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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칼럼/기고 기사

  • [기고] 우리 아이들 생존수영 교육, 이대로 좋은가? ①
    [교육연합신문=정광수 기고] 예고 없이 찾아오는 생명의 위협. 그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생존수영의 중요성... 인접 국가는 어떠하며, 우리는 어떻게 발전시켜 나가야만 하는가? 2014년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사고. 그들은 다시 올 수 없는 사고로의 항해를 시작했고, 예고 없이 생명의 위협은 그들에게 찾아왔다. 그리고 300여 명의 안타까운 소중한 생명들을 앗아갔다.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와 국민 모두는 생명과 집결되어 있는 안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수상안전사고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대비할 수 있는 생존수영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정부와 교육당국은 지속적인 생존수영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였고 그 결과로 초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한 생존수영 교육이 2015년부터 확대 운영되게 되었다. [세월호와 생존수영 / 위 사진은 해당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 없음. (사진=자료사진)] 간단히 말해서 생존수영은 사고로 물에 빠졌을 때 자신을 지키고 생명을 지키기 위한 수영법이다. 일반적인 수영 영법은 에너지 소모가 많은 발차기나 팔 동작을 통해 수영 영법에 대한 스킬(Skill)을 배우는 데 집중하지만 생존수영에서는 물에 대한 공포심을 없애고 물 위에 뜨는 요령, 에너지 소모가 적은 기초 평영, 체온 유지를 위한 방법들을 배움으로써, 구조대가 도착하여 구조될 때까지 최대한 물 위에서 오래 버틸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 목적인 셈이다.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물속에서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익히는 데 중점을 두기 때문에 수영 영법 교육이라기보다는 안전교육으로 인식되어 오래전부터 영국과 프랑스, 독일, 스웨덴,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안전교육의 하나로 생존수영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 한국의 모습은 어떠할까?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우리 한국의 수상안전의 민낯은 어떠할까? 그야말로 상황이 좋지 않다. 우리 한국 어린이의 수상 익사 사망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고인 것으로 나타났다. OECD 통계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어린이 10만 명당 3.1명이해마다 익사사고로 숨지는 것으로 파악됐다. 익사 사망률이 0.4명으로 세계 최저 수준인 영국, 이탈리아, 스웨덴은 물론이고 일본(1.3명)이나 미국(1.6명)보다도 크게 높은 것이다. 조사 대상국 중 2위인 멕시코의 2.4명보다도 10만 명 중 약 1명꼴로 한국 어린이의 익사 사망률이 높았다. 이에 대해 교육 당국에서는 ‘생존수영’의 조기교육을 공교육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제안이 나왔고, 이에 따라 2015년부터 진행된 생존수영이 정시 과목으로 채택되어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외국에서의 생존수영의 사례를 살펴보면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일본 등 많은 나라의 어린이들은 평소 입던 옷과 신발을 신고 수영을 배우고 있다. 각국의 사례 중 한국과 가까운 일본만 하더라도 생존수영이라는 용어 대신에 착의영(着衣泳·일상복을 입고 하는 수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즉, 일반적인 영법 수영의 개념이 아닌 실제적인 재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옷을 입은 채로 수영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안전교육 수영의 입장에서 명칭 또한 바꾼 것이다. 실제로 조난 시에 신발과 옷은 부력을 얻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존수영 교육 관계자도 말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일부 교육현장에서 생존수영 수업 때 옷 입은 상태로 물에 들어가 교육받는 착의 영과 유사한 형태의 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 [착의수영과 생존수영 / 위 사진은 해당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없음. (사진=자료사진)] 하지만 대부분의 교육생들은 일반 평상복이 아닌 발수력이 좋은 ‘래시가드(Rash Guard)’를 준비해 교육에 참여한다. 여건이 된다면 생존수영 교육 시 간단한 시범식 교육을 통해서라도 일부의 인원이 일반복 착용하에 생존수영 교육을 진행하고, 나아가서는 전 인원이 평상복 착용하에 생존수영을 배워본다면 보다 더 실질적인 교육으로의 발전이 이루어질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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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29
  • [기자수첩] 코로나19에 고개드는 수상안전 불감증
    [교육연합신문=김태호 기자] 코로나19로 인해 학교 생존수영 교육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또 다른 수상안전사고 불감증으로 오지 않을까. 세월호 참사의 교훈으로 시행된 생존수영, 이대로 다시 안전불감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2019년 연말. 그리고 2020년 연초. 대한민국은 코로나19의 감염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모든 국민에게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고, 이에 따라 교육당국도 초유의 조치로 온라인을 이용한 비대면 수업을 진행했으며 졸업식, 입학식의 일상적인 행사 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생존수영과 같은 정규 교과 실기과목 조차도 코로나19 감염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교육당국은 2020학년 1학기 생존수영 수업을 잠정 연기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단기간에 종식될 줄 알았던 코로나19는 지속적인 감염 증가 추세를 보이며 2020학년도 2학기 생존수영 수업조차도 잠정 취소 조치에 들어가기에 이르렀다. 생존수영 수업 전면 취소는 생존수영을 위한 교육준비로 바빴던 수영장 관계자 및 강사들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고, 생존수영 전용 수영장을 갖추었던 수영장들은 경영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했던 강사들의 일자리는 사라져 갔다. 한 수영장 관계자는 “생존수영 전용 수영장이라는 교육여건을 갖추기 위해 기존 회원 정리 및 내부 리모델링, 노후 교구 교체 등 다각적인 준비를 해왔는데 이렇게 연기 및 전면 취소로 인해 막대한 경영 손실이 불가피하게 됐다. 강습을 위한 강사들의 월급도 반토막 이하로 떨어졌으며, 많은 일선의 강사들은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어떻게든 회사를 살리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정말로 막막하다“라고 하소연했다. 이런 현장의 목소리와는 달리 일부 교육청에서는 “일시적이지만 생존수영 실기수업을 이론수업으로 대체한 뒤 교육성과가 높았다”라고 말하고 있어 생존수영 교육 현장 관계자들을 아연실색케 하고 있다. 정말로 유튜브 같은 시청각 교육으로 그들은 생존수영을 할 수 있을까? 실기수업을 이론수업으로 대체하겠다는 게 모두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생존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깊고 교육의 숙련도가 요구되는 생존수영 정시 교육을 실기 수업도 아닌 이론 교육을 통해 그 성과를 운운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생존수영은 단순한 교과 수업이 아니다. 수영은 단순히 눈으로, 책으로, 이론으로 대체할 수 있는 교과목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안을 바라보는 교육당국의 안일한 시각을 지켜보며 2015년부터 시행된 생존수영 교육을 아직도 단순한 물놀이 안전사고 예방교육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 최근 생존수영 교육의 잠정적 연기 조치와 함께 파생되고 있는 문제로서 생존수영 교육의 무용론이나 이론 대체교육이 대두되는 등 상황논리에 아이들의 생존을 다루는 교육이 너무나도 가벼이 여겨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생존수영 교육의 가치는 구조를 받기 전까지 긴 시간 동안 자신을 지키는 수영교육이다. 생존을 위해 일정 시간 물에 떠 있을 수 있어야 하고, 구조요령 및 응급처치 교육도 함께 해야 하는 교육이다. 물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물과 친해지기부터 다양한 상황에 부합되는 해수, 내수면 생존수영교육까지 시행되기 때문에 단순한 이론 교육만으로 대체할 수 없는 교육인 것이다. 교육당국의 무사안일한 의식부터 바뀌어야 한다. 교육당국도 코로나19와 같은 초유의 상황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현장 교육에 있어 혼란이 있을 수는 있다. 학교에 등교하는 것도 장담하기 어려운 시기에 생존수영을 논하느냐 라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학교가 가장 안전한 곳이다라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한다. 학교가 가장 안전하게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교육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온라인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생존수영 교육도 마찬가지다. 안전한 생존수영 교육을 위해서는 교육부, 교육청, 학교, 일선 교사 및 학부모, 그리고 수영장 관계자들까지도 어떻게 하면 코로나19로부터 안전한 방역환경이 갖춰진 가운데 안전한 교육을 시행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축소 등교,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한 교육 인원 분리, 일정 조정에 따른 예산 조정 등 방역 대책을 강구한 가운데 안전한 교육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 생존수영 교육은 단순한 물놀이 안전사고 예방교육이 아니다. OCED 회원국 중 10대 수상사고 발생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대한민국. 초심을 잃지 말라는 말이 있다. 2014년 세월호 참사를 겪고 2015년부터 시행했던 생존수영을 시행했던 교육 목적을 잊지 말고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우리 아이들, 청소년들을 구할 수 있는 필요 최소한의 실기 교육이라는 점을 교육당국은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단순한 수치상의 계획, 예산이 중요한 것이 아닌, 이론수업으로 실기수업을 대체할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닌, 어떻게 하면 안전한 교육 환경 속에서 우리 아이들이 생존수영을 배울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할 때다. 수상안전사고의 불감증은 부지불식간에 우리 곁에 다가온다. 또 다시 2014년 세월호의 비극은 없어야 한다. 생존수영 교육은 학생들의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안전교육임을 깨닫고 2021년 교육계획도 다시 한번 면밀하게 검토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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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15
  • [기고] A Hidden Beauty "Gangjin"
    [교육연합신문=마리아 모스키니 기고] 지난 16개월간, 저는 강진군을 나의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사는 동안, 강진만이 보여줄 수 있는 숨겨진 개성 있는 아름다움들을 저는 경험했습니다. 맨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저는 강진고등학교의 동료 교사들과 1학년 학생들과 함께, 김영랑이라는 유명한 한국의 시인의 집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전문적인 여행 가이드가 학생들을 반기면서 여행 명소의 간단한 역사를 설명하였습니다. 그 후, 기념관과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란 공원을 자유롭게 다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시문학파기념관에는 김영랑 시인의 유명한 작품들과 함께 동시대 시인들의 작품들도 전시되어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기념관을 둘러본 후에는 모란 공원 안의 정자에서 다른 동료 선생님들과 함께 맛있는 한국 전통 음식을 맛보았습니다. 식사 후에는 정원을 거닐면서 정경을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이 멋진 외출은 저를 새로운 고향으로 맞이하게 해주었습니다. 또 다른 여행 명소로는 고려 청자 박물관을 꼽을 수 있습니다. 저는 운이 좋아서 고려 청자 축제 기간에 이 박물관을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저와 저의 친구들) 고려 청자 박물관에 방문하던 날 아침에 김밥을 포장한 후, 지역의 산을 가볍게 올라 정상에 앉아서 그것을 먹었습니다. 우리는 마침내 축제를 위해 고려 청자 박물관에 도착하여 청자 만들기 교실과 판매 중인 다양한 명품 청자들 그리고 청자로 된 전시 유물들을 보았습니다. 이 지역은 청자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며, 청자 축제는 그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강진은 대한민국에서 청자의 생산지로 알려졌으며, 청자 축제 기간은 지역의 도공들에게는 자신들의 재능을 뽐낼 귀한 기회였습니다. 축제는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지역 발전을 위한 기초가 되고자 합니다. 우리는 오후 시간은 축제를 구경하며 보냈습니다. 멋진 축제라면 당연히 보여줘야 할 아름다움을 최대한 만끽하면서요. 다음으로 제가 뽑은 강진의 여행 명소는 가우도입니다. 전라남도에서라면 반드시 가 보아야할 섬이에요. 강진의 8개의 섬들 중 하나입니다. 가우도는 대구면과 도암면에, 각각 저두 현수교(438m)와 망호 현수교(716m)로 연결되어있습니다. 이 다리들은 가우도가 제공하는 끝없는 아름다운 광경을 감상하기에 좋은 곳입니다. 우리는 늦은 저녁에 가우도를 방문하였습니다. 태양이 저물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함께 산책로(2.5km)를 따라 걸었습니다. 이 순간에 강진만이 보여주는 절경은 아찔하였습니다. 이 날 최고로 기억에 남았던 순간은 가우도 꼭대기의 청자 타워(25m)에 올라 태양이 지는 장면을 본 것입니다. 섬의 모습은 더욱 화려하게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800m 길이의 짚 트랙을 타고 강진만을 건너 내려왔습니다. 비록 2분도 안 되게 걸렸지만, 강진만의 일몰의 풍경을 즐기기엔 최고의 방법이었습니다. 일단 내려오자, 우리는 이상적인 장소에 위치한 가출 카페라는 커피 숍을 발견했습니다. 그곳에서 일몰의 나머지를 목격하며 다과를 즐겼습니다. 강진에서 여태까지 방문한 곳 중에서 가우도는 저에게 가장 최고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은 마을이 간직한 많은 것들이 있기 때문에 저는 앞으로 좀 더 탐험해 볼 수 있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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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07
  • 하는 척 ‘티’를 버리고 할 수 있는 ‘끼’를 발산하는 글로벌 교육으로
    [교육연합신문=전재학 기고] 교육이란 인간 내면의 잠재력을 밖으로 끌어내는(引出)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교육은 이러한 역할을 얼마나 충실하게 수행하는가? 대다수는 교육의 본질을 벗어나 오직 상급 학교 진학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백년대계인 우리 교육은 아직도 산업화 시대의 낡은 사고방식으로 세계와의 경쟁을 도모하고 있다. 과거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낸 교육의 역군들조차 이제는 왜소해 보인다. 어딘가로 생존을 도모하려고 필사적인 몸부림을 반복하는 것이 현재의 교육이다. 그 속에서 저마다 운명론자가 돼 우리 교육은 여기까지가 한계라고 선언하고 몸을 사리기만 하는 것 같다. 이러한 시기에 코로나19의 위기는 교육의 혁신을 앞당기고 있다. 전환기에 선 우리 교육은 이제는 유명무실하게 하는 척하는 ‘티’를 버리고 현실을 과감하게 헤쳐나가며 할 수 있는 ‘끼’를 발산하는 글로벌 교육으로의 탈바꿈이 절실하다. 잠시 우리 교육을 되돌아보자. 무엇보다 이상(理想)을 향한 여정(旅程)이 애매모호하다. 마치 해도(海圖)를 펼쳐놓고도 방향을 정하지 못한 채 키를 잡은 선장의 무기력함을 보는 것 같다. 국가 지도자부터 수시로 변심하는 교육정책은 확고한 교육철학이 없다. 그저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침몰당하지 않게 무사히 어딘가에 정박하기만을 바라는 것과 같다. 그래서 교육의 참된 본질의 회복이 시급하다. 하지만 책임 있는 사람들은 자존심을 내세워 체질을 바꾸기를 꺼린다. 악착같이 ‘티’를 부리면서 다수가 원하는 ‘끼’의 발산을 무시하거나 저지하려 한다. 이제 우리 교육은 당당한 자존감을 바탕으로 개성이 춤추며 꿈과 끼를 계발해 미래역량을 키워나가는 시대적 과업으로의 항해가 요망된다. 논어에 “군자는 자기에게서 구하고 소인은 남에게서 구한다(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는 말이 있다. 자기에게서 구하는 사람은 타인과 견주기보다는 스스로 끼를 계발하는 데 매진하는 반면에, 남에게서 구하면 주변과의 비교를 내밀히 진행해 티를 내어야 만족하게 된다. 끼가 자기존중과 계발을 충실하게 하는 자존감이라면, 티는 타인과의 상대적 위치를 확인함으로써 만족을 느끼는 자존심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남을 통한 자기 확인만이 믿음직한 성과인 입신양명, 곧 출세라는 심리가 굳건히 자리 잡아 왔다. 이제 학교 교육부터 이런 사고와 심리를 극복하는 데 앞장서야 할 때다. 왜냐면 학교 교육의 새로운 역할이 사회적 인식 개선에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꿈과 끼를 찾아주자는 교육으로 우리의 학교 교육이 선회하고 있다. 중학교의 자유 학년제 운영, 고등학교의 진로적성검사, 직업탐구의 과정, 다양한 창의적 체험학습의 운영이 바로 꿈과 끼를 찾는 교육과정으로 연계가 되고 있다. 여기서 필자는 다시 한번 묻고자 한다. 아직도 다수의 꿈이 없는 아이들, 꿈을 상실한 아이들, 꿈꾸기를 두려워하는 아이들이 어떻게 미래의 역량을 키울 수 있겠는가? 그저 타인의 삶을 감상하거나 방조하는 자세로는 안 된다.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인정하고 끼를 계발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갖추게 해야 한다. 아는 척, 학생인 척, 공부하는 척, 열심인 척, 생각하는 척.... 그 어디에서도 하는 ‘척’을 버리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운명의 개척자다운 기업가 정신으로 당당하게 끼를 발산하도록 우리 청소년을 폭넓게 교육하자. 이것은 자존심이 아닌 자존감의 향상으로 나아가는 인간 육성의 교육이다. 이제 시대의 총아인 4차 산업혁명은 현실과 상상의 융합을 도모하면서 이러한 끼를 키우는 교육을 요구하고 있다. 불행 중 다행인가, 코로나19는 언택트(untact) 교육의 일환으로 세계적인 무료 온라인 MOOC(Massive Open Online Course) 강좌를 실생활에 열어 놓았다. 이는 교육의 평등을 꾀하고 학생의 다양한 끼를 계발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이제 우리 교육은 하는 척 티를 버리고 할 수 있는 역량, 끼를 키우는 글로벌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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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3
  • 실패로부터 회복탄력성을 키우는 교육 - 인천제물포고 전재학 교감
    [교육연합신문=전재학 기고] 고대의 중국 당나라 역사서 가운데 하나인 <구당서> ‘배도전(裵度傳)’에는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勝敗兵家之常事)”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병가(兵家)에서 항상 있는 일이란 뜻으로 어떠한 실수나 잘못을 가볍게 여길 때 주로 쓰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당나라 헌종 때는 전쟁에 시달리면서도 개혁을 늦추지 않았는데 싸움을 여러 번 하면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는데 한번 졌다고 포기해버리면 대의를 이룰 수 없음으로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한두 번의 작은 승패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렇게 해서 헌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피할 수 있었고 잠시나마 당나라의 중흥기를 가졌었다. 결국 어떤 실수나 실패를 했을 때 너무 낙심하거나 연연하지 말라는 교훈으로 압축할 수 있다. <타임즈>의 칼럼니스트 매슈 사이드는 『블랙박스 시크릿』에서 “세계 최고의 능력을 갖춘다 해도 실수에 대한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소용없다”고 했다. 그는 실패로부터 성공까지 가는 가장 정확하고 안전한 길을 항공업계의 블랙박스에서 찾아냈다. 항공기에는 두 개의 블랙박스가 설치돼 있는데 하나는 기내 시스템으로 보내지는 지시 사항을 기록하고 다른 하나는 기내 조종실의 대화와 소리를 녹음한다. 그리곤 사고가 일어나면 박스를 열어서 데이터를 분석하고 사고의 원인을 파헤친다. 이를 통해 같은 실수가 재발하지 않도록 절차를 수정하는 것이다. 실제로 실수를 통해 배우는 시스템이 튼튼하게 구축된 국제항공운송협회 소속의 항공사들은 사고율이 0.12건에 불과하다. 실수에 위협을 느끼기보다 실수를 통해 배우고자 하는 의지와 끈기, 그러한 시스템과 문화를 통틀어 ‘블랙박스 사고(Black Box Thinking)’라 명명하며 이를 개인과 기업, 사회의 차원으로 확장한 것이다. 필자에게는 12년 전, 모 고등학교에서 3학년 담임교사를 하던 중, 3월 중·하순경에 학급의 남학생 7명이 공모해 처녀 선생님의 치마 밑을 동영상으로 도찰해 이를 즐기다 적발이 된 사건이 있었다. 피해 교사로부터 강력한 교권침해 고발이 있었고 학교 규정에 따라 사건을 처리하면서 처음 겪는 절차가 진행됐다. 결국 주동자 3명은 타 학교로 자진 전학을 가고 4명은 사회봉사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이를 통해 필자는 학생들에 대한 실망과 반성할 줄 모르는 학부모의 억지 민원에 힘든 시기를 보냈다. 필자는 그때 담임으로서의 학생지도 실패를 인정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비 온 뒤에 굳어지는 길처럼 교사의 전문성을 심화시킬 수 있었다. 학생들의 심리 파악은 물론 상담 기술, 나아가 10대들을 이끄는 리더십의 역량을 키울 수 있었다. 결국 개인의 성장과 발전으로 이어지는 전화위복을 이뤘다. 주시해보면 그와 유사한 사건들이 학교에선 많이 발생한다. 그때마다 귀한 타산지석으로 삼아 ‘셋이서 길을 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三人之行 必有我師)’는 논어의 가르침처럼 성장의 실마리를 얻기도 한다. 그뿐이랴. 학생들은 누구나 비에 젖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가는 학창 시절이 있을까. 어찌 보면 다양한 경험과 지혜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성공만이 있을 수는 없다. 학생 누구나 몇 번의 실수나 실패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럴 때마다 그들이 좌절하고 낙심하고 포기한다면 어찌 험난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었던 넬슨 만델라는 “나는 절대로 지지 않는다. 이기거나 배운다.”고 말했다. 그는 절망이나 포기를 몰랐다. 오히려 실패를 기회로 삼아 성공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지금, 이 순간 고입, 대입에서 실패해 실의와 좌절에 빠진 학생들, 코로나19로 인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이 많다. 그들을 격려하고 응원함으로써 훗날 ‘인생 역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도록 해야 한다. 병가지상사와 블랙박스, 타산지석의 교훈처럼 실패로부터 회복 탄력성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의 역할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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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3
  • [기고] 時代 意識
    [교육연합신문=文德根 기고] 가슴을 덜컥하게 했던 코로나 19, 한 개인으로서 추이를 지켜볼 뿐이지만, 이러한 추이가 세계를 어떤 모습으로 재편할 지 자못 걱정도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 국민의 의식과 행동 수준, 그리고 방역 기술이 세계를 선도한다는 언론 보도와 세계 정상들의 요청으로 이루어지는 정상 간 화상 회의는 격세지감을 넘어 흐뭇함을 지울 수가 없다. 이제까지는 언제나 선진국이 만들어 놓은 기준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았고, 우리의 현실은 버려지고 외면당한 채 오직 선진국의 교육과 문화, 산업 등만 바라보고, 오직 따라가야만 할 것으로, 늘 그리워하고 동경하는 기준으로 자리매김하여 왔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는 없고 ‘외국’만 있는 세계를 살아왔던 아픔을 조금씩 덜어내고, ‘한국인’이라는 자긍심과 국격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할 것이다. 사건이 일어나면, 특히,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도 외국의 사례에서 해결책을 먼저 찾고, 언론 매체에서도 외국에서 학위를 받은 토론 참석자들을 모셔오고,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낱말은 외국어 잡화상을 방불케 하여, 여기가 외국 방송사일 정도로 착각을 일으키고, 일반 국민들은 알아먹을 수도 없는 상황에 분노를 금할 수 없었던 일이 부지기수였다. 지금도 영어유치원에 보내려면 한 달에 1백만 원 정도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물론 우리나라의 일이 곧 세계의 사건이 되고, 세계의 사건이 우리의 일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조기 외국어 교육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우리말을 잃어버리면 정체성을 잃게 되고, 정체성을 잃으면 우리의 땅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우리말의 어원을 제대로 배우고 난 다음에 하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순서가 아닐까. 언젠가 미국에서 세계학술연구대회가 열렸는데, 우리나라 학자가 ‘듀이’에 관해 발표를 하고 단상을 내려오자, 한 언론 기자가 “왜, 퇴계나 율곡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지 않는가. ‘듀이’는 미국 학자들이 더 잘할 수 있지 않는가 하고 질문을 하더라는 것이다. 물론 뜻한 바가 있었겠지만 우리의 현실 감각과 시대 의식을 짐작하게 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집단 감염의 우려로 인해 원격 교육의 형태가 시도되고 있다. 이는 또 다른 형태의 교육을 불러 올 것이고, 장단점을 보완하여, 수요자의 만족도에 따라 대세를 이룰 수도 있다. 이러한 형태의 시도가 교육의 일반 형태로 발전한다면 현재의 교육 체제는 큰 전환점을 맞이할 것이다. 이를 지켜만 볼 것인가? 그렇지 않고 스스로 변화의 경계에 서서 변화의 양면을 볼 수 있고 스스로 대처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출 것인가? 요즘 프로그램 중에 세계 테마기행을 보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한다. 거기에는 반드시 사람들이 공감하고 환호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프로그램이 오랫동안 국민들의 사랑을 받으려면 그 프로그램을 편성하는 이유와 가치 등의 개념이 분명해야 한다. 왜 그 나라이고 그 출연자이어야 하는 설명 등이 납득될 수 있어야 한다. 나라와 유적지를 소개하면서 그 사람들의 삶의 의식과 행태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유명 배우, 그것도 미끈한 청년 남자를 등장시켜서, 팬티만 입고 수영하면서 근육 보여주고자 국민의 수신료로 제작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그 나라 전문가가 그 연예인뿐인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은 왜일까? 요즘 코로나 19로 바깥출입이 어려워 텔레비전에 눈과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그런데 시청률 위주와 저열한 언어와 속어들로 무장한 출연자의 잡담으로만 진행되는 ‘아무 말 대잔치’를 보고 있다는 속내를 감추지 못한다고 한다.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구별을 모르고, ‘왜, 이 프로그램을 편성하는지’ 등의 개념이 없는 사회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왜’가 없는 사회가 어떤 방점을 찍을 것인지는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 아닌가? 모든 언어, 행동, 문화가 삶 속에서 나와서 정성에서 잉태하는 것이다. 그래서 삶은 정성을 다하는 태도여야 한다. 사람의 길은 같이 사는 방법이고 함께 가는 길이어서, 철저히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부는 사람의 길을 알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어야 하는 것을 아는 것이고, 스스로를 낮추는 것은 남과 더불어 살기 위함이다. 그래서 황하문명권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음 속에 감추어져 있는 이치를 깨닫기 위해 공부를 사후까지 가지고 가는 것이다. 우리 주위를 보자. 어디를 둘러보아도 사람의 길을 만드는 곳은 보기가 어렵다. 오로지 자동차 다니는 길만 만들고 있다. 사람의 길은 모든 것과의 조화로운 관계 형성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모든 관계의 처음은 이득이 얼마나 되는가이다. 公은 없어지고 私만 존재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지가 오래인 것 같다. 교육은 어떤가. 사람의 길은 가르치지 않고 돈 되는 길만 가르치고 배운다고 하면 지나친가. 이제 세계는 대한민국의 국민 의식이 최고임을 감동하고 배우려 하고 있다. 공익을 우선하고 사익을 다음으로 돌리는 한국인의 의식을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즉 선현들의 先公後私 의식이 빛을 내고 있는 것이다. 공익을 우선하는 公의 개념은 유목문명이 아닌 황하문명의 큰 유산이다. 公의 개념이 배태된 井田制는 모든 백성이 화합하면서 배불리 먹고 조화롭게 살게 하기 위한 정치와 경제 이념인 것이다. 그런데 이 井田制는 조선시대에 한 번 시도만 있었고 아직 실천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내재되었던 의식이 위기에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씨앗도 황하문명에서 잉태하였듯이 우리의 의식과 사고가 이제는 세계를 선도할 수 있는 사상이었다. 버려야 할 것과 가지고 가야 할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先進이 되는 길이다. 그 중에서도 시험에 합격하고 나면 그 수험 공부 책을 쓰레기 통으로 버리는 교육 체제에서 탈피해야 한다. 기억하고 생각해서 삶에 어른거려서 자신의 삶을 안내해주는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내구성이 있고, 자가 발전을 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해주는 용량 큰 배터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시키는 대로, 읽은 대로도 하지만, 본대로, 보이는 대로 하는 경우가 더 많다. 내가 가고 싶어 하는 자리라도 나보다 그 자리에 합당한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을 추천하는 것이 우리 선비들의 삶이었던 것이다. 이제 ‘좋다, 나쁘다’의 이분법에서 눈 앞 저 ‘현상’이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는 공부로 전환해야 한다. 보고 들은 낱말과 내용을 글자 그대로 기억해서 답하는 즉, 앵무새를 기르는 새장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의 미래는……. ▣ 文德根 博士 ◈ 陶山書院선비문화수련원 指導委員 ◈ 前 康津敎育長 ◈ 敎育學博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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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7
  • [기고] 나의 삶이 내 꿈의 실현과정으로 되어 있는가?
    [교육연합신문=文德根 기고] 언론매체가 정보와 교양 그리고 휴식을 얻는데 상당 부분 기여하고 있다. 그런데 언론매체들의 시사 프로그램에서, 토론 참석자들은 진행자의 주제 제기에 따라 대책과 해법을 이야기하는데, 자주 실상과 동떨어져서 정파와 반대를 위한 반대로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이 적지 않다고 한다. 또한 제기된 문제에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하기 보다는 자신의 이념, 가치관, 이해관계 등을 대변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더 나아가 자신의 지식이나 전공을 자랑하고, 자신의 이력과 경력을 쌓아 다음으로 건너가기 위한 자리로 삼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까닭은 무엇일까? 지금은 무엇보다도 세계적인 재난이라고 할 수 있는 코로나 19에 대처하기 위해 지혜와 역량을 집중해야 할 중차대한 시기다. 비난과 비판도 이러한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힘과 의식을 제고하는 데 두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생각일지라도 자기 지역과 자신의 입지에 따라 다르게 대처하는 나라가 우리가 아닌가 하는 서글픔마저 든다. 선진국들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 대해, 공정 보도를 추구한다는 언론까지도 국익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하고 기사를 쓴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세계적인 재난에 대하여 정부와 지도자에게 힘을 모아서 대처를 할 수 있도록 대동단결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비난과 반대를 위한 指摘 쌓기에 몰두하고 있다는 비난들을 지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지혜는 和合에 기초해야 하는 것이고, 상황에 맞게 적용하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인데 말이다. 왜 이렇게 상반되는 상황이 전개되며, 다른 반응을 보이며, 과연 이런 생각은 어디에서 말미암은 것일까? 어쩌면 ‘나와 너’를 분리하고 대립시켜서 ‘너와는 다른 나’를 추구하는 가치관에 근거하고 있지는 않은가? 조선시대, 일본 정세에 대하여 사실적으로 보기보다는 당파에 따라 다른 생각과 선택으로 임진왜란을 초래한 구시대적인 발상이 지금도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목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기에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자들이 다름 아닌 나라의 지도자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아닌가? 실상을 보고 생각을 달리할 수는 있지만 자신의 말과 행위를 자세히 관찰하고 돌아보는 자세가 중요하다. ‘우리’라는 갇힌 생각보다는 상대를 ‘포용하고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여기는 틀로, ‘옳고 그름’과 ‘돼 안 돼’라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아닌 문제가 잉태한 실재에서 문제를 풀 수 있는 자신만의 독립적인 뜻을 세우고, 다른 사람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 더 나은 해결책을 찾는 모습이 아닐까? 이렇게 되려면 교육의 틀이 바뀌어야 한다. 기존의 생각을 머리에 담고 이고 지고 살아가는 훈고적 기풍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에서 눈을 떼지 않고 면밀히 관찰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길을 걸을 때 옮기는 발걸음 하나하나를 보면서 걷다보면 넘어지는 일도 적어지는 것처럼,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는 자세다. 끝까지 보지도 않고 자신만의 아집으로 단정해버리는 태도야말로 갈등과 반목을 일으키고 세계를 겉으로만 보는 위험한 발상인 것이다. 訓誥的이란, 실상은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해놓은 결과만을 받아들이고 삶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따라 하기’로 정치와 경제 발전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이제는 ‘따라 하기’만으로는 더 경제적이고 효율성을 높일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그것도 말로만이 아닌 행동으로 옮기는 통찰이어야 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익히기만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독립적으로 자기만의 생각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에 가면 가장 먼저 손에 드는 것이 ‘리모콘’이라고 한다. 왜일까? 모든 방송국은 프로그램 베끼기에 열을 올리고 있고, 거기에 따라 새로운 프로그램을 찾아 계속 리모콘을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요즈음 ‘트로트’가 인기 있으니까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따라하기, 베끼기’다. 그래서 더욱 ‘리모콘’을 찾을 수밖에 없다. 새로운 것, 호기심을 리모콘으로 찾아 나서는 것이다. ‘베끼기’를 하면서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더 한숨을 자아내게 한다. 누구나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職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살아간다.’는 말은 그 ‘職’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職’은 ‘職業’이 된다. ‘職’은 자기가 맡은 역할이고, ‘業’은 사명 또는 자아실현을 의미한다. 그래서 ‘職業’은 그 사람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그 사람의 人格이 되는 것이다. 人格이 된다는 말은 ‘職’과 ‘業’이 일치하는 것을 함유한다. 직장인과 직업인의 모습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職’과 ‘業’이 분리된 사람들로 채워진 조직에서는 부패가 만연하고 쇠락해가는 것이다. ‘나’로서 사는 삶은 ‘시대’를 아파해야 하는 것이다. 아픈 시대를 구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그쪽으로 생각과 발을 모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이 시대가 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유산으로 남길 것인지?’ 등을 고민하고 행동하는 ‘시대정신’으로 호흡해야 한다. 그래서 莊子가 이런 말을 남겼는지도 모른다. “有眞人而後有眞知(참된 사람이 있고 난 다음에라야 참된 지식이 있다).” 즉 인격을 갖추고 난 다음에라야 그 사람이 지식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言行이 그 사람이라는 말도 있듯이, ‘세 치의 혀’가 그 사람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孔子가 “不知言이면 無以知人也”라고 했던 그 말이 지금도 회자되는 까닭을 깊이 고민하는 과정이 먼저여야 한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것, 나만의 상상력과 호기심이 묻어나게 하는 것은 나에게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洪範衍義>에 ‘貌言視聽思’로 깊이 생각해야 할 몸가짐을 ‘五事’라고 한다. 첫째는 겉모습이고, 둘째는 말하는 것이며, 셋째는 보는 것이고 넷째는 듣는 것이며, 다섯째는 생각하는 것이다. 겉모습은 공순해야 하고, 말은 따르고 따를 수 있어야 하며, 보는 것은 어둠과 밝음을 함께 보아야 하고, 듣는 것은 분명해야 하고, 생각하는 것은 치우침이 없이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五事는 “無爲無不爲”할 수 있는 성찰을 뜻한다고 한다. 무심코 짓는 표정 하나 하나는 곧 의도와 무관하게 하나의 메시지가 된다. 그래서 ‘눈빛 하나 낯빛 하나’ 생각하고 행동하는 삶이야말로 자신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생각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하고 있는 모습이 나를 ‘나’이게 만든다. 위기와 기회는 다른 길이 아니라 함께 짊어지고 가야하는 경계의 길이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위기와 기회를 넘나들고 있는 ‘나’를 본다. 오늘도 내 꿈이 실현되는 여정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 文德根 博士 ◈ 陶山書院선비문화수련원 指導委員 ◈ 前 康津敎育長 ◈ 敎育學博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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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20-04-13
  • [기고] 思惟의 獨立, 個人과 國家 發展의 基礎!
    [교육연합신문=文德根 기고] 요즘 코로나 19로 인하여 온 세계가 전쟁에 비유할 만한 중병을 앓게 되어, 그 끝을 찾는데 골몰하고 있다. 그러나 그 끝을 모르니 답답하지 않을 수 없고, 인간의 한계까지 의심하게 되는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네 탓’ 공방만 하고 있는 모습이 우리의 현주소다. 지금 우리 정치를 보면 노론과 소론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하고 눈과 귀를 의심하게 된다. 이념과 편견에 사로잡혀 서로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데 모든 언어와 행동을 총 동원하고 있는 이 현실, 도대체 국민들을 생각이나 하고 있는 것일까? 마치 조선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현대를 다스리겠다고 하니 ‘개나 소’가 웃을 일이다. 더 나아가 지도자 위치에 있는 종교인들은 국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잇속’만을 찾아 나서는 행렬은 어느 시대의 유물인가? 지도자층이 국민을 걱정하는 시대는 있었지만 국민이 ‘종교인’을 걱정하던 시대는 없었던 것 같다. 미증유의 병원균으로 세계가 고난을 겪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다행인 것은 우리가 개발한 진단 장비(키트)가 세계로부터 인정을 받고 더 나아가 한국의 방역대책이 모범적인 상황으로 세계의 시선이 모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특히 의료인의 헌신과 열정, 국민들의 先進 의식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할 것이다. 우리 주위에 있는 물건 가운데 우리가 다른 나라보다 먼저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을 찾기는 힘들다. 거의 모든 물건은 다른 나라에서 먼저 만들기 시작한 것을 우리가 따라서 다시 만든 것들이다. 그런데 전 세계에 코로나 19가 들불처럼 번지며 한국을 향한 각국의 ‘방역 SOS’가 쇄도하고 있다. 120곳이 넘는 국가에서 앞 다퉈 진단키트를 요청하는 통에 지원 순위를 두고도 고민이 깊은 모양새다. 특히 봉쇄 정책 없이도 코로나 19 확산을 저지하는데 성공한 한국의 대처 능력을 구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과거나 외부의 것을 답습하기만 하는 訓誥的 사고나 기존의 틀 안에 갇혀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우리의 사고가 이제는 전략적 사고의 수준으로, 즉 선진국 수준으로 視線이 상승했다는 의미이다. 전략적 사고란 한층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다는 뜻이다. 전략적 높이에서의 사고란 어떤 현상이 ‘좋고 나쁨’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새로운 변화, 짜임, 틀, 판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思惟(哲學)의 독립’이 국가와 개인 발전의 기초라는 것을 깨닫고 우뚝 섰다는 의미일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로 선진국의 자리를 차지한 나라는 지금까지 선진국이고, 후진국이었던 나라는 지금까지 후진국이다. 왜 그럴까? 선진국을 선진국으로 있게 하는 것은 시선의 높이에 의해 운영되기 때문이다. 시선의 높이가 생각의 높이이고, 생각의 높이가 삶의 높이이며, 삶의 높이가 바로 사회나 국가의 높이이기 때문이다. 이미 익숙해져 있는 기존의 시선을 바꾸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기에 그럴 것이다. 어떠한 문제일지라도 그 해결은 구체적 사건이 일어난 실재에서 풀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문제가 발생하면 외국의 사례부터 따지고, 우리의 실재를 외국의 기준으로 재단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것은 ‘二流的’이고 선진국의 것은 ‘一流的’인 것으로 보는 문화가 형성되고 말았다. TV 자막이나 토론자, 특히 아나운서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보고 들으면 여기가 우리나라인지 의구심이 들 때가 여러 번이다. 더 나아가 외국어를 쓰고, 외국의 사례를 들면 훌륭하고 정답인 것처럼 포장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실재는 한국인데 외국의 사례로 한국을 해석하고 처방하려 든다. 한 예를 들면, ‘영어단어 무분별한 남발로 무슨 뜻인지 이해 안 돼, 한국사회 의사소통, 文解力 급격히 추락’(2019. 1. 30. 수. 동아일보)이라는 기사를 보면, 한국사회에서 영어는 성공의 언어로 취급되어 왔다. 특히 국제화가 불어 닥치면서부터 우리 사회의 무분별한 영어 사용은 더욱 극성을 부렸다. 학계든 언론계든 관료사회든 온통 영어 단어를 남발하거나 엉터리로 영어 단어를 갖다 붙여 사용했다. 그 결과 이제는 원활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말의 철저한 이해도 없이 외국어의 일방적 사용, 외국의 도량형 사용, 현실을 외면한 외국 이론의 차용 등은 우리 스스로를 생각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 모두가 우리 문화와 우리 자체의 비하에 앞장서고 있으며, 영어유치원의 학비가 1개월에 100만원을 상회하는 것이 그 예가 되고도 남는다. 그래서 우리말을 잘 모른다는 것은 사물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서 있지 못한다는 의미다. 이제 우리 문화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영역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화, 철학, 사상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우리 스스로의 움직임이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현재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꿈을 꾸어야 하는데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현재를 넘어서려면 증오만 하지 말고, 이제는 극복하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 자각해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끌고 가는 상위의 문화나 철학을 스스로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교육의 주도권이 대답보다는 질문에 있어야 한다. 대답은 과거를 따지는 일에 몰두하게 되고, 배운 것을 암기하는데 머물게 하는 반면, 질문은 자신만이 느끼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안에 머물지 않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생각이다. 그래서 대답뿐인 교육은 과거에 갇히게 되고, 질문은 미래를 열리게 하는 것이다. 배움은 지식과 경험을 쌓는 것이 아니라 응용해서 현재의 단계를 넘어설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이런 단계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저 지식을 습득하는 일로 치부해버리거나 즐기고 소비하는 대상으로 간주하다가 세월만 헛되이 보내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배웠으면 배움이 언어와 행동으로 익혀서 삶의 향기로 뿜어져야 한다. 코로나 19! 어떻게 예방하고 벗어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대책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로 인해 전개될 변화의 맥락이나 달라진 사회의 큰 흐름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전략적 사고일 것이다. 문제를 ‘좋다, 아니다’의 관점에서 ‘변화나 새로운 짜임’으로 보는 사유는 현재를 딛고 스스로 일어서는 힘이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인 것이다. ▣ 文德根 博士 ◈ 陶山書院선비문화수련원 指導委員 ◈ 前 康津敎育長 ◈ 敎育學博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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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06
  • ‘노력은 언젠가 반드시 보상받는다’는 현대판 거짓말 - 인천제물포고 전재학 교감
    [교육연합신문=전재학 기고] 요즘 저마다 세상살이가 힘들다고 아우성친다. 그러나 이런 고난 속에서도 꾸준히 성실하게 노력하면 언젠가는 보상받을 거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세상은 공정해야 하며 실제로 그렇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세계관을 사회 심리학에서는 ‘공정한 세상 가설(Just-world hypothesis)’이라고 부른다. 이는 ‘정의’에 관한 심리학 연구의 선구자로 캐나다 워털루 대학교의 교수인 멜빈 러너(1929~)에 의해서 이뤄진 업적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상은 실제로 그렇지 않다. 이러한 세계관을 고집스럽게 주장한다면 오히려 폐해가 더 클 수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우리는 이러한 공정한 세상 가설에 사로잡힌 사람이 무의식중에 표출하는 ‘노력 원리주의’를 주의해야 한다. "노력은 반드시 보상받는다"고 순수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근거 가운데 하나가 ‘1만 시간의 법칙’이다. 이는 말콤 글래드웰이 저서 <아웃라이어>에서 제창한 법칙으로, 간단히 말하면 "큰 성공을 이룬 음악가나 스포츠 선수는 모두 1만 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훈련에 쏟아 부었다"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일부의 바이올리니스트 집단과 빌 게이츠(프로그래밍에 1만 시간을 열중했음), 그리고 비틀스(데뷔 전에 무대에서 1만 시간 연주했음)에게서 관측됐다는 것뿐이다. 이는 "재능보다 노력"이라고 주장하는 수많은 책의 공통된 특징이다. 하지만 주장의 근거치고는 일방적이고 빈약하다. 필자는 섣불리 이 사고에 사로잡혔다간 승산이 없는 일에 쓸데없이 인생을 허비할 수도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또한 이 가설을 신봉해 무언가 불행한 상황에 부닥친 사람을 보면 그런 일을 당할만한 원인이 당사자에게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소위 ‘피해자 비난’ 편견에 사로잡히게 될 것을 경계한다. 세상에는 ‘뿌린 대로 거둔다’, ‘자업자득’ ‘인과응보’ 등 약자를 비난하는 말들이 많다. 또 다른 경우를 보자. 나치 독일에 의한 로마인과 유대인 학살, 또는 세계의 많은 국가에서 자행되는 약자 박해는 세상은 공정한데 곤경에 처한 사람은 뭔가 이유가 있어서 그렇다는 세계관을 토대로 형성되었다. 게다가 노력은 보상받는다는 공정한 가설에 사로잡히면 사람들은 사회나 조직을 도리어 원망하게 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렇다고 노력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1만 시간의 법칙이 성립되느냐 아니냐는 그 대상이 되는 악기나 종목, 또는 과목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프린스턴 대학교의 맥나마라 교수팀은 '자각적 훈련'에 관한 88건의 연구에 메타분석을 행하고 "연습이 기량에 미치는 영향의 크기는 기술이나 능력 분야에 따라 다르며 기능 습득에 필요한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구체적으로 이 논문은 각 분야에 대해 '연습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성과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정도'가 다음과 같이 소개돼 있다. 컴퓨터게임:26%, 악기:21%, 스포츠:18%, 교육:4%, 지적 전문직:1% 등이다. 이 수치는 '1만 시간의 법칙’이 사람들을 얼마나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위험한 주장인지 밝혀준다. '노력은 반드시 보상받는다.'는 주장에는 일종의 아름다운 세계관이 반영돼 있다. 하지만 그것은 바람일 뿐이고 현실 세계는 그렇지 않다. 이를 직시하지 않으면 의미 있고 풍요로운 인생을 살아가기 어려울 수 있다. 현실 세계는 공정하지 않기 때문에 남들 모르게 혼자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서 발탁되지도 않을뿐더러 주목을 받는 일도 없다. 그 결과는? 사람들은 조직에 원한을 품게 되고 심하면 테러를 일으키는 심리로 발전한다. 그래서 한층 더 공정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교육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책임이요, 의무이다. 남모르는 노력이 언젠가는 보상받는다는 사고가 인생을 망칠 수도 있음을 직시하고 이를 진심으로 교육하는 것이 용기를 겸비한 현명한 교육자의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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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2
  • 학생들에게 ‘쉼이 있는 삶’의 교육이 필요하다 - 인천제물포고 전재학 교감
    [교육연합신문=전재학 기고] 한때 정치권에서 ‘저녁이 있는 삶’이 선거공약으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인간의 행복권 추구인데 이를 정치권에서 공약으로 내세워 이슈로 부각할 정도로 이상한 나라가 됐다. 우리는 과거 이런 인간의 기본권조차 무시하고 오직 전진을 위한 전진만을 삶의 목표로 삼고 살아왔다. 그 결과는? ‘한 지붕 다른 가족’으로 살아가며 함께 외로운 가족공동체가 됐다. 특히나 학생을 자녀로 둔 가정의 경우는 심각하다. 온 가족이 함께 식탁에서 오붓하게 식사를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만만찮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자녀와 부모 간에 대화를 나누기가 어렵고 그러다 보니 자녀는 부모의 직업을 모르는가 하면, 부모는 자녀에 대해선 그야말로 등잔 밑이 어둡게 됐다. 그래서 문제가 터지면 부랴부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이다. 이제 ‘쉼이 있는 삶’은 학생의 가정에 행복권 추구의 로망이다. 특히 주말에는 ‘쉼’을 찾는 강력한 욕망으로 분출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교육 당국 처음으로 서울시교육청이 일요일에 학원과 교습소를 의무적으로 쉬게 하는 ‘학원 일요 휴무제’ 타당성 연구에 착수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인터넷 뉴스에 따르면 서울시교육청 산하 교육정책연구소가 학생들의 학원 이용 실태 조사해, 학생·학부모 의견 수렴 등을 거쳐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법제화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학생들의 휴식권을 보장하고 사교육비를 줄이려는 취지지만, 우리 사회 특성상 찬반 논란이 클 것으로 보인다. 우리 학생들이 과도한 학습과 극심한 입시 경쟁에 내몰린 현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에 따르면 회원국 학생들의 주당 평균 학습 시간은 35시간인데 한국은 50시간으로 가장 길다. 일요일 하루만이라도 아이들에게 고통을 주는 학원 교습을 제한하자는 주장은 충분한 타당성을 갖고 있다. 매년 최대치를 경신하는 사교육비는 서민들이 허리를 더 졸라매게 하는 요인이다. 하지만 학원 일요 휴무제에 대한 반대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교육권 침해라는 주장과 함께 오히려 과외 수요를 늘려 사교육비가 높아질 거라는 전망이다. 법제화할 경우 서울 시내 학원과 교습소 중 교과와 관련된 2만여 개의 일요일 영업 중단에 따른 반발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학원 일요 휴무제는 서울뿐 아니라 전국적인 현안이다. 서울시 교육감을 비롯한 대다수 진보교육감이 공약으로 내건 터라 2017년에는 전국 시도교육감협의회에 공식 안건으로 상정됐었다. 당시 참석자 대다수는 아동 권리 보호 측면에서 제도 도입의 필요성에 공감대를 형성했으나 법제화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다. 부모와 학생의 교육권 침해, 실효성 논란 등의 문제로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많았다. 서울시의회가 2017년 서울시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83%는 학원 일요 휴무제 도입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도 시행에는 오리무중이다. 나이와 학년의 질서를 되찾아 결국 교육의 질서를 회복하자는 본질이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요구된다. 아이들에게 ‘쉼이 있는 삶’을 만들어주는 것은 어른들의 의무이다. 시대의 흐름은 인간다운 삶으로 행복권을 추구하는 것이다. 평생학습을 지향하는 배움의 입장에서는 단지 눈앞의 단기적인 교육 성과만을 도모하는 것을 이제는 지양할 일이다. 지금은 인간의 보편적 삶이 100세로 이어지는 장수시대다. ‘쉼이 있는 삶’을 가정에 돌려주고 어려서부터 교육의 장에서 제도화해 이를 전 국민에게 의무화하지 않으면 뿌리 깊은 교육사상에 의한 경쟁은 더욱 야만적으로 변모해 우리를 번아웃 시키는 악순환을 되풀이할 뿐이다. 이제는 삶에서 양보다 질을 생각할 때이다. 학생들은 인공지능 로봇(AI)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는 우리의 소중한 미래의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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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2
  • 시험용 공부와 고시인간을 육성하는 교육 - 인천제물포고 전재학 교감
    [교육연합신문=전재학 기고] 우리 학생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하는 말이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지식은 시험 다음 날이 되면 자연스럽게 다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는 시험을 위한 학교 공부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물론 평가가 교육 활동의 과정상 불가피한 것이다. 문제는 과정과 수단이 목적과 본질을 훨씬 뛰어넘어 실행이 되는 것이다. 우리 교육은 평가를 위한 교육이 우선이니 모든 수단은 평가에 맞춰 정당한 과정이 무시된다. 지금의 대한민국 교육은 오직 대학입학을 위한 점수, 즉 평가를 위해서 과정은 무시되고 본질은 왜곡되고 있다. 그래서 한 마디로 우리 학교 교육은 시험에 의한, 시험을 위한, 시험의 교육으로 전락이 된 것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는 이미 공부가 시험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공부를 잘해 고시에 붙어 엘리트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에서 모든 고생은 끝이고 가문의 영광과 꽃길과도 같은 미래가 보장된다. 그런데 이 고시라는 것이 무엇인가? 뿌리 깊은 과거제도로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시대부터 실시된 과거제도는 인재의 등용문이자 입신양명의 수단이었다. 조선 시대에 와서는 그 정도가 극에 달했다. 그래서 이율곡은 9번이나 과거에 장원했고 어느 선비는 80세가 돼서 과거를 통해 벼슬에 등극한 사례도 있다. 현대에 와서는 고시=성공=인생 역전 이라는 등식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 하듯 최근에는 9개월 공부를 통해 사법시험에 붙었다며 공부법을 알려주는 유튜브가 등장했다. 이에 따르면 한 변호사는 중·고교는 물론 대학교 때까지도 게임에 빠져 살다가 단 9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공부해서 26세의 어린 나이에 사법시험에 붙었다고 한다. 말이 뻥튀기돼 전해져 내려오는 상술이겠지만 그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자극하니 허무맹랑한 소문이 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9개월 집중해서 공부하면 붙는 시험을 통해 권력 집단의 일원으로 상승할 수 있는 ‘고시 사회’, 그 과정이 어떠하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악습이 공정한 경쟁으로 찬양받는 우리 사회의 모습에 그저 씁쓸할 뿐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고시 합격자들이 진보와 보수 가리지 않고 지배 엘리트가 돼 과도하게 좌지우지한다. 이들은 공부의 달인으로 정해진 답을 빨리 찾기에는 귀신을 능가할 정도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당사자들이 정해진 답이 없는 문제에는 젬병이라는 것이다. 다른 문제를 제기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능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러니 그들이 사법농단으로 자신들과 그 소속 집단의 기득권이나 이권을 옹호하고 사수해 나가는 데만 교묘한 능력을 발휘한다. 그리고는 힘없고 무지한 사회적 약자들을 희생으로 자신들의 자리를 지켜나가는 것이다. 그들에게 배움은 곧 시험이었고 시험은 단박에 벼락출세를 가져다줘 배운 지식으로 이 사회에서 타인을 지배하고 때로는 능욕도 불사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형식상 사법시험은 폐지됐지만, 여전히 시험용 공부라는 악습 속에 빠져 있다. 공부를 많이 했어도 시험에 붙지 못하면 쓸데없는 짓이 돼 버린다. 공부가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니 기출문제 풀이와 다를 바 없게 된다. 단기 속성으로 합격해서 기득권으로 진입하는 공부가 최고다. 이처럼 공부를 출세의 수단으로 보는 도구주의적 관점이 계속 지배하는 한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봐야 소용없다. 공정 운운하며 시험 결과를 최우선으로 두는 고시 인간이 그러한 제도를 민주주의적으로 운용할 문화적 역량을 갖췄을 리 없다. 다만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망과 출세의 눈을 부릅뜨고 세상을 웅시할 뿐이다. 이런 사회에선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가 없고 오직 경쟁에서 이기려는 욕망과 이기심만이 존재한다. 우리 교육은 여기서 환골탈태 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부추기는 국민의 의식과 가치관은 시급히 바뀌어야 한다. 세상이 변하는 속도만큼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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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0
  • 스승의 부활을 꿈꾸며 - 인천제물포고 전재학 교감
    [교육연합신문=전재학 기고] 흔히 하는 말 중에 “학생은 많으나 진정한 제자는 없고, 교사는 많으나 진정한 스승은 없다”고 한다. 학생이나 교사에게 모두 불명예스러운 말이기에 입에 올리기 망설여진다. 하지만 쓴소리는 귀에 거슬리나 행동에 유익하기에 다시금 숙고할 문제다. 각자의 가치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고 양자를 도매금으로 매겨 취급하는 것이 문제이지만 작금의 세태를 반영하기에 씁쓸할 뿐이다. 언제부터 우리 교육 현장에 이처럼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회자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매년 종교적으로 이 세상에 신의 부활을 꿈꾸지만, 우리 모두의 인생의 길을 밝혀주고 인도해 주는 진정한 스승의 부활을 먼저 꿈꾸어야 한다.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 헤드(1861-1947)는 교사를 네 부류로 나눴다. 보통 선생은 지껄이고, 좋은 선생은 잘 가르치며, 훌륭한 스승은 스스로 모범을 보이고. 위대한 스승은 가슴에 불을 지른다고 했다. 여기서 잠시 선생과 스승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 선생은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 스승은 ‘자기를 가르쳐서 인도하는 사람’이라 정의한다. 그래서 우리가 단지 선생으로 남는 것보다는 지식 전달과 삶의 지혜를 함께 가르쳐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스승이 되고 싶은 것은 결코 지나친 욕심이 아니다. 하지만 세상은 단순한 선생으로 살아가기를 유혹한다. 그래도 부단한 학문의 연마와 자기 수양으로 이를 극복하고 스승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이 땅의 교사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작금의 교육 현장을 성찰해 보자. 과거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은 예사말이 된 지 오래다. 그만큼 교사의 권위는 추락했다. 학생에게 매 맞는 교사가 있지 않나, 각종 소송에 휩싸여 치욕스럽게 직위를 유지하는 교사도 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학생·학부모의 폭언 등 날로 심각해지는 교권침해와 교사를 부정적 시각으로 보는 현실은 이제 한계를 넘어섰다. 그래서 교권을 보호한다고 ‘교원지위법’을 제정하는 등 정부가 나섰다. 어찌 보면 이런 세태를 맞이한 것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처사라 탓할 수는 없다. 학교 현장에서 교사로서 낯부끄러운 일이 수없이 발생하는 것을 보고 들으면서 모든 것이 인과 관계에 의한 귀결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이제 세상은 교사에게 스승으로서의 부활을 요구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 ‘군사부일체’처럼 스승에 대한 존경은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교사로부터 변화의 물결이 시작돼 스스로 스승으로 거듭나는 노력이 우선이다. 교사는 제2의 부모로서 학생을 사랑으로 대하고 본인 스스로가 스승이라는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 이래야만 비로소 우리 교육이 바로 설 수 있다. 교사 자신부터 학생과 학부모 앞에서 참된 스승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품격과 자질, 소양을 갖춰 스승의 자리를 되찾는 일이 절실하다. 아직도 역사 속에 유령처럼 배회하는 세월호 사건을 보자. 참사 현장에서 자신보다는 학생들을 끝까지 챙긴 승무원, 침몰하는 배 속에서 마지막까지 난간에 매달려 학생들을 대피시킨 교사 등 우리 주변에는 숭고함을 보여주신 분들이 많다. 이들은 모두가 스승이라 칭해도 손색이 없다. 스승이란 꼭 가르쳐야 얻는 호칭이 아니라 그동안 살아오면서 보여준 그 사람의 말과 행동, 모습, 인품에서 얻어지는 호칭이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능력의 한계에 부딪혀 좌절하고 절망할 때, 뜻하지 않은 일로 슬픔을 겪을 때, 건강을 잃어 생사를 헤맬 때 누군가의 말과 행동, 모습, 인품을 생각하여 힘과 용기를 얻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면 이가 바로 스승이다. 스승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많은 교사가 스승으로 거듭나야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고 영혼까지 움직이는 교육이 가능하다. 혼과 혼의 대화, 인격과 인격의 부딪힘, 정성과 호응, 정열과 정열의 만남이 있는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스승의 부활, 이는 다시금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강력한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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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0
  • [칼럼] 교육의 답은 언어에 있다
    [교육연합신문=김대중 기고] “ㅁㅎ? 말 몇명만 댓 다 달아주 몇명 탐라 유령 몇명 잡아요 내 와꾸가 어떼? ㅆㅅㅌ지 지나가면서 다 좋아요“ 필자 페이스북 10대 친구가 올린 글이다.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해석을 요청하자, “뭐해? 프사(프로필 사진)를 몇 명에게만 바꾸겠다고 말했다. 댓글 다 달아줘. 몇 명 타임라인에 게시물 올려준다. 연락하지 않는 친구 몇 명 삭제해요. 내 얼굴 어때? 매우 좋지. 지나가면서 좋아요 다 눌러”라고 풀어 주었다. ‘갑분싸(갑자기 분위기 싸해졌다)’, ‘댕댕이(멍멍이)’와 같이 요즘 10대들이 쓰는 말을 ‘급식체’라고 한다. ’급식을 먹는 세대가 쓰는 언어‘라는 뜻이다. 10대들은 SNS, 인터넷 방송, 게임을 즐기며, 그 속에서 만든 그들만의 언어를 습관적으로 쓴다. 이러한 급식체가 10대들의 언어 문화로 확산되자, 2018년 전남 광양 백운고 황왕용 사서교사와 1학년 학생들이 함께 <급식체 사전>을 엮고 출판하였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언어 습관을 되돌아보고 교사와 학부모가 서로 이해하고 소통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10대들의 언어 문화는 급식체 보다 더 축약되고, 여러 언어들이 복합된 신조어가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다. 마치 상상 속에 있는 외계인의 언어처럼 기호화 되어가고 있다. 오늘날, 인간은 0과 1의 두 기호언어로 모든 지식과 정보를 컴퓨터에 저장하고, 분석하고, 창조해내고 있다. 이러한 컴퓨터 언어의 아이디어는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하여 지식정보사회를 거쳐 인공지능시대인 4차 산업혁명시대로 진화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저서인 <논리철학논고>에서 “언어는 세계에 대한 그림이다. 나의 언어의 한계들은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들은 침묵해야 한다.”라고 정리했다. 그에게 철학이란, 우리에게 세상을 이해하게 해주고 세상에 대해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언어가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탐구하는 하나의 활동일 뿐이었다. <논리철학논고>의 집필이 끝나자 비트겐슈타인은 더 이상의 철학이 없다고 생각하고, 가장 가치있는 일을 한다며 케임브리지를 떠난다. 비트겐슈타인은 가장 가치 있는 일은 교육이며, 대학 교수도 할 수 있었지만 대학 교육은 이미 늦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가난한 시골지역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게 된다. 정약용 선생이 18년의 강진 유배 시기에 제자들의 언어교육을 위해 <다산 천자문>을 집필했듯이, 비트겐슈타인은 <초등학생을 위한 사전>을 펴내고 자신이 확신한 언어교육을 원했고 학생들의 상급학교(문법학교) 진학에 열정을 다했다. 그러나, 경제 형편 때문에 자녀들의 노동력을 원했던 학부모들은 불만을 갖게 되었고, 그의 체벌이 문제가 되어 6년간의 교사생활은 끝이 났다. 그러나 세계의 모든 것은 언어로 해결할 수 있다는 20세기 최고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언어 교육을 위해 살았던 초등교사의 삶은 우리에게 커다란 울림을 준다. 우리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그의 삶에 공감한다면, 지금 10대들의 언어 문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교육해야 하는지 분명해진다. 창의교육, 인성교육 등 모든 교육의 목적은 학생들의 사고력을 높여 정신적으로 성장시키는 데에 있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이 정리했듯이 사고는 언어로 한다. 언어 능력이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 그래서 동서고금 모든 교육의 시작과 끝은 언어이다. 우리도 무엇보다 우선시 할 가장 중요한 교육은 국어이다. 전라남도교육청에서 교육장을 역임한 김승호 교육성장연구소장은 퇴임 이후에도 쉬지 않고 국어사전 보급운동을 하고 있다. 모든 학생들의 국어 어휘력 배양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는 확신을 실천하고 있다. 우리 교육의 등대같은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10대 학생들은 서로 급식체 같은 신조어로 재미있게 소통하고 있다. 이러한 신조어 사용이 더 확산되어 교사와 학생의 언어가 달라지면 소통에 문제가 생기고 교육의 질도 떨어지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학생들의 신조어 사용을 제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고, 할 수도 없다. 필자는 언어의 중요성을 학생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신조어 사용의 실태를 파악해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일도 중요하다. 학생들이 즐겁게 사용하는 신조어를 활용하여 오히려 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언어교육의 계기가 되면 어떨까?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언어철학에서는 형이상학, 종교학, 윤리학 같은 것은 중요하지만 명료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므로 침묵해야 한다고 정리했다. 그러나 그는 초등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다시 철학을 탐구하여, 언어는 그 시대성과 역사성, 그리고 삶의 맥락 속에서 의미를 갖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수정하였다. 지금 10대들의 언어 문화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될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언(言)을 모르면, 사람을 알 수 없다.” 동서고금의 최고의 고전인 <성경> 요한복음 1장 1절과, <논어> 제일 마지막 구절이다. 필자가 가르치고 있는 중학생들에게 이 말의 의미를 설명한 후에 신조어 등 그들의 언어로 다시 써보도록 해야겠다. 우리 학생들이 제2, 제3의 비트겐슈타인으로 성장하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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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25
  • [지니쌤의 희망램프] 좋은 인성이 기본이다
    [교육연합신문=김진희 논설위원] 4차 산업혁명의 시대, AI와 로봇기술, 사물인터넷, 빅 데이터 등의 기술적 융합과 혁신은 산업분야의 생산성을 더욱 높이고, 신기술이 집약된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의 제공으로 인간의 삶은 더욱 편리해질 것이다. 이 세상은 급진적으로 변화 발전해가며 AI와 로봇기술이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여 우리가 알고 있던 많은 수의 직업이 사라지고 또 새롭게 생겨나고 있는 중이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 최적화된 서비스를 제공할 사물인터넷, 그것이 가져다줄 4차 산업혁명의 미래가 과연 우리에게 유토피아가 될지 디스토피아가 될지 아무도 확언할 수 없다. 호기심에 앞선 서투른 발걸음, 막연한 두려움에 따른 머뭇거림은 필요 없다. 기계화되어가는 변화 혁신의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데이터로 증명되는 스펙보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의 영역, 즉, 창의적인 역량이 요구되며, 다양한 사회적 관계 안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협력할 수 있는 인성을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좋은 인성을 갖춘다는 것은 그 기준도 모호하듯 제법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좋은 인성으로 살기로 다짐하였다 하여 ‘오늘부터 좋은 인성을 갖춘 1일째’의 내가 될 수는 없다. 퇴근 무렵, 전화기를 통해 낯익은 목소리가 밝게 인사한다. 함께 면접 준비를 하며 수없이 반복해서 들었던 음성이기에 단번에 누군지 알아챌 수 있다.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한 특급 호텔에서 ‘학습 중심의 현장실습’ 기간을 거치고 취업에 성공한 아이다. 뜬금없이 걸려온 전화에 반가우면서도 ‘무슨 일이지?’ 하는 의문도 잠깐, 수화기 너머에 있는 아이는 예상외로 무척 밝은 음성이다. 그저 안부전화인가 싶어 안심할 즈음, 조심스럽게 전화의 용건을 밝히는 이 아이는 지금 막 퇴사를 했다고 한다. ‘어이쿠, 어쩌다가! 역시...’ 속으로 생각하며, “그동안 많이 힘들었나 보구나, 무슨 일 있었니?” 하며 대화를 이어간다. 아이들이 전화를 걸어오거나 SNS로 연락을 취할 때는 3가지 경우가 있다. 아주 좋은 일이 있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또는 무엇인가 도움이 필요할 때! 그저 안부만을 묻고 전하기 위해 연락을 취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자랑하고 싶도록 좋은 일인 때보다 대부분은 힘든 상황에 위로와 도움이 필요할 때 연락하기 마련이다. 용기 내어 무언가를 청한 아이들에게 응답할 수 있어서 다행이고 그저 감사할 뿐이다. 이 아이가 밝힌 퇴사의 이유는 ‘직장 내에서 관계가 힘들어서’이다. 입사 후 1년 내 퇴사한 경험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 따르면, 실질적 퇴사 이유로 말한 1위는 낮은 연봉 수준, 2위는 직장 내 상사 및 동료와의 갈등, 3위 과도한 업무량, 4위 적성에 맞지 않는 직무, 5위 낮은 성장 가능성 순이다. 이 아이의 경우는 2위 직장 내 상사 및 동료와의 갈등에 해당하겠다. 일터의 낯선 환경, 업무를 배우는 단계의 긴장된 심리 상태에서 서로 다른 여럿이 모여 일을 하다 보면 서로 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갈등의 상황은 있을 수밖에 없다. 취업을 나가기 전에 좋은 선임자, 좋은 사수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선임자의 입장에서도 실력과 인성을 두루 갖춘 후배가 들어오기를 기도했을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주려는 마음보다 그저 좋은 사람을 만나기만 기대하는 것은 너무 이기적인 마음이 아닐까? 좋은 사람을 만나려거든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혹독한 직장 생활 속에서 심한 차별과 괴롭힘, 깊어진 갈등의 상황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게 만든다.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함께 일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결국 행복하기 위함이다. 그 목표에 도달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역량, 꼬이고 얽힌 갈등의 상황을 지혜롭고 의연하게 이겨낼 수 있는 고유의 힘, 좋은 인성을 키우고 다듬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 되어야 할 것이다. ▣ 김진희 논설위원 ◈ 교육N플러스 대표 ◈ 특성화고 취업지원관 ◈ 인천광역시차세대여성지도자연합회 고문 ◈ 前인천광역시 시민행복정책자문단 교육위원 ◈ 前인천광역시차세대여성지도자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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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16
  • [칼럼] 노론의 300년 권력과 우리나라의 정당 정치
    [교육연합신문=김대중 전 목포시의회 의장] 조선이 왜 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느냐? 사색당파(붕당) 때문에 망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붕당은 조선시대 민주주의 제도였다. 조선왕조 500년은 세계에서 가장 긴 왕조였다. 잘 짜여진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유지되었던 것이다. 조선의 권력구조는 왕권과 신권(臣權)이 5:5로 서로 견제할 수 있는, 유럽에서도 볼 수 없었던 합리적인 구조였다. 이 때 붕당이 민주주의 정당의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광해군이 당시 명나라와 청나라 간의 중립(실리)외교를 실시하자, 서인이 명에 사대해야 한다는 명분 등으로 인조반정(쿠데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후 사실상 서인의 주류 세력인 노론의 1당 독재가 시작되었다. 권력이 오래가면 썩기 마련이다. 결국 조선은 패망하고 일제 식민지가 되었다. 노론의 마지막 당수가 이완용이고,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와 막대한 은사금을 받은 매국노 대다수가 노론이었다. 이 노론 세력은 을사늑약 이후 41년간 일제 치하의 지배세력으로 있다가 해방 후 미국과 이승만 정권의 반공이데올로기에 편승해 다시 주류 세력이 되었으며, 산업화 시대 박정희,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주류로 300여 년간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승만에 의해 반민특위가 해체된 뒤 어느 한 분야도 친일 잔재가 제대로 청산된 곳이 없다. 독립운동가의 얼굴이 새겨진 화폐 하나 없는 나라이고, 친일파의 동상이 여러 대학에 버젓이 세워진 나라이다. 상해임시정부의 정통성마저 부정하려는 국가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 민족. 민주주의 세력과의 심각한 갈등 요인이 되고 있다. 우리 사회는 대통령이 누가 되든 관계없이 300여 년 이어온 이 노론 세력이 사회 주류세력이다 보니 이런 갈등이 지속된다. 인조반정 이후 처음으로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서 1당 독재가 바뀐다. 그 뒤를 이어 노무현 대통령이 등장하면서 노론 주류 세력과의 갈등이 증폭된다. 검사들과의 대화 때 “나랑 한번 해보자는 겁니까?” 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은 지금도 생생하다. 300여 년 동안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노론 적폐세력이 대통령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았다. 그 이후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면서 적폐현상은 더 심화되었고 고이게 되면서 촛불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한국 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의 문제점을 꾸준하게 지적해 온 이덕일 한가람문화연구소 소장은 세월호 사건으로 드러난 한국 사회의 민낯이 낯설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선장과 선원이 공모해서 승객을 버리고 배에서 빠져나가는 장면이나, 진입 명령을 받은 해경이 진입하지 않은 것은 광복 직후 친일 세력이 다시 득세한 반역사적 반문명적 현실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친일 세력의 뿌리는 망해가고 있는 명나라를 명분으로 인조반정을 일으킨 세력에 닿아있고, 사도세자를 죽이고 정조를 독살한 세력에 닿아있다. 외국 침략자에 붙어서 매국 행위를 한 자들이 처벌을 받기는커녕 광복된 대한민국의 공직자로 부활했을 때 이들에게 국가란 무엇이겠는가. 그야말로 사적, 집단적, 당파적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이익 추구가 ‘관(官)피아’를 비롯한 한국사회의 온갖 학벌, 지역 카르텔로 나타났고, 그 적폐가 채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 300여 송이의 희생으로 한국 사회를 덮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지금 문재인 정권에서는 태극기 부대 등 각종 집회 주도 세력과 남.북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호도하는 집단이 자기들의 기득권을 방어하기 위하여 이 나라 전체가 흔들리고 경제가 무너진 것처럼 과장하여 가짜뉴스를 유포하고 있다. 자기들의 위기를 나라의 위기로 착각하고 있다. 그들은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제도 개혁의 의지를 가진 정권, 교육, 언론, 단체를 여전히 종북좌파로 매도하면서 국민들을 선동하고 있다. 나라를 가져다 북한에 바치려 한다는 그들의 거짓에 속고 또 속는 국민들을 총알받이 삼아서 재집권을 위하여 필사적인 노력을 하는 노론의 후예들, 친일파의 후손들, 군부독재의 아들들의 소행이 어쩌면 그리도 조선의 멸망을 가속화시키고 끝내는 멸망시켰던 노론 벼슬아치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는지! 이러한 300여 년 노론세력의 적폐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정당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그 정당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사회적 갈등만이 난무하고 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기존 양당의 독과점 때문이다. 이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낮은 투표율이 보여주듯이 정치에 대한 불신과 무관심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보듯이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독과점이 지속되는 이유는 새로운 정당의 국회 진출을 막고 현행 선거제도(승자독식, 지역주의제)에 있으며, 그 책임은 지역주의에 편승하여 생긴 자신의 기득권 때문에 끝내 이를 고치지 않으려는 퇴행적 정치세력에 있다. 지금 국회에서 추진되고 있는 선거법 개정이 한계는 있지만 대단히 중요하다. 이마저도 못해낸다면 300여 년 동안 집권하고 있는 노론붕당은 계속될 것이고 촛불도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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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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