행한 것이다. 이는 모든 학문의 중심에 인간이 있음을 의미한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함은 백년지계의 핵심인 것이다. 징벌적 등록금제와 전교과 영어수업은 당장의 이익을 위해 더 큰 것을 놓치는 우매한 일이다. '旁岐曲逕(방기곡경)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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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4-22
  • [기자수첩] 아프니까 투쟁이다
    [교육연합신문=김현균 기자] '아프다. 슬프다. 버겁다. 힘들다. 절망적이다…' 이 말들에서 무엇이 느껴지는가.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의 중얼거림?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어버린 뒤 내뱉어지는 절규? 모두 아니다. 언제부턴가 이 문장들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을 표현하는 기표가 돼버렸다. 어쩌다 아름다워야할 청춘이 이토록 슬퍼졌는가. 사회가 가장 낭만적이고 행복해야 할 청춘들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하고 있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대학 등록금은 올랐다. 어떤 이는 등록금 인상 반대 관련 '개나리 투쟁'을 시작했고, 또 어떤 이는 비싸진 등록금에 시달리다가 꽃도 한 번 못 펴보고 싸늘한 주검이 됐다. 입시를 위해 밤낮 공부하라 하더니, 이제는 등록금을 내기 위해 밤낮 일하라고 한다. 학교가 마치 청춘이라는 이름의 '감옥'이 돼버린 꼴이다. 청춘들은 답답하기만 하다. 이런 감옥에서 누구와 싸워야하는가? 또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위해 눈물을 흘려야하는지, 끊임없이 반복되는 싸움에 조금씩 지치고 무뎌져 가고 있다. 계절이 돌아오듯 세상에는 반복되는 것 투성이라지만, 이건 해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반복이다. 올해도 승산 없어 보이는 싸움은 계속될 것이고, 청춘은 또 한 번 아픔을 겪고 생채기를 남길 것이다. 그래도 올해는 뭔가 이전과 다른 특별한 움직임이 보여 기대를 걸어볼만하다. 이화여대는 등록금 동결을 내세워 졸업을 위한 필수과목인 '채플'수업을 거부하는 등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서강대, 고려대, 인하대, 등 역시 등록금 인상 철회를 요구하며 학교 본관을 점거하는 등 투쟁의 불씨를 여전히 이어나가고 있다. 더 이상 3월 반짝 일어나는 '개나리 투쟁'이 아니라는 사실은 사뭇 긍정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시대의 청춘들이여, 투쟁의 결과를 놓고 큰 기대는 하지 말지어다. "배추가 없으면 양배추를 먹으면 되지"라는 이런 어이없는 답변이 돌아올 게 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 여기' 이 지점은 현재의 청춘들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역량을 펼칠 때다.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투쟁, 앞으로 이들의 행보가 자못 기대된다. 정말 죽도록 아파봤는가?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쉽게 말하지 마라.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라, (너무나도) 아프니까 (계속해서) 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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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4-22
  • [기자수첩] '메이와쿠'에 열광하는 한국
    [교육연합신문=김수아 기자] 일본 도우쿠현을 강타한 대지진. 이런 대참사에도 일본인들은 차분한 태도를 보여 놀라움을 주고 있다. '국화와 칼'의 저자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인들은 남이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에 민감하다"고 말한 바 있다. 재앙수준의 지진피해 속에서도 일본인들이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상대를 배려하고 질서를 지키는 모습은 민족성이라기보다 교육의 성과라고 볼 수 있다. 어릴 때 일본의 아이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단어는 차례, 순서를 뜻하는 '준방(順番)'이라고 한다. 이는 '남에게 폐 끼치지 않는다'는 이른바 '메이와쿠' 문화의 근간으로 일본인들은 가정교육을 통해 어릴때부터 이런 습관을 몸으로 배운다. 어릴때부터의 교육으로 일본인들의 뇌리에는 메이와쿠 가케루나'(迷惑を 掛けるな) 즉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관념이 형성되는 것이다. 지나칠 정도로 차분한 일본의 이런 모습은 장례식장에서도 볼 수 있다. 대성통곡하지 않는 일본 특유의 죽음에 대한 인식속에도, 남에게 피해 주는 것을 싫어하는 '메이와쿠 문화'가 깔려있다. 현재 일본의 47개 도도부현에는 '메이와쿠 방지 조례'라는 것이 있어 '남에게 현저한 피해를 끼치는 행위'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이같은 절제된 모습이 우리나라의 정서와는 상당히 다르기에 무조건 따라서 배울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대재난 속에서 차분한 모습을 보이며 질서를 유지하는 침착한 태도는 분명 그 자체로 귀감이 될 만하다. 그러나 일본 지진피해에 대한 우리의 모습이 언젠가부터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필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지진피해를 거의 받지 않은 일본 다른 지역은 동북부 지진을 먼나라 이야기로 여기는 분위기다. 그저 내게 피해가 오면 어떡하지 하는 근심이 자리하고 있을 뿐, 앞장서서 성금을 모금하거나 구호물품이 산처럼 쌓이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남에게 폐를 끼쳐서도 안되지만 내가 남으로 인해 피해를 받는 일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본 메이와쿠 문화의 숨겨진 내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지하철역에서 추락한 승객을 구한 '이수현 열사'가 영웅이 될 수밖에 없다. 남 때문에 자기 목숨을 거는 '무모한' 행동은 일본인들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나라에서도 보이지 않는 국민성금과 추모음악회가 우리나라에서 등장했다. 지난 겨울 전국 축산농가를 폐허를 만들고 농민들을 절망으로 내몰았던 구제역 확산사태 속에서 이들을 위한 성금모금액은 채 1억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일본지진피해에는 한류스타와 대기업들이 앞 다투어 거액을 선뜻 내놓고 있다. 이것도 모자라 학교에서도 성금을 모금한다. 구제역으로 축산농민들이 평생 쌓은 기반을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상황에서도 지나치게 의연했던 우리국민들이 일본 지진피해에 대해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애정을 보내고 있다.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고 가리치는 교과서가 일본의 각 학교에 보급되고, 아직도 위안부만행을 부인하는 일본이다. 속죄라는 단어를 모르는 그들에게 우리국민들은 한없는 '성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 쓰촨성 대지진과 아이티 대지진, 칠레 지진참사 등 불과 몇 년 사이 연이어 지구촌을 강타한 재난을 마주하면서 우리국민들이 이처럼 뜨거운 애정을 보여줬던 적이 있었던가?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전통은 우리 민족 고유의 자랑이며 정신문화이다. 일본의 아픔을 나누자는 그 따뜻한 마음이야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느 누구도 이를 탓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정도라는 것이 있다.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일부에서는 이런 우리의 모습을 '냄비근성'이라 폄하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그 또한 부적절한 의견이다. 남을 돕겠다는 마음을 폄하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도와주고 따뜻한 마음은 잃지 말되, 겉모습만 보지 말고 그 내면의 숨겨진 진실을 꿰뚫어보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의아하게 생각할 만큼 지금 우리가 보여주는 모습은 과하다. 더구나 아직도 그들의 죄악을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일본에게 무제한의 애정만을 보여주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되새겨볼 일이다. 이웃이 고통을 당하는데 그런 것을 가지고 따져서야 되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도네시아 쓰나미참사와 국가 존립 자체를 뒤흔든 아이티 참사 때는 왜 성금을 거두지 않았고, 왜 추모음악회를 열지 않았느냐는 아이들의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답을 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왜 구제역으로 신음하는 농민들을 위해서는 그리도 굳게 지갑을 닫았을까? 이제 그만하면 됐다. 지금부터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할 것은 원전 안전성과 취약한 내진설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안전불감증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대책마련이다. 일본 지진참사를 통해 앞으로 닥칠지 모르는 대재난에 대비한 국가 차원의 시스템 점검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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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4-14
  • [기자수첩]교육계의 ‘클라크 켄트’를 꿈꾸다.
    [교육연합신문=문석주 기자] 나는 어린 시절 ‘슈퍼맨’을 동경 했었다. 남다른 초능력으로 지구를 지키는 수호자이면서도 데일리 플래닛이라는 신문사에 취직해 기자로서 이중생활을 하는 그. 자신의 펜으로 또는 자신의 기사 한 줄로도 세상을 구할 수 있음을 그는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을까. 얼마전 트위터의 인사말을 바꿨다. “교육연합신문 문석주 기자입니다.” 교육전문지라는 타이틀이 갖는 무게감이 어깨를 짓누른다. 학생 개개인의 미래가 내 기사하나로 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기왕이면 밝은 소식으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하고 싶은 바람이다. 그러나 취재기자로서 일선에서 접하는 뉴스가 항상 밝을 수만은 없다. 학교시험문제가 유출됐는가 하면 고교 학생부 성적이 조작되고 강남에선 1인당 천만원을 호가하는 불법과외가 성행한다는 등의 제보를 접하노라면 내 안의 슈퍼맨이 꿈틀거린다. 어린시절 동경하던 그 처럼 공중전화부스에서 안경이라도 벗어야 할까. 그러나 뚫어져라 자료를 쏘아봐도 내 눈에서 레이저가 발사될 리 없다. 그렇게 내가 낙심해 있을 때 선배 기자들은 지금 필요한 것은 레이저가 아니라 ‘냉철한 시각’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안타깝게도 세상에 슈퍼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와 현실을 떠나서 세상은 언제나 영웅의 출현을 갈망하고 있다. 민선교육감이 첫 출범했고 교과부는 입학사정관제를 비롯한 새로운 제도를 계속해서 쏟아내는 가운데 어쩌면 우리 교육계는 보다 현실적인 영웅을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분별한 질책보다 칭찬을, 지적보다 건의를, 적재적소에 꼭 필요한 말을 해 주는 그런 영웅. 본지의 슬로건 “교육의 미래, 우리가 있다!”를 되새겨 본다. 어른이 되고 기자가 된 지금 나는 더 이상 슈퍼맨을 동경하지 않는다. 새로운 영웅의 패러다임이 도래한 걸까. 나는 교육계의 클라크 켄트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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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3-28
  • [교육칼럼] ‘학생인권조례’ 교사로서의 역할에 대한 단상
    [교육연합신문=편집국] 박계승 교육칼럼니스트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합니다. 이 말은 배움이 깊을수록 겸허(謙虛)해 진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요. 학문이 아무리 깊다고 해도 가르치다 보면 자신이 미처 알지 못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고 따라서 스승은 부족한 곳을 더 공부하여 제자에게 익히게 하며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남김없이 받아 더욱 학식이 풍부한 인재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스승의 가르침이란 단편적인 지식이 아니라 살아가는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교양과 지혜의 전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육은 예로부터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를 다스리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자연 상태의 미숙아가 성숙아가 되기까지의 돌봄, 즉 인간의 교육이 살아남고 생존하기 위한 기술의 터득이라면 굳이 ‘백년지계(百年之計)’라 하여 유난을 떨 필요도 없고, 선거철이면 중점 공약 사항으로 교육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풍경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육열을 가진 나라 한국. 어찌 보면 다사다난했던 민족사(民族史)와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만 그것은 삶의 총체이며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기에 인류와 함께 지속되어 온 교육이야말로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현대사회를 포스트모던 사회(Postmodern Society) 또는 다원주의 사회(Pluralism Society)라고도 합니다. 이들 사회는 정형화된 가치를 지양하며 다양성을 존중합니다. 현대의 교육 또한 다양한 가치를 받아들임으로써 전근대적인 교육의 모습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는데요. 다원화된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상을 위해 학습자 개개인에 맞춘 교육방법이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은 교육현장에서 적지 않은 문제 사태를 발생시켰으며 교육의 본래 목적을 훼손하고 집단 내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기계인간을 만드는 부작용을 가져왔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공공의 가치를 지향하며 개인의 이상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교육을 한다는 것이 다소 모순을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시쳇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자식 교육이라고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혈연집단인 가정에서조차 1차 교육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는 상황에서 공공의 성격이 강한 학교가 교육 주체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교육을 행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특히, ‘대학지상주의’에 빠져있는 한국의 교육현실에서 교육의 본래 목적을 온전하게 달성한다는 건 불가능해 보입니다. 작금의 상황이 이러할진대 그냥 간과해 버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교육을 포기하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경기도교육청에서 ‘학생인권조례’가 공포되었습니다. 체벌금지와 학생의 자율권 존중, 교육현장에서의 학생인권 강화가 핵심인 이번 조례안을 두고 교육계 안팎에서 기대와 함께 우려의 목소리도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 교육현장에서 학생의 인권은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교사와 학생이라는 특수한 관계로 인해 약자일 수밖에 없는 학생들의 인권 유린은 결코 용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학생들의 잘못된 인권 의식이 오히려 학교현장에서 많은 문제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실례로 수업 중 웃고 떠드는 학생에게 몇 차례 주의를 준 후, 더 이상 개선의 여지가 없자 퇴장 조치를 시켰더니 그 아이는 학생인권을 운운하며 계속 교사에게 저항하더랍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수업 시간에 자는 학생에게 담당교사가 일어나라고 깨웠더니 내가 잔다는데 무슨 참견이냐고 욕설까지 퍼붓는 학생에게 교사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다른 학생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문제 학생을 다독이든지 아니면 교육적 차원에서 즉각적인 벌을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두 가지 선택이 모두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땜질 처방이란 비난을 받을 것이고, 후자는 학생인권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사한 상황이 교육현장에서 무수히 반복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올바른 교육이 될 수 있을까요?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학생인권 강화에 맞춘 올바른 인권 교육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인격이 아직 미완성된 아이들에게 인권이란 결코 자유방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책임 있는 권리 행사만이 진정한 인권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시켜야 할 것입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교육을 무한경쟁 사회와 연결시켜 서비스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육에 비즈니스 개념이 적용된 것인데 이는 옳지 않습니다. 교육은 비즈니스가 아닙니다. 수요와 공급이 있기 때문에 경제법칙이 적용된다면 교육의 본래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서비스란 수요자 중심의 교육을 의미합니다. 일면 타당한 말입니다만 이는 공급자인 교사의 역할을 잘못 이해한 것에서 기인합니다. 교육은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일방향성이 아닌 쌍방향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교육 또한 인간관계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기에 단순한 비즈니스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지 못한다고 합니다. 교사의 질을 어찌 교과 지식만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교과 지식뿐만 아니라 교육적 열정, 그리고 참된 스승으로서의 소명의식 바로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참교사로서의 덕목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라도 이러한 선생님들이 학교를 지키고 있는 한 한국교육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습니다. 모든 교육주체들이 웃을 수 있는 즐거운 학교를 위해 오늘도 교육현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모든 선생님들께 아낌없는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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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3-24
  • [교육칼럼] 학교 안전, G20 기준으로 재설계하자
    [교육연합신문=편집국] 배은희, 한나라당 대변인 (국회의원) 일본 대지진 참사 발생 이후 우리나라 초․중․고등학교 건물의 내진설계 비율이 13.2%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발표됐다. 2008년 중국 사천성 지진 시 학교에서 대규모 피해가 발생한 후, 시·도 교육청에서는 초·중·고 건물에 대한 중장기 내진화 계획을 세웠지만 겨우 1년 시행한 뒤, 여러 곳에서 공사를 취소시킨 모양이다. 내진 보강공사는 막상 위기가 닥쳤을 때 우리 아이들의 생과 사를 갈라놓는다. 사천성에서는 내진설계는 고사하고 비리로 인한 부실공사 때문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7,000여개의 학교들이 힘없이 무너졌다. 콘크리트 더미에 깔려버린 연약한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속수무책으로 떼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고 발생 3년 전부터 내진 보완공사를 한 쌍자오(桑棗) 중학교에서는 기적적으로 단 한명의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바로 안전에 각별한 관심을 갖았던 교장 선생님의 선견지명이 2천323명 전교생의 생명을 살린 것이다. 우리 기성세대에게 ‘학교’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시골에 살던 분에게는 하도 멀어 산 넘고 강 건너야 도착할 수 있었던 곳, 나무 책걸상, 삐걱거리던 바닥, 추운 겨울에 연탄난로 위에 양은 도시락을 데워먹던 기억. 어떤 이미지가 생각나던 추측하건데 다녔던 초·중·고등학교의 시설이 당시 최고급 건축기술의 실현이었다고는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 먹고살기 힘들었던 때, 우리에겐 경제발전이 절실했고 좋은 학교의 기준은 오로지 인재양성에만 맞춰져 있었다. 그때는 학교의 시설이 안전한지 찬찬히 따질 경황이 없었기에… 그러나 이제, 대한민국 초중고 안전시설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바뀔 시점이 왔다. 우리나라의 1인당 국내총생산이 2040년에는 세계4위로 뛰어오를 예측이 나오고 G20의장국으로 당당히 거듭난 지금, 우리 아이들은 학교에서 좀 더 세심하고 치밀한 보호를 받아야 한다. 공항이나 병원시설의 내진율이 90%에 달하는데 학교 건물의 내진율이 20%에도 못 미치는 현재 상황은 우리가 아이들 안전을 위해 아직 훨씬 더 노력해야 한다는 방증이다. 본인도 50대로서 옛날 학교에 대한 추억이 있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학교에 대한 꿈을 꿔야 한다. 21세기의 대한민국 학교들은, 재해방지시설을 완벽히 갖추고 있어 지진이나 홍수가 발생했을 때 제일먼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지역주민들의 피난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재해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각종 범죄도 계획적인 안전시설을 통해 미연에 예방해야 한다. 학교 울타리를 세워 운동장에서 노는 아이들을 지키고, 방문자 안내실을 설치해서 모든 외부 방문객들의 신분을 철저하게 확인해야 한다. 소파 방정환 선생은 말했다, 어린이를 우습게 볼 것이 아니라 어른보다 한결 더 새로운 시대의 새 인물인 것을 알아야 한다고. 더 이상 구시대의 안전기준으로 학교를 관리하지 말고,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안전시설로 우리의 희망이요, 내일인 아이들을 지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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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3-24
  • [기자수첩] 轉補는 '섬'을 싣고
    [교육연합신문=김수아 기자] "완전히 시골이구만"3월 1일 교원인사에서 섬으로 가게 된 A교사의 '섬 발령' 첫 소감이다. 2003년 영화 '선생 김봉두'를 기억하는가. 서울의 초등학교 선생인 김봉두는 촌지사건으로 인해 동료 교사들이 모두 기피한 '오지유배'에 자신이 낙점되자 '울며겨자먹기식'으로 오지 시골분교로 가게 된다. 영화의 장면은 코믹하게 그려졌다. 그러나 영화의 장면은 결코 가상이 아닌 실제다. 도서벽지 학교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교사들은 교육공무원 승진에서 가산점을 줌에도 불구하고 지방발령을 꺼리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 '선생 김봉두'를 교육행정 및 경영의 관점에서 보자. 김봉두가 시골의 작은 학교로 발령을 받는 것은 '전보'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전보'란 동일한 직위 안에서의 수평적 이동을 의미한다. 보통 5년에 1번 이뤄진다. 영화에서는 김봉두가 촌지와 관련돼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시골로 가게 된 것으로 나온다. 일반적으로 '전보'는 징계가 아니다. 그러나 전보조치에 대한 이유보다 전보를 가는 이유에 당사자는 부당하다고 느낄 수 있다. 이번 교육계의 대대적인 인사개편 또한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각 시도교육청들은 대대적인 인사단행(전보포함)으로 분주했다. 3월 초 전국의 모든 교육기관은 윗층과 아래층으로 또는 지방으로 섬으로 오고가며 부임 또는 일명 '좌천'이 되기도 했다. 인사단행을 포함한 전보는 교원의 의욕과는 별개로 단행되는 듯 보인다. 서울시교육청은 5급 전보·파견 168명, 6급이하 전보·파견 610명의 인사를 실시했다. 인사 자체에는 물론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어 강원도교육청 또한 조직개편과 함께 사상 최대 규모인 2200여명 선에 이르는 교원·일반직 정기인사를 동시 단행했다. 전직 전보 모두 합쳐 총1800여명의 파격적인 인사단행이다. 파격적인 인사가 논란을 빚자 도교육청은 다자녀 교원에 대해 전보 인사 발령 시 혜택을 주는 내용 등을 담은 '행복한 교직원 복지프로그램'등을 발표하며 진화에 나섰다. 프로그램은 18세 미만 자녀 3명 이상을 둔 교원이 타 지역 교육지원청 관내 학교로 전보를 희망할 경우 현 재직 학교 근무연수에 50%를 더해주는 것이다. 매번 진행되는 대대적인 인사단행에서 벌어지는 문제점들과 교원 처우 개선책들(교원의 복지프로그램등)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충족되며 적용될지는 미지수이다. 처음 얘기로 돌아가 섬으로 가게 된 A교사. "잘 지낼 수 있을까. 여기서…."라며 혼자 괜히 읊조리는 시간이 많다고 한다. 그는 서울에 있을 때 열정이 가득한 교사였다. 그러나 섬으로 출발할 때 패기는 도착과 함께 선기루처럼 사라지고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교사들은 정기, 부정기 인사에서 생각지도 못한 발령을 받고 당황하는 경우가 적지않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해당 교사와 가족이 받는 심리적 고통도 가벼이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매번 실시되는 교원인사는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뤄져야 한다. 교사의 사기와 전문성, 역량 등을 고려해 '파격'적인 인사보다는 '신중한' 인사가 실시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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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3-17
  • '배움터지킴이' '아동안전지킴이' 현실과 문제점
    [교육연합신문=편집국] 불과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도 다른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점차 가정이 맞벌이 및 핵가족화 되어가는 현실에 있어 아동들에 대한 보호체계가 미흡한 상태에서 아동들이 위험에 노출되어가며 이것이 강력 범죄로 이어지는 사고가 점차 증가되고 있는 것이 사회현실이다. 이에 대한 안전대책으로 아동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구조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도록 경찰과 지역사회가 함께 아동사회 안전망 및 민·경 협력 치안시스템 구축 이를 제도화하여 학교 주변의 편의점과 약국 등을 아동안전지킴이집으로 지정하여 위급상황에 처한 아동의 임시보호처 역할을 하도록 하고 있다. 이어 전직경찰들과 퇴직교원 등을 '배움터 지킴이' 및 '아동안전 지킴이'로 위촉하여 학교와 놀이터, 공원 등에 대한 순찰활동을 강화해 나가고 있으며, 성폭력 피해아동을 전문적으로 지원하기 위하여 아동성폭력전담센터인 해바라기아동센터의 설치 확대와 기능 강화 또한 범정부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가 날로 증가되고 심각해져 사회의 문제로 대두되는 현 시점에서 오히려 아동안전지킴이의 본질은 이 제도의 근본취지와는 달리 점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양상을 띠고 있으며 아이들과 어른들 또한 안전교육자체도 미비한 상태로 이 또한 문제 시 되고 있는 것 또한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는 이 아동안전지킴이 제도가 언제부턴가 노인일자리 창출사업의 일환으로 전환되어지면서 그 운영 자체가 처음의 취지와는 달리 많이 퇴색되어가며 그 변형 되어진 모습이 점차 자리잡혀가고 있어 아동범죄가 빈발하고 있는 심각한 현실과 동떨어져지게 운영되어 그 기능이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가장 중점을 둘 수 있다.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빈발하고 그 수위를 넘고 있는 불안한 현실속에서 아동안전지킴이제도의 운영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데 반드시 정착되어야 할 중요한 제도이며 시대적 요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에 관련된 보다 선진적이며 체계적인 시스템도입 및 제도를 새로 정비.구축하고 이에 관련된 전문 인력을 양성하여 한 직업군에 속할 수 있는 형태로 제도자체를 재조정하며 이들이 사명감과 자긍심을 가지고 직분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는 것이 시급하다 할 수 있다. 현재에도 배움터지킴이 및 아동안전지킴이로 많은 수사 및 형사분야에 근무했던 전직경찰(경우회원)들이 그간 쌓아온 많은 경험을 토대로 최선을 다해 학교안과 밖으로 우리들 자녀의 안전을 위해 경찰청 관계자 및 여러 단체들과 협력하여 체계적으로 무수히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학부모들에게도 더 많은 기대와 호응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를 더욱 발전시켜 안정적으로 확대 정착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각 선진국들의 우수사례를 토대로 좀 더 정부가 이 제도에 대한 연구와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배움터지킴이' 및 '아동안전지킴이'를 결정함에 있어 그 기준을 좀 더 체계적으로 세워 일자리없는 노인분들이 활동할 수 있는 제도로 운영하되 좀 더 효과적이고 발전적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 제도와 연계되어 과거의 전문적인 풍부한 경험이 있는 인력을 중심으로 구성해 나가야 한다고 본다. 이와 더불어 늘 학부모와 아이들 그리고 지역주민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점진적으로 개선방향을 모색해 나가며, 이들을 대상으로 한 체계적인 안전교육 또한 끊임없이 병행되어야 할 과제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미래의 꿈나무들을 위험에서 지켜주기 위한 최소한인 이 제도가 이 나라에 안정적으로 정착되기까지 국민 모두가 관심을 갖고 한마음으로 함께 노력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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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3-08
  • [교육 칼럼] 교사의 자질과 체벌금지와의 관계(1)
    21세기 교육(敎育)이 세계화(世界化), 정보화(情報化) ,선진화(先進化)를 추구(追求)하는 차제(此際)에 늦게나마 체벌금지령(體罰禁止令)을 시행하고 곁들여 간접체벌과 출석정지 등을 허용하겠다니 학교사회가 새롭게 변모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일단 환영하면서 필자는 교사(敎師)의 자질(資質) 문제와 관련하여 고찰(考察)해 보고자 한다. 물론 교육당국에서는 깊이 연구하여 내 놓은 정책이겠지만 체벌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서당(書堂) 교육으로부터 오늘날까지 회초리 문화, 교편((敎鞭)을 드는 문화로 학생도 학부모도 당연시 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 인권존중(人權尊重)을 위해 체벌이 정당화(正當化) 될 수는 없다. 개인적 원한이나 질투로 인하여 분노(憤怒)하는 것을 죄악시(罪惡視)하기 때문이다. 교사가 학생에게 감정과 분노로 체벌할 때는 징계(懲戒)를 받아야 하고 큰 상처를 입혔다면 형사적 책임도 저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묵인하였던 사랑의 매, 훈육문제까지 문제로 삼는다면 반대급부 (反對給付)로 교사는 처벌을 두려워한 나머지 의기소침(意氣銷沈)하여 학생에 대한 무관심(無關心)과 안일주의(安逸主義), 보신주의(補身主義)로 나갈 것이며 학생은 이런 교사의 약점을 틈타 교사의 권위(權威)를 무시하고 오히려 반항할 수 있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예전엔 학부모들이 때려서라도 내 아이를 잘 가르쳐 달라고 한 적도 있으며 교육성자(敎育聖者) 페스탈로치도 "교육적으로 매를 드는 것은 폭력이 아니고 사랑이다. 꼭 필요할 때 매를 들지 않는 것이야 말로 오히려 교육의 포기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성경(聖經)에서도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勤實)히 징계하느니라."(잠언13;24)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아니하리라."(잠언 23;13)하였으니 사랑의 매는 필요악(必要惡)으로 공공연히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어떤 체벌도 할 수 없게 한다니 좋기는 하다. 그러면 교사는 학생을 체벌하지 않고 잘 교육하고 학생은 선생님 가르침에 따를 수 있을까를 연구하고 실천해아 할 것이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만히 살펴보면 학생끼리 싸우는 일, 공부에 집중하지 않는 일, 교사에게 반항하는 일 등으로 부득이 거친 언어를 쓰고 체벌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야, 마음먹기에 따라서 조용히 훈육할 수 있고 매를 들 수 있다고 여겨왔다. 선악(善惡)을 가려주고 성공(成功)의 길로 인도한다는 측면에서 가벼운 체벌은 교사의 재량권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안 된다는 말이다. 체벌은 전체 교사가 또 각 교실마다 상습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고 일부 교사들이 가끔 학습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쓰는 수단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선진국에서도 시행되고 있는 체벌금지는 핵가족 시대와 선진화 교육을 위한 시대적 요청이기에 모든 교사들은 새로운 인식전환과 함께 이에 동참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체벌없는 학교사회는 모든 국민, 학부모 학생들이 바라는 바이지만 체벌금지 법제화가 됐으니까 저절로 체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무서운 형법이 있어도, 하나님의 십계명이 있어도 매번 죄를 지으며 사건 사고는 계속 일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체벌금지 대안으로 나온 간접체벌(間接體罰) 출석정지(出席停止)는 학생들에게는 무척 힘든 심리적 압박(壓迫)이 될 수 있을 것 같으며 교사들이 혹여 학생들을 징계(懲戒)하는 합법적 수단으로 남용(濫用)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면서 기왕에 체벌금지를 하라면 간접체벌도어떤 처벌 징계도 하지 말아야 진정 학생의 인격을 존중하는 길이라 본다. 문제는 교사들이 수업준비를 철저히 하고 교수용어(敎授用語)를 정선하여 학생에게 성취의욕을 주는 교사, 학생의 아픔을 위로해 주는 교사, 칭찬과 격려를 하는 수용적(受容的)교사가 되겠다는 다짐이 있다면 학생으로부터 존경(尊敬)과 동일시(同一視) 대상이 될 것이며 잠재적(潛在的) 교육과정(敎育課程) 속에 친근한 인간관계(人間關係)가 형성되어 때리고 욕할 일이 없어지리라 생각한다. 모름지기 학교교육은 창의성(創意性) 계발(啓發)과 인성(人性)의 함양(涵養)을 두 축으로 한 전인교육(全人敎育)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니 학교는 즐거운 집과 같은 곳이어야 하며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공부하는 교실이 되어야 한다. 학생들이 가고 싶은 학교, 선생님들은 보람을 느끼는 학교, 학부모가 신뢰하는 학교여야 한다. 교육은 고도의 지적 수월성(秀越性)과 높은 윤리의식 및 도덕적 수준이 갖추어진 교사가 전문성(專門性)을 발휘하여 투철한 사명감(使命感)을 가지고 교육애(敎育愛)를 발휘할 때 비로소 그 성과를 올릴 수 있다고 본다. 그래야만 21세기를 주도할 인재(人材)를 양성할 수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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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2-28
  • [교육 칼럼] 한국 전래의 일본 문화
    7. 착한 어린이와 폐끼치지 않는 어린이 한국과 일본 교육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발견한다. 즉, 두 나라 교육의 이면 목표가 전혀 다른 곳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착한 어린이가 되라'고 가르치는데, 일본은 '남에게 폐 끼치지 않는 어린이가 되라'고 가르친다. 한국 교장선생님 훈화의 핵심인 '착한 어린이가 되라'는 어떤 어린이를 말하는가?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열심히 공부하는 어린이가 아닐까? 바꿔 말하면 우리 교육은 '효행 사상'을 제일의 덕목으로 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일본이 강조하는 '남에게 폐 끼치지 않는 어린이'란 무엇을 의미하나? 그것은 한마디로 사회성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공동체의식 즉, 사리분별이다. 일본인들은 자기보다 남을 더 의식하고, 타인에 대한 세심한 배려의 습관은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주입시켜, 설령 부부라 할지라도 서로를 깍듯하게 존중하고 예의를 지키며 산다. 그러다 보니 웬만한 것은 참게 되고, 이러한 인내가 한계에 다다르면 화산의 분화구처럼 무섭게 폭발하고 만다. 한마디로 끝장을 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효행정신은 자기 가족, 동료, 아는 사람, 즉 우리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타인에 대해서는 이해심이 적고 매우 배타적이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소홀히 하거나 함부로 해도 괜찮다는 의식이 은연중에 숨어있어, 때때로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불손한 태도를 보이는 젊은이들을 거리에서 종종 본다. 자기가 잘 아는 친구의 부모나 가까운 이웃이었다면 전혀 상상도 못할 무례도 서슴지 않는 것에 가슴 아팠던 기억을, 한국에 사는 이들은 누구나 한두번씩은 경험해서 알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도 있지만, 효는 정(情)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바탕에는 사랑이 있다. 반대로 타인에 대한 배려 즉, 사회성은 사리판단의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지(知)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감정을 억제하고 자제하는 인내를 미덕으로 여기는 분별력이 있다. 이러한 두 나라의 이면 교육이 '이지적인 일본인'과 '감성적인 한국인'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8. 하하하(ははは) 호호호(ほほほ) ◆ 웃음 소리로 인품을 추정 한국어에는 감정을 표현하는 의태어나 감탄사가 넘칠 정도로 많은데, 이런 말들도 일본으로 전래되어 비슷한 말로 남아있다. 예를 들면, 냄새를 맡는 '킁킁'은 '쿵쿵'(くんくん), 늘쩡거리는 '시부적시부적'은 '시부시부'(しぶしぶ), 이야기가 '술술'은 '스라스라'(すらすら), 조용히 하라는 '쉿'은 '싯', 바람이 '살랑살랑'은 '사라사라'(さらさら), 방울이 '짤랑짤랑'은 '차랑차랑'(ちゃらんちゃらん), 맥없이 '터벅터벅'은 '토보토보'(とぼとぼ), 북소리의 '둥둥'은 '동동'(どんどん), 새가 '파닥파닥'은 '파다파다'(ぱたぱた)…등. 그리고 웃는 모습은 일본어에서는 모음이 5개 밖에 없어서 '하하하(ははは), 히히히(ひひひ), 후후후(ふふふ), 해해해(へへへ), 호호호(ほほほ)'의 5종류 밖에 없어, 우리처럼 '흐흐흐' '끼륵 끼륵' 'ㅋㅋㅋ'하는 괴상망칙한 웃음은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1443년에 만든 글자로 "어린 백성이 자기 말할 바를 표현하고 싶어도 그 뜻을 표현할 길이 없어서 이 글을 만들었노라"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고, 그 이면의 목표는 유교의 기본정신인 '충효사상'의 심화 보급에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한글을 배우면 저절로 상하의 개념이 생기게 되어 있다. 한국어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것이지만, 한국어는 영어의 알파벳처럼 그냥 단순한 배열이 아니고 자음과 모음이 합쳐져야 하나의 문자가 된다. 남녀가 합해서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것처럼, 삼라만상이 음양이 합쳐서 된 것으로, 글자에도 그런 개념을 도입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글의 모음 배치도 '아, 야, 어, 여…를 보면 금새 알수 있지만, 여기에는 말의 중요도와 높낮이가 절묘하게 배치돼 있다. 예를 들면, 아버지의 '아' 가 맨 윗자리에 있고 그 밑에 어머니의 '어', 그 아래에 형, 더 아래에 누나…이런 배치는 그저 된 것이 아니고 의도적으로 만든 유교정신의 서열을 가미한 것이다. 웃음소리도 위로부터 열거하면 '하하, 허허, 호호, 후후, 흐흐, 히히'가 되는데, 여기서 '하하'는 남자의 웃음소리, '허허'는 그보다 낮은 남자의 웃음소리이고, '호호'는 여자의 웃음소리인데, 그보다 낮은 것이 '후후'이다. 그리고 더 내려가면 '흐흐'가 되는데 이는 뭔가 흉계를 꾸미는 못된 간신을 연상케 하고, '히히'가 되면 귀신이 씻나락 까먹는 웃음소리가 되고 만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그냥 웃음소리만 듣고도 그 주인공의 인물 됨됨이를 대강 짐작하는 것이다. 이렇듯 맑고 아름다운 말은 윗자리에, 어둡고 음침한 말은 아래 구석으로 몰아넣은 한글이야말로 뜯어보면 뜯어볼수록 천하의 명품으로 언어학 대회가 있으면 한번 내 보내고 싶을 정도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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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2-28
  • [기자수첩] 오바마도 학자금 대출 받았다
    [교육연합신문=김수아 기자] 한국의 교육열을 높이 사는 오바마 대통령도 젊은 시절 취업후 상환 학자금 대출제를 이용해 대학을 다녔다고 한다. 오바마 대통령도 학생시절 우리나라의 '취업후 상환 학자금 대출제'와 같은 제도를 활용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교과목을 마음껏 공부하며 오늘의 커리어를 쌓았다. 우리나라도 작년에 시작한 취업후 상환 학자금 대출로 현재 약 15만명의 젊은 학생들이 대출을 받고 있다. 일명 '든든학자금 대출' 이다. 그런데 학자금 시스템이 기존의 일반 학자금 대출보다 못하다는 얘기가 솔솔 나오면서 '마음껏 공부' 하고 싶었던 학생들의 마음에 그늘이 지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 인가. 한국장학재단이 주관하는 '든든학자금(취업후 상환 학자금 대출)'은 작년 1학기부터 운영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용자는 정부의 당초 기대치를 크게 밑돌았다. 든든학자금의 장점은 재학중(거치기간) 이자부담이 없다는 것과 졸업후에도 소득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될 때 상환을 시작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 든든학자금에서 주목을 해야 할 것은 바로 상환 시작 시점이다. 따로 거치기간이 없고, 취업 후 소득이 발생하는 시점부터 상환을 하게 되는 점이다. 유예기간 중 이자는 단리계산방식이며, 일반 학자금 대출의 거치기간은 든든학자금의 유예기간과 같은 개념이다. 대출이자가 아무리 낮아도 유예기간에만 해당하는 금리와 유예기간에 이자만 쌓이다 소득발생이후 시점부터 복리가 계속 불어나 원리금을 갚게 되는 것이다. 왜일까. 우선 유예기간 중 단리계산법은 상환시점부터 복리가 된다. 상환을 할 때가 되면 원금으로 3배가 넘는 금액을 지불하게 될지도 모르는 점이다. 비싼 등록금과 생활비로 자신이 원하는 꿈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는 대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대출받은 대학 등록금을 취업 후에 상환하는 제도, 등록금 부담 없이 대학생들이 학업에 전념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학자금 대출제도인 '든든 학자금제도'가 학생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더욱 많은 혜택을 대학생들이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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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2-23
  • [기자수첩] 문제아 랍비는 나쁜 학생인가
    [교육연합신문=김수아 기자] 무엇인가 배워간다는 배움의 여정은 질문으로 시작해 질문으로 끝난다. 질문의 끝에는 언제나 배움의 길에 안내자가 나타난다. 이제 좀 통박 굴리는 어른이 된 것 같은가. 가당치 않다. 새우버거세트 보다 굴비백반을 찾고, 희망찬 노래보다 구성진 성인가요 노랫가락을 불러 제칠만큼 현실적이다. 21세기를 사는 어른들의 세상은 사방이 고수이다. 여기저기 훈수와 지략의 달인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생각의 굴레에 갇혀 있을 때 척박한 언론사에 푸른 새싹들과 소통의 기회를 줬다. 휴일을 반납하고 향한 인천교육청 중앙도서관, 똘똘한 돌고래 같은 명예학생기자들을 만나는 날이다. 강의 도중 나와 눈을 마주친 학생에게 '왜 명예 기자 강의를 듣는가?' 라고 살살 물었다. 장래의 밝은 꿈나무 답게 역시 강하게 문다. “그냥이요.” 달콤한 말로 속삭여도 괜찮을 텐데, 예전 개그코너에 나온 죄민수 버전같이 이유 없이 피스다. 해탈의 경지에 이를 무신념의 단어이다. 함축적인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다. 역시 수재다. 이런, 훈수 두는 어른처럼 나도 이러면 안 되는데 제2의 자아가 나를 깨운다. 너는 지금 잘못하고 있는 거란다. 지금 네가 하는 말은 면접관에게 "당신은 나를 이렇게 대할 이유가 없어”라는 말과 같은 거란다. 제2의 자아가 말한다. 오바마 대통령도 말하지 않았는가. 공부만이 살길인 시대이다. 세계의 인재가 되어줄 학생들 앞길에 공부와의 ‘소통’만이 남았다. 인성교육의 롤 모델이 되는 교육이 있다.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게 유도하는 유대인 교육이다. 질문은 단순히 앎의 차원을 넘어 흩어진 파편의 지식을 하나로 묶는 매개체이다. 랍비는 “나쁜 답은 있되 나쁜 질문은 없다”고 했다. 천하명언이다. 한국의 진정한 교육은 부재중이다. 나 또한 문제의식을 느끼는 어른임에 피곤하다. 좋은 어른이 되는 길에 지름길은 없나 보다. 학생들은 교장 선생님들의 추천으로 내로라하는 수재들이다. 앞으로 세상의 인재가 될 날을 기대해 본다. JUST STORIES, '그냥' 이라는 무한한 진정한 의미를 나역시 깨닫게 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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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2-14
  • [기자수첩] 지금은 진보교육감시대
    [교육연합신문=김수아 기자] 서울에서 처음으로 전교조 출신의 교장이 나온다고 한다. 국회 여야를 막론하고 전 국민이 진보를 너무 사랑해 그런 것인가. 아니면 진보 교육감의 승리인가. 거칠게 말해 보수진영에서는 곽노현은 전교조의 도구라는 낭설까지 나오고 있다. 전교조는 좌파이고, 진보교육감들은 친 전교조 성향이므로 모두 '좌파 교육감'이라는 것이다. 곽노현 교육감은 초·중·고 교육 쟁점현안에 대해 현 정부와 보수진영에 대립각을 열심히 세우고 있는 상황이다. 전교조 저격수로 이름 높은 한나라당 조전혁 의원은 지난해 전교조 가입 교사들의 명단을 교과부로부터 받아 인터넷에 공개했었다. 그러나 지난 8일 서울고법은 조 의원의 항고를 기각해 교과부와 한나라의 합동 공격은 사실상 참패다. 반면 여론은 교장공모제에 만족도가 꽤 높다. 그 중 내부형(평교사 지원 가능형)은 교원과 학부모 만족도가 8개 전체 항목에 걸쳐 가장 높은데 교장의 허용된 권한을 함부로 쓰지 않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교장의 권한은 막강하다. 학교의 대통령이다. 평교사회를 설치하고, 교장의 권한을 줄이면 만족도가 달라질까? 아니다. 현재 가장 해묵은 공격 논거는 진보와 보수의 교육 색깔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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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2-12
  • [기자수첩] 제군들, 계란과 밀가루는 챙겼나
    [교육연합신문=김수아 기자] 졸업 시즌이면 각급 학교마다 울려 퍼지는 노래의 향연. 빛나는 졸업장을 타는 2월이 왔다. 졸업만큼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날은 없다. 새로운 길을 향해서 인생의 항로를 개척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졸업은 3년 혹은 6년간 함께했던 친구와 선생님 그리고 정든 교정과 이별의 순간이다.그러나 현재의 졸업식 풍경은 과연 아름다운 이별인가. 밀가루 세례는 이제 졸업식의 단골메뉴이다. 지난 ‘09년 서울 송파구에 있는 한 여고 졸업식에서 요즘 유행하는 졸업식 풍경을 그대로 보여주는 퍼포먼스가 벌어졌었다. 교복을 찢고, 나무에 학생을 묶어 밀가루 세례를 퍼부었다. 민망스럽고 피하고 싶은 풍경이지만 이것이 우리나라 교육의 현 실태를 알 수 있는 풍경이라 씁쓸하다. 무조건 대학입시만을 바라보게 하는 세상, 그들은 족쇄 같은 교복을 찢고 싶고 그런 세상에 계란을 던지고 싶었으리라. 과격한 졸업식 뒤풀이가 사회 문제시되면서 법무부와 교육과학기술부, 경찰청은 졸업식이 몰려 있는 2월 초 중순 전국의 중고교생들을 대상으로 올바른 졸업식 문화를 권장하고 폭력을 방지하는 내용의 교육, 예방활동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런 교육과 예방대책에도 상당수의 아이가 올해에도 뒤풀이를 통해 일을 터트릴 것으로 예상된다. 학생들에게 형법상 범죄가 된다는 사실과 죄의식에 대한 문제 인식을 깨우치는 교육이 우선순위가 돼야 할 것이다. 덕분에 경찰들은 매우 바쁘다. 각 지역의 학교졸업식에 촉각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경찰관계자는 “구제역 담당을 제하고 졸업시즌에 모든 인원이 졸업행사에 동원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제 막 2살배기의 어린 자녀가 있는 그는 경찰이 아닌 아버지로서 말을 전했다. 서로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에서 축복 되는 졸업식이 되자고….계란과 밀가루를 투척하는 전쟁 같은 졸업 시즌 2월이다. 제군들,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나 세상을 향해 쏘아야 할 화살을 계란과 밀가루로 대신하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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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2-09
  • [교육칼럼] 교사의 자질과 체벌금지와의 관계
    21세기 교육(敎育)이 세계화(世界化), 정보화(情報化) ,선진화(先進化)를 추구(追求)하는 차제(此際)에 늦게나마 체벌금지령(體罰禁止令)을 시행하고 곁들여 간접체벌과 출석정지 등을 허용하겠다니 학교사회가 새롭게 변모 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일단 환영하면서 필자는 교사(敎師)의 자질(資質) 문제와 관련하여 고찰(考察)해 보고자 한다. 물론 교육당국에서는 깊이 연구하여 내놓은 정책이겠지만 체벌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는 서당(書堂) 교육으로부터 오늘날까지 회초리 문화, 교편((敎鞭)을 드는 문화로 학생도 학부모도 당연시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 인권존중(人權尊重)을 위해 체벌은 정당화(正當化) 될 수는 없다. 개인적 원한이나 질투로 인하여 분노(憤怒)하는 것을 죄악시(罪惡視)하기 때문이다. 교사가 학생에게 감정과 분노로 체벌할 때는 징계(懲戒)를 받아야 하고 큰 상처를 입혔다면 형사적 책임도 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묵인하였던 사랑의 매, 훈육문제까지 문제로 삼는다면 반대급부(反對給付)로 교사는 처벌을 두려워한 나머지 의기소침(意氣銷沈)하여 학생에 대한 무관심(無關心)과 안일주의(安逸主義), 보신주의(補身主義)로 나갈 것이며 학생은 이런 교사의 약점을 틈타 교사의 권위(權威)를 무시하고 오히려 반항할 수 있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예전엔 학부모들이 때려서라도 내 아이를 잘 가르쳐 달라고 한 적도 있으며 교육성자(敎育聖者) 페스탈로치도 “교육적으로 매를 드는 것은 폭력이 아니고 사랑이다. 꼭 필요할 때 매를 들지 않는 것이야 말로 오히려 교육의 포기이다”하였고 성경(聖經)에서도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勤實)히 징계하느니라.”(잠언13;24)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아니하리라.“(잠언 23;13)하였으니 사랑의 매는 필요악(必要惡)으로 공공연히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어떤 체벌도 할 수 없게 한다니 좋기는 하다. 그러면 교사는 학생을 체벌하지 않고 잘 교육하고 학생은 선생님 가르침에 따를 수 있을까를 연구하고 실천해아 할 것이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만히 살펴보면 학생끼리 싸우는 일, 공부에 집중하지 않는 일, 교사에게 반항하는 일 등 때문에 언어폭행(言語暴行)과 체벌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야, 마음먹기에 따라서 조용히 훈육할 수 있고 매를 들 수 있다고 여겨왔다. 선악(善惡)을 가려주고 성공(成功)의 길로 인도한다는 측면에서의 가벼운 체벌은 교사의 재량권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안 된다는 말이다. 체벌은 전체 교사가 또 각 교실마다 상습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고 일부 교사들이 가끔 학습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쓰는 수단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선진국에서도 시행되고 있는 체벌금지는 핵가족 시대와 선진화 교육을 위한 시대적 요청이기에 모든 교사들은 새로운 인식 전환과 함께 이에 동참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체벌 없는 학교사회는 모든 국민, 학부모 학생들이 바라는 바이지만 체벌금지 법제화가 됐으니까 저절로 체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무서운 형법이 있어도, 하나님의 십계명이 있어도 매번 죄를 지으며 사건 사고는 계속 일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체벌금지 대안으로 나온 간접체벌(間接體罰) 출석정지(出席停止)는 학생들에게는 무척 힘든 심리적 압박(壓迫)이 될 수 있을 것 같으며 교사들에게는 학생들을 징계(懲戒)하는 합법적 수단으로 남용(濫用)하지나 아니할까라는 생각도 해 보면서 기왕에 체벌금지를 하라면 간접체벌도 어떤 처벌 징계도 하지 말아야 진정 학생의 인격을 존중하는 길이라 본다. 문제는 교사들이 수업준비를 철저히 하고 교수용어(敎授用語)를 정선하여 학생에게 성취의욕을 주는 교사, 학생의 아픔을 위로해 주는 교사 칭찬과 격려를 하는 수용적(受容的)교사가 되겠다는 다짐이 있다면 학생으로부터 존경(尊敬)과 동일시(同一視) 대상이 될 것이며 잠재적(潛在的) 교육과정(敎育課程) 속에 친근한 인간관계(人間關係)가 형성되어 때리고 욕할 일이 없어지리라고 본다. 모름지기 학교교육은 창의성(創意性) 계발(啓發)과 인성(人性)의 함양(涵養)을 두 축으로 한 전인교육(全人敎育)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니 학교는 즐거운 집과 같은 곳이어야 하며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공부하는 교실이 되어야 한다. 학생들이 가고 싶은 학교, 선생님들은 보람을 느끼는 학교, 학부모가 신뢰하는 학교이어야 한다. 교육은 고도의 지적 수월성(秀越性)과 높은 윤리의식 및 도덕적 수준이 갖추어진 교사가 전문성(專門性)을 발휘하여 투철한 사명감(使命感)을 가지고 교육애(敎育愛)를 발휘할 때만이 그 성과를 올릴 수 있다고 본다. 그래야만 21세기를 주도할 인재(人材)를 양성할 수 있다. 이 시대에 훌륭한 교사, 바람직한 교사. 필요한 교사는 지칠 줄 모르는 건강 ,고매한 인격, 폭넓은 학식, 능숙한 교수학습 기술을 겸비(兼備)한 교사야 말로 훌륭한 교사의 자질을 갖춘 교사라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들 교사들이 무조건 학생을 체벌하거나 간접체벌 언어폭력 출석정지를 시킬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교육의 본질은 무엇인가?사람다운 사람, 쓸모 있는 사람을 만들자는 것이다. 체벌금지령 때문에 교사들이 문제 학생을 무관심으로 대한다거나 선도하지 않으려는 교육풍토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럴수록 참신한 교사들이 필요한 것이다. 교사의 능력과 자질을 개선하기 위해 교원능력개발평가(敎員能力開發評價)가 시행되고 있으니 교육당국은 평소 교사 자질 향상을 위한 자기 연수, 집단 연수를 적극 추진하여 좋은 교사를 양성함이 급선무라 생각한다. 학생을 내 자식처럼 사랑할 수는 없지만 내가 맡은 학생이 성공하기 까지 무한책임(無限責任)지는 의식이 자리해야 한다. 교사가 실력이 없으면 따르는 자가 없으며 사랑 없는 교육은 물 없는 호수 같다는 명언을 명심하자. 교육과정을 운영하다보면 학습부진아도 있고 수업분위기를 흐리게 하는 학생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 등 교사의 양심으로 그냥 묵과할 수 없는 장면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교사도 학생도 학부모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며 교육은 삼위일체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교사가 먼저 훌륭한 자질을 갖춘다면 학생은 향학열을 가지고 집중할 것이며 학부모는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해 불평하기보다 협조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쉐마(Shema)라 하여 하나님 말씀과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배우도록 자녀에 대한 가정교육을 철저히 한다고 하니 이는 우리 학부모들이 본받을 일이라고 본다. 학생들은 실력도 있고 정성을 다 해 능란하게 가르쳐주는 따뜻한 선생님을 요구하고 있으며 학부모의 바람은 훌륭한 교사를 만났으면 하는 것이다. 여기서 지나치면 안 될 일이 학생과 학부모들의 이런 소박한 기대를 만족 시키는 노력과 학생들을 아끼는 교사와의 인간관계이다. 부연(敷衍)하건데 교사는 학생과의 인간관계(人間關係)를 잘 형성하는 일도 중요하다. 맹자는 이르기를 인화(人和)는 조직 성공의 기본 요건이라고 했다. 학생들의 개성과 자유를 속박하는 강압적 권위, 스파르타식 교육, 매의 교육은 학습자에게 고통을 주게 되지만 애정과 신뢰의 감정이 흐르는 교실 분위기에서는 이상적 인간관계를 형성할 것이며 학생은 교사를 외경(畏敬)하면서 학습목표(學習目標)를 향해 가기 때문에 순종(順從)의 자세로 변모하여 벌(罰)할 일이 없게 되리라. 어차피 체벌금지법이 나왔으니 이제 우리 모두 이를 지키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러니 교사는 타 직종에 우선한 성직관(聖職觀), 전문직관(專門職觀), 사명감(使命感), 교육애(敎育愛)와 원만한 인간관계(人間關係)를 가지고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자세로 학생교육에 임하여 국가가 바라는 공포분위기의 체벌이 사라지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이 일이 잘 이행된다면 학교는 명실상부(名實相符)한 학생들의 등용문(登龍門)이 될 것이다.오늘도 교사(敎師) 학생(學生) 학부모(學父母)가 협력하여 선(善)을 이루는 학교로 참된 배움터로 가꾸어가기를 자손을 둔 국민의 한 사람으로 간절히 소망한다. 오범세 前 인천청천초등학교 교장 인천교육대학 졸업 인천 작전초 교감인천 청천초 교장 학교경영 우수교 표창한자지도사(성균관장)사회교육 강사(한국어, 한문, 교양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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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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