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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장윤기 사건을 통해 얻은 교훈과 바람직한 인성교육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오늘도 각종 TV 매체에서는 ‘장윤기 사건’이 단 한 순간도 거르지 않고 오랫동안 ‘핫(hot)’한 뉴스 기사로 오르고 있다. 물론 그 이유는 범죄의 잔혹함을 넘어 권력 유착, 초동수사 부실, 그리고 인간 염치의 상실이라는 촌극이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2026년 5월 광주에서 장윤기에 의해 벌어진 한 여고생 성폭행 및 살인 사건은 10대 청소년의 귀중한 목숨을 앗아간 가슴 아픈 비극이자, 우리 사회의 법치와 윤리가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충격적인 사건이다. 이 글에서는 청소년들에게 바른 가치관을 정립하기 위한 경종으로 삼기 위해, 사건의 전말과 교육적 교훈을 짚어보고자 한다. 이는 향후 유사한 사건이 반복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는 길잡이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 사건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첫째, 계획된 왜곡과 뻔뻔한 변명으로 “우발적 자살 충동”이라는 거짓말이다. 피의자 장윤기(23세)는 체포 초기 “극단적 선택을 하려다 우발적으로 범행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 수사와 디지털 포렌식 결과, 범행 이틀 전 직장 동료 성폭행, 1.2km 미행, 차량 문을 열어둔 납치 시도, 결박용 케이블타이 준비, 학창 시절부터 SNS에 남긴 “청소년 여성 납치 범행” 발언 등이 속속 드러났다. 자신을 ‘불쌍한 피해자’로 포장하려던 가해자의 황당한 변명이 언론에 하나씩 노출되면서 국민적 공분을 샀다. 둘째, “아빠가 경찰이라서”라는 아빠 찬스 수사 유착과 부실 초동수사 논란이다. 사건이 끊임없이 잡음을 낳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가해자 부친과 큰아버지가 현직 경찰 간부라는 사실 때문이다. 수사 초기, 현직 경찰인 부친이 자택 내 주요 증거물(성인용품 등)을 폐기했고, 경찰은 강간살인 혐의(최소 무기징역)가 아닌 단순 살인 혐의로 사건을 검찰에 송치해 ‘봐주기 수사’ 의혹을 자초했다. 검찰이 재수사를 통해 사건의 실체를 바로잡고, 경찰청 특별수사단이 당시 형사과장 등 책임자들에 대해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영장을 재신청하는 지경에 이르면서 매일 같이 새로운 스캔들이 쏟아진 것이다. 셋째, 뻔뻔한 미래 계획과 빼앗긴 희생자의 꿈이 서로 극과 극을 이루고 있다. 희생된 고(故) 이채원 양은 생전 응급구조사를 꿈꾸며 이웃을 돕고자 했던 따뜻한 청소년이었다. 반면 가해자 장윤기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수감된 상태에서도 “교도소에서 자격증을 취득하겠다”며 자신의 미래를 태연하게 계획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타인의 삶을 송두리째 짓밟아놓고 정작 자신의 삶은 알뜰히 챙기려는 피도 눈물도 없는 몰염치한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씁쓸함과 분노를 안겼다. 그렇다면 우리 청소년들이 이 사건에서 배워야 할 삶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핑계의 기술’ 대신 ‘책임의 무게’를 배워야 한다. 어른들의 세상에는 종종 자신의 범행을 ‘환경 탓’, ‘기분 탓’, ‘우발적 충동’으로 포장하려는 비겁함이 넘쳐난다. 하지만 진짜 어른이란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엄중한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청소년 시기부터 자신의 잘못을 타인이나 상황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직면하는 용기를 배워야 할 것이다. 둘째, 타인을 대상화하는 왜곡된 정보와 거리 두기다. 장윤기는 학창 시절부터 음란물과 삐뚤어진 욕망에 노출되며 타인을 인격체가 아닌 ‘성적 대상’이나 ‘범죄 대상’으로 바라보는 왜곡된 인식을 키웠다. 인터넷과 미디어에 범람하는 그릇된 성 관념과 자극적인 정보들을 비판적으로 걸러내고, 타인의 인권을 존중하는 감수성을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셋째,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정의감과 용기다. 이 사건의 비극 속에서도 빛난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친구를 구하기 위해 달려들었던 동년배 학생의 용기였다. 또한 권력 유착 의혹에 굴하지 않고 진실을 파헤친 언론과 검찰의 추적은, 시스템이 오염되더라도 결국 정의는 바로잡혀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이 사건을 교육적으로 청소년들에게 하나의 의미와 교훈을 남길 수 있는 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는 자제력과, 잘못 앞에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주변 사람들의 염치다. 타인의 삶을 짓밟고 얻는 자유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청소년 교육에 시사점으로 부각시켜 활용함으로써 인간의 도덕적·윤리적 사상과 가치, 그리고 생명 존중 의식을 더욱 확고하게 고취하는 것이야말로 인성교육과 인간 존중의 핵심이라 믿는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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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교실 사법화에 경종 울리기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요즘 대한민국 학교는 교육의 전당이라기보다 교사의 ‘아동학대’, 또는 ‘정서 학대’로 인한 사법화가 일상화됨에 따라 법원 직영 아동 청소년 상담소에 가까워졌다. 예컨대, “선생님, 쟤가 제 지우개 가져갔어요!”라는 귀여운 고자질의 시대는 저물었다. 이제는 “선생님, 그 눈빛과 말투는 제 아이에게 정서적 학대 행위이니 법정에서 뵙겠습니다”라는 무시무시한 ‘사법 고소’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상 이상의 많은 교사들이 고소·고발의 홍수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 그런데 다소 이해 불가의 사실이 있다. 이렇게 난무하는 교육 현장의 아동학대 고소 중 거의 대부분이 조사나 재판 과정을 거쳐 결국 ‘기각’되거나 ‘무죄 판결’로 끝난다는 점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법정에서 “죄가 없다”고 최종 판결을 내려준들, 그동안 교사가 흘린 피눈물과 영혼의 상처는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교사가 법정을 들락날락하는 동안 방치된 다른 학생들의 학습권은 어디서 환불받아야 하는가? “아님 말고” 라는 무분별한 고소로 교육 현장을 초토화한 무법자들에게 이제는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할 때이다. 이 글에서는 교권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방어벽, 이른바 ‘징벌적 교육방해죄(가칭)’ 제정의 필요성을 제안하고자 한다. 미국의 저명한 법학자이자 문화비평가인 필립 하워드(Philip K. Howard)는 그의 저서 『법의 죽음(The Death of Common Sense)』에서 과도한 사법화가 어떻게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리는지 경고한 바 있다. 미국에서도 1990년대 이후 학교 내 소송이 급증하자, 교사들이 학생의 싸움을 말리지 않거나 칭찬조차 조심하는 ‘방어적 교육’ 현상이 일어났다. 하워드는 이를 “법이 상식을 집어삼켜 공동체를 마비시킨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우리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최근 국회 교육위원회 및 교육청 국정감사 자료 등에 따르면, 교사를 상대로 한 아동학대 신고 중 실제 처벌(벌금형 이상)로 이어지는 비율은 극히 낮다. 대부분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되거나 재판에서 무죄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무죄를 받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년이 걸린다. 그동안 교사는 직위해제를 당해 월급이 깎이고, ‘아동학대 피의자’라는 주홍글씨를 단 채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 교사가 무죄 판결을 받고 교단에 돌아왔을 때, 교실에 남은 것은 영광의 상처, 서먹함과 두려움뿐이다. 전쟁에서 이겼는데 영토는 황무지가 된 꼴이다. 우리 사회는 지하철에서 비상정지 버튼을 장난으로 누르면 무거운 과태료를 부과한다. 수많은 사람의 발을 묶고 시스템을 마비시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학교라는 공공 시스템을 사적인 감정이나 무리한 요구로 마비시킨 사람에게도 통념에 상응하는 책임, 즉 ‘교육 활동 마비죄’ 혹은 ‘무고성 교육방해죄’를 물어야 공평치 않겠는가? 이를 위해 첫째, 소송 비용 및 정신과 치료비 ‘전액 역청구’가 필요하다. 무죄나 무혐의가 확정되는 순간, 고소인이 교사의 변호사 선임 비용은 물론, 그동안 입은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 그리고 교사 공백을 메우기 위해 투입된 대체 강사 인건비까지 전액 배상하도록 법제화하는 것이다. 둘째, 공익 봉사 명령(‘학교 잡무 100시간’)부여다. 돈으로만 해결하면 ‘유전무죄’가 될 수 있으니, 무리한 고소로 학교 행정을 마비시킨 학부모에게는 학교 행정실이나 급식실에서 공익 봉사를 하도록 조치해야 한다. 이는 본인이 마비시킨 교육 현장이 얼마나 치열하게 돌아가는지 몸소 체험해 보라는 취지라 할 것이다. 교사를 죽이는 과도한 사법 고소·고발을 종식시키기 위해, 무죄 판결 시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경제적 대가를 치르게 하는 법 제정은 결코 과한 처사가 될 수 없다. 단적인 예로 축구의 헐리우드 액션에 대한 대응(경고 또는 퇴장)을 보라. 이제는 무너진 공교육을 정상화하고, 대다수의 선량한 학생들의 학습권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정당방위’가 필수적이다. 법은 교실을 흔드는 자들에게 엄중한 청구서를 주저 없이 발행해야 한다. 상식이 통하는 교실, 교사가 안심하고 출근하는 학교를 만드는 것, 이것이 우리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교육이라 믿는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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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월드컵은 끝났지만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4년을 기다렸던 2026 FIFA 북중미 월드컵이 끝났다. 한국은 첫 경기에서 체코를 상대로 역전승을 거두며 기대를 키웠지만 멕시코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연이어 패하며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한국 축구의 개선 여론 속에서 홍명보 감독이 사퇴했다. 2002년 월드컵은 우리에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고 2026년 월드컵은 다른 숙제를 남겼다. ‘이제는 정말 바꿔야 한다.’ 한국 축구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과거 관행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하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역설적 상황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한국 교육은 어떤가. 인공지능, 창의력, 학생 중심이라는 구호 아래 실질적인 시스템은 건드리지 못하고 ‘뫼비우스 띠의 길’을 달리는 것은 아닌가. 정답과 입시라는 관행의 길은 한국 교육이 뛰어내려야 할 길이다. 축구에 ‘경기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입시만 바꾼다고 교육이 달라지지 않는다. 교실이 바뀌고, 수업이 바뀌고, 평가가 바뀌어야 한다. 월드컵에서 강한 팀은 실수를 숨기지 않는다. 패배를 분석하고 다시 도전한다. 그러나 우리는 교육의 실패를 학생 탓, 교사 탓, 부모 탓으로 돌리는 데 익숙하다. 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가. 수없이 강조했듯이 입을 닫고 귀를 기울이는 수업이 아니라 질문을 만들고 협력하고 실수에서 배우는 교육이다. 상대를 끌어내리는 교육이 아니라 협력하는 교육이다. 거대한 과학기술은 많은 반복적 실수와 협력으로 업그레이드한 결과물이다. 컴퓨터 세상이 되면서 업그레이드는 일상이 되었다. 유연한 업그레이드는 생존 조건이다. 산업화 시대의 경직된 교육 방식을 인공지능 시대까지 끌고 간다면 미래를 이길 수 없다. 세상이 변했는데 교실이 변하지 않는다면 학생들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배우게 된다. 좋은 축구는 좋은 선수가 만드는 것보다는 좋은 시스템이 만든다. 좋은 교육도 마찬가지다. 한 명의 천재를 기다리는 나라보다 평범한 아이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꽃피울 수 있는 나라가 결국 미래의 승자가 된다. 우리는 선수가 바뀌기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시스템이 바뀌기를 요구해야 한다. 교사를 믿고, 학생에게 질문할 자유를 주며, 교실을 토론과 협력의 공간으로 바꾸어야 한다. 창의성은 침묵에서 자라지 않고 질문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교실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 학생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보다 출제자의 생각을 추론하는 훈련을 받는다. 실패는 성장의 과정이 아니라 감점의 이유가 된다. 인공지능은 이미 지식 암기의 인간을 앞질렀다. 검색도, 계산도, 번역도 기계가 더 빠르다. 인간에게 남은 경쟁력은 질문하는 능력, 서로 협력하는 능력,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능력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어제의 방식으로 내일의 인재를 키우고 있다. 장기적 교육 시스템 개선이 필요하다. 월드컵 패배는 경기의 패배지만 교육의 실패는 미래 세대의 돌이킬 수 없는 패배이다. 세계와 경쟁하는 시대에 단기적인 정책 중심의 교육은 처참한 패배를 불러 올 수 있다. 월드컵 조별 탈락을 통해서 우리 교육을 볼 때 결코 남일 같지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진로융합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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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무너지는 교실 속에서도 조용히 싹트는 ‘진짜 공교육’의 실태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우리는 흔히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을 달고 산다, 하지만 이는 기원전(B.C) 1700년경 수메르 점토판에도 적혀 있었다. 참으로 오랫동안 인간 성장에 대한 교육적 한탄은 인류의 유구한 전통으로 아어진 것이다. 특히 오늘날 대한민국의 교육 언론을 장식하는 뉴스들을 보면 온통 여기저기서 교권 추락, 붕괴된 교실, 인공지능(AI) 시대의 학력 미달, 그리고 끝없는 입시 경쟁까지, 온통 사면초가에 빠진 ‘교육 부실론’뿐이다. 그러나 모든 교실이 절망의 비명만 지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 모두가 한국 교육의 절망적인 상황을 진단하고 있을 때, 전국 구석구석의 학교 현장에서는 도덕과 상식, 그리고 인간미를 복원하며 ‘공교육의 기적’을 일구어내는 진짜 교육자들과 아이들이 존재한다. 이 글에서는 비판과 비난의 목소리를 잠시 가라앉히고, 묵묵히 교육의 본질을 혁신하며 주목받고 있는 교육의 현장들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최근 교육계의 화두는 AI 교육과 같은 ‘기술적 진보’에 치우쳐 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배워도 타인을 존중하는 법을 모른다면 그 교육은 실패한 것이다. 이 엄혹한 시대에 경쟁 대신 ‘상생과 인성’을 전면에 내걸고 획기적인 성과를 낸 사례가 있다. 이를 널리 알리고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은 긴 장마 끝에 모처럼 활짝 피어오른 햇살과 같은 감응을 일으킨다. 먼저 경기도 파주교육지원청이 전개하고 있는 ‘마음 온(溫, ON) 인성교육’ 프로젝트다. 파주 관내 초·중·고등학교들은 ‘1학교 1인성브랜드’를 자율적으로 선정해 교육과정 속에 완전히 녹여냈다. 2026년 2월 파주교육지원청이 선정한 인성브랜드 실천 우수학교(청암초, 통일초, 선유중, 운정고 등)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타임즈, 2026년 2월 4일 자 보도). 이 학교들은 일회성 캠페인에 그치지 않고, 학생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상시로 배려와 감사를 실천하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욕설이 난무하던 복도에 감사 인사가 흐르고, 선후배가 멘토링을 통해 격차를 메우는 모습은 ‘인성교육이 곧 최고의 학력 향상 대책’임을 증명했다. 지식만 욱여넣는 ‘인큐베이터 교실’을 인간성을 따뜻하게 켜는(ON) ‘온실’로 바꾼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학교가 바뀌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무거운 관료주의와 행정 편의주의다. 교사가 공문 처리에 치여 아이들 눈을 맞출 시간이 없다면 그 교육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그런데 경남교육청이 지난 12년간 추진해 온 ‘경남 혁신교육’은 일부 학교의 실험을 넘어 공교육 전체의 문화를 바꾼 대표적 성공 사례로 꼽힌다(교육언론창, 2025년 기획 분석 보도). 이 사례가 주는 교육적 울림은 경남 혁신교육의 핵심이 ‘학교 자치’와 ‘교사 행정업무 경감’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교사를 온전히 아이들 곁으로 돌려보내니, 수업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주입식 수업은 학생 중심의 프로젝트형 토론 수업으로 바뀌었고, 아이들은 획일적인 정답 찾기가 아니라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개별 교사의 독단적 헌신에 의존하던 구조를 깨고, 학교 공동체 전체가 협력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은 공교육 개혁의 가장 큰 수확이라 할 수 있다. 초·중등 교육의 긍정적인 변화가 입시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좌절하지 않으려면, 고등 교육과의 유기적인 생태계 구축이 필수적이다. 이제는 단순히 “착하게 살자”는 훈화식 교육을 넘어, 인성과 창의성을 고등 교육 및 지역 산업과 연계하는 획기적인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그와 같은 획기적인 대안으로 경상남도가 추진 중인 미래차·방산 등 지역산업 DNA를 교육과 연계하는 ‘G-10 모델’(한국대학신문, 2025년 보도)처럼, 이제는 대학과 시도교육청이 손을 잡고 ‘인성 및 창의성 특별전형’을 교육 벨트화해야 한다. 이 땅에서 매우 흔한 일로 대한민국 교육의 문제점을 찾아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손쉬운 일이다. 확대경을 들이대고 교실의 상처를 들추며 비난의 화살만을 쏘아 대는 것은 지양할 일이다.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얼어붙은 학교 현장을 녹이고 묵묵히 헌신하는 교사와 학교를 응원하는 따뜻한 ‘햇볕’의 시선이라 믿는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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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AI 시대, ‘기술 낙관론’의 후퇴와 기초학력의 역습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최근 대한민국 교육계의 지배적인 언어는 단연 ‘AI’와 ‘디지털 대전환’이다. 이를 반영하듯이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인공지능(AI)이 학생 개개인의 학업 성취도를 분석해 맞춤형 문제를 제공하고, 교실마다 태블릿 PC와 디지털 교과서가 보급되면 해묵은 학력 격차와 사교육 문제가 마법처럼 해결될 것만 같았다. 그동안 몇 해에 걸쳐서 수조 원의 예산이 에듀테크 인프라 구축에 투입되었고, 미래 교육은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였다. 그러나 2026년 7월 현재, 대한민국 교육 현장의 분위기는 완전히 급반전했다. 화려한 기술적 수사(修辭) 뒤에 가려져 있던 차가운 현실, 즉 ‘사상 최악의 기초학력 붕괴’와 ‘디지털 과의존’이라는 역풍을 정면으로 마주하기 때문이다. 교육부가 최근 발표한 2026년도 주요 업무계획과 예산 편성 추이를 살펴보면, 기술 중심 정책에서 벗어나 ‘국가 책임 기초학력 보장’을 정책의 최전면에 다시 배치했음을 알 수 있다. 화려한 미래 기술 낙관론이 교실의 참담한 현실 앞에서 일보 후퇴하고, 교육의 가장 본질적인 ‘기초’가 2026년 교육계의 ‘핫(hot)’한 화두로 떠오른 것이다. 이러한 학력 붕괴의 주범으로 지목된 것이 바로 과도한 디지털기기 노출이다. 위기감을 느낀 국회는 결국 지난 하반기 초·중등교육법을 개정하여, 올해 2026년 3월 1일부터 ‘전국 학교 내 학생 스마트폰 사용 원칙적 금지’라는 초강수 제도를 전면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행정규칙에 불과했던 스마트폰 제한을 상위법 개정을 통해 법제화한 것은 그만큼 아이들의 디지털 중독과 교실 붕괴가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이의 연계로 지난 7월 1일, 새로운 교육감들이 업무를 시작하면서 안민석 경기도교육감은 결제 서류 1호로 경기도 내 초중고에서의 ‘폰-프리(Phone-free) 스쿨’ 선언에 이르렀다. 이는 AI 시대에 학교에서의 소통을 강화하고 학력의 저하를 막기 위한 고육지책의 일환으로 판단된다. 인공지능 디지털 교과서를 도입하겠다며 예산을 쏟아붓는 동시에, 한편에서는 스마트폰을 법으로 금지하고 국가기초학력지원포털을 급히 개통하는 모순적인 풍경이 바로 이 시대 대한민국 교육의 현주소라 할 것이다. 이처럼 디지털의 홍수 속에서 무너진 기초학력을 복원하고 공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첫째, 기술을 이기는 ‘기초학력 전담 교원’의 파격적 확장인 인프라 구축이 요구된다. 교육부는 ‘국가기초학력지원포털’을 구축하여 나이스(NEIS)와 연계한 학습 이력 관리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컴퓨터 모니터 속 데이터와 분석 리포트는 아이들의 무너진 학력을 스스로 메워주지 못한다. ‘수포자 및 ’국포자‘란 용어로 통칭되는 기초학력 미달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교한 알고리즘이 아니라, 자신의 눈을 맞추고 발음을 교정해 주며 끝까지 기다려 주는 ‘인간 교사의 따뜻한 손길’에 달려 있다는 것이 정론이다. 둘째, ‘질문하는 학교’와 ‘서·논술형 평가’로의 평가 혁신이 시급하다. 기초학력의 붕괴는 단순히 지식의 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정답을 도출해 내는 ‘생각의 근육’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사지선다형, 오지선다형 객관식 시험에 최적화된 기존의 평가 체제 속에서는 디지털 기기에 익숙한 아이들이 요령만 터득할 뿐, 깊이 있는 인지 능력을 발달시키기 어렵다. 실제로 수능에 고득점을 한 졸업생들은 “고등학교 시절. 문제를 빨리 풀고 익숙해지는 연습만을 무한 반복했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이제 대한민국 교육은 방향타를 거듭 고쳐 잡아야 한다. 한때 국가교육위원회의 권고 사항이었다가 이제는 인권 침해가 아니라고 번복한 스마트폰 압수 제재라는 일차원적 규제를 교육혁명으로 간주하는 수준을 넘어, 아이들이 책장을 넘기며 스스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교실 환경을 시급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화려한 예산안과 차가운 디지털 플랫폼 뒤에 숨지 말고, 교실 현장에서 아이들과 뒹굴며 기초를 닦아줄 ‘교사’라는 휴먼 웨어에 과감히 투자해야 한다. 공교육의 본령은 모든 아이가 사회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단단한 지적·정서적 기초를 다져주는 데 있다. 부디 대한민국 교육이 만병통치약처럼 번지는 첨단 기술이라는 미혹에서 벗어나 ‘인간적 성장의 기초’라는 인간 중심의 위대한 본질에 보다 집중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소망하는 마음이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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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인생의 길은 전공이 아니라 도전이 만든다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이 말은 컴퓨터의 선구자 앨런 케이가 한 말로 유명하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어느 대학을 나왔는가?”, “무슨 전공을 했는가?”를 성공의 잣대로 삼는 관행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시대는 이미 달라졌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직업을 바꾸고, 최첨단 기술이 산업의 경계를 허무는 시대에는 전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평생 배우려는 자세와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한성숙 신임 국무총리다. 그녀는 공학도도, 컴퓨터공학 전공자도 아니었다. 숙명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평범한 인문학도였다. 그러나 졸업 후 컴퓨터 전문지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누구보다 빠르게 정보기술의 미래를 읽었다. 이후 나눔기술을 거쳐 인터넷 포털 엠파스 창립 멤버로 참여했고, 국내 최초의 '열린 검색' 서비스를 기획하며 인터넷 산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어 NHN과 네이버에서 검색과 서비스 혁신을 주도했고, 2017년에는 네이버 최초의 여성 대표이사(CEO)에 올랐다. 그녀가 대표로 재직하는 동안 네이버는 웹툰, 간편결제, 인공지능, 글로벌 플랫폼 사업을 확대하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IT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경영 성과를 인정받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으로 발탁되었고, 이어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되며 기업 경영과 공공행정을 모두 경험하는 보기 드문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한성숙의 인생은 우리에게 묻는다. “전공이 미래를 결정하는가, 아니면 배움이 미래를 결정하는가?” 말이다. 답은 이미 그녀의 삶 속에서 드러났다. 교육학자 존 듀이는 “교육은 삶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 삶 그 자체”라고 말했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은 출발점일 뿐이다. 삶은 졸업 후에도 계속 배우는 사람에게 더 큰 기회를 선물한다.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 CEO 가운데도 전공과 직업이 일치하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중요한 것은 학과 이름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며, 끊임없이 배우려는 태도이다. 한성숙 국무총리는 과거 기술자가 아니었지만 기술을 이해했고, 경영학도가 아니었지만 조직을 성장시켰으며, 정치인이 아니었지만 국가의 미래를 설계하는 자리까지 나아갔다. 이것이 바로 융합형 인재가 갖는 힘이다.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꿈이 무엇이냐?"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은 “평생 무엇을 배우며 살아갈 것인가?”이다. 직업은 바뀔 수 있다. 산업도 바뀐다. 그러나 배우는 사람은 어느 시대에서도 살아남는다. 이 시대 최고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미래를 예측하는 최선의 방법은 스스로 미래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교육도 이제는 정답을 빨리 맞히는 학생보다 새로운 질문을 던질 줄 아는 학생을 길러야 한다. 대학 입시를 위한 암기보다 세상을 바꾸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인공지능 시대에는 지식을 저장하는 사람보다 지식을 연결하는 사람이 더 큰 가치를 만든다. 한성숙 국무총리의 성공은 개인의 영광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것은 대한민국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는 하나의 이정표다. 오늘의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영문학을 전공했다고 영어만 해야 하는 시대는 끝났다. 지방대 출신이라고 꿈을 포기할 이유도 없다. 실패했다고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결론은 배우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은 언제든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있다는 진리다. 교육은 직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드는 일이다. 사람다운 사람이 많아질 때 사회는 발전하고, 그런 사람이 혁신을 이끌 때 국가는 미래를 얻는다. 이제 우리는 조용하지만 강한 교육적 메시지를 얻었다. “전공은 출발선일 뿐, 목적지는 스스로 배우는 사람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오늘날 우리의 청년들은 고용 절벽의 시대를 살아간다. 온갖 스펙으로 실력을 갖추었지만 40만~70만 명의 청년들이 아무 하는 일도 없이 그냥 쉬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 어렵게 살아 온 순간의 삶과 축적한 지식, 실력을 그대로 사장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대학에서의 전공은 하나의 경우일 뿐이다. 인생의 길은 전공이 아니라 도전이 만든다는 사실을 이 글의 주인공의 삶을 통해 느끼고 모델로 삼을 수 있기를 기대하고 바라는 마음이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교육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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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성심당 빵집이 던지는 질문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내 고향은 대전이다. 초,중,고 학교를 대전에서 다녔다. 대전은 유명한 ‘노잼 도시’였다. 그런데 새롭게 관광명소가 된 곳이 있다. 역사적인 사찰도 아니고 단풍이 고운 명산도 아니다. 빵집이다. 성심당 빵을 사려고 사람들이 줄을 서고 주변 칼국수 가게까지 사람이 늘더니 대전을 대표하는 명소가 되었다. 주말과 평일 가리지 않고 대전 중구 은행동 성심당 본점 앞에는 늘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쟁반 가득 빵을 골라 담는 사람들은 행복해 보인다. 빵집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궁금했다. 사람들을 이렇게까지 기다리게 하는 성심당의 힘은 무엇인가. 빵에 대한 진심, 합리적 가격, 약자를 위한 기부 등 성심당이 실천하는 '착한 기업'의 가치가 인기의 비결이라고 한다. 과연 성심당은 어떻게 70년 동안을 이어오고 있을까. 우리가 배울 점은 없는가. 학교도 이렇게 학생이 오고 싶은 곳이 되었으면 하는 욕심이 든다. 성심당은 빵집의 본질이 ‘빵의 맛’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본질에 대한 집요함이다. 교육도 다르지 않다. 교육의 본질은 입시 성과나 화려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배움이 실제로 일어나는 교실이다. 보여주기식 정책, 단기 성과, 수치화된 결과에 몰두하면 정작 수업의 질과 교사의 전문성이라는 핵심은 뒤로 미뤄진다. 성심당이 반죽과 오븐 앞을 떠나지 않듯 교육 역시 교실과 아이들 곁을 떠나면 안 된다. 성심당은 빵을 통해 말한다. 교육도 그래야 한다. 성심당은 전국 어디에나 있는 빵집이 되지 않았다. 대신 ‘대전에 가야만 만날 수 있는 빵집’으로 남았다. 모든 학교가 똑같은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똑같은 성취 기준만을 좇는 현실에서 학교는 특색이 없다. 학교는 지역의 역사와 삶, 아이들의 현실을 품을 때 비로소 살아 있는 배움의 공간이 된다. 과거에 학교는 지역사회의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성심당은 등록상표 43건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소비자의 입맛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부단한 연구와 상품개발을 통해 입맛을 선도하는 빵집이라는 말이다.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원칙이 있다는 말이다. 시대가 변했는데 과거의 틀을 고집하는 분야에서 성장은 없다. 성심당은 1956년 문을 연 이래 복지단체에 빵 기부, 수억 원 넘는 장학금, 미혼모와 신생아를 위한 병원 진료비 기탁 등을 해왔다고 한다. 법인 설립 뒤 20여 년 동안 펼쳐온 기부활동은 모두 120억 원에 이른다고 한다. 성심당의 인기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상승장만 가는 주식이 없듯이 언젠가는 내리막길을 갈 것이다. 하지만 빵을 만들어서 한 지역을 관광명소로 만드는 일은 드문 일이다. 거기에는 분명하게 배울 점이 있다. 성심당 임선 이사가 강연에서 밝힌 성심당 성공 공식은 ‘단기적 이익이 아니라 고객이 느끼는 가치에 집중한 게 성공 비결’이라고 한 적이 있다. 오늘 학교는 과연 본질에 충실하면서 따뜻한 가치를 존중하는가. 대전의 작은 빵집이 던지는 질문은 가볍지 않다. 성심당은 묻는다. “우리는 빵을 통해 더 따뜻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가치가 있다. 오늘날 학교는 과연 무슨 가치로 교육을 하고 있는가”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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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성심당 빵집이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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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AI 시대, 우리는 무엇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인공지능(AI)은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저 멀리 미국의 미래 도시 라스베가스에서는 지난 1월 6일~9일까지 미국 소비자 가전협회에서 주관하는 ‘CES 2026’이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으며 진행되었다. 인간의 사고와 판단 영역까지 넘보는 AI 시대, 올해는 피지컬 AI인 휴머노이드 로봇과 자율주행 로봇의 진화된 모습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 여기에 당당히 도전장을 던진 우리의 자랑스런 스타트업 기업들의 AI 시대를 선도하는 모습에 진한 감동과 함께 힘찬 박수와 응원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학생들은 이미 생성형 AI와 함께 글을 쓰고, 문제를 풀며, 진로를 탐색한다. 그러나 정작 학교 교육은 “AI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만 머물러 있고, “AI와 함께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에는 충분히 답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드시 학생들에게 읽혀야 할 책이 있다. 바로 MIT 물리학자 맥스 테그마크(Max Tegmark)의 『라이프 3.0: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의 미래』이다. 이 책이 AI 시대의 필독서로 등장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라이프 3.0』은 기술 사용법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인공지능 이후의 인간 정체성, 윤리, 교육, 민주주의를 다룬 사유의 대표성을 가진 책이기 때문이다. 테그마크는 생명의 진화를 라이프 1.0(본능에 의해 결정되는 생명), 라이프 2.0(학습은 가능하지만 신체와 지능은 스스로 설계할 수 없는 인간), 그리고 라이프 3.0(스스로 지능과 목적을 재설계하는 존재)으로 구분한다. 인공지능은 인류를 라이프 3.0의 문턱에 세운 존재이며, 문제는 “가능한가”가 아니라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이다. 교육적으로 이 책을 강력히 권장하는 이유는 정답을 주지 않고 질문을 훈련시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저자는 묻는다. “AI가 인간보다 똑똑해진다면, 우리는 무엇을 목표로 설정해야 하는가?”, “효율이 최선의 가치가 될 때, 인간의 존엄은 어떻게 지켜지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단순한 철학 담론이 아니라, 교실에서 토론 수업과 프로젝트 학습으로 확장될 수 있다. 실제 사례를 들어 본다. 한 고등학교에서 『라이프 3.0』의 일부를 읽고 ‘AI가 교사가 되는 사회’라는 주제로 토론 수업을 진행했다. 학생들은 AI 튜터의 장점(개별 맞춤 학습, 공정성)과 한계(공감의 부재, 가치 판단의 문제)를 스스로 분석했다. 이후 한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AI는 답을 잘 주지만, 왜 살아야 하는지는 말해주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 깨달음이야말로 AI 시대 교육의 핵심 성취라 할 것이다. 『라이프 3.0』은 교사에게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지식을 전달하는 역할은 AI가 빠르게 대체할 수 있지만, 가치를 해석하고 책임을 가르치는 일은 인간 교사의 몫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학생뿐 아니라 예비 교사, 현직 교사, 교육 정책가 모두가 읽어야 할 책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교육은 더 많은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인간을 길러내는 일이 되어야 한다. 『라이프 3.0』은 그 방향을 잃지 않게 해주는 나침반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책을 교실로 들여와야 하는 이유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아이들이 AI를 두려워하지도, 맹목적으로 숭배하지도 않고, 책임 있게 설계할 수 있는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AI는 이미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있다. 학생들은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와 함께 글을 쓰고, 문제를 풀며, 진로를 탐색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학교 교육은 “AI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만 머물러 있고, “AI와 함께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에는 충분히 답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에게는 AI 시대에 반드시 읽고 이해할 필요성과 가치가 큰 서사에 눈길을 돌릴 계기가 필요하다. 따라서 각급 학교에서는 독서를 적극 권장하고 활용하여 혁명적인 AI 시대의 흐름과 진화하는 인공지능의 발전 모습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실용적인 교육을 실시할 것을 기대한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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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AI 시대, 우리는 무엇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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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새해에 내 안을 단순하고 깨끗하게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직원과 점심식사를 하는 시간에 전화가 왔다. 전에 같이 근무했던 지인이다. 전화하는 대부분은 부탁을 하는 내용이다. 간단하게 해결되는 일이 아니기에 부탁을 하는 것이다. 부탁을 듣고 나니 소화가 안 된다. 나도 쉽게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살다 보면 잡다한 고민이 많다. 선택은 곧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해 준다. 무엇을 내가 중요시하는지도 알려 준다.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만 나에게 문제를 던져 주는 상대방은 주로 내가 나쁜 사람 역할하기를 원한다. 사료를 먹고서 졸고 있는 개를 보면 행복해 보인다. 현재에 충실하고 미래에 대한 걱정도 없고 남에게 부탁을 받지도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반려동물을 키우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본능에 충실한 삶이 평안을 준다. 옛날보다 쌀밥과 고기반찬을 더 많이 먹는데도 행복감이 적다. 인간관계는 더욱 복잡해졌다. 얕고 넓은 모임이 많아지고 선택은 고민을 낳는다. 청렴하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비우는 것이다. 깨끗한 것이다. 욕심이 없는 사람. 가을 하늘처럼 맑은 사람이 되어보자. 매일 조금씩 버려보자. 법정의 ‘무소유’에서 비움의 철학을 살뜰히 말하지 않았던가. 물건을 버리면 집착이 없어진다. 삶이 불편할 정도로 비워내고 싶다. 현대는 적어서 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차고 넘쳐서 병이 되고 있다. 이발을 하고 손톱과 발톱을 깎고 샤워를 하고 거실에 누워 눈을 감으면 실구름처럼 몸은 가볍고 마음은 평안하다. 담담함은 얼마나 큰 기쁨인가. 형형색색의 간판이 있는 도시의 거리보다 조용한 오솔길을 걸을 때에 얼마나 영혼이 충만하고 좋았던가. 정리를 잘하는 사람은 차곡차곡 빈틈없이 쌓아놓은 것이 아니라 쓸모가 없어진 것을 과감하게 버리는 사람이다.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인식도 버리자.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의 가족들을 보라. 그들은 잠자가 죽자 모두 훌륭하게 자신들의 생활을 잘 꾸려 나갔다. 세상일에서 내가 아니면 망할 것 같은 망상을 버리자. 세상은 내가 아니어도 잘 돌아간다. 자유롭고 싶다면 비우자. 비우는 만큼 자유로워진다. 손에 움켜쥔 것을 놓으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짐승들은 몸이 아프면 단식을 한다. 자신의 몸을 비운다. 비우는 것이 자연이 가르치는 최상의 치유 방법이다. 일주일에 한 번은 잠자던 반려견처럼 자신에게 충실해 보자. 신이나 타인에게 주는 관심을 자기 내면으로 돌려보자. 새해가 되어 많은 성취를 꿈꾸고 체계적인 계획을 구상했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 겨울나무처럼 중요한 뼈대만 남기고 정리해야 한다. 너무 많은 계획도 욕심이다.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이라도 시간을 내서 내면을 깨끗이 하자. 새해맞이 집안 대청소도 필요하지만 내면의 묵은 때를 벗기는 시간도 필요하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것을 할 때 가장 행복하고 마음이 편안했는지 내 안을 들여다보자. 자기가 아닌 나머지는 버리자. 2026 병오년 말처럼 자유롭게 달리려면 먼저 안장 위 짐을 확 줄이자.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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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새해에 내 안을 단순하고 깨끗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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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학교의 위치와 한국 사회의 철학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학교는 언제인가부터 도시의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입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가 교육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대한 집단적 고백이다. 도시는 가장 비싼 땅에 무엇을 세우는지를 통해 사회의 우선순위를 보여준다. 백화점, 고급 주거지, 상업시설이 중심을 차지하는 동안 학교는 늘 외곽으로 밀려났다. 아이들의 미래보다 더 값진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학교는 가장 비싸고 좋은 땅에 있어야 한다. 나는 시골 지역에서 교장을 할 때 학생 화장실에 비데 있는 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행정실에서 돈이 없다고 했지만 우선 층마다 몇 개라도 만들자고 했다. 학교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공간이 아니다. 학생이 꿈을 꿈꾸고 미래를 설계하는 공간이며 한 사회의 철학이 형성되는 장소이다. 민주시민의 경험이 길러지는 공적 공간이다. 그렇기에 학교는 접근성이 가장 좋고 안전하며 문화, 자연, 공공 인프라를 누릴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 학교는 문화센터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교육 시설의 열악함은 무관심의 다른 이름이다. 아이들이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공간이 낡고 비좁으며 비인간적이라면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인가. 세계의 교육 선진국들은 학교를 도시의 자산으로 인식한다. 학교는 지역의 문화 거점이다. 공원과 도서관, 예술 공간과 연결되며, 주민과 함께 숨 쉬는 장소로 설계된다. 학교가 좋은 땅에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특권을 요구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아이들을 사회중심에 두겠다는 선언이며 교육을 투자로 보겠다는 사회적 약속이다. 가장 소중한 것은 가장 좋은 자리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가치를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있는가. 한국 사회는 분명하게 올바른 철학을 학생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 대답이 곧 우리 사회의 미래다. 학교는 미래에 대한 가장 확실한 투자이고 가장 멋진 투자이다. 공간을 같이 쓴다면 지역사회와의 연계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학교는 공공기관으로서 가장 많은 지역에 있다. 이 시설이 주민과 하나가 되는 체제가 되어야 한다. 가장 좋은 문화시설, 회의실, 영화관, 수영장, 도서관, 농구장, 공연장이 학교와 같이 한다면 학생과 주민이 모두 성장하는 모습이 될 것이다. 60년대 석탄이 이제 전기 난방으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학교 부지와 시설은 가난하다. 오죽하면 학생에게 학교를 생각하라고 하면 감옥을 연상하겠는가. 중고등학교도 강당만이 아닌 도서관과 동아리실, 수영장, 운동시설, 휴게실, 회의실을 모두 모아놓은 학생회관 건물이 있으면 좋겠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지역의 군수나 시장과 협의하여 주민시설을 학교 옆에 지어서 함께 이용하도록 했으면 좋겠다. 과감하고 놀라운 결단으로 학교 부지와 시설을 가장 좋은 곳으로 하는 법안을 만들어야 한다. 학생은 나라의 가장 귀한 보배이고 미래이다. ‘학교를 어느 곳에 세우고 어떤 대우를 하느냐’라는 문제는 한국 사회의 교육 철학을 보여준다. 반성해야 할 일이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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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학교의 위치와 한국 사회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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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2026년 고전의 가르침으로 시작하는 교육개혁의 길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2026년 병오년 새해가 밝았다. 새 아침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우리는 다시금 희망을 품고 우리 교육이 나아가야 할 길을 묻는다. “우리 교육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는 어떤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가?” 시대의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변화의 폭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그러나 교육만큼은 보수적 성향의 특성대로 아직도 과거의 형틀에 묶인 채 제자리걸음을 반복하고 있다. 이 새해 정초의 시점에 우리는 지혜의 보고(寶庫)인 고전(古典)의 지혜를 빌려 교육의 본질을 다시 성찰하고, 과감한 개혁의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 일찍이 스승 공자는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有教無類)”고 했다. 빈부의 격차나 지위고하의 출신에 상관없이 누구나 공정한 배움을 통해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교육의 첫 원칙이라는 뜻이다. 그는 스스로 그렇게 3,000명에 이르는 제자들을 차별하지 않고 키웠다. 2,500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의 교육은 어떤가? 오늘날 우리의 교육은 여전히 지역·계층·학교에 따라 기회가 갈리고, 출발선의 격차가 결과의 격차를 그대로 재생산하고 있다. 국가가 올해 반드시 세워야 할 교육개혁의 첫 축은 바로 공정한 출발선의 회복, 곧 공자가 말한 ‘차별 없는 배움’의 실천이어야 한다. 맹자는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공허하고,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라 했다. 이는 단순 암기 중심의 지식 축적이나, 근거 없는 사유만으로는 미래를 준비할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 지금의 교육이 지향해야 할 방향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인공지능(AI)이 지식을 대신 정리하는 시대, ‘잘 외우는 학생’보다 ‘깊이 생각하고 새롭게 연결하는 학생’을 길러내야 한다. 학생이 스스로 탐구를 설계하고 경험을 조합할 수 있는 학습경험의 혁신, 교실을 넘어 지역·대학·기업과 연결되는 확장된 배움의 장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다. 순자는 “국가의 밝음은 교육을 바로 세움에서 비롯된다(國之明在於興學)”고 강조했다. 교육의 질은 곧 국가 경쟁력이며, 교육을 바로 세우는 일은 교사의 전문성과 교육 행정의 일관성을 보장하는 구조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오늘의 교사는 과도한 행정과 무분별한 민원의 파도 속에 본연의 역할을 충분히 발휘하기 어렵다. 교사를 ‘지식 전달자’가 아닌 ‘학습의 설계자’ 또는 ‘학습의 길잡이’로 재정립하고, 전문성을 뒷받침하는 제도적 기반을 확고히 해야 한다. 교실을 교사에게 돌려주지 않고는 어떤 교육개혁도 현장에서 실현될 수 없다. 《대학》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말하며, 모든 변화는 개인의 성찰에서 시작한다고 일깨운다. 교육정책 또한 마찬가지다. 정권마다 바뀌는 정책, 이해관계의 충돌로 흔들리는 행정, 현장의 피로를 외면하는 결정 방식으로는 지속 가능한 개혁이 불가능하다. 교육의 원리에 기반한 정책의 일관성, 공론을 통해 지혜를 모으는 협치 체계, 그리고 국가·교육청·학교 간의 명확한 책임 구조가 재정립되어야 한다. 교육정책은 정치에 예속되어 갖은 변덕이 아니라 흔들림 없이 인재를 기르는 ‘도(道)’의 차원에서 다뤄져야 한다. 이제 병오년의 아침은 우리에게 새로운 교육 과제를 던진다. 변화의 기운이 움트는 해라면, 교육도 그 변화의 문을 열어야 궁합이 맞을 것이다. 고전의 가르침이 일러주듯, 교육은 사람을 세우는 일이며, 국가의 백 년 기틀을 다지는 작업이다. 한 세대가 미루면 다음 세대가 감당해야 할 짐이 더 무거워질 뿐이다. 올해만큼은 더 이상 말을 앞세우지 말고, 교육위기라 일컫는 이 시대에 보다 합당한 실천과 결단을 수행해야 할 때다. 병오년 정초에 다시 새기자. 교육개혁은 희망을 말하는 일이 아니라, 희망을 실천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교육계의 지혜와 사회의 신뢰, 국가의 책임이 하나로 모일 때, 우리는 비로소 다음 세대에게 떳떳한 미래를 건네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의 눈앞에 펼쳐질 내일이 오늘의 많은 교육 현안을 슬기롭게 해결하는 한 해가 되도록 과감한 결단과 함께 그의 실행을 기대하고자 한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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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2026년 고전의 가르침으로 시작하는 교육개혁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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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전쟁과 올바른 교육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전쟁은 먼 이야기이고 생뚱맞은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세계에서 전쟁이 그칠 날은 거의 없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과 가자지구 전쟁만이 아니라 크고 작은 국지전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전쟁은 상대를 힘으로 굴복시키려는 최후의 수단이다. 전쟁은 무력을 써서 행하는 싸움이다. 전쟁은 살상을 초래하고 일상의 온전한 파괴를 감수한다. 오직 상대를 굴복하기 위한 가장 비참한 수단이다. 서울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을 다녀왔다. 기말시험이 끝나서인지 힉셍들이 현장체험으로 많이 왔다. 전쟁은 기념할 것이 아니라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은 기념하기보다는 기억해야 할 사건이다. 승자의 역사에서 전쟁은 영웅을 기념하지만 우리는 살상과 잔악함을 기억해야 한다. 전쟁은 무엇보다 비인간적이다. 전쟁은 인간을 숫자로 환원한다. 전사자 수, 난민 규모 같은 통계 속에서 개인의 얼굴은 사라진다. 경쟁 교육 역시 그 얼굴을 닮고 있다. 성적, 등수, 진학률로 줄 세울 때 교육은 전쟁의 언어를 닮아간다. 경쟁과 승패, 효율과 성과만이 강조될 때 교육은 평화의 반대편에 서게 된다. 거대한 범죄는 사악한 괴물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다. 생각하지 않는 교육, 질문하지 않는 수업, 정답만 외우는 학습은 언제든 폭력의 토양이 될 수 있다. 과거 학교에서 교련을 배우고 군사훈련을 받는 것이 당연한 시대에 진정한 질문은 없었다. 폭력은 일상적인 것이었고 순종만이 미덕이었다. 전쟁을 막는 가장 확실한 무기는 미사일이 아니라 공감력이다. 타인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는 능력, 다른 관점을 이해하는 이성, 갈등을 언어로 해결하려는 태도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평화에 대한 교육은 모든 수업에 녹아있어야 한다. 국어 시간에는 타인에 대한 공감 이야기를 읽고 역사 시간에는 승자의 기록뿐 아니라 패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과학 시간에는 기술의 윤리적 책임을 함께 토론해야 한다. 세계가 종교, 민족, 영토 등으로 갈등을 겪고 있다. 한국은 현재도 휴전상태에 있다. 전쟁은 언제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올바른 교육은 ‘다른 선택은 없는가’를 계속 묻는다. 전쟁을 상상하기 이전부터 교육은 인간의 존엄을 반복해서 가르쳐야 한다. 교실에서 사유와 양심, 명령보다 질문, 적대보다 공존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전쟁의 시대일수록 교육은 무엇보다 인간다운 인간을 가르쳐야 한다. 전쟁을 막을 수 있는 느리지만 가장 확실한 힘을 갖고 있는 것이 ‘올바른 교육’이라고 믿는다. 인류가 전쟁을 없애지 않으면 언젠가 전쟁이 인류를 멸종시킬 것이다. 전쟁은 명령에 따르는 인간을 원한다. 올바른 교육은 질문하는 인간을 육성해야 한다. 세계에서 ‘공존과 문화’를 선도하는 문화종주국이 되는 꿈. 그 꿈이 대한민국의 올바른 교육으로 실현되기를 바란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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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전쟁과 올바른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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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은 희망이어야 한다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요즘 한국의 교육 현실은 낙관을 거의 허락하지 않는다. 학교폭력 갈등은 여전히 반복되고, 교사의 권위는 날개 없는 새처럼 추락했으며, 학부모와 학교는 자녀 교육을 위해 한곳을 바라보는 동반자가 아닌 이해관계의 충돌 속에 서 있다. 지역·계층에 따른 학습 격차는 심화되고, 디지털 환경의 급변은 학생들의 집중과 정서를 흔들고 있다. 교실은 더 복잡해졌고, 교사는 갈수록 지쳐 간다. 이제 교육의 미래를 이야기할 때조차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라는 회의가 먼저 떠오르는 현실이다. 그러나 이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우리는 동시에 질문해야 한다. 그렇다면 교육 말고 무엇이 희망을 가져다줄 것인가? 사회적 양극화, 기술 격차, 세대 간 단절, 빠른 변화 속의 불안 등 오늘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에서 결국 해답은 사람의 역량, 태도, 감수성에 있다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역량을 가장 체계적으로 키울 수 있는 영역이 바로 교육이다. 현실이 결코 녹록하지 않기에 그럴수록 교육은 더 강한 희망이어야 한다. 얼마 전 한 중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2학년 한 학생은 스마트폰 중독과 학교생활 부적응으로 수업에는 거의 참여하지 못했고, 잦은 문제 행동으로 교사와 친구들에게 부담이 되는 아이였다. 학교는 촘촘한 상담 지원과 기초 학습 코칭, 또래 멘토 프로그램을 함께 적용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은 성적이 아니라 ‘관계’였다. 친구 한 명이 자신의 조용한 관심을 계속 기울이자, 그 학생은 처음으로 “누군가 나를 미워하지만은 않는구나”라는 감정을 느꼈다. 1년 뒤 그는 단번에 모범생이 되진 않았지만, 지각이 줄고 담임교사에게 먼저 말을 걸기 시작했고, 교내 드론 동아리에도 참여했다. 한 교사, 한 또래의 작은 손길이 한 아이의 삶을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이는 교육이 변화시키는 것은 성적표보다 먼저 ‘사람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 사례라 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종 제도 개편과 규정 강화에만 눈을 돌린다.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교육이 희망이 되려면 제도의 효율이 아니라 관계와 의미의 회복이어야 한다. 아이들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고,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을 얻는 곳,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공존하는 법을 배우는 곳, 불확실한 사회에서 흔들리지 않을 내면의 기준을 세우는 곳, 이 모든 것은 교육이 아니면 대신할 수 없다. 더 나아가 AI 시대가 오히려 교육의 가치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기술은 많은 것을 대신하지만,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 스스로 사고하는 힘, 다른 사람과 협력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결코 대체할 수 없다. 미래가 불확실할수록 인간다움을 기르는 교육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필수 기반이어야 한다. 어두운 그림자가 곳곳에 드리워진 교육현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은 희망이어야 한다는 말은 현실을 외면한 낭만이나 로망이 아니다. 지금의 혼란은 교육이 중요한 만큼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난다는 방증이며, 복잡한 문제 속에서도 교육만이 지속적이고 구조적인 해결책을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교육은 오늘 당장의 성과보다, 미래의 가능성을 높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희망은 교육이 완벽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교육만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생긴다. 비록 학교는 혼란스럽고 교사는 지치고 학생들은 불안해도, 그럼에도 우리는 교육을 붙들어야 한다. 교육을 포기하는 순간, 미래를 포기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피력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은 희망이어야 한다. 희망은 결과가 아니라 선택이며, 그 선택을 통해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내일을 건넬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교육을 신뢰하는 한, 현실은 흔들리더라도 미래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굳게 믿는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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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은 희망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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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희 반려詩選] 세 개의 방
- [교육연합신문=구본희 詩選] 세 개의 방 우리 집엔 아이들 방이 세 개 있다. 기숙사처럼 복도형 구조, 거실에서 보면 큰애는 맨 끝방, 둘째는 가운데, 막내는 가장 가까운 방ㅡ 보살핌과 작은 비밀을 고려한 배치다 한때는 왁자지껄하던 방들, 지금은 적막하다. 아이들 물건도 그대로인데, 금방이라도 "엄마, 배고파!" 하며 들어올 것 같은 현관문은 무료하게 졸고 있다. 어릴 땐 직장과 돌봄에 지쳐 빨리 커서 독립하길 바랐는데, 막상 하나둘 떠나고 자주 못 보게 되니 괜히 서운하다. 이젠 가족 단톡방에서나 말 섞고, 성장이 멈춘 가족사진을 보며, "자식도 품어야 자식이다"라는 말이 오늘따라 가슴 깊이 사무친다. ▣ 구본희 ◇ 前인천국제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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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희 반려詩選] 세 개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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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교사 자율성과 교육의 품격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과거에 교사는 ‘교장의 명을 받아 학생을 교육한다’는 교육법 75조 규정에 매여 있어야 했다. 1998년에 ‘교장의 명’이 아닌 ‘법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학생을 교육한다는 내용으로 바뀌기 전까지의 일이다. 교육에서 창의성과 자율성과 주인의식이 필요하다면 그 시작은 교사의 자율성에서 시작해야 한다. 자율성이 없다면 전문성도 기대할 수 없다. 학교 상황은 천태만상이지만 모두 같은 지침에 매여 있다. 자율성이 없는 교사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지시를 전달하는 매개체일 뿐이다. 진정으로 학생을 성장시키려면 교사를 믿어야 한다. 한국 교육의 변화는 늘 더디고 제한적이었다. 교사가 교실의 주체로 설 수 없다는 구조적 문제가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교사가 교육의 전문가로서 기초적인 자율권마저 행사할 수 없는 환경이 근원적인 걸림돌이다. 교육 혁신은 결국 교사의 손에서 완성되지만 정작 교사는 경직된 행정 체계, 촘촘한 평가 기준 속에 갇혀 있다. 변화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아는 만큼 할 수 없는’ 현실이 교사를 무력감에 빠지게 하고 있다. 오늘날 교실은 다양한 요구와 변화를 마주하고 있다. 학생 개개인의 학습 속도와 흥미는 천차만별이다. 디지털 기술은 학습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교사는 ‘지식 전달자’가 아니라 학습 환경을 설계하고 학생의 경험을 조율하는 ‘교육 디자이너’가 되어야 한다. 현실은 수업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려 해도 과도한 평가 기준과 행정 규정에 막히기 일쑤다. 교사는 교육과정과 평가와 복무에 대한 자율성은 없고 민원과 상담과 부가적 업무에만 자율성을 강요받고 있다. 교사의 자율성이 필요한 이유는 명확하다. 학생의 특성과 지역의 환경에 따라 효과적인 교육 방식은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도시의 교실과 농촌의 교실, 학습 동기가 높은 학생이 많은 학교와 그렇지 않은 학교는 전혀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재의 교육 체제는 모든 학교가 동일한 방식으로 평가받고 동일한 방식으로 수업하도록 강요한다. 교사는 교실의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전문가이다. 교사에게 더 큰 판단권과 선택권을 부여해야 한다. 교사의 자율성을 강화하는 것은 교사를 편하게 하려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율성은 곧 책임을 의미한다. 교사가 수업 방식과 교육과정에 대해 책임질 수 있도록 전문성과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게 해야 한다. 교사가 수업 연구와 연수에 시간을 투자할 수 있도록 행정 업무를 대폭 줄여야 한다. 학생 수준과 교실 조건의 복잡한 과정을 가장 잘 이해하는 주체가 바로 교사다. 교육정책에서 ‘교사를 믿는가 통제하는가’는 중대한 핵심 요소이다. 교사를 믿지 않는 교육은 성공할 수 없다. 세계 주요 선진국이 교사에게 높은 자율성과 전문적인 판단권을 부여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교사의 자율성은 교사의 질을 결정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교육의 품격은 통제와 규제 중심의 체제가 아닌 자율과 책임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 교육은 교실에서 일어나며 교실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교사의 자율성이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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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교사 자율성과 교육의 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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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KBS '트랜스휴먼'이 던지는 교육적 메시지와 미래교육의 길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우리는 최첨단 기술이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키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즈음에 우리는 오래된 질문 앞에 다시 선다. “인간은 무엇으로 완성되는가?” 최근 KBS의 다큐멘터리 '트랜스휴먼'은 인공지능, 유전공학, 뇌과학, 로봇기술이 결합하며 인간 능력의 경계를 다시 쓰는 현장을 보여주었다. 이 프로그램은 단순한 과학 소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교육에 던지는 도전장이자, 미래 세대를 책임지는 우리에게 던지는 무거운 질문이라 할 수 있다. 방송이 보여준 미래는 이미 시작되었다. 인공지능이 의사결정을 돕고, 유전자 편집이 질병을 지우고, 인간의 사고와 기계가 연결되는 세상, 이 변화 앞에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라는 물음을 피할 수 없다. 기존의 지식 전달 중심 교육은 기술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기계는 인간을 능가해 지식을 더 많이,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암기한다. 따라서 단순 지식의 우열을 가리는 교육은 이미 의미를 잃었다. '트랜스휴먼'이 주는 가장 큰 교육적 의미는 ‘교육의 목적 자체가 변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초지능과 초연결의 세계에서 교육은 더 이상 지식을 나열하는 과정이 아니라, 인간만의 고유한 역량을 확장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결국 우리는 ‘초인류’를 만드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인간다움을 지켜내는 교육을 고민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미래교육은 기술을 선도하는 교육이 아니라 기술을 이끄는 인간을 기르는 교육이어야 한다. 인공지능과 함께 일할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알고리즘보다 더 큰 사고력, 즉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이다. 학생들은 정답을 찾는 법이 아니라 문제를 새롭게 정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기술의 목적을 묻고, 기술의 한계를 고민하는 윤리적 상상력이야말로 초겸손의 미래를 살아갈 진짜 능력이 될 것이다. 둘째, 초인류 시대일수록 감성·공감·관계 능력 배양이 더욱 중요하다. 기계는 계산할 수 있지만, 서로의 마음을 안아주는 능력은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영역이다. '트랜스휴먼'이 보여주는 기술의 발전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감성과 관계를 더욱 소중하게 만든다. 따라서 미래교육은 학생들에게 협력하는 법, 갈등을 해결하는 법,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이는 어떤 AI도 대신해 주지 못할 인간의 본질적 자산이기 때문이다. 셋째,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의 유연성이다. 급변하는 미래는 정해진 길(定道)을 따르는 이들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다양한 경험, 실패를 통한 성찰, 끊임없는 자기 재창조가 가능한 학습 환경이 필요하다. 따라서 교육은 학생들에게 ‘정답을 외우는 힘’이 아니라,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 혁신의 기반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넷째, 미래교육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교육이어야 한다. 기술이 인간을 뛰어넘는 시대에 진짜 위기는 ‘능력의 격차’가 아니라 ‘존재의 균열’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너는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묻기보다 “너는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이냐?”를 묻는 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트랜스휴먼'은 우리에게 인간을 기술 뒤에 놓지 말고, 기술 앞에 세워야 한다고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이제 초인류가 오는 시대, 교육의 역할은 더 이상 단순한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다. 교육은 아이들에게 미래를 ‘대비’시키는 것을 뛰어넘어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존재로 성장시키는 길잡이여야 한다. 우리는 지금 인류 문명사의 거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이 길의 끝에 어떤 인간이 서게 될지는 교육이 결정한다. 기술은 인간을 확장시키지만, 교육은 인간을 완성시킨다. 그리고 그 완성은 더 빠른 인간이 아니라, 더 깊은 인간으로 향하는 길이어야 한다. 초인류의 시대를 대비하는 교육을 넘어서, 초인류의 시대를 이끌 인간을 기르는 교육, 그것이 바로 '트랜스휴먼'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강력한 교육적 메시지라 믿는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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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KBS '트랜스휴먼'이 던지는 교육적 메시지와 미래교육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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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희 반려詩選] 차선 변경
- [교육연합신문=구본희 詩選] 차선 변경 어차피 목적지는 정해졌는데, 운전을 하다 고민한다. 차선을 바꿀까, 다른 길로 돌아갈까. 그 고민이 도리어 더 아프게 한다. 인생도 그렇다. 고민했고, 망설였고, 그러다 그냥 흘러갔다. 그래도 도착한다. 수많은 선택들이 모여 이룬 하나의 길. 그러려니 하며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 구본희 ◇ 前인천국제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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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희 반려詩選] 차선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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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이제 그만해야 하는 대입수학능력시험 제도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11월 13일 목요일 전국적으로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졌다. 수능(대학수학능력시험) 공화국에서 벗어나야 한다. 과연 이 시험이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제대로 평가하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수능은 더 이상 ‘공정한 경쟁의 상징’이 아니다. 학생은 ‘사람’이 아니라 ‘정답생산기’로 길러진다. 이것은 교육이 아니다. 우리는 결단해야 한다. 수능 폐지는 단순히 시험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교육의 방향을 인간으로 되돌리는 일이다. 대한민국이 객관식 선다형 사고로 사는 나라에서 생각하며 살아가는 나라도 바뀌어야 할 시점이다. 교사들은 신분상의 위험까지 안고 수능 감독관에 반강제적으로 참여한다. 학교에서 어린 나이순으로 감독관 참여를 강요받는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작은 몸짓과 언어에도 소송이 뒤따를 수 있다는 위험은 교사에게 공포에 가까운 것이다. 돈을 내고라도 수능 감독시험에 착출되고 싶지 않다는 말은 수능 업무에 대한 힘겨움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수능은 학교교육과정을 파행으로 이끌고 있다. 수능을 위한 EBS 수업을 정규 수업시간에 공공연히 한다. 교실 수업은 오직 수능을 위한 교육과정으로 진행되다가 수능이 끝나면 모든 수업을 할 수 없는 ‘시장판 교실’이 된다. 교사들이 이 과정에서 겪는 자괴감은 매년 적응이 되지 않는다. 수능을 치르고 난 후 고등학교 교실은 교과과정이 유명무실해진다. 교사가 교실에서 앉아 있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자체적으로 많은 행사를 하지만 이미 대입에 실패한 학생이나 입학이 확정된 학생에게 아무런 참여 의지가 없다. 교사의 권위나 말이 아무런 힘이 없다는 자괴감을 교사가 느끼는 계절이다. 수능이 지속되는 이유는 효율성과 공정성 때문이다. 수능 존치론은 공정성, 효율적 선발, 기초학력 검증을 말하고 폐지론은 창의력 억압, 불평등 심화, 한 번의 시험이라는 비인간적 제도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대안이 한 번에 완벽할 수는 없다. 하지만 수능 폐지가 반드시 가야 할 길이라면 대안을 만들어 시행해 나가야 한다. 학교생활 전반을 평가하는 과정 중심의 학생부 중심 종합전형을 해야 한다. 학습 태도와 성실성을 반영하고 꾸준한 노력과 성장 과정을 보아야 한다. 물론 학교와 교사의 평가 신뢰성, 지역별 교육격차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학교 교육이 정상화되고 교육과정을 준수하는 제도가 시행되어야 한다. 교육과정 붕괴의 수능이 아니라 교육과정을 충실히 하는 학생이 대학에서도 존중받는 학생이 되도록 그 길로 가야 한다. 수능으로 미래 사회형 인재를 선발하는 시대는 끝내야 한다. 학생 사고력, 표현력, 가치관을 평가하는 방식과 창의적 문제 해결 능력을 볼 수 있는 평가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는 속담이 있다. 나중에는 어찌 되든 당장 좋은 것만 취하는 경우를 이르는 말이다. ‘곶감먹기’가 너무 오래 지속되어 왔다. 학교, 학부모, 교직원, 교육청, 학생이 고통받는 제도와 학생의 미래역량에 역행하는 제도는 이제 과감하게 폐기해야 한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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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이제 그만해야 하는 대입수학능력시험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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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AI 3대 강국’을 외치면서 인재를 유출하는 현실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현재 대한민국 정부는 강력한 ‘AI 3대 강국’을 꿈꾸고 있다. ‘국가과학자’제도를 신설해 AI인재 해외유출을 막으려 하고 있다. 5년간 100명을 뽑아 개인당 연 1억을 지원하겠다는 정책도 논의되고 있다. 또한 AI 분야 등 해외 연구자 2000명을 유치하겠다며 “과학 문명 투자한 국가는 흥해”라는 대통령 발언도 강조하고 교육부, 과학기술부, 대학 총장들까지 나서 총체적으로 AI 인재 육성을 지원하고 나섰다. 이제 AI가 미래 산업의 심장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다. 과거에도 정부는 대규모 예산을 투입해 AI 대학원을 설립하고, 코딩과 데이터 과목을 초등학교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겉으로는 혁신의 시대를 향해 질주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화려한 구호 뒤에는 한 가지 안타까운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바로 지금도 AI 인재들이 한국을 떠나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어렵게 석·박사 과정을 마친 젊은 연구자들이 미국, 중국, 캐나다, 유럽의 연구소나 빅테크 기업으로 향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연구 환경이 열악하고, 창의적 연구보다 ‘성과 지표’가 우선시되기 때문이다. 연구실은 여전히 상명하복식 구조에 묶여 있고,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문화가 혁신의 싹을 자르고 있다. 정부는 “AI 인재 10만 명 양성”을 외쳤지만, 정작 그들이 머물고 싶어 하는 토양은 만들지 못했다. 이 모습은 단지 AI 분야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교육 시스템 전체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찍어내는 공장형 구조로 고착되고 있다. 교실은 여전히 정답 중심, 주입식 경쟁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이들은 스스로 질문하기보다 ‘어떤 전공이 유망한가’를 계산하며 진로를 택한다. 인문학적 사유와 예술적 감성은 ‘비경제적’이라며 밀려나고, 교육이 산업의 수요에 종속되면서, 청년은 점점 더 좁은 틀 안으로 몰리고 있다. 그 결과는 명확하다. ‘AI 강국’을 표방하면서도, AI 인재를 잃어가는 나라가 되고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한 한국 출신 연구자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에서는 연구보다 보고서를 쓰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아이디어보다 상사의 눈치를 먼저 봐야 했죠.” 그의 말은 단순한 하소연이 아니라, 청년 세대가 느끼는 시스템적 피로의 고백이다. 우리가 청년을 ‘미래 자원’으로만 대하는 한, 그들은 언젠가 더 넓은 세상으로 떠날 수밖에 없다. 교육 선진국 핀란드나 캐나다의 교육을 보면, 그들은 인재를 붙잡기 위해 억지로 “AI 전공자를 늘리자”라고 외치지 않는다. 대신 창의와 실패의 자유를 보장하는 교육 생태계를 만든다. 학생이 철학을 전공하다가 데이터 과학으로 옮겨가도, 사회는 그것을 ‘진로 방황’이 아니라 ‘탐색’으로 이해한다. 반면 한국에서는 고등학교 때 선택한 계열이 평생의 족쇄가 된다. 이런 구조 속에서,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시스템의 불편한 존재로 취급된다. 정작 우리가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은 AI 기술이 아니라 AI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인간의 자유로운 상상력이다. 하지만 지금의 교육은 상상력을 두려워하고, 다른 길을 걷는 청년을 ‘비효율’로 본다. 미래는 기술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술을 다루는 인간의 철학, 윤리, 창의력이 함께해야 한다. 우리가 “AI 강국”이라는 구호에 취해 있는 사이, 귀한 청년들은 떠나고 있다. 그들이 떠나는 이유는 돈 때문만이 아니다. 존중받지 못하는 환경, 자율이 없는 문화,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사회 때문이다. 지금처럼 교육이 국가의 산업정책을 위한 하청 구조로 머무른다면, 우리는 또 다른 이름의 ‘두뇌 유출국(Brain Drain)’으로 남게 될 것이다. 청년을 낭비하지 않는 교육은 그들이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돕는 일이다. 교실은 인재를 공급하는 공장이 아니라, 인간이 꿈꾸는 실험실이어야 한다. “AI 3대 강국”이라는 구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그 강국을 이끌 청년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들이 한국에 머물고 싶게 만드는 교육이 없는 한, 우리의 미래는 구호 속 숫자로만 남을 것이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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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AI 3대 강국’을 외치면서 인재를 유출하는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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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시간을 잊고 사는 하루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일 년에 한 번씩 오는 명예퇴직 공문을 만지작거린다. 해마다 오는 공문인데 정년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관심을 담아서 보게 된다. 이제 한 번만 옮기면 40년 가까운 공직 생활이 끝날 것이다. 친구 말대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 고생을 한다는 말인가’하는 회의가 들기도 한다. 명예퇴직을 한 친구들이 여유로운 생활을 자랑하며 단톡방에 올리는 여행 사진을 보면 더 그런 생각이 올라온다. 아침 6시 45분에 아파트를 나선다. 동절기에는 사방이 어둡다. 출근을 하면 매일 조용한 날이 드물다. 학교폭력이 언론에 나고 교육 비리, 학생 사고, 학교 시설 민원, 전입학에 대한 민원, 각종 행사와 위원회 참석 요청, 수능시험장 학교 폭발물 신고까지 온갖 민원이 늦가을 낙엽처럼 가득하다. 고대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별과 달을 관찰해 달력을 만들었고 이집트 사람들은 오벨리스크의 그림자를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했다고 한다. 증기기관차가 발명되면서 합의된 시간에 대한 중요성이 커지게 되었다. 1884년 국제자오선 회의에서는 전 세계를 24시간대로 나누었다. 시간이 전 세계의 공통어로 자리 잡게 된 중요한 사건이었다. 알람 시계는 누가 만들었을까. 알람 시계가 없던 시대 사람들은 자연의 소리에 의지해 일어났다. 옛사람들은 아침 햇빛, 닭의 울음소리가 아침 신호였다. 기계식 알람 시계는 1787년 미국 뉴햄프셔에 살던 시계공 리바이 허친스(Levi Hutchins)가 발명했다고 한다. 그는 해가 뜨기 전인 새벽 4시에 일어나 일터로 가야 했다. 시계 문자판의 숫자 '4' 위치에 핀을 박고 시침이 핀에 닿는 순간 지렛대 장치가 움직여 종을 울리도록 설계한 것이다. 이제 시간은 아침햇살처럼 모든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계 직장인의 아침 침대에서 알람이 울리고 있다. 시계와 화폐가 발명되면서 사람은 그것에 노예가 되다시피 살고 있다. 편리함을 위해 만든 대상인데 이제 사람이 그것 없이 살 수 없는 형세가 되었다. 때로 그것에서 벗어나야 자유로운 인간으로 하루를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역설적으로 그것을 버림으로 더 크고 진실한 것을 얻는 예를 보았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기존의 틀을 깨는 것에서 커다란 변화와 변혁이 시작되었다. 컴퓨터와 핸드폰으로 살아가는 시대이다. 과거만 가지고 세상에 적응할 수 없다. 학교에서 예술과 인문학, 동아리 활동을 강조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그러한 활동은 스스로 추동의 힘을 갖고 기존의 것에서 더 새롭고 자유롭고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하는 영역이 될 수 있다. 하루 정도는 공적 시간을 벗어버리고 싶다. 핸드폰과 시계를 멀리하고 오직 ‘존재’와 ‘마음’과 ‘삶의 의미’를 사색하며 하루를 보내고 싶다. 타인과 사회에 맞추는 시간은 잠시 멈추고 나만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시간을 이번 휴일에 가져보려 한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말한 ‘현존재’로서의 인간 존재를 생각하며 내 안의 여행을 가려 한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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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시간을 잊고 사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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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희 반려詩選] 기프티콘 세상
- [교육연합신문=구본희 詩選] 기프티콘 세상 선물보다 기프티콘이 더 익숙해진 세상. 포장지를 뜯던 그 설렘은 어디에 쌓였을까. 선물엔 주는 이의 시간과 정성이 겹겹이 쌓이고, 눈빛과 마음이 서로 스며든다. 알림 소리로 도착한 기프티콘은 고맙지만, 빈 메아리처럼 스쳐 간다. 오늘은 그리운 손길의 선물을 받고 싶다. ▣ 구본희 ◇ 前인천국제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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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희 반려詩選] 기프티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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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깊어가는 가을, 교육의 수확을 바라보며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전국이 온통 만산홍엽으로 물들어 가고 하늘은 높고 청명하기만 하다. 깊은 가을의 공기는 한층 차분하고, 그 속에는 성찰의 향기가 배어 있다. 황금빛 이삭을 거두어 들인 논과 밭에서는 철새들이 줄지어 날아들고, 나무들은 한 해의 결실을 잎의 빛깔로 드러낸다. 농부는 봄에 씨를 뿌릴 때 이미 가을의 수확을 그리지만, 그 수확은 단지 노력의 결과만이 아니다. 비와 바람, 햇살과 토양의 조화 속에서, 그리고 보이지 않는 기다림과 인내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를 문학인들은 ‘기다림의 미학’으로 표현하고 결과에 대한 칭송을 노래한다. 교육 또한 이와 마찬가지다. 가르침과 배움의 세계는 ‘가을의 수확’처럼 시간의 축적과 정성의 누적 속에서 비로소 결실을 맺는다. 교육의 본질을 농경의 순환에 빗대어 보면, 가을은 학습의 성찰기이자 성장의 확인기라 할 수 있다. 봄의 파종이 교육의 시작이라면, 여름은 열정적인 성장의 시기, 그리고 가을은 그 모든 노력이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이다. 학생뿐 아니라 교사에게도 가을은 한 해의 교육 여정을 마무리하며, 자신이 던진 ‘교육과 배움의 씨앗’이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 되돌아보기 때문이다. 한 초등학교 교사는 매년 가을이 되면 학생들과 함께 ‘나의 성장 나무’를 그리는 시간을 갖는다. 아이들은 지난 1년 동안 자신이 배운 것, 느낀 것, 새롭게 도전한 것을 나뭇잎 하나하나에 적는다. “처음에는 글씨를 잘 못 썼지만, 지금은 일기 쓰기가 즐거워졌어요.”, “친구와 싸우지 않고 대화로 해결했어요.”… 작은 문장 속에는 아이들의 성장이 오롯이 담긴다. 교사는 말한다. “이 나무는 아이들이 지식만이 아니라 삶을 배우는 증거이죠. 그 잎사귀 하나하나가 교육의 결실이에요.” 이처럼 교육의 수확은 점수나 등수가 아니라 성장 그 자체에 있다. 어느 고등학교에서는 매년 ‘가을 배움 축제’를 연다. 학생들은 자신이 한 해 동안 탐구한 주제나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교사와 학부모, 지역사회가 함께 참여한다. 누군가는 과학 실험의 결과를 공유하고, 누군가는 자작시를 낭독하며, 또 누군가는 지역 노인정과 함께한 봉사활동을 영상으로 소개한다. 그 축제는 단순한 행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배움의 열매를 나누는 장’, 즉 교육의 수확제(收穫祭)다. 교사들은 이 시간을 통해 학생들의 성장을 실감하고, 학생들은 자신의 노력이 사회와 연결된다는 기쁨을 배운다. 그러나 모든 가을의 수확이 풍성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가뭄이나 태풍으로, 혹은 잡초의 번성으로 기대만큼의 결실을 얻지 못할 때도 있다. 교육도 그렇다. 아무리 정성을 다해 가르쳐도 즉각적인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가 있다. 하지만 가을이 일시적 실패의 계절이 아니라, 다음 해를 준비하는 순환의 고리이듯, 교육의 여정에서도 실패는 다음 성장을 위한 거름이 된다.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는 ‘돌봄의 의지’다. 교육의 수확은 눈에 보이는 성취보다 보이지 않는 변화 속에서 더욱 깊게 익는다. 한 중학교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아무 말 없던 아이가 요즘은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 오늘 수업 재밌었어요’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제게는 올해 가장 큰 수확이에요.” 가을의 들녘에서 단 한 줄의 벼라도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순간, 농부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처럼, 교육의 현장에서도 한 명의 아이가 ‘배움의 즐거움’을 느낄 때, 그 한 해의 교육은 이미 결실을 맺은 거다. 깊어지는 가을, 우리는 또 한 해의 배움의 끝자락에 서 있다. 학교와 교실, 그리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교육이란 밭을 일구고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노력 하나하나가 내일의 결실로 이어진다는 믿음이다. “교학상장”, “심은 대로 거둔다”, “인과응보”, “절차탁마”… 비슷비슷한 언어의 향연이 모두가 열과 성을 다한 만큼 그 결과로 수확하는 진리를 품고 있다. 이제 가을의 나무가 잎을 떨구며 내년을 준비하듯, 교육의 여정도 쉼과 성찰을 통해 다시 시작될 것이다. 결국 교육의 가을은 끝이 아니라 인고의 겨울을 나면서 새로운 봄을 잉태하는 계절이라 할 것이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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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깊어가는 가을, 교육의 수확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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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아이들의 삶을 중심에 두는 교육의 길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교육은 아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일이다.” 이 단순한 진리를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수많은 교사, 학부모, 지역사회가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교육 현장은 입시 중심, 일방향적인 교육 정책, 그리고 교사와 학생의 자율성이 제한된 구조 속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삶을 풍요롭게 가꾸는 교육’이 가능할까? 그 해답은 바로 교육자치에 있다. 최교진 교육부 장관조차 “교육자치의 꽃은 학교자치”라고 우리 교육 정책의 방향을 한 마디로 압축하기도 했다. □ 교육자치란 무엇인가? ‘교육자치’란 학교 구성원들이 교육의 방향과 내용을 함께 결정하고 실행하는 민주적인 과정이다. 이때 교사, 학생, 학부모는 단순한 수혜자가 아니라 교육의 주체가 된다. 특히 ‘삶을 가꾸는 교육자치’는 점수와 경쟁이 아닌, 학생 개개인의 삶과 성장을 중심으로 한 교육을 실현하려는 노력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율성’이 아니라 ‘자치’다. 자율이 개인의 자유라면, 자치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책임지고 함께 결정하는 것이다. □ 사례 1. 핀란드 교육의 본질은 ‘신뢰와 자치’ 핀란드는 교육자치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교사는 커리큘럼을 자율적으로 구성할 수 있으며, 학생들의 삶을 중심으로 한 수업을 운영한다. 시험은 최소화되고, 비교와 경쟁보다 성장과 협력이 강조된다. 모든 학교에는 ‘학교운영위원회’가 존재하며, 학생과 학부모의 목소리가 실제 학교 운영에 반영된다. 핀란드 교육부의 슬로건은 단순하다. “신뢰하라(Trust).” 이 신뢰가 교사에게, 학생에게 자율성을 넘어 자치를 가능케 하는 기반이 된다. □ 사례 2. 지방 A 중학교 - 삶 중심 교육의 실현 국내에서도 삶을 가꾸는 교육자치의 모범 사례가 있다. 2023년 전북특별자치도교육청 공식 블로그에 의하면 지방의 A 중학교는 교사와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가 함께 만들어가는 작은 혁신학교이다. 이 학교는 수업, 생활지도, 동아리 활동까지도 학생 자치회와 교사 공동체가 함께 결정한다. 매년 ‘삶을 나누는 축제’에서는 학생들이 스스로 기획한 공연과 작품이 학교 전체를 채운다. 교사들은 "학생들의 삶을 함께 꾸려가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 사례 3. 서울시교육청의 ‘학생자치활성화 조례’ 2020년 서울시교육청 보도자료에 의하면 서울시교육청은 학생자치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학생자치활성화 조례’를 제정했다. 이 조례는 모든 학교에 학생 자치기구 구성과 운영의 의무를 명시하고 있으며, 학교장은 이에 필요한 예산과 인력을 지원해야 한다. 실제로 이 조례 이후 많은 학교에서 학생회가 교육과정, 급식, 학교 축제 등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고 이를 반영하고 있다. 학생들은 말한다. “이제 우리는 학교의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다.” □ 교육자치가 가꾸는 것은 '삶'이다 교육자치는 단순한 행정 절차나 학교 운영의 민주화를 넘어, 사람을 살리는 교육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자치가 있는 교실에서는 교사와 학생이 서로를 존중하며 수업을 만들어가고, 학부모는 아이들의 일상에 함께 참여한다. 교육의 중심이 ‘지식’에서 ‘삶’으로 옮겨가는 순간, 교실은 변화한다. 그 변화는 점수로 환산되지 않지만, 아이들의 눈빛과 목소리, 태도 속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정답을 잘 맞히는 아이’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아이’를 길러야 한다. 그 시작은 교육자치이며, 그 끝은 모두의 삶이 아름답게 가꾸어지는 교육의 공동체다. 어느 교사의 교단 일기에는 "삶을 가꾸는 교육자치란, 아이들이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함께 지켜보고 돕는 일이다. 그것이 진짜 교육이다"라고 쓰여있다. 이는 우리 교육이 지향할 바를 한 문장으로 요약, 압축한 것이라 할 것이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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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아이들의 삶을 중심에 두는 교육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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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고교학점제가 쏘아 올린 작은 공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소설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김불이’는 117cm의 작은 키를 가진 노동자이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를 상징한다. 이 작품에서 “아버지는 난장이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이었습니다”와 “저희는 인간 취급을 받고 싶었습니다”라는 말은 소외에 대한 절규라고 할 수 있다. 교실에서 ‘학습 미도달자’에 대한 방관도 사회적 소외이다. ‘난장이’로 표상되는 ‘학습 미도달자’나 ‘학습 포기자’에 대한 우리의 교육은 얼마나 양심적이었는가 하는 윤리적 반성을 하게 된다. 고교학점제가 폐지론이 강하게 나올 정도로 논란의 중심에 있다. 고교학점제가 꿈꾸던 이상과 현실의 대입제도는 다른 길로 들어서고 있다. 절대평가제를 설계로 했지만 입시는 상대평가제를 유지하고 있다. 고교학점제가 ‘학생-교사’의 관계를 ‘학생-학습’으로 이동시키려는 구조적 개혁이라고 하지만 최소성취보장제에서 국가의 책임교육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함을 확인하였다. 과거에 학교부적응 학생은 스스로 자퇴를 했다. 최소성취보장제도의 미도달학생이라는 말은 이런 학생들을 수면 위로 떠올렸다. 교사들은 어려움을 호소한다. 학교에 나오지도 않고 수업에 아무런 흥미도 없는 학생을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성적을 끌어올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신평가제도가 9등급에서 5등급으로 전환한다고 하니 변별력이 없어진다고 학원은 선전하고 학부모는 불안해하고 있다. 학생은 진로를 선택하기도 전에 진로에 대한 과목을 선택해야 한다고 하니 불안하기만 하다. 교사는 증원은 없고 업무는 증가하여 불만이 많다. 교실은 점점 일상적인 수업이 힘든 학생이 늘어나고 있다. 정서행동 문제와 게임중독, 자살 위기, 무기력이 모두 한 교실에서 동일한 방법으로 수업을 받고 있다. 물고기, 독수리, 거북이, 사자가 같은 공간에서 같은 방법으로 달리기를 요구받고 있는 형국이다. 그동안 방치되었던 ‘학습 저성취 학생’에 대하여 특단의 대책으로 수업과 평가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수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이 교실에서 방치되고 있는 것은 인권 침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뫼비우스의 띠’는 앞과 뒤가 구분되지 않는 동일 반복의 은유이다. 가난한 하루가 반복되는 일상은 그 띠 위의 무한 반복을 연상하게 한다. 한편, ‘뫼비우스의 띠’는 현실이 가진 이중성과 모순도 보여준다. 피해자와 가해자, 선과 악이 결국은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난이라는 길은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기도 하고 선을 악으로 만들기도 한다. 한국 사회에서 학습 부진은 곧 자기 존재의 부정으로 이어진다. 스스로에게 느끼는 좌절과 수치는 학생을 학교에서 떠나가게 한다. 학교는 학생이 사회에 나가기 전에 충분히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뿌리가 썩으면 꽃을 피울 수 없다. 그들의 속도에 맞추어 줄 교육과정은 있는가. ‘작은 공’은 희미한 희망을 상징한다. 고교학점제가 불러온 소외된 학생에 대한 관심이 ‘하늘로 날아간 작은 공’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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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고교학점제가 쏘아 올린 작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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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희 반려詩選] 내일이면 생각나겠지
- [교육연합신문=구본희 詩選] 내일이면 생각나겠지 오늘도 사람 찾는 문자 하나. 의학은 발전했고 오래 사는 건 이젠 당연하다지만, 사람들은 말한다ㅡ "아프지 말고 오래 살아야지." 하지만 치매 환자는 늘고, 우리도 가끔 기억이 흐려진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다독인다. 내일이면 생각나겠지. 어쩌면 우린 이미 그 길 위에 있는지도 모른다. 조용히, 세월에 몸을 맡긴 채. ▣ 구본희 ◇ 前인천국제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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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희 반려詩選] 내일이면 생각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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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우리 교육 현실, 이대로 좋은가?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Gresham’s law)”는 말은 경제학 법칙으로 가치가 낮은 화폐가 시장에 넘쳐날 때, 가치 있는 화폐는 점점 사라진다는 원리다. 이는 오늘의 한국 교육 현실에도 정확히 들어맞는 말이기도 하다. 진실 되고 성실한 노력이 힘을 잃고, 전략과 정보, 자본이 우선시되는 구조가 그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법칙이 교육이라는 공공영역에서조차 부정할 수 현실이 되어가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입시 제도다. 본래 ‘수시’는 학생의 다양성과 잠재력을 발굴하려는 취지로 도입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제도는 점점 변질됐다. ‘비교과 활동’을 수치화하고, 대입 자기소개서를 컨설팅 업체에서 ‘기획’하며, ‘진로 설계‘조차 사교육에 맡기는 현실은 결국 자본력과 정보력이 학생의 성실함을 앞서는 결과가 나타났다. 이런 구조 속에서 교실은 점점 더 왜소해졌다. 아이들은 교사의 수업보다 사교육 강사의 강의를 더 신뢰하고, 교사는 학생의 잠재력을 믿고 기다리기보다 실적과 성적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정직하게 내신을 준비한 학생이 외부 스펙으로 무장한 학생에게 밀리는 것을 반복해서 목격하면, 아이들 스스로도 교육의 정당성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우리 교육의 민낯이다. 공교육이 무너졌다는 말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다. 그것은 신뢰의 붕괴, 공동체 가치의 해체, 교육 정의의 상실을 의미한다. “학교에서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무너질 때, 아이들이 배움을 삶과 분리시키고, 경쟁만이 살아남는 방식임을 조기 학습하게 된다. 이제는 더 늦기 전에 돌이켜 보아야 할 때다. 교육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구조 자체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말이 강한 설득력을 얻고 있는 이유다. 일찍이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문제를 야기한 제도(시스템)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몇 가지 방안을 다음과 같이 제안해 본다. 첫째, 수시 제도의 전면 개편이 필요하다. 이미 진행 중인 자기소개서 폐지, 외부 인증서⋅대회 실적의 제한 등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학교 안에서 정규 교육과정을 충실히 이수한 활동과 성장을 중심으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정시 비율을 높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양산할 뿐이다. 학교 교육만으로도 대학에 갈 수 있도록 구조적 신뢰를 완전하게 회복해야 한다. 둘째, 공교육 내 입시 정보 격차 해소가 필요하다. 진로진학지원센터나 대입지원단 제도를 확대해, 누구나 자신의 학교 안에서 공정하고 질 높은 입시 지도를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사교육 의존도를 낮추는 유일한 길은 공적으로 책임지는 진로 설계 시스템이다. 다행히 각시도 교육청마다 이에 대한 이해를 통해 지원단을 크게 확대해 나가는 것은 다행이라 할 것이다. 셋째, 교사의 교육권과 평가권 회복이 병행되어야 한다. 교사는 이제 ‘관리자’나 ‘행정인력’이 아니라. 학생의 가능성과 성장을 이끄는 전문직으로 명실공이 자리매김해야 한다. 학교가 다시 ‘교육의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교사에게 신뢰와 자율성을 완전 돌려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예비 나아가 현직교사들의 교육과 평가 역량을 고도로 강화시키는 전문성 함양 교육이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넷째, 성과 중심에서 성장 중심으로 평가 전환이 필요하다. 이는 단순 점수로 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학습 과정과 참여, 변화의 흔적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평가가 보다 강조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아이들은 정답보다 ‘과정의 힘’을 믿는 학습자로 성장할 수 있다. 교육이 무너질 때, 사회의 공정도 함께 흔들린다.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과연 지금의 교육이 아이들에게 ‘정직하게 노력하면 보상받을 수 있다’거나 ‘심은 대로 거둔다’는 믿음을 확실하게 주고 있는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오늘의 교육 현실을 바꾸는 것은 한순간의 개혁이 아니라, 구조와 문화, 믿음의 회복을 위한 연대의 여정이어야 할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우리는 그 길을 찾아야 한다. 아이들의 미래가, 우리 사회의 정의가, 교육에 달려 있음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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