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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은자(殷字)의 재발견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한자는 2,000여 년간 동양 문명의 핵심이자 일상의 도구였으나, 우리는 매일 쓰는 글자의 진짜 주인과 얼굴을 잊은 채 살아왔다. 오늘날 흔히 ‘한자(漢字)’라 불리는 이 문자는 사실 한나라 시대에 붙여진 이름일 뿐, 그 기원은 3,500년 전 상(은)나라의 갑골문과 금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적·고고학적 진실은 이 문자의 창제 주체가 바로 우리의 직접적인 선조인 ‘동이족(東夷族)’이었음을 명백히 가리킨다. 하지만 이 위대한 유산의 해석은 오랜 시간 왜곡되었다. 그 오해의 중심에는 서기 100년경 동한(東漢)의 학자 허신(許愼)이 집대성한 『설문해자(說文解字)』가 있다. 허신은 문자학의 권위자였으나,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갑골문과 금문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소전(小篆) 위주의 해석을 내놓았다. 이는 동이족의 풍습과 철학이 담긴 문자를 화하족(한족)의 시각에서 한정 지어 해석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수많은 ‘은자(隱字)’가 본래의 뜻과는 다른 모습으로 굳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특히 한자의 근본 원소 곳곳에는 동이족만의 고유한 생활 양식과 풍습이 짙게 배어 있다. 대표적으로 ‘오랑캐’로 격하된 ‘이(夷)’자는 갑골문에서 ‘큰 활(大+弓)’을 능숙하게 다루는 문명인의 기개를 형상화한 것이다. 또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술을 올리고 춤을 추며 신과 소통하던 제천 행사의 모습, 죽은 이의 영혼을 기리며 옥(玉)을 소중히 여겼던 장례 문화, 그리고 흰 옷을 즐겨 입으며 예의를 갖추어 무릎을 굽히던 생활 방식 등은 갑골문 속에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다. 허신은 이러한 동이족의 문화적 맥락을 알지 못한 채, 이미 변형된 글자 모양만을 보고 억지로 뜻을 짜 맞추는 실수를 저질렀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는 여러 개의 작은 ‘근본 원소’들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정교한 퍼즐이다. 본서는 허신의 권위에 가려진 채 잃어버린 동이족의 지혜를 되찾기 위해 다음의 5가지 엄격한 원칙으로 한자의 비밀을 검증한다. ㅁ원형성: 반드시 갑골문과 금문의 초기 자형에 부합해야 한다. ㅁ역사성: 반드시 동이족의 역사적 사실이나 선진(先秦) 시대의 문헌 기록에 부합해야 한다. ㅁ일관성: 모든 한자 부호의 해석은 일관되어 다른 글자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ㅁ합리성: 자형에서 파생된 뜻이 논리적으로 설명 가능해야 한다. ㅁ계승성: 자형과 뜻의 변화 과정이 시대별로 일관되게 이어져야 한다. 본서의 목적은 명확하다. 2,000년 전 허신의 실수와 화하족 중심의 역사관이 만들어낸 광범위한 오류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다. 왜곡된 해석을 바로잡고 동북아시아 문명의 시원인 동이족의 발자취를 추적함으로써, 비로소 한자라는 거대한 나무의 뿌리인 진짜 ‘은자(殷字)’의 의미를 마주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문자 해석을 넘어, 우리 역사의 잃어버린 원류를 되찾는 엄숙한 여정이다. ■ 한자의 막힌 혈관, ‘홀태’와 ‘모래톱’으로 뚫다 한자(漢字)는 동양 정신의 뿌리이자 고대인의 삶을 담은 그릇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한자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중국의 해설서, 특히 허신의 『설문해자』가 정해놓은 틀에 갇혀 그 역동적인 본래 의미를 잃어버렸다. 이제 우리말의 고유한 감각인 ‘훑다’와 ‘모래톱’이라는 열쇠를 통해, 한자의 잃어버린 원형을 복원해보고자 한다. ■ 勿(물/몰), 깃발이 아닌 ‘훑어내는’ 동작의 형상 허신은 말 물(勿)자를 깃발이 세워진 모습이라 설명했다. 하지만 갑골문과 금문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칼(刀) 사이로 낱알(丶)이 흩어지는 형상, 즉 빗처럼 생긴 도구로 곡식을 ‘훑어내는’ 동작이 선명하게 읽힌다. 본래 ‘털어내다’라는 뜻의 털 몰(勿)이었던 셈이다. 이 흔적은 만물 물(物)자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소의 등 긁개로 털을 훑어내는 모습에서 유래한 이 글자는, 본래 ‘털어내다’라는 동작이 한자의 핵심 자형 원리였음을 증명한다. ■ 賜(사)와 易(이), 모래톱이 내어준 자연의 선물 줄 사(賜)와 쉬울 이(易)의 관계는 우리 민족의 지형적 감각인 ‘모래톱’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賜’는 조개(貝)를 훑어내는(勿) 모습이다. 물가 모래톱에서 조개를 훑어 건져 올리는 풍경을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우리말 ‘모래톱’이다. 지형이 톱니처럼 생기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왜 ‘톱’이라 부르는가. 이는 ‘훑는 도구’인 홀태(톱)의 이미지가 지형에 투영된 결과다. 자연이 거저 내어주는 조개를 줍는 일이니 ‘줄 사(賜)’가 되었고, 물줄기가 지형을 쉽게 바꾸는 모습에서 ‘바꿀 역/쉬울 이(易)’라는 뜻이 파생된 것이다. 이는 우리가 갑골문의 원형 정신을 가장 온전히 계승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 利(리), 벼를 베는 것이 아니라 알곡을 ‘터는’ 유용함 우리는 흔히 이로울 리(利)를 ‘벼(禾)를 칼(刀)로 베는 모습’이라 배운다. 그러나 원형은 벼와 ‘털 몰(勿)’의 결합에 가깝다. 볏단에서 알곡을 훑어내는 ‘홀태질’의 효율성을 표현한 글자인 것이다. 수확의 극대화에서 ‘이롭다’는 뜻이, 홀태 날의 예리함에서 ‘날카롭다’는 뜻이 나왔다. 더 나아가 알곡이 체에 걸러지듯 배출된다는 비유에서 대소변을 뜻하는 의미까지 확장되었다. ‘베는’ 행위보다 ‘터는’ 행위가 농경의 핵심적 이익임을 고대인들은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 우리말로 복원하는 한자의 생명력 중국조차 자의적 해석에 갇혀 잃어버린 한자의 본뜻이, 역설적이게도 우리말의 ‘훑다’와 ‘모래톱’이라는 감각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한자를 중국의 전유물로만 여기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고유의 언어 감각으로 한자를 재해석할 때, 비로소 한자의 막힌 혈관이 뚫리고 고대인의 삶과 지혜가 우리 곁으로 온전히 돌아올 것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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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칼럼] 한·독 미래 교육의 만남: 기술적 수용성과 윤리적 성찰의 글로컬 상생을 향하여
[교육연합신문=김춘식 칼럼]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에 따스한 봄 햇살이 깊숙이 내려앉는 이 계절, 전라남도와 독일 브레멘·니더작센주가 미래 교육이라는 가치 아래 국경을 넘어 손을 맞잡았다. 양국 교육 교류 역사상 최초로 시도되는 전라남도교육청교육연수원(JETI)과 독일 브레멘주교육연구원(LIS)·니더작센주 교육전문가의 교원 공동 연수를 앞두고, 수많은 교육 관계자들과 교사들이 뜻을 모아 연수를 준비해 왔다. 필자 또한 양국 교원들의 교육적 고뇌가 담긴 발제문들을 한국어와 독일어로 다듬고 살피는 과정에 동참하며, 비록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으나 참여한 모든 이들의 마음만큼은 내내 뜨거웠음을 깊이 체감할 수 있었다. 교육의 본질은 결국 아이들을 가슴에 두고 서로의 미래를 위해 함께 투입하는 정성과 시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장의 수많은 손길이 모여 시작된 헌신이 인류 보편의 가치와 맞닿을 때, 우리는 비로소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글로컬(Glocal) 교육의 진정한 서막을 목도하게 된다. 이 역사적인 만남이 뜻깊은 결실을 보게 된 배경에는 교육의 미래를 멀리 내다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 흘린 교육 리더들과 실무자들의 결단과 헌신이 있었다. 전남 담양교육지원청 교육장을 포함한 관계자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혜안, 그리고 대한민국 최초의 한·독 공동 연수라는 장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한 교육연수원장과 연수기획부장, 그리고 교육연구사의 교육적 진심이 맞물려 이 경이로운 무대가 완성되었다. 형식주의와 일회성 퍼포먼스를 과감히 걷어내고, 오직 교사와 학생의 질적 성장을 도모하고자 했던 이들의 교육 철학은 전남이라는 지역적 경계를 넘어 대한민국 공교육 전반에 깊은 시사점을 던진다. 무엇보다 이러한 글로컬 실천의 중심에서 이루어진 양국 교육의 만남은 '기술 수용성'과 '윤리적 성찰'의 화학적 결합이라는 거시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번 교류의 핵심 축인 ‘민주주의 교육’, ‘지속가능발전 교육(ESD)’, 그리고 ‘인공지능(AI)과 디지털 교육’이라는 글로벌 3대 의제는 오늘날 지구촌 전체가 마주한 문명사적 위험이자, 대한민국을 포함한 전 세계 미래 세대가 반드시 풀어내야 할 공동의 숙제다. 주지하다시피 대한민국과 전남의 교육은 인공지능과 디지털 인프라를 빠르게 흡수하고 현장에 적용하는 '기술적 수용성'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반면 독일의 교육은 디지털 전환의 거센 흐름 속에서도 개인정보보호와 데이터 주권, 그리고 강력한 기술 윤리적 문제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며 인간 중심의 철학적 브레이크를 밟아왔다. 따라서 속도를 내며 질주하는 한국의 디지털 교육과, 방향과 안전을 철저히 점검하는 독일의 윤리적 교육이 만난 것은 단순한 친선을 넘어 미래 문명을 선도할 상호 보완적 융합의 계기다. 학교 현장을 방문하는 동안 디지털화가 가져온 편리함 뒤에 숨은 인간 소외 현상, 그리고 알고리즘 의존으로 인한 비판적 사고 저하를 깊이 염려해 온 독일 교사들의 고뇌는 대한민국 교육이 쫓던 속도전에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 반대로 한국의 역동적인 디지털 수업 모델과 담양 관내 학교에서 펼쳐진 생태·역사·진로 중심의 유연한 교육과정은 독일 연수단에게 미래 교육의 실천적 가능성을 명확하게 제시해 주었다. 주목할 만하게도 교류 첫날, 담양의 한 초등학교에서 진행된 '5·18 민주화운동' 주제의 현장 수업은 양국 교육자들에게 깊은 공감대를 선사했다. 5·18의 진실을 세계에 알린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깊이 있게 다룬 이 수업에서, 독일 연수단은 한국 초등학생들의 높은 역사적 문제의식과 성숙한 태도에 큰 감동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의 정체성과 존엄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바로 이처럼 국경을 초월해 인류 보편의 가치를 뜨겁게 공유했던 상생의 현장 속에 존재한다. 이번 한·독 교원 교류는 단순한 지역 단위의 연수를 넘어 대한민국 미래 교육의 거버넌스를 확장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향후 대한민국 교육 정책을 이끌어갈 선구자들과 행정 담당자들에게 세 가지 정책적 제안을 던지고자 한다. 첫째, 글로벌 교육 교류에 대한 지속가능한 행정·재정적 지원의 확대와 제도화가 시급하다. 미래 교육의 도전과제는 개별 지역이나 국가 혼자서 해결할 수 없다. 정책 담당자들은 지역의 우수한 교육 자산이 글로벌 무대와 중단 없이 소통할 수 있도록 전용 예산을 확보하고 수립 절차를 간소화하는 등 국가적 차원의 제도적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둘째, '기술' 중심의 디지털 수용성 정책에서 '철학과 윤리' 중심의 가치 정책으로 확고하게 대전환해야 한다. 스마트 기기 보급률이나 AI 디지털 교과서 도입 속도라는 수치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독일 교육이 보여준 개인정보보호, 데이터 윤리, 그리고 비판적 사고 능력을 기르는 'AI 리터러시'를 대한민국 교육과정 전반에 제도적으로 정착시켜야 한다. 기술을 다루는 테크니션을 넘어, 기술의 시대에 인간다움을 사수하고 다스리는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 정책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셋째, 일회성이자 일방향적인 교원 연수를 넘어선 '글로컬 교육공동체 및 학생 교류 모델'의 정립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 교사들의 만남과 사유의 시간은 반드시 미래의 주역인 학생들의 실질적인 상호 교류로 이어져야 한다. 대한민국의 아이들이 세계의 학생들과 민주주의와 인권, 디지털 윤리를 주제로 함께 토론하고 연대할 수 있도록, 지역의 특수성과 세계의 보편성을 잇는 글로벌 교육 네트워크를 국가 정책 차원에서 밀어주어야 한다. 이번 교류는 현장 리더들의 교육적 혜안과 보이지 않는 실무진의 땀방울이 맞물려 일궈낸 대한민국 미래 교육의 역동적인 출발점이다. 참된 교육은 외형적 형식을 넘어 내실 있는 가치를 채우는 일이며, 교사의 뜨거운 가슴을 통해 아이들의 숨결을 온전히 느껴야 하는 본질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교육정책 담당자들이 이번 한·독 교류가 전남의 대지 위에 가꾸어 놓은 글로컬 상생의 불씨를 이어받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 아이들이 거대한 디지털 해일 속에서도 인권과 민주주의, 그리고 인간 존엄의 가치를 단단히 쥔 채 당당한 세계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대한민국 미래 교육의 문을 활짝 열어주기를 간곡히 기대한다. ▣ 김춘식 동신대학교 에너지경영학과 교수이자 한국독일사학회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의 교육, 독일의 직업교육과 평생교육을 만나다』(포스텍융합문명연구원; 소명, 2025) 등이 있다. ◇ 교육연합신문 논설위원 ◇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 한국독일네트워크(ADeKo) 이사 겸 인문교육위원장 ◇ 2024 칼만 해외석학(독일 연방교육연구부, 아헨공과대학교) ◇ 前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 前 국가교육위원회 미래과학인재양성특별위원회 전문위원 ◇ 前 한국전문대학평가인증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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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백제의 이름, ‘밝은 나라’에서 ‘일본’까지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역사는 과거를 읽는 일이지만, 단지 지나간 세월을 정리하는 작업에 그치지 않는다. 역사는 오늘을 비추고, 내일을 준비하는 거울이 된다. 그래서 국호(國號), 즉 나라의 이름을 새삼 살펴보는 일은 단순한 어원 풀이가 아니다. 이름은 정체성이고, 그 이름에 담긴 뜻은 후대가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큰 자산이 된다. 우리에게 백제는 교과서 속에서 흔히 “한반도 서남부의 소국,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최근 학계와 현장의 발굴은 그 단순화된 서술에 물음표를 던진다. 백제의 범위는 더 넓었고, 영향력은 훨씬 깊었으며, 무엇보다도 그 이름이 지닌 의미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풍부했다. □ 백제라는 이름의 여러 얼굴 문헌과 금석문에는 백제의 국호가 한 가지로만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잘 아는 百濟(백제) 말고도, 광개토대왕비에는 百殘(백잔), 다른 기록에는 十濟(습제), 또 이체자인 佰濟, 남부여(南扶餘)라는 표기도 보인다. 일본에서는 倶太羅(구다라), 百濟(일본식 발음 구다라)라 불렀다. 더 나아가 은유적 표현으로 扶桑, 風谷, 半島라는 지칭까지 섞여 있다. 이처럼 다층적이고 이질적인 표기들이 얽혀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연구자들이 찾는 것은 이들을 하나로 묶어낼 “어원 열쇠”이다. □ ‘백’과 ‘제’, 문자에 담긴 빛과 물 먼저 ‘백(百)’이라는 글자를 보자. 갑골문과 금문에서는 본래 엄지손톱의 흰빛을 그린 상형이었다. 그 흰빛이 곧 밝음, 순수함을 뜻하게 되었고, 후대에 ‘많다’의 의미가 붙으며 수사 ‘백(100)’이 된 것이다. 결국 그 뿌리는 ‘밝음’이었다.([그림 30] ‘百’ 참조) ‘제(濟)’는 본래 제나라의 ‘제(齊)’에서 갈라져 나온 글자다. 물(水) 변이 붙으며 강과 관련된 뜻으로 발전했다. 중국의 제수(濟水)와 연결되고, 후대에는 ‘건너다’, ‘구제하다’라는 뜻이 파생되었다. 그러니 百濟는 문자적으로도 ‘밝음’과 ‘강’이 결합한 이름이라 할 수 있다.([그림 30] ‘濟’ 참조) □ 예군 묘지명에 새겨진 단서 2011년, 중국 서안에서 발견된 한 묘지명은 백제사 연구에 큰 충격을 주었다. 백제계 인물로 추정되는 ‘예군(禰群)’의 묘지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日本餘燼(일본의 여초, 전란 뒤 살아남은 무리)”, “扶桑에 의지하여 죽임을 면했다.” 여기서 ‘일본’을 단순히 열도, 즉 야마토로 읽을 수는 없다. 당시 맥락에서 ‘餘燼(여초)’는 멸망한 나라의 잔민을 뜻했으니, 이는 분명 백제를 가리킨 것이다. 같은 문맥의 ‘扶桑’이 일본 열도를 가리키는 은유로 쓰였음을 고려하면, 문장은 이렇게 읽힌다. “망국 백제의 유민이 일본(扶桑)에 의지하여 살아남았다.” 즉, 묘지명 속 ‘日本’은 ‘해가 떠오르는 곳’이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바로 백제를 지칭했다고 보는 해석이 힘을 얻는다. □ 왜가 일본이 되다, 그리고 백제 『신당서』는 함형 원년(670)에 왜가 국호를 ‘일본’으로 바꾸었다고 기록한다. 『삼국사기』 문무왕 10년조에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하지만 『구당서』와 『신당서』의 서술은 미묘하게 다르다. 한쪽은 “일본이 예전 작은 나라였는데 왜를 병합했다”고 하고, 다른 한쪽은 “왜가 일본을 병합했다”고 전한다. 명칭이 혼용되던 전환기의 혼란이 드러난다. 해석은 이렇다. 백제 멸망 이후 유민과 지배층이 열도 정치에 깊이 편입되었고, 그 결과 670년 국호 ‘일본’ 채택은 백제 재기의 성격을 띠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일본’은 단순히 왜의 새로운 이름이 아니라, 백제인의 자의식이 투영된 이름이었다. □ ‘해의 근본’, 일본과 백제를 잇다 여기서 흥미로운 언어학적 연결고리가 등장한다. 고구려 건국지로 알려진 ‘졸본(卒本)’은 광개토왕비에는 ‘홀본(忽本)’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홀’은 ‘해’를 뜻하는 말과 음운적으로 이어지고, 결국 ‘日(해)의 本(근본)’이라는 ‘日本’의 의미망과 연결된다. 소서노가 졸본계 부여 혈통이라는 전승, 해모수·주몽의 태양적 신화 계보와 겹쳐 보면, ‘해의 근본’이라는 관념이 이미 고대 건국서사 속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백제, 밝음의 나라 우리 고대 국호 가운데는 태양과 광명과 관련된 이름이 많다. 조선(아침 해가 비치는 나라), 부여(벌판, 햇볕이 드는 곳), 고구려(높음, 태양), 발해(큰 바다에 뜨는 해) 모두 그렇다. 백제도 예외가 아니다. 국어학자 양주동은 백제를 ‘밝은 성(城), 곧 광명성’으로 풀이했다. ‘백’은 밝음, ‘제’는 성·고을을 뜻하는 자을(齊)의 음차라는 것이다. 결국 백제는 ‘밝은 땅, 해가 비치는 나라’라는 뜻으로 확장된다. 이는 예군 묘지명의 ‘日本(해의 근본)’ 은유와도 정확히 호응한다. ‘박달’이라는 말도 같은 계열이다. ‘밝-달(양달, 해가 드는 곳)’이 ‘배달’로 발전했고, 이는 곧 밝은 나라, 태양의 나라를 뜻했다. 백제의 이름도 바로 이 ‘밝음’의 계열에 속한다. □ 다양한 별칭과 변이 물론 백제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들도 있었다. ‘十濟(습제)’는 몽골어·튀르크어의 ‘온(온, 열)’과 연결짓는 가설이 있지만, 『수서』의 “백가가 바다를 건너 백제라 부름”과 같은 후대식 설명에 가깝다. ‘남부여(南扶餘)’는 부여계 혈통을 강조한 표기였다. 일본에서 부른 ‘구다라(倶太羅)’는 어원설이 다양하다. ‘큰 나라(쿠) + 타라(땅)’라는 풀이, 공주 구드레 나루에서 비롯되었다는 지명설, 심지어 브리야트계 민족명과의 연결까지 제기된다. 일본어 속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 하찮다)’가 여기서 비롯되었다는 설까지 있지만, 아직 분분하다. □ 맺으며 사료, 금석문, 언어학, 신화적 상징을 종합하면, 백제라는 이름은 결국 ‘밝음, 해, 근본’이라는 의미장으로 수렴한다. 예군 묘지명 속 ‘日本’이 백제를 지칭했다는 해석은, 백제의 멸망 이후에도 그 이름과 상징이 일본 열도 속에서 살아남아 정치적 재편의 원동력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660년 백제가 무너진 뒤, 불과 10년 만에 왜가 ‘일본’으로 국호를 바꾼 사실은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백제인의 기억과 정체성이 열도에 깊이 뿌리내린 사건이었다. 결국 백제는 ‘밝은 땅, 해의 나라’였다. 그 이름 속에는 태양의 힘과 동아시아를 가로지른 백제인의 활력이 함께 담겨 있다. 오늘 우리가 백제를 다시 불러내는 까닭은, 단순히 잊힌 나라를 복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이름에 깃든 빛을 오늘의 자존과 내일의 역량으로 되살려내기 위함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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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칼럼]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삶, 평범을 자처한 삶의 품격과 향기
[교육연합신문=김춘식 칼럼] 인생의 정점에서 스스로를 낮추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앉는 것은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용기다. 성취와 효율만이 강조되는 현대 사회에서 프랑스의 올리비에 드 베랑제(Olivier de Berranger, 1938-2017) 주교가 남긴 삶의 궤적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마무리'의 진정한 의미를 묻는다. 베랑제 주교의 생애는 국경과 지위를 초월한 헌신과 겸손의 결정체였다. 그의 한국 인연은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초청으로 시작되었다. 1976년부터 17년간 '오영진'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살았던 그는 화려한 사목 활동 대신 가난한 이들의 곁을 선택했다. 그는 프라도사제회가 한국 가톨릭교회에 뿌리내리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이 땅의 고통받는 민중과 함께 울고 웃었다. 프랑스로 돌아간 뒤에도 그의 가슴에는 늘 한국이 살아 있었다. 1996년 생드니 교구 주교로 서품된 후, 저서 『서울의 예수, 생드니의 예수』를 통해 두 나라 소외된 이들의 삶을 증언했다. 특히 2000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당시에는 "상대방에게 모멸감을 주지 않고 감싸 안는 인내와 민족애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분단의 상처를 보듬기도 했다. 주교라는 권위의 정점에 도달했을 때조차 그의 마음은 늘 프라도 사제로서 서약했던 초심의 자리를 향했다. 은퇴 후 행보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성찰을 안겼다. 그는 주교의 지팡이를 내려놓고 프라도회가 시작된 리옹의 가난한 동네에서 홀로 숙식을 해결하며 살기를 자청했다. 말년에는 고향 양로원에서 '주교님'이 아닌 친근한 형제로서 노인들과 똑같은 처지로 살다 생을 마감했다. 지위라는 껍데기를 벗어던진 인간 본연의 숭고함을 몸소 증명해 보인 것이다. 이러한 삶은 직위와 명예를 인생의 성적표로 여기는 우리 사회의 고정관념을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내려놓은 '직함'이 아니라, 그 자리에 새롭게 채워진 '삶의 품격'이다. 이는 퇴임 후 과거의 위신을 뒤로하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 아이들과 눈을 맞추는 독일 교육자들의 성숙한 직업 윤리와도 궤를 같이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역시 재직 시절의 위세에 갇히지 않는 용기다. 원숙한 경륜이 박제된 훈장이 아닌, 학교 현장의 실질적인 활력으로 환원되는 선순환의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최근 우리 곁에서도 이러한 가치의 실천을 통해 잔잔한 감동을 주는 사례를 만날 수 있다. 전남 강진교육지원청의 최 모 전 교육장의 행보가 그러하다. 그는 평생을 바친 교단에서 최고의 영예인 교육장까지 역임했으나, 퇴임 후 안락한 원로의 자리를 사양했다. 대신 최근 강진의 외국인 유학생 중심 직업계 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분필을 들었다. 화려한 의전 대신 타국 학생들의 서툰 한국말을 다독이며 교육자의 초심을 현장에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주교에서 평범한 노인으로 돌아간 베랑제 주교처럼, 교육장에서 임시교사로 돌아간 그의 행보는 직함이 사라진 자리에 오직 '스승'이라는 이름의 진정성만을 남겼다.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오히려 세상을 밝히는 이들의 삶은 기술적 풍요 속에서도 우리가 결코 잃지 말아야 할 인간의 품격과 온기가 무엇인지 일깨워준다. 결국 이들이 보여준 삶의 궤적은 우리 사회 전반의 의식 개혁을 요구하는 묵직한 화두다. 전문성이 사장되지 않고 사회적 자산으로 재투입되는 환경, 위계의 옷을 벗고 존재 그 자체로 기여하는 이들이 존중받는 풍토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성숙한 공동체의 모습이다. 이러한 겸손의 선순환이야말로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유산이자, 우리 시대가 마주해야 할 '준비된 기적'이다. ▣ 김춘식 동신대학교 에너지경영학과 교수이자 한국독일사학회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의 교육, 독일의 직업교육과 평생교육을 만나다』(포스텍융합문명연구원; 소명, 2025) 등이 있다. ◇ 교육연합신문 논설위원 ◇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 한국독일네트워크(ADeKo) 이사 겸 인문교육위원장 ◇ 2024 칼만 해외석학(독일 연방교육연구부, 아헨공과대학교) ◇ 前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 前 국가교육위원회 미래과학인재양성특별위원회 전문위원 ◇ 前 한국전문대학평가인증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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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고구려의 국호, 잊힌 이름을 다시 부르다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우리가 역사를 이야기할 때, 늘 아쉬움으로 남는 장면이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라는 말은 교과서에서 너무도 익숙하지만, 사실 그 통일은 제한적이었다. 청천강 이북은 포함되지 않았고, 한반도의 북쪽은 여전히 미완의 공간으로 남았다. 그래서일까. 한국인들의 집단 기억 속에는 언제나 “고구려가 통일했다면 어땠을까?”라는 물음표가 남아 있다. 실제로 몇 해 전 학자 100인에게 “한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사건”을 묻는 설문에서, 가장 많이 꼽힌 답은 ‘고구려의 멸망’이었다. 패배의 순간임에도, 사람들은 고구려에서 한국사의 자존심과 대륙적 상상력을 찾는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 이름, ‘고구려’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그 국호 속에는 어떤 의미가 숨어 있을까? □ 건국 연대, 단순한 연표가 아니다 『삼국사기』는 고구려의 건국을 기원전 37년으로 적었다. 그러나 다른 기록은 다르다. 『신당서』는 고구려가 “한(漢) 대부터 있었고, 지금 900년에 이른다”라고 전한다. 『후한서』, 『삼국지』 등 중국 사서에 고구려는 일찍부터 등장하지만, 신라는 훨씬 늦게 독립된 항목으로 나타난다. 이는 단순히 연표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고구려’라는 이름을 썼는지, 그것이 어떤 문화적 맥락에서 형성되었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 ‘구려’라는 이름의 뿌리 『삼국지』 동이전에는 “구루는 고구려말로 성(邑)이다”라는 흥미로운 구절이 있다. 여기서 ‘구루’는 ‘굴(동굴)’, ‘골짜기’, ‘고을’로 이어지는 어원망을 품고 있다. 즉, 집단이 모여 사는 거처, 곧 성(邑)을 뜻했다. 따라서 ‘구려’는 단순한 고유명사가 아니라, 원래는 ‘성’이나 ‘고을’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였다가 국호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고구려는 ‘높은 성, 위대한 고을’을 뜻하는 이름이었다. □ 졸본이 아니라 홀본, 해의 근본 고구려 건국지로 잘 알려진 곳은 ‘졸본(卒本)’이다. 그러나 광개토왕비(413년)에 기록된 표기는 ‘홀본(忽本)’이다. 시기상 더 원 사료에 가까운 비문을 따른다면, ‘홀본’이 원형일 가능성이 높다. ‘홀’은 문자학적으로 ‘해(태양)’와 연결된다. 그렇다면 ‘홀본’은 곧 ‘해의 근본’, ‘해 뜨는 곳’을 의미한다. 조선의 ‘아사달’, 단군신화의 태양적 국호 전통과도 이어진다. 고구려의 건국지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태양 숭배와 연결된 신성한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 ‘고(高)’ 자의 기원 그렇다면 ‘고(高)’는 무엇일까. 흔히는 다층 성곽의 모양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하지만 갑골문과 금문을 들여다보면, ‘고’는 원래 솟아오름, 남성적 생명력의 상징에서 출발한 글자였다. ‘높다’라는 추상적 의미는 그 뒤에 파생된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높은 성’일 뿐 아니라, 태양의 상징과 맞닿아 있었다. 시조 해모수와 주몽의 성씨 전통이 이 ‘높음’과 ‘태양’을 겹겹이 담아낸 셈이다.([그림 28] ‘高’ 참조) □ 이미 쓰였던 이름, ‘고려’ 많은 사람들이 ‘고려’라는 국호를 왕건이 새로 만든 줄로 안다. 그러나 사실 고구려 시기부터 ‘고려’는 이미 사용되었다. 충주 고구려비(397년)에는 ‘고려 태왕’이 등장하고, 539년의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에는 ‘고려국’이라는 명문이 보인다. 게다가 당·원·명대의 음운서, 그리고 『용비어천가』 표기를 보면 ‘려’는 ‘리’로도 발음되었다. 고려가 곧 ‘고리’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고려’는 단순한 약칭이 아니라, ‘골/홀(해)’ 계열 어원과 연결된 또 하나의 정통 국호였다고 볼 수 있다. □ 북경까지 뻗은 고구려의 무대 덕흥리 고분 벽화(408년)에는 ‘유주자사’와 13군 태수의 이름이 등장한다. 유주는 오늘날 북경 일대다. 이는 고구려가 이미 화북 내륙과 접속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당대 문헌에는 평양성·국내성·한성의 3수도 체제가 등장한다. 그런데 송·명대 지리지에는 평양성을 ‘평주=북경권’으로 비정한 기록이 있다. 이는 고구려의 활동 무대가 단순히 압록강 주변이 아니라, 북경까지 이어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고구려가 수·당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 계승된 국호, 고려 고구려 멸망 후에도 ‘고려’라는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발해, 보덕국, 후삼국의 태봉, 그리고 왕건의 고려까지 이어졌다. 왕건의 고려는 새로운 창조물이 아니라, 고구려 시기부터 이어진 정통 국호의 계승이었다. 조선 건국 때 명나라의 눈치를 보며 채택된 ‘조선’과는 달리, 고려라는 이름은 대륙적 상상력과 민족적 자존을 담은 이름이었다. □ 다시 불러야 할 이름 1948년 제헌 국회에서도 국호는 논쟁거리였다. ‘대한민국’과 ‘고려공화국’이 경쟁했고, 결국 표결로 ‘대한민국’이 채택되었다. 하지만 고려라는 이름을 다시 쓰려 했던 흔적은 분명 남아 있다. 오늘날 통일 한국의 국호를 논의한다면, ‘고려’는 가장 국제성과 역사성을 겸비한 후보일 것이다. 북한 역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을 제안한 바 있다. ‘고려’라는 이름에는 남과 북이 함께 이어받을 수 있는 전통이 담겨 있다. □ 결론: 태양과 높음의 나라 고구려와 고려의 이름에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태양 숭배와 ‘높음’의 상징이 담겨 있다. 그것은 단군의 아사달에서, 해모수와 주몽의 성씨에서, 홀본이라는 건국지에서, 그리고 ‘고려’라는 국호의 지속에서 확인된다. 고구려는 패망했지만, 그 이름은 꺼지지 않았다. 민족의 자존심, 대륙적 상상력, 그리고 태양과 높음의 전통은 여전히 살아 있다. 언젠가 통일의 순간이 오면, 우리는 다시 이 이름을 불러야 할지 모른다. 고려(高麗). 그 이름 속에서 우리는 사라진 전사의 기억과 미래의 자존을 함께 만날 수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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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도깨비, 도철, 독기, 그리고 동이족의 기억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 천 년을 넘어 이어진 전사의 기운 우리가 아는 도깨비는 어떤 모습일까? 뿔이 달린 장난꾸러기, 씨름을 좋아하고 아이들과 어울리며, 때로는 사람과 흥정을 벌이는 친근한 존재로 떠올린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 도깨비의 뿌리는 훨씬 더 묵직하다. 단순한 민속 괴물이 아니라, 고대의 전쟁신과 맞닿아 있는 상징이자, 동이족의 기억을 품은 형상이다. □ 잊힌 이름, 도깨비의 기원 도깨비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갑골문과 청동기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고대 중국의 제기와 무기 위에는 무시무시한 얼굴 문양이 새겨져 있다. 바로 도철(饕餮)이다.([그림 27] 도철 문양 참조) 크고 날카로운 눈, 튀어나온 송곳니, 뿔 달린 이 형상은 보는 이에게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이 도철 문양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전쟁과 제사의 기운을 상징했고, 적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전사의 얼굴이었다. 중국 고대 기록에 따르면, 치우(蚩尤)라는 전쟁의 신은 황제 헌원과 맞서 싸운 전사였다. 그의 투구에는 소머리와 뿔, 날카로운 송곳니가 장식되어 있었고, 이 형상이 훗날 도철 문양으로 정착했다. 즉, 오늘날 우리가 친근하게 부르는 도깨비는, 그 뿌리를 따라가면 전장의 피비린내와 무기, 청동기의 도철에 닿아 있는 셈이다. 두려움의 상징이 시간이 지나 민속 속 귀물로 변신한 것이다. □ 전장의 깃발, ‘독기’ 치우와 동이족은 전쟁터에서 늘 독기(纛旗)라는 깃발을 세웠다. 독기는 단순한 깃발이 아니었다. 깃대 끝에 괴이한 형상을 조각하고, 그 아래에 깃발을 늘어뜨렸다. 사람의 얼굴, 짐승의 머리, 괴물의 형상이 독기의 꼭대기를 장식했다.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바람과 전운을 점치고 적에게 심리적 압박을 주는 장치였다. 깃발은 멀리서도 잘 보였고, 그 위의 괴물 얼굴은 전사의 군기를 고취시키며 적군에게 공포를 심었다. 이 전통은 동북아시아의 여러 민족으로 이어졌다. 몽골군 역시 독기와 유사한 군기를 사용했고, 원나라와 청나라 시대에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전통이 한반도에도 남아 있었다는 점이다. 정조 시기의 궁중 행렬을 담은 「화성능행도」를 보면, 화려한 깃발 행렬 속에 독기가 등장한다. 다만 이 시기의 독기는 전투 장비라기보다 왕권과 의례를 상징하는 장식물로 변해 있었다. 전장의 공포에서 왕실의 권위로, 상징의 의미가 변모한 것이다. □ ‘도깨비’라는 이름의 비밀 그렇다면 ‘도깨비’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 여러 설이 있지만 흥미로운 가설 하나가 있다. 바로 ‘도철(饕餮)’과 ‘귀(鬼)’가 합쳐졌다는 것이다. 도철의 ‘도-’와 귀신의 ‘귀’가 합쳐져 ‘도귀비→도깨비’로 바뀌었다는 해석이다. 즉, 고대 전쟁신의 상징이 민간 신앙 속 귀물 이미지와 섞여 탄생한 이름이라는 것이다. 언어학적으로도 음운 변화 과정을 거치면 충분히 가능한 설명이다. 이 이름의 변천은 도깨비 이미지의 변화를 보여준다. 전투와 무용의 상징에서, 민속 속 장난꾸러기로 변신한 과정 말이다. 도깨비가 씨름을 좋아하고, 쇠붙이를 잘 다루며, 때로는 흥정을 벌이는 성격을 띠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전사의 기운이 민속 속에서 장난기와 융합한 것이다. □ 치우, 전사에서 민속까지 다시 치우로 돌아가 보자. 중국의 역사서에 치우는 종종 ‘반역자’나 ‘야만인’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북방과 한반도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오히려 동이족의 대표적 영웅이었다. 소머리, 뿔, 날카로운 이빨을 장식한 그의 모습은 전쟁의 신, 혹은 강력한 부족의 수장을 상징했다. 이 형상이 도철 문양으로, 독기 장식으로, 그리고 민속 속 도깨비의 이미지로 변해 내려온 것이다. 결국 도깨비는 단순한 민속 괴물이 아니라, 동이족 전사의 기억을 담고 있는 문화적 유산이다. 패자의 기록이자 동시에 살아남은 자의 기억인 셈이다. □ 전사의 기억, 민족의 추억 오늘 우리가 도깨비를 이야기할 때, 흔히 장난꾸러기나 민속 신앙의 대상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속에는 잊힌 전사의 기억이 숨어 있다. 갑골문과 청동기에 새겨진 도철, 전쟁터의 독기, 그리고 치우의 형상이 그것이다. 이 기억은 수천 년의 시간을 건너 민화 속 도깨비로, 민담 속 장난꾸러기로, 아이들의 놀이 친구로 남았다. 그 과정에서 두려움은 친근함으로, 공포의 전사는 민속의 장난꾸러기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뿌리를 알면 도깨비는 단순히 웃음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동이족의 기억을 잇는 상징이고, 민족의 추억을 담은 문화적 자산이다. □ 맺으며 도깨비, 도철, 독기. 세 단어는 서로 다른 듯하지만, 모두 동이족의 흔적을 품고 있다. 도깨비를 연구하는 일은 단순한 민속학이 아니다. 그것은 패자의 기록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기억을 복원하는 일이다. 오늘 우리가 도깨비를 만날 때, 씨름판에서 씨름을 벌이는 장난꾸러기를 떠올리든, 민화 속에서 금빛 방망이를 휘두르는 귀물을 떠올리든, 그 뒤에 겹겹이 쌓인 전사의 기억을 함께 떠올려 볼 일이다. 도깨비는 그저 웃음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천 년을 넘어 이어진 전사의 기운이기 때문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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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赤, 흙으로 덮지 못한 ‘거대한 불’의 생명력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한자 붉을 적(赤)을 보며 흔히들 땅의 빛깔이나 흙(土)을 떠올린다. 한자의 자형이 변하면서 아랫부분이 ‘흙 토(土)’의 모양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자 해석의 경전이라 불리는 허신의 『설문해자』조차 뜻은 ‘불’이라면서도 글자는 ‘흙’으로 적는 오류를 범했다. 그러나 갑골문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면, 그 속에는 흙이 아닌 활활 타오르는 ‘거대한 불’이 살고 있다. ■ ‘사람을 태우는 형상’이라는 오해를 넘어서 적(赤)의 원형은 사람(大)과 불(火)이 합쳐진 모습이다. 이를 두고 혹자는 "사람을 불에 태우는 제사 의식"이라거나 "죄인을 벌하는 모습"이라고 공포스럽게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大’는 사람이라기보다 ‘크다’는 의미의 형용사적 상징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즉, 적(赤)은 이름 모를 들꽃의 붉음이 아니라, 세상을 삼킬 듯 일어나는 ‘커다란 불길’ 그 자체를 형상화한 글자다. ■ 갓 태어난 아기가 ‘적자(赤子)’인 이유 이 글자가 단순한 색깔을 넘어 뜨거운 에너지를 상징한다는 증거는 우리 삶 속에 녹아 있다. 갓 태어난 아기를 적자(赤子)라고 부르는 것이 대표적이다. 흔히 핏덩이라 붉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본래 의미는 아기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하고 생기 있는 불의 기운을 일컫는다. 차가운 주검과 대비되는, 생명이라는 뜨거운 에너지가 곧 ‘적(赤)’인 셈이다. ■ 불길이 겹치고 번지며 탄생한 글자들 ‘큰 불’이라는 원리를 이해하면 파생된 글자들의 맥락도 선명해진다. 빛날 혁(赫): 붉은색(불길)이 두 개 모여 있다. 불길과 불길이 만나 세상을 더욱 환하게 비추는 찬란한 에너지를 뜻한다. 쏠 석(螫): 벌레에 쏘여 피부가 불꽃에 데인 듯 붉고 뜨겁게 부어오르는 고통을 묘사한다. 이처럼 赤은 정적인 색채가 아니라 동적인 에너지의 분출을 담고 있다. ■ 오해의 흙을 털어내고 본질의 불을 보다 글자의 모양이 변하면서 본래의 뜨거움은 ‘흙’이라는 차가운 껍데기에 갇혀버렸다. 땅의 색이 붉어서 赤이 된 것이 아니라, 불의 열망이 글자가 된 것이다. 우리가 한자의 자형 변화 속에 숨겨진 원형을 찾아내는 이유는 단순히 옛 지식을 뽐내기 위함이 아니다. 무미건조하게 외우던 글자 속에서 고대인들이 느꼈던 생명의 박동과 불길의 역동성을 다시 발견하기 위함이다. 흙 속에 파묻혔던 ‘큰 불’의 정신을 복원할 때, 우리의 언어생활도 비로소 뜨거운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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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赤, 흙으로 덮지 못한 ‘거대한 불’의 생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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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지금, 깨달을 결심 - 경동대학교 권오만 교수
- [교육연합신문=편집국] 경동대학교 건축디자인학과 권오만 교수가 신작 산문집 『지금, 깨달을 결심』(제이브리즈북스刊)을 출간했다. “비우러 갔다, 채워져 돌아온 스무날” 우리는 저마다의 소란을 등에 지고 살아간다. 잠시 멈추고 싶을 때조차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보다 무엇을 더 채워야 하는지에 익숙하다. 『지금, 깨달을 결심』은 작은 산사에서 보낸 스무 날의 기록이다. 산사 지킴이 강아지 ‘댕구(본명 자비)’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저자는 삶의 속도를 늦추고, 비움 속에서 오히려 채워지는 마음의 풍경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이 책은 바쁜 일상 속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잠시 멈춰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건네는 치유와 성찰의 산문집이다. 대학교수로 재직하며 쉼 없이 달려온 저자는 안식년이라는 뜻밖의 쉼을 마주하며, 무엇을 더 채울 것인가보다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질문을 안고 향한 곳은 경주 단석산의 작은 산사 ‘신선사’. 화려하고 편리한 도시의 삶을 잠시 내려놓은 채 머문 스무 날의 시간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자신을 다시 만나가는 과정이었다. 이번 산문집에서 저자는 산사에서 불을 지피고 스스로 밥을 해먹어야 하는 소박한 일상과 작은 노동, 계절의 변화, 그리고 산사 지킴이 강아지 ‘댕구’와의 교감을 통해 삶의 본질을 들여다본다. 채움보다 비움, 익숙함보다 낯섦, 경쟁보다 멈춤이 건네는 의미를 섬세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냈다. 특히, 말없이 곁을 지켜준 댕구와의 시간은 단순한 반려의 기억을 넘어 삶의 태도를 되돌아보게 하는 사색의 계기가 된다. 순간의 욕심보다 만족을, 앞서가기보다 함께 걷는 시간을 통해 저자는 일상의 소중한 깨달음을 발견해간다. 환경계획과 조경학을 전공한 권 교수는 자연과 인간의 공존, 지속 가능한 환경디자인에 대한 연구와 실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또한, KBS 「북한산은 살아있다」, SBS 「월악산」 등 자연·환경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한 환경·생태 전문가이기도 하다. 책은 경쟁과 속도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멈춰도 괜찮다”는 조용한 메시지를 전한다. 반복되는 일상과 관계 속에서 잊고 지내던 자신을 다시 바라보며, 삶의 방향을 바꾸는 ‘쉼’의 가치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권오만 교수는 “이 책은 무언가를 더 얻기 위한 기록이 아니라,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를 묻는 시간의 기록”이라며 “익숙한 삶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만의 속도로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정호승 시인, 김우종 문학평론가, 김승진 선장, 서경덕 교수 등 각계 인사들도 추천사를 통해 이 책이 전하는 쉼과 성찰의 의미에 공감과 지지를 보냈다. ▣ 저자 권오만 경동대학교 메트로폴 캠퍼스 건축디자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자연과 인간의 공존, 지속 가능한 환경디자인에 대한 실천적·학문적 탐구를 이어가고 있다. 산학협력단장을 역임하며 교육과 연구, 현장을 아우르는 다양한 활동을 수행해 왔다. 자연과학과 문학, 사유와 실천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는 현재 창작산맥 문학회 제6대 회장으로, 윤동주의 문학정신을 계승하며 문학의 사회적 역할과 실천적 가치를 확장하는 데 힘쓰고 있다. 문학이 현실과 분리된 언어가 아니라 삶과 사회 속에서 작동하는 힘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꾸준한 창작과 강연을 이어가고 있다. 2022년 「두물머리」, 「해남 도솔암」, 「샛별」로 창작산맥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하였고, 저서로는 『신선 두꺼비가 지키는 전통 사찰 이야기』, 『디자인과 철학의 공간 우리 궁궐』, 『잊혀진 문화유산 해자와 풍류 이야기』 등이 있다. 2026년 대한건축학회 특별상 소우(윤장섭) 저작상을 수상하였다. 이번 산문집 『지금, 깨달을 결심』은 안식년의 시간 속에서 산사에 머물며 경험한 고요와 불편, 그리고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한 내면의 질문들을 담아낸 기록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채움보다 비움, 익숙함보다 낯섦 속에서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삶의 본질과,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결심에 대해 잔잔한 물음표를 던진다. ■ 소개 영상 https://youtu.be/NczaMqd8cx0?si=S-GxTd9q6IHcJG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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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지금, 깨달을 결심 - 경동대학교 권오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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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은자(殷字)의 재발견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한자는 2,000여 년간 동양 문명의 핵심이자 일상의 도구였으나, 우리는 매일 쓰는 글자의 진짜 주인과 얼굴을 잊은 채 살아왔다. 오늘날 흔히 ‘한자(漢字)’라 불리는 이 문자는 사실 한나라 시대에 붙여진 이름일 뿐, 그 기원은 3,500년 전 상(은)나라의 갑골문과 금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적·고고학적 진실은 이 문자의 창제 주체가 바로 우리의 직접적인 선조인 ‘동이족(東夷族)’이었음을 명백히 가리킨다. 하지만 이 위대한 유산의 해석은 오랜 시간 왜곡되었다. 그 오해의 중심에는 서기 100년경 동한(東漢)의 학자 허신(許愼)이 집대성한 『설문해자(說文解字)』가 있다. 허신은 문자학의 권위자였으나,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갑골문과 금문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소전(小篆) 위주의 해석을 내놓았다. 이는 동이족의 풍습과 철학이 담긴 문자를 화하족(한족)의 시각에서 한정 지어 해석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수많은 ‘은자(隱字)’가 본래의 뜻과는 다른 모습으로 굳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특히 한자의 근본 원소 곳곳에는 동이족만의 고유한 생활 양식과 풍습이 짙게 배어 있다. 대표적으로 ‘오랑캐’로 격하된 ‘이(夷)’자는 갑골문에서 ‘큰 활(大+弓)’을 능숙하게 다루는 문명인의 기개를 형상화한 것이다. 또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술을 올리고 춤을 추며 신과 소통하던 제천 행사의 모습, 죽은 이의 영혼을 기리며 옥(玉)을 소중히 여겼던 장례 문화, 그리고 흰 옷을 즐겨 입으며 예의를 갖추어 무릎을 굽히던 생활 방식 등은 갑골문 속에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다. 허신은 이러한 동이족의 문화적 맥락을 알지 못한 채, 이미 변형된 글자 모양만을 보고 억지로 뜻을 짜 맞추는 실수를 저질렀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는 여러 개의 작은 ‘근본 원소’들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정교한 퍼즐이다. 본서는 허신의 권위에 가려진 채 잃어버린 동이족의 지혜를 되찾기 위해 다음의 5가지 엄격한 원칙으로 한자의 비밀을 검증한다. ㅁ원형성: 반드시 갑골문과 금문의 초기 자형에 부합해야 한다. ㅁ역사성: 반드시 동이족의 역사적 사실이나 선진(先秦) 시대의 문헌 기록에 부합해야 한다. ㅁ일관성: 모든 한자 부호의 해석은 일관되어 다른 글자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ㅁ합리성: 자형에서 파생된 뜻이 논리적으로 설명 가능해야 한다. ㅁ계승성: 자형과 뜻의 변화 과정이 시대별로 일관되게 이어져야 한다. 본서의 목적은 명확하다. 2,000년 전 허신의 실수와 화하족 중심의 역사관이 만들어낸 광범위한 오류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다. 왜곡된 해석을 바로잡고 동북아시아 문명의 시원인 동이족의 발자취를 추적함으로써, 비로소 한자라는 거대한 나무의 뿌리인 진짜 ‘은자(殷字)’의 의미를 마주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문자 해석을 넘어, 우리 역사의 잃어버린 원류를 되찾는 엄숙한 여정이다. ■ 한자의 막힌 혈관, ‘홀태’와 ‘모래톱’으로 뚫다 한자(漢字)는 동양 정신의 뿌리이자 고대인의 삶을 담은 그릇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한자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중국의 해설서, 특히 허신의 『설문해자』가 정해놓은 틀에 갇혀 그 역동적인 본래 의미를 잃어버렸다. 이제 우리말의 고유한 감각인 ‘훑다’와 ‘모래톱’이라는 열쇠를 통해, 한자의 잃어버린 원형을 복원해보고자 한다. ■ 勿(물/몰), 깃발이 아닌 ‘훑어내는’ 동작의 형상 허신은 말 물(勿)자를 깃발이 세워진 모습이라 설명했다. 하지만 갑골문과 금문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칼(刀) 사이로 낱알(丶)이 흩어지는 형상, 즉 빗처럼 생긴 도구로 곡식을 ‘훑어내는’ 동작이 선명하게 읽힌다. 본래 ‘털어내다’라는 뜻의 털 몰(勿)이었던 셈이다. 이 흔적은 만물 물(物)자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소의 등 긁개로 털을 훑어내는 모습에서 유래한 이 글자는, 본래 ‘털어내다’라는 동작이 한자의 핵심 자형 원리였음을 증명한다. ■ 賜(사)와 易(이), 모래톱이 내어준 자연의 선물 줄 사(賜)와 쉬울 이(易)의 관계는 우리 민족의 지형적 감각인 ‘모래톱’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賜’는 조개(貝)를 훑어내는(勿) 모습이다. 물가 모래톱에서 조개를 훑어 건져 올리는 풍경을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우리말 ‘모래톱’이다. 지형이 톱니처럼 생기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왜 ‘톱’이라 부르는가. 이는 ‘훑는 도구’인 홀태(톱)의 이미지가 지형에 투영된 결과다. 자연이 거저 내어주는 조개를 줍는 일이니 ‘줄 사(賜)’가 되었고, 물줄기가 지형을 쉽게 바꾸는 모습에서 ‘바꿀 역/쉬울 이(易)’라는 뜻이 파생된 것이다. 이는 우리가 갑골문의 원형 정신을 가장 온전히 계승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 利(리), 벼를 베는 것이 아니라 알곡을 ‘터는’ 유용함 우리는 흔히 이로울 리(利)를 ‘벼(禾)를 칼(刀)로 베는 모습’이라 배운다. 그러나 원형은 벼와 ‘털 몰(勿)’의 결합에 가깝다. 볏단에서 알곡을 훑어내는 ‘홀태질’의 효율성을 표현한 글자인 것이다. 수확의 극대화에서 ‘이롭다’는 뜻이, 홀태 날의 예리함에서 ‘날카롭다’는 뜻이 나왔다. 더 나아가 알곡이 체에 걸러지듯 배출된다는 비유에서 대소변을 뜻하는 의미까지 확장되었다. ‘베는’ 행위보다 ‘터는’ 행위가 농경의 핵심적 이익임을 고대인들은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 우리말로 복원하는 한자의 생명력 중국조차 자의적 해석에 갇혀 잃어버린 한자의 본뜻이, 역설적이게도 우리말의 ‘훑다’와 ‘모래톱’이라는 감각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한자를 중국의 전유물로만 여기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고유의 언어 감각으로 한자를 재해석할 때, 비로소 한자의 막힌 혈관이 뚫리고 고대인의 삶과 지혜가 우리 곁으로 온전히 돌아올 것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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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은자(殷字)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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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구교정 동인천중 교장, '학교 성장의 구조와 실천' 출간
- 〔교육연합신문=이유연 기자〕 학생과 교사, 학부모와 지역사회가 함께 성장하는 학교의 모습을 담은 교육 전문서 『학교 성장의 구조와 실천』이 출간됐다고 동인천중학교 구교정 교장이 5월 21일 밝혔다 구교정 교장과 함께 고흔석, 전인선, 신봉철, 이창열 저자가 공동 집필했으며, 미래교육 시대 학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학교 성장의 의미를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 최근 교육 현장에서는 단순한 학업 성취를 넘어 학생의 삶과 성장, 관계와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인공지능(AI)과 디지털 전환, 기후 위기, 사회 변화 등 빠르게 달라지는 시대 속에서 학교의 역할 역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학교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공간을 넘어 학생이 스스로 질문하고 탐구하며 자신의 삶과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돕는 공간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저자들은 이번 책에서 학교 성장을 단순한 수상 실적이나 평가 결과 중심으로 바라보는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동안 학교의 성장은 눈에 보이는 결과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실제 학교 안에서는 학생과 교사가 함께 배우며 만들어 가는 관계의 변화와 학교 문화의 성장, 교실 속 작은 실천들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학교 성장의 중요한 의미로 바라보며, 학교를 살아 있는 교육공동체로 설명하고 있다. 교육계 전문가들의 추천도 이어졌다. 손민호 인하대학교 교수는 “미래교육의 방향과 학교 현장의 실천을 담아낸 책”이라고 평가했으며, 최재광 국가교육위원회 전문위원은 “학교 현장을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전했다. 김미란 한국교육개발원 석좌연구위원은 “학교 성장의 실제와 철학을 함께 담아낸 의미 있는 저서”라고 평가했다. 임상순 평택대학교 교수는 “학교 현장의 생생한 변화와 고민을 담아낸 책”이라고 밝혔으며, 유석형 인천광역시교육청 정책기획조정관은 “성과 중심이 아닌 과정과 변화 중심으로 학교 성장을 바라본 새로운 시도”라고 평가했다. 저자들은 “학교 성장은 특정한 결과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학생과 교사, 학부모, 지역사회가 함께 배우고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다”며, “이번 책이 미래교육과 학교의 새로운 가능성을 고민하는 교육 현장에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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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구교정 동인천중 교장, '학교 성장의 구조와 실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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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칼럼] 한·독 미래 교육의 만남: 기술적 수용성과 윤리적 성찰의 글로컬 상생을 향하여
- [교육연합신문=김춘식 칼럼]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에 따스한 봄 햇살이 깊숙이 내려앉는 이 계절, 전라남도와 독일 브레멘·니더작센주가 미래 교육이라는 가치 아래 국경을 넘어 손을 맞잡았다. 양국 교육 교류 역사상 최초로 시도되는 전라남도교육청교육연수원(JETI)과 독일 브레멘주교육연구원(LIS)·니더작센주 교육전문가의 교원 공동 연수를 앞두고, 수많은 교육 관계자들과 교사들이 뜻을 모아 연수를 준비해 왔다. 필자 또한 양국 교원들의 교육적 고뇌가 담긴 발제문들을 한국어와 독일어로 다듬고 살피는 과정에 동참하며, 비록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으나 참여한 모든 이들의 마음만큼은 내내 뜨거웠음을 깊이 체감할 수 있었다. 교육의 본질은 결국 아이들을 가슴에 두고 서로의 미래를 위해 함께 투입하는 정성과 시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장의 수많은 손길이 모여 시작된 헌신이 인류 보편의 가치와 맞닿을 때, 우리는 비로소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글로컬(Glocal) 교육의 진정한 서막을 목도하게 된다. 이 역사적인 만남이 뜻깊은 결실을 보게 된 배경에는 교육의 미래를 멀리 내다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 흘린 교육 리더들과 실무자들의 결단과 헌신이 있었다. 전남 담양교육지원청 교육장을 포함한 관계자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혜안, 그리고 대한민국 최초의 한·독 공동 연수라는 장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한 교육연수원장과 연수기획부장, 그리고 교육연구사의 교육적 진심이 맞물려 이 경이로운 무대가 완성되었다. 형식주의와 일회성 퍼포먼스를 과감히 걷어내고, 오직 교사와 학생의 질적 성장을 도모하고자 했던 이들의 교육 철학은 전남이라는 지역적 경계를 넘어 대한민국 공교육 전반에 깊은 시사점을 던진다. 무엇보다 이러한 글로컬 실천의 중심에서 이루어진 양국 교육의 만남은 '기술 수용성'과 '윤리적 성찰'의 화학적 결합이라는 거시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번 교류의 핵심 축인 ‘민주주의 교육’, ‘지속가능발전 교육(ESD)’, 그리고 ‘인공지능(AI)과 디지털 교육’이라는 글로벌 3대 의제는 오늘날 지구촌 전체가 마주한 문명사적 위험이자, 대한민국을 포함한 전 세계 미래 세대가 반드시 풀어내야 할 공동의 숙제다. 주지하다시피 대한민국과 전남의 교육은 인공지능과 디지털 인프라를 빠르게 흡수하고 현장에 적용하는 '기술적 수용성'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반면 독일의 교육은 디지털 전환의 거센 흐름 속에서도 개인정보보호와 데이터 주권, 그리고 강력한 기술 윤리적 문제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며 인간 중심의 철학적 브레이크를 밟아왔다. 따라서 속도를 내며 질주하는 한국의 디지털 교육과, 방향과 안전을 철저히 점검하는 독일의 윤리적 교육이 만난 것은 단순한 친선을 넘어 미래 문명을 선도할 상호 보완적 융합의 계기다. 학교 현장을 방문하는 동안 디지털화가 가져온 편리함 뒤에 숨은 인간 소외 현상, 그리고 알고리즘 의존으로 인한 비판적 사고 저하를 깊이 염려해 온 독일 교사들의 고뇌는 대한민국 교육이 쫓던 속도전에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 반대로 한국의 역동적인 디지털 수업 모델과 담양 관내 학교에서 펼쳐진 생태·역사·진로 중심의 유연한 교육과정은 독일 연수단에게 미래 교육의 실천적 가능성을 명확하게 제시해 주었다. 주목할 만하게도 교류 첫날, 담양의 한 초등학교에서 진행된 '5·18 민주화운동' 주제의 현장 수업은 양국 교육자들에게 깊은 공감대를 선사했다. 5·18의 진실을 세계에 알린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깊이 있게 다룬 이 수업에서, 독일 연수단은 한국 초등학생들의 높은 역사적 문제의식과 성숙한 태도에 큰 감동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의 정체성과 존엄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바로 이처럼 국경을 초월해 인류 보편의 가치를 뜨겁게 공유했던 상생의 현장 속에 존재한다. 이번 한·독 교원 교류는 단순한 지역 단위의 연수를 넘어 대한민국 미래 교육의 거버넌스를 확장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향후 대한민국 교육 정책을 이끌어갈 선구자들과 행정 담당자들에게 세 가지 정책적 제안을 던지고자 한다. 첫째, 글로벌 교육 교류에 대한 지속가능한 행정·재정적 지원의 확대와 제도화가 시급하다. 미래 교육의 도전과제는 개별 지역이나 국가 혼자서 해결할 수 없다. 정책 담당자들은 지역의 우수한 교육 자산이 글로벌 무대와 중단 없이 소통할 수 있도록 전용 예산을 확보하고 수립 절차를 간소화하는 등 국가적 차원의 제도적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둘째, '기술' 중심의 디지털 수용성 정책에서 '철학과 윤리' 중심의 가치 정책으로 확고하게 대전환해야 한다. 스마트 기기 보급률이나 AI 디지털 교과서 도입 속도라는 수치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독일 교육이 보여준 개인정보보호, 데이터 윤리, 그리고 비판적 사고 능력을 기르는 'AI 리터러시'를 대한민국 교육과정 전반에 제도적으로 정착시켜야 한다. 기술을 다루는 테크니션을 넘어, 기술의 시대에 인간다움을 사수하고 다스리는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 정책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셋째, 일회성이자 일방향적인 교원 연수를 넘어선 '글로컬 교육공동체 및 학생 교류 모델'의 정립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 교사들의 만남과 사유의 시간은 반드시 미래의 주역인 학생들의 실질적인 상호 교류로 이어져야 한다. 대한민국의 아이들이 세계의 학생들과 민주주의와 인권, 디지털 윤리를 주제로 함께 토론하고 연대할 수 있도록, 지역의 특수성과 세계의 보편성을 잇는 글로벌 교육 네트워크를 국가 정책 차원에서 밀어주어야 한다. 이번 교류는 현장 리더들의 교육적 혜안과 보이지 않는 실무진의 땀방울이 맞물려 일궈낸 대한민국 미래 교육의 역동적인 출발점이다. 참된 교육은 외형적 형식을 넘어 내실 있는 가치를 채우는 일이며, 교사의 뜨거운 가슴을 통해 아이들의 숨결을 온전히 느껴야 하는 본질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교육정책 담당자들이 이번 한·독 교류가 전남의 대지 위에 가꾸어 놓은 글로컬 상생의 불씨를 이어받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 아이들이 거대한 디지털 해일 속에서도 인권과 민주주의, 그리고 인간 존엄의 가치를 단단히 쥔 채 당당한 세계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대한민국 미래 교육의 문을 활짝 열어주기를 간곡히 기대한다. ▣ 김춘식 동신대학교 에너지경영학과 교수이자 한국독일사학회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의 교육, 독일의 직업교육과 평생교육을 만나다』(포스텍융합문명연구원; 소명, 2025) 등이 있다. ◇ 교육연합신문 논설위원 ◇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 한국독일네트워크(ADeKo) 이사 겸 인문교육위원장 ◇ 2024 칼만 해외석학(독일 연방교육연구부, 아헨공과대학교) ◇ 前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 前 국가교육위원회 미래과학인재양성특별위원회 전문위원 ◇ 前 한국전문대학평가인증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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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칼럼] 한·독 미래 교육의 만남: 기술적 수용성과 윤리적 성찰의 글로컬 상생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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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백제의 이름, ‘밝은 나라’에서 ‘일본’까지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역사는 과거를 읽는 일이지만, 단지 지나간 세월을 정리하는 작업에 그치지 않는다. 역사는 오늘을 비추고, 내일을 준비하는 거울이 된다. 그래서 국호(國號), 즉 나라의 이름을 새삼 살펴보는 일은 단순한 어원 풀이가 아니다. 이름은 정체성이고, 그 이름에 담긴 뜻은 후대가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큰 자산이 된다. 우리에게 백제는 교과서 속에서 흔히 “한반도 서남부의 소국,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최근 학계와 현장의 발굴은 그 단순화된 서술에 물음표를 던진다. 백제의 범위는 더 넓었고, 영향력은 훨씬 깊었으며, 무엇보다도 그 이름이 지닌 의미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풍부했다. □ 백제라는 이름의 여러 얼굴 문헌과 금석문에는 백제의 국호가 한 가지로만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잘 아는 百濟(백제) 말고도, 광개토대왕비에는 百殘(백잔), 다른 기록에는 十濟(습제), 또 이체자인 佰濟, 남부여(南扶餘)라는 표기도 보인다. 일본에서는 倶太羅(구다라), 百濟(일본식 발음 구다라)라 불렀다. 더 나아가 은유적 표현으로 扶桑, 風谷, 半島라는 지칭까지 섞여 있다. 이처럼 다층적이고 이질적인 표기들이 얽혀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연구자들이 찾는 것은 이들을 하나로 묶어낼 “어원 열쇠”이다. □ ‘백’과 ‘제’, 문자에 담긴 빛과 물 먼저 ‘백(百)’이라는 글자를 보자. 갑골문과 금문에서는 본래 엄지손톱의 흰빛을 그린 상형이었다. 그 흰빛이 곧 밝음, 순수함을 뜻하게 되었고, 후대에 ‘많다’의 의미가 붙으며 수사 ‘백(100)’이 된 것이다. 결국 그 뿌리는 ‘밝음’이었다.([그림 30] ‘百’ 참조) ‘제(濟)’는 본래 제나라의 ‘제(齊)’에서 갈라져 나온 글자다. 물(水) 변이 붙으며 강과 관련된 뜻으로 발전했다. 중국의 제수(濟水)와 연결되고, 후대에는 ‘건너다’, ‘구제하다’라는 뜻이 파생되었다. 그러니 百濟는 문자적으로도 ‘밝음’과 ‘강’이 결합한 이름이라 할 수 있다.([그림 30] ‘濟’ 참조) □ 예군 묘지명에 새겨진 단서 2011년, 중국 서안에서 발견된 한 묘지명은 백제사 연구에 큰 충격을 주었다. 백제계 인물로 추정되는 ‘예군(禰群)’의 묘지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日本餘燼(일본의 여초, 전란 뒤 살아남은 무리)”, “扶桑에 의지하여 죽임을 면했다.” 여기서 ‘일본’을 단순히 열도, 즉 야마토로 읽을 수는 없다. 당시 맥락에서 ‘餘燼(여초)’는 멸망한 나라의 잔민을 뜻했으니, 이는 분명 백제를 가리킨 것이다. 같은 문맥의 ‘扶桑’이 일본 열도를 가리키는 은유로 쓰였음을 고려하면, 문장은 이렇게 읽힌다. “망국 백제의 유민이 일본(扶桑)에 의지하여 살아남았다.” 즉, 묘지명 속 ‘日本’은 ‘해가 떠오르는 곳’이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바로 백제를 지칭했다고 보는 해석이 힘을 얻는다. □ 왜가 일본이 되다, 그리고 백제 『신당서』는 함형 원년(670)에 왜가 국호를 ‘일본’으로 바꾸었다고 기록한다. 『삼국사기』 문무왕 10년조에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하지만 『구당서』와 『신당서』의 서술은 미묘하게 다르다. 한쪽은 “일본이 예전 작은 나라였는데 왜를 병합했다”고 하고, 다른 한쪽은 “왜가 일본을 병합했다”고 전한다. 명칭이 혼용되던 전환기의 혼란이 드러난다. 해석은 이렇다. 백제 멸망 이후 유민과 지배층이 열도 정치에 깊이 편입되었고, 그 결과 670년 국호 ‘일본’ 채택은 백제 재기의 성격을 띠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일본’은 단순히 왜의 새로운 이름이 아니라, 백제인의 자의식이 투영된 이름이었다. □ ‘해의 근본’, 일본과 백제를 잇다 여기서 흥미로운 언어학적 연결고리가 등장한다. 고구려 건국지로 알려진 ‘졸본(卒本)’은 광개토왕비에는 ‘홀본(忽本)’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홀’은 ‘해’를 뜻하는 말과 음운적으로 이어지고, 결국 ‘日(해)의 本(근본)’이라는 ‘日本’의 의미망과 연결된다. 소서노가 졸본계 부여 혈통이라는 전승, 해모수·주몽의 태양적 신화 계보와 겹쳐 보면, ‘해의 근본’이라는 관념이 이미 고대 건국서사 속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백제, 밝음의 나라 우리 고대 국호 가운데는 태양과 광명과 관련된 이름이 많다. 조선(아침 해가 비치는 나라), 부여(벌판, 햇볕이 드는 곳), 고구려(높음, 태양), 발해(큰 바다에 뜨는 해) 모두 그렇다. 백제도 예외가 아니다. 국어학자 양주동은 백제를 ‘밝은 성(城), 곧 광명성’으로 풀이했다. ‘백’은 밝음, ‘제’는 성·고을을 뜻하는 자을(齊)의 음차라는 것이다. 결국 백제는 ‘밝은 땅, 해가 비치는 나라’라는 뜻으로 확장된다. 이는 예군 묘지명의 ‘日本(해의 근본)’ 은유와도 정확히 호응한다. ‘박달’이라는 말도 같은 계열이다. ‘밝-달(양달, 해가 드는 곳)’이 ‘배달’로 발전했고, 이는 곧 밝은 나라, 태양의 나라를 뜻했다. 백제의 이름도 바로 이 ‘밝음’의 계열에 속한다. □ 다양한 별칭과 변이 물론 백제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들도 있었다. ‘十濟(습제)’는 몽골어·튀르크어의 ‘온(온, 열)’과 연결짓는 가설이 있지만, 『수서』의 “백가가 바다를 건너 백제라 부름”과 같은 후대식 설명에 가깝다. ‘남부여(南扶餘)’는 부여계 혈통을 강조한 표기였다. 일본에서 부른 ‘구다라(倶太羅)’는 어원설이 다양하다. ‘큰 나라(쿠) + 타라(땅)’라는 풀이, 공주 구드레 나루에서 비롯되었다는 지명설, 심지어 브리야트계 민족명과의 연결까지 제기된다. 일본어 속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 하찮다)’가 여기서 비롯되었다는 설까지 있지만, 아직 분분하다. □ 맺으며 사료, 금석문, 언어학, 신화적 상징을 종합하면, 백제라는 이름은 결국 ‘밝음, 해, 근본’이라는 의미장으로 수렴한다. 예군 묘지명 속 ‘日本’이 백제를 지칭했다는 해석은, 백제의 멸망 이후에도 그 이름과 상징이 일본 열도 속에서 살아남아 정치적 재편의 원동력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660년 백제가 무너진 뒤, 불과 10년 만에 왜가 ‘일본’으로 국호를 바꾼 사실은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백제인의 기억과 정체성이 열도에 깊이 뿌리내린 사건이었다. 결국 백제는 ‘밝은 땅, 해의 나라’였다. 그 이름 속에는 태양의 힘과 동아시아를 가로지른 백제인의 활력이 함께 담겨 있다. 오늘 우리가 백제를 다시 불러내는 까닭은, 단순히 잊힌 나라를 복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이름에 깃든 빛을 오늘의 자존과 내일의 역량으로 되살려내기 위함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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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백제의 이름, ‘밝은 나라’에서 ‘일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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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칼럼]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삶, 평범을 자처한 삶의 품격과 향기
- [교육연합신문=김춘식 칼럼] 인생의 정점에서 스스로를 낮추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앉는 것은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용기다. 성취와 효율만이 강조되는 현대 사회에서 프랑스의 올리비에 드 베랑제(Olivier de Berranger, 1938-2017) 주교가 남긴 삶의 궤적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마무리'의 진정한 의미를 묻는다. 베랑제 주교의 생애는 국경과 지위를 초월한 헌신과 겸손의 결정체였다. 그의 한국 인연은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초청으로 시작되었다. 1976년부터 17년간 '오영진'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살았던 그는 화려한 사목 활동 대신 가난한 이들의 곁을 선택했다. 그는 프라도사제회가 한국 가톨릭교회에 뿌리내리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이 땅의 고통받는 민중과 함께 울고 웃었다. 프랑스로 돌아간 뒤에도 그의 가슴에는 늘 한국이 살아 있었다. 1996년 생드니 교구 주교로 서품된 후, 저서 『서울의 예수, 생드니의 예수』를 통해 두 나라 소외된 이들의 삶을 증언했다. 특히 2000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당시에는 "상대방에게 모멸감을 주지 않고 감싸 안는 인내와 민족애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분단의 상처를 보듬기도 했다. 주교라는 권위의 정점에 도달했을 때조차 그의 마음은 늘 프라도 사제로서 서약했던 초심의 자리를 향했다. 은퇴 후 행보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성찰을 안겼다. 그는 주교의 지팡이를 내려놓고 프라도회가 시작된 리옹의 가난한 동네에서 홀로 숙식을 해결하며 살기를 자청했다. 말년에는 고향 양로원에서 '주교님'이 아닌 친근한 형제로서 노인들과 똑같은 처지로 살다 생을 마감했다. 지위라는 껍데기를 벗어던진 인간 본연의 숭고함을 몸소 증명해 보인 것이다. 이러한 삶은 직위와 명예를 인생의 성적표로 여기는 우리 사회의 고정관념을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내려놓은 '직함'이 아니라, 그 자리에 새롭게 채워진 '삶의 품격'이다. 이는 퇴임 후 과거의 위신을 뒤로하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 아이들과 눈을 맞추는 독일 교육자들의 성숙한 직업 윤리와도 궤를 같이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역시 재직 시절의 위세에 갇히지 않는 용기다. 원숙한 경륜이 박제된 훈장이 아닌, 학교 현장의 실질적인 활력으로 환원되는 선순환의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최근 우리 곁에서도 이러한 가치의 실천을 통해 잔잔한 감동을 주는 사례를 만날 수 있다. 전남 강진교육지원청의 최 모 전 교육장의 행보가 그러하다. 그는 평생을 바친 교단에서 최고의 영예인 교육장까지 역임했으나, 퇴임 후 안락한 원로의 자리를 사양했다. 대신 최근 강진의 외국인 유학생 중심 직업계 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분필을 들었다. 화려한 의전 대신 타국 학생들의 서툰 한국말을 다독이며 교육자의 초심을 현장에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주교에서 평범한 노인으로 돌아간 베랑제 주교처럼, 교육장에서 임시교사로 돌아간 그의 행보는 직함이 사라진 자리에 오직 '스승'이라는 이름의 진정성만을 남겼다.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오히려 세상을 밝히는 이들의 삶은 기술적 풍요 속에서도 우리가 결코 잃지 말아야 할 인간의 품격과 온기가 무엇인지 일깨워준다. 결국 이들이 보여준 삶의 궤적은 우리 사회 전반의 의식 개혁을 요구하는 묵직한 화두다. 전문성이 사장되지 않고 사회적 자산으로 재투입되는 환경, 위계의 옷을 벗고 존재 그 자체로 기여하는 이들이 존중받는 풍토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성숙한 공동체의 모습이다. 이러한 겸손의 선순환이야말로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유산이자, 우리 시대가 마주해야 할 '준비된 기적'이다. ▣ 김춘식 동신대학교 에너지경영학과 교수이자 한국독일사학회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의 교육, 독일의 직업교육과 평생교육을 만나다』(포스텍융합문명연구원; 소명, 2025) 등이 있다. ◇ 교육연합신문 논설위원 ◇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 한국독일네트워크(ADeKo) 이사 겸 인문교육위원장 ◇ 2024 칼만 해외석학(독일 연방교육연구부, 아헨공과대학교) ◇ 前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 前 국가교육위원회 미래과학인재양성특별위원회 전문위원 ◇ 前 한국전문대학평가인증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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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칼럼]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삶, 평범을 자처한 삶의 품격과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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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고구려의 국호, 잊힌 이름을 다시 부르다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우리가 역사를 이야기할 때, 늘 아쉬움으로 남는 장면이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라는 말은 교과서에서 너무도 익숙하지만, 사실 그 통일은 제한적이었다. 청천강 이북은 포함되지 않았고, 한반도의 북쪽은 여전히 미완의 공간으로 남았다. 그래서일까. 한국인들의 집단 기억 속에는 언제나 “고구려가 통일했다면 어땠을까?”라는 물음표가 남아 있다. 실제로 몇 해 전 학자 100인에게 “한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사건”을 묻는 설문에서, 가장 많이 꼽힌 답은 ‘고구려의 멸망’이었다. 패배의 순간임에도, 사람들은 고구려에서 한국사의 자존심과 대륙적 상상력을 찾는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 이름, ‘고구려’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그 국호 속에는 어떤 의미가 숨어 있을까? □ 건국 연대, 단순한 연표가 아니다 『삼국사기』는 고구려의 건국을 기원전 37년으로 적었다. 그러나 다른 기록은 다르다. 『신당서』는 고구려가 “한(漢) 대부터 있었고, 지금 900년에 이른다”라고 전한다. 『후한서』, 『삼국지』 등 중국 사서에 고구려는 일찍부터 등장하지만, 신라는 훨씬 늦게 독립된 항목으로 나타난다. 이는 단순히 연표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고구려’라는 이름을 썼는지, 그것이 어떤 문화적 맥락에서 형성되었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 ‘구려’라는 이름의 뿌리 『삼국지』 동이전에는 “구루는 고구려말로 성(邑)이다”라는 흥미로운 구절이 있다. 여기서 ‘구루’는 ‘굴(동굴)’, ‘골짜기’, ‘고을’로 이어지는 어원망을 품고 있다. 즉, 집단이 모여 사는 거처, 곧 성(邑)을 뜻했다. 따라서 ‘구려’는 단순한 고유명사가 아니라, 원래는 ‘성’이나 ‘고을’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였다가 국호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고구려는 ‘높은 성, 위대한 고을’을 뜻하는 이름이었다. □ 졸본이 아니라 홀본, 해의 근본 고구려 건국지로 잘 알려진 곳은 ‘졸본(卒本)’이다. 그러나 광개토왕비(413년)에 기록된 표기는 ‘홀본(忽本)’이다. 시기상 더 원 사료에 가까운 비문을 따른다면, ‘홀본’이 원형일 가능성이 높다. ‘홀’은 문자학적으로 ‘해(태양)’와 연결된다. 그렇다면 ‘홀본’은 곧 ‘해의 근본’, ‘해 뜨는 곳’을 의미한다. 조선의 ‘아사달’, 단군신화의 태양적 국호 전통과도 이어진다. 고구려의 건국지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태양 숭배와 연결된 신성한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 ‘고(高)’ 자의 기원 그렇다면 ‘고(高)’는 무엇일까. 흔히는 다층 성곽의 모양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하지만 갑골문과 금문을 들여다보면, ‘고’는 원래 솟아오름, 남성적 생명력의 상징에서 출발한 글자였다. ‘높다’라는 추상적 의미는 그 뒤에 파생된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높은 성’일 뿐 아니라, 태양의 상징과 맞닿아 있었다. 시조 해모수와 주몽의 성씨 전통이 이 ‘높음’과 ‘태양’을 겹겹이 담아낸 셈이다.([그림 28] ‘高’ 참조) □ 이미 쓰였던 이름, ‘고려’ 많은 사람들이 ‘고려’라는 국호를 왕건이 새로 만든 줄로 안다. 그러나 사실 고구려 시기부터 ‘고려’는 이미 사용되었다. 충주 고구려비(397년)에는 ‘고려 태왕’이 등장하고, 539년의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에는 ‘고려국’이라는 명문이 보인다. 게다가 당·원·명대의 음운서, 그리고 『용비어천가』 표기를 보면 ‘려’는 ‘리’로도 발음되었다. 고려가 곧 ‘고리’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고려’는 단순한 약칭이 아니라, ‘골/홀(해)’ 계열 어원과 연결된 또 하나의 정통 국호였다고 볼 수 있다. □ 북경까지 뻗은 고구려의 무대 덕흥리 고분 벽화(408년)에는 ‘유주자사’와 13군 태수의 이름이 등장한다. 유주는 오늘날 북경 일대다. 이는 고구려가 이미 화북 내륙과 접속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당대 문헌에는 평양성·국내성·한성의 3수도 체제가 등장한다. 그런데 송·명대 지리지에는 평양성을 ‘평주=북경권’으로 비정한 기록이 있다. 이는 고구려의 활동 무대가 단순히 압록강 주변이 아니라, 북경까지 이어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고구려가 수·당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 계승된 국호, 고려 고구려 멸망 후에도 ‘고려’라는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발해, 보덕국, 후삼국의 태봉, 그리고 왕건의 고려까지 이어졌다. 왕건의 고려는 새로운 창조물이 아니라, 고구려 시기부터 이어진 정통 국호의 계승이었다. 조선 건국 때 명나라의 눈치를 보며 채택된 ‘조선’과는 달리, 고려라는 이름은 대륙적 상상력과 민족적 자존을 담은 이름이었다. □ 다시 불러야 할 이름 1948년 제헌 국회에서도 국호는 논쟁거리였다. ‘대한민국’과 ‘고려공화국’이 경쟁했고, 결국 표결로 ‘대한민국’이 채택되었다. 하지만 고려라는 이름을 다시 쓰려 했던 흔적은 분명 남아 있다. 오늘날 통일 한국의 국호를 논의한다면, ‘고려’는 가장 국제성과 역사성을 겸비한 후보일 것이다. 북한 역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을 제안한 바 있다. ‘고려’라는 이름에는 남과 북이 함께 이어받을 수 있는 전통이 담겨 있다. □ 결론: 태양과 높음의 나라 고구려와 고려의 이름에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태양 숭배와 ‘높음’의 상징이 담겨 있다. 그것은 단군의 아사달에서, 해모수와 주몽의 성씨에서, 홀본이라는 건국지에서, 그리고 ‘고려’라는 국호의 지속에서 확인된다. 고구려는 패망했지만, 그 이름은 꺼지지 않았다. 민족의 자존심, 대륙적 상상력, 그리고 태양과 높음의 전통은 여전히 살아 있다. 언젠가 통일의 순간이 오면, 우리는 다시 이 이름을 불러야 할지 모른다. 고려(高麗). 그 이름 속에서 우리는 사라진 전사의 기억과 미래의 자존을 함께 만날 수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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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고구려의 국호, 잊힌 이름을 다시 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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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도깨비, 도철, 독기, 그리고 동이족의 기억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 천 년을 넘어 이어진 전사의 기운 우리가 아는 도깨비는 어떤 모습일까? 뿔이 달린 장난꾸러기, 씨름을 좋아하고 아이들과 어울리며, 때로는 사람과 흥정을 벌이는 친근한 존재로 떠올린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 도깨비의 뿌리는 훨씬 더 묵직하다. 단순한 민속 괴물이 아니라, 고대의 전쟁신과 맞닿아 있는 상징이자, 동이족의 기억을 품은 형상이다. □ 잊힌 이름, 도깨비의 기원 도깨비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갑골문과 청동기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고대 중국의 제기와 무기 위에는 무시무시한 얼굴 문양이 새겨져 있다. 바로 도철(饕餮)이다.([그림 27] 도철 문양 참조) 크고 날카로운 눈, 튀어나온 송곳니, 뿔 달린 이 형상은 보는 이에게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이 도철 문양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전쟁과 제사의 기운을 상징했고, 적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전사의 얼굴이었다. 중국 고대 기록에 따르면, 치우(蚩尤)라는 전쟁의 신은 황제 헌원과 맞서 싸운 전사였다. 그의 투구에는 소머리와 뿔, 날카로운 송곳니가 장식되어 있었고, 이 형상이 훗날 도철 문양으로 정착했다. 즉, 오늘날 우리가 친근하게 부르는 도깨비는, 그 뿌리를 따라가면 전장의 피비린내와 무기, 청동기의 도철에 닿아 있는 셈이다. 두려움의 상징이 시간이 지나 민속 속 귀물로 변신한 것이다. □ 전장의 깃발, ‘독기’ 치우와 동이족은 전쟁터에서 늘 독기(纛旗)라는 깃발을 세웠다. 독기는 단순한 깃발이 아니었다. 깃대 끝에 괴이한 형상을 조각하고, 그 아래에 깃발을 늘어뜨렸다. 사람의 얼굴, 짐승의 머리, 괴물의 형상이 독기의 꼭대기를 장식했다.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바람과 전운을 점치고 적에게 심리적 압박을 주는 장치였다. 깃발은 멀리서도 잘 보였고, 그 위의 괴물 얼굴은 전사의 군기를 고취시키며 적군에게 공포를 심었다. 이 전통은 동북아시아의 여러 민족으로 이어졌다. 몽골군 역시 독기와 유사한 군기를 사용했고, 원나라와 청나라 시대에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전통이 한반도에도 남아 있었다는 점이다. 정조 시기의 궁중 행렬을 담은 「화성능행도」를 보면, 화려한 깃발 행렬 속에 독기가 등장한다. 다만 이 시기의 독기는 전투 장비라기보다 왕권과 의례를 상징하는 장식물로 변해 있었다. 전장의 공포에서 왕실의 권위로, 상징의 의미가 변모한 것이다. □ ‘도깨비’라는 이름의 비밀 그렇다면 ‘도깨비’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 여러 설이 있지만 흥미로운 가설 하나가 있다. 바로 ‘도철(饕餮)’과 ‘귀(鬼)’가 합쳐졌다는 것이다. 도철의 ‘도-’와 귀신의 ‘귀’가 합쳐져 ‘도귀비→도깨비’로 바뀌었다는 해석이다. 즉, 고대 전쟁신의 상징이 민간 신앙 속 귀물 이미지와 섞여 탄생한 이름이라는 것이다. 언어학적으로도 음운 변화 과정을 거치면 충분히 가능한 설명이다. 이 이름의 변천은 도깨비 이미지의 변화를 보여준다. 전투와 무용의 상징에서, 민속 속 장난꾸러기로 변신한 과정 말이다. 도깨비가 씨름을 좋아하고, 쇠붙이를 잘 다루며, 때로는 흥정을 벌이는 성격을 띠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전사의 기운이 민속 속에서 장난기와 융합한 것이다. □ 치우, 전사에서 민속까지 다시 치우로 돌아가 보자. 중국의 역사서에 치우는 종종 ‘반역자’나 ‘야만인’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북방과 한반도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오히려 동이족의 대표적 영웅이었다. 소머리, 뿔, 날카로운 이빨을 장식한 그의 모습은 전쟁의 신, 혹은 강력한 부족의 수장을 상징했다. 이 형상이 도철 문양으로, 독기 장식으로, 그리고 민속 속 도깨비의 이미지로 변해 내려온 것이다. 결국 도깨비는 단순한 민속 괴물이 아니라, 동이족 전사의 기억을 담고 있는 문화적 유산이다. 패자의 기록이자 동시에 살아남은 자의 기억인 셈이다. □ 전사의 기억, 민족의 추억 오늘 우리가 도깨비를 이야기할 때, 흔히 장난꾸러기나 민속 신앙의 대상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속에는 잊힌 전사의 기억이 숨어 있다. 갑골문과 청동기에 새겨진 도철, 전쟁터의 독기, 그리고 치우의 형상이 그것이다. 이 기억은 수천 년의 시간을 건너 민화 속 도깨비로, 민담 속 장난꾸러기로, 아이들의 놀이 친구로 남았다. 그 과정에서 두려움은 친근함으로, 공포의 전사는 민속의 장난꾸러기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뿌리를 알면 도깨비는 단순히 웃음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동이족의 기억을 잇는 상징이고, 민족의 추억을 담은 문화적 자산이다. □ 맺으며 도깨비, 도철, 독기. 세 단어는 서로 다른 듯하지만, 모두 동이족의 흔적을 품고 있다. 도깨비를 연구하는 일은 단순한 민속학이 아니다. 그것은 패자의 기록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기억을 복원하는 일이다. 오늘 우리가 도깨비를 만날 때, 씨름판에서 씨름을 벌이는 장난꾸러기를 떠올리든, 민화 속에서 금빛 방망이를 휘두르는 귀물을 떠올리든, 그 뒤에 겹겹이 쌓인 전사의 기억을 함께 떠올려 볼 일이다. 도깨비는 그저 웃음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천 년을 넘어 이어진 전사의 기운이기 때문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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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도깨비, 도철, 독기, 그리고 동이족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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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보이지 않는 바람을 그리려 한 사람들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우리는 매일같이 바람을 느낀다. 여름날 더위를 식혀 주는 산들바람, 가을 들판을 흔드는 갈바람, 태풍처럼 무섭게 몰아치는 강풍. 하지만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고대인들은 ‘바람’을 글자로 표현하는 데 큰 상상력을 발휘해야 했다. 오늘 우리가 쓰는 ‘풍(風)’ 자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놀라운 사실과 만난다. 갑골문 속 초기의 ‘풍’ 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벌레(虫)’ 모양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새’, 특히 봉황 같은 거대한 조류의 형상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바람을 새로 그렸다는 발상, 여기에 고대인의 자연 인식과 신화적 상상력이 오롯이 담겨 있다. □ 왜 바람을 ‘새’로 그렸을까? 갑골문 초기의 ‘풍’ 자를 보면, 머리와 날개를 단 새의 모습이 분명하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깃털이 흩날리고, 깃발이 펄럭이고, 나무가 흔들리는 모습은 눈앞에 보인다. 고대인에게는 이런 현상을 가장 잘 상징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날개 치는 새였다.(그림 26 ‘風’ 참조) 특히 봉황은 단순한 새가 아니었다. 머리 위에 삼각형·역삼각형 같은 권위의 표식을 얹고 등장한다. 이는 단순한 자연표지가 아니라 제사와 권력, 신성의 영역과 연결된 기호였다. 바람은 농업과 직결되는 힘이었고, 봉황의 형상은 그 힘을 길들이고 제어하려는 사회적·종교적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 바람의 신, ‘비렴(飛廉)’ 음운학적 흔적도 남아 있다. 최춘태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갑골문 시기 바람의 발음은 [팔람] 계열로 추정되며, 이것이 오늘날의 ‘풍(風)’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고문헌에는 바람의 신 ‘비렴(飛廉)’ 이야기가 전해진다. 상나라 장군의 이름이기도 한 ‘비렴’은 날개 달린 전설적 존재로, 곧 바람을 의인화한 신이었다. 즉, 바람은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라 사회와 전쟁, 제사의 질서를 좌우하는 거대한 존재였고, 그 형상은 새, 특히 봉황으로 그려졌다. □ 그런데 왜 ‘벌레(虫)’가 끼어들었을까? 문제는 후대다. 상 후기 이후부터 ‘풍’ 자 오른쪽에 이상한 부호가 붙는다. 전국 시대에 들어서면 ‘虫’ 혹은 ‘凡(범)’과 비슷한 글자가 따라붙어 지금 우리가 아는 ‘風’의 형태가 된다.([그림 26] ‘風’ 참조) 민간에서는 이를 억지로 설명하려 했다. “바람이 불면 벌레가 생긴다.” 그러나 이는 과학적으로도, 고고학적으로도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문자학적 분석은 이것이 가차(假借)와 형태 전이의 결과임을 보여준다. 음을 빌려 쓰는 과정에서 발음 표식이 덧붙고, 후대 필사 과정에서 벌레 모양으로 단순화되었다는 것이다. 즉, 벌레는 본래 바람과 아무 관련이 없었다. 다만 문자 사용과 전승의 과정에서 우연히 끼어들었을 뿐이다. □ 봉황과 대붕, 그리고 오로라의 기억 봉황을 왜 바람의 상징으로 택했는가에 대해 또 다른 흥미로운 가설이 있다. 바로 오로라와 같은 북방의 자연현상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거대한 빛의 장막이 하늘을 물들이는 모습을 고대인은 거대한 새, 날개짓하는 대붕(大鵬)의 형상으로 기억했을 수 있다. 이 상상은 후대로 이어져 다양하게 변주된다. 유가에서는 봉황을 인의예신의 덕목을 상징하는 도덕적 존재로 만들었고, 장자 같은 도가 사상에서는 대붕을 자유와 초월의 상징으로 재해석했다. 홍산문화 등 북방 문화권의 상상력이 중원으로 흘러들어와 용과 봉황이라는 거대 상징체계를 형성한 것이다. □ 왜 복잡한 봉황 그림을 고집했을까?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고대 문자라면 간단한 기호를 쓰는 것이 효율적일 텐데, 왜 굳이 새의 머리와 날개를 그려 넣는 복잡한 도형을 고집했을까? 그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봉황은 단순한 자연 표지가 아니라 의례와 권위의 상징이었다. 제사와 정치의 질서를 나타내는 글자이니 함부로 간소화할 수 없었다. 둘째, 시각적 기억 때문이다. 오로라 같은 거대한 현상을 집단이 기억하는 방식은 상징과 그림이었다. 그 기억은 문자 속에서도 유지될 필요가 있었다. 셋째, 문자적 보수성이다. 초기의 형식이 한 번 정착되면, 실용성보다 전통과 관습이 우선하는 경향이 있었다. □ 용봉 문화의 한 뿌리 ‘풍(風)’ 자의 변천사를 따라가다 보면, 단순한 글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문화의 기원을 본다. 바람이라는 보이지 않는 자연현상을 새로 형상화했고, 그 새는 봉황으로 신성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바람은 자연을 넘어 권위와 제사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후대에 벌레 부호가 끼어들고 형태가 바뀌었지만, 봉황과 대붕 신화는 여전히 살아남아 동아시아의 상징 세계를 지배했다. 용과 봉, 이 두 상상의 동물이 결합해 ‘용봉 문화’를 형성한 배경에는 바로 이런 고대의 집단적 상상과 기후·신화의 기억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 오늘의 질문 우리가 매일 보는 ‘풍(風)’ 자는 단순한 언어 기호가 아니다. 그 속에는 보이지 않는 바람을 그리려는 고대인의 고뇌, 거대한 자연현상을 기억하려는 집단적 상상력, 그리고 의례와 권위를 중시한 사회 질서가 겹겹이 녹아 있다. 다시 말해, ‘풍’ 자 하나를 통해 우리는 자연–신화–권력–문자의 복합적 교차를 읽어낼 수 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바람을 붙잡으려 한 사람들의 상상은 오늘날까지도 글자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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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보이지 않는 바람을 그리려 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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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아내(妻)는 정말 약탈당한 여자의 흔적일까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김씨, 이씨, 박씨 같은 성(姓)만큼이나, 우리의 일상 언어에 늘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아내’와 ‘처(妻)’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妻’ 자의 기원을 두고 오랫동안 널리 퍼진 이야기가 있다. 고대 사회에 흔했던 약탈혼(창혼, 娶婚)의 흔적이라는 해석이다. 글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자(女)’ 옆에 ‘손(又)’ 모양이 붙어 있으니, 남자가 여자의 머리채를 낚아채 끌고 가는 모습이라는 것이다.([그림 25] ‘姓’ 참조) 언뜻 그럴듯하다. 고대에는 전쟁과 약탈이 일상이었고, 다른 부족 여성을 빼앗아 오는 일이 흔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강준식 선생은 이 통설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동이(東夷) 전통의 눈으로 보면, ‘妻’는 약탈의 흔적이 아니라 오히려 예(禮)에 따른 혼례와 성인 의식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 무릎 꿇은 사람들, 글자의 출발 먼저 문화사적 배경을 살펴보자. 상(商)·주(周)·한(漢) 시대까지 사람들은 의자가 아니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는 좌식 생활을 했다. 갑골문이나 금문에 나타난 사람의 모습이 무릎을 접은 형상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당나라 이후 북방에서 의자 문화가 들어오면서 좌식이 점차 줄었지만, 일본의 세이자(正座) 같은 풍습은 여전히 고대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즉, 고대 문자의 자형 속 ‘사람’은 오늘날의 의자에 앉은 모습이 아니라 무릎 꿇은 자태다. 이 점을 놓치면 문자의 의미를 오독하기 쉽다. □ 머리채를 낚은 손? 아니면 머리를 올려주는 손? 이제 문제의 ‘妻’ 자를 보자. 갑골문과 금문에서 ‘妻’는 ‘여자(女)’와 ‘손(又)’이 결합된 모양이다. 통설은 이 손이 여자의 머리채를 거칠게 낚아채는 장면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 손이 여인의 머리를 ‘끌어내리는’ 손이 아니라 ‘올려주는’ 손이라는 전혀 다른 해석이 있다. 고대의 혼례와 성인 의식에는 계례(髻禮)가 있었다. 성년이 된 여성이 머리를 올려 쪽을 틀고, 비녀를 꽂아 성숙한 여인으로서 사회에 나아감을 알리는 의식이다. 남자도 관례(冠禮)를 통해 상투를 틀고 동곳이나 비녀로 고정했다. 금문을 자세히 보면 손이 여자의 머리 쪽으로 들어가 정리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소전(小篆)에 이르면 헝클어진 머리가 가지런히 다듬어지고, 해서체에서는 머리 위의 짧은 가로획이 나타나는데, 강 선생은 이를 비녀를 뜻하는 기호로 해석한다.([그림 25] ‘妻’ 참조) 즉, ‘妻’는 여인을 머리채 잡아 끌고 가는 모습이 아니라, 혼례 예식을 치르며 동반자로 맞이하는 장면이라는 것이다. □ ‘부(婦)’와 ‘노(奴)’와의 구별 혼동은 여기서 비롯된다. ‘妻’와 비슷한 모양의 글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婦)’ 자는 ‘빗자루(帚)’와 ‘여자(女)’의 결합이다. 살림을 맡는 여인을 뜻하는 글자다. 그러나 후대 사람들은 ‘妻’에도 빗자루가 들어 있다고 착각해 ‘빗자루 든 여자’로 설명하기도 했다.([그림 25] ‘婦’ 참조) 또 ‘노(奴)’ 자는 일부 갑골 자형에서 여자의 손이 뒤로 묶여 있는 형상으로 보인다. 포로와 노예의 의미가 드러난다. 이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妻’ 역시 노예처럼 약탈된 여인을 가리킨다고 오해했다. 그러나 갑골문을 보면 ‘妻’에는 ‘노’와 같은 강제성 기호가 애초에 없었다고 지적한다.([그림 25] ‘奴’ 참조) □ 약탈혼 통설의 문제점 중국의 고문자학자들 가운데는 상고시대 약탈혼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물론 그런 풍습이 실제로 존재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갑골문·금문·소전·해서에 이르는 자형의 연속성을 보면, ‘妻’를 약탈과 동일시하는 해석은 지나친 일반화라는 것이다. 오히려 ‘예에 따른 혼례 준비’라는 맥락에서 일관성이 드러난다. □ 동이의 예(禮), 동반자의 탄생 동이 문화권에서는 혼인이 단순한 남녀 결합이 아니라 성인으로 인정받는 통과의례였다. 계례에서 여인은 머리를 올리고 비녀를 꽂았다. 그 순간 그는 아이가 아닌 어른, 사회적 동반자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妻’는 남자가 여자를 소유하는 표지가 아니라, 함께 가정을 이루는 동반자를 맞이하는 의식의 문자였다. □ 부호(婦好)의 묘, 존중받은 여인 이런 해석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증거도 있다. 1976년 은허에서 발굴된 부호(婦好)의 무덤이다. 그녀는 무정왕의 아내였으며, 동시에 뛰어난 장수이자 제사 주관자였다. 무덤에서는 수백 점의 청동기와 옥기, ‘婦好’라는 명문이 새겨진 유물이 나왔다. 갑골문 점사에는 무정왕이 부호의 병세를 염려하거나 군사를 맡기는 장면이 남아 있다. 이 사례는 당시 여성도 정치와 군사, 종교의 주체로 존중받았음을 보여준다. 오랑캐적 약탈과 억압의 상징이라던 해석과는 사뭇 다르다. □ 처와 첩의 차이, 핵심은 예(禮) 고대 문헌에 ‘빙위처(聘爲妻)’와 ‘분위첩(奔爲妾)’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通說은 ‘빙(聘)’을 안부 묻는다, ‘분(奔)’을 달아난다로 풀지만, 강 선생은 다르게 본다. ‘빙’은 예를 갖추어 맞이함, 곧 정례 결혼이고, ‘분’은 예 없이 결합한 비정례 관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처(妻)’와 ‘첩(妾)’의 구분 기준은 경제력이나 신분 차이가 아니라 예의 유무였다. 첩(妾) 자의 갑골 자형에는 무릎 꿇은 여자와 머리에 형틀 같은 표지가 함께 나타나는데, 이는 죄수나 포로 여성과 연관되었음을 시사한다.([그림 25] 참조) 즉 첩은 예가 생략된 강제적 결합의 산물이었다. □ 맺으며 결국 ‘妻’는 약탈의 흔적이 아니라 계례와 혼례를 통한 동반자의 탄생을 상징하는 문자로 읽는 것이 더 타당하다. ‘부(婦)’는 살림의 역할, ‘노(奴)’는 강제와 포로, ‘첩(妾)’은 예 없는 결합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구별된다. 동이적 전통은 예를 중시했고, 부호의 사례처럼 남녀가 동반자로 존중받는 문화도 분명히 존재했다. 따라서 ‘동이는 약탈혼의 민족’이라는 도식은 지나친 단순화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아내’라는 말 속에도 사실은 고대인의 예절과 존중, 동반자의 의미가 깃들어 있다. 문자의 기원을 바로 읽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오해도 하나씩 벗겨낼 수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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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아내(妻)는 정말 약탈당한 여자의 흔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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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성(姓)과 씨(氏), 우리 이름 뒤에 숨은 오래된 이야기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우리는 모두 성을 가지고 있다. 김씨, 이씨, 박씨... 이름을 부를 때마다 자연스럽게 앞에 붙는 그것.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묘하다. 왜 굳이 성과 이름을 나누어야 했을까? 더구나 옛 문헌을 보면 성(姓)과 씨(氏)는 본래 전혀 다른 개념이었다 한다. 지금은 하나로 뭉뚱그려졌지만, 그 기원은 훨씬 더 오래되고, 훨씬 더 신비로운 세계와 맞닿아 있다. 성과 씨의 뿌리를 따라가다 보면 단순한 족보의 문제가 아니라, 고대 사회의 생식 숭배, 조상 숭배, 정치 권력의 재편, 그리고 문자와 기록의 편집 과정이 얽혀 있음을 드러낸다. □ 성은 왜 ‘여자(女)’에서 시작했을까 ‘성(姓)’이라는 글자를 보자. 전통적 해석은 단순하다. ‘여자가 낳는다.’ 그러나 갑골문과 금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단순한 ‘출산’ 이상의 의미가 숨어 있다. 원형에는 여성의 형상, 풀과 씨앗, 불꽃 같은 생명의 상징이 섞여 있었다. 성은 곧 생명의 원천, 생식력을 이어가는 힘을 가리켰다는 것이다.([그림 24] ‘姓’ 참조) 하지만 세상이 변한다. 부계 중심 사회가 등장하면서, 문자의 모양조차 달라졌다. 원래 여자 그림이 들어있던 글자가 어느 순간 인(人) 자로 바뀌거나, 여성적 요소가 사라지고 추상적 부계 표지가 들어섰다. 문자학만이 아니라, 사회 구조가 글자의 뼈대를 다시 짠 셈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성’의 모습은 그 변형의 결과물이다. □ 씨(氏), 씨앗일까, 말뚝일까 ‘씨(氏)’의 기원은 더욱 난해하다. 학계에는 다섯 가지 설이 있다. 오이를 닮았다느니, 동굴의 형상이라느니, 흐르는 물을 뜻한다느니, 절벽을 본뜬 글자라느니… 심지어 남성 성기를 상징했다는 주장까지 있다. 그중 ‘씨앗설’을 가장 설득력 있게 본다. 곡식을 뿌리는 사람의 동작, 생명을 잉태하게 하는 씨앗의 힘이 글자의 뿌리였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중앙아시아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발견된 고대 묘지(소화 묘지)에서는 남녀 무덤마다 다른 말뚝과 목주가 세워져 있었는데, 연구자들은 이를 성기 상징과 생식 숭배의 흔적으로 본다. 씨(氏)라는 제도 역시 이런 신앙과 깊이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그림 24] ‘氏’ 참조) 결론은 단순하지 않다. 씨는 씨앗이자 말뚝, 곧 생식과 토지, 신분을 함께 뜻했을 수 있다. 문자와 유물, 민속 상징이 한데 얽혀 만들어진 다층적 개념이었다. □ 조상 숭배는 곧 생식 숭배였다 오늘날 우리는 제사를 조상에 대한 예의로 이해한다. 그러나 고대인들에게 조상 숭배는 곧 생식력 숭배였다. 선조가 자손을 낳아 이어주었듯, 제사와 제의는 ‘생명이 다시 이어지길’ 바라는 의식이었다. 타클라마칸 미라 옆에 세워진 남녀 상징 말뚝은 이를 잘 보여준다. 성과 씨라는 제도가 단순히 ‘가문 구분’이 아니라, 생명의 신비를 제도화한 장치였음을 시사한다. □ 정치와 권력이 성씨를 바꿔 놓다 그러나 생명의 상징은 곧 권력의 도구가 된다. 주나라 이후 정치 권력은 모계 중심 전통을 약화시키고, ‘덕(德)’과 ‘천명(天命)’ 같은 추상적 개념을 내세워 지배의 정당성을 재편했다. 사마천 같은 역사 편찬자들은 성과 씨의 구분을 흐리게 적었고, 후대 독자들은 그 차이를 잊어버렸다. 진(秦)의 중앙집권은 성씨 제도를 또 한 번 바꿔 놓았다. 호적과 행정 체계가 정비되면서 씨(氏), 곧 봉토와 신분을 구분하던 표식은 의미를 잃고, 성과 통합되어 버렸다. 이제 성씨는 혈통과 행정이 결합한 제도가 되었다. □ 한국에서 성씨는 어떻게 자리 잡았을까 한국의 성씨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등장한다. 그러나 실제로 성씨가 사회 전반에 정착한 시기는 4~6세기 전후로 추정된다. 초기에는 귀족층만 성씨를 가졌고, 일반 백성은 이름만 있었다. 고려와 조선에 이르러 왕권이 호적 제도를 정비하면서 성씨가 확대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성을 가지게 되었다. 동이계 후손의 관점에서 본다면, 성씨의 뿌리는 더 오래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다만 기록이 부족해 단정하기는 어렵다. □ 이름은 곧 역사다 성과 씨는 단순한 가계 표지가 아니다. 그것은 생식과 조상 숭배의 상징이었고, 사회 구조와 권력 재편의 흔적이었으며, 문자와 행정 제도의 변형을 거쳐 오늘날에 이른 결과물이다. 우리가 성씨를 부를 때마다, 사실은 수천 년 전의 신앙과 생활, 권력의 흔적을 동시에 불러내고 있는 셈이다. □ 남은 과제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강 선생은 문자 연구와 고고학 발굴, 민속 연구를 종합해 성씨의 원형을 더 치밀하게 밝히는 과제를 제안한다. 타클라마칸 묘지의 말뚝, 갑골문 속의 여성 형상, 고려·조선의 성씨 확산 과정은 그 단서가 될 수 있다. 성씨 제도를 둘러싼 오래된 기억을 되살리는 일은, 단순한 과거 탐구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누구인지를 새삼 자문하는 일이다. 우리가 오늘도 부르는 성씨. 그것은 단지 행정상의 호칭이나 족보의 표지가 아니다. 그것은 수천 년 전, 생명을 숭배하고 조상을 기렸던 인간의 마음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증거다. 우리의 이름 앞에 붙은 글자 하나에, 그렇게 깊고 먼 역사가 겹겹이 스며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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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성(姓)과 씨(氏), 우리 이름 뒤에 숨은 오래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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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칼럼] AI 시대의 생존 전략: 한국직업교육원과 전남광주직업교육원 설립을 제안하며
- [교육연합신문=김춘식 칼럼]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추월하는 특이점이 목전에 다가왔다. 거대한 변화의 파도 속에서 대한민국 교육 시스템 역시 근본적인 전환점에 서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현안은 직업교육이다. 이제는 단순히 개인의 기술 습득을 넘어 국가 차원의 체계적이고 지속 가능한 직업교육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때다. 그 해법으로 중앙 정부 수준의 한국직업교육원(가칭)과 광역 단위의 직업교육 거점, 특히 행정과 교육의 대통합을 이뤄낸 지역 모델로서 전남광주직업교육원(가칭) 설립을 적극 제안한다. □ 정치적 이해타산을 넘어선 국가적 책무 반세기 전 故김대중 前대통령은 옥중에서도 지식산업 사회와 초지능 시대의 등장을 예견하며 인본주의적 기술관을 강조했다. 이러한 통찰은 이후 보수와 진보라는 정권의 색채와 상관없이 기술이 곧 국력이라는 명제 아래 국가 전략의 핵심으로 이어져 왔다. 직업교육은 결코 정쟁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의 생존이 걸린 국가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우리 사회의 허리를 지탱해야 할 특성화고와 전문대, 폴리텍대학은 여전히 견고한 학벌주의의 벽에 가로막혀 있다. 기업은 현장에 바로 투입할 인재가 없다고 아우성치고,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다고 한숨짓는 인력 미스매치 현상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교육이 산업의 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지금의 구조를 이대로 방치해서는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 □ 학벌의 늪을 건너 실무 중심의 고등교육 개편으로 뿌리 깊은 학벌 중심 사회는 유능한 청년들조차 현장 대신 대학 간판을 쫓게 만든다. 심지어 일부 특성화고 학생들마저 직업교육 그 자체보다 대입 가산점을 위한 통로로 학교를 선택하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직업교육원의 설립은 이러한 왜곡된 흐름을 바로잡는 마중물이 될 것이다. 이곳은 단순히 기관 하나를 늘리는 차원을 넘어선다.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로 이어지는 직업교육의 끊어진 고리를 잇고, 간판이 아닌 실력으로 승부하는 사회를 만드는 고등교육 구조개편의 신호탄이 될 것이다. 교육의 형식이 아닌 내용에 집중할 때 우리 청년들은 비로소 당당한 전문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 □ 칸막이를 허무는 통합적 컨트롤타워 현재 우리나라 직업교육은 교육부와 고용노동부로 이원화되어 있다. 부처 간의 행정적 칸막이는 현장의 목소리를 빠르게 반영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된다. 새로 설립될 직업교육원은 교육부가 주관하되 산업통상자원부, 중소벤처기업부 등이 긴밀히 협력하는 범부처 통합 기구여야 한다. 학문적 기반과 현장의 실무 훈련이 한데 어우러지는 AI 시대의 기술 사령탑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독일 경제를 지탱하는 저력은 학교의 이론과 기업의 실무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이원화 시스템(Dual System)에서 나온다. 독일에서 직업교육은 단순한 기술자 양성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 인간의 품격을 완성하는 빌둥(Bildung), 즉 자기 형성의 과정이다. 우리도 산업과 교육이 유기체처럼 움직여 미스매치를 해결하는 독일식 구조의 강점에 주목해야 한다. □ 통합 전남광주교육청의 핵심 과제 지역 소멸의 위기 속에 전남과 광주는 행정과 교육의 대통합이라는 역사적 결단을 내렸다. 이 통합의 시너지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줄 모델이 바로 전남광주직업교육원이다. 이곳은 초등과 중등 단계의 진로 탐색부터 고등 단계의 전문 교육까지 아우르는 지역 인재 양성의 거점이 될 것이다. 광주의 인공지능 및 데이터 산업과 전남의 에너지 및 모빌리티 등 지역 전략 산업을 직업교육과 직접 연결해야 한다. 지역 내 기업과 학교가 하나로 묶여 한국형 독일식 교육을 구현할 때 우리 아이들은 기술의 부속품이 아닌 세계적인 전문가로 자라날 수 있다. □ 사유하는 직업인 기술의 주인을 기르는 길 직업교육은 단순히 먹고사는 기술을 가르치는 일을 넘어선다. 인간이 노동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인본주의적 과정이다. 이제 정부와 지자체, 그리고 교육 행정가들은 교육의 본질을 바꾸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한국직업교육원과 전남광주직업교육원은 우리 아이들이 거친 인공지능 시대의 파도를 헤쳐 나갈 든든한 구명정이다. 스스로 질문하고 사유하는 힘을 가진 자유인이자 숙련된 전문가를 길러내는 일,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인공지능 시대를 가장 인간답게 살아낼 따뜻하고도 확실한 해법이다. ▣ 김춘식 동신대학교 에너지경영학과 교수이자 한국독일사학회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의 교육, 독일의 직업교육과 평생교육을 만나다』(포스텍융합문명연구원; 소명, 2025) 등이 있다. ◇ 교육연합신문 논설위원 ◇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 한국독일네트워크(ADeKo) 이사 겸 인문교육위원장 ◇ 2024 칼만 해외석학(독일 연방교육연구부, 아헨공과대학교) ◇ 前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 前 국가교육위원회 미래과학인재양성특별위원회 전문위원 ◇ 前 한국전문대학평가인증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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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칼럼] AI 시대의 생존 전략: 한국직업교육원과 전남광주직업교육원 설립을 제안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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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갑골문 속에서 되살아난 우리 풍습의 그림자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어느 민족이든 과거를 돌아보면 낯익은 것과 낯선 것이 교차한다. 한민족의 오랜 생활 풍습 가운데도 그렇다. 상투, 옷깃, 무릎 꿇어 앉는 자세, 때로는 무덤 속 순장 풍습까지. 이 모든 것이 과연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어떻게 오늘까지 이어져온 걸까? 갑골문, 고분에서 나온 옥인형, 고구려 벽화, 고려와 조선의 기록들을 교차해 읽으며, 동이족과 한민족의 문화적 연속성을 추적해보면, “동이족과 현대 한국인이 완전히 동일하다 말할 순 없다. 그러나 풍습과 생활 속 흔적은 생각보다 많이 이어져 있다.” 이는 단순한 민족주의의 외침이 아니라, 차근차근 증거를 꿰는 실증적 접근이다. □ 왜 동이족을 다시 보아야 하는가 고조선, 부여, 고구려… 이름만 들어도 가슴 뛰는 우리의 옛 나라들이다. 그러나 막상 들여다보면 기록은 신화와 전설로 덮여 있다. 삼국지의 몇 줄 기록이나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후대의 서술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문헌이 부족하다면, 물증으로 보완해야 한다. 갑골문, 옥인형, 무덤 유물, 벽화, 고려도경 같은 외부인의 기록까지 모아 서로 비교해 보아야 한다. 이는 하나의 퍼즐 맞추기와 같다. 문헌만으론 모양이 안 나오던 그림이, 유물과 문자와 풍습을 함께 놓아보면 윤곽을 드러낸다. □ 상투와 옷깃, 생활 속의 흔적 첫 번째 사례는 상투다. 갑골문 가운데 ‘지아비 부자’(夫)라는 글자를 보면 머리 위로 머리를 틀어 올린 듯한 모습이 보인다. 상나라 옥인형에서도 같은 형상이 나타난다. 흥미롭게도 고구려 벽화 속 인물이나 신라 토우에도 상투가 그려져 있다. 진나라 병마용의 머리 모양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뚜렷하다. 진의 군사들은 속발, 즉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다. 이렇게 문자와 유물, 벽화가 한데 모이면, 상투라는 풍습이 단순한 ‘머리 모양’이 아니라 동방 세계의 문화적 표식이었음을 알게 된다.([그림 23] ‘夫’ 참조) 옷깃 방향도 흥미롭다. 갑골문과 고구려 벽화 속 옷깃은 왼쪽으로 여민 ‘좌임’이다. 반면 한나라의 유물은 ‘우임’이 주류다. 왜 이렇게 달랐을까? 이는 활쏘기와 연관이 있다. 좌임은 활을 당길 때 화살이 옷깃에 걸리지 않도록 고안된 궁수 문화의 산물일 가능성이 높다. 스키타이 기마병들의 판금 갑옷도 좌임이었는데, 이 역시 활쏘기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유교가 확산되면서 좌임은 ‘오랑캐의 풍습’으로 낙인찍히고, 대륙의 표준인 우임으로 수렴된다. 풍습이 정치·이데올로기와 만나 변용된 것이다. □ 무릎 꿇은 옥인형과 ‘여자(女)’ 은허에서 나온 작은 옥인형은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모으고 있다. 이 자세는 단순한 예배 동작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일상 자세였다. 의자 대신 바닥에 앉아 생활하던 시대, 무릎 꿇기는 자연스러운 기본 자세였다. 이 인형은 곧 갑골문의 ‘女’와도 연결된다. 여자의 글자는 무릎을 꿇고 앉아 상체를 구부린 모습을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가슴이 강조된 듯한 선까지 남아 있다. 문자란 결국 생활의 기록이라는 말이 이보다 잘 맞는 경우도 드물다. □ 앉는 풍속의 변천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익숙한 ‘양반다리’는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상·주·한 시대에는 바닥에 무릎을 꿇어 앉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당대 이후 서역에서 ‘호자’라 불린 의자가 전래되며 앉는 방식이 변하기 시작했다. 조선 시대에는 온돌의 보급이 큰 변화를 가져왔다. 따뜻한 바닥 덕에 무릎을 꿇기보다는 다리를 풀어 앉는 습관이 자리잡은 것이다. 일본은 다다미 문화 덕에 무릎 꿇어 앉는 풍습이 오래 지속되었으니, 생활기술과 환경이 사람의 몸짓을 바꾸는 대표적 사례라 할 만하다. □ 편두와 순장, 낯선 풍습의 그림자 편두(偏頭), 즉 납작한 머리 모양은 고대 기록마다 묘사가 엇갈린다. 어떤 사서는 부여와 고구려 사람들이 뒤통수를 평평하게 만들었다고 적고, 또 어떤 기록은 그렇지 않다고 전한다. 후한서, 삼국지, 지증대사비… 자료는 제각각이다. 이런 차이는 단순한 사실 확인의 문제가 아니라, 기록자의 인식·편견에서 나온 문제로 본다. 건륭이 남긴 비판적 언급도 이를 뒷받침한다. 실제 풍습이 어땠든, 후대의 눈으로 본 모습은 언제나 가감과 왜곡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순장 풍습은 더욱 극적이다. 상나라 무덤에서는 순장의 흔적이 확연하다. 『삼국지』에도 부여에서 순장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구려 벽화에도 피장자 곁을 지키는 듯한 인물상이 보인다. 신라의 지증왕은 공식적으로 순장을 금지했고, 고려 시대에 이르면 법으로 철저히 막는다. 그러나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는 실제 순장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풍습은 권력과 사회구조의 그림자처럼 나타나고 사라진다. □ 왜 바뀌었을까? 풍습의 변화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첫째는 교류다. 스키타이, 페르시아, 몽골과의 만남이 머리 모양, 옷차림, 무기 체계에 영향을 주었다. 둘째는 사상이다. 유교의 확산은 옷깃 하나까지도 ‘문명 vs 오랑캐’라는 틀로 재해석했다. 셋째는 생활기술이다. 의자와 온돌 같은 작은 발명품이 사람들의 몸짓과 풍습을 완전히 바꿨다. 넷째는 정치다. 순장 금지 같은 국가적 법령이 사회 풍습을 강제로 바꿔놓았다. □ 연속성과 단절의 기억 그렇다고 해서 동이족과 현대 한국인을 단순히 동일시할 수는 없다. 수천 년 동안 수많은 교류와 전쟁, 제국의 흥망이 있었다. 그러나 상투, 좌임, 무릎 꿇기, 편두, 순장 같은 풍습이 문자와 유물, 벽화, 기록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연속된 흐름을 보여준다. 문화는 시간의 겹을 통과하며 남고, 사라지고, 또 변형된다. 갑골문과 유물은 그 겹 사이에 박힌 단서들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꿰어내어, 한 민족의 옷자락을 다시 펼쳐보는 것이다. □ 오늘의 함의 흔히 역사는 먼 과거의 일이어서 우리와 무관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상투를 틀던 손길, 옷깃을 여미던 습관, 무릎 꿇어앉던 자세, 그리고 순장에 담긴 사회 질서까지……. 모두가 오늘 우리의 몸과 의식 속에 길게 드리워져 있다. 민족 정체성이란 단순히 혈통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생활 속에 스며든 몸짓과 관습, 그 변형과 지속 속에서 형성된다. 우리가 흰옷을 고집하듯, 상투나 옷깃, 앉는 방식 하나에도 수천 년의 이야기가 겹겹이 배어 있다. 결국 역사를 본다는 것은, 우리 안의 오래된 몸짓을 발견하는 일이다. 동이족을 다시 보는 것은, 그 속에서 현재 우리를 다시 만나는 길이기도 하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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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갑골문 속에서 되살아난 우리 풍습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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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흰옷을 입은 민족, 그 오래된 빛의 기억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3·1운동의 사진을 떠올려보자. 거리마다 모여든 군중은 손에 태극기를 들고, 모두 흰옷을 입고 있었다.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와 함께 사람들의 옷도 하얗게 빛났다. 일제 당국은 이 장면을 경계했다. 흰옷은 너무나 눈에 잘 띄었고, 동시에 민족의 상징으로 번져갔다. 그래서 일제는 ‘백의(白衣) 금지령’을 내려 흰옷을 입지 못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흰옷은 사라지지 않았다. 왜일까? 흔히 “우리 민족은 가난해서 흰옷만 입었다”, “염색 기술이 부족해서 그렇다”라는 말을 들었다. 또 어떤 이는 “상복을 오래 입는 풍습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설명은 어딘가 부족하다. 과연 흰옷이 단순히 염색 비용을 아낀 가난의 상징이었을까? 아니면 상복의 연장이었을까? 흰옷 숭상이 경제적 이유가 아니라, 훨씬 더 오래된 관념 즉, 태양과 광명에 대한 숭배에서 비롯되었다 □ 갑골문 속 ‘白’자의 비밀 먼저 문자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白(백)’의 갑골문과 소전(小篆) 형태를 보면, 그 기원은 흥미롭다. 글자는 해(日)와 닮아 있으면서도 그 위에 빛줄기 같은 표상을 얹은 모습이다. 다시 말해, ‘白’은 원래 햇빛, 특히 정오의 눈부신 빛을 상징했다는 것이다.([그림 22] ‘白’ 참조) 물론 다른 해석도 많다. 어떤 이는 쌀알을 본뜬 것이라 하고, 어떤 이는 촛불, 또 어떤 이는 누에고치라 말한다. 그러나 ‘日(해)’과의 관계, 선사시대 제천 맥락을 고려할 때 ‘광명 → 흰색’으로 읽는 해석이 훨씬 더 설득력 있다. 흰색은 단순한 색이 아니라, 태양이 내리쬐는 찬란한 빛 그 자체였다.([그림 22] ‘日’ 참조) □ 태생의 빛, ‘소(小)’자의 단서 청동기 문자 가운데 ‘小(소)’의 초기형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학자들은 이 글자의 원형을 태반이나 탯줄과 연결 짓는다. 아이가 태어날 때 맺는 탯줄, 그 창백한 빛깔에서 ‘흰색’의 의미가 비롯되었다는 해석이다. 결국 ‘흰색’은 태어남과 빛, 생명의 상징과 이어진다. 이처럼 문자 속에서 흰색은 처음부터 신성하고 생명적인 의미를 지녔다. □ 은나라에서 조선까지 흰색의 역사적 전승 문자학적 단서가 흰색과 태양을 이어준다면, 역사 기록은 이 관념이 실제 사회 풍습으로 이어진 과정을 보여준다. 중국 고대의 은(殷, 상)나라는 흰색을 신색(神色)으로 삼았다. 제천 의식과 왕실 제사에서 흰색이 신성한 색으로 쓰였다. 이 관습은 은나라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부여, 그리고 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졌다고 한다. 『삼국지』에는 부여인이 흰옷을 즐겨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고려사, 그리고 『세종실록』에도 흰옷에 대한 언급이 이어진다. 백의 민족이라는 인식은 단절되지 않고 기록 속에 계속 이어졌다. □ 오행과 색채 정치 그렇다면 왜 은은 흰색을, 주는 붉은색을 숭상했을까? 이는 고대 중국의 색채 정치, 즉 오행 사상과 관련 있다. 오행에서 흰색은 서쪽과 금(金)을 상징하고, 붉은색은 남쪽과 화(火)를 상징한다. 은은 흰색을, 주는 붉은색을 통해 각기 자신들의 정치적·문화적 정체성을 드러냈다. 조선에 들어오면 흰옷은 여전히 민중의 삶 속에 자리했지만, 동시에 국가 권력은 색을 통제하려 했다. 푸른색 염색을 금지하거나, 특정 계급만이 특정 색을 입게 하는 제도적 규제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그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흰옷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 단순한 경제적 이유일까? 여기서 반론이 제기된다. “조선 사람들은 가난해서 흰옷을 입은 것 아니냐?” 염색에는 비용이 들고, 흰옷은 값이 싸니 자연히 대중화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반론은 “조선은 상복을 중시했으니 흰옷 풍습은 상복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가난이나 상복으로는 왜 왕실과 제사에서조차 흰색이 신성하게 쓰였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또한 왜 이웃 민족들과 달리 한민족은 지속적으로 흰옷을 고집했는지도 풀리지 않는다. 기후나 지역적 조건만으로는 더더욱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문자·제천·왕실 풍습에서 이어진 ‘광명 숭배’의 일관성이 이런 현상을 더 잘 설명해 준다. 흰옷은 가난의 표지가 아니라, 태양의 빛을 입는 행위였다. □ 근대의 백의는 저항과 정체성의 상징 이 오래된 관념은 근대에 들어와 또 다른 의미로 부활한다. 일제강점기, 흰옷은 항일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3·1운동의 군중이 흰옷을 입고 거리를 메운 장면은 세계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일제는 이를 두려워했고, 그래서 백의 착용을 금지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흰옷은 여전히 민족 정체성과 저항의 코드로 살아남았다. 즉, 흰옷은 단순한 의복의 선택이 아니라, 민족의 영혼이 담긴 문화적 표상으로 기능했다. □ 오늘날 흰옷의 의미 오늘날 우리는 예복이나 제례에서조차 흰옷을 자주 입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흰색은 특별하다. 결혼식의 드레스, 장례식의 상복, 국기와 체육대회 단체복까지 흰색은 여전히 ‘순수·광명·정화’의 상징으로 쓰이고 있다. 흰옷은 단순한 옷감의 색깔이 아니라, 오랜 역사와 문화적 기호가 응축된 상징이다. 그것은 태양의 빛을 입고자 했던 제천의 기억이고, 왕실과 민중이 공유한 신성의 색이었으며, 근대에는 저항과 정체성의 옷이 되었다. □ 맺으며 흔히 우리는 “흰옷 입은 민족”이라는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그 뿌리를 따라가면 태양 숭배와 제천, 문자와 왕실 제사, 색채 정치와 항일 저항이 서로 얽힌 깊은 역사를 발견한다. 흰옷은 가난의 흔적이 아니라, 광명과 신성의 표상, 그리고 민족적 정체성의 상징이었다. 오늘 우리가 흰옷을 입을 때, 비록 그 의미를 다 알지는 못하더라도, 우리의 몸은 이미 수천 년 이어온 빛의 전통을 다시 입고 있는 것이다. 흰옷은 단순히 눈에 띄는 색이 아니라, 한민족이 기억 속에서 지켜온 빛의 언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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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흰옷을 입은 민족, 그 오래된 빛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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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칼럼] AI의 시대, 다시 인문학의 시간을 걷다
- [교육연합신문=김춘식 칼럼] 불과 몇 년 전까지 교육 현장과 우리 사회는 '코딩', '3D프린팅', '메타버스'라는 기술적 주문(呪文)에 함몰되어 있었다. 모든 교육의 지향점은 기계적 숙련도에 매몰되었고, 대학의 인문학은 취업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숨을 죽인 채 고사(枯死) 위기에 내몰렸다. 그러나 2026년 오늘, 우리는 거대한 역설의 시대를 목격하고 있다. 인공지능(AI) 기술이 정점에 다다를수록 세상은 오히려 가장 ‘인간다운 것’을 강력하게 호출하고 있으며, 인문학적 사유와 소통 능력이 기술적 기량을 압도하는 핵심 자본이 되는 ‘인류사적 디지털 르네상스’가 그 서막을 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담론이 아닌 실증적 지표로 증명되고 있다. AI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 안드레이 카파시(Andrej Karpathy)는 최근 “이제 가장 핫한 프로그래밍 언어는 인간의 언어”라고 단언했다. 복잡한 코딩 언어보다 문제를 정의하는 ‘비판적 사고력’과 협업을 이끌어내는 ‘공감 능력’이 AI 활용의 성패를 가른다는 뜻이다. 실제로 뉴욕 연방준비은행(New York Fed)의 최신 자료에 따르면, 이공계 전공자의 실업률(5.9~7.2%)보다 인문학 전공자의 실업률(3.0~3.8%)이 현저히 낮게 나타났다. 이는 기술의 유효기간이 급격히 짧아지는 시대에 특정 기술에만 매몰되기보다, 변화하는 환경을 유연하게 읽어내고 맥락을 짚어내는 인문학적 소양이 노동시장에서 훨씬 더 높은 생존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방증이다. 파편화된 정보를 엮어 통찰을 만드는 능력이 AI 시대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 셈이다. 한국 교육은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인프라를 구축하며 2023년 이래 ‘국제 컴퓨터·정보 소양 연구(ICILS)’ 등에서 압도적인 성과를 거두어 왔다. 하지만 자부심 이면에 도사린 과제는 무겁다. 이제는 하드웨어의 확충을 넘어 그 안을 채울 ‘질적 소프트웨어’, 즉 교육의 본질을 혁신해야 한다. 기술 도입에 앞서 ‘비판적 미디어 수용 능력’을 최우선 가치로 세워야 하며, 단순히 기술을 가르치는 것을 넘어 기술이 사회와 인간에 미치는 영향을 성찰하게 하는 교육 모델로의 전격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가장 시급한 실천은 교사의 역할 재정의다. 지식의 전달은 AI가 더 효율적으로 수행하겠지만, 학생의 윤리적 판단력을 길러주고 기술적 한계를 비판적으로 조망하게 하는 것은 오직 인간 교사만이 가능하다. 교사는 이제 지식 공급자가 아니라 인문학적 성찰을 이끄는 ‘조력자’이자 기술의 오남용을 막는 ‘윤리적 등대’가 되어야 한다. 교육 현장은 이제 단순히 기기를 다루는 법이 아니라, AI의 결과물을 의심하고 재해석하는 능력을 키우는 '질문의 장'으로 변모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찰을 넘어 구체적인 교육 혁신에 나서야 한다. 첫째, 교과 과정을 기술 습득과 더불어 인문학적 사유와 비판적 글쓰기를 동시에 함양할 수 있는 구조로 재편해야 한다. 둘째, AI 학습 도구 활용 시 기술적 오류와 편향성을 탐색하는 ‘디지털 혹은 인공지능 문해력(AI Literacy)’ 교육을 정규 과정에 전면 배치해야 한다. 셋째, 정답을 찾는 경쟁보다 인간과 기술의 공존 방안을 모색하는 프로젝트형 인문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나아가 이러한 교육적 실천은 교실의 담장을 넘어 사회적 연대로 확장되어야 한다. AI가 가져올 고용 구조의 변화와 윤리적 혼란은 어느 한 분야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산·학·연이 머리를 맞대어 인문학적 통찰이 기술 개발의 가이드라인이 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시민사회가 기술의 공공성을 감시하는 역량을 키울 때 비로소 우리는 기술에 매몰되지 않는 단단한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다. 인문학적 가치는 결코 먼지 쌓인 옛 유물이 아니라, AI 시대를 당당하게 헤쳐 나갈 가장 품격 있는 삶의 전략이다. 우리가 고유한 인간성을 잃지 않으면서 거센 기술의 파도를 넘는 주체가 될 때, 비로소 교육은 그 존재의 이유와 근본 가치를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교육 현장의 체질을 인문학적 성찰 중심으로 유연하게 바꾸는 실천이 필요하다. 그것이 이 시대 인문학이 우리에게 부여한 소중한 과업이자, 인간과 기술이 공존하는 미래를 열어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 김춘식 ◇ 동신대학교 교수 ◇ 교육연합신문 논설위원 ◇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 한국독일네트워크(ADeKo) 이사 겸 인문교육위원장 ◇ 2024 칼만 해외석학 ◇ 前국가교육위원회 전문위원 ◇ 前한국전문대학평가인증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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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칼럼] AI의 시대, 다시 인문학의 시간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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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강강수월래, 춤추는 글자의 기원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한여름 보름달 아래, 손에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노래하고 춤추던 기억이 있는가. “강강수월래―” 소리를 높이면, 어느새 우리 몸은 노래와 하나가 되고, 둥근 원 속에서 삶의 고단함도 흩어진다. 이 단순한 원무(圓舞), 곧 손잡고 도는 춤은 어쩌면 수천 년을 이어온 인간 공동체의 원초적 몸짓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춤’이라는 글자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태어났을까. 오늘 우리가 쓰는 ‘舞(무)’자는 갑골문에서부터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단순한 몸놀림 이상의 의미, 곧 공동체가 하늘에 기도하고 자연과 소통하던 오래된 제의적 기억이 숨어 있다. □ 팔 벌린 사람, 손에 든 도구 갑골문 속 ‘舞’는 단순하다. 두 팔을 활짝 벌린 사람의 형상(大) 위에, 양손에 나뭇가지나 깃털, 혹은 꼬리 같은 도구가 들려 있다. 이 도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어떤 이는 소의 꼬리라고 했고, 어떤 이는 깃털 장식이라고 했다. 최근에는 제의적 도구, 이를테면 바람과 비를 불러들이는 가지나 부채와 같은 기능을 가진 물건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그림 21] ‘舞’ 참조) 중요한 건, 춤의 본래 모습이 단순한 오락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양손에 든 도구는 하늘에 대한 기도, 특히 기우제와 같은 제천의식의 상징일 수 있다. 하늘을 향해 흔들고, 땅을 두드리며, 무리를 지어 돌던 춤. ‘舞’의 출발은 곧 공동체 전체가 하나 되어 하늘과 소통하던 몸짓이었다. □ 발자국이 더해지다 흥미로운 점은 글자의 변화다. 갑골문에서는 단순히 팔 벌린 사람과 도구만 그려졌지만, 금문(청동기에 새겨진 문자)과 소전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요소가 추가된다. 바로 발자국이다. 글자 아래 ‘止(발자국 지)’ 모양이 덧붙으며, 이제 ‘무’는 단순히 도구를 든 사람이 아니라 발을 옮기며 움직이는 장면으로 변한다. 다시 말해, 춤은 손의 동작과 함께 발의 움직임까지 담아내며 본격적으로 ‘춤’의 의미를 확립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舞’와 ‘無(없을 무)’가 일시적으로 의미 관계를 맺은 흔적도 보인다. 어떤 제의에서는 손에 든 도구를 불 속에 던져 태움으로써 ‘없어짐’을 상징했는데, 이런 의례적 맥락이 ‘무(無)’의 뜻과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문자학적 세부는 복잡하지만, 분명한 것은 춤과 제의가 분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 춤은 제사였다 우리는 춤을 흔히 예술이나 오락으로 본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 춤은 무엇보다 제사였다. 춤은 신과 만나는 길이었고, 공동체가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의식이었다. 중국의 종묘대제 기록에는 ‘무구(舞具)’라는 도구가 등장한다. 북과 피리뿐 아니라, 춤추는 이들이 손에 들던 도구가 제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한국의 종묘제례악에서도 춤은 빠질 수 없는 요소다. 다만 조선시대의 종묘무는 송나라와 고려를 거쳐 들어온 양식을 계승한 것이어서, 갑골문 ‘舞’의 원형과 동일시하기에는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의식에서 춤이 빠질 수 없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춤은 곧 기도였고, 기도는 춤이었다. □ 고고학과 민속의 증언 문자의 해석을 넘어 고고학은 우리에게 더 구체적인 그림을 보여준다. 요하 지역의 우하량 유적에는 제천을 위한 원형 재단이 발견되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 사상을 구현한 구조다. 흥미롭게도 강화도의 참성단도 이와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 우연일까, 전승일까? 또한 중국과 티베트 일대에서는 4~5천 년 전 도자기에서 원을 그리며 춤추는 무리의 그림이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손에 손을 잡고 둥글게 선 채 발을 구르며 춤을 춘다. 이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문득 오늘날의 ‘강강수월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강강수월래가 곧 갑골문 ‘舞’의 원형이다”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문화는 복잡하게 전파되고 변용된다. 그러나 원무, 즉 원을 그리며 집단으로 추는 춤이 인류 보편의 오래된 제의적 몸짓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강강수월래는 그 기억의 한국적 변주라 할 수 있다. □ 춤은 어떻게 전승되었나 고대의 춤이 제의적 기원에서 출발했다면, 이후의 역사는 수용과 변용의 과정이었다. 송나라에서 유입된 궁중무가 고려와 조선을 거쳐 종묘제례악에 자리 잡았듯, 춤은 국경과 시대를 넘어 옷을 갈아입으며 이어졌다. 고구려의 넓은 소매춤을 갑골문 ‘舞’와 직접 연결 짓는 해석도 있지만, 역사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선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춤이 시대마다 다른 이름과 형식을 입었어도 그 뿌리에는 늘 공동체적 기도와 제의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곧 춤의 본질이었다. □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이제 우리는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춤이 왜 필요했을까. 단순히 즐기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다. 춤은 곧 공동체의 생존과 직결되었다. 비가 와야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풍년이 들어야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었다. 하늘에 기도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은 몸을 흔들고, 손에 도구를 들고, 발을 구르며 춤을 췄다. 오늘 우리는 더 이상 하늘에 비를 빌기 위해 춤을 추지 않는다. 그러나 축제와 무대, 혹은 운동장에서 손에 손을 잡고 함께 노래하며 몸을 흔들 때, 우리는 여전히 같은 기억을 공유한다. 춤은 여전히 우리를 하나로 묶어준다. 강강수월래는 단순한 민속놀이가 아니다. 그것은 하늘을 향한 오래된 기도의 기억이자, 공동체가 함께 살아남고자 했던 몸짓의 유산이다. □ 맺으며 갑골문 ‘舞’는 단순히 춤을 뜻하는 글자가 아니다. 그것은 팔 벌린 사람과 양손의 도구, 그리고 발자국이 새겨진, 살아 있는 의식의 기록이다. 춤은 오락이 아니라 제사였고, 기도였다. 우하량의 재단, 강화도의 참성단, 고대 도자기의 원무, 그리고 오늘날의 강강수월래. 이 모든 것이 서로 닮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춤이 인류의 가장 오래된 언어이기 때문이다. 노래와 몸짓으로 하늘에 닿고, 서로의 마음에 닿고자 했던 몸의 언어. ‘舞’라는 글자 속에는 바로 그 언어가 새겨져 있다. 춤은 단순한 몸짓이 아니라 공동체의 기도였고, 글자는 그 기도를 잊지 않기 위한 도구였다. 수천 년이 흘러도 우리는 여전히 그 글자 속 발자국을 따라 걷고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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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강강수월래, 춤추는 글자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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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칼럼] 인공지능의 빛과 단종의 그림자: 기술 권력 시대, 왜 우리는 다시 슬픔의 공동체를 찾는가
- [교육연합신문=김춘식 칼럼] □ 프롤로그: 0과 1의 세계에서 터져 나온 집단적 통곡 최근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이하 단종)가 개봉 31일 만에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사회적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투자배급사 쇼박스가 관객의 뜨거운 성원에 보답하고자 마련한 ‘통곡 상영회’는 예매 시작과 동시에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큰 화제를 모았다. 효율과 논리가 지배하는 인공지능(AI) 시대에 현대인들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울기 위해 극장으로 모여드는 현상은 단순한 흥행 기록 그 이상의 의미를 시사한다. 스크린 속 어린 왕의 비극에 수많은 이들이 오열하는 모습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감상적 동조를 넘어선다. 그 이면에는 빛의 속도로 질주하는 기술 문명 속에서 방향 감각을 잃고 소외된 현대인의 깊은 실존적 공허함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기계가 결코 복제할 수 없는 인간성의 최후 보루를 확인하기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 기술의 초가속과 인간의 정서적 지연 인공지능은 어제의 불가능을 오늘의 일상으로 치환하며 진화한다. 그러나 인간의 생물학적 뇌와 정서 체계는 이토록 빠른 기술 속도에 적응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기술 문명은 삶의 중심을 잡아주던 기준점인 닻을 흔들어 놓았고, 그 결과 많은 이들이 공중에 부유하는 듯한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정체성의 위기는 고도화된 기술 사회에서 낙오될지 모른다는 실용적 공포와, 모든 것이 데이터로 환원되는 세상에서 인간 고유의 감정적 교감이 거세당하고 있다는 근원적 두려움을 동시에 낳는다. 기술이 가속화될수록 우리 내면에는 기묘한 정서적 지연 현상이 발생하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점점 더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온다. 단종의 비극에 대한 열광은 바로 이 길을 잃은 세대가 찾아낸 역설적인 안식처인 셈이다. □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과 통곡 상영회의 평행이론 현대인들이 통곡 상영회로 집결하는 모습은 수천 년간 특정 민족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Wailing Wall)’을 연상시킨다. 거대한 성벽 앞에 모여 자신의 고통을 하늘에 고하고 집단적으로 슬픔을 공유하며 정체성을 지켜냈듯, 오늘날의 관객들은 극장이라는 현대적 성벽 앞에 모여 디지털 시대에 상실해 가는 인간의 원형을 붙잡으려 한다. 인공지능은 결코 눈물을 흘릴 수 없기에, 인간의 눈물이 지닌 실존적 가치는 이 지점에서 더욱 빛난다. AI는 수억 개의 데이터를 학습하여 가장 그럴듯한 답변을 출력할 수는 있지만, 가슴이 먹먹해지고 목이 메는 신체적 고통을 수반한 실제적 경험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슬픔은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우리가 기계가 아님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하고도 유일한 신호다. 통곡 상영회는 인공지능이 줄 수 없는 따뜻한 위로와 연대를 확인하는 현대판 통곡의 벽이라 할 수 있다. □ 아날로그적 결핍과 살롱 문화의 귀환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으나, 역설적으로 심각한 정서적 굶주림을 겪고 있다. 온라인 소통이 강화될수록 대면 소통은 줄어들고, 이모티콘과 ‘좋아요’는 타인의 온기를 갈구하는 인간의 근원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이러한 결핍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과거 계몽주의 시대 유럽의 교양 사회를 이끌었던 ‘살롱 문화(Salon culture)’에 주목해야 한다. 살롱은 당대의 지식인들이 모여 철학과 예술, 정치와 사회를 논하며 고립된 자아를 확장하던 소통의 장이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적 노동을 대체하는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를 전달하는 기계적 회의가 아니다. 오히려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고 지적으로 자극하며 인간적 유대를 쌓는 ‘취향과 감성의 공동체’가 절실하다. 디지털의 범람 속에서 아날로그적 온기를 간직한 작은 살롱들은 우리를 기계적 종속으로부터 해방해 줄 정서적 피난처가 될 것이다. □ 역사적 고비로서의 AI 혁명과 기술 권력에 대한 공포 역사적으로 기술의 급격한 전환기는 언제나 인간 소외와 정체성 붕괴라는 혹독한 대가를 요구해 왔다. 산업혁명의 가속화가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듯, 현재의 4차 산업혁명 역시 인류에게 거대한 실존적 위협을 가하고 있다. 현대인이 느끼는 막연한 불안은 AI가 일자리를 뺏을 것이라는 걱정을 넘어, 기술을 장악한 소수 권력에 의해 인간의 판단과 감정이 통제당할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정보를 소비하고 데이터가 분석한 감정에 의존하는 삶 속에서 인간의 주체성은 점차 희미해진다. 우리는 지금 역사의 심판대 위에서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기술이 우리를 이끄는 대로 내버려 둘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기술의 방향을 결정할 것인가. □ 에필로그: 인간 중심의 5차 산업혁명과 공동체 리빙랩의 시대 결국 해답은 기술의 거부가 아니라 인간성을 중심에 둔 기술의 통제와 관리에 있다. 기술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주인이 아닌,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도구로 남을 수 있도록 윤리적·제도적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것이 바로 인공지능 시대의 정서적 공허함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인간 중심의 5차 산업혁명’의 핵심 가치다. 이러한 가치를 현실화할 구체적인 대안으로 생활 현장 기반의 ‘리빙랩(Living Lab)’ 공동체에 주목해야 한다. 리빙랩은 시민들이 삶의 현장에서 기술을 도구 삼아 지역 사회의 문제를 직접 해결해 나가는 ‘살아있는 실험실’이다. 이는 전문가의 일방적인 주도를 넘어 사용자 중심의 사회 혁신을 실현하며, 기술이 만남을 대체하는 고립의 섬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잇는 따뜻한 다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통곡 상영회에서 터져 나온 뜨거운 눈물은 기술 문명의 노예가 되지 않고 존엄한 인간으로 남겠다는 가장 강력한 저항이자 선언이다. 슬픔은 기계가 결코 침범할 수 없는 인류 최후의 영토다. 우리가 여전히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고 함께 울 수 있는 한, 인류의 이정표는 차가운 알고리즘이 아닌 따뜻한 공감의 선율을 따라 움직일 것이다. 결국 슬픔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며, 그 공감의 능력이 바로 우리가 인공지능 시대를 인간답게 살아내야 할 진정한 이유다. ▣ 김춘식 ◇ 동신대학교 교수 ◇ 2024 칼만 해외석학 ◇ 교육연합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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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칼럼] 인공지능의 빛과 단종의 그림자: 기술 권력 시대, 왜 우리는 다시 슬픔의 공동체를 찾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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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죽은 자의 발자국, 살아 있는 자의 기억-은자 ‘복(復)’의 이야기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역사라는 것은 언제나 낯설고도 친근하다. 눈앞에 있는 돌 하나, 땅속에서 나온 기와 조각 하나에도 수천 년의 기억이 서려 있다. 그런데 그 기억을 읽어내는 방식은 시대와 권력, 그리고 우리의 시선에 따라 달라진다. 갑골문 이야기도 그렇다. 중국에서는 흔히 갑골문을 ‘중화문명의 뿌리’라 부른다. 맞는 말이지만, 그 내부로 들어가면 상황은 조금 다르다. 정작 갑골문이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지, 글자 하나하나가 어떤 사연을 품고 있는지 아는 이는 드물다. “갑골문 글자 하나만 해독해도 10만 위안을 번다더라”는 식의 괴담이 대중 속에 퍼져 있을 정도다. 귀중한 문화유산이지만, 막상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신비하고도 난해한 문자일 뿐이다. 하지만 갑골문을 단순히 난해한 고문자로만 본다면 그 속의 생생한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놓치게 된다. 오늘 다루려는 ‘복(復)’자가 바로 그렇다. 우리는 보통 ‘복’이라 하면 ‘되돌아온다, 회복한다’는 뜻을 떠올린다. 하지만 갑골문 속 ‘복’은 조금 다르다. 글자의 형상을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단순한 ‘돌아옴’ 이상의, 생과 사를 오가는 깊은 상징을 만나게 된다. □ 발자국, 집을 나서다 먼저 글자의 아랫부분을 보자. 거기에는 ‘止(지)’라는 모양이 새겨져 있다. 우리는 이 글자를 오늘날 ‘그칠 지’라고 읽지만, 본래의 뜻은 달랐다. ‘발자국’ 혹은 ‘발이 움직이는 모습’을 나타내는 상형이었던 것이다. 즉, ‘앞으로 걸어간다’는 의미가 기본에 깔려 있었다. 그런데 ‘복’자의 갑골문에서는 이 발자국이 거꾸로 뒤집혀 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집에서 ‘밖으로 나가는’ 모양새다. 발길이 안쪽을 향하지 않고 바깥으로 향한다는 점이 중요한 대목이다. 이 발자국 위에는 직사각형 구조물이 놓여 있다. 마치 성곽이나 움집처럼 보이는 그림이다. 그 중앙에는 삼각형, 혹은 역삼각형의 표시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출입구를 뜻하는 기호로 자주 쓰였다. 그렇다면 이 모양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단순히 해석하면 ‘집에서 발길이 밖으로 향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갑골문은 늘 단순한 그림 이상이다. 당대의 삶과 죽음을 담아내는 기호였으니, 여기서 집은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니라 죽은 자의 거처, 곧 신옥(神屋)이나 무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발자국이 밖으로 향하는 장면은? 바로 ‘죽은 자의 영혼이 집을 나서 세상으로 나온다’는 뜻이다.([그림 20] ‘復’ 참조) 즉, 복(復)은 ‘다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의 발길이 세상으로 되돌아오는 장면’을 담고 있는 셈이다. □ ‘아(亞)’와 ‘복(復)’의 친연성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것은 ‘아(亞)’자와의 연관성이다. ‘亞’ 하면 우리는 흔히 ‘버금, 차순위’의 뜻을 떠올린다. 하지만 원래 이 글자는 조상의 영혼이 거처하는 종묘를 둘러싼 길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귀신의 집’이라는 뜻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그림 20] ‘亞’ 참조) 시간이 흐르면서 ‘亞’는 단순히 위계나 순서를 표시하는 용도로 의미가 축소되었지만, 갑골문 단계에서는 ‘죽은 자와 산 자를 이어주는 장소’를 뜻했다. ‘복(復)’자가 ‘죽은 자의 발자국’이라면, ‘亞’는 그 발자국이 오가는 길과 공간이었다. 두 글자는 같은 세계관 속에서 서로 호응하며 만들어진 셈이다. □ 고고학이 말해주는 것들 갑골문 해석은 종종 고고학의 발견과 맞닿는다. 하북성에서 발견된 조조의 무덤을 보자. 무덤 구조가 ‘복’자의 형상과 닮아 있다. 직사각형의 집 모양, 출입구, 바깥으로 향한 통로. 조조 무덤이 실제로 그 시대의 것인지 여부를 떠나, 이 형식이 상나라 이래 이어져 온 전통임을 보여준다. 더 흥미로운 건 한반도의 사례다. 2007년 경북 문경의 고모산성에서 5세기 지하 목조건물이 발굴되었다. 고고학자들은 그 내부 구조를 보고 깜짝 놀랐다. 직사각형의 집 모양과 출입구, 그 배치가 갑골문 속 ‘복(復)’자의 형상과 거의 동일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상나라의 건축 전통, 나아가 동이족 문화권의 신앙과 생활양식이 한반도 신라에까지 전승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결국 ‘복’자는 단순히 문자 차원의 해석이 아니라, 건축, 장례, 종교적 의례 전반과 연결되는 문화적 상징이었던 것이다. □ 돌아옴은 곧 ‘영혼의 귀환’ 우리는 흔히 ‘복’이라는 글자를 일상적으로 쓴다. 회복, 반복, 복귀. 모두 되돌아옴을 뜻한다. 하지만 그 뿌리를 더듬어 올라가면, 그 되돌아옴은 단순히 사람의 이동이 아니라 ‘영혼의 귀환’을 가리켰다. 죽은 자가 저승에서 다시 세상으로 나오는 발자국, 그것이 곧 ‘복’이었다. 동이족의 세계관에서는 죽음은 단절이 아니었다. 삶과 죽음은 서로 문을 열고 드나드는 관계였다. 영혼은 저승으로 떠났다가도 제사와 의례를 통해 언제든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서 무덤은 단순한 ‘끝’이 아니라, 양쪽 세계를 이어주는 통로였고, 갑골문 속 ‘복’은 그 문턱에서 찍힌 발자국이었다. □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여기서 우리는 질문 하나를 던질 수 있다. 왜 동이족은 죽음을 ‘복’이라 불렀을까. 왜 발자국이 집을 나서는 장면을 글자로 새겼을까. 그것은 아마도, 죽은 자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올 존재’임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우리는 과학의 시대를 산다. 영혼의 귀환 같은 이야기는 미신으로 치부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믿음이 담고 있던 삶의 태도, 곧 죽음을 두려움이 아니라 ‘되돌아옴’으로 바라보던 시선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그것은 단절 대신 순환을, 끝 대신 이어짐을 강조하는 세계관이다. 문경 고모산성 지하 건축물의 발자취를 바라보며, 혹은 갑골문 속 ‘복’자를 마주하며 우리는 깨닫는다. 우리 조상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삶과 죽음을 하나의 길 위에서 바라보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발자국은 멈추지 않고 이어져 왔다는 것을.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의 존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갑골문 속 작은 발자국 하나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귀환이며, 우리는 모두 언젠가 다시 ‘복’할 존재라는 것. □ 맺으며 중국에서조차 대다수는 알지 못하는 갑골문. 그러나 그 안에는 동아시아 문명의 뿌리, 나아가 한반도까지 이어진 깊은 문화의 흔적이 숨어 있다. ‘복(復)’자는 그중에서도 특별하다. 단순히 돌아옴을 뜻하는 글자가 아니라, 죽은 자의 영혼이 세상으로 돌아오는 상징,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잇는 통로였다. 이제 우리는 ‘복’자를 다시 읽어야 한다. 그것은 단지 반복되는 일상의 귀환이 아니라, 선조들의 영혼이 오늘도 우리 곁에 되돌아오는 발자국이다. 고대의 무덤과 건축물, 그리고 문자 속에 살아 있는 그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돌아갈 것인지에 대한 답도 조금은 가까워질 것이다. 죽은 자의 발자국은 살아 있는 자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울리고 있다. 그것이 바로 갑골문이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오래된, 그러나 가장 따뜻한 위로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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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죽은 자의 발자국, 살아 있는 자의 기억-은자 ‘복(復)’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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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무지개, 한자 속에 새겨진 색과 신화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무지개는 누구에게나 신비롭다. 비가 갠 뒤 하늘에 걸리는 곡선, 일곱 가지 색이 겹쳐진 장면을 우리는 자연의 선물로 받아들인다. 어린 시절 과학책에서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 순으로 줄 세워 배웠지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 이 현상은 단순한 스펙트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특히 동아시아, 그중에서도 고대 동이족 사회에서는 무지개의 색을 자연 관찰과 신화, 인간과 연결해 해석했고, 그 흔적이 한자 속에 남아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먼저 서양에서 무지개 색을 기억하는 방법을 떠올려보자. 영어권에서는 R.O.Y.G.B.I.V.라는 이니셜, 즉 Red(빨강), Orange(주황), Yellow(노랑), Green(초록), Blue(파랑), Indigo(남색), Violet(보라)를 외운다. 15세기 영국, 요크 공작 리처드의 장미 전쟁 패배와 연결해, 교육과 기억을 돕는 장치로 정착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세기도 코구세이(世も世も今や昔)'’란 이름으로 비슷한 체계를 가졌지만, 중국이나 고대 동이족 사회에는 이렇게 알파벳식 축약 표현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무지개의 색은 자연과 인간, 신화적 존재를 결합해 문자와 그림으로 표현되었다. □ 홍색(빨강) - 용과 불타는 색의 상징 무지개의 첫 색, 빨강은 동이족에게 단순한 색상이 아니었다. 갑골문 속 기록을 보면 무지개는 ‘북쪽에서 내려와 강에서 물을 마시는 신비한 생물’로 묘사되었고, 종종 머리가 두 개인 용으로 그려졌다. 이 용은 암용과 수용으로 나뉘는데, 수용은 화려한 색, 특히 빨강을 띠었다. 초기 갑골문에서는 뱀과 공(큰 것)을 합쳐 거대한 용으로 표현했고, 이후 소전과 해서에 이르러 용이라는 상징이 정교하게 확립되었다.([그림 19] 참조) 한국과 일본에서는 이 빨강을 ‘불타는 붉은색’으로, 중국에서는 비단에 염색한 ‘홍자’로 표현했다. 관련 글자로는 적(赤), 홍(紅), 주(朱), 단(丹), 비(緋) 등이 있다. 단순히 눈으로 보는 색을 넘어, 인간과 신화적 상상, 그리고 제의적 의미까지 포괄한 색이었다. □ 주황색 - 등자와 황자 주황색은 자연과 인간의 생활을 연결한 색이다. 한국에서는 ‘불굴 주자’와 ‘황자’를 합쳐 주황색을 표현했다. 등자는 인도에서 유래해 한국에서 재배가 어려웠지만, 색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채택됐다. 황색은 갑골문에서 태반과 출산 장면을 묘사하면서 발전했다. 갓 태어난 아이의 피부색, 건강과 번식의 상징, 그리고 귀중함을 나타내는 황금과 황제, 옥토와 연결된다. 이렇게 주황과 황색은 단순한 색을 넘어 생명과 번영을 상징하는 색이 되었다.([그림 19] 참조) □ 초록색 - 풀과 우물, 생명의 색 초록은 무지개의 자연적 색상을 대표한다. 갑골문에서는 우물가의 싱싱한 풀 그림에서 비롯됐다. 당시 동이족은 녹색과 청색을 엄격히 구분하지 않았으며, 자연 속 푸른 풀과 물빛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소전과 해서에 이르러서는 명주실과 우물물 그림으로 발전해, 청록빛을 표현하는 문자가 만들어졌다. 즉 초록색은 자연의 생명력과 물의 신비를 동시에 담은 색이었다.([그림 19] 참조) □ 파란색 - 쪽람과 청자 파란색은 쪽람, 즉 쪽 염색과 연결된다. 소전 단계에서는 풀과 감 그림으로 발전해, 쪽을 물에 적셔 햇볕에 말린 청색 천을 상징했다. 우리가 잘 아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속담은 청자가 먼저 있었고, 쪽람은 소전 시대 이후 등장했다는 연구가 많다. 동이족의 색 개념에서 파랑은 염색 기술과 자연의 색이 결합해 문자가 된 사례다.([그림 19] 참조) □ 자주색 - 명주실과 색의 혼합 마지막으로 자주색은 명주실에 빨강과 파랑을 혼합해 얻은 색이다. 갑골문과 금문에서는 사람, 발, 명주실 그림이 합쳐져 자주빛을 나타내는 글자로 정착했다. 현대적 감각에서 자주색의 범위가 넓어 명확한 정의는 어렵지만, 혼합과 조합을 통한 색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그림 19] 참조) □ 무지개 색과 문화적 의미 이처럼 무지개는 단순히 하늘의 현상에 머무르지 않았다. 고대 동이족은 비 온 뒤 나타난 하늘을 통해 자연, 인간, 신화적 존재를 연결했다. 각 색은 생명, 풍요, 불, 물, 염색 기술 등 구체적 경험과 결합해 의미화되었다. 문자의 발전도 흥미롭다. 갑골문에서는 그림처럼 구체적 도상을 사용했고, 금문과 소전을 거치며 도상과 의미가 점차 추상화됐다. 해서에 이르러 현대 한자로 정착하면서도 초기 의미와 상징은 여전히 남아 있다. 또한 지역별로 색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달랐다. 한국과 일본은 동이족 전통의 색상과 상징을 비교적 그대로 유지했지만, 중국에서는 문화적, 지역적 차이에 따라 일부 색상을 선택하거나 방식이 달라졌다. □ 결론 : 무지개, 자연과 인간의 기록 무지개의 색은 단순한 스펙트럼이 아니었다. 고대 동이족에게는 인간, 자연, 신화가 결합된 문화적 상징이었다. 그 의미는 문자 속에 새겨졌고, 시대를 거치며 한자로 정착했다. 오늘날 우리가 무지개를 볼 때 느끼는 경이로움 속에는, 수천 년 전 사람들이 하늘을 바라보며 느끼고 기록한 경험이 겹겹이 쌓여 있다. R.O.Y.G.B.I.V.라는 영어 축약법은 현대인의 기억 장치일 뿐, 동이족은 용, 풀, 물, 명주실, 신화적 존재를 통해 색을 이해했고, 문자로 남겼다. 한 글자, 한 색 속에는 자연 관찰, 인간 생활, 신화, 사회적 의미가 결합되어 있다. 무지개를 바라볼 때, 우리는 그 긴 시간과 문화의 흐름을 함께 보는 셈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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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무지개, 한자 속에 새겨진 색과 신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