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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장윤기 사건을 통해 얻은 교훈과 바람직한 인성교육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오늘도 각종 TV 매체에서는 ‘장윤기 사건’이 단 한 순간도 거르지 않고 오랫동안 ‘핫(hot)’한 뉴스 기사로 오르고 있다. 물론 그 이유는 범죄의 잔혹함을 넘어 권력 유착, 초동수사 부실, 그리고 인간 염치의 상실이라는 촌극이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2026년 5월 광주에서 장윤기에 의해 벌어진 한 여고생 성폭행 및 살인 사건은 10대 청소년의 귀중한 목숨을 앗아간 가슴 아픈 비극이자, 우리 사회의 법치와 윤리가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충격적인 사건이다. 이 글에서는 청소년들에게 바른 가치관을 정립하기 위한 경종으로 삼기 위해, 사건의 전말과 교육적 교훈을 짚어보고자 한다. 이는 향후 유사한 사건이 반복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는 길잡이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 사건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첫째, 계획된 왜곡과 뻔뻔한 변명으로 “우발적 자살 충동”이라는 거짓말이다. 피의자 장윤기(23세)는 체포 초기 “극단적 선택을 하려다 우발적으로 범행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 수사와 디지털 포렌식 결과, 범행 이틀 전 직장 동료 성폭행, 1.2km 미행, 차량 문을 열어둔 납치 시도, 결박용 케이블타이 준비, 학창 시절부터 SNS에 남긴 “청소년 여성 납치 범행” 발언 등이 속속 드러났다. 자신을 ‘불쌍한 피해자’로 포장하려던 가해자의 황당한 변명이 언론에 하나씩 노출되면서 국민적 공분을 샀다. 둘째, “아빠가 경찰이라서”라는 아빠 찬스 수사 유착과 부실 초동수사 논란이다. 사건이 끊임없이 잡음을 낳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가해자 부친과 큰아버지가 현직 경찰 간부라는 사실 때문이다. 수사 초기, 현직 경찰인 부친이 자택 내 주요 증거물(성인용품 등)을 폐기했고, 경찰은 강간살인 혐의(최소 무기징역)가 아닌 단순 살인 혐의로 사건을 검찰에 송치해 ‘봐주기 수사’ 의혹을 자초했다. 검찰이 재수사를 통해 사건의 실체를 바로잡고, 경찰청 특별수사단이 당시 형사과장 등 책임자들에 대해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영장을 재신청하는 지경에 이르면서 매일 같이 새로운 스캔들이 쏟아진 것이다. 셋째, 뻔뻔한 미래 계획과 빼앗긴 희생자의 꿈이 서로 극과 극을 이루고 있다. 희생된 고(故) 이채원 양은 생전 응급구조사를 꿈꾸며 이웃을 돕고자 했던 따뜻한 청소년이었다. 반면 가해자 장윤기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수감된 상태에서도 “교도소에서 자격증을 취득하겠다”며 자신의 미래를 태연하게 계획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타인의 삶을 송두리째 짓밟아놓고 정작 자신의 삶은 알뜰히 챙기려는 피도 눈물도 없는 몰염치한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씁쓸함과 분노를 안겼다. 그렇다면 우리 청소년들이 이 사건에서 배워야 할 삶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핑계의 기술’ 대신 ‘책임의 무게’를 배워야 한다. 어른들의 세상에는 종종 자신의 범행을 ‘환경 탓’, ‘기분 탓’, ‘우발적 충동’으로 포장하려는 비겁함이 넘쳐난다. 하지만 진짜 어른이란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엄중한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청소년 시기부터 자신의 잘못을 타인이나 상황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직면하는 용기를 배워야 할 것이다. 둘째, 타인을 대상화하는 왜곡된 정보와 거리 두기다. 장윤기는 학창 시절부터 음란물과 삐뚤어진 욕망에 노출되며 타인을 인격체가 아닌 ‘성적 대상’이나 ‘범죄 대상’으로 바라보는 왜곡된 인식을 키웠다. 인터넷과 미디어에 범람하는 그릇된 성 관념과 자극적인 정보들을 비판적으로 걸러내고, 타인의 인권을 존중하는 감수성을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셋째,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정의감과 용기다. 이 사건의 비극 속에서도 빛난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친구를 구하기 위해 달려들었던 동년배 학생의 용기였다. 또한 권력 유착 의혹에 굴하지 않고 진실을 파헤친 언론과 검찰의 추적은, 시스템이 오염되더라도 결국 정의는 바로잡혀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이 사건을 교육적으로 청소년들에게 하나의 의미와 교훈을 남길 수 있는 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는 자제력과, 잘못 앞에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주변 사람들의 염치다. 타인의 삶을 짓밟고 얻는 자유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청소년 교육에 시사점으로 부각시켜 활용함으로써 인간의 도덕적·윤리적 사상과 가치, 그리고 생명 존중 의식을 더욱 확고하게 고취하는 것이야말로 인성교육과 인간 존중의 핵심이라 믿는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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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교실 사법화에 경종 울리기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요즘 대한민국 학교는 교육의 전당이라기보다 교사의 ‘아동학대’, 또는 ‘정서 학대’로 인한 사법화가 일상화됨에 따라 법원 직영 아동 청소년 상담소에 가까워졌다. 예컨대, “선생님, 쟤가 제 지우개 가져갔어요!”라는 귀여운 고자질의 시대는 저물었다. 이제는 “선생님, 그 눈빛과 말투는 제 아이에게 정서적 학대 행위이니 법정에서 뵙겠습니다”라는 무시무시한 ‘사법 고소’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상 이상의 많은 교사들이 고소·고발의 홍수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 그런데 다소 이해 불가의 사실이 있다. 이렇게 난무하는 교육 현장의 아동학대 고소 중 거의 대부분이 조사나 재판 과정을 거쳐 결국 ‘기각’되거나 ‘무죄 판결’로 끝난다는 점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법정에서 “죄가 없다”고 최종 판결을 내려준들, 그동안 교사가 흘린 피눈물과 영혼의 상처는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교사가 법정을 들락날락하는 동안 방치된 다른 학생들의 학습권은 어디서 환불받아야 하는가? “아님 말고” 라는 무분별한 고소로 교육 현장을 초토화한 무법자들에게 이제는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할 때이다. 이 글에서는 교권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방어벽, 이른바 ‘징벌적 교육방해죄(가칭)’ 제정의 필요성을 제안하고자 한다. 미국의 저명한 법학자이자 문화비평가인 필립 하워드(Philip K. Howard)는 그의 저서 『법의 죽음(The Death of Common Sense)』에서 과도한 사법화가 어떻게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리는지 경고한 바 있다. 미국에서도 1990년대 이후 학교 내 소송이 급증하자, 교사들이 학생의 싸움을 말리지 않거나 칭찬조차 조심하는 ‘방어적 교육’ 현상이 일어났다. 하워드는 이를 “법이 상식을 집어삼켜 공동체를 마비시킨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우리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최근 국회 교육위원회 및 교육청 국정감사 자료 등에 따르면, 교사를 상대로 한 아동학대 신고 중 실제 처벌(벌금형 이상)로 이어지는 비율은 극히 낮다. 대부분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되거나 재판에서 무죄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무죄를 받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년이 걸린다. 그동안 교사는 직위해제를 당해 월급이 깎이고, ‘아동학대 피의자’라는 주홍글씨를 단 채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 교사가 무죄 판결을 받고 교단에 돌아왔을 때, 교실에 남은 것은 영광의 상처, 서먹함과 두려움뿐이다. 전쟁에서 이겼는데 영토는 황무지가 된 꼴이다. 우리 사회는 지하철에서 비상정지 버튼을 장난으로 누르면 무거운 과태료를 부과한다. 수많은 사람의 발을 묶고 시스템을 마비시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학교라는 공공 시스템을 사적인 감정이나 무리한 요구로 마비시킨 사람에게도 통념에 상응하는 책임, 즉 ‘교육 활동 마비죄’ 혹은 ‘무고성 교육방해죄’를 물어야 공평치 않겠는가? 이를 위해 첫째, 소송 비용 및 정신과 치료비 ‘전액 역청구’가 필요하다. 무죄나 무혐의가 확정되는 순간, 고소인이 교사의 변호사 선임 비용은 물론, 그동안 입은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 그리고 교사 공백을 메우기 위해 투입된 대체 강사 인건비까지 전액 배상하도록 법제화하는 것이다. 둘째, 공익 봉사 명령(‘학교 잡무 100시간’)부여다. 돈으로만 해결하면 ‘유전무죄’가 될 수 있으니, 무리한 고소로 학교 행정을 마비시킨 학부모에게는 학교 행정실이나 급식실에서 공익 봉사를 하도록 조치해야 한다. 이는 본인이 마비시킨 교육 현장이 얼마나 치열하게 돌아가는지 몸소 체험해 보라는 취지라 할 것이다. 교사를 죽이는 과도한 사법 고소·고발을 종식시키기 위해, 무죄 판결 시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경제적 대가를 치르게 하는 법 제정은 결코 과한 처사가 될 수 없다. 단적인 예로 축구의 헐리우드 액션에 대한 대응(경고 또는 퇴장)을 보라. 이제는 무너진 공교육을 정상화하고, 대다수의 선량한 학생들의 학습권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정당방위’가 필수적이다. 법은 교실을 흔드는 자들에게 엄중한 청구서를 주저 없이 발행해야 한다. 상식이 통하는 교실, 교사가 안심하고 출근하는 학교를 만드는 것, 이것이 우리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교육이라 믿는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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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월드컵은 끝났지만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4년을 기다렸던 2026 FIFA 북중미 월드컵이 끝났다. 한국은 첫 경기에서 체코를 상대로 역전승을 거두며 기대를 키웠지만 멕시코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연이어 패하며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한국 축구의 개선 여론 속에서 홍명보 감독이 사퇴했다. 2002년 월드컵은 우리에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고 2026년 월드컵은 다른 숙제를 남겼다. ‘이제는 정말 바꿔야 한다.’ 한국 축구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과거 관행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하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역설적 상황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한국 교육은 어떤가. 인공지능, 창의력, 학생 중심이라는 구호 아래 실질적인 시스템은 건드리지 못하고 ‘뫼비우스 띠의 길’을 달리는 것은 아닌가. 정답과 입시라는 관행의 길은 한국 교육이 뛰어내려야 할 길이다. 축구에 ‘경기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입시만 바꾼다고 교육이 달라지지 않는다. 교실이 바뀌고, 수업이 바뀌고, 평가가 바뀌어야 한다. 월드컵에서 강한 팀은 실수를 숨기지 않는다. 패배를 분석하고 다시 도전한다. 그러나 우리는 교육의 실패를 학생 탓, 교사 탓, 부모 탓으로 돌리는 데 익숙하다. 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가. 수없이 강조했듯이 입을 닫고 귀를 기울이는 수업이 아니라 질문을 만들고 협력하고 실수에서 배우는 교육이다. 상대를 끌어내리는 교육이 아니라 협력하는 교육이다. 거대한 과학기술은 많은 반복적 실수와 협력으로 업그레이드한 결과물이다. 컴퓨터 세상이 되면서 업그레이드는 일상이 되었다. 유연한 업그레이드는 생존 조건이다. 산업화 시대의 경직된 교육 방식을 인공지능 시대까지 끌고 간다면 미래를 이길 수 없다. 세상이 변했는데 교실이 변하지 않는다면 학생들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배우게 된다. 좋은 축구는 좋은 선수가 만드는 것보다는 좋은 시스템이 만든다. 좋은 교육도 마찬가지다. 한 명의 천재를 기다리는 나라보다 평범한 아이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꽃피울 수 있는 나라가 결국 미래의 승자가 된다. 우리는 선수가 바뀌기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시스템이 바뀌기를 요구해야 한다. 교사를 믿고, 학생에게 질문할 자유를 주며, 교실을 토론과 협력의 공간으로 바꾸어야 한다. 창의성은 침묵에서 자라지 않고 질문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교실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 학생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보다 출제자의 생각을 추론하는 훈련을 받는다. 실패는 성장의 과정이 아니라 감점의 이유가 된다. 인공지능은 이미 지식 암기의 인간을 앞질렀다. 검색도, 계산도, 번역도 기계가 더 빠르다. 인간에게 남은 경쟁력은 질문하는 능력, 서로 협력하는 능력,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능력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어제의 방식으로 내일의 인재를 키우고 있다. 장기적 교육 시스템 개선이 필요하다. 월드컵 패배는 경기의 패배지만 교육의 실패는 미래 세대의 돌이킬 수 없는 패배이다. 세계와 경쟁하는 시대에 단기적인 정책 중심의 교육은 처참한 패배를 불러 올 수 있다. 월드컵 조별 탈락을 통해서 우리 교육을 볼 때 결코 남일 같지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진로융합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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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무너지는 교실 속에서도 조용히 싹트는 ‘진짜 공교육’의 실태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우리는 흔히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을 달고 산다, 하지만 이는 기원전(B.C) 1700년경 수메르 점토판에도 적혀 있었다. 참으로 오랫동안 인간 성장에 대한 교육적 한탄은 인류의 유구한 전통으로 아어진 것이다. 특히 오늘날 대한민국의 교육 언론을 장식하는 뉴스들을 보면 온통 여기저기서 교권 추락, 붕괴된 교실, 인공지능(AI) 시대의 학력 미달, 그리고 끝없는 입시 경쟁까지, 온통 사면초가에 빠진 ‘교육 부실론’뿐이다. 그러나 모든 교실이 절망의 비명만 지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 모두가 한국 교육의 절망적인 상황을 진단하고 있을 때, 전국 구석구석의 학교 현장에서는 도덕과 상식, 그리고 인간미를 복원하며 ‘공교육의 기적’을 일구어내는 진짜 교육자들과 아이들이 존재한다. 이 글에서는 비판과 비난의 목소리를 잠시 가라앉히고, 묵묵히 교육의 본질을 혁신하며 주목받고 있는 교육의 현장들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최근 교육계의 화두는 AI 교육과 같은 ‘기술적 진보’에 치우쳐 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배워도 타인을 존중하는 법을 모른다면 그 교육은 실패한 것이다. 이 엄혹한 시대에 경쟁 대신 ‘상생과 인성’을 전면에 내걸고 획기적인 성과를 낸 사례가 있다. 이를 널리 알리고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은 긴 장마 끝에 모처럼 활짝 피어오른 햇살과 같은 감응을 일으킨다. 먼저 경기도 파주교육지원청이 전개하고 있는 ‘마음 온(溫, ON) 인성교육’ 프로젝트다. 파주 관내 초·중·고등학교들은 ‘1학교 1인성브랜드’를 자율적으로 선정해 교육과정 속에 완전히 녹여냈다. 2026년 2월 파주교육지원청이 선정한 인성브랜드 실천 우수학교(청암초, 통일초, 선유중, 운정고 등)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타임즈, 2026년 2월 4일 자 보도). 이 학교들은 일회성 캠페인에 그치지 않고, 학생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상시로 배려와 감사를 실천하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욕설이 난무하던 복도에 감사 인사가 흐르고, 선후배가 멘토링을 통해 격차를 메우는 모습은 ‘인성교육이 곧 최고의 학력 향상 대책’임을 증명했다. 지식만 욱여넣는 ‘인큐베이터 교실’을 인간성을 따뜻하게 켜는(ON) ‘온실’로 바꾼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학교가 바뀌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무거운 관료주의와 행정 편의주의다. 교사가 공문 처리에 치여 아이들 눈을 맞출 시간이 없다면 그 교육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그런데 경남교육청이 지난 12년간 추진해 온 ‘경남 혁신교육’은 일부 학교의 실험을 넘어 공교육 전체의 문화를 바꾼 대표적 성공 사례로 꼽힌다(교육언론창, 2025년 기획 분석 보도). 이 사례가 주는 교육적 울림은 경남 혁신교육의 핵심이 ‘학교 자치’와 ‘교사 행정업무 경감’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교사를 온전히 아이들 곁으로 돌려보내니, 수업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주입식 수업은 학생 중심의 프로젝트형 토론 수업으로 바뀌었고, 아이들은 획일적인 정답 찾기가 아니라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개별 교사의 독단적 헌신에 의존하던 구조를 깨고, 학교 공동체 전체가 협력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은 공교육 개혁의 가장 큰 수확이라 할 수 있다. 초·중등 교육의 긍정적인 변화가 입시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좌절하지 않으려면, 고등 교육과의 유기적인 생태계 구축이 필수적이다. 이제는 단순히 “착하게 살자”는 훈화식 교육을 넘어, 인성과 창의성을 고등 교육 및 지역 산업과 연계하는 획기적인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그와 같은 획기적인 대안으로 경상남도가 추진 중인 미래차·방산 등 지역산업 DNA를 교육과 연계하는 ‘G-10 모델’(한국대학신문, 2025년 보도)처럼, 이제는 대학과 시도교육청이 손을 잡고 ‘인성 및 창의성 특별전형’을 교육 벨트화해야 한다. 이 땅에서 매우 흔한 일로 대한민국 교육의 문제점을 찾아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손쉬운 일이다. 확대경을 들이대고 교실의 상처를 들추며 비난의 화살만을 쏘아 대는 것은 지양할 일이다.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얼어붙은 학교 현장을 녹이고 묵묵히 헌신하는 교사와 학교를 응원하는 따뜻한 ‘햇볕’의 시선이라 믿는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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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AI 시대, ‘기술 낙관론’의 후퇴와 기초학력의 역습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최근 대한민국 교육계의 지배적인 언어는 단연 ‘AI’와 ‘디지털 대전환’이다. 이를 반영하듯이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인공지능(AI)이 학생 개개인의 학업 성취도를 분석해 맞춤형 문제를 제공하고, 교실마다 태블릿 PC와 디지털 교과서가 보급되면 해묵은 학력 격차와 사교육 문제가 마법처럼 해결될 것만 같았다. 그동안 몇 해에 걸쳐서 수조 원의 예산이 에듀테크 인프라 구축에 투입되었고, 미래 교육은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였다. 그러나 2026년 7월 현재, 대한민국 교육 현장의 분위기는 완전히 급반전했다. 화려한 기술적 수사(修辭) 뒤에 가려져 있던 차가운 현실, 즉 ‘사상 최악의 기초학력 붕괴’와 ‘디지털 과의존’이라는 역풍을 정면으로 마주하기 때문이다. 교육부가 최근 발표한 2026년도 주요 업무계획과 예산 편성 추이를 살펴보면, 기술 중심 정책에서 벗어나 ‘국가 책임 기초학력 보장’을 정책의 최전면에 다시 배치했음을 알 수 있다. 화려한 미래 기술 낙관론이 교실의 참담한 현실 앞에서 일보 후퇴하고, 교육의 가장 본질적인 ‘기초’가 2026년 교육계의 ‘핫(hot)’한 화두로 떠오른 것이다. 이러한 학력 붕괴의 주범으로 지목된 것이 바로 과도한 디지털기기 노출이다. 위기감을 느낀 국회는 결국 지난 하반기 초·중등교육법을 개정하여, 올해 2026년 3월 1일부터 ‘전국 학교 내 학생 스마트폰 사용 원칙적 금지’라는 초강수 제도를 전면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행정규칙에 불과했던 스마트폰 제한을 상위법 개정을 통해 법제화한 것은 그만큼 아이들의 디지털 중독과 교실 붕괴가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이의 연계로 지난 7월 1일, 새로운 교육감들이 업무를 시작하면서 안민석 경기도교육감은 결제 서류 1호로 경기도 내 초중고에서의 ‘폰-프리(Phone-free) 스쿨’ 선언에 이르렀다. 이는 AI 시대에 학교에서의 소통을 강화하고 학력의 저하를 막기 위한 고육지책의 일환으로 판단된다. 인공지능 디지털 교과서를 도입하겠다며 예산을 쏟아붓는 동시에, 한편에서는 스마트폰을 법으로 금지하고 국가기초학력지원포털을 급히 개통하는 모순적인 풍경이 바로 이 시대 대한민국 교육의 현주소라 할 것이다. 이처럼 디지털의 홍수 속에서 무너진 기초학력을 복원하고 공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첫째, 기술을 이기는 ‘기초학력 전담 교원’의 파격적 확장인 인프라 구축이 요구된다. 교육부는 ‘국가기초학력지원포털’을 구축하여 나이스(NEIS)와 연계한 학습 이력 관리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컴퓨터 모니터 속 데이터와 분석 리포트는 아이들의 무너진 학력을 스스로 메워주지 못한다. ‘수포자 및 ’국포자‘란 용어로 통칭되는 기초학력 미달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교한 알고리즘이 아니라, 자신의 눈을 맞추고 발음을 교정해 주며 끝까지 기다려 주는 ‘인간 교사의 따뜻한 손길’에 달려 있다는 것이 정론이다. 둘째, ‘질문하는 학교’와 ‘서·논술형 평가’로의 평가 혁신이 시급하다. 기초학력의 붕괴는 단순히 지식의 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정답을 도출해 내는 ‘생각의 근육’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사지선다형, 오지선다형 객관식 시험에 최적화된 기존의 평가 체제 속에서는 디지털 기기에 익숙한 아이들이 요령만 터득할 뿐, 깊이 있는 인지 능력을 발달시키기 어렵다. 실제로 수능에 고득점을 한 졸업생들은 “고등학교 시절. 문제를 빨리 풀고 익숙해지는 연습만을 무한 반복했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이제 대한민국 교육은 방향타를 거듭 고쳐 잡아야 한다. 한때 국가교육위원회의 권고 사항이었다가 이제는 인권 침해가 아니라고 번복한 스마트폰 압수 제재라는 일차원적 규제를 교육혁명으로 간주하는 수준을 넘어, 아이들이 책장을 넘기며 스스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교실 환경을 시급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화려한 예산안과 차가운 디지털 플랫폼 뒤에 숨지 말고, 교실 현장에서 아이들과 뒹굴며 기초를 닦아줄 ‘교사’라는 휴먼 웨어에 과감히 투자해야 한다. 공교육의 본령은 모든 아이가 사회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단단한 지적·정서적 기초를 다져주는 데 있다. 부디 대한민국 교육이 만병통치약처럼 번지는 첨단 기술이라는 미혹에서 벗어나 ‘인간적 성장의 기초’라는 인간 중심의 위대한 본질에 보다 집중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소망하는 마음이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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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인생의 길은 전공이 아니라 도전이 만든다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이 말은 컴퓨터의 선구자 앨런 케이가 한 말로 유명하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어느 대학을 나왔는가?”, “무슨 전공을 했는가?”를 성공의 잣대로 삼는 관행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시대는 이미 달라졌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직업을 바꾸고, 최첨단 기술이 산업의 경계를 허무는 시대에는 전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평생 배우려는 자세와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한성숙 신임 국무총리다. 그녀는 공학도도, 컴퓨터공학 전공자도 아니었다. 숙명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평범한 인문학도였다. 그러나 졸업 후 컴퓨터 전문지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누구보다 빠르게 정보기술의 미래를 읽었다. 이후 나눔기술을 거쳐 인터넷 포털 엠파스 창립 멤버로 참여했고, 국내 최초의 '열린 검색' 서비스를 기획하며 인터넷 산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어 NHN과 네이버에서 검색과 서비스 혁신을 주도했고, 2017년에는 네이버 최초의 여성 대표이사(CEO)에 올랐다. 그녀가 대표로 재직하는 동안 네이버는 웹툰, 간편결제, 인공지능, 글로벌 플랫폼 사업을 확대하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IT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경영 성과를 인정받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으로 발탁되었고, 이어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되며 기업 경영과 공공행정을 모두 경험하는 보기 드문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한성숙의 인생은 우리에게 묻는다. “전공이 미래를 결정하는가, 아니면 배움이 미래를 결정하는가?” 말이다. 답은 이미 그녀의 삶 속에서 드러났다. 교육학자 존 듀이는 “교육은 삶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 삶 그 자체”라고 말했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은 출발점일 뿐이다. 삶은 졸업 후에도 계속 배우는 사람에게 더 큰 기회를 선물한다.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 CEO 가운데도 전공과 직업이 일치하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중요한 것은 학과 이름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며, 끊임없이 배우려는 태도이다. 한성숙 국무총리는 과거 기술자가 아니었지만 기술을 이해했고, 경영학도가 아니었지만 조직을 성장시켰으며, 정치인이 아니었지만 국가의 미래를 설계하는 자리까지 나아갔다. 이것이 바로 융합형 인재가 갖는 힘이다.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꿈이 무엇이냐?"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은 “평생 무엇을 배우며 살아갈 것인가?”이다. 직업은 바뀔 수 있다. 산업도 바뀐다. 그러나 배우는 사람은 어느 시대에서도 살아남는다. 이 시대 최고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미래를 예측하는 최선의 방법은 스스로 미래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교육도 이제는 정답을 빨리 맞히는 학생보다 새로운 질문을 던질 줄 아는 학생을 길러야 한다. 대학 입시를 위한 암기보다 세상을 바꾸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인공지능 시대에는 지식을 저장하는 사람보다 지식을 연결하는 사람이 더 큰 가치를 만든다. 한성숙 국무총리의 성공은 개인의 영광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것은 대한민국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는 하나의 이정표다. 오늘의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영문학을 전공했다고 영어만 해야 하는 시대는 끝났다. 지방대 출신이라고 꿈을 포기할 이유도 없다. 실패했다고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결론은 배우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은 언제든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있다는 진리다. 교육은 직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드는 일이다. 사람다운 사람이 많아질 때 사회는 발전하고, 그런 사람이 혁신을 이끌 때 국가는 미래를 얻는다. 이제 우리는 조용하지만 강한 교육적 메시지를 얻었다. “전공은 출발선일 뿐, 목적지는 스스로 배우는 사람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오늘날 우리의 청년들은 고용 절벽의 시대를 살아간다. 온갖 스펙으로 실력을 갖추었지만 40만~70만 명의 청년들이 아무 하는 일도 없이 그냥 쉬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 어렵게 살아 온 순간의 삶과 축적한 지식, 실력을 그대로 사장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대학에서의 전공은 하나의 경우일 뿐이다. 인생의 길은 전공이 아니라 도전이 만든다는 사실을 이 글의 주인공의 삶을 통해 느끼고 모델로 삼을 수 있기를 기대하고 바라는 마음이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교육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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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 산책] 보이지 않는 힘으로 세상을 뚫다 - 방동사니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힘의 원천은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다. 진정한 힘이란 외면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방동사니는 어디에나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잡초라 부르며 하찮게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거친 아스팔트를 뚫고 솟아나는 강한 생명이다. 누구도 보살피지 않지만, 스스로 살아간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을 모으며, 어느 순간 세상의 틈을 뚫고 얼굴을 내민다. 그 힘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방동사니는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뿌리를 깊이 내린다. 단단한 돌 틈 사이에서도,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버틴다. 제초제가 뿌려지고, 수없이 밟혀도 다시 살아난다. 장애물이 클수록 뿌리는 더욱 깊어지고,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힘을 만든다. 우리도 그렇다. 쉽게 드러나지 않는 노력이 가장 강한 힘을 만든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내면에서 단단하게 쌓인 힘이 어려운 순간을 뚫고 나올 수 있게 한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준비한 자만이 끝내 길을 연다. 방동사니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환경에서도 다시 살아나며, 그 존재를 증명한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준비하고, 내면의 힘을 단단하게 키운다면 어떤 어려움도 뚫고 나아갈 수 있다. 방동사니가 묻는다. “너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떤 힘을 키우고 있는가?”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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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 산책] 보이지 않는 힘으로 세상을 뚫다 - 방동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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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희 반려詩選] 반려인간(伴侶人間)
- [교육연합신문=구본희 詩選] 반려인간(伴侶人間) 자식이 있어도 제 살기 바빠 안부조차 잊는 세상. 결혼을 해도 아이 키울 엄두 없어 자식조차 낳지 않는 현실. 후진과 개발, 선진이 뒤엉킨 세대, 풍요와 편리함은 더 깊은 고독을 잉태했다. 이제는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시대. 자식도 찾지 않는 노년의 외로움을 달래는 반려인가, 부모 되기를 포기한 무자식 상팔자의 반려인가. 반려동물의 눈을 바라본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지만, 문득, 나도 누군가의 반려인간이면 좋겠다. ▣ 구본희 ◇ 前인천국제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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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희 반려詩選] 반려인간(伴侶人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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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자사고와 공립고, 진정한 교육의 기능을 다하고 있는가?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한국의 고등학교 교육은 오랫동안 ‘입시 중심’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자율형 사립고(이하 자사고: 특목고의 기능을 대표하는 유형))와 공립고(일반고의 대표적 유형)다. 자사고는 “자율”이라는 이름을 달고 탄생했지만, 실상은 경쟁 위주의 교육을 심화시키는 제도로 전락했고, 공립고는 형식적인 평등에 갇혀 교육의 질적 다양성을 놓치고 있다. 이 두 제도가 과연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교육의 방향과 부합하는지, 진지하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자사고의 존재 이유를 보자. 그것은 한마디로 다양성과 자율성에 있다. 학교마다 독자적인 교육과정을 구성해 학생의 개성과 창의성을 신장하겠다는 것이 취지였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상당수 자사고는 명문대 진학률을 경쟁력으로 내세우며 사실상 ‘입시 사관학교’로 기능하고 있다. 예컨대 전국적으로 유명한 지방의 한 자사고는 2024년도 약대 및 의학계열(의⋅치⋅한⋅수)의 진학률이 졸업생의 40~50%에 이르렀다. 가히 ‘의대 사관학교’인 셈이다. 이런 성향으로 보아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기대한다는 것은 지나친 낙관이라 할 것이다. 서울 강남의 일부 자사고는 내신(수시전형)보다 수능(정시전형) 준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단편적인 총평에 불과할 뿐이다. 문제는 이런 과정에서 공교육의 정상적인 흐름을 크게 왜곡시키고 있는 점이다. 자사고가 고교 서열화를 고착화시키고, 사교육 의존도를 높인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러한 구조는 교육 기회의 불균형을 초래하며, 가정의 경제력이 곧 교육의 질을 결정하는 이른바 ‘부의 세습’을 부추기는 불공정한 환경을 조장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전국적으로 일반화 되어가는 경향이라 볼 수 있다. 반면에 공립고는 제도적으로 평등을 지향한다. 대부분의 학생이 거주지 학군 내 무작위 배정을 통해 진학하며 교육의 형평성과 접근성 면에서는 분명한 장점이 있다. 하지만 문제는 교육의 다양성과 역동성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공통 교과 위주의 교육은 평균적인 학생을 기준으로 설계되어, 뛰어난 학생이나 특별한 관심사를 가진 학생에게는 도전이나 자극이 되지 못한다. 게다가 교사의 자율성이 제한되고 학교 자체도 혁신적 시도보다는 안정적인 운영에 집중한다. 그 결과, 공립고는 때때로 ‘관리형 교육’에 머무르며 학생의 잠재력을 충분히 끌어내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결국 자사고와 공립고 모두 교육의 본질에서 어긋난 점이 드러나고 있다. 부연하자면 자사고는 지나친 경쟁과 서열화로 교육의 공공성을 훼손하고, 공립고는 제도적 평등에 안주한 채 학생 개개인의 다양성과 성장 욕구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 양극단에서 벗어나야 한다. 고교 교육은 단순히 대학 진학을 위한 ‘통과의례’가 아니라, 삶을 설계하고, 자신만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시기여야 한다, 입시 실적이 아니라 교육의 질과 다양성, 그리고 학생의 성장 가능성을 중심으로 한 학교 운영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첫째, 고교체제 개편 논의는 입시 결과가 아닌 교육의 본질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교육부는 자사고 폐지나 전환을 단순한 ‘형평성’ 차원이 아니라, 공교육 전반의 질적 향상과 연계된 정책으로 접근해야 한다. 둘째, 공립고에도 교육과정의 자율성을 확대해 각 학교가 지역 특성과 학생의 요구에 따라 특색 있는 교육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이것이 점차 확대하려는 자율형 공립고(자공고) 2.0 정책의 목적인 것으로 보인다. 셋째, 교사의 전문성과 자율성을 강화해 교육의 주체로서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이는 자사고, 공립고 모두에 해당한다. 우리는 이제 ‘어떤 학교가 더 좋은가’를 묻기보다는 ‘학교는 무엇을 위해 존재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진정한 교육은 성적이 아닌 삶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자사고든 공립고든, 그 학교가 학생 한 명 한 명의 가능성을 존중하고, 미래를 살아갈 민주시민의 자질과 역량을 길러주는 곳이라면, 비로소 교육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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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자사고와 공립고, 진정한 교육의 기능을 다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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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즐거운 인생을 위한 예술교육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사는 것이 즐거우신가요? 나이가 들수록 되도록 즐겁게 살고 싶다. 사는 것이 즐겁게 느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즐겁다는 것은 보람을 느끼거나 재미가 있거나 보상이 크거나 칭찬을 듣거나 인정을 받거나 성취감을 느낄 때일 것이다. 즐거움을 느끼지 못할 때는 지루하거나 실패하거나 의미를 느끼지 못하거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일을 할 때이다. 사는 일이 항상 즐거울 수는 없다. 하지만 이왕 사는 거라면 즐겁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멋진 삶, 의미 있는 삶, 성공한 삶, 건강한 삶이 있지만 즐겁지 않다면 인생은 숙제일 뿐이다. 근대에 와서 쇠사슬에 묶여 강제 노역을 하는 전통적 노예는 없어졌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엇인가에 지배를 당하는 심리적 노예는 많다. 돈은 가장 강력한 족쇄이다. 보이지 않는 세련된 방식의 구속으로 지배를 당하는 현대인은 항상 일에 바쁘다. 돈, 건강, 의무, 성과에 매몰되어 살다보면 출구에는 커다란 허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가 일상을 장악하면서 인정 욕구에 예속되기도 한다. 인공지능마저 인간의 사고를 알고리즘으로 예속하려고 한다. 인간의 인정 욕구는 생리적 욕구가 아닌 심리적 욕망이다. 남에게 인정받는 일은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통하여 살아갈 힘을 얻는 일이다. 타인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자신의 진정성을 속이는 것이 비극의 시작이다. 재미있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새로운 것이 재미를 준다. 여행한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이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적은 목록에 ‘여행’이 많은 것은 그런 이유이다. 배운다는 것도 새로운 경험과 대면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즐겁고 행복하게 살게 하려면 예술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가정, 학교, 사회, 국가가 예술교육에 지금보다 더 노력, 시간, 예산을 투자해야 한다. ‘쇼생크의 탈출’이라는 영화에서 죄수들에게 들려오는 아리아는 예술의 마력을 보여준다. ‘앤디’라는 남자주인공이 간수를 화장실에 가두고 감옥 전체에 들려주는 음악은 ‘피가로의 결혼’ 3막에 나오는 이중창 ‘산들바람이 불고’라는 아리아이다. 공간은 여전히 교도소 마당이지만 음악이 흘러나오는 그곳은 마법처럼 아름다움이 오로라처럼 일어난다. 실수와 반성에서 내면의 성장이 있다. 전기밥솥에 물만 맞추어 부으면 밥이 간편하게 된다. 타지도 않고 질지도 않다. 실패가 없다. 이야기도 없고 성장도 없다. 밥을 태우거나 질게 하거나 되게 하거나 해야 웃음이 있고 반성이 있고 이야깃거리가 있다. 손으로 당기고 밀고, 입으로 불고, 손가락으로 힘들여 튕기고 여닫는 동작으로 소리가 나온다. 그 소리는 같은 듯 다르다. 그 다른 것을 느끼러 연주회장에 간다. 다른 것들의 조화가 아름답다. 인생을 즐기려면 예술에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선진국이 왜 예술교육에 많은 투자를 했는가를 새삼 깨닫는 요즘이다. 점점 예술교육의 필요성이 새롭게 다가온다. 우리가 학생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학교에서 예술과 스포츠, 동아리 활동을 활성화해야 한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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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즐거운 인생을 위한 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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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좋은 교사는 어떤 사람인가?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좋은 교사는 어떤 사람인가?” 교육계에 몸담은 지난 40년 세월 동안 필자는 수없이 이 질문을 되뇌었다. 교사로, 교감으로, 그리고 교장으로 다양한 학교와 아이들을 만나며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삶 속에서 찾고자 노력해 왔다. 필자는 그 과정에서 특히 학교의 관리자가 되어 봉직했던 중고등학교에서의 교육 현장이 중요한 마무리이자 사고의 큰 전환점이 되었음을 고백하고자 한다. 첫째, 좋은 교사는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사람이다. A학교에서 한 학생이 잦은 지각과 무기력한 태도로 교내 문제아로 낙인찍히곤 했다. 그 아이와의 쉽지 않은 대화를 통해 밝혀진 것은, 아침조차 거르며 열악한 가정환경 속에서 힘겹게 상당한 거리의 학교를 다닌다는 사실이었다. 그 후 필자는 담임교사와 함께 아침 간식을 제공하며 생활지도를 병행했고, 점차 그 학생은 자율적으로 교내활동에 참여하고 수업에도 몰입하기 시작했다. 이 학생을 통해 결과보다 과정을, 성적보다 사람을 먼저 보는 교사의 시선, 그것이 한 아이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둘째, 좋은 교사는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B학교 재직 당시, ‘자기주도 학습 프로젝트’ 운영을 권장하고 관리하며 교실 구조를 바꾸는 공간 혁신을 통해 교육적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기존의 일방향 수업 대신 학생 주도 토론과 탐구 과제를 중심에 둔 일명 프로젝트 수업(PBL) 방식이었다. 초기에는 “답이 없으면 어떻게 공부하나요?”라는 학생들의 불안한 질문이 많았지만 필자는 선생님들도 답을 모를 수 있고, 따라서 교사-학생이 함께 찾아가는 과정이 교육이라고 학생들과의 진솔한 대화 시간을 이용해 설득해나갔다. 그 경험을 통해 아이들은 ‘틀려도 괜찮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스스로 탐구하는 태도를 갖게 되었다. 이로써 진짜 배움은 지식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실감했다. 나중에 그 아이들이 발표를 통해 한 뼘씩 크게 성장한 사실이 놀라웠다. 셋째, 좋은 교사는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C학교에서 근무할 당시 학생회 학생들과 1:1 면담을 실시했던 일이 있다. 학생들의 이름을 외우고, 복도나 운동장, 또는 도서관에서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즉시 말을 건넸다. “○○야, 오늘 하루 어땠어?”, “◇◇야, 요즘 어떤 책을 읽고 있어?”라는 짧은 질문에도 아이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교감 선생님이 제 이름을 알아요.”라는 한 학생의 말에서 필자는 교육의 본질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진심 어린 관심은 지시보다 강력하고, 사랑은 어떤 교육 기술보다 깊은 울림을 남긴다는 사실을 말이다. 현재 필자는 교직을 떠났어도 여전히 우리 교육에 대해 생각하고 어떤 교육이 바람직한 것인지를 사유하며 글을 쓰고 있다. 지금 “좋은 교사란 어떤 사람인가?”를 쓰면서 과거 필자 자신도 결코 완성된 교사가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신한다. 좋은 교사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매일 아이들 앞에 진심으로 서려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교실 어딘가에서, 아이 한 명 한 명을 위해 애쓰고 있는 모든 교사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스스로 묻기를 바란다. 당신은 어떤 교사가 되고 싶은가, 그리고 어떤 교사를 기억하고 있는가, 말이다. 좋은 교사에 대한 기준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예컨대 인공지능(AI)과 로봇, 첨단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디지털 시대에는 ‘질문하는 학생’에 중점을 두고 가르쳐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변함없이 좋은 교사란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기다려줄 수 있는 인내심, 아이들의 실수나 과오를 너그럽게 수용하고 오히려 이를 격려하고 응원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갈수록 힘들고 어려운 교육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사도를 걸으며 ‘교학상장’, ‘청출어람’ ‘솔선수범’의 교육사상과 철학을 실천하며 교사 본연의 길을 가고 있는 선생님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저절로 존경과 사랑의 마음이 앞선다. 좋은 교사는 결코 화려한 언변이나 계획된 꾸밈이 겉으로 드러나는 사람이 아니라 앞에서 선도하는 사람(First Mover)이 되어 학생과 학부모, 동료교사의 지지와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 믿는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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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좋은 교사는 어떤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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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 산책] 이름을 넘어 피어나다 - 개여뀌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우리는 모두 이름에 담긴 의미보다, 자기 스스로 정체성을 정의하는 힘을 가져야 한다.” 개여뀌, 이름부터 남루하다. ‘개’가 붙는 순간, 진짜가 아닌 가짜가 된다. 사람들은 이름만으로 그것을 하찮게 여긴다. 그러나 이름이 본질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름이 전부라면, 그 속에 숨은 진짜 가치를 놓치게 된다. 개여뀌는 화려하지 않다. 진짜 꽃처럼 보이도록, 가짜 꽃봉오리를 단다. 겉모습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남는다. 이것은 속임수가 아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생존하는 자연의 지혜다. 우리도 그렇다. 타인의 시선과 평가 속에서 흔들리지만, 이름이 우리의 가치를 결정짓지는 않는다. 진정한 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란다. 겉모습에 가려진 노력과 인내가 진짜 삶을 만든다. 개여뀌는 눈에 띄지 않아도 살아남는다. 가짜 꽃을 피우지만, 결국 진짜 꽃을 준비한다. 우리는 이름을 넘어야 한다. 타인의 평가가 아니라, 스스로의 본질로 살아가야 한다. 개여뀌가 묻는다. "네가 가진 이름이 아니라, 너 자신으로 살고 있는가?“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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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 산책] 이름을 넘어 피어나다 - 개여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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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마음을 따스하게 하는 존중의 아름다운 말하기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대낮에 시각장애인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서로 몸을 부딪쳤다. 한 사람이 말했다. “아니 이 사람아, 두 눈 똑바로 뜨고 다니지 못해?” 그러자 다른 시각장애인 한 사람이 말한다. “보면 모르냐?” 배려는 상대방의 입장도 생각하는 태도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대하여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고 대응한다. 직장에서 가장 힘든 업무는 자기가 맡은 일이라는 말이 있다. 자신만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사정 속에서 살고 있다고 믿는다. 상대방도 자신과 같은 힘든 상황 속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판단하지 않는다. 내가 힘들면 상대방에게 소리를 쳐도 괜찮고 무례를 범해도 된다는 태도와 논리가 사회에 만연하다. 실제로는 상대방도 더 힘든 상황에 있을 수 있다. 모두가 사는 것이 힘들다고 한다. 거친 말 속에는 상대에 대한 배려가 보이지 않는다. 내가 힘드니 상대방이 양보해야 한다고 한다. 악성 민원도 이런 태도에서 나온다. ‘내로남불’도 자기중심적 이중잣대의 공격언어이다. 공정한 ‘역지사지’의 태도가 아쉽다. 어릴 때 읽은 동화 내용이 가끔 떠 오른다. 말할 때마다 입에서 금은보화가 나오는 아가씨와 징그러운 파충류가 입에서 쏟아져나오는 아가씨 이야기이다. 불쌍한 노파를 도와준 아가씨는 말할 때마다 입에서 금은보화가 쏟아져 나온다. 이를 부러워 한 다른 아가씨가 우물에 갔지만 노파를 도와주지 않고 비난만 하고 집에 오자 온갖 징그러운 생물들이 말할 때마다 입에서 마구 나왔다. 살아가면서 이 단순한 이야기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하루종일 어떤 말을 하며 하루를 지냈는가를 반성한다. 내가 힘들다고 느낄 때면 상대방의 요구에 거친 말이 나오게 된다. 내 힘겨움을 알아주지 못하는 마음에 서운한 말을 하기도 한다. ‘혀 밑에 도끼가 들었다’는 속담도 있고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도 있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상대를 배려하는 아름다운 말이 더 소중하다. 부부와 친구 사이도 마찬가지다. 교사가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 존중의 아름다운 말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언어는 그중에서도 중요한 요소이다. 언어는 관계를 이어 나가는 주요 수단이다. 존중받는 존재로 살고 싶은 것은 생명체의 본능이다. 그런 학생들에게 따스한 말로 하루를 시작하자. 사는 것이 힘들지만 아름다운 말은 어둡고 힘든 마음에 따스한 온기를 주는 한 줄기 빛이 된다. 세상살이가 각박하고 힘들어도 선생님은 말을 곱게 해야 한다. 그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다. 때로는 학생이나 학생 부모에 대한 비난 한마디가 평생 가슴에 남기도 한다. 교사는 매일 학생에게 많은 말을 해야 하는 존재이다. 교사는 자신의 말 한마디가 징그러운 뱀인가 아름다운 보석인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교실에 뱀을 한가득 풀어놓은 교사가 되지 말자. 학생에게 삶에 도움이 되는 보석보다 따스하고 아름다운 말을 하자. 말은 관계 회복의 열쇠가 되기도 하고 상처를 치유하고 자존감을 키워주기도 한다. 아름다운 말은 상대를 존중하는 말이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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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왜 학교는 학생들의 운동량을 높여야 하는가?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최근 국내 언론들은 청소년들의 신체활동 실천율 즉, 운동량이 ‘세계 꼴찌’ 수준임을 앞 다투어 보도했다. 이에 대한 가장 큰 이유로는 “학원 다니기 힘들고 운동할 곳이 없다”라는 반응이 압도적이다. 운동량은 중학생일 경우 22%, 고등학생이 되면 13%로 급감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체력은 국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이에 학교와 교육 당국은 건강상의 이유는 물론 학습 성과를 높이기 위해서도 학생들의 운동량 확보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이를 다양한 측면에서 강화할 필요성이 매우 크다. 국내 한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중학생 A양(15)은 땀 흘리는 것을 싫어해 체육 시간을 꺼린다. 학교는 버스를 타고 다녀 하루 10분 남짓 걷는다. 주말에는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동영상을 보느라 집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는다. 그녀는 “주변에 마땅히 운동할 공간도 부족하고, 학원만 다녀와도 힘들어서 운동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뿐이랴. 매일 한 번에 최소 10분 이상을 걸었다는 여학생 비율은 겨우 절반을 넘는다. 이는 외국의 또래에 비하면 운동 부족 현상이 매우 심각한 상태다. 최근 질병관리청의 ‘2025년 국민건강 통계 플러스’ 보고서에 의하면 학생들의 운동량(하루 60분, 주 5회 이상)은 중학생 21.5%, 고등학생 12.9%로 밝혀졌다. 이는 입시부담이 커질수록 운동에 소홀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국가별 비교로 보면 2023년 한국 고교생은 13.4%로 미국 고교생의 46.3%보다 월등히 낮았다. 특히 한국의 여고생은 6.6%로 미국 여고생의 36.0%에 비해 1/5 수준에 불과했다. 이는 세계보건기구(WHO)의 분석 결과에서도 한국의 청소년은 운동 부족 상태가 94.2%인 반면에 세계 평균은 81%, 미국 72%, 싱가포르 76.3%와 비교해서 매우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과거 70년대 우리의 상당수 전통 명문교의 지덕체 교육활동을 복원할 필요가 있다. 당시 학교는 정규 체육 교과 수업과는 별도로 교육의 특성화에 나서 전교생을 대상으로 1인 1운동을 적극 실행하였다. 이는 1인 1악기 교육과 함께 소위 ○○학교하면 태권도, 유도, 검도, 기타, 하모니카 등으로 학교의 이미지가 자동 연계되던 때가 있었다. 물론 지금과는 다른 교육과정운영으로 가능했지만 여기엔 학교장과 교사들의 교육철학과 고유한 학교문화 즉, 전통 만들기에 열정과 사명감이 함께 하면 현재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제는 어찌 보면 여건이 과거보다 더 유리한 상황이라 할 수도 있다. 왜냐면 잘 나가는 K팝처럼 K댄스로 학생들의 건강과 운동량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는 콘텐츠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K댄스를 전교생을 대상으로 주 2~3회 10~30분씩 운영한다면 이 또한 긍정적인 교육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뿐이랴. 요즘 건강상 폭발적으로 인기를 얻는 ‘맨발 걷기’도 학교 운동장을 활용하면 학생들의 관심과 성과를 거둘 것으로 짐작된다. 그만큼 춤과 노래에 익숙한 신세대들이 학교에서 장려하는 (맨발)걷기 운동까지 함께 한다면 우리 청소년들에게 보다 건강을 위한 운동량 확보에 최적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학교는 학생들의 경제적 부담을 고려해서도 실행 의지만 갖는다면 비용이 들지 않고도 걷기 운동을 생활화할 수 있다. 매일 10분 이상 걷는 청소년은 주 5일 미만 걸을 때보다 운동량이 3배가량 높았고 학교 체육 수업에서도 주 3회 이상 직접 운동하는 학생은 전혀 운동하지 않는 학생보다 약 2.5배 높은 연구 결과도 확증할 것이다. 이는 최근 경고음을 내는 학생들의 비만율과 스트레스 인지율을 낮추는 효과에도 탁월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제 학생들의 운동이 생활화되도록 적극 실천하는 학교와 그렇지 않은 학교는 학생들의 ‘학교 선택 선호도’와 학부모의 ‘학교 참여’에서도 긍정적인 효과를 초래할 것이다. 학교 차원에서 학교장의 철학과 교사들의 협조와 추진력만 있으면 ‘학교 재량 시간’을 활용해 교육과정에 적용할 수 있다. 이밖에 학생들의 운동량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창의적인 방안은 학생의 성장⋅발전과 바람직한 학교문화 창조, 그리고 학생들의 학교생활 만족도 및 행복지수 등 부가적인 측면과 궁극적으로는 학력향상에도 지속적인 플러스의 효과를 유발할 것으로 확신한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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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왜 학교는 학생들의 운동량을 높여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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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 산책] 끊임없이 피어나는 꽃 - 참나리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삶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외모나 결과만이 아니라, 그 뒤에 숨은 노력과 인내에서 비롯된다.” 참나리는 쉽게 피지 않는다. 봄이 와도 성급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린다. 어둠 속에서 오래도록 견디며, 차가운 흙과 바람을 받아들이며 힘을 키운다. 겉으로 보이지 않아도, 그 안에서는 생명이 자라고 있다. 비바람이 지나가고, 계절이 바뀌어도 참나리는 서두르지 않는다. 덩이뿌리는 뜯겨도 사라지지 않는다. 상처 난 자리에서 다시 싹을 틔우고, 꺾인 곳에서도 생명을 이어간다. 쉬운 길은 없다. 그러나 시련은 참나리를 더 강하게 만든다. 긴 기다림 끝에 마침내, 참나리는 붉은 꽃을 연다. 그 과정이 있었기에 더욱 단단하고, 그 시간이 있었기에 더욱 찬란하다. 꽃은 아래를 향하고, 호랑나비는 애써 날갯짓해야 꿀을 얻는다.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은 없다. 참나리는 말없이, 그러나 강하게 삶의 진리를 보여준다. 쓰러졌는가? 그럼 다시 일어나라. 부서졌는가? 그렇다면 다시 피어나라. 참나리는 묻는다. “아픔이 있는가? 그렇다면 너는 더 강해질 것이다.” 상처는 끝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일 뿐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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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아름다운 인연으로 가꾸는 멋진 직업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사람이 사는 일은 ‘인연’을 맺으며 사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부모, 국가, 친척, 친구, 학교, 선생님과 인연을 맺는다. 선택이 의지와 무관할 때 운명이라고 여긴다. 선진국에 태어난 아이도 있고 북한처럼 힘겨운 나라에 태어난 아이도 있다. 아직도 거리에서 사주팔자를 알려준다는 간판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 싶어한다. 운명적 만남은 생애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정말 다양하다. 30년 동안 담임을 해도 항상 새로운 것이 학생이다. 하나하나가 다르다. 반응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경험도 다르다. 같은 이야기에도 반응이 다르다. 감동을 받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잔소리가 많다고 싫어하기도 한다. 교사는 학생에게서 보람을 얻기도 하고 실망으로 힘들어하기도 한다. 교사는 학생과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다른 직업은 10년이면 숙달이 되어서 ‘세상에 이런 일이’ 프로그램에서 달인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30년이 넘게 교사를 한 사람이 학생 지도의 달인이라고 나온 일을 본 기억이 없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수십만 갈래의 바둑 수보다 복잡하다. 많은 교사가 힘들어하는 것은 사람의 깊이가 학생마다 달라서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물에 돌을 던져서 떨어지는 소리로 그 깊이를 짐작하는데 소리가 나지 않는 깊이를 가진 것이 인간 마음이라는 우물이다. 3월 2일 개학날. 담임 발표를 할 때 아이들은 한껏 긴장을 한다. 담임도 어떤 학생들과 한 해 동안 만날 것인가 긴장한다. 처음 담임 학급 출입문을 열 때의 마음은 외국의 거리로 처음 나설 때처럼 긴장과 설레임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설렘으로 만나서 일 년간을 그야말로 지지고 볶는 관계로 얽히고설키게 된다. 군사부일체라는 말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가장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는 학생에게 많은 영향을 주는 곳이 학교이고 교사이다. 자동차 바퀴를 다루기는 인간 마음을 다루기보다 쉽지만 수십 년이 지나서 바퀴가 나에게 연락을 하지는 않는다. 어렵지만 소중한 인연들은 시간이 지나 사제 간의 고민의 크기만큼 소중한 추억이 된다. 아름다운 인연이라는 것은 사랑으로 상대를 변화시킨 인연이다. 오직 상대에 대한 관심과 배려와 사랑이라는 것이 상대를 변화시키고 감동을 준다. 세상이 바뀌고 물질이 풍족해도 변함이 없는 것은 사랑이 부족한 학생이 많다는 것이다. 그 학생에게 필요한 것은 관심과 사랑이다. 교사에게 사람에 대한 애정과 믿음과 열정이 필요한 이유이다. 교사가 아름다운 인연을 소중하게 가꾸어서 학생이 든든한 거목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큰 보람이다. 학생들은 어떤 교사가 사랑으로 가르쳤는가를 귀신처럼 알아낸다. 학생과의 인연은 매우 소중한 존재와의 운명적인 만남이다. 교사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싶다면 학생을 무조건 사랑하자. 다만 사랑의 방법은 과거와 달라야 한다. 학생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 내가 아닌 상대방이 바라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수많은 인연을 아름답게 만들며 살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직업은 그리 많지 않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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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아름다운 인연으로 가꾸는 멋진 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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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진짜 대한민국”을 만드는 ‘진짜 교육’을 실현하려면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무엇이 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이는 서로 다른 질문 같지만 사실은 그 이면은 거의 흡사한 질문이다. 왜냐면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꿈꾸지만 여기에는 높은 지위에 올라 타인에게 영향력을 미쳐서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이중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에 혹자는 사람은 무엇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고 그것이 행복을 가늠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서는 무엇이 되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확실한 보장이라고 믿는 성향이 강하다. 이처럼 출세와 성공지향의 목표와 방법을 철저히 숭배하는 사람들 중에는 “내가 잘 되어야, 너도 있고 너를 도울 수 있다”는 권력자나 리더의 말에 쉽게 현혹돼 그에게 무조건적, 무사유적인 절대 맹종과 충성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최근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과 공모하여 자신들의 권력욕을 충족하고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민주주의에 크게 역행하고 위헌적, 비법치적 쿠데타를 도모하다 법의 냉엄한 심판을 받고 있는 자들이 방증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 교육이 배출한 엘리트임에도 불구하고 뒤틀린 가치관과 사고, 리더십 부재의 전형적인 인재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런 행태에 빠져든 것인가? 우리 사회는 예로부터 과도한 특혜를 누리는 자들이 남들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려는 성향을 널리 용인해 왔다. 이는 소위 ‘배워서 남 주는’ 이타적인 인간이 아니라 ‘배워서 남위에 우뚝 서는’ 욕망의 인간으로 육성해온 우리 교육의 자업자득이다. 즉, 치열한 경쟁교육을 통해 각자도생을 추구해온 결과이다. 결국 우리의 학교와 교실에서는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협력과 연대로써 상생을 추구하여 이 사회와 세상을 보다 좋은 곳으로 만드는데 기여하는 이타적인 인간 양성의 ‘진짜 교육’이 결여된 반쪽짜리 인재들을 교육해 온 것이다. 문제는 우리 교육의 최고 수혜자인 엘리트들이 사회 곳곳에서 “내 사전에는 부끄러움은 없다”고 선언하는 것 같은 행태를 보이는 것이다. 이는 안타깝게도 어려서부터 야만적인 경쟁으로 남을 딛고 우뚝 서야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출세하고 성공할 수 있다는 교육 가치를 당연시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학교는 그런 경쟁보다 나눔과 배려, 칭찬과 격려, 연대와 협력으로 상생을 추구하는 함께 잘 사는 진짜 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타인은 곧 나의 경쟁자이자 타도해야 할 적이라는 의식을 완전 불식시켜야 한다. 지난 달 이 땅에는 “이제부터 진짜 대한민국”을 표방하는 새로운 국민주권정부가 들어섰다. 말 그대로 이제부터 모든 정부 기구와 조직체가 오직 국가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나서야 한다. 이에 대한 초석은 바로 교육에서 시작된다. 새 정부는 국가교육위원회의 권한을 키우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육부의 기능은 축소하겠다는 취지의 선거공약을 내걸었다. 또한 한국교육개발원과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등 교육기관들을 통합해 실질적인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정책 의지도 내비쳤다. 이로써 우리는 비로소 국가의 장기적인 교육 비전을 비롯한 실용적인 교육의 목표와 방향을 제대로 디자인하고 집중적으로 실행해 나가기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 교육은 진짜 디지털 대전환 시대에 걸 맞는 창의적이고 효율적인 교육대개혁을 이루어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보다 표준화된 세계적 기준(Global Standard)에 다가서는 바람직한 교육을 구현해야 한다. 그것은 보다 강력한 민주시민이자 세계시민을 육성하는 교육과정으로의 집중적인 디자인과 실행에 달려있다. 여기에는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 전 세계로 도약하려는 교육에의 강력한 의지와 추진력이 필요할 뿐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 하듯이 새 정부는 21세기 디지털 대문명에 보다 적합한 새로운 교육으로 인공지능(AI)과 로봇 등 첨단 과학기술의 적용은 물론, 다양한 인문학적 사상에 기초하는 인간존중사상(Humanism)을 심화하여 바람직한 인간을 육성하는 인재교육에 보다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사회와 세계를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이타적인 인재들을 육성하는 ‘진짜 교육’으로 탈바꿈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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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진짜 대한민국”을 만드는 ‘진짜 교육’을 실현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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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 산책] 경쟁하지 않는 꽃 - 메꽃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경쟁은 불신을 낳고, 협력은 신뢰를 쌓는다. 각자의 색깔을 지닌 꽃들이 협력하여 세상에 빛을 발할 수 있다.” 나팔꽃이 아침을 노래할 때, 메꽃은 한낮의 태양 아래 조용히 피어난다. 소란스럽지 않지만, 자신만의 시간을 따라 꽃을 연다. 부드러운 빛깔이지만, 그 뿌리는 깊고 질기다. 보이지 않아도 살아 있다. 겨울을 지나 땅속에서 숨을 고르고, 어느 날 다시 피어나는 생명. 침묵 속에서도 준비되고, 사라진 듯 보여도 사라지지 않는다. 경쟁 없이도 피어난다. 빛나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메꽃은 말한다. “서로 다르게 피어나도, 각자의 자리에서 충분히 아름답다.” 누구나 자신만의 때가 있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피어날 권리가 있다. 메꽃처럼, 조용히, 그러나 깊이 뿌리내리고 살아가면 된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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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미래 비전 보이지 않는 교육정책, 재건축이 필요한 교육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차로 출근하다가 놀라운 변화에 감탄했다. 옛집과 밭이 늘어서 있던 곳이었다. 출근길에 신도시 개발구역을 지나갔다. 새로운 아파트와 상가가 하나둘 들어서더니 풍경이 놀라보게 달라졌다. 하늘과 맞닿은 경계선만이 아니라 간판의 종류도 달라졌다. 운동시설과 상가, 병원, 공원, 산책로 등의 시설이 보였다. 앞으로 이 신도시에 오는 주민은 새로운 문화를 즐기게 될 것이다. 신도시 건축을 위해 설계와 기초공사, 공사 기간에 따른 얼마나 많은 인력과 노력이 있었을까 상상하게 된다. 새로운 신도시는 설계가 실천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이다. 정확한 목표를 가지고 청사진을 가지고 노력하고 실천할 때 인생은 새로운 모습으로 괄목상대할 만큼 성장하는 것이다. 미리 외국어를 배워서 해외 기관장을 하는 동료를 보거나 목표를 세워 꾸준히 글을 써서 책을 내는 후배를 볼 때 그런 생각을 한다. 명확한 목표와 꾸준한 실천이 눈부신 성과를 만드는 것을 보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다. 과거에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있었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시작하여 1996년까지 7차례의 5개년 계획을 끝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장기적인 목표를 세워 경제 성장 발전에 대한 목표를 달성했다. 오직 잘살아 보겠다는 명확한 청사진과 목표가 있었고 실천 방향을 하나하나 실천했다. 교육에서도 모두가 자식에게 고등교육을 마치게 하여 성공한 삶을 살게 하고자 했던 의지로 가득했다. 이 두 가지가 한국을 지금의 선진국 대열로 들어서게 한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교육도 50년이 넘었다면 리모델링이 아니라 재건축을 해야 한다. 세계 100개 우수대학교에 한국은 3개 대학밖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고 그나마 예년에 비해 순위가 떨어지고 있다. 대학의 경쟁력, 초중고의 학제 개편, 인문계 위주의 진학풍토 개선, 전문계 방면에 우수자원 인력 충원이 절실하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어디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비전과 의지가 분명하고 명확하게 교육정책에 반영되어야 한다. 추상적인 미사여구로는 새시대 변화 파도에 적응할 수 없다. 새 정부가 들어섰어도 교육에 대한 비전과 열정이 보이지 않는다. 대선이 끝났다. 대선에서 교육에 대한 비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서울대 10개 만들기나 교권에 대한 법적 도움이 이 시대의 비전이 될 수는 없다. 인공지능이 불의 발견에 비견될 만큼 세상을 바꾸고 있다. 주변 강대국의 지도자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좌고우면하지 않고 달리고 있다. 경제는 내수와 무역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앞으로 수출에 의지하던 한국경제는 불안하기만 하다. 한국은 다시 변곡점에 다다르고 있다. 위기이며 기회이다. 우리는 기회를 위기로 만들고 있다. 허허벌판이었던 곳이 새도시에 대한 설계와 실천으로 멋지게 변한 곳이 있는가 하면 계획도 없이 사 두었던 공터들은 잡풀이 우거지고 흉물로 남아있다. 구체적 비전과 열정적 도전 없이 벽지만 교체하는 리모델링 수준의 교육정책이 계속된다면 이 위기의 시대에 한국은 황무지로 남을지 모른다. 제2의 교육 도약이 절실한 시기이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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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미래 비전 보이지 않는 교육정책, 재건축이 필요한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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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세계를 매료시킨 K-콘텐츠와 창의성 교육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한국인의 잠재력은 어디까지 일까? 최근 한국의 토종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Maybe Happy Ending)’이 미국 연극⋅뮤지컬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토니상에서 무려 6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여기엔 최고 영예인 작품상을 비롯해 극본상, 연출상, 작사⋅작곡상, 무대디자인상, 남우주연상 등을 석권한 것이다. 토니상은 오스카상(영화), 에미상(TV), 그래미상(음악)과 함께 미 대중문화계에서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상이다. 우리에게 이제는 그래미상만 남았다. 이 또한 현재까지의 BTS, 블랙핑크 등 빌보드 차트를 휩쓰는 K-팝 그룹의 활동으로 가능성이 높은 상태다. 머잖아 ‘그랜드 슬램’을 이룰 날이 멀지 않았음을 예측할 수 있다. 이렇게 한국인의 창의성 저력은 그저 어쩌다 우연히 주어지는 상황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지난달에도 국산 기술과 자본으로 제작된 에니메이션 ‘킹 오브 킹스’가 북미 박스오피스에서 기록적인 흥행 수익을 올렸다. 이미 오스카상 4관왕에 빛나는 ‘기생충’을 뛰어넘는 실적이다. 이런 놀라운 성과는 잠재력이 뛰어난 한국인의 두뇌에서 충분히 입증이 되고 있다. 한국인은 오래 전부터 국민 평균지능지수(IQ)가 전 세계의 상위권을 오르내리고 있다. 2024년 핀란드의 지능 테스트 기관 윅트콤(Wiqtcom)의 109개국 IQ 테스트 결과에서도 세계 평균 99.64를 훨씬 뛰어넘는 110.80으로 5위를 기록했다. 이번 토니상 수상은 2016년 대학로 소극장 무대에서 시작된 토종 뮤지컬이 세계 뮤지컬계의 심장인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예술성과 대중성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그 배경에는 21세기 후반 서울을 배격으로 인간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들의 사랑 이야기인 ‘어쩌면 해피엔딩’이 미국 평가단에서 “한국적인 기발함을 바탕으로 보편적 인간애를 녹여낸 수작”이란 호평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 기발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평범함(일반성)을 뛰어넘은 일종의 창의성으로 한국인의 잠재력이 창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1세기 디지털 대전환 시대를 맞이한 대한민국 교육은 2022 개정교육과정의 실현을 통해 방향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는 곧 상상력과 창의력 등 미래 역량의 계발에 의해 그 성패가 달려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이미 ‘모방’에 있어서는 넘사벽의 세계적인 우수성을 인정받았고 그 결과는 ‘한강의 기적’과 같은 산업화 시대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제는 그 모방에 또 다른 모방을 가미하는 창의력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 우리의 초중고 학교 교육은 ‘미래를 선도하는 창의적인 인재 육성’을 학교마다 슬로건으로 내건지 오래다. 이제 전국의 중학교 이상 학교 교육은 학생들의 ‘창업(스타트업) 교육’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각종 참신한 아이디어와 창의성을 이용한 제품 개발 및 연구에 어린 학생들의 관심과 열정이 더해지고 있다. 산업인력공단과 청소년 창의성 관련 재단들이 후원하고 교육부와 각 시도교육청이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 전국적으로는 우수한 수능 성적에도 불구하고 대학 진학을 접고 창업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고교생들이 등장하면서 창의성의 주역으로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제 이들에 대한 지원과 창의력 배양은 새로운 교육의 물길로 방향을 전환할 때이다. 우리 교육은 앞으로 초중고 학생들의 창의력을 더욱 돋우기 위해 각종 ‘창의성 대회’를 개최해 기발한 아이디어를 창출함은 물론 이를 적극적으로 키우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대학입학전형에도 창의성 관련 수시전형을 널리 확대하고 국가는 창의적인 기발한 아이디어를 계발한 청소년들에게는 적극 후원하는 제도를 공식화할 수 있기를 바란다. 현행 중고교의 창업 스쿨을 동아리나 방과후 활동 차원에서 정식 교과 과정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다. 대학은 창업과 관련해 보다 많은 관심과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이스라엘이나 중국 등 모범적인 청년 창업 국가들을 보고 듣고 배우는 연수를 확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창의성 계발은 이제 국가의 미래가 달린 교육의 목표이자 국가 비전으로 온 나라가 나서 힘을 모아 크게 성장시켜야 할 핵심이라 할 수 있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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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 산책] 이름을 초월한 꽃 - 털별꽃아재비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영원하지 않다” 이름은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구속하고 제한하는 역할을 한다.” 털별꽃아재비는 늦가을, 찬바람 속에서도 피어난다. 흔들리지만 꺾이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묵묵히 살아간다. 사람들은 ‘쓰레기풀’이라 부르지만, 이름이 본질을 결정할 수는 없다. 이름 없이도 꽃은 피고, 계절이 바뀌어도 다시 살아난다. 김춘수의 시 「꽃」처럼, 대부분 이름이 불리는 순간 의미가 정해진다. 그러나 털별꽃아재비는 말한다. “나는 어떤 이름에도 갇히지 않는다.” 자연은 원래 이름이 없다. 우리는 이름으로 존재를 가두지만, 삶은 이름을 넘어선 곳에서 더 자유롭다. 이름에 얽매이지 않고,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털별꽃아재비처럼, 우리도 경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이름이 중요하지 않은 순간,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나로 피어날 수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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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질문하기라는 시대적 과제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제주도에 있는 대정고등학교는 질문탐색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질문에 대한 답은 구하지 않는다. 질문을 만들고 하고 듣는 과정에서 사색과 평가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질문은 질높은 사고의 과정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질문하기는 중요한 삶의 기술로 떠올랐다. 질문을 한다는 것이 우선 중요하고 어떻게 질문을 하느냐가 중요해졌다. 서점에도 올바른 질문하기에 대한 책이 쏟아지고 있다. 질문 자체가 더 큰 깨달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질문은 상대방의 능력을 끌어내는 유용한 능력이다. 질문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직장에서도 상사가 애매한 지시를 하면 실무자는 엉뚱한 보고서를 올릴 수 있다. ‘예쁜 춘향이를 그리라’고 하면 자기가 생각하는 ‘예쁘다’는 기준에 따라 인물을 그리게 된다. ‘예쁘다’는 감정은 각자의 생각에 따라 크게 다르다. 사람마다 연상 내용은 당연히 다르다. 타인은 자신과 똑같은 개념으로 연상하지 않는다. 의사소통에서 문제상황은 상대도 나를 전적으로 이해했다고 하는 환상을 가질 때이다. 챗GPT에 큰 기대를 하지만 애매한 질문으로 기대한 답을 얻을 수 없다. 실망만 얻을 뿐이다. 종처럼 때리는 힘이 클수록 소리도 큰 법이다. 질문은 능동적 삶의 수단이다. ‘왜 사는가’라는 질문이 의미가 없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질문을 하지 않는 삶은 공허하기 쉽다. 태어났기에 산다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삶에 대한 능동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삶은 변화가 본질이고 주체성은 능동성을 본질로 한다. 산업화 시대에 ‘왜’를 따지는 것은 불손한 것이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어떻게 잘 주어진 업무를 수행할 것인가’하는 것만 생각하면 되었다. 변화의 세상에서 주체성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듣기, 읽기 중심에서 말하기, 쓰기의 자기주도와 능동성이 필요하다. 참여와 능동성은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고 비판적이고 건전한 의식을 만든다. 우리 교육이 바라는 미래의 모습은 지식을 받아먹는 콩나물키우기의 수동적 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먹이를 찾아 먹는 능동적 교육이 되어야 한다. 질문하기가 그래서 필요하다. 질문하는 학생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독서, 토론, 도전이라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질문이 없는 학교, 웃음이 없는 학교, 토의가 없는 학교, 지시와 통제만 있는 학교는 변화가 필요하다. 선풍기에서 에어컨으로 넘어가는 시대에 부채의 개선에 힘을 쏟는 교육은 시대착오적이다.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 교사는 이제 답을 말하는 존재에서 답을 찾게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교육은 내면의 잠재력을 끌어내어 자신의 길을 찾아 주는 일을 해야 한다. 질문 없이 맹목적으로 무조건 따르기만 하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나오는 동물들처럼 불행할 수 있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삶은 위험하고 허무하다. 질문이 없는 사회는 민주사회라고 할 수 없다. 답을 찾는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답은 컴퓨터가 찾아 줄 것이다. 삶에 대한 열정이 없으면 질문도 없다. 올바른 질문으로 주도성을 키워주는 교사가 많아지기를 바란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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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 산책] 땅 위의 작은 별 - 별꽃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작은 존재에도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으며, 그 소박한 존재는 우리 삶을 밝히는 지혜와 강인함을 보여준다.” 별꽃은 땅 위의 별이다. 하늘에서 빛나지 않아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존재를 드러낸다. 꽃잎은 다섯 개지만, 열 개처럼 보인다. 작지만, 스스로를 확장하며 살아간다. 별꽃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씨앗을 멀리 퍼뜨리며 자신만의 길을 찾는다. 바람에 실려 떠나고, 새로운 땅에서 뿌리를 내린다. 우리는 종종 화려함만을 위대함이라 믿는다. 크고 웅장한 것만이 가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별꽃은 말한다. “작고 소박한 것도 충분히 빛난다.” 진정한 가치는 크기가 아니라, 존재의 깊이에서 나온다. 화려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발길 아래에서도 별꽃은 조용히 빛을 낸다. 눈부신 조명이 없어도, 고개를 들어 바라볼 이가 없어도,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살아간다. 우리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눈에 띄지 않아도, 조용히 빛을 내며 살아가는 것. 별꽃이 빛나는 이유는 하늘에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만의 방식으로 빛날 수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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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정서와 교감이 가득한 학교를 위하여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벽제 승화원에 다녀왔다. 형수가 졸지에 돌아가셨다. 장례지도사가 손가락 길이의 쇠막대 3개를 들어 보였다. 디스크 수술을 하게 되면서 몸속에 넣었던 쇠였다. 허리가 안 좋은 줄만 알았지 쇠막대의 존재는 몰랐다. 수분을 모두 말려버린 유골 가루 봉투는 작았다. 한약 한 첩 크기보다 약간 큰 크기였다. 자그마한 향나무 밑에 묻었다. 형수는 치매가 온 어머니를 돌아가실 때까지 모셨었다. 요리 솜씨가 좋았던 형수는 우리 아들, 딸에게 돼지갈비와 곱창구이를 맛나게 손수 만들어 주셨었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교차했다. 주민등록 사진을 확대했다는 영정사진은 왠지 아직도 이승을 떠나지 않은 모습이었다. 한 줌의 재와 뼛가루로 남는 실상을 목도하면 인생이 참으로 무상하다는 것도 새삼 느끼게 된다. 형은 어깨를 들썩이며 미안하고 고맙다며 울었다. ‘있을 때 잘해’라는 유행가 가사는 가슴을 찌르는 말이다. 살아 있을 때는 생명체이기에 욕심이 있고 자존감이 있기에 부딪치고 고집을 세운다. 갈등과 오해와 자존감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지는 삶. 그러다가 느닷없이 모든 것이 정지되어 돌아보면 그 많은 오해와 고집이 다 부질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요즘 학교에 정서가 부족하다. 매를 들어도 서로에 대한 애정과 교감이 있던 때를 그리워하는 이유가 있다. 인권을 위한 촘촘한 규정이 오히려 인권을 침해하는 역설이 일어나고 있다. 매는 없어졌어도 그 자리에 악성 민원과 고소와 법과 처벌이 생겨났다. 학교를 졸업하면 스승도 제자도 없이 졸업장과 학교생활기록부만 남는다. 진정한 친구도 없고 추억도 없는 학교생활은 모든 물기(정서)가 사라진 유골 가루만 남게 되는 셈이다. 만남과 친함과 정서가 있는 학교와 교실이 정말 사람 사는 삶이다. 방식은 어떻게든 좋다. 관리자는 학교에 그런 정서적 공간과 정서적 시간과 정서교류의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학생이 학교를 졸업하며 남는 것이 졸업장만이 되면 안 된다. 얼마나 정서적인 교류를 친구와 교사와 나누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학교에 꽃을 심고 화단을 가꾸고 긴 벤치를 놓고 도서관을 카페처럼 꾸미고 곳곳에 도서대를 비치하고 대화하고 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웃음과 반가움과 즐거움이 가득한 학교가 좋은 학교다. 동창회에서 2학년 기말고사 수학 점수를 논하는 친구는 없다. 같이 먹었던 라면, 진로를 고민하던 대화, 함께 다녔던 추억, 교사의 진정한 말 한마디를 기억하고 그리워한다. 폭력, 폭언, 악담, 악행을 기억하기도 한다. 그것은 나무에 찍힌 도끼 자국이나 벽에 박힌 못처럼 삶에 오랜 기간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십수 년이 지나서 유명인이 학창시절에 친구를 괴롭혔다는 이유로 지탄을 받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학교폭력을 당한 친구의 고발 때문이다. 교도소처럼 형기를 마치는 학교가 아닌 즐거운 추억이 가득 한 학교. 훗날 동창회에서 아픈 기억보다 행복한 추억이 많은 학교를 만들어 주는 것을 위해 노력해 달라고 부탁드린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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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정서와 교감이 가득한 학교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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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생각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참교육이다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 중에는 시대를 앞서 갈만큼 뛰어난 능력을 소유한 인재들이 많았다. 그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해 온갖 역경과 고난의 시대를 살면서 후대에 전하는 이야기는 놀랍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사의 뒤편에서 당대에 충직하고 의로운 삶을 살다간 영웅들도 많다. 문헌에서 전하는 그들에 관한 서사(敍事)는 참신할 뿐만 아니라 더욱 진한 감동을 남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의병장이었던 강항(1567~1618)은 다섯 살 때 한시로 ‘각도만리심교각(脚到萬里心敎脚)’을 썼다고 한다. 이는 ‘다리는 만 리를 간다. 그렇게 시키는 것은 마음이다’는 뜻이다. 아이의 상상력과 관찰력이 놀라울 뿐이다. 강항이 누구인가? 그는 임진왜란 때 일본 억류 중 일본의 문인들과 교류하였고 귀국할 때 외교적으로 노력하여 일본에 끌려간 사람들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강항의 고향인 전남 영광군과 강항이 포로 생활을 했던 일본 오즈시는 2001년에 자매결연 맺고 교류하고 있다. 오즈시 중심가에 강항 현창비가 있는데 그 옆의 안내문에는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유학자 강항’이라고 적혀 있다.(이승하, 조선일보, 2025. 3.19. 참조) 선조와 광해군 때의 문신 박엽(1570~1623)도 어릴 때 쓴 한시에 ‘등입방중야출외(燈入房中夜出外)’가 전해 온다. 이는 ‘등잔불이 방에 들어오니 밤은 밖으로 나가는구나’ 라는 뜻이다. 아이가 이런 생각을 할 정도였다니 놀랍기만 하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한문 공부를 일찍 시작했기도 하겠지만 오늘날과는 달리 과거에는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펼칠 수 있게 자랐기 때문이 아닌지 짐작케 한다. 그렇다면 필자는 왜 이 두 인물을 이 시대에 소환하는가? 그것은 바로 어릴 때부터 ‘생각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하기 위함이다. 이를 일러 소위 ‘참교육’이라 말할 수 있다. 흔히들 교육은 ‘인간 내면에 잠재된 능력을 밖으로 끄집어내는(引出) 것’이라 정의한다. 20세기 대표적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인간은 누구나 천재”라 말했다. 결국 인간 개개인의 천재성을 어떻게 인출해 키울 것인가는 교육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교육은 지나친 경쟁을 유발함으로써 어려서부터 각자도생, 적자생존의 정글법칙만을 연마한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어려서부터 “다 너를 위한 거야”라고 당연시하며 아이들을 과도한 사교육으로 몰아간다. ‘4세 고시’ ‘7세 고시’ ‘초등 의대반’ 등은 최근에 등장한 대표적인 사례다. “실제로는 교육적 효과가 극소수 아이에게만 해당한다.”는 사교육 종사자들의 고백이 무색하게 초등 아이들이 5~7개의 학원을 돌며 거의 좀비처럼 일상을 살아가는 형국이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사교육비는 2024년 29조 2000억 원에 이르렀다. 혹자는 비공식적으로 40조에 달할 것이라 예측한다. 가히 사교육 공화국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부모의 등골을 휘게 하고 초저출산의 원인이 되는 사교육비도 그렇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어릴 적에 한창 또래들과 놀아야 할 아이들을 지나치게 혹사해 그들에게 생각하는 시간, 창의적인 삶을 박탈한다는 것이다. 이를 ‘자녀 사랑’이라 칭하며 자랑삼아 말하는 부모들은 지나치다 못해 아동학대의 범죄자들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두 인물처럼 어려서 매우 놀라운 사고력을 발휘할 여지를 허용하지 않고 오직 특정한 과목(영어, 수학, 논술 등)에 매달려 오히려 다양한 천재성을 사장(死藏)시키는 것이 이 땅의 오랜 고질병이라 할 것이다. “아이는 놀면서 배운다”고 한다. 그럼에도 지적인 능력계발에만 치우쳐 바람직한 민주시민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사회성, 인간관계의 미성숙은 어찌할 것인가? 노벨문학상 후보에 다섯 번이나 지명된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폴 부르제(Paul Bourget, 1852~1935)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에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아이들이 놀 여유와 시간도 없이 학원을 뺑뺑이 돌며 살아가는 오늘의 모습은 그야말로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인공지능(AI)과 로봇 등 디지털 문명이 지배하는 이 전환의 시대에 생각하는 능력을 키우는 교육이야말로 인간 존엄을 위한 참교육이라 할 것이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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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생각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참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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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미경의 클래식 스토리] 나무 그늘 아래에서...
- [교육연합신문=전미경 칼럼] 2025년 5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나라가 참 시끄럽다. 전 세계적으로 기후 위기와 더불어 경제 상황도 좋지 않아 사회 전반적으로 힘든 일이 많기도 하지만, 거기에 대한민국이 처한 정치적 상황은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내가 싫다고 무인도로 떠나버릴 수도 없다.(요즘은 자발적 은둔 형 외톨이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럴 때 우리는 쉼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몸도 휴식이 필요하지만, 정신적 쉼도 매우 중요하니깐. 가끔 이어폰을 끼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세상을 둘러볼 때 세상이 평소보다 아름답게 보이던 경험, 한 번쯤은 누구나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오늘은 내 마음에 휴식이 필요할 때 들으면 딱 좋은 ‘나무 그늘 아래에서’에 대해 얘기해 보려 한다. 사실 이 곡은 너무나 유명해서 누구나 들으면 ‘아~~ 어디서 들어 봤는데?’ 그럴 만큼 대중적인 멜로디가 된 것 같다. 보통 ‘라르고(Largo)’라는 제목으로 더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사실 라르고는 원래 제목은 아니고 ‘아주 느리게’를 의미하는 빠르기말이다. 이 곡의 빠르기가 ‘Largo’이기 때문에 아마도 라르고라는 제목으로 널리 연주되어 왔지만, 원래의 제목은 옴브라 마이 퓨(Ombra mai fu)라고 헨델의 오페라 <세르세(Serse)> 1막에 등장하는 아리아다. 오페라에서는 페르시아의 왕 세르세가 플라타너스 나무 그늘에 앉아 쉬며 삶의 피로와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고 진정한 평화와 위안을 찾는 모습을 노래한다. 이 곡은 플라타너스 나무 그늘에 대한 찬사와 그곳에서 느끼는 평화, 그리고 왕 자신이 그곳에서만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쉼에 대한 감사의 내용을 담고 있다. 오페라의 전체 줄거리와는 별개로 이 아리아는 특별한 사건이나 갈등 없이, 순수하게 자연 속에서의 평화와 위로를 노래하고 있기 때문인지 성악가들에 의해 불려질 뿐만 아니라 여러 악기에 의해서도 연주되어 듣는 이에게 평화와 맘의 위안을 주는 곡이다. 이 곡은 헨델의 다른 곡들과 성격이 많이 다르다. 보통 헨델의 곡들은 웅장하고 극적 긴장감이 있거나 경쾌하고 화려한데, 이 곡은 평화롭고 위로를 주는 분위기와 조용하고 내면적인 감정을 이끌어내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일상적이고 소박한 감정을 예술로 승화시킨 점이 독특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곡은 단순히 나무를 찬양하는 노래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본질적인 평화와 위로에 대한 갈망이 담겨 있는데, 우리가 감동을 받고 마음의 위로를 받는 것은 결코 대단한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마음에 위안과 위로를 주는 것은 어떤 화려함이나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살면서 종종 느낀다.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가다 보면 가끔은 내가 어디에 서있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 막연하고 지칠 때가 있지만, ‘옴브라 마이 퓨(Ombra mai fu)’ 노래 내용처럼 잠시 나무 그늘에서 숨을 고르며 나무가 주는 위안을 깊이 호흡해 보는 일이 우리에겐 종종 필요하지 않을까. 때로는 멈추는 것이 가장 큰 전진이다. 지금 이 순간, 마음이 쉬어갈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작은 휴식을 선물하자. 그 쉼이 내일의 당신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 첼리스트 전미경 ◇ 가천대 관현악과 졸업(첼로전공) ◇ 서울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부수석 역임 ◇ 금천 교향악단 부수석 역임 ◇ 의왕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 ◇ 강동 챔버 오케스트라 단원 ◇ 롯데백화점 문화센터 첼로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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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미경의 클래식 스토리] 나무 그늘 아래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