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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대인생학교 행복교육] 아낌없이 베푸는 친절
    [교육연합신문=전준우 칼럼] 최근 3분의 작가님들과 함께 공동저서를 집필하고 있다. 서로 으쌰으쌰해가면서 글을 쓰는데 재밌기도 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알게 되서 반갑기도 하고,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그런 와중에도 같은 주제를 바탕으로 글을 쓰다 보니 주제에 대해 세밀하게 파고 드는 수준의 차이라는 게 있었다. 그리고 이분들의 수준은, 소위 말하는 '넘사벽'이었다. 어쩌다 보니 책을 출간해서 작가님 작가님 소리도 듣지만, 사실 글을 쓴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나름의 계기라는 것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적성에 맞아서 시작한 일이었고, 그렇다 보니 쓰는 글의 수준도 고만고만했다. 당연히 내가 넘을 수 없는 수준의 글이라는 게 존재했다. 문제는 '내가 쓸 수 없는 수준의 글'을 이 분들이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함께 글을 쓰는 분 중 엘리트 코스만을 거쳐서 연구원으로 재직중인 분이 계시는데, 5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박사학위 논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수준 높은 저서를 출간하셨다. 또 다른 한 분은 책이 출간되자마자 방송사, 언론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고, 심지어 최근에는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이야기해주셨다.(본인의 요청에 의해 상세한 내용은 이야기할 수 없지만, 그야말로 엄청난 기회라고 우리는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또 다른 한 분은 업무일정상 아직 출간은 안되었지만 벌써 몇 년 전에 첫 책을 출간 계약했다고 한다. 공동저서를 집필해보자는 제안도 내가 했고 시작도 내가 했는데, 정작 함께 하는 사람들의 수준이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차원일 때 느껴지는 그 묘한 기분, 참 말로 형용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이분들에게서 느껴지는 친절과 겸손이 나로 하여금 상당한 존경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다. 어두움을 찾아볼 수 없는 겸손, 밝은 목소리, 그리고 친절. 그런 것들이 나에게 꽤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에 한 꼭지 글을 올렸는데, 이분들에게서 칭찬일색이 쏟아졌다. 글이 넘 아름답다, 넘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 덕분에 좋은 기운을 받아간다 등등... 글을 올리면 서로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글쓰는 사람에게 있어서 칭찬이 늘 좋을 수는 없다. 때로는 약이 되지만, 때로는 독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무엇보다 글이라는 건 날카롭게 다듬어진 칼로 깎듯이 철저한 퇴고가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연약함은 그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글을 쓰다 보면, 어느 순간 잘 쓴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이 생긴다. 평소 독서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잘 쓴 글을 읽는 순간 '잘 쓴 글이다.'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 반해 내가 쓴 글은 그렇지 않다는 것도 금방 알 수 있다. 그렇다 해서 글쓰는 수준이라는 게 하루 이틀 사이에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보니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나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 모든 작가의 숙명이다. 눈에 빤히 보이니 피할 수 없다. 칭찬은 그런 연약함에 대한 배려인 셈이다. 그런 연약함도 보듬어줄 수 있는 친절, 그 배려의 자세를 갖춘 사람을 나는 존경한다. 칭찬에 인색하지 않은 사람들과 동행하는 게 얼마나 큰 즐거움인지 모른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친절처럼, 배려처럼, 나 역시 그들에게서 따뜻한 위로와 공감을 얻는다. 글 뿐만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성을 존중하되, 올바른 사람들을 선별해서 훌륭한 관계를 맺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기회이자 권리다. 훌륭한 생각을 갖고 하루하루 의미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굳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가며 불필요한 관계를 맺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우스갯소리인지 과학적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친절한 자세와 배려는 지적능력의 일부분이라고 한다. '상대방이 나의 말로 인해 상처를 받거나 마음에 아픔이 남지 않을까'를 생각하는 것, 그리고 이후의 상황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인지능력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100% 믿진 않지만, 요즘엔 '어쩌면 그럴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을 해본다. 배운 사람에게서만 느껴지는 분위기가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 앞에 서면 학벌이나 성공이라는 것도 한 줌의 흙보다 못한 가루로 변해버리겠지만,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다. 죽음과 이상에 관련된 심오한 철학적 진리는 항상 마음에 품고 살되 현실과 공존하는 법도 배울 필요가 있다. 오늘, 마음 깊이 존경하는 분들에게, 조금 더 친절하게 대하는 하루를 보내보련다. 그들의 인생에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어주기를 바라면서. ▣ 전준우 ◇ 작가, 강연가, 책쓰기컨설턴트 ◇ 前국제대안고등학교 영어교사 ◇ [한국자살방지운동본부] ◇ [한국청소년심리상담센터] 채널운영자 ◇ [전준우책쓰기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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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29
  • [연재] 만화로 풀어보는 근고지영[根固枝榮]
    [교육연합신문=글.그림 임오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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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28
  • [전미경의 클래식 스토리] 꾸준함이 힘이다
    [교육연합신문=전미경 칼럼] 학생들에게 악기를 가르치다 보면 다양한 경우를 접하게 되는데 그중 안타까운 경우가 하나의 악기를 꾸준히 하지 못하고 계속 다른 악기로의 시도를 하는 경우이다. 어느 정도 악기를 다룰 줄 알게 돼서 새로운 악기를 배우려는 그런 상황이 아니고 겨우 악기의 초보 수준을 벗어나지도 못했는데 또다시 새로운 악기를 해보려는 그런 경우. 새로운 봄 학기가 시작되고 두 학생이 찾아왔었다. 첼로를 배우고 싶다고. 얘기를 들어보니 이 학생들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피아노, 우쿨렐레, 플룻, 오카리나, 바이올린을 전전하며 지금은 제대로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하나도 없다고 했다. 어떤 악기든 제대로 연주하려면 꾸준함이 생명이다. 배우고 익히며 꾸준히 연습하면 누구나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갈 수 있다. 그 속도와 걸리는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꾸준히 하면 반드시 누구나 다 된다. 특히 취미로 악기를 배우는 사람에게는 꾸준함 만큼 중요한 지름길은 없다. 꾸준히 하지 못할 때도 여러 이유와 핑계들이 있지만 자기와는 잘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쉽게 결론을 내버리기도 한다. 첼로를 배우는 사람들도 그렇다. 초반에 팔이 아프거나 힘들면 자기와는 안 맞는 악기인가 고민한다. 그러나 첼로라는 악기를 편하게 연주하려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첼로를 연주하기 쉽도록 그에 맞는 근육들이 생겨야 하고 그러려면 꾸준히 연습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꾸준히 올바른 자세로 하다 보면 차츰 악기와 내가 편안해지는 시간이 다가온다는 걸 알게 된다. 악기를 연주하는 것만 꾸준함이 필요할까? 꾸준함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루고자 하는 그 어떤 분야에서도 가장 큰 자산이 아닐까 싶다. 꾸준하다는 것은 성실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성실함은 성공의 가장 큰 조건이지 않나? 신은 재능을 주시고 노력은 그 재능을 천재로 만든다고 하였다. 우리가 잘 아는 러시아의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가 한 말이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연약함을 극복하고 큰 영향력을 미치는 무용수가 되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꾸준하면 성공한다고 하는 것이다. 어느 때보다 인터넷과 주변엔 정보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성공이니 대박이니 쉽게 말하곤 하지만 정말 성공하거나 대박 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건 그 많은 정보를 누구나 쉽게 말할 순 있지만 꾸준히 지속적으로 하긴 쉽지 않기 때문 아닐까? 한 가지의 일을 꾸준히 하여 성과를 맛본 사람은 다른 일들도 잘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하나의 악기를 꾸준히 하여 어느 정도 잘 연주할 수 있게 된 사람은 다른 악기를 배우더라도 금방 더 잘할 수 있게 된다. 한 가지를 꾸준히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을 얻게 하는지 알아야 한다. 세상에 꾸준함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다. ▣ 첼리스트 전미경 ◇ 가천대 관현악과 졸업(첼로전공) ◇ 서울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부수석 역임 ◇ 금천 교향악단 부수석 역임 ◇ 의왕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 ◇ 강동 챔버 오케스트라 단원 ◇ 롯데백화점 문화센터 첼로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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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20
  • [10대인생학교 행복교육] 운명에 대항하라
    [교육연합신문=전준우 칼럼] 최근 지역 유지들과 더불어 고위직 공무원들과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생겼는데, 덕분에 전혀 뜻하지 않게 정치권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들도 조금씩 주어졌다. 당파싸움이나 이권다툼 같은 부분은 관심도 없을뿐더러 정치색을 바탕으로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배척하는 일도 나와 맞지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많은 기회와 인맥의 확장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고, 그들로 인해 크고 작은 기회들이 생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겸손하게 행동하면서 사람들을 대하는 부분에 조심히 행동한다면 좋은 경험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이 정치권의 세계인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권이 마냥 행복하거나 감사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은 아니라는 사실을 덧붙이고 싶다. 민주주의 국가는 공화국이나 군주국처럼 민중에 대한 지배권력을 가진 통치체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자유의지를 갖고 발언할 수 있으며 소신 있게 자신의 뜻을 피력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긴 하다. 그러나 좀 더 내부적으로 들어가 보면 공천제도라는 것이 있고, 각 구와 군, 읍마다 지역을 이끌어가는 결정권자와 실제 업무를 담당하는 실무자들의 영향력이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자신만의 잣대가 없다면 큰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고, 낭패를 볼 수도 있다. 그 이면에는 운명이라는 잣대가 마음에 기둥으로 굳게 세워져있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 중에는 본인의 일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기에 어렵고 고달파도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앞으로 달려나가는 자세를 보여주곤 한다. 어려운 일을 당해도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이 찢어질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을 당해도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훌륭한 가치관이자, 삶의 방향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일말의 존경심도 느낀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나도 운명을 믿지만, 어느 정도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나가며 창조하는 세계라고 생각한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으며, 또한 그 자유의지대로 움직임으로써 발생하는 일들에 대해 일말의 책임을 지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삶과 움직임이 오직 전지전능한 신의 뜻에 의해서만 움직인다면, 인간은 꼭두각시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한 셈이지 않은가. 어느 정도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은 있지만, 외적인 다양한 요소들에 의해 운명의 물레바퀴도 바뀐다고 믿는다. 전적으로 운명에만 의지하는 사람은 운명의 변화에 의해 몰락한다. 이렇다 할 도전정신이 없이 모든 것이 운명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개인이나 단체, 기업도 마찬가지다. 운명의 굴레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긴 사람은 그 나름대로 선한 뜻을 따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실의 패망과 실수에 대해 신을 탓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책임을 질 것이 없으므로 편하기까지 하다.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공부를 못했다는 둥, 집에 돈이 없어서 대학을 못갔다는 둥, 주변에 멘토가 없어서 어려움을 겪었다는 둥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30년 전의 이야기다. 지금은 가정형편이 어려워도, 집에 돈이 없어도 배우고자 하는 마음만 먹으면 배울 길이 수도 없이 많다. 상당히 훌륭한 복지체제와 교육시스템이 구축되어 있고, 심지어 대학을 졸업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사회적 제도가 충분히 마련되어 있다. 흙수저로 살아갈 가난한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기보다는, 흙을 빚어 구워서 천년의 역사를 만들어갈 도자기 인생으로 삶의 이름을 바꿔보는 것은 어떨까. ▣ 전준우 ◇ 작가, 강연가, 책쓰기컨설턴트 ◇ 前국제대안고등학교 영어교사 ◇ [한국자살방지운동본부] ◇ [한국청소년심리상담센터] 채널운영자 ◇ [전준우책쓰기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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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7
  • [자살예방 칼럼] 기독교의 생명사랑 정신과 자살예방-⑥
    [교육연합신문=김대선 기고] 일반적으로 교회는 예배공동체, 친교공동체, 교육공동체, 봉사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마틴루터가 ‘교회는 아프고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위한 여인숙과 병원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의 생명사랑 정신은 ‘인간은 자신의 형상을 통해 만든 존엄한 존재라는 정신, 따라서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해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며,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정신, 따라서 생명은 어떤 것과도 바꿀수 없는 절대적 가치를 지니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정신과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정신으로 하나님과 이웃과 나는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한 몸이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기독교의 생명사랑은 이 세상을 떠나가고 있는 현실을 지켜볼 수 없다는 소명이자 서로 다른 사람의 짐을 지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루는 공동체 정신으로 거듭나고자하는 하는 것입니다. 이웃종교의 교리에 대한 짧은 견해이지만 ‘생명은 철저하게 그 원천인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생명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명제이다’(창2:7:시36:9)라 함은 생명의 창조주이고 생명의 원천은 생명 존중의 사상의 선포요, 표현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율법의 살인 금지 계명은 생명 사랑과 보호를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은 제6계명의 생명 존엄의 정신을 더 철저하게 실천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그러면 자신을 죽이는 행위도 제6계명과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에 해당하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제6계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행위도 금지하고 성경은 어떤 경우에도 자살을 결코 정당화하지 않는다고 엄격하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퀴나스나 칼뱅은 십계명의 살인금지 계명을 결코 자살과 관련시키지 않았습니다. 독일 신학자 칼 바르트’는 자살은 ‘하나님의 권리를 침범한 결정이요, 불신의 행위요, 생명을 은혜의 선물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누구도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살을 감행할 수 없다하였으며. 독일 신학자 본 회퍼’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정당화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분명하게 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독일 신학자 몰트만’은 자살은 ‘곧 자기 살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편이 낫지만 모든 죽음과 동일하게 자신을 죽임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생명을 적대시하는 행위임이 분명하다.’라고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여러 신학자들은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주로서 생명의 원천이자, 은총의 선물이다”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자살예방은 정부만의 노력으로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고, 국민 모두가 참여하는 범 국민적 운동으로 확산되어야 그 효과가 증대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물질만능주의와 생명 경시 문화를 생명 존중 문화로 바꾸어 나가고, 무관심과 단절의 문화를 상호존중과 배려의 공동체성 회복의 문화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생명 존중 문화가 조성이 될 때, 자살로 내몰리지 않는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생명의 전화’는 1971년 시작, 대한민국 최초 전화상담 기관으로서 24시간 365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상담하고, 생명존중 문화확산과 자살예방을 실천하는 국제 NGO단체입니다. 또한 ‘기독교 자살예방센터 lifehope’는 2010년 출발, 사명선언문(Mission Statement)에서 LifeHope는 이 땅에 상처입고 소외된 이웃들을 예수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섬기고, 이를 통해 개인과 공동체의 영적가치를 회복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삶 가운데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어떠한 격려나, 사랑의 어떠한 위로나, 성령의 어떠한 교제나, 어떠한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나의 기쁨이 넘치게 해주십시오”(빌2:1-2) 자살은 더 이상 그 원인을 개인 혹은 사회로 구별하여 생각하는 자세를 넘어서서, 우리 모두가 동참하여 예방하고 치유해야 할 중요한 세대 통합, 사회 통합의 주제입니다. 교회도 이제 이러한 문제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진정한 평화의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 땅과 하나님 나라를 연결하는 "생명의 소중함"을 핵심가치로 가지는 교회는 학교와 가정 그리고 사회 전반을 아우르며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는 관계와 자원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LifeHope기독교자살예방센터’는 교회의 이러한 힘을 극대화하여 자살률을 낮추는 일에 다음과 같이 헌신 할 것입니다. -.교육 프로그램의 개발을 통해서 자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자살예방을 위해서 교회와 교인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가르칠 것입니다. -.연구 활동을 통해서는 자살에 대한 신학적 논의들을 이끌고, 동시에 전문가들을 통해서 자살에 대한 연구와 예방 프로그램 개발을 할 것입니다. -.상담을 통해서 자살 위험자들과 예비자들을 직접적으로 섬기는 기회를 갖을 뿐만 아니라 유가족들을 치유하고 섬기는 일을 지속적으로 할 것입니다. 생명존중, 생명사랑은 모든 종교의 공통적인 가르침이며 중요한 종교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계가 생명존중 문화 확산과 자살예방 대책을 위해 앞장서, 자살률을 낮추고 출생률 높이는 생명 파수꾼이자 전도사로 거듭나야합니다. 그 중심에 한국 기독교가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주로서 생명의 원천이자, 은총의 선물이다’란 생명사랑 정신을 선양하고, 자살예방의 단체인 생명의 전화, LifeHope 등 모든 교회가 생명살리기 자살예방인 생명문화 확산에 앞장서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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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2
  • [10대인생학교 행복교육] 질문의 품격
    [교육연합신문=전준우 칼럼] 최근에 <천로역정>이라는 책을 읽었다. 존 버니언이라는 사람이 쓴 책으로, 세계적인 고전이다. 종교적 색채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고전문학이라는 선입견만 없다면, 펼치는 순간 글의 깊이에 압도당한다. 그만큼 수준이 높은 책이다. 책은 한 남자가 꿈에서 크리스천이라는 사람의 여행기를 기록하면서 시작된다. 천국을 향한 여정에서 그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어려움을 만나고, 위기를 만난다. 그리고 험난한 여정 끝에 비로소 천국이라는 목적지에 다다르고 이야기는 끝이 난다. 크리스천의 아내와 아이들이 뒤따라 길을 떠나는 내용은 천로역정 1부가 끝나고 수년이 지난 뒤에 2부로 출간되었다. 너무 깊은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므로 한 번 읽고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천로역정을 고전 중에서도 가장 수준 높은 고전으로 만들 수 있었던 이유를 꼽으라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성경과 질문의 깊이다. 성경 속에는 수많은 왕과 왕비, 다양한 직업군을 가진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로 기록되어 있지만, 인간의 감정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다. 반면에 성경은 사람이 가진 마음의 흐름에 대해 매우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마음에 해당하는 단어들(소심, 대담, 믿음 등)이 천로역정에서는 등장인물들로 등장하는데, 이들은 매우 수준 높은 질문을 주고받으며 순례자의 길을 걷는다. 살다 보면 누구나 나름의 권위(Authority)를 가진 과정들을 만난다. 처음에는 권위의 수준이 높지 않다. 학생들에게는 중간고사, 기말고사 등이 권위를 가진 과정이다. 이미 그 과정을 거친 사람들에게는 어렵지 않기 때문에 권위가 높지 않다. 4년제 학사과정을 마친 성인이 책 한번 읽어보지 않고 초등학교 3학년 중간고사 수학시험에서 무리 없이 만점을 맞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그 권위라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다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그 권위는 주로 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10대의 끝에는 수학능력시험, SAT, 바칼로레아(Baccalauréat)라는 권위가 던지는 질문에서 가장 정확하고 지혜롭게 대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학생들만이 (등급대로) 대학생이 될 수 있으며, 그중에서 가장 훌륭한 해답을 가진 학생들은 엘리트 그룹으로 선별된다. 대학생이 되면 한층 더 수준 높은 질문들을 받는다. 그리고 그 질문에는 정확한 해답이 없다. 알아서 찾아야 한다. 리포트, 논문, 석박사 과정이 그 예다. 대학을 졸업하면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다양한 선택지로 이동하게 되지만, 그곳에서도 위치에 맞는 권위가 있고, 거기에 걸맞은 해답을 준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인류 역사상 현존하는 가장 높은 질문 체계의 권위를 가진 단계는 사법시험이며, 법을 바탕으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직업의 특성상 그 권위의 최고봉은 아무래도 판사가 아닐까 싶다. 좌우지간 대부분의 권위는 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그에 걸맞은 적절한 해답을 찾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삶의 한 과정이자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천로역정은 인간이 세운 학문이 아닌 성경을 바탕으로 질문하고 해답을 내놓는다는 점에서 상당한 권위가 있다. 그리고 무지, 수다쟁이, 사심, 구두쇠 등 부정적인 면모를 가진 순례자들의 대답은 조악하고 힘이 없는 반면 믿음, 소망, 담대, 경건, 자비심과 같은 순례자들의 질문과 대답은 상당한 힘과 지혜가 있다. 마음의 힘에 따른 내면의 차이다. 역사를 톺아보면 성경을 바탕으로 질문하고 해답을 찾는 책들은 대부분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파스칼의 <팡세>,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은 모두 성경을 바탕으로 질문하고 해답을 찾는다. 성경 그 자체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인문고전이기 때문에, 가장 정확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기록한 책이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때로 말과 질문에 졸한 사람들을 만난다. 쉽게 사람을 잃고,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 안타깝게도 사회적 위치나 경제력과는 무관하다. 이처럼 적절하지 않은 말과 질문은 내면의 깊이를 낮추지만, 적절한 말과 적절한 질문은 내면의 깊이를 더한다. 얕은 책은 얕은 질문을, 훌륭한 책은 대부분 훌륭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독서가 중요한 이유다. 올바른 질문의 힘을 키우기 위해, 이번 기회에 천로역정을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 전준우 ◇ 작가, 강연가, 책쓰기컨설턴트 ◇ 前국제대안고등학교 영어교사 ◇ [한국자살방지운동본부] ◇ [한국청소년심리상담센터] 채널운영자 ◇ [전준우책쓰기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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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9
  • [전미경의 클래식 스토리] 클래식 음악엔 초현실주의가 있을까?
    [교육연합신문=전미경 칼럼] 얼마 전 초현실주의 전시를 하나 보고 왔는데 여러 미술 작품들이 방마다 전시되어 있고, 그에 어울리는 음악들이 정말 다양하게 나오는데 참으로 좋았다. 그런데 그 전시에서 흘러나오던 음악들은 유명한 현대 작곡가들의 음악이었는데, 그 음악들도 초현실주의 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질문한다면, 그건 아니고 현대 음악을 적절하게 각 미술 작품마다 잘 쓴 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궁금해지는 것, 클래식 음악엔 초현실주의 음악이 없을까? 초현실주의라는 것은 인간의 무의식이나 꿈의 세계를 흘러가는 대로 표현해내는 걸 지향하는 20세기의 문학, 예술 사조이다. 이미 미술이나 영화, 문학 등 에서는 많은 작품들이 있고, 앞으로도 많이 나올 것 같다. 그런데 클래식 음악은 상당히 수학적이고 이성적인 학문이다. 그래서 과거 소크라테스 시대에는 음악가가 과학자이며 수학자이고 천문학자였던 것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봐도 수학을 잘하는 학생은 음악도 잘한다. 물론 음악이라는 것이 그것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성적이고 수학적인 면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초현실주의 음악을 만들려면 조성을 파괴하고, 악기의 존재 자체를 위협받아야 하며, 정통적인 연주법을 부정해야 하는데 쉽지 않은 것이다. 물론 20세기 이후에 우리가 현대 음악이라고 부르는 음악들엔 다양한 시도가 있기는 하다. 기존의 형식을 탈피한 조성, 무대에서 악기를 부수기도 하며 심지어 존 케이지라는 작곡가의 피아노 곡 <4분 33초>라는 작품은 연주자가 피아노 앞에 앉아 '4분 33초'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 시간 동안 들리는 모든 소리(관객들의 기침소리나 숨소리, 시계 초침 소리 등)가 음악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렇듯 여러 시도가 있긴 하지만 이 또한 또 다른 형식을 갖고 있기에 완전한 형식의 탈피라고는 보기 어렵다. 초현실주의가 지향하는 무의식의 세계나 꿈의 흐름을 그 모든 형식을 파괴하고 표현하기란 사실상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음악적 내용이 무의식의 세계를 그린다거나 꿈의 세계를 노래하는 건 찾아보면 많이 있다. 초현실주의를 얘기할 때 아프리카 미술을 빼놓을 수 없다고 하는데,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미술계에선 수학적이고 이성적인 원근법이 파괴된 아프리카 미술이 관심을 받았다고 한다. 그 당시 아프리카의 노예들이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음악, 즉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들의 소울을 따라 자유롭게 노래하는 음악이 서양인들의 음악과 접목되면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흑인 재즈의 시작이 되었다. 재즈뿐만 아니라 팝, 그리고 클래식 음악까지 자유로움이나 꿈을 노래한 음악은 참으로 많은 걸 보면 인간은 구속보단 자유로워야 하는 존재임에 틀림 없는 것 같다. 결국 현실을 부정하고 무한한 꿈을 좇는 초현실주의의 세계도 그런 인간의 의지가 표현된 예술사의 하나일 것이다. 초현실주의 음악을 생각하다 보니 결국 인간의 자유로움 추구, 인간의 꿈으로 귀결된다. 인간은 자유가 없으면 슬퍼지는 동물인가 보다. 하긴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체에겐 다 자유가 필요하다. 그런 우리에게 코로나19라는 구속 아닌 구속의 시간들로 자유가 제한당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우리와 함께할지 모르겠지만 인간이 자유롭고자 하는 의지는 우리의 꿈을 따라 우리의 무의식의 자유로운 흐름을 따라 여러 예술의 형태로 멈추지 않고 표현될 것 같다. 클래식 음악의 영역에서도 비록 초현실주의 음악이라 명칭할 순 없지만 좀 더 형식을 탈피하고 좀 더 자유로우며 좀 더 인간의 욕망과 무의식의 저 깊은 곳까지 자유롭게 표현하는 음악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게 개인적인 바람이다. ▣ 첼리스트 전미경 ◇ 가천대 관현악과 졸업(첼로전공) ◇ 서울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부수석 역임 ◇ 금천 교향악단 부수석 역임 ◇ 의왕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 ◇ 강동 챔버 오케스트라 단원 ◇ 롯데백화점 문화센터 첼로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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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8
  • [10대인생학교 행복교육] 나의 삶에 희망을
    [교육연합신문=전준우 칼럼] 서른 중반이 넘어가면서, 이전에 가져보지 못했던 꿈이 생겼다. 60대에 슈퍼카를 타는 디지털 노마드, 다소 두루뭉실해보이는 꿈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차는 관심 밖의 대상이다. 차는 이동수단으로서의 가치가 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20대에서 30대로 넘어오는 동안, 한 번도 슈퍼카를 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차에 관심이 없다는 게 첫 번째 이유이고, 감가상각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엄청나게 가격이 하락하는 슈퍼카를 타고 다닐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수천억의 재산이 있어도 슈퍼카를 타고 싶진 않다, 하는 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생각이 조금씩 바뀌어져갔다. 슈퍼카 그 자체에 관심이 생긴다기보다는, 60대에 슈퍼카를 타는 삶이 내게 주는 의미 때문이었다. 젊을 때 크게 성공해서 한평생 재미있게 인생을 사는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인생이 항상 그런 식으로 상승곡선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삶에는 반드시 반등구간이 존재하며, 그 구간을 얼마나 지혜롭게 넘기느냐에 따라 노후의 삶이 큰 폭으로 달라진다. 존경하는 어느 지인은 젊은 시절 크게 사업을 하며 수백억의 자산을 구축했지만, 정치활동을 하는 동안 상당한 부를 잃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지금은 정치권에 입문해서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지만, "나에게 주어진 재물이 아니라면 반드시 내 손을 떠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는 3,40대였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 누구나 삶의 기준이 있다. 초고속 승진, 좀 더 넓은 아파트, 외제차, 급등하는 주식의 가치 등. 어느 것 하나 나쁠 것 없다. 느린 승진보다는 초고속 승진이 좋고, 좁은 집 보다는 넓은 집이 좋다. 국산 경차보다는 외제차가 좋고, 급락하는 주식보다 급등하는 주식이 더 할 나위 없이 좋다. 문제는 그 해답의 끝이 무엇인지를 아는가 하는 데 있다. 살면서 한번쯤 접해본 철학적,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옳은 것과 바른 것을 구별할 만한 지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추고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삶은 결코 이론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인생에 정확한 목적이 없이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들은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 강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거대한 성과를 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반면, 그에 못지 않은 허탈감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것. 철학적 이론이 결코 이렇다 할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 채 이론으로만 중무장한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 취약점이다. 인생에는 반등이 존재하듯, 초로의 삶에 접어들 때까지 성공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성공에 대한 욕심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질 때마다, 똑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했음에도 훨씬 더 앞서나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나의 성공은 60대에 비로소 완성된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각인시키곤 했다. 매일 꾸준히 글을 쓰고, 공동저서와 소설을 집필하고, 현명한 투자가 무엇인지에 대해 공부하며, 어제보다 오늘 더 발전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마음 깊이 느끼고 있다. 그리고 느릿느릿하게 움직이지만, 결코 안일한 태도로 삶을 대하고자 하는 비겁함에서 이 모든 태도가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지금 느린 것은 느린 게 아니다. 지금 실패하는 것은 실패가 아니다. 초로에 접어들었을 때, 어느덧 노신사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낄 때, 그 때에도 성장하고 있다면 가장 앞선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젊으며, 꿈을 꿀 수 있는 나이다. ▣ 전준우 ◇ 작가, 강연가, 책쓰기컨설턴트 ◇ 前국제대안고등학교 영어교사 ◇ [한국자살방지운동본부] ◇ [한국청소년심리상담센터] 채널운영자 ◇ [전준우책쓰기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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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3
  • [연재] 만화로 풀어보는 위타위기[爲他爲己]
    [교육연합신문=글.그림 임오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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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9
  • [전미경의 클래식 스토리] 코로나19와 우리 인생의 무대
    [교육연합신문=전미경 칼럼] 얼마 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오랜만에 오케스트라 연주를 했다. 작년 2월 신년음악회를 앞두고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연주가 무기한 연기된 이후 첫 연주였으니 이게 도대체 얼마만인지... 물론 그 사이 인터넷 중계를 통한 연주는 몇 번 했지만 공식적인 행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연주하는 연주자도, 그 자리에 나와 음악회를 즐기던 시민들도 다 감격스러웠음은 말이 필요 없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세상에 없던 새로운 존재가 아니다. 지구상엔 수많은 바이러스가 존재하는데 코로나 바이러스도 그렇게 이미 존재하던 바이러스라고 한다. 그런데 이 바이러스가 무엇 때문인지 2019년에 갑자가 변이를 일으키며 우리에게 치명적인 고통을 주고 결국 팬데믹이라는 전 지구적인 사태까지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바이러스는 끊임없이 변이를 일으키고 있다. 무서운 건 이 변이가 또 우리를 언제 팬데믹에 빠뜨릴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 일은 없길 바라지만 말이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로 우리가 겪었던 이런 상황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지금 지구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환경 파괴로 기후변화를 겪고 있으며, 그로 인해 여러 가지 문제들이 끊임없이 생기고 있다. 앞으로 더 무서운 재앙들이 닥친다면 나 같은 연주자는 연주할 수 있는 상황이 없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작년 코로나19 이후 거의 2년 동안 연주 없는 세상에서 살았다. 연주가 삶이고, 거기에서 힘과 에너지를 얻는 연주자에게 연주 없는 삶이란 암흑과 같았다. 암흑 속에서 2년 가까이 헤매고 나니 내 영혼이 엄청 황폐해진 것 같다. 팬데믹 시대는 비단 연주자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힘든 시기였다. 이중적이게도 팬데믹의 덕을 본 직업군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으니 이런 전 지구적인 상황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으리라. 이제는 뉴노멀의 시대라고 한다. 뉴노멀은 표준을 뜻하는 신조어로서 시대 변화에 따라 새롭게 떠오르는 기준을 말한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새로운 신조어들이 많이 생겼는데 그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겠다. 연주자에게도 뉴노멀은 해당된다. 위드코로나라며 많은 부분에서 방역이 완화되고 있긴 하지만 코로나19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백신 접종률이 높아졌지만 코로나 확진자는 계속해서 늘고 있고 위중증자도 늘고 있다. 언제 또다시 모든 것이 정지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얼마 전 오랜만에 다시 시작된 연주 또한 언제 다시 중지 될지 알수 없다. 얼마 전 연주는 야외 연주였는데 뉴노멀 시대의 훌륭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여기에도 아직은 보완해야 될 숙제들이 많이 있다. 야외 연주는 청중들이 느끼는 것과는 다른 연주자들만의 고충이 여러 가지 있다. 날씨, 바람, 무대 장치, 음향 등등. 연주 날 바람이 많이 불면 악보가 날아가고 그 악보를 날아가지 않게 고정시키기 위해 연주자는 예민해진다. 해외에는 야외 상설 무대가 예전부터 활성화되어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그런 무대도 없다. 무대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장소에서 연주하려면 바닥부터 연주자에겐 고난 시작이다. 음악 자체 외에도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은 것이다. 그러니 풀어나가야 할 숙제가 우리에겐 많이 있다. 인생이라는 큰 무대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역할이 있고, 누구 하나 소중하지 않은 역할이 없다.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우리의 역할도 그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이 변화가 빨라도 너무 빨리 다가왔다. 누구나 혼란스럽고 정신이 없겠지만, 아날로그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에게 초특급 디지털 시대는 더더욱 혼란스럽다. 온라인으로 연주를 중계하고 줌으로 학생들을 레슨하고 야외에서 연주회를 하며 뉴노멀 시대의 인생 무대를 만들어 가고 있지만 아직은 모든 것이 불안정하다. 인생은 미완성이라고 했던가. 이 생의 삶은 누구에게나 처음이라 다 불안하고 두려운데,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우리 삶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불안에만 빠져 있을 순 없다. 무대가 새롭게 변했다면 우리의 역할도 그에 맞게 새롭게 변화시키면 된다. 변화를 위해서 끊임없이 공부하고 배우며 생각해야 할 것이다. 누구나 갖고 있는 삶의 무대. 그 위에서 자신의 역할을 멋지게 펼치기 위해 지치지 마시길. 아날로그 연주자가 파이팅을 외쳐 본다. ▣ 첼리스트 전미경 ◇ 가천대 관현악과 졸업(첼로전공) ◇ 서울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부수석 역임 ◇ 금천 교향악단 부수석 역임 ◇ 의왕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 ◇ 강동 챔버 오케스트라 단원 ◇ 롯데백화점 문화센터 첼로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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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2
  • [10대인생학교 행복교육] 선별적 인간관계
    [교육연합신문=전준우 칼럼] 언젠가 CEO클럽 모임에서 만난 분이 계신다. 공과계열에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수준이 높은 사립대학교 교수님으로, 젊고 유쾌한 분이었다. 모임에 참석한 분들과 한참 대화를 나누던 중, 그 교수님이 나에게 하신 말씀이 있다. "경청을 정말 잘하시네요." 최근에 행사를 준비하는 모임에서 알게 된 또다른 분이 계신다.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평범한 분이었다. 그 분은 술자리에서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원래 말이 그렇게 없어요?" 어떤 말을 하는가보다 중요한 것이 어떻게 말하느냐 하는 것이고, 어떻게 말하느냐보다 중요한 것이 어떤 질문을 하는가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말은 누구나 잘 한다. 어릴 때부터 배우기 때문이다. 질문은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배울 수 없다. 질문을 잘 하는 사람이 드문 이유다. 상대방을 만날 때, 어떤 말을 하느냐보다 어떤 질문을 하느냐를 유심히 지켜보라. 상대방이 가진 마음의 깊이와 품격은 말보다 질문에 담겨있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물론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중요하다. 마음을 표현하는 데 서툰 사람들은 곧잘 우울증에 걸리거나, 위험한 상황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외에 말을 많이 해서 이득을 보는 경우는 홈쇼핑과 세일즈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상대방의 질문에 집중하면, 훨씬 더 깊이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인간관계를 기준으로 한 인연에도 깊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3개월 인연. 3년 인연. 30년 인연. 최근 들어 만나고 있는 분들이 계신다. 그분들은 모두 나보다 20세 이상 많은 분들이고, 사회적으로 큰 명성을 쌓은 분들이다. 나는 그 분들처럼 성공하지도, 인생의 많은 풍파를 만나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 분들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 분들이 세상에 미치는 선한 영향력이 내 인생에도 스며들어서 가치있는 일에 몰두하고자 하는 마음의 그릇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분들과의 인연은 대개 5년이 넘어간다. 함께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사업상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내 주위에 있다. 나이대는 모두 다르지만, 그들은 내 친구들이다. 나이가 많은 친구, 나이가 어린 친구, 비슷한 또래의 친구도 있다. 하지만 진짜 친구들은 주로 책에 있다. 진짜 친구들 중에는 오래 전에 죽은 친구도 있고, 아직 살아서 전 세계에 훌륭한 영향력을 전파하는 친구도 있다. 지그 지글러, 피터 드러커, 카네기, 나폴레온 힐, 투퀴디데스, 나폴레옹, 브라이언 트레이시, 찰스 디킨스, 로버트 치알디니, 호메로스, 예수 그리스도,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내 진짜 친구들이다. 그들은 내게 용기를 주고, 자신감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나의 실수와 연약함을 너그럽게 포용해준다. 그 속에서 상당히 큰 힘과 믿음을 얻는다. 그들과의 인연은 10년, 20년이 아닌 100년, 200년, 심지어 수천년의 역사적 괴리를 품고 있다. 내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들인 셈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누가 만든 말인지는 모르지만, 참 훌륭한 표현이라는 생각을 했다. 짧은 인생에 예술적 가치를 더할 수 있는 사람들을 주변에 두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비난하고 힐난하며 수군수군하는 사람들, 돈관계가 깨끗하지 않은 사람들, 술담배를 권하는 사람들, 말이 많아 탈도 많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많다. 그들과 가까이하며 인생을 허비하고 싶은가, 아니면 훌륭한 진리와 가치를 추구하며 의미있는 일에 시간을 쏟는 사람들과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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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0
  • [10대인생학교 행복교육] 소망은 인내로부터 나온다
    [교육연합신문=전준우 칼럼] 지난 몇 년 간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쌀이 없어서 밥을 먹지 못할 때도 있었다. 실패가 두려워 많은 책을 읽었다. 대부분 자기 계발서, 교육서적, 인문학 서적이었다. 적게는 하루에 1권, 많게는 하루에 5, 6권 이상을 꾸준히 3, 4년간 읽었다. 시간이 흐른 뒤 달라진 게 몇 가지 있었다. 작가가 되었다는 것과, 깊이가 있는 독서를 즐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뒤, 최근에는 다양한 부류의 문학작품들을 접하고 있다. 찰스 디킨스는 위대한 작가다. 그의 작품을 조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금방 알 수 있다. 흔히 이야기하는 위대하다는 단어는 좋다, 괜찮다, 흥미롭다와 전혀 다른 부류의 단어다. 그가 쓴 글은 매우 지적이고, 세밀하며, 감동적이다. 훌륭한 글을 쓰는 위대한 작가였으며, 빅토리아 시대가 낳은 천재 중의 천재다. 올리버 트위스트는 찰스 디킨스가 25살에 집필한 자전적 장편소설이다.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의 주인공인 올리버 트위스트는 구빈원(고아원)에서 태어나 불우한 유년시절을 거쳤으나, 따뜻한 심성과 순수한 영혼을 가진 소년이다. 찰스 디킨스의 어린 시절 경험이 녹아 있는 올리버 트위스트는 어떤 역경이나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 그리고 따뜻한 영혼을 가진 아름다운 소년상을 창조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 모든 스토리의 중심에는 빅토리아 시대의 시대적 배경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극 중에 등장하는 극악무도한 인물들의 행태와 언변은 당시 사회분위기를 재조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이야 사회적 제도가 잘 정리되어 있어서 굶어 죽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고, 경제적 빈곤이라고 해봤자 남들보다 조금 못 사는 정도의 수준이겠지만, 찰스 디킨스가 <올리버 트위스트>를 집필하던 1830년대는 산업사회로 변화하면서 급격한 도시화의 부작용으로 인해 상당한 빈민층이 양성되던 시기였다. 그리고 도덕적 엄숙주의(엄격주의 혹은 리고리즘)에 의해 성실과 품위, 검소함의 미덕을 자랑하는 반면, 인간 내면에 숨겨진 본질적인 추악함과 어우러져 도덕적 엄숙주의 그 자체가 결코 인간의 성숙함으로 미화될 수 없음을 작품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어느덧 마흔을 바라보는 나에게 올리버 트위스트가 주는 소망은 단순하지만 단순하지 않은 그 무엇이었다. "삶과 죽음은 만인에게 똑같이 부과된 엄숙한 환희이며 가혹한 형벌임을 과연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일까." -대망 1권 119p, 야마오카 소하치, 동서문화사- 인간은 똑같은 육체와 정신을 갖고 태어나지만, 누구에게는 환희이며 누구에게는 가혹한 형벌과도 같다. 한적한 마을, 소설 속 인물의 가난한 탄생으로부터 첫 문장이 시작되는 소설이지만 결국은 시대를 반영하는 작품이자 찰스 디킨스 본인의 유년시절의 경험으로 말미암았듯이, 모든 사람에게 인생이라는 것이 즐거움이나 행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위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실에 손을 얹고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었던 어린 영혼의 순수함을 통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한 줄기 빛을 비춰주기 때문이 아닐까.
    • 기획·연재
    • 연재
    2021-11-16
  • [연재] 만화로 풀어보는 당구풍월[堂狗風月]
    [교육연합신문=글.그림 임오숙]
    • 기획·연재
    • 연재
    2021-11-15
  • [자살예방 칼럼] 가톨릭 생명존중, 사랑에 대한 가르침-⑤
    [교육연합신문=김대선 기고] 지난 3월 25일, ‘삶이오’ 생명존중의 날을 선포하였다. 한국생명운동연대와 공동주관으로 종교인 상생문화 확산을 위한 생명살리기 교육사업을 불교,기독교,천주교,유교,천도교,민족종교,원불교 7대종단과 생명문화학회 등이 참여해 10차례에 걸쳐 릴레이식으로 10월까지 비대면, 유튜브로 진행됐다. 각 종단의 생명관과 생명윤리와 사상을 통하여 자살예방을 위한 인식 개선에 기여해 왔다. 특히 16여년간 OECD 1위 자살국의 오명을 벗어나고 죽음으로 희생되는 자살률을 낮추는 노력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가톨릭 생명존중, 사랑에 대한 가르침인 교리를 인용코자 한다. 가톨릭교회는 현시대의 생명경시풍조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다. 성경은 세상 창조부터 끝까지 생명의 주인은 인간이 아닌 하느님이심을 강조하며, 어떤 경우에도 그것이 본인 자신일지라도 인간생명을 직접 파괴할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다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인간이 인간 자신의 생명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느냐 라는 것은 쉽지 않은 윤리적 가치의 문제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생명의 복음」은 “생명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임무이며 의무”라고 규정한다. 또한 “인간 생명은 모든 단계, 모든 상황 속에서 신성하고 침해할 수 없는 것이므로 편견과 차별은 용납될 수 없다. 그것은 분리할 수 없는 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에 관심을 보여야 한다. 이 모든 일에는 인내심 있고 두려움 없는 교육활동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며 생명의식을 강조한다. 교회는 인간의 고통과 병고, 곤경과 허물에 직면하여 하느님께서 예수를 통해 이 세상에 오셨음을 천명한다. 하느님 당신의 자기이해에 관한 물음에 예수께서는 “내가 온 것은 그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0,10)”라 답하셨다.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 각자는 예수님을 뒤따름(Imitatio Christi)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기 위해, 특히 고통과 죽음의 세계서 충만한 생명의 시작을 증거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충만한 삶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데에 기여한다. 가톨릭 신앙에서 하느님은 생명의 주인이시기에 인간이 생명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즉,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죽일 권리가 없고 자기 자신의 생명을 파괴할 수도 없다. 인간의 생명을 희생의 제물로 드리는 것을 금지하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을 보호하도록 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연적인 생명을 뛰어 넘는 참 생명을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는 것인데 이 변화는 단순한 행동의 변화가 아닌 신분의 변화이자 존재론적 변화이다. 즉 죽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는데 이것은 적어도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인간의 생명이 하느님께 방향 정위가 되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의 생명과 결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이 타락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 사람이 되고 의로움을 인정받을 때에 그 생명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곧 생명을 경외하는 것이 된다. 이 경외는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된 것이다. 이렇듯 가톨릭교회는 자살을 명백한 죄로 보지만 동시에 자살자에 대해선 인간이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다”(히브 4,13)라는 말씀처럼 오직 하느님만이 죽은 사람을 심판할 수 있고, 그분만이 한 인간을 그 절망적인 행위로 몰아넣은 이유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도 “교회는 자기 생명을 끊어 버린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만이 아시는 길을 통해서 그들에게 구원에 필요한 회개의 기회를 주실 수 있고”,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의 영원한 구원에 대해 절망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으로 인해 모두 구원이라는 영원한 행복에 초대받았다. 하지만 “상처 입은 인간에게는 하느님의 구원이 필요하다.” 인간이 처한 상황 곧 “물질적 궁핍, 부당한 억압, 육체적 정신적 질병, 끝으로 죽음 등과 같은 다양한 인간의 비참”은 인간이 나약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구원의 필요성을 드러낸다. 인간의 비참은 그리스도의 ‘연민’을 일으켰고, 그리스도는 이 비참을 함께 했다. 그리스도는 최후의 심판을 이야기하며,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말씀하시며 가장 작은 이들을 당신과 동일시했다. 그러므로 ‘가톨릭교회교리서’가 표명한 대로 “인간의 비참에 짓눌리는 사람들은 교회의 우선적 사랑을 받는 대상이 된다.” 자살의 위협을 받는 이들 또한 바로 ‘인간의 비참에 짓눌리는 사람’이다. 가톨릭은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생명나눔센터, 각교구마다 생명위원회 등을 운영, ‘생명의 복음’을 앞장서 실천하고 있어 매우 고무적이다. 종교의 본령인 생명은 영역이 따로 없다. 자살은 사회적 책임이므로 모두가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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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1
  • [10대인생학교 행복교육] 용기를 주는 사람이란 무엇인가
    [교육연합신문=전준우 칼럼] 얼마 전 창업지원센터를 방문했다. 저서 출간에 관련한 컨설팅을 하고 있고, 제조업 분야에서 창업을 구상 중인 사업이 하나 있어서 상담을 받고 싶었다. 짧게 생각했던 상담은 1시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개중에는 아는 것도 있고 모르는 것도 있었다. 그렇게 상담을 마치고 나오면서 든 생각은 한 가지였다. 그들은 용기를 주는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창업은 정보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주워들은 정보만 갖고 창업을 시도하면 오래가지 않아서 실패의 쓴맛을 본다. 창업은 정보도 중요하지만 1%의 가능성을 100%로 끌어올려야 하는 자신감, 확신, 용기, 추진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 창업을 해본 사람들은 안다. 반면에 창업지원센터에서 근무하는 상담자들은 모두 직장인이다. 직장인의 뇌구조를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업가의 뇌를 가진 예비창업자들, 혹은 초중장기 창업자들의 뇌구조와는 확연히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갖고 있다. 창업을 통해 성과를 내 본 사람들은 아니기 때문에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물론 개인적인 업무에 관련된 경험을 토대로 어느 조직의 내부 문화를 판단하기엔 어폐가 있고, 오류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만난 사람들(직장인의 뇌구조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대다수 비슷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최근에 본 티비 프로그램에서는 게임중독에 빠진 중학생 아들과 자해를 일삼는 초등학생 아들을 키우는 부모님의 이야기가 나왔다. 첫째 아들은 게임을 하지 말라고 야단치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욕을 하고, 둘째 아들은 야단치는 부모님 앞에서 땅에 머리를 찧는다. 교육계에서 오랫동안 종사해온 나는, 결코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았다. 따뜻한 사랑이 오가야 하는 가족이, 희망과 소망을 나누어야 하는 식사시간이, 아이들에겐 고통의 시간이 되었으리라. 때때로 가족은 용기를 주는 사람들이 아니라, 슬픔과 실망을 안겨주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다행히도 나는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산다. 특히 아내와 아들에게서 많은 용기를 얻는다. 같은 마인드로 해외봉사활동을 다녀온 아내와 통하는 게 많고, 신앙으로 엮어진 마음의 힘으로 용기를 북돋워주는 게 익숙하다. 청소년 육성에 관련한 일을 오랫동안 해오면서 대화를 자주 하고, 스킨십과 마음의 표현을 하는 게 편하다. 아내, 그리고 아들과 함께 울고 웃는 시간이 내겐 더할 나위 없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다. 가끔은 이런 행복이 내게 주어진 당연한 선물인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당연하지 않은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인생에 당연한 것은 없다. 햇빛, 공기, 깨끗한 물, 건강한 영혼은 은혜의 세계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선택이며, 또한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스물다섯 살에 나는 아프리카에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보낸 1년이란 시간은 내 인생의 상당 부분을 바꿔놓았다. 14년이 지난 지금도 아프리카를 생각하면 마음이 뜨겁다. 사그라들지 않는 향수병에 걸린 것이다. 내 인생에 있어 운명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때로는 운명과도 같은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대학 입시준비일 수도 있고, 취업일수도 있다. 창업, 결혼, 이민 등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 모든 것들이 선택의 연속이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모습이 달라지게 된다, 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내가 용기를 주는 사람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들의 조언에 나의 확신을 더해서 길을 정했다. 그리고 대부분 실패하지 않았다. 운명을 개척해야 하는 순간이 올 때마다, 내게 용기와 확신을 심어주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그 길은 좁고 험난하다. 어려움과 눈물이 가득한 곳일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잘못된 길이 아니다. 틀리지 않는 길이다, 라고 나는 이야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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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04
  • [연재] 만화로 풀어보는 효자애일[孝子愛日]
    [교육연합신문=글.그림 임오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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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01
  • [10대인생학교 행복교육] 위대한 인간, 위대한 영혼
    [교육연합신문=전준우 칼럼] 수년 전 학원에서 근무할 때부터 알고 지내던 여학생이 있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던 그 여학생은 어느덧 중3이 되었고, 고교 입시를 앞두고 있다.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밝은 얼굴로 지내던 그 아이가 기특하면서도 가여워서 종종 연락을 주고 받곤 했다. 오늘은 이런 메시지가 왔다. “선생님, 저 대학 안가고 생명과학고 갈려고 해요. 아직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도 없고, 이렇다 할 꿈도 없거든요.” 나는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이야기하며, 대학은 언제든지 갈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교수가 되고 싶어서 대학원을 준비하고 있단다.”하고 덧붙였다. 최근 들어 [선생님]이라는 제목으로 장편소설을 쓰고 있다. 오랫동안 선생노릇을 해왔기에 보고 들은 것도 있고, 50년 뒤에도 학생들에게 깊은 영감을 줄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줄곧 해왔었기에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소설을 쓰면서 완벽한, 훌륭한 인간상을 가진 인물들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하고 있다. 도서, 영화, 주변인물 분석 등등 다양한 요소를 통해 사람들을 관찰하고, 특성을 공부하고, 사람을 얻고 잃는 부분에서의 차이점을 관찰한다. 그런 과정들을 통해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망막한 열정과 사랑은 우리에게 희생과 올바른 선택의 가치를 알게 한다는 점이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과 같은 결정적인 순간에 있어서, 인간은 누구나 나에게 유리한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순수한 열정은 인간으로 하여금 올바른 선택을 하게 하고, 그 선택으로 인해 내가 받는 고통과 인내의 시간으로 인해 삶의 상당수가 하릴없이 무너져 내린다고 해도, 기꺼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승화할 수 있는 마음의 그릇을 만든다. 부모, 훌륭한 교사, 훌륭한 사업가, 이들이 진정 위대한 인간상인 이유다. 어른이 되었다고 느껴질 무렵부터, 나는 내가 어떤 면에서 부박한 영혼을 가진 인물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동시에, 훌륭한 가치관을 가진 탁월한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시대적 배경, 언어, 문화, 모든 것이 다르지만, 훌륭한 품격을 가진 인물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존경을 얻고, 배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삶 속에서 우리는 그런 인물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다. 아브라함 링컨, 조지 워싱턴, 케네디, 버락 오바마와 같은 세계의 대통령들 뿐만 아니라 간디, 테레사 수녀와 같은 종교지도자, 김구 선생, 도산 안창호, 윤봉길 의사와 같은 역사적 인물들을 통해서 위대한 인간상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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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3
  • [연재] 만화로 풀어보는 효자애일[孝子愛日]
    [교육연합신문=글.그림 임오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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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15
  • [10대인생학교 행복교육]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교육연합신문=전준우 칼럼] 아몬드, 어른을 위한 소설 최근에 [아몬드] 라는 제목의 소설을 읽었다. 전 세계 12개국에 출간된 초대형 베스트셀러다. 소설 속 등장인물은 감정표현불능증이라는 장애를 갖고 있는 소년이다. 우연히 어렵게 자란 친구, 곤이를 만났고, 곤이와의 관계 속에서 사랑, 우정, 행복과 같은 단어를 찾아간다. 나와는 전혀 반대의 성향을 갖고 있고,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을 살아온 아이와 친구가 되는 이야기가 책으로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감정표현불능증이라는 단어도 생소했거니와 스토리 전개가 독특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그랬기에 제법 유명한 롱텀Long-Term베스트셀러 작품이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 속 주인공의 친구, 곤이는 평생을 어렵게 산 아이였다. 놀이공원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뒤 소년원에서 13년을 산 곤이는 거친 아이였다. 소설 속 주인공은 신체적 결함으로 인해 감정을 표현하는 게 서툴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장면, 상황, 그 앞에서 두려움이 없다. 그래서 표현하는 것도 서툴다. 주변 사람들의 오해를 받기도 한다. 감정표현불능증, 존재하기나 하는 증세일까? 놀랍게도 세상은 감정표현불능증에 취해 있는 사람을 능력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한다. 어른이 되고 나니 감정표현불능증에 취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분이 태도가 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소중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면서 마음을 조율하는 사람도 있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숨기는 것이 좋은 것인양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때로는 안타까운 죽음을 선택하는가? 나는 감정이 풍부한 편이다. 뮤지컬 배우로 활동한 경험이 있기에, 표정연기도 곧잘 따라한다. 아내도 나처럼 감정이 풍부한데다 사교성까지 좋다. 아내랑 둘이 있으면 서로 웃기기 바빠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나는 아내보다 훨씬 더 감정이 풍부하다. 슬픈 소설을 읽으면 눈물을 흘리고, 아들의 손을 잡고 길을 걷는 아버지의 손을 보기만 해도 마음이 허해진다. 정작 그들은 나를 모르고, 나도 그들을 처음 보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감정에 메마른 사람들을 보면 잘 이해가 안된다. 감동적인 장면에서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는 모습이 나로서는 퍽 어색하다. 결혼식을 준비할 때 일이다. 아내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고 괜히 눈물이 났다. 참 예쁘다, 하는 마음이 첫번째였다. 더 좋은 웨딩드레스와 예식장을 준비해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미안함이 두번째였다. 그럼에도 불평 한마디 없이 "나 예뻐? 나 예뻐?" 하고 연신 물어보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이 세번째였다. 어느덧 결혼 9년차에 접어든다. 26살의 아내는 34살이 되었고 30살의 나는 38살이 되었지만, 우리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대학생커플, 혹은 연인같다는 소리를 9년째 듣고 산다. 어려보이는 외모를 가진 사람은 세상에 널렸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고, 사랑을 표현하고,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면서 온갖 부정적인 요소들을 최대한 제거하며 살았다. 자주 웃고, 자주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부부생활을 영위해왔다. 동갑내기 부부들에 비해 젊게 살았다고 자부했고, 그 결과가 외모로도 드러났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우리에게도 아들이 있다. 몇달만 있으면 3살이 되는 아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아들이 자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 인생의 끝은 어디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아들이 어른이 되어 나처럼 아버지가 될 때까지만 건강히 살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도 한다. 그런 아들이 22개월에 접어들었다. 싫을 때는 고개를 강하게 저으면서 싫다고 표현하고, 좋은 건 좋다고 표현도 한다. 옹알이에 불과하지만, 종종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따끔하게 혼을 내기도 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실수에 대해서 꾸짖고 야단을 쳤을 때 잘못된 오해를 하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한다. 우리 모두 누군가의 아들이고, 딸이고, 연약한 인간이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부모가 되고, 인도자가 되며, 따뜻한 마음을 흘려주는 소망의 메세지가 된다. 그 인도자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얼마나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흘려주느냐에 달려있다고 믿는다. 작고 예쁜 아가씨였던 아내는 엄마가 되었다. 아들을 볼 때마다 예쁘다고 이야기한다. 이 아기가 아니었다면 내 삶의 의미가 사라졌을 것이라고도 이야기한다. 평생 젊고 예쁠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아내는 엄마가 되어 있고, 엄마로서의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우리는 아들에게 줄 수 있는 것들 중에 가장 크고 놀라운 것이 가족의 행복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 행복은 서로에 대한 사랑과 소망을 차분하게, 따뜻함을 담아 전달할 때 비로소 극대화될 수 있다. 우리가 전하는 행복과 소망이 아들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래본다. 그리고 그 행복이 아들의 마음에, 또 아들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에 즐거움으로 남게 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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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15
  • [자살예방 칼럼] 불교의 생명관과 자살인식 개선-④
    [교육연합신문=김대선 기고] 지난 3월 25일, ‘삶이오’ 생명존중의 날을 선포한 후 생명운동포럼 첫 번째 순서로 지난 5월 7일 ‘불교의 자살 인식개선 사업 방안’에 대한 세미나를 실시한 바 있다. 이번 사업은 한국생명운동연대와 공동 주관으로 종교인 상생문화 확산을 위한 생명살리기 교육사업으로 불교, 기독교, 천주교, 유교, 천도교, 민족종교, 원불교 등 7대 종단, 생명문화학회 등이 참여하여 10차례에 걸쳐 릴레이 식으로 10월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이러한 사업을 통하여 각 종단의 생명관과 생명을 기리는 교리와 사상을 사회에 전파하고, 자살예방을 위한 죽음 인식 개선 활동을 통해 지난 15여 년 간 OECD 1위 자살국의 오명을 벗어나고 내몰린 죽음으로 희생되는 자살을 줄이는 동력이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현대인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세계관(世界觀)은 크게 영혼불멸(靈魂不滅)을 믿는 종교적 생명관과 영혼은 물질의 소산이라는 과학적 생명관이다. 이 두 생명관은 끓임 없이 많은 사회문제를 일으키면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인간 중심의 생명관에 기인한다. 과학은 인간의 복리를 목적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과학은 일부 탐욕스러운 자본과 결합하여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켰으며, 생태계를 파괴하여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게 하고 있다. 게다가 근래에는 가축을 복제하는 기술까지 개발했고, 로봇 등 인간의 복제를 가능케 함으로써 인간 생명의 존엄과 가치를 손상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인간의 생명만 소중하다는 생각은 그것이 과학이건 종교이건 결국 인간 생명의 존엄의 근거를 상실하는 것이다. 이에 불교계는 진정한 생명의 존엄과 가치의 근거한 사상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윤리적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자살예방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불교의 생명관은 매우 심오하여 해량(解量)하기 어렵다. 불교의 화엄경에 의하면 넓게는 우주 전체가 한 생명체이고, 그 한 생명체가 전 우주라 하며 전 우주가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온 우주의 생명체에는 형상이 있는 생명체, 형상이 없는 생명체도 있으며 생(生)과 식(識)이 없는 생명체도 있다. 물질 자체도 생명이며 정신 자체도 생명체이며 동시에 물질과 정신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것도 생명체이다. 이와 같이 우주 안에 있는 생명체는 매우 다양하고 심오하여 인간의 육안으로는 모두 다 관찰할 수 없으며 청정하고 수승(殊勝)한 부처님의 지혜에 의해서만 관찰될 수 있다고 했다. 불교는 생명을 연기설로도 설명한다. 불교에서는 생명이 머무는 세계를 유정세간, 기세간, 지정각세간으로 나눈다. 기세간은 유정(有情)상태의 생명체(중생; 衆生)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로 이루어진다. 욕계는 일체 유정이 탐욕, 음욕 등의 근본적인 욕망으로 인하여 성립되는 세계이다. 색계는 욕계를 초래하는 그러한 근본 욕심은 없어졌지만 아직은 더 이상 욕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 수승한 물질이 남아있는 세계이다. 무색계는 수승한 물질의 존재도 없는 정신 상태의 세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붓다는 우리가 생명을 이야기하면서 물질인 육신과 영혼을 나누어 생명을 규정하려는 생각 자체를 비판하고 있다. 붓다에 의하면 육신이나 영혼은 ‘12연기설’인 『유전문(流轉門)』”과 『환멸문(還滅門)』이 있다 하였다. 『유전문』에서는 생사가 나타나지만 『환멸문』에서는 생사가 사라진다. 영혼이 있는가 없는가라는 질문은 무명에 휩싸인 중생들이 생명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생사를 느끼면서 만들어 낸 허구인 것이다. 『잡아함 (39)경』에서 ‘한 알의 볍씨가 인연을 만나면 그 볍씨는 사라져도 거기에서 뿌리, 줄기, 가지, 잎, 볍씨가 나오듯이 식온(識蘊)이 새로운 인연을 만나면 새로운 오온(五蘊)으로 상속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속에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영혼은 없으며 이러한 생명의 상속(相續)은 업보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생명은 이러한 업보의 현상인 것이다. 우리가 육신이나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본질은 업보인 셈이다. 불교의 연기설은 이러한 ‘무아업보설’을 의미한다. 무아의 논리적 근거가 되는 연기란 업보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생명의 본질을 육체나 영혼과 같은 존재로 보지 않고 업으로 본다. 이러한 업설의 생명관에서 보면 생명의 존엄은 업(業)의 결과 즉 보(報)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자살은 죄이다. 자살의 업은 윤회한다’하였듯이 누구나 12단계를 거치는 인연을 따라 연기하며 영원불멸하므로 절대적으로 생명은 불멸의 고귀성을 가진다 하겠다. 불교계가 생명존중에 목적을 두고 ‘법회, 의식(儀式)을 통한 생명살림 켐페인, 생명지킴이 활동, 자살예방 학술대회, 유족 자조 모임 운영, 자살 유가족 템플스테이, 자살 인식개선 프로그램 운영, 성직자 자살 인식개선 교육, 자살 예방교육 강사양성 교육, 자살예방사업 예산 증액 촉구대회’ 등을 통하여 자살예방운동을 지속하고 있음은 매우 고무적이다. 불교의 250계율에서 가장 먼저 살생을 하지 말라 하셨듯이 불교의 생명관은 항상 우리들을 일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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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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