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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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대인생학교 행복교육] 시작점을 향한 탐구
    [교육연합신문=전준우 칼럼] 이병철 삼성전자 초대회장의 미꾸라지와 메기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경제적 이익 창출에 도움을 입었겠지만, 살면서 만나는 스트레스, 고난, 어려움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닌 것임을 알게 해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살면서 만나는 지속적인 어려움, 문제, 고난은 필요악이다. 이겨내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는 스트레스와 어려움은 염증처럼 마음에 남아 곯기 마련이다. 어느 순간이 되면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무서운 병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마음이 건강한 가장은 결코 망가亡家를 허락하지 않는다. 세계적인 천문학자였던 故칼 세이건 Carl Sagan(1934-1996) 박사는 '지구는 사랑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특별한 사건이 없는 한 우리에게 마음의 고요를 허락하는 곳'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사랑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별, 마음의 고요를 허락하는 위대한 별에서 마음의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은 고무적인 데다 자상하기까지 한 칼 세이건 박사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마음의 병은 치료가 중요하다. 새벽산책, 늦은 밤 서재에서의 묵상, 간헐적 단식, 혼자 걷기 등은 내가 사랑하는 습관들이다. 덕분에 우울증 테스트에서 0점이 나올 정도로 나의 정신은 건강하다. 전문가의 소견에 의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라고 한다. 이 모든 습관에 앞서 글쓰기가 나의 가장 소중한 습관이라고 덧붙여 이야기하고 싶다. 종교는 없으나, 글쓰기가 소명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미분과 적분이 천지가 창조되던 어느 시점부터 있던 영원불멸의 진리가 아니라 고집불통에 비사교적인 성격 때문에 대인관계도 원만하지 못한 어느 천재의 사색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뉴턴 Isaac Newton(1643-1727)은 런던 대역병이 유행하던 시기에 고향에서 미분과 적분을 발명했다. 지독한 경쟁심과 탐구력을 바탕으로 한 생각의 결과를 책(프린키피아 Principia)으로 엮었다. 투퀴디데스는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 연합군의 27년에 걸친 전쟁기간 동안 전쟁기록을 남겼고, 이는 출간 즉시 고전이 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되었다. 그들의 글은 그들의 천재성과 리더십, 사리를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의 증거가 되었고, 인류 역사에 큰 영향력을 미친 고전이 되었다. 우리의 글도 그러할 수 있다. 글쓰기가 단순히 일기나 에세이 쓰기, SNS 홍보용으로 국한될 필요도 없으며, 우리가 쓰는 글이 누군가에게 소중한 영향력을 미치지 않으리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능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사람은 각기 다른 경험을 갖고 산다. 대부분 글의 소재가 경험과 깨달음의 집약체라는 점에서 나와 당신의 글이 훌륭한 보석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 전준우 ◇ 작가, 강연가, 책쓰기컨설턴트 ◇ 前국제대안고등학교 영어교사 ◇ [한국자살방지운동본부] ◇ [한국청소년심리상담센터] 채널운영자 ◇ [전준우책쓰기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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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4
  • [육우균의 周易산책] 한마음으로 모이는 힘-택지췌의 교훈과 공동체의 힘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우리는 종종 어려운 상황을 겪을 때 협력과 팀워크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특히 4차 산업시대는 창조성과 협력성이 강조된다. 택지췌괘는 협력과 공동의 노력을 통해 번영을 이룰 수 있는 길임을 상기시킨다. 「대상전」에 택지췌괘를 보면 ‘연못이 땅 위에 있는 모습은 물이 모여 있는 모습이다. 모여들게 되면 항상 쟁송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자신의 통치의 질서를 도모한다. 우선 병기를 점검하고 소제하고 수리한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불행한 사태들에 대비한다.’고 되어 있다. ‘택지췌(澤地萃)’의 ‘췌(萃)’는 ‘모이다’, ‘모으다’, ‘가려 뽑아 모으다’란 뜻이다. 만물이 모여들어 풍성해지고 인심이 모여들어 한마음이 되면 모든 사회 현상이 여유롭고 풍족해진다. 택지췌는 연못에 물이 모이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연못은 겸허한 태도로 스스로 몸을 낮은 곳에 두고 있다. 그리하여 모든 계곡으로부터 오는 물길이 자연스럽게 즐겁게 노래하면서 모여들게 한다. 못은 무한한 포용성과 아량을 가졌다. 큰 개천물도 가냘픈 시냇물도 구분하지 않는다. 맑은 물도 흐린 물도 차별하지 아니한다. 자기를 향하여 찾아드는 모든 물은 이것을 반가이 그 품에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그 넓고 깊은 품 안에서 맑았던 물도 흐렸던 물도 그리고 가냘펐던 것도 거대했던 것도 마침내는 혼연일체가 되어 커다란 하나의 맑은 못물로 만들어 놓는다. 작위하지 않는다. 선(善)의 분위기 속에서 저절로 정화된다. 이것이야말로 노자가 말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道)라는 것이 아닐까. 노자는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능히 만물을 좋게 하지만 다투지 아니하며, 여러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도에 가까운 것이다.”라고 말했다. 택지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시가 있다. 바로 이성부의 「벼」라는 시다. 감상해보자.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 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 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한 그루 한 그루의 벼는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릴 만큼 약한 존재이지만 그들이 서로 어우러져 몸을 기대고 살아가기 때문에 강인한 힘을 가지는 것처럼, 민중은 서로를 돌보는 마음과 서로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강한 힘을 가질 수 있다. 민중들은 벼들이 서로 기대어 살 듯이 서로 어우러져 기대어 산다. 외적인 고난과 어려움이 심할수록 민중들은 스스로 자숙하고 이웃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 공동체적 유대를 통해 더욱 공고해진 민중들의 모습을 보라. 그들은 죄가 없으면서도 마치 죄인처럼 짓눌려 살아온 사람들이기도 하다. 민중들은 달관의 자세를 지닌 사람들이다. 자연의 질서에 순응해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줄도 안다. 그리고 올바른 역사를 이루기 위한 희생과 헌신의 정열을 지니고 있다. 또한 민중들은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역사의 주체로 일어서고자 하는 사람들이며 남을 위해 혹은 올바른 역사를 위해 사랑을 바칠 줄도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 민족은 수천 년간 ‘벼’를 재배해 왔다. 즉 벼는 우리와 오랫동안 지내왔으며, 풀과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적 삶의 뿌리이자 역사의 저력을 상징하는 데 적합하다. 시적 화자는 벼의 서로 어우러져 기대는 모습으로부터 공동체적 유대와 신뢰감을, 서로의 몸을 묶고 떠나는 모습으로부터 민중의 저력과 희생의 모습을, 서러움을 달래고 노여움을 삭이는 모습으로부터 민중의 현명함과 지혜로움을 발견하고 있다. 한 포기의 벼와 들판을 가득 메운 벼들을 보라. 모이면 강해지고 풍족해진다. 택지췌괘는 동지와 협력자를 얻고, 발전과 번영을 이룩할 수 있는 행운의 징조를 보이는 괘다. 이 괘의 모양을 보면 아래로 세 개의 음효가 연속하여 있고 맨 위에도 음효가 있는 사이에 두 개의 양효가 있어서 마치 잉어가 폭포를 치달려 올라가서 이제 막 마지막 코스의 문턱에 도달한 상태와 같다. 그래서 이 괘를 잉어가 용문에 오르는 기상이라고 말한다. 이 괘는 매우 운세가 강력하고, 또 모인다는 뜻이므로 동지와 협력자를 얻을 수 있다. 항상 겸허한 마음과 정성되고 정직한 태도와 유순하고 관대하게 행동하라. 그리하면 모든 일은 저절로 순조롭게 성취될 것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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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2
  • [전재학의 교육칼럼] 우리 교육이 지향해야 할 실력주의에 관하여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근래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빈부격차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국 중에서 2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계층 간의 갈등도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이른바 흙수저 논란이 그 대표적 증거다. 매년 고등학교 졸업자 수는 줄어드는데 대입 경쟁은 약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청소년의 자살률은 매년 최상위권을 달리는 심각한 수준이다. 그뿐이랴. 역으로 행복지수는 늘 최하위 수준에서 맴돈다. 역대 정부가 학벌타파를 위한 능력주의 사회구현을 내세워도 이는 언어의 희롱에 불과하며 어떤 정책 보완도 미미하다. 이러한 문제의 뿌리는 무엇일까? 교육학자 박남기 교수는 우리사회가 크게 착각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실력(능력+노력)주의 사회가 구현되면 학교교육이 정상화되고, 대입경쟁도 완화되며, 우리가 꿈꾸는 보다 정의롭고 바람직한 사회가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보라. 오히려 그 반대로 가고 있지 않은가? 실력주의가 극으로 치달은 결과 교육에도 신자유주의 물결의 부작용과 사회적으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임금격차가 큰 노동시장의 이중화 및 분단 구조의 양극화가 우려의 수준이지 않은가. 영국의 사회학자인 마이클 영(Michael Young 1915~2002)은 지금 우리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과도한 경쟁, 교육전쟁, 학벌, 사회 양극화 등은 실력주의(meritocracy)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아 나타난 것이 아니라 역으로 과도한 실력주의가 가져온 폐단이라고 말했다. 실력에 따른 보상의 차이가 점점 더 커지는 실력주의가 보완되지 않는 한 실력 판단의 잣대인 학력은 또 다른 이름의 학력을 향한 경쟁으로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객관적인 시험을 통해 공채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직장이 SKY를 중심으로 졸업한 대학과 학과를 실력의 잣대로 삼는다. 그러니 해당 대학과 학과를 향한 치열한 경쟁은 극단으로 치닫는다. 이는 학교가 경쟁을 조장한 것이 아니라 학교가 실력주의 사회의 극심한 경쟁의 장(場)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녀교육에 목숨을 거는 학부모의 입장도 무리는 아니다. 문제는 노동시장의 분단화 및 양극화 실상을 극복하지 않는 한 교육을 통한 경쟁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전통적인 실력주의를 타파해야 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새로운 실력주의로 나아가야한다. 어떻게 말인가? 이는 실력과 대학 및 직업 사이의 연결고리를 유지하되 직업과 보상의 함수 관계를 줄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직업 간 사회적 분배의 차이를 줄이는 제도적⋅사회 문화적 보완장치가 마련되어 근로의욕을 고취하는 복지사회 정립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마이스터고 학력으로 전문가로 인정받고 행복하게 사는 독일이 그 대표적 사례다. 박 교수가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며 이보다 앞서 진보학자 김누리 교수가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누구나 어느 정도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보장된다면 부모들은 자녀를 무작정 입시경쟁에 몰아넣지 않을 것이고 학생들도 자유롭게 자신의 꿈과 적성을 찾아 원하는 공부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친구가 경쟁자가 아닌 더불어 사는 사회의 재화를 창출하는 동반자가 될 것이며 성공과 출세 지향의 교육 가치 또한 변화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실력주의 사회로 가는 첫 걸음이라 믿는다. 이제 학교는 사회구성원들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교육개혁에 나서야 한다. 여기엔 상생(win-win)을 추구하는 교육이 우선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노력이 아닌 신에게서 받은 능력에 상응하는 부분은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다. 또한 서로의 노력과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아가 희생과 봉사 그리고 나눔과 배려의 정신을 몸과 마음에 익힌 정치인을 육성하는 정치교육을 학교교육에서부터 실시해야 한다. 더불어 교육당국은 학교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고 지원하며 각종 교육개혁에 선도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풀뿌리 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주사회의 기반이듯 학교가 올바른 실력주의를 통해 민주시민을 육성하는 보루여야 한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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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0
  • [김홍제의 목요칼럼] 개 식용 금지와 생명의 무게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2027년부터 개고기가 불법이 된다. ‘개의 식용 목적의 사육 도살 및 유통 등 종식에 관한 특별법’이 재석 210명 중 찬성 208명으로 통과되었다. 미국 시엔엔(CNN)은 이 법안이 한국의 분열된 정치 지형에서 드물게 초당적 합의를 얻었다고 보도했다. 대한육견협회 회장은 국민이 먹는 것을 금지해서 성공한 역사는 없다며 반발했다. 같은 날 참사 발생 후 437일 만에 ‘10.29 이태원 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법’도 통과되었다. 여당은 표결에 불참했다. 정부는 반려동물 연관산업을 육성해 2027년까지 국내 시장 규모를 15조 원까지 키우기로 했다. 반려동물 문화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동물장묘업체 화장 시설을 갖춘 업체는 60개가 넘어서 사람 화장 시설 수 62개와 비슷한 수준이다. 반려동물용 유모차 판매 비중은 가파르게 상승하지만 유아용 유모차는 2022년 64%에서 2023년 43%로 떨어지고 있다. 출생아 수가 줄어 2024 의무취학 대상자는 최초로 40만 명 선이 무너지고 있다. 2026년 초등학생 입학생 수는 20만 명대로 내려올 수 있다. 학령인구 감소로 학교도 무너지고 있다. 개는 약 4만 년 전부터 인류가 길들인 가축이다. 서유기에서 삼장법사가 저팔계의 별명을 지을 때 8가지 음식을 금하고 있다고 해 팔계(八戒)라고 지었는데 8가지 음식 중 하나가 개고기였다. 개는 인간에게 가장 오랜 친구 같은 동물이다. 개를 먹으면 혐오스럽고 돼지를 먹으면 건전하다는 것은 문화적 관점이다. 모든 육식에는 살생과 잔인성이 존재한다. ‘슬견설(蝨犬說)’은 고려시대 이규보가 쓴 글이다. 개를 몽둥이로 때려잡는 광경을 보고 참혹하고 마음이 아파 다시는 개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손님이 말했다. 이규보는 "나는 어떤 사람이 불이 이글거리는 화로에 이를 잡아서 불 속에 넣어 태워 죽이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 이를 잡지 않기로 맹세했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손님은 자신을 놀리느냐며 대들었다. 이규보는 미물부터 사람까지 다들 살고자 하는 마음은 같으며 어찌 큰 것만 죽기를 싫어하고 작은 것들은 그렇지 않겠느냐고 한다.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본질을 보는 안목을 말하고 있다. 높은 직위 사람의 생명과 서민 노동자의 생명은 현실에서 같은 무게일까. 우리나라는 ‘자살률 1위 국가’이다. 자살로 인한 사망자 수가 OECD 평균에 비해 두 배나 높아 38개국 중 1위이다. 우리나라 국민은 39분마다 1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2021년 사망원인 통계에 따르면 연간 자살로 사망하는 사람은 1만 3,352명이다. 한국은 산재공화국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산재 승인 통계 기준으로 2021년 사고사망자는 828명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34위다. 2022년 중대 재해 사망자는 644명이다. 동물에 대한 새로운 복지나 관점의 전환은 필요하다. 다만 반려동물보다도 못한 인간이라는 자괴감이 없도록 정부는 국민의 생명과 행복에도 한층 노력해야 한다.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하는 인구는 늘어나는데 입양시설의 아이 입양이 늘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생명의 무게에 대소가 없지만 인간 생명 무게가 동물 복지보다 낮아서 되겠는가.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학생교육문화원 예술진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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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8
  • [10대인생학교 행복교육] 올바르지 않은, 올바른 선택
    [교육연합신문=전준우 칼럼] 메데이아는 콜키스 왕 아이에테스의 딸이자 이아손의 아내다. 남편 이아손을 배반한 펠리아스를 죽이고 추방되어 코린도스로 옮겨와 살지만, 이민족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안고 있다. 그런 메데이아에게 싫증을 느낀 이아손이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의 딸과 결혼하기로 하자 크레온과 크레온의 딸을 죽이고 자식들 역시 자신의 손으로 죽인다. 이아손이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진 것을 확인한 메데이아는 이아손을 향해 조롱하며 용 수레를 타고 아테나이로 도망간다. 메데이아의 대략적인 줄거리다. 여성의 지위가 남성에 비해 한없이 연약하고 초라할 수밖에 없었던 고대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는 그야말로 보잘것없었을 것이다. 어린아이와 여성에게는 국가행사 참여는 물론 투표권도 허락되지 않았고, 남편이 여성의 존엄 자체를 짓밟는 발언과 행동도 서슴지 않았던 시대였다. 당신들 여자들은 어떤가 하면, 결혼 생활만 원만하면 모든 걸 다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결혼 생활이 여의치 않으면 가장 훌륭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조차 가장 적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사람들이 다른 방법으로 자식을 낳고, 여자 같은 것은 없어져 버렸으면 좋으련만! 그러면 인간들에게도 불행이란 것이 없어질 텐데! -<메데이아>570-575, 이아손의 독백 남편인 이아손의 바람직하지 않은 선택, 즉 왕족의 피를 이어받은 공주와의 결혼을 두고 메데이아는 이아손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지만, 이아손은 공주와의 결합이 아내의 행복과 가정의 평화가 아닌 가문의 영광과 영화를 위한 선택임을 이야기한다. 당신을 구하고 자녀들에게 왕족의 피를 받은 형제자매를 낳아 주어 우리 집안의 울이 되게 하려는 것이란 말이오. -<메데이아>595-597, 이아손의 대답 남편에게 아내는 가정의 수호자이며 영육의 동반자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삶의 동반자나 자녀의 선한 인도자로 생각하기보다는, 오직 집안의 안녕과 평안을 위해 가정에 충실해야 하는 순종적인 여인 정도로 생각하는 가장의 경우를 많이 본다. 언젠가 모임에서 페미니즘(혹은 페미니스트)에 대한 토론을 경험한 적이 있다. 모임의 인도자는 페미니즘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옹호하는 입장이었고, 페미니즘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또다른 한 분은 여성이었다. 이야기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잘 진행되었는데, 대화를 나누던 중에 약간의 오해가 발생했다. 그러자 금세 냉랭한 기운이 맴돌았고, 스스럼없는 대화에서 약간의 불협화음을 띠게 되는 경험을 했다. 다행히 지적 능력이 뛰어난 분들이었기에 곧 자신들의 실수를 언급하며 서로에게 양해를 구했고 이전과 같은 토론이 진행되었지만,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남녀노소를 무론하고 상당히 민감하고 예민하게 받아들여지는 주제임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나 역시 여성의 안전하고 건강한 사회생활과 성장을 위한 페미니즘 운동 그 자체는 적극 지지하고 찬성하는 바이지만, 일각에서는 레디컬 페미니즘 radical feminism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퇴행성 세력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기에 성별을 무론하고 어느 한쪽의 일반적인 성장과 성취를 두둔하기란 어렵다. 다만 작품 속에서 메데이아가 보여주는 사고의 흐름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영웅적인 요소를 보인다는 점에서 여성이 갖추어야 할 남성적인 면모를 볼 수 있는 반면, 일차원적인 생각과 사고의 흐름을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마침내 비극으로 마주하는 모습에서 광기와 잔악성을 갖춘 어리석은 인간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아! 어떡하지? 애들의 반짝이는 눈을 보니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아요, 여인들이여. 차마 못하겠어. 지금까지의 계획은 사라져 버려라! 나는 내 자식들을 이 나라에서 데리고 나가겠어. 왜 애들의 불행으로 애들 아버지에게 고통을 주려다가 나 스스로 두 배의 고통을 당하는 거야? 그건 안 돼! 그런 계획들은 사라져 버려라! 내가 뭐 잘못된 것 아니야? 원수들을 응징하지 않고 내버려 둠으로써 웃음거리가 되겠다고? 해치워야지! 부드러운 말에 마음이 솔깃해지다니 나야말로 얼마나 비겁한가! 얘들아, 집안으로 들어가거라! -<메데이아>1042-1053, 메데이아의 독백 메데이아는 이아손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메데이아 1399) 자식들을 죽였으며, 아이들을 죽인 것은 아버지의 악덕과 교만, 그리고 새 장가로 말미암았다(메데이아 1363-1366)고 이야기한다. 메데이아는 자식으로 인해 겪는 고통이 신들로부터 비롯된 운명과 같은 것이며, 그렇기에 자신의 손으로 자식들을 죽이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한다. (메데이아 1105-1115)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일차원적인 생각의 결과다. 자식은 하늘의 선물이며, 가정에 따사로운 빛을 선사하는 귀중한 보물이기도 하다. 자식을 죽이는 것은 저주이며, 분명히 잘못된 선택이다. 자신의 선택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메데이아의 분노는 남성에게 억압받는 여성들의 마음에 숨어 있는 영웅의 심리를 자극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 내릴 수 있지만, 그 행위 자체가 결코 올바른 선택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오오, 제우스에게서 태어난 빛이여, 그녀를 막고 저지하고 이 집에서 내쫓아 주소서! 그녀는 살의에 찬 악령들에게 쫓기는 가련한 복수의 여신이에요. -<메데이아>1258-1260, 코로스 좌 제 혈육에게 저지르는 범행은 지상의 인간들에게 가혹한 벌을 가져다주는 법. 제 혈육을 살해한 자들에게 걸맞은 재앙이 신들에 의해 그들의 집에 떨어진다네. -<메데이아>1267-1270, 코로스 우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페미니즘이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종속적 존재, 조건적 평등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여성은 남성들에 비해 일반적으로 과소평가받아온 것이 사실이며, 작품 속에도 그러한 평가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듯하다. 그러나 남성 우월주의에 대한 항거, 복수를 위한 비이성적인 선택을 체면, 혹은 남성에 대한 분노로 돌리려는 인물 정도로 메데이아를 평가한다면 곤란할 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이며, 다양한 선택 속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오랫동안 저울질하는 존재(그 저울질이 자신에 선택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할 듯하다. 결국 모든 인간은 메데이아처럼 올바른 선택을 위하여 올바르지 않은 선택을 습관적으로 하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 전준우 ◇ 작가, 강연가, 책쓰기컨설턴트 ◇ 前국제대안고등학교 영어교사 ◇ [한국자살방지운동본부] ◇ [한국청소년심리상담센터] 채널운영자 ◇ [전준우책쓰기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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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6
  • [육우균의 周易산책] 우물-공동체 정신과 인간 삶의 근원(수풍정)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우물은 많은 면에서 고요하고 정적인 존재처럼 보이지만, 그 심오한 의미와 상징성은 우리의 삶과 공동체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전달한다. 「대상전」에 수풍정괘를 보면 ‘나무 위에 물이 있는 모습이다. 이때 풍은 나무를 가리킨다. 나무가 물 밑으로 깊게 들어가 물 위로 나온다는 것은 우물을 긷는 모습을 말한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백성들을 위하여 근로하며, 또 백성들로 하여금 서로를 도울 것을 권면한다.’고 되어 있다. ‘수풍정(水風井)’의 ‘정(井)’은 ‘우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우물은 원형이고, 중국의 우물은 사각형이다. 역사적으로 봐도 이는 명백하다. 만주의 고조선, 고구려, 발해 영역의 옛 우물들은 모두 원형으로 남아 있다. 중국의 우물이 사각인 것은 바로 이 ‘우물정(井)’의 모양에서 출발한다. 사방 1리의 밭(田)을 9등분하여 주변의 8개를 사전(私田)으로 하고, 가운데 하나를 공전(公田)과 택지로 사용했는데, 그 중앙에는 반드시 우물이 있어, 공동으로 사용했다. 우물은 문명의 센터다.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생명의 근원을 나누어 준다. 그리고 끊임없이 퍼내어도 샘물이 솟아난다는 새로움의 이미지가 우물에 겯들여져 있다. 우물은 생명의 젖줄이다. 우물은 인간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선물이다. 사람은 물을 마시지 않고는 생명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 물을 공급하여 주는 것이 우물이다. 인류의 생활은 물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원시인들은 사냥으로, 방목으로, 어로로, 그들의 유랑 생활을 이어가는 동안 항상 물 있는 곳을 찾아다녔을 것이다. 물 있는 곳에 생활의 근거가 되어 정착했을 것이다. 우물은 자아의 근원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윤동주의 「자화상」을 보자.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리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자화상은 원래 화가가 스스로 자기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뜻하는 말이다. 화가들이 흔히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듯이, 윤동주는 자신의 삶에 대해 반성하면서 시에 이런 제목을 붙인 것일 터다. 이 시에서 우물은 거울과 똑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시적 화자 자신의 근원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시인은 그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신에 대한 사랑과 부끄러움으로 인한 미움 사이에서 계속 갈등하고 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이란 결벽이라고까지 할 만한 시인의 양심과 그 양심을 지키며 살기에는 너무도 어려웠던 일제 강점하의 암울한 현실로 말미암은 것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우물은 공동체 정신이다. 우물을 중심으로 자연 발생적인 부락이 구성되고 공동 생활이 시작되었다. 인류의 사회 생활도, 문화도, 역사도 우물과 더불어 시작되고 우물과 더불어 살아왔다. 그 유구한 세월을 우물은 인류의 목을 축여 주고 마음을 적셔 주고, 정서를 길러 주고 생명을 키워 주었던 것이다. 우물은 끊임없이 자기 갱신을 도모하는 창조의 상징이다. 우물은 언제나 맑고 시원한 물을 가득 담고 있어서 불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퍼서 쓰면 쓸수록 새로운 맑은 물이 고이는 것이다. 언제나 누구나 자유로이 마실 수 있는 개방성을 갖추었다. 그러나 우물은 반드시 두레박이 있어야 물을 퍼 올려 마실 수 있다. 수풍정괘는 의욕과 노력이 있는 자에게는 대성을 약속하는 행운의 괘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흉운의 괘인 것이다. 행운이냐 흉운이냐는 오직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고, 그것을 실천하느냐의 차이로 결정된다. 그래서 정이천은 「대상전」에서 ‘로민권상’이라 했다. 로민(勞民)은 우물의 쓰임을 본받는 것이고, 권상(勸相)은 우물의 베풂을 본받는 것이다. 정(井)은 우물, 우물의 두레박처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형상이다. 가득한 맑은 물도 두레박이 없으면 퍼 올릴 수 없다. 두레박이 있어도 퍼 올리려는 의욕과 노력 없이는 될 수 없다. 우물은 사람의 일상생활에 없을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이것을 퍼올려려는 의욕과 노력을 가지라. 우물은 퍼낼수록 새로운 물이 솟아오르는 것, 자신만의 목마름을 풀어주려 하지 않고 남에게도 봉사해야 한다는 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남의 위에 있는 사람은 부하의 노고를 위로하고 그 목마름을 풀어줄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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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5
  • [김홍제의 목요칼럼] 부끄러움을 아는 교육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는 소설가 박완서(1931-2011)가 1970년대를 배경으로 쓴 단편소설 제목이다. 종로 학원가에서 가이드가 이곳에서는 소매치기를 조심하라고 일본인 단체 관광객에게 일본말로 소근거린다. 중년여성 화자인 나는 일본어를 알아듣고 모처럼 찾아온 ‘부끄러움의 통증’과 그것을 만인이 공유하고 싶은 간절한 심경을 말한다. “처음엔 나는 왜 내가 그 말뜻을 알아들었을까 하고 무척 미안하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몸이 더워 오면서 어떤 느낌이 왔다. 아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그 느낌은 고통스럽게 왔다. 나는 마치 내 내부에 불이 켜진 듯이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나는 각종 학원의 아크릴 간판의 밀림 사이에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는 깃발을 펄러덩펄러덩 훨훨 휘날리고 싶다. 아니, 굳이 깃발이 아니라도 좋다. 조그만 손수건이라도 팔랑팔랑 날려야 할 것 같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고. 아아, 꼭 그래야 할 것 같다. 모처럼 돌아온 내 부끄러움이 나만의 것이어서는 안 될 것 같다.”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것이 소설의 ‘나’뿐만은 아니다. 후안무치, 적반하장, 견리망의. 정작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이 지도층이라면 더욱 서글프다. 맹자가 성선설의 싹에 해당하는 4단(端) 중에 수오지심(羞惡之心)을 밝힌 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맹자는 ‘염치를 모르면 인간이 아니다’라고까지 말한다. ‘유교경(遺敎經)’에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은 금수와 다를 바가 없다’고 했다. 부끄러움은 내적 두려움이고 양심의 발로이다. 창피함은 외적 두려움이다. 부끄러움은 자신에게 부끄러운 것이고 창피한 것은 타인에게 부끄러운 것이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면 세상은 동물의 왕국이 된다. 야만의 시대에는 저항하는 사람을 억압하고 없는 죄를 만들어 가둔다. 검투사처럼 상대방을 죽여야 자신이 산다고 생각한다.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는 케스토스 히마스(Kestos Himas)라는 마법의 허리띠로 어떤 남자라도 유혹할 수 있었다. 그 허리띠는 부끄러움이다. 부끄러움은 매력이고 아름다움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정치인을 믿고 나라를 맡길 수 있는가. 지식이 부족해서 사회가 불안한가.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되는 일은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중요한 일이다. 한동안 인간답다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해본 기억이 있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인간다움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전에는 부모들이 부끄러움을 가르쳤다. 이제 어디서도 부끄러움을 가르치지 않는다. ‘모처럼 찾아온 부끄러움이 나만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것은 교육자들이 되새겨야 할 인간교육의 사명이다. 사람다운 사람을 키우는 것이 교육이라면 모름지기 양심과 연민과 공감을 깨워야 한다. 잠들어 있는 부끄러움을 깨워야 한다. 부끄러움은 모두에게 있다. 교육이 할 일은 그것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학생교육문화원 예술진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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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1
  • [육우균의 周易산책] 기제는 미제로 가는 노정이다(수화기제)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수화기제괘는 64괘 중 가장 음양의 위치가 바르고 서로 호응하는 상태를 갖춘 이상적인 괘다. 기제(旣濟)는 ‘이미 성취하였다’는 뜻이다. 성취한 것을 그 상태로 유지하는데 힘쓰고 있는 시기를 표현한다. 모든 것이 흐뭇하고 만족한 상태에 있다. 이러한 가득찬 상태는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균형을 유지하도록 크게 힘써야 한다. 현상 유지는 전진하는 것보다 더욱 힘드는 일, 교만하거나 해이하는 일이 없어야 행운을 유지할 수 있다. 새로운 일에 착수하거나, 더 큰 성공에 욕심을 부리면 크게 전락할 위험이 있다. 현재의 일을 그대로 한결같이 계속하라.고 『주역』에는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성취를 되돌아보면 기제(旣濟)는 종종 하찮은 느낌이 들곤 한다. ‘내가 이걸 이루려고 젊을 때 그렇게 노력했나’하는 허망함이 밀려온다. 김국환의 노래 「타타타」를 보자. ”산다는 건 좋은 거지/수지맞는 장사잖소./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우리네 헛짚는 인생살이/한세상 걱정조차 없이 살면 무슨 재미/그런 게 덤이잖소.“ 결국 우리가 힘들게 버텨온 한평생이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알몸으로 태어나 옷 한 벌 입고 가는 것이다. 삶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나라 탕왕은 자신의 청동거울에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을 새겨 놓아 나날이 새롭게 태어남을 기뻐했다. 이렇게 허무한 인생에서 우리는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에 있는 싯구에서 위안을 찾아야 한다. 시인은 어느 날 저녁 자신이 머물고 있는 좁은 방에서 외로움과 쓸쓸함에 잠겨 있다. 희미한 전등의 지친듯한 불빛과 그 아래 걸린 낡은 셔츠의 피곤한 그림자가 시인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이렇게 외로움에 잠겨 있는 시인의 눈앞, 바람막이로 친 흰 벽 위에, 마치 스크린에 영상이 지나가듯 그리운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의 가난하고 늙은 어머니와 이제는 남의 아내가 된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이. 추운 겨울날 차가운 물에 무와 배추를 씻고 있을 늙은 어머니의 가난하고 고달픈 삶을 떠올리며, 시인은 자신의 불효를 생각하고 회한과 아픔에 젖는다. 그리고 그의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포구 마을의 집에서 남편과 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고 있을 모습을 떠올리며 쓸쓸함과 외로움을 곱씹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신의 삶 앞에서, 시인은 자신의 드높은 운명을 생각하며 애써 스스로를 위로한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는 것이다. 자신의 외롭고 가난하고 쓸쓸한 삶은, 높은 것을 지향하며 이루고 살도록 하려는 하늘의 뜻에 따른 것이라 생각해 보는 것이다. 프란시스 잼과 도연명,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같은 시인이 쓸쓸하고 외롭게 살아갔듯이, 하늘이 가장 사랑하는 이들을 그렇게 가난과 외로움, 쓸쓸함 속에서 사랑과 슬픔을 느끼며 살아가게 했듯이 말이다. 인생의 허무함을 느낄 때 이 구절을 묵상해보자. 위로의 원천이 된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허망했던 마음이 눈 녹듯 풀어진다. 전문을 읽어볼수록 백석의 절창 중 한 편이라 할 수 있다. 빼어난 명작이다. 우리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 잠재력을 계발하는데 온 힘을 써야 한다. 결국 인생은 잠재력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잠재력의 실현 후에는 허무함, 허망함이 찾아오기에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따라서 기제는 미제로 가는 노정이라 할 수 있다. 「대상전」에 수화기제괘를 보면 ‘물이 불 위에 있는 모습이다. 물이 불 위에 있으면 물은 불을 꺼트린다. 군자는 그런 일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방지한다.’고 되어 있다. 수화기제(水火旣濟)의 ‘기제(旣濟)’는 ‘이미 끝났다’, ‘이미 넘어갔다’, ‘이미 건넜다’, ‘개울을 건넌다’는 의미다. 생명의 완성을 의미한다. 불이 밑에서 물을 끓일 수 있고, 물은 아래로 불을 제어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기제는 생명의 완성인 동시에 생명의 쇠락이다. 물과 불이 각기 자기의 위치를 지니고 있어서 서로 잘 교섭할 수 있고 또 서로에게 쓰임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건물을 세우는 사람들은 그 일에 몇 년이라는 세월을 바치기도 하지만, 결국 언젠가는 그 일을 끝내게 된다. 그리고 그 일을 마치는 순간, 그는 자신이 쌓아올린 벽 안에 갇히게 된다. 건물을 세우는 일이 끝나면 그 삶은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다.(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브리다』 참조) 미완성이 좋은 것이다. 우리말에 ‘거의’란 말이 있다. “밥이 거의 다 됐어!”, 혹은 “거의 다 왔어”라고 말한다. ‘거의’란 말은 기제로 향하는 길의 막바지를 뜻한다. 그래서 이 낱말을 좋아한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직전의 과정, ‘거의’의 과정에 도달했을 때 기쁨과 즐거움은 절정에 오른다. 목적지에 도달하면 기쁨이나 즐거움도 그 과정에 비해 반감된다. 완성 직전.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점 하나 찍기 직전의 기쁨과 짜릿함, 그 비어 있는 마지막 공간이 있을 때, 삶은 새벽별처럼 빛나는 것이다. 화룡점정하는 순간, 즉 완성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 과정에서 느끼는 기쁨과 짜릿함은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수화기제괘의 효사 95를 보면 ‘하느님은 완전보다 불완전, 완성보다 미완성을 사랑하신다’고 되어 있다. 또 효사 64에도 ‘완성의 길에는 항상 위험의 씨앗이 도사리고 있다’고 경계하고 있다. 기제는 처음에는 길하지만 끝은 어지럽다. 완성은 비극이다. 완성은 일종(一終)일 뿐이다. 미완성을 성취하라. 기제는 미제로 가는 노정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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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8
  • [전재학의 교육칼럼] 2024년, ‘갈등’을 ‘공존’으로 ‘함께하는 교육운동’이 필요하다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최근 야당 대표의 테러 사건에서 보듯이 우리 사회 구성원 간의 ‘갈등’이 날로 악화되어 이제는 ‘혐오’로 굳어진 것 같다. 그 배경에는 일찍이 보수와 진보의 거대 양당 체제로 적대적 공생 관계를 유지하던 정치 구조가 이제는 국민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급기야는 중도층의 압도적인 증가를 불러 공고하게 구축된 거대 양당 체제의 불합리한 점들을 깨고 다당 체제로의 변화를 모색하려는 제3지대의 신당창당 흐름은 국민적 관심과 지지를 얻어가면서 정치세력화를 추구하고 있다. 갈등은 늘 우리 사회에 존재해 왔다. 하지만 지금처럼 우리의 정치 구조가 이념적 편가르기에 의한 양분화로 굳어짐에 따라 철지난 낡은 이념 대결로 다시금 복귀하고 있다. ‘좌빨’ ‘빨갱이’로 불리며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공산전체주의 세력으로 내몰린 진보 진영과 ‘극우’ ‘태극기부대’로 불리며 운동권 특권세력의 세대교체를 부르짖는 보수 진영은 이미 서로 돌아올 수 없는 외나무다리를 건너 상호 간에 극한 혐오로 굳어졌고 이의 추종자들은 서로 상대방 죽이기에 나서 백주(白晝)에 테러도 불사한 채 갈등을 악화시키는 정치저급화를 초래하고 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공존’의 필요성이 날로 증대되고 있다. 공존은 양당 체제의 차이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고 상호 인정과 존중으로 갈등을 차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갈등을 차단하거나 해소하려는 대화와 소통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엔 소위 칼자루를 쥔 주인공인 국가 지도자의 독단과 아집으로 아예 대화 자체를 거부하거나 또는 국정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여론을 강력하게 차단하려 검찰통치의 수단을 강화하는 것이 큰 문제다. 하지만 정치적 반대편에 선 야당도 과거 운동권의 특권의식으로 시대의 흐름에 부적절한 한계를 노출하는 것도 또한 문제다. 마치 한반도의 남과 북이 정치적 이념으로 양분되어 상호 체제의 고수와 우월함을 내세워 끝없는 대치 상태에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제 우리는 공존의 개념과 사상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공존은 갈등과 함께 가는 것이다. 갈등 없이는 상호 발전과 성장이 불가하다. 갈등 없는 안정 추구는 획일적인 사상을 부르고 이는 전체주의적 문제해결의 발상을 초래한다. 강력한 법치주의를 지향하는 것도 사실은 긍정적인 민주제도의 명분을 넘어 그 이면에는 인도주의적 해결이나 상호 존중과 배려의 차원을 제거하고 오직 차갑고 냉정한 법의 심판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으로 우려된다. 오늘날 우리의 유⋅초⋅중등학교 체제는 구성원 간의 갈등을 오직 법으로만 해결하려는 ‘교육의 사법화’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는 실로 교육적 관점에서 볼 때 ‘교육의 부재’를 크게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상호 존중과 배려 없이 오직 냉정한 법의 논리로 인간적인 교육행위를 처음부터 차단하는 부정적인 ‘교육 법정주의’는 그래서 기계적이며 반교육적이고 창조적인 인간행위가 배제된 인공지능(AI)의 로봇에 의한 문제해결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공정하고 갈등이 없는 것으로 합리화를 내세우나 결국은 인간의 삶을 무미건조하게 만드는 주범으로 결코 높이 평가할 수는 없는 소위 필요악이라 할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 토론 문화를 시급하게 정착시켜야 한다. 갈등을 관리하는 것은 대화와 소통으로 가는 토론이 적격이기 때문이다. 부모와 이견이 있다고 인연을 끊을 수 없는 것처럼 현재와 같이 학교 구성원들 간에 심한 갈등이 있다고 교육행위를 포기할 수는 없다. 소란이 두려워 갈등의 장을 마련하지 않는 것은 편견이고 이는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유발한다. 새해 들어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는 상대에게서 어짊과 지혜를 발견하는 ‘견인견지(見仁見智)’의 자세로 공존의 교육을 실현하겠다는 신년사를 발표했다. 학교에서는 교사와 학생, 학부모 간에 상호 경청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가장 강력한 공존의 조건은 교류와 소통이다. 상대에 대한 열린 마음과 애정 어린 눈길로 학교에서의 모든 교육활동에 임하자. 이것이 갈등을 해소하고 소통하는 교육이다. 그래서 2024년은 ‘함께 하는 교육 운동’이 더욱 필요하고 중요하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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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7
  • [김홍제의 목요칼럼] 죽음으로 증명해야 하는 슬픔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유명 영화배우가 마약 투약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다가 유서를 남기고 숨졌다. 수사 당시에 비공개 소환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망하기 하루 전까지 두 달 동안 유튜브 동영상과 언론 기사 수가 1만이 넘었다. 그렇게 많은 기사가 모두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판단하기 어렵다. 작년에 4년 동안 학부모 악성 민원에 시달렸고 아동학대 가해자로 신고당해 힘든 생활을 하던 초등학교 교사도 생을 달리했다. 서이초 교사의 죽음은 학부모 민원에 대한 후폭풍을 남겼다. 죽음으로 자신의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시도는 노동자나 교사를 가리지 않고 일어났다. 죽기 전까지 때로는 죽을 때까지 법적 고소로 약자를 괴롭히는 법은 공정의 수호자이기보다 유전무죄를 굳건하게 믿고 있는 특권 계층의 수호자가 된 듯하다. 한국 사회가 죽음으로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사회가 되었다면 우울하고 암담한 일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죽음의 의미를 자신들의 입장에서 왜곡하는 일도 안타깝다. 목숨을 스스로 버려야 관심을 끌 수 있다면 정당한 소통이 차단된 사회다. ‘경찰, 언론, 유튜브’로 이어지는 선정적 보도의 순환 고리는 견고하다. 이익을 얻으려 하는 고리이다. 유튜브는 조회 수, 슈퍼챗(후원)으로 금전적 이익을 얻기 때문에 고리가 더 복잡하다. 언론과 검찰, 경찰, 악성 민원은 약자에 대하여 유독 강하고 잔인하다. 죽음으로 고발하는 억울함은 잠시 이목을 끌다가 사라진다. 마치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듯 억울한 죽음이 끝나면 다른 방향으로 채널을 돌리는 것으로 끝난다.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로 넘어간다. 언론기관과 법 집행기관은 국민을 권력, 범죄,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해 사회가 용인해준 권력기관이다. 그 권력을 자신들의 집단이익을 위해 사용한다면 ‘서울의 봄’에 나온 쿠데타와 무엇이 다른가. 국민 보호를 위해 군인에게 세금을 쓰고 권한을 주었는데 정치적인 야망을 위해 쿠데타를 한 집단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국민을 위해 준 권력을 자신들의 카르텔을 위한 무기로 쓰는 집단에게는 국민이 준 권한을 빼앗거나 감시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권한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 강한 권력을 가진 자에게는 반드시 강한 견제를 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있어야 한다. 속도가 빠른 자동차일수록 더 강하고 효율적인 브레이크가 필요하다. 민주주의의 중요한 도구인 법 집행, 언론, 댓글문화가 사회적 흉기가 되면 안 된다. 언론과 검찰과 사회관계망서비스는 자유와 행복을 위한 도구이자 장치이다. 이 막강한 힘은 사회의 약자와 민주주의를 향상하는 일에 써야 한다. 그것을 감시해야 하는 것이 민주시민의 역할이고 교육의 역할이다. 약자들이 죽음으로 자신의 결백함이나 고통을 증명해야 하는 사회는 억압적 기제가 강한 사회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는 그러한 사회가 아니다. 대중의 성숙하고 올바른 시민의식이 필요하고 여기에 교육의 지속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자정과 자성이 필요하다. 스스로 자정이 어려울 때는 국가와 사회가 강제적인 수단으로 마땅히 제재해야 한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학생교육문화원 예술진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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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4
  • [육우균의 周易산책] '연을 쫓는 아이'에게서 '지천태'의 모습을 본다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대상전」에 지천태괘를 보면 ‘하늘과 땅이 서로 자리를 바꾸어 교섭하는 소통의 모습이다. 천지가 소통(교태)함으로써 보통 사람들의 삶이 풍족해지도록 만든다.’고 되어 있다. 음은 가라앉고 양은 올라가는 성질이 있다. 그래서 땅은 무거워 가라앉고, 하늘은 가벼워 떠오른다. 그런데 지천태괘의 자리를 보면 땅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려 하고, 하늘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려는 접점에 있는 모습이다. 서로 도와 화합하는 모습이다. 즉 하늘과 땅이 서로 만나면 만물이 생성되고 세상이 태평하게 된다. 자연과 문명의 상생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64괘 중 가장 이상적인 괘라 할 수 있다. 갑진년 새해 벽두 지천태괘로 시작한다. 얼마 전 뉴스에서 지구의 자전축이 23.5도보다 조금 더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자전축 때문에 사계절이 생기는데, 최근 연구에 의하면 자전축이 더 기울어진 원인이 바로 70억 인간들이 지하수를 마구 퍼내어 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연 파괴의 모든 원인은 인간에게 있다. 언제부터 지구라는 행성을 인간이 독점해도 된다고 했는가? 걷는 발자국 위에 개미가 한 마리 지나갈 때 무슨 생각이 드나? 이 땅은 인간만이 생활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지구는 이 땅에 사는 모든 생물의 공유지다. 어떻게 인간만이 지구의 회전축이 될 수 있겠는가. 자연의 자원을 인간 마음대로 쓰다 보니 자연이 황폐화되고 결국에는 지구의 자전축이 23.5도보다 더 기울어지는 사태까지 왔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최근 소설인 『꿀벌의 예언』에도 “꿀벌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순간 인간에게 남은 시간은 4년뿐이다.”라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뒤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되었다.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가 되었다. 이제는 인간이 신이 되는 호모 데우스의 시대다. 이 시대에 지구는 망가져 가고 있다. 지구는 인간의 것이 아니다. 지구의 자원을 잠시 빌려 쓰는 것이다. 빌리고 내려놓는 찰나의 순간인 우리의 삶처럼 존재의 순환성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재생의 선순환이 되느냐 파괴의 악순환이 되느냐 하는 중요한 시대에 당대를살고 있는 우리의 몫이 우리가 남기는 유산이 결정된다. ‘지천태(地天泰)’의 ‘태(泰)’ 는 ‘태평’, ‘평화’를 의미한다. 도올에 의하면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것은 해부학적 사실이고, 땅이 하늘의 자리에 있고 하늘이 땅의 자리로 내려가 있는 것은 생리학적 진실이라면서 우리 생명의 생존 자체가 ‘다름’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탁견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는 것도 중력에 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든다. 하늘이 땅의 자리에 있고 땅이 하늘의 자리에 있을 때만, 즉 지천태의 모습이 되어야만, 이 다름을 화해하려는 음양의 화합이 일어나게 된다. 생명은 무차별한 평등이 아니라 다름의 조화다. 작게 가고 크게 온다는 ‘소왕대래(小往大來)’는 조화로운 존재를 약속하는 장엄한 화해인 지천태의 모습을 담고 있다. 흥미롭게도 할레드 호세이니의 장편소설 『연을 쫓는 아이』는 지천태의 정신을 유난히 잘 담아내고 있다. 이 소설은 1970년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1990년대 탈레반의 부상을 배경으로 한다. 또한 주인공 아미르의 여정이 펼쳐지며 인간관계와 연민의 심오한 영향을 강조한다. 이 이야기는 갈등이 개인, 가족, 공동체에 미치는 파괴적인 결과를 탐구하며, 궁극적으로 용서의 변혁적인 힘과 인간 존엄성의 회복을 강조한다. 이러한 주제에 대한 탐구를 통해 소설은 공감과 이해가 보다 평화로운 세상을 조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아미르와 그의 친구 하산의 관계는 인간관계와 연민이 어떻게 인종, 종교, 국적의 장벽을 초월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평화는 다름의 조화"라는 표현은 현대적 맥락에서 해석한다면, 사람들이 서로 다른 생각, 신념, 의견을 분별할 수 있지만 여전히 조화롭게 함께 사는 방법을 찾을 때 진정한 평화가 달성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여기서 차별은 부정적이거나 편견이 있는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관점과 관점을 구별하고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즉, 평화는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인정하며 공통의 기반과 이해를 찾기 위해 노력할 때에만 달성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평화라는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의 모임이라 생각한다. 소랍의 엷은 미소나, 아미르의 환한 미소처럼 이 소설은 서로의 미소를 이해하는 것이 평화의 보물창고를 여는 심오한 열쇠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현대 고전이 된 이 놀라운 소설은 마음을 열고, 마음이 국경을 넘어 통합할 때 펼쳐지는 무한한 잠재력을 숙고하도록 손짓하며, 우리가 공유하는 인류의 실에서 조화가 짜여지는 미래를 예고한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인 소랍의 엷은 미소든, 아미르의 환한 미소든, 그 미소를 서로 바라볼 줄 아는 자세가 더소중하다. 소통은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벽이 없는 마음, 벽을 넘어서는 마음에서 진정한 소통은 이루어진다. 진정한 평화는 그렇게 찾아온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공식 로고송으로 코리아나가 부른 「손에 손 잡고」는 이런 지천태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체 가사 중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란 구절이 지천태와 딱 맞는 말이다. 손에 손을 잡고 자신의 고정 관념을 버리고, 분별심을 버리면 평화는 다름의 조화가 되고 오해의 벽, 분별심의 벽을 넘게 된다. 서로의 손을 잡을 때 공감이 더욱 커지고 벽이 무너지고 지속적인 평화가 정당한 자리를 찾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여기서 잠깐! 샛길로. 『연을 쫓는 아이』의 주인공 아미르의 여정을 따라가며 지천태의 효사를 풀어보자. 지(地)의 자리다. 이 소설에서 아미르와 그의 친구 하산은 인간관계와 연민이 어떻게 인종, 종교, 국적의 장벽을 초월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아미르(Amir)는 하인인 하산(Hassan)과 함께 형제처럼 자란다. 태어난 순간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진 못했지만 그는 하산과 함께 책을 읽고 놀이를 하며 비교적 즐겁게 어린 시절을 보낸다. 효사(초9)와 같이 뿌리가 뒤엉켜 있는 모습이다. 인(人)의 자리다. 어느 날 언덕으로 놀러가는 아미르와 하산을 불량배 아세프 일당이 막아서고 하산의 새총 덕에 두 사람은 위기를 모면한다. 연싸움 대회에서 우승함으로써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었던 아미르는 마침내 대회에서 우승하고 하산은 마지막으로 잘린 연을 쫓아 달려간다. 하산을 찾아나선 아미르는 하산이 아세프 일당에게 붙잡혀서 성폭행당하는 모습을 목격하지만 겁이 나서 나서질 못하고 골목에 숨어버린다. 그후 하산을 보기 괴로운 아미르는 하산을 도둑으로 몰아서 결국 집에서 내쫓아버린다. 효사(93)처럼 태평하던 국면이 기울어진 것이다. 소설가로 성공한 아미르에게 아버지의 친구이자 아미르의 어릴적 정신적 지주였던 라힘 칸이 전화를 걸어온다. 파키스탄으로 라힘 칸을 찾아간 아미르는 라힘 칸에게서 하산이 이복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이 하산의 진짜 아버지이며 아미르와 하산이 형제 사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 평생을 산 아버지의 죄와 어린 시절 하산을 구하지 못한 자신의 비겁함을 속죄한다. 효사(93)의 내면의 성실함을 다하는 아미르의 모습이다. 아미르는 탈레반에게 처형당한 하산의 아들 소랍을 구하러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효사(94)의 모습이다. 이상을 향해 날개를 펄럭이는 모습이다. 성실한 아미르의 속죄의 씻음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 하산에게 진 마음의 빚을 해결한다. 소랍을 파키스탄으로 피신시킨다. 이윽고 아미르는 소랍을 미국으로 입양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천(天)의 자리다. 미국으로 온 소랍은 실어증 증세를 보이며 감정적 반응을 전혀 표현하지 않는다. 어느 날 공원에서 소랍과 함께 연싸움을 하게 된 아미르는 처음으로 소랍의 눈에서 생기를 발견하고 그를 위해 연을 쫓아 달려간다. 효사(상6)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 옛날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었던 아미르가 연싸움 대회에서 우승하고, 잘린 연을 쫓아 달려갔던 하산의 순수했던 표정이 오버랩되는 것은 필자만의 감정일까.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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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김홍제의 목요칼럼] 어린 왕자가 사는 별의 바오바브(baobab)나무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160여 개 언어로 번역되었고 정식 판매 부수가 8,000만 부가 넘는 책이 있다. 1943년 4월 6일 뉴욕에서 영어판과 프랑스어판으로 동시 출간한 그 책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이다. 비행기 고장으로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사가 작은 별에서 우주여행을 온 어린 왕자와 만나서 나누는 이 이야기는 어른을 위한 동화이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은 겨우 집 한 채보다 클까 말까 하다. 내가 사는 아파트 공간 크기가 어쩌면 소혹성 B612호와 비슷할 듯하다. 지구는 어린 왕자가 찾아오는 일곱 번째 별이다. 그 전에 방문한 별은 이상한 어른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명예와 허영과 술과 일에 매몰된 자기 폐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비행사를 만난 어린 왕자가 처음 한 말은 ‘양 한 마리만 그려주세요.’였다. 왜 어린 왕자는 맨 처음 본 사람에게 양을 그려달라는 부탁부터 했을까. 절실함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사는 별을 구하기 위해서다. 그 별의 위기를 막기 위해서다. 무엇이 위기인가. 바오바브나무 씨앗이 너무 큰 나무로 커져서 별이 부서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어린 왕자는 양이 바오바브나무를 먹을 수 있냐고 묻는다. 씨앗에는 이로운 씨앗과 해로운 씨앗이 있다. 바오바브나무는 조금이라도 자라면 영영 없애 버릴 수가 없게 된다. 어린 왕자는 바오바브나무 씨앗이 큰 나무로 자라기 전에 없애지 않으면 나중에 재앙이 온다고 걱정했다. 그것 때문에 어린 왕자는 바오바브나무를 먹어 없애는 양이 필요했던 것이다. 바오바브나무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나무의 종류로 알려져 있다. 나무가 너무 커버리면 작은 별 전체는 나무로 가득 찬다. 나무뿌리가 별을 뚫는다. 별은 작은데 바오바브나무가 많으면 별이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것이다. 어린 왕자는 규칙적으로 신경을 써서 바오바브나무를 뽑아야 한다고 한다. 어린 왕자는 게으름뱅이가 살고 있는 어느 별을 이야기한다. 다른 별에 사는 게으름뱅이가 작은 바오바브나무 세 그루를 무심히 내버려 두었다가 낭패를 당할 것을 걱정한다. 우리도 자기만의 특성을 지닌 작은 행성이다. 외로운 작은 별이다. 자신의 작은 행성에 많은 씨앗들이 날아온다. 씨앗이 장미가 될지 바오바브나무가 될지는 모른다. 자신의 몸과 내면을 망가지게 하는 씨앗은 어린 왕자가 한 것처럼 계속 정리를 해 주어야 한다. 잘못된 만남은 암처럼 속도가 빠르다. 새해가 온다. 자그마한 씨앗 중에도 바오바브나무처럼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거대한 인습이 되는 씨앗이 있다. 바오바브나무 씨앗들이 더 크기 전에 정리하자. 새해에는 나쁜 습관의 씨앗이 커가지 못하게 부지런하게 뽑아내자. 바오바브나무가 소중한 행성에 멋대로 커나가게 둘 것인가. 학교든 자신이든 바오바브나무 씨앗과 같은 파괴적 조짐은 뿌리를 내리기 전에 단호하고 꾸준하게 정리를 해야 한다. 세 그루 바오바브나무를 방치해서 자신의 별을 바오바브나무에게 온전히 내 준 게으름뱅이처럼 되지 않으려면.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학생교육문화원 예술진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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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8
  • [육우균의 周易산책] 현실적 평등의 실현(산택손)–덜어내고 보탬으로 나아가는 길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연말연시다. 구세군의 자선냄비가 눈에 들어오는 계절이다. 자신의 한 해 농사가 잘 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시기다. 산택손괘를 생각나게 한다. 「대상전」에 산택손괘를 보면 ‘산 아래에 못이 있는 모습이다. 못의 흙을 파내어 산을 더 높게 만드는 것이니 자기 몸을 깎아 이상을 드높게 만드는 이미지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나의 몸에 내재하는 분노와 욕망을 덜어내어 버린다. 즉 분노를 억제하고 사욕을 제압한다.’고 되어 있다. ‘산택손(山澤損)의 ‘손(損)’은 ‘扌(손)으로 鼎(솥)의 음식물을 덜어내다’에서 나왔다. 그래서 ‘손해보다’, ‘던다’, ‘덜어내다’, ‘줄이다’의 의미다. 손괘는 연못 바닥의 흙을 준설하여 산의 흙에 보태어 더 높게 만든다는 의미를 가진다. 즉 못이 깊으면 깊을수록 산은 높아진다. 따라서 기쁨으로서 위를 받든다는 의미가 있다. 특히 손(損)은 아래를 덜어 위를 보탠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임시방편이라는 뜻이 아니라, 아래 민중의 것을 빼앗아 자기를 살찌우게 하면 그것은 곧 손이 되는 것이다. 어차피 인간 세상도 집단생활을 하고 국가 사회의 유지를 위하여 세금을 거둬들인다. 손(損)은 현실이다. 덜어내고 보탬으로 나아가는 것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을 덜어내고 보태며 현실적 평등을 실현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성실함과 성찰을 통해 가능하며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현실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힘이다. 덜어냄과 보탬에 대해 정민 교수는 ‘덜어냄은 등잔에 기름이 줄어듦과 같아 보이지 않는 사이에 없어진다. 보탬은 벼의 싹이 자라는 것과 한가지라 깨닫지 못하는 틈에 홀연 무성해진다. 그래서 몸을 닦고 성품을 기름은 세세한 것을 부지런히 하기에 힘써야 한다’고 했다. 또 ‘대숲이 빽빽해도 물을 막지 못한다. 구름은 높은 산을 탓하는 법이 없다. 하루하루를 허투루 살지 않아야 삶의 기쁨이 내 안에 고인다’고 전했다. ‘절미통’이란 말을 아는가. 절미통은 부뚜막 옆에 놓여있는 항아리를 가리킨다. 옛날 어머니들이 밥을 지을 때마다 쌀 한 주걱씩을 절미통에 넣었다가 나중에 난리가 나서 쌀이 떨어졌을 때 요긴하게 쓸 수 있게 만든 항아리다. 절미통에 쌀을 조금씩 덜어놓았던 우리 어머니들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고 했다. 필자가 지금도 존경하는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었던 임완수 선생님(그때 우리 반 급훈은 ‘책임완수’였다)은 점심시간이 되면 빈 도시락 뚜껑을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학생에게 주신다. 그러면 차례로 자기가 싸 가지고 온 도시락에 반찬 한 가지를 그 빈 도시락 뚜껑에 담는다. 반찬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밥을 한 숟가락 덜어놓는다. 그리고 뒤로 전달. 그렇게 한 바퀴 돌고 나면 선생님 책상 앞에 놓은 도시락 뚜껑에 반찬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선생님은 좋겠다, 저렇게 맛있는 반찬을 많이 먹을 수 있으니까’ 생각했다. 선생님은 “자아, 식사 끝났으면 운동장에 나가 놀아라” 하셨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우루루 밖으로 나갔다.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반 아이들 중 점심을 못 먹는 가난한 아이들 세 명을 불러 선생님 책상에 둘러 앉힌다. 그렇게 밥을 같이 먹는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다. 복도에서 유리창으로 그 광경을 본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소문을 낸 것이다. 지금은 안 계시지만 필자의 가슴 속에선 늘 선선한 미소를 짓는 담임 선생님이 살아계신다. 그리고 담임 선생님의 습관 하나. 수업 시간에 설명하시다가 학생이 딴짓을 하거나 잡담을 하면 분필을 세 번 천장으로 던졌다 받곤 하신다. 처음에는 왜 그러나 했는데, 본인의 화를 참고 계신 중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요즘엔 정말 보기 드문 스승이셨다. 자전거 타고 출퇴근하시며 지나가시다가 아이들에게 손짓으로 인사하시던 우리 담임 선생님. 그때 이미 우리 선생님은 산택손괘를 아셨으리라. 아니 모르셨어도 이미 실천하고 계셨던 것이리라. 사회 생활을 하면서 위로 올라가려면 점점 좁아지는 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 문을 통과하려면 자신이 아껴온 것들을 덜어내야 한다. 다 덜어내고 나면 자존심 하나가 남는다. 그 자존심마저 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덜어내고 보태는 방법은 성실함에 있다. 「대상전」에서도 산택손괘는 ‘징분질욕(懲忿窒慾)’이라 했다. ‘분노를 억제하고 사욕을 제압하라’는 의미다. 이것은 인민에 대한 손(損)을 완화시키는 것이다. 군자는 이러한 손괘의 ‘자기 깎음’을 본받아 내 몸에 내재하고 있는 분노와 욕망을 덜어내어 버려야 한다. 겉으로 화려한 장식보다 덜어내어 내면에 깃든 진실한 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여기서 잠깐! 샛길로. 산택손괘의 효사를 보자. 지의 자리다. 산택손의 괘는 모든 일이 형식에 있지 않고 성의에 있음을 말한다. 성의만 있다면 두 개의 대나무 그릇에 곡식을 담은 간소한 제물만으로도 신에게 제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머니가 호스피스 병동에 계실 때 병동 안에 차려진 성당에 미사를 보러 천주교인들이 찾아왔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흘러 나중에 도착한 사람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뒷문에 기대어 서서 기도를 드렸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히 기도드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필자는 그곳 복도를 지나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그의 기도가 이루어졌으면 하고 바랐다.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도 그의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랐는데, 하나님이야 당연히 들어주시지 않겠는가. 그의 성의가 진실되었으므로. 산택손은 덜어내는 것을 상징한다. 그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웃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선의를 수행하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아랫사람이 웃사람을 위하여 받들어 섬기는 일이다. 전자는 자발적인 것이고, 후자는 당위적인 것이다. 인의 자리다. 그러기에 진정한 웃사람에게 보탬이 되는 일은 그 나타난 형식이나 눈에 보이는구체적 이익의 크고 작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참된 성의에 있는 것이다. 천의 자리다. 결국 이 괘는 소아(小我)를 희생하여 대아(大我)를 살리고, 사사로운 이익보다 공공의 이익을 중시함으로써 손(損)하여 도리어 커다란 익(益)을 성취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산택손괘는 뒤가 길한 괘다. 당신이 상대자를 봉사해 줌으로써 장래에 그것이 몇 배로 되돌아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손(損)은 익 (益)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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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6
  • [전재학의 교육칼럼] 청소년의 행복교육을 위한 ‘Future Self’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근래 재직하던 학교의 학생들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런데 당당하게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를 말하기보다는 “꿈이 없어요”,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꿈을 꾸기가 두려워요”, “어차피 이루어지지 않을 건데 꿈을 꾸어 무엇해요?”라는 의외의 대답이었다. 필자는 순간 호흡이 멈추었다. 그것은 청춘의 시기에 어울리는 용기와 도전의 호연지기와는 달리 안타깝게도 청소년들이 지쳐 시들어가고 있었다. 이는 경쟁교육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고정된 틀에 얽매여 살아가는 그들에게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뿐이랴. 무언가 해야 할 행동에 대해서 “생각은 해봤어?” 하고 물으면 “아뇨. 생각하기가 귀찮고 피곤해요.” 또는 “아뇨. 저는 그냥 다른 애들 따라서 하면 되요.” 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왜 생각하기를 기피하고 피곤해 할까? 그리고 자기의 생각 말고 남의 생각만을 따르려고 할까? 그들은 한 마디로 주체적인 판단과 행동으로 자신의 삶을 운영하기보다는 수동적이고 남이 생각하고 마련해 놓은 길만을 편하게 밟고 지나려 한다. 마치 음식점에서 “무엇을 먹을래?”하고 물으면 “아무거나요” 또는 “같은 걸로요”라고 대답하는 것과 유사하다. 독일의 어느 대학 철학과에서 실험을 했다. 학생들에게 백지를 주고 10분 동안 목표를 적어보라고 했다. 그런데 시간이 다 되어도 학생들은 한숨만 쉴 뿐 아무것도 적지 못했다. 교수가 말했다. “여러분의 생명은 1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버킷 리스트를 써보세요.” 그러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학생들이 백지를 채웠다. 교수가 앞서 말한 목표와 버킷 리스트는 비슷한 개념인데 왜 결과가 달랐을까? 이른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상상은 이렇게 단어 하나의 차이에서 엄청난 심리적 반응의 차이를 가져왔다. 요즘 항간에 벤저민 하디의 『Future Self』가 사람들의 이목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는 ‘미래의 나’를 상상해 현재에 접목시킴으로써 현재와 미래가 달라지는 놀라운 혁명을 파생시키는 엄청난 효과를 제시하고 있다. ‘Future Self(미래의 나)’를 통한 교육의 효과는 철저하게 심리학의 이론과 결과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은 ▶행동과 태도를 좌우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 ▶모든 목표는 접근 또는 회피라는 두 가지 범주로 나뉜다. ▶미래의 나와 연결되면 현재를 수용하고 사랑하며 그 가치를 인식할 수 있다. ▶미래의 나와 연결하는 것이 현재의 목적과 의미를 만들어 낸다. ▶장기적인 미래의 나와 연결하면 오늘 더욱 훌륭하고 탁월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로 요약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미래의 나와 연결될 때 행복하고 생산적이며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기대하는 것을 본다. 나아가 어떤 모습을 간절하게 이루고 싶고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하면 그런 생각과 일치한 행동을 하게 된다. 즉, 믿음이 행동과 힘을 끌어내는 원리인 것이다. 사상가이자 시인은 랠프 월도 에머슨은 “당신이 무언가 하겠다고 결심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그 일이 이루어지게 만든다”라고 말했다. 성경에서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라고 말한다. 믿음으로 산을 옮길 수 있다고도 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인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미래를 기대해야만 살 수 있는 것이 인간의 특징이다”고 했다. 전술한 것처럼 청소년들에게 ‘메멘토 모리’의 효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여기에 더해 ‘타임캡슐’의 제작을 통한 효과도 그러할 것이다. 6개월, 12개월, 5년, 10년 후에 열어볼 타임캡슐을 만들어 놓고 지금 ‘미래의 나’가 되도록 한다면 과연 청소년들은 얼마나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삶의 의미를 소유하며 의지를 가지고 살아갈 것인지 그 상상은 헤아리기 어려울 것이다. 청소년들이 꿈이 없고 생각이 없다고 비난하기 전에 현재의 나에 대한 연민과 공감, 사랑하는 능력을 키워 주어야 한다. 아인슈타인은 “상상력이 지식보다 더 중요하다”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들에게 과거의 모습과 미래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은 ‘Future Self’를 간직하고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며 이는 행복교육의 또 하나의 지침이라 믿는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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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4
  • [김홍제의 목요칼럼] 언어 장벽의 무너짐과 한국어의 발전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SK텔레콤은 최근 통화 중 실시간 통역 서비스를 공개했다.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동시 통화가 가능하다. 컴퓨터를 이용해 언어를 번역하려는 시도는 1950년대부터 시작됐다. 현재 가장 널리 사용되는 기술은 인공지능 기반의 인공신경망 기계 번역이다. 통신업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상상한 서비스가 현실화하고 있다며 내년은 서비스 상용화의 원년이 될 것이라 말한다. 인공지능이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있다. 외국어 공포증에서 벗어날 날이 머지않았다. 세계여행을 하면서 한국어로 길을 물어볼 수 있는 때가 올 수 있을까? 이것이 중학생 시절에 처음 영어를 배우며 가졌던 꿈이었다. 영어처럼 한국어 시험에 통과해야 입사가 되고 대입시험과목에 들어가는 날이 올까? 평생 자가용을 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당시로서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꿈이었다. 영어 단어를 외우면서 계속 쏟아지는 새로운 영어 단어가 마치 테트리스 블록처럼 느껴졌다. 영어 단어 시험을 보고 성적에 따라 손바닥을 맞는 체벌을 경험했다. 영어시험은 성장해 가는 길에서도 수문장처럼 곳곳에 서 있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독일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했다. 관사를 외우던 기억밖에 없다. 해외여행을 하면서 영어권 사람들이 편하게 영어로 대화하며 예약하고 여행하는 모습을 보면 부러웠다. 영어를 배워서 외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 싶었다. 군대에서 야전잠바에 영어책을 넣고 다니다 상관에게 기합을 받았다. 한국 국력이 커지면 한국어 교사 수요가 폭발하리라 확신했다. 한국어 해외교육은 기대한 만큼은 확산하지 못했다. 학창시절은 의미도 잘 모르는 팝송을 눈만 뜨면 듣던 시대였다. 파란 눈과 금발머리는 모두 멋있어 보였다. 수십 년이 지나 비틀즈만큼 유명한 그룹이 한국에서 나오리라고 상상조차 못했다. 한국 노래가사를 미국, 남미, 유럽에서 따라 부르는 것을 예상할 수 없었다. 21세기 '비틀스(Beatles)로 불리는 '방탄소년단(BTS)'이 미국, 유럽, 중동, 아시아 등으로 인기가 확산되자 한국어 학습이 확산되고 있다. 2022년 말 기준으로 세계 105개국에 1,348개 대학, 3,000여 개의 각급 기관단체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국제언어연구원에 따르면 세계에 약 3백만 명 이상이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통해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2022년 언어 앱 듀오링고에서 7번째로 가장 많이 공부하는 언어가 한국어다. 2023년 앱이 네 번째 글로벌 언어 보고서를 출시했을 때 한국어는 6위로 뛰어올라 이탈리아어보다 더 인기 있는 언어가 되었다. 이런 날을 보게 된 것만 해도 우리 세대는 가슴이 벅차다. 한국어로 세계여행을 하면서 핸드폰 없이도 길을 물어볼 수 있는 시대에 대한 소망은 여전하다. 1949년 한글타자기를 발명한 공병우 선생님은 이런 말을 남겼다. 한글은 금이요, 로마자는 은이요, 일본 가나는 동이요, 한자는 철이다. 우리의 멋진 한글이 인공지능시대에도 세계로 번성하기를 소망한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학생교육문화원 예술진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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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1
  • [육우균의 周易산책] 수산건의 지혜 – 과학혁명을 벗어나 생활혁명으로 가야 한다.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대상전」에 ‘수산건괘’를 보면 ‘뒤에는 높은 산이 있고, 앞에는 건너지 못할 물이 있는 모습이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전도가 곤란할 때에는 앞으로 나아가기보다는 뒤로 물러나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덕을 쌓는다.’고 되어 있다. ‘수산건(水山蹇)’의 ‘건(蹇)’은 ‘절름발이’, ‘절뚝거리다’는 의미다. 즉 ‘전진하지 못하고 곤경에 빠져 고생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미지가 앞으로 위험한 물(함정)이 있고 뒤로는 높은 산이 막고 있는 형상이다. 이럴 때에는 앞으로 나서지 말고 자신이 이제까지 달려온 시간들을 되새겨 보고,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다. 그렇게 한 다음에 전진하려는 무리 속에 들어가 목적이 같은 사람들끼리 뜻을 모아 이들을 규합하고 연대해야 한다. 그래야 강을 건널 배를 만들든지 다리를 놓을 것 아니겠는가. 그래야 모두가 함께 그 다리로 강을 건널 수 있는 것이다. 도종환 님의 「담쟁이」라는 시가 있다. 수산건괘에 잘 맞는 시라는 생각에 전문을 실어본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절망의 벽은 수산건의 건(蹇)이다. 그 절망의 벽을 어떻게 넘을까? 손을 잡고 연대하여 나머지 수천 개의 잎사귀들을 이끌고 넘는 것이다. 그래서 『주역』에서는 이러한 고난 속에서도 변절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덕을 쌓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담쟁이와 같이 앞으로만 전진하려는 진보의 학문이 있다. 바로 과학이다. 과학은 진보의 종교다. 과학의 가장 큰 병폐가 전진만 알고 멈춤을 모른다는 것이다. 무조건 진보하는 과학은 과연 좋은 것일까? 과학과 결탁된 자본을 위하여 인간이 희생되고 있는 측면이 있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호모 사피엔스』에서 “우리가 과학혁명을 중시하고 그런 쪽으로 역사의 발전 동력을 삼았지만, 결국 다른 모든 동물의 운명을 깡그리 무시할 때만 현대 사피엔스가 이룩한 성취를 자축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즉 우리는 스스로 질병과 기근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물질적 부를 자랑하지만, 그중 많은 부분이 실험실의 원숭이, 젖소, 컨베이어 벨트 위에 있는 병아리의 희생 덕분에 축적된 것이라는 말이다. 갈릴레이가 피사의 사탑에서 자유낙하운동 실험을 했다. 무거운 돌과 종이가 똑같이 떨어진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런데 공기저항 때문에 달리 떨어지는 것이 현실 세계에서의 일이지만 갈릴레이의 실험에서는 진공상태라는 가정하에 실험을 진행했다. 현재까지도 모든 과학 실험은 변수를 통제하기 때문에 현실과는 다른 결과 값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만약 물에서 실험을 한다면 압력, 온도, 색깔 등 똑같이 조건을 만들고 나머지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무수히 많은 변수 값이 존재한다. 그 변수들 때문에 돌연변이가 생긴다. 하늘에 우산을 놓고 그리는 것은 지식인의 몫이고, 우산을 찢어 빛이 들어오도록 하는 것은 시인이나 예술가의 몫이라 했다. 과연 과학의 실험을 믿어야 할까? 그럼 또 전진만 있는 과학의 미래는 어떤 세계일까? 그것은 헉슬리가 1932년에 발표한 디스토피아 소설 『멋진 신세계』 속에 나타나 있다. 과학이 발전하면 생화학 시스템을 조작하여 세로토닌 수치를 높여줌으로써 행복을 지속적으로 만끽하게 해 준다. 지속적 행복은 세로토닌, 도파민, 옥시토신에서만 온다는 믿음을 과학자들은 가지고 있다. 『멋진 신세계』 속에서도 모든 사람은 날마다 ‘소마’라는 약을 복용하는데, 생산성과 효율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합성 마약이다. 결국 과학이 더욱 발전해서 만든 최고의 신세계가 또 다른 괴물의 세상이다. 행복이란 불쾌한 순간을 상쇄하고 남는 여분의 즐거움의 총합이 아니라, 그보다는 개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데서 온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탈 수밖에 없다. 프리츠 오르트만의 소설 『곰스크로 가는 기차』의 줄거리를 간략히 소개한다. 주인공은 멀리 있는 멋진 도시, 곰스크로 가고 싶어 한다. 그의 아버지도, 자신도 어릴 적부터 곰스크로 가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다. 이후 결혼한 주인공은 돈을 탈탈 털어 기차표를 샀다. 아내와 곰스크로 가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못마땅해 한다. 기차가 작은 산골 마을에 잠깐 멈추자, 아내는 금세 활기를 되찾고 주인공의 손을 붙잡고 근처 산으로 간다. 신혼의 달콤함에 빠져 두 사람은 열차를 놓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곰스크 행 열차는 그 마을에 항상 서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열차표도 더 이상 쓸 수 없게 돼 버렸다. 새로운 표를 사기 위해 주인공은 마을에서 머슴살이를 해야 했다. 아내는 아예 그곳에서 살려는 듯이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며 임시로 빌린 방을 잘 꾸몄다. 마침내 주인공은 표를 샀다. 그런데 아내가 임신 중이었다. 주인공은 마을에 더 있기로 한다. 아이를 키우려면 안정된 수입도 필요했다. 주인공은 마지못해 학교 선생님 자리를 물려받는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 둘째 아이까지 생기자, 주인공은 이제 곰스크를 입 밖에 꺼내지도 못한다. 아내와 아이들이 불안해하는 탓이다. 주인공은 안정되어가는 일상이 불편하기만 하다. 자리를 잡을수록 자신의 꿈은 점점 더 흐려질 터였다. 그렇다면 주인공의 인생은 실패한 것일까? 그 답을 늙은 선생님이 준다. “그대가 원한 것이 그대의 운명이고, 그대의 운명은 그대가 원한 것이랍니다.” 주인공은 곰스크로 가지 못했다. 그는 자기가 원치 않은 삶을 살았을까? 아니다. 아내를 위해 곰스크를 포기한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다. 목표한 대로 되지 않아도 인생은 충분히 따뜻하고 살 만한 가치가 있다. ‘최선을 다해 살되, 결과에 초연하라’는 스토아 철학자의 말처럼. 이 소설의 작가인 오르트만의 충고다. “그냥 살아온 대로의 삶을 따뜻하게 받아들이라고” 이 소설의 마지막 단락이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다. “멀리서 곰스크로 가는 열차의 기적소리가 들린다. 주인공은 말없이 아내와 아이들 곁을 지나쳐 다락방으로 올라간다. 주인공은 문을 잠그고 나머지 시간을 누구하고도 말하지 않고 숨어서 보내곤 하는 것이다.” 아마 주인공은 숨을 죽여 울었으리라. 생과 사만 빼고 살아있는 동안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자기가 선택한 결과다. 그러니 남을 탓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자신이 선택한 결과에 대해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주역』에서 말하는 혁명이란 권력의 이동이 아니라 생활의 혁명이다. 이 혁명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자기와 이웃의 삶을 바꾸는 것이다. 과학혁명은 돈이라는 자본과 결탁한다. 그것은 권력의 이동이다. 과학의 미래는 암울하다. 과학에 더 이상 무엇을 바라랴. 인공지능과 생명공학과 컴퓨터. 그 삼위일체의 결과인 인류 생명의 연장, 행복을 위해 생화학적 합성 마약의 투약, 들레즈와 가타리가 말한 ‘기관 없는 신체’인 사이보그 공학 등으로 인류를 생체공학적 존재(안경, 심장박동기, 의료장구, 컴퓨터, 휴대전화 등으로 점철된 인간)로 만드는 일 외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수산건은 앞으로 나아가려고만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제자리에 두고 생각해보라는 거다.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가 하는 일종의 ‘생각 주간(think week)’ 같은 것이다. 자신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성찰해 보라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과 같은 무리들과 연대하여 벽을 뚫을지, 아니면 그만두고 다른 길을 찾을지 선택할 수 있다. 자기 자신과 이웃의 삶을 바꾸는 생활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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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전재학의 교육칼럼] 대한민국의 시대적 과업과 교육개혁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대한민국은 국민소득이 60달러 남짓하던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 산업화를 시작으로 오늘날 국민 소득 3만 5천 달러를 넘는 인구 5천만 이상의 7번째 3050 선진국이 되었다. 이는 2021년 7월 2일 유엔경제총회인 운크타드(UNCTAD)가 195개 회원국 만장일치로 대한민국을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공식적으로 격상시킨 역사적 사건을 불러일으켰다. 지난 1964년 UNCTAD가 설립된 이래 개발도상국이 선진국으로 지위가 변경된 최초의 사례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편의 ‘그림의 떡’이자 내면적 상처가 가득한 대한민국의 모습이 덩그렇게 서있다. 최근 한국 사회는 감춰진 불평등과 불공정이 가감 없이 드러나고 있다. 사회적으로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의 가속화와 함께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잘못이 아닌 정부의 명령에 의해 벼랑 끝에 몰렸지만 한국 사회는 그들에게 최소한의 안전망조차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의 이태원 참사를 보라. 이런 결과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모두가 사회는 없다고 믿으며 각자도생(各自圖生)을 추구한 결과다. 공적 복지 확대 없이 성장만으로도 안전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한국인의 믿음은 바로 한국의 성공 신화가 만든 ‘성공의 덫’이다. 우리 사회의 서글픈 자화상을 보자. 인도주의 의료를 실천하는 슈바이처가 되겠다고 의대에 진학했던 수많은 청년이 모든 국민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공공성에 눈을 감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2차 확산이 본격화되던 2020년 여름의 끝자락에 정부가 지역 의사를 양성하기 위해 의대정원을 늘리겠다고 발표하자 청년 의사들이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위중한 환자들을 앞에 두고 진료를 집단으로 거부했다. 이는 최근에도 마찬가지다. 의대 정원을 늘리겠다는 정부의 정책에 심하게 저항하고 있다. 의사 집단의 극단적인 이기적 행태가 국가발전의 뒷다리를 잡고 있다. 왜 대한민국이 이렇게 되었을까? 누가 이런 대한민국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 최근 대한민국의 위상은 한류의 세계화로 갈수록 높아져 간다. 하지만 이 역시 성공의 덫을 피할 수는 없다. 한국 대중문화의 놀라운 성공 뒤에는 한국 경제 성공 신화의 가혹한 경쟁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극소수만의 성공’이라는 비극을 재생산하고 있다. 그 이면엔 수만 명의 청소년이 성공을 위해 아이돌 연습생이 되어 무지막지한 연습생 생활을 하지만 극소수만이 무대를 밟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바로 승자독식(Winners take all)의 한국 사회가 얼마나 잔인한 경쟁으로 1등 지상주의를 지향하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뿐이랴. 몇 해 전 봉준호 감독의 오스카상 4관왕에 빛나는 '기생충'에 엄청난 찬사와 환호를 보내면서 그 영화가 말하는 한국 사회의 심각한 불평등과 빈곤에는 정작 눈을 감고 있다, 또한 BTS에 열광하면서도 출세와 성공지향적인 교육체제에 짓눌려 꿈을 잃고 살아가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피눈물 나는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지금 한국 사회의 모습이다. 최근에는 52만 여명의 청년들이 단지 기약 없이 ‘쉬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있다. 대한민국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적 성공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빈곤은 만연하고 불평등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노인 빈곤율 1위, 자살률 1위, 초저출산율 1위, 행복지수 OECD 36개국 중 34위, 국민의 60퍼센트가 우울하고 분노하는 이런 선진국이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룬 것인가? 우리는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힘이 있는가? 이젠 우리의 성공을 음미하면서 현재의 비극이 이상한 성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이제 선진국 진입에 합당한 국민적 의식전환을 이루는 것은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업이 되었다. 여기엔 학벌 타파, 조화와 균형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복지정책이 국가 발전의 모델로 개선되어야 한다. 그래야 공무원, 공기업, 대기업에 취직하기만을 목숨 걸고 투쟁하는 한국의 심각성을 극복할 수 있다. 교육입국을 지향하는 한국사회는 새로운 교육 가치의 전환, 뉴노멀(New Normal)과 교육개혁으로 인한 행복교육의 과감한 실행이 필요하다. 이는 늦출 수 없는 국가의 과업이자 교육이 감당해야 할 시대적 운명이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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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7
  • [김홍제의 목요칼럼] 영화 ‘서울의 봄’을 보고 떠오른 분노와 수치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코믹한 대사나 웃긴 장면은 없었다. ‘서울의 봄’(감독 김성수)은 1979년 하나회 신군부 세력의 쿠데타를 소재로 한 영화다. 아들이 꼭 한 번 보라고 해서 아내와 같이 보았다. 영화는 12월 12일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9시간의 상황을 그려냈다. 아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내밀한 부분을 알 수 없었기에 보는 내내 긴박함을 느꼈다. 영화는 끝부분에서 성공한 신군부 사진을 올렸다. 정권 찬탈이후 국가주요직책을 맡았던 이름들이 보였다. 분노와 수치스러움. 그 감정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분노와 수치스러운 감정은 지속되었다. 신군부 세력은 승승장구했고 맞섰던 이들은 비참했다. 그들은 정권을 잡은 이후 대통령과 국회의원 관변단체 회장을 했다. 극중 오국상 국방부장관은 가족과 함께 피신, 우유부단, 유혈충돌을 피하려는 무장해제 지시로 공분을 자아냈다. 노재현 당시 국방부 장관은 말년에 이사장, 회장, 총재의 직함을 달고 살다가 93살에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장태완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은 서빙고분실에서 45일 간 고초를 겪었다. 아들은 할아버지 무덤 옆에서 자살을 했다. 2030 세대 관객이 절반을 넘었다. 전두환은 추징금을 내지 않았고 광주 학살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추종자들에도 반성한 인물은 없다. 장태완(극중 이태신)의 저항은 외롭고 비장했다. 2030 세대는 공정을 부르짖은 세대이다. 억울해서 눈물이 났다는 영화평 후기를 보았다. 1979년을 지나 1980년 봄은 광주의 비극이 있었다. 근현대사의 12.12 사건은 끝이 아니었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 광주의 많은 죽음, 역사적 퇴행은 그 시작이었다. 불의는 어디 시대에나 있다. 콩고물을 위해 국민을 배신한 측근과 자리 지키기에 급급한 군장성과 같은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현실론을 언급하며 현실과 타협하라고 한다. 자기 이익을 생각하며 현실을 합리화하려는 자들은 고려 몽고항쟁, 일제 식민지하, 혼란한 광복 시기, 독재의 시대에도 있었다. 책임은 없고 권한만 챙기려는 이들. 그들이 쿠데타를 막을 수 있는 기회를 막은 자들이다. 전두광보다도 추종자와 국방장관이 너무 미웠다. 한 사람의 힘으로 불의의 시대가 완성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조직 확대, 지역구에 나라 예산 퍼주기, 무고한 흑색선전이 아직도 정치에 있다. 콩고물을 바라고 침묵으로 동조하거나 곡학아세하는 지식인, 지역 이기주의자의 태도에 분노가 일어난다. 그들은 현실을 들먹이며 불의와 일시적 타협을 하라고 한다. 영화처럼 결국은 이기주의로 시기와 대의를 망치게 된다. 불의와 하는 타협은 명백한 불의이다. 전두광(배우 황정민 역)은 말한다.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닙니까?’ 법은 입을 닫고 있다가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자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17년 형을 확정 판결했다. 내란 목적 살인자들은 불과 8개월 후인 1997년 12월 21일 국민화합과 경제난 극복이라는 명분 아래 사면을 받아 풀려났다. 정의보다는 돈, 인성보다는 성공, 과정보다는 결과, 성공하면 모든 것을 용인하는 세상을 가르친 존재는 누구일까. 만약 그 존재가 교육이라면 세상에 이보다 더 부끄러운 것이 있을까.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학생교육문화원 예술진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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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4
  • [육우균의 周易산책] 혁명; 썩은 것을 버리고 새로움을 창조하는 과정(택화혁)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요즘 영화계가 활짝 웃었다. 12.12사태 때의 전두환 군사 쿠데타 사건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 때문이다.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조직하고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전두환 소장은 김재규가 저지른 10.26 사태 때, 보안사령관이란 직책을 십분 활용하여 12.12사태를 일으켜 서울에 따뜻한 민주의 봄이 오는 것을 막았다. 그는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니냐“라고 말하며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혈안이 되었다. 성공하면 혁명이 되는가? 여기 『주역』의 택화혁괘는 말한다. 민중의 협력이 없는 혁명은 허상일 뿐이라고. 혁명은 역사적으로 인류의 진보와 변화를 촉발한 핵심 개념이다. 택화혁괘를 통해 혁명의 본질을 이해하고 혁명이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자. 「대상전」에 택화혁괘를 보면 ‘연못 가운데 불이 있는 모습이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역(歷)을 새롭게 정하고 삶의 기준이 되는 때를 밝힌다.’고 되어 있다. ‘택화혁(澤火革)’의 ‘혁(革)’은 ‘동물의 가죽’이다. 가죽은 무두질을 통하면 거의 새로운 물질이 된다. 고대 문명에서는 가죽으로 의복, 신발, 장갑, 물통, 배낭, 마구, 칼집, 화살통 등등 수 없는 생활 도구와 전쟁 도구가 만들어졌다. 옛날 천민이었던 가파치들이 이런 일을 했다. 가파치가 없었다면 전쟁도 불가했을 것이다. 이처럼 썩은 것을 제거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의미가 변혁, 혁명이다. 택화혁괘는 물과 불이 동거하고 있으니 반드시 개변된다. 물과 불은 서로를 차단시킨다. 물은 불을 끄고, 불은 물을 말린다. 서로를 변혁시키는 것이다. 불의 성질은 위로 올라가는 것이고, 물의 성질은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다. 따라서 서로에게 덤벼들어 서로를 멸식시켜 버린다. 그래서 혁(革)이다. 「대상전」에 보면 ‘치력명시(治歷明時)’라고 되어 있다. 역(歷)은 역(曆)이다. ‘역(曆)을 새롭게 정한다’는 것은 혁명의 상징이다.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다. 이런 택화혁괘와 유사한 문학작품이 바로 최인훈의 필생의 역작인 『광장』이다. 이 소설은 해방 직후에서 6.25 전쟁 이후를 배경으로 남북한의 이념 대립과 그 사이에서 파멸해 가는 ‘이명준’이라는 개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남북한 통일론에 대한 논의가 자유로워지면서 등장했으며, 남북한 이념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논의한 최초의 소설로 꼽힌다. 이 작품의 주인공 이명준의 여정을 따라가 보자. 작품 내의 시간은 타고르 호에서의 이틀뿐이고, 대부분의 이야기는 명준의 회상이다. 남한의 대학생 이명준은 월북한 아버지 때문에 수난을 당하고, 밀실은 넘치나 '광장'이 없는 현실에 좌절하던 명준은 결국 연인 윤애를 남겨둔 채 월북한다. 그러나 북한 또한 표현의 자유가 극히 제한받는, 각종 집단주의를 위한 광장은 있으나 개인의 '밀실'이 없는 곳이었다. 명준은 월북한 아버지의 힘으로 전공을 살려 처음에는 노동신문에 들어갔는데, 이러한 면들에 실망하고 일부러 건설 현장으로 나간다. 노가다 일을 하다 사고로 부상당해 입원했는데, 거기에서 간호 봉사를 온 발레리나 은혜를 만나게 되고 그곳에서 도피하듯 새 연인 은혜와 인연을 맺는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벌어지고, 공산군 고위 장교로 참전한 명준은 친구 태식을 고문하고 친구 태식의 아내가 된 윤애를 성폭행하고 '악마도 되지 못한' 자신을 비웃는다. 성폭행하는 악몽을 꾼다. 낙동강 전선에서 명준은 간호장교로 투입된 은혜를 다시 만난다. 그곳의 한 동굴에서 둘만의 시간을 가지던 중 은혜는 명준의 딸을 가진 것 같다는 말을 하지만, 얼마 안 가 폭격에 비명횡사하고 만다. 이후 포로가 된 명준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중립국 행을 선택하게 된다. 남, 북에 모두 실망한 탓도 있었고, 남한으로 가봐야 빨갱이 취급받으며 계속해서 괴롭힘을 당할 게 뻔하고, 북한으로 가 봐야 남로당계인 아버지는 숙청당할 것이라 명준 자신도 무사할 수 없었다. 명준은 중립국으로 지정된 인도로 향하는 타고르 호에 오른다. 그러나 중립국에서도 자신의 행복을 찾지 못할 것을 갈등하던 명준은 처음에 감시자로 여기며 총으로 쏴버리려고 했던 갑판 위 두 갈매기의 모습에서 은혜와 자신의 딸을 떠올리며 마지막 자유의 공간인 푸른 광장으로 뛰어든다. 결국 명준은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빨갱이도 반동분자도 없는 곳을 선택하는 불행을 자신의 손으로 맞이한다. 남과 북, 혁명으로 인한 새로운 국가는 어디에도 없었다. 남한을 밀실에, 북한을 광장으로 빗대어 남과 북을 모두 경험하고 나서 이명준은 제3국 중립국을 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택화혁괘의 효사(초9)를 보면 혁명의 시기에는 ‘황소 가죽으로 만든 단단한 허리띠로써 그대의 허리를 조르라’고 했다. 자기 자신을 단속하고 자신의 위상을 단단하게 만들어야 함에도 이명준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6.25 전쟁 중에도 은혜를 만나 감정에 치우쳐 행한 자신의 행동 때문에 결국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남과 북, 그리고 중립국에서도 자신의 행복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죽는 장소인 바다가 오히려 이명준에게는 이상향이 되어버린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혁명은 실패했다. 이명준의 실패한 삶은 그가 주변 사람들을 신뢰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진실한 혁명은 정치혁명이 아닌 삶의 혁명, 도덕적 혁명, 의식혁명이어야 한다. 민중의 협력이 없는 혁명은 허상일 뿐이다. 요즘 개봉한 『서울의 봄』이란 영화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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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1
  • [김홍제의 목요칼럼] 미리 안내하기에 담긴 배려의 태도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상대방에게 무엇을 먹을지 묻지 않고 짜장면을 시키면 상대방은 어떤 기분일까. 상대방 의견을 묻지 않는 것은 상대방을 무시하는 행위다. 과거에는 효율성을 위해 일사천리를 중시했다. 민주적 과정보다는 과감한 추진력을 더 높이 샀다. 현대 사회는 민주, 다양, 연계, 복잡, 융합을 향해 가고 있다. 상대와 협의를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통솔자에게 조직 구성원은 자발적 협력을 하지 않는다. 바람직한 통솔자는 구성원에게서 자발성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일사불란한 진행을 위해 제창을 지도하는 지휘자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음악, 문학, 미술, 무용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인 오페라 감독과 같은 지휘자가 필요한 시대이다. 구성원의 협력이 없으면 성공적인 오페라는 기대할 수 없다. 눈을 감고 걸으면 두려움이 생긴다. 눈을 감더라도 앞에 무엇이 있고 어떻게 가야 하나를 설명해 준다면 두려움은 줄어든다. 미리 안내하는 태도는 알 수 없는 미래 상황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이다. 존중해야 하는 분을 모시고 운전을 할 때는 운전자가 미리 목적지와 시간을 안내한다. 진행상황에 대하여 안내를 하면 탑승자는 안심한다. 친절한 여행 가이드는 그날 일정, 해야 할 일, 조심해야 할 일을 상세하게 미리 안내한다. 교육자는 친절한 가이드여야 한다. 존중한다는 것은 미리 알려주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전달만 하면 성과 달성이 어렵다. 대상자들의 지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업무를 추진할 때는 정책을 내려 보내기 전에 취지를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한다. 정책의 과정과 성과를 구성원들과 공유해야 정책은 지속가능성이 높아지고 성과 달성도 가능해진다. 내용을 설명하고 안내할 때 말하는 사람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 듣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하다. 보도 자료를 쓸 때 ‘행사 개최’를 알리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상대방이 그 상황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행사의 배경, 주요 핵심, 특정 일정, 과정에 대한 안내가 중요하다. 말하기 기본요소인 쉬운 말씨, 분명한 내용, 친절한 태도도 고려해야 한다. 학생은 교사의 말 한 마디에 의지를 갖고 나아가기도 하고 깊은 위로를 받기도 하고 새로운 진로를 꿈꾸기도 한다. 교사의 말 한 마디에 수십 년 동안 깊은 상처를 간직하기도 한다. 품격 있는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품격 있는 언어 구사를 배워야 한다. 존중하고 자발성을 이끌어 내는 말하기를 배워야 한다. 교육자는 존중과 배려와 상황에 적합한 말을 해야 한다. 상대방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미리 설명해주기가 작지만 중요하다. 교육정책도 국민에게 배려의 말하기를 해야 한다. 교육 정책들이 뉴스에 오르내린다. 늘봄학교 확대, 사교육비 경감, 공교육경쟁력 강화, 교원평가 유지, 디지털 교과서, 학교시설 복합화, 교원정원 축소, 교육재정 감축과 같은 많은 난제가 있다. 교육당국은 교사와 학부모와 학생에게 정책의 취지, 의도, 과정, 예상 성과에 대해 미리 충분하게 설명해야 한다. 국민은 무시받지 않고 존중받고 싶기 때문이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학생교육문화원 예술진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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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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