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교육연합신문=文德根 기고]

언론매체가 정보와 교양 그리고 휴식을 얻는데 상당 부분 기여하고 있다. 그런데 언론매체들의 시사 프로그램에서, 토론 참석자들은 진행자의 주제 제기에 따라 대책과 해법을 이야기하는데, 자주 실상과 동떨어져서 정파와 반대를 위한 반대로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이 적지 않다고 한다. 또한 제기된 문제에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하기 보다는 자신의 이념, 가치관, 이해관계 등을 대변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더 나아가 자신의 지식이나 전공을 자랑하고, 자신의 이력과 경력을 쌓아 다음으로 건너가기 위한 자리로 삼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까닭은 무엇일까?

 

지금은 무엇보다도 세계적인 재난이라고 할 수 있는 코로나 19에 대처하기 위해 지혜와 역량을 집중해야 할 중차대한 시기다. 비난과 비판도 이러한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힘과 의식을 제고하는 데 두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생각일지라도 자기 지역과 자신의 입지에 따라 다르게 대처하는 나라가 우리가 아닌가 하는 서글픔마저 든다.

 

선진국들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 대해, 공정 보도를 추구한다는 언론까지도 국익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하고 기사를 쓴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세계적인 재난에 대하여 정부와 지도자에게 힘을 모아서 대처를 할 수 있도록 대동단결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비난과 반대를 위한 指摘 쌓기에 몰두하고 있다는 비난들을 지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지혜는 和合에 기초해야 하는 것이고, 상황에 맞게 적용하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인데 말이다.

 

왜 이렇게 상반되는 상황이 전개되며, 다른 반응을 보이며, 과연 이런 생각은 어디에서 말미암은 것일까? 어쩌면 ‘나와 너’를 분리하고 대립시켜서 ‘너와는 다른 나’를 추구하는 가치관에 근거하고 있지는 않은가? 조선시대, 일본 정세에 대하여 사실적으로 보기보다는 당파에 따라 다른 생각과 선택으로 임진왜란을 초래한 구시대적인 발상이 지금도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목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기에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자들이 다름 아닌 나라의 지도자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아닌가?

 

실상을 보고 생각을 달리할 수는 있지만 자신의 말과 행위를 자세히 관찰하고 돌아보는 자세가 중요하다. ‘우리’라는 갇힌 생각보다는 상대를 ‘포용하고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여기는 틀로, ‘옳고 그름’과 ‘돼 안 돼’라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아닌 문제가 잉태한 실재에서 문제를 풀 수 있는 자신만의 독립적인 뜻을 세우고, 다른 사람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 더 나은 해결책을 찾는 모습이 아닐까?

 

이렇게 되려면 교육의 틀이 바뀌어야 한다. 기존의 생각을 머리에 담고 이고 지고 살아가는 훈고적 기풍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에서 눈을 떼지 않고 면밀히 관찰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길을 걸을 때 옮기는 발걸음 하나하나를 보면서 걷다보면 넘어지는 일도 적어지는 것처럼,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는 자세다. 끝까지 보지도 않고 자신만의 아집으로 단정해버리는 태도야말로 갈등과 반목을 일으키고 세계를 겉으로만 보는 위험한 발상인 것이다.

 

訓誥的이란, 실상은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해놓은 결과만을 받아들이고 삶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따라 하기’로 정치와 경제 발전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이제는 ‘따라 하기’만으로는 더 경제적이고 효율성을 높일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그것도 말로만이 아닌 행동으로 옮기는 통찰이어야 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익히기만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독립적으로 자기만의 생각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에 가면 가장 먼저 손에 드는 것이 ‘리모콘’이라고 한다. 왜일까? 모든 방송국은 프로그램 베끼기에 열을 올리고 있고, 거기에 따라 새로운 프로그램을 찾아 계속 리모콘을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요즈음 ‘트로트’가 인기 있으니까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따라하기, 베끼기’다. 그래서 더욱 ‘리모콘’을 찾을 수밖에 없다. 새로운 것, 호기심을 리모콘으로 찾아 나서는 것이다. ‘베끼기’를 하면서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더 한숨을 자아내게 한다.   

 

누구나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職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살아간다.’는 말은 그 ‘職’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職’은 ‘職業’이 된다. ‘職’은 자기가 맡은 역할이고, ‘業’은 사명 또는 자아실현을 의미한다. 그래서 ‘職業’은 그 사람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그 사람의 人格이 되는 것이다. 人格이 된다는 말은 ‘職’과 ‘業’이 일치하는 것을 함유한다. 직장인과 직업인의 모습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職’과 ‘業’이 분리된 사람들로 채워진 조직에서는 부패가 만연하고 쇠락해가는 것이다. ‘나’로서 사는 삶은 ‘시대’를 아파해야 하는 것이다. 아픈 시대를 구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그쪽으로 생각과 발을 모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이 시대가 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유산으로 남길 것인지?’ 등을 고민하고 행동하는 ‘시대정신’으로 호흡해야 한다.

 

그래서 莊子가 이런 말을 남겼는지도 모른다. “有眞人而後有眞知(참된 사람이 있고 난 다음에라야 참된 지식이 있다).” 즉 인격을 갖추고 난 다음에라야 그 사람이 지식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言行이 그 사람이라는 말도 있듯이, ‘세 치의 혀’가 그 사람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孔子가 “不知言이면 無以知人也”라고 했던 그 말이 지금도 회자되는 까닭을 깊이 고민하는 과정이 먼저여야 한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것, 나만의 상상력과 호기심이 묻어나게 하는 것은 나에게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洪範衍義>에 ‘貌言視聽思’로 깊이 생각해야 할 몸가짐을 ‘五事’라고 한다. 첫째는 겉모습이고, 둘째는 말하는 것이며, 셋째는 보는 것이고 넷째는 듣는 것이며, 다섯째는 생각하는 것이다. 겉모습은 공순해야 하고, 말은 따르고 따를 수 있어야 하며, 보는 것은 어둠과 밝음을 함께 보아야 하고, 듣는 것은 분명해야 하고, 생각하는 것은 치우침이 없이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五事는 “無爲無不爲”할 수 있는 성찰을 뜻한다고 한다.

 

무심코 짓는 표정 하나 하나는 곧 의도와 무관하게 하나의 메시지가 된다. 그래서 ‘눈빛 하나 낯빛 하나’ 생각하고 행동하는 삶이야말로 자신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생각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하고 있는 모습이 나를 ‘나’이게 만든다. 위기와 기회는 다른 길이 아니라 함께 짊어지고 가야하는 경계의 길이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위기와 기회를 넘나들고 있는 ‘나’를 본다. 오늘도 내 꿈이 실현되는 여정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 文德根 博士

◈ 陶山書院선비문화수련원 指導委員

◈ 前 康津敎育長

◈ 敎育學博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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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나의 삶이 내 꿈의 실현과정으로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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