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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육우균의 周易산책] 소송은 폭풍우 치는 바다다(천수송)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대상전에 천수송괘를 보면 ‘하늘이 위에 있고 물이 그 아래에 있는 모습이다. 이런 형국에서 천과 수는 가는 방향이 엇갈릴 수밖에 없다. 필자는 소송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여 폭풍우 치는 바다’라고 했다. 이 은유에서 바다는 갈등이나 분쟁을 나타내고 파도는 법적 또는 개인 전투 중에 발생하는 다양한 도전과 장애물을 나타낸다. ‘폭풍우 치는 바다’가 예측할 수 없고 위험할 수 있는 것처럼 소송이나 다툼은 감정적으로 격렬하고 예측할 수 없으며 해결을 어렵게 만들 수 있는 예기치 않은 우여곡절이 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으면 기쁨은 잠시고, 모두가 경쟁자인 전쟁터로 가는 폭주 기관차를 탄다. 사회에서 사람들은 다투고 산다. 다툼은 대개 말(언어)에서 생긴다. 불리한 상황에서는 말을 아끼며 기다리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필자는 언어에 정령이 있다고 믿는다. 언어는 초자연적 본체로 물체에 붙어 그것을 보살피는 힘으로 다가온다. 또한 언어는 자연 그 자체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햇빛을 받으면 반짝거리고, 습한 곳에서는 썩기도 한다. 그것은 감정을 가지고 있어 때론 분노하고 때론 흐느낀다. 동학농민전쟁을 다룬 글을 읽다 보면 거기에 쓰인 활자들이 일제히 일어서는 소리를 듣게 된다. 언어를 사용할 때 정령성을 생각하지 않으면 값싼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언어가 당신의 본질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더러운 쓰레기더미 위에 자신을 내던지는 꼴이다. 보다 품위 있고 절제된 언어 사용을 바란다. 필자는 영혼과 육체과 정신이 삼위일체가 된 조화로운 삶을 살고 싶다. 그러나 이해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급변하는 사회에서 분쟁과 소송이 일상화되어 있다. 서로 마음을 터 놓고 말하면 쉽게 해결될 일도 어렵게 소송을 준비해서 그 승패로 울고 웃는 코미디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한 교실에 70여 명 정도가 있었다. 그것도 오전반, 오후반 하면서 학교에 갔다. 학생들이 많으니 제한된 공간 안에서 친구들끼리 싸움도 잦았다. 그래도 싸우고 나면 서로 사과하며 더 친해지기도 했다. 요즘에는 가벼운 싸움에도 송사를 벌인다. 학교폭력위원회에 넘겨 먼저 서로를 떼어 놓는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서로 얼굴도 못 보게 하면 내 잘못을 반성하기보다 상대방의 잘못이 더 크게 보인다. 그러면 화해는 어려워진다. 무조건 법대로 하는 것이 최선은 아니다. 법은 인생에서 최소한의 것이어야 한다. 요즘에는 법이 최고다. 모든 것을 법대로 처리한다. 따뜻한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가 아니다. 층간 소음 문제도 마찬가지다. 법대로 하기 전에 먼저 소통하면 의외로 일이 잘 풀리는 경우도 있다. 술 한잔하면서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는 아량이 없다. 사람이 많아지고 자본주의 사회가 되다 보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량은 멀리 떼어두고 법이라는 도구가 만능키가 되어 버렸다. 쟁송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다. 자신의 인생길은 물론이고 자신의 철학까지도 바뀌게 된다. 재판과 관련한 역사적 사건은 『소크라테스의 재판 (Scorates against Athens)』일 것이다. 기원전 399년에 열린 철학과 정치 사이의 비극적 대결이었던 ‘소크라테스의 재판’의 충격적 장면은 고희를 넘긴 노쇠한 철학자가 “국가보다 우선하는 신의 도덕적 법칙을 버리느니 차라리 국가에 불복하겠다”고 단호하게 선언함으로써 죽음을 맞는 장면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국민은 법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가, 법은 언제나 정의로운가, 또 양심에 어긋나는 법과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가, 정치적 의무의 근거는 무엇이며 어디까지 그 의무를 지켜야 하는가,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불러온 논란의 불씨는 아직도 꺼지지 않고 있다. 국가의 잘못된 체제와 사회 관습을 끊임없이 비판했던 소크라테스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철학적 사명과 신념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인류사에 ‘시민 불복종’의 철학적 근거를 마련하며 그 첫 씨앗을 뿌렸다. 17세기의 존 밀턴에서 19세기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20세기의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터 킹에 이르기까지 도덕적인 자연법에 거스르는 국가의 법에 맞서 대항한 이들은 또 다른 소크라테스의 모습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Der Prozess)과 한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심판』이란 작품은 왜곡된 법체계를 드러낸다. 먼저 『소송』(Der Prozess)을 보면 아무 이유도 모른 채 재판을 받게 된 남자 요제프 K는 갖은 노력을 했음에도 비참하게 처형당하게 된다. 이는 공정하지 못한 법 제도가 법조계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과 정해진 규칙이나 절차가 없는 법 제도의 상황에서 피고인들은 저마다 살길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법 제도가 공정하고 누구나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요제프 K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인생의 이유와 목적을 빨리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준다. 우리는 사실 자신이 태어난 이유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불시에 태어나 인생살이가 시작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명(無明)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마다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 왜?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현재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미래는 다가오지 않았다. 오직 현재만이 살아 있음으로 변화가 가능하니까. 다음으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심판』은 폐암 수술 중 사망한 판사 아나톨 피숑이 천국에 도착해 천상 법정에서 다음 여정을 위한 심판을 받는 내용이다. 피숑은 살아 생전에 잘못한 일이 없다고 항변하지만, 검사 베르트랑은 ‘천생연분을 몰라본 죄’, ‘재능을 낭비한 죄’ 등 생각지도 못한 죄를 들추어낸다. 작사모시(作事謀始)라고 했다. 일을 시작할 때는 반드시 그 시작을 잘 헤아려 싸움이나 쟁송이 일어나지 않도록 신중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일단 소송이 제기되면 골치가 아프고, 일반인들은 법 조항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더욱 고생한다. 카프카의 『소송』에서도 말하지 않았는가. 소송을 당하지 않으려면 인생의 이유와 목적을 빨리 알아야 한다고. 또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심판』에서는 한 술 더 떠 잘못이 없는데도 ‘천생연분을 몰라본 죄’, ‘재능을 낭비한 죄’ 등을 덧씌워 죄를 심판받게 하고 있잖은가. 우리가 인생을 진지하고 성실히 살아야 하는 이유다. 천수송괘의 효사(上9)에 보면 ‘송사를 치열하게 진행시켜 얻은 승리의 관복은 하루 아침이 끝나기도 전에 세 번이나 빼앗기고 말 것’이라 했다. 송사로 얻는 것은 나의 생애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뜻이다. 소송은 폭풍우 치는 바다다. 폭풍우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천수송괘는 아무쪼록 송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신중을 다해야 한다는 소중한 지혜를 주고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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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5
  • [전재학의 교육칼럼] 정직과 행복의 쌍방향 교육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정직! 이 말이 주는 감응은 무엇일까? ‘정직은 이긴다’ ‘정직하면 손해본다’… 각자에 따라서 서로 다른 느낌과 경험을 말할 것이다. 하지만 정직에 대해서는 현실에서의 부정적 반응보다는 교과서적인 교훈이 주는 긍정 효과가 더 크고 또한 교육적이다. 우리가 학창 시절에 흔히 접하던 영어속담 “정직은 최선의 방책이다(Honesty is the best policy)”가 있지 않은가. 또 과거에 우리 어른들은 자녀교육을 할 때마다 “입은 삐뚤어도 말은 똑바로 하라”고 정직을 중요한 덕목의 하나로 언급하지 않았든가. 그만큼 정직은 그 어느 가치보다도 먼저다. 그런데 작금의 우리 주변은 어떤가? 그야말로 많이 배운 사람치고 오히려 거짓말에 능수능란한 시대가 되었다. 사회 지도층, 특히 정치인들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거짓말을 밥 먹듯 한다. 그리곤 전혀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작금의 국민 대상 인터뷰, 청문회, 국정감사, 법정 증언에서 한 치의 거짓이 없음을 선서하면서도 위증으로 판명 난 경우가 적지 않음이 이를 증명한다. 문제는 요즘 이런 현상이 국민 DNA로 굳어지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최근에는 마치 ‘거짓말하는 것은 인간이고 용서하는 것은 신이다’라고 명제(命題)로 삼을 만큼 압도적이다. 한때 웃픈 사실이 있었다. 어느 설문조사에서 고등학생의 44%가 ‘10억 원이 생긴다면 1년간 감옥행도 불사하겠다’고 응답한 결과가 아연실색하게 했다. 또한 청렴도 검사에서도 ‘부자가 되는 것과 정직하게 사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질문에서 15~30세의 40.1%가 부자를 택했고 또 ‘거짓말하거나 부패한 사람과 그러지 않은 사람 중 인생에서 더 성공할 사람은?’이라는 질문에서는 51.9%가 전자를 꼽았다. 문제는 학년이 높을수록 정직 지수가 낮아지고 부자를 선호하며 거짓말하거나 부패한 사람이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이는 그동안 우리 교육이 “공부만 잘하면 만사 오케이”라고 말하면서 ‘무조건 유능하라’고 가르친 까닭이다. 그런 결과가 성인이 되어서 그대로 드러나는 현대판 인과응보라 할 것이다. 옛이야기는 거의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이로써 ‘착하고 정직한 사람이 잘 먹고 잘 산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요즘은 ‘정직한 사람은 어리석고, 법을 지키며 착하게 살면 손해 본다’, 또는 ‘정직해서는 험한 세상을 살 수 없다’는 정직 불감증이 널리 확산되었다. 따라서 올바른 인성의 방향을 잃은 우리 사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선 정직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그리하여 정직이 바른 인간, 행복한 인간의 버팀목이라는 믿음을 심어주어야 한다. 이러한 인성교육은 빠를수록 좋다. 왜냐면 정직은 인성교육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부문에서 삶의 행복을 화두로 삼고 있다. ‘소확행’의 추구도 그 한 사례이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정직과 행복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신사의 나라 영국에서도 “평생을 행복하게 지내려면 정직해라”라는 격언이 있다. 이는 정직은 영원한 가치이고 우리가 이 가치를 추구할 때 행복해지고 잘 살 수 있음을 말한다. 행복은 그저 추구한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정직은 신용사회의 밑천이다. 그래서 신용은 자본이라고 하지 않는가. 문제는 신용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직함이 축적되고 인정받을 때만이 가능하다. 바로 이러한 정직의 실천은 어려서부터 인성교육에 의해서 습관처럼 형성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직 교육을 해야 할까? 진리는 단순하듯이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한다. 바로 어른, 특히 지도층의 솔선수범이다. 아이들은 어른의 거울이고 자화상이다. 청소년 문제의 근원은 대부분 어른이다. 어찌 보면 10억 원이 생긴다면 1년간 감옥에 가겠다는 생각은 고교생이 아닌 바로 우리 어른들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미국의 작가 잭슨 브라운은 말했다. “잘 사는 삶이란 자식들이 정직, 공정, 배려를 생각할 때 당신을 떠올리는 삶”이라고 했다. 부모, 교사, 어른부터 정직하면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더욱 행복한 사회를 구현하는 지름길이고 또 그렇게 정직과 행복의 쌍방향 교육만이 그 어느 것보다 우선이고 최선이라 믿는다. ▣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現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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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0
  • [김홍제의 목요칼럼] 교사와 술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로마시대 귀족 자녀를 가르치는 선생들은 노예였다고 한다. 로마에게 땅과 일터를 침탈당한 지식인들은 로마로 끌려와 로마 귀족들 자녀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다. 선생들이 사는 지역 길옆에는 선술집들이 즐비했다고 한다. 노예 신분의 선생이 하는 훈육을 귀족 자녀들이 고분고분 잘 들었을 리 없다. 얼마나 속이 타들어가는 심정이었겠는가. 하지만 어찌 하겠는가. 술로 달랠 수밖에. 로마 귀족 아이에게 힘없는 노예 선생이 철학과 수학, 역사를 가르치는 일은 노동보다 힘들었으리라. 지금도 남의 귀한 자녀를 가르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학부모 중에는 학교나 교사를 자기 자녀만을 위한 편의점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다. 이래저래 선생들은 술과 인연이 많다. 속상한 일이 하나둘이 아니다. 성공한 친구, 다양한 방법으로 속을 썩이는 학생들, 자존감을 꺾는 관리자와 학부모, 많은 업무와 선생다움을 지키는 일이 모두가 술을 부르는 것들이다. 양주를 먹는 교사는 상상이 안 된다. 초임시절에 선배교사들은 후배를 시장골목 술집에 데리고 다녔다. 순대나 허파를 안주로 하는 막걸리주점에서 술만 먹는 것이 아니라 힘든 학생지도나 수업에 대해서 자기 경험을 살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초임교사들은 시루의 콩나물처럼 그런 이야기를 듣고 조금씩 성장했다. 술을 먹으며 가슴 속 힘겨움을 삭였고 동료들과 따스한 위로와 격려 담긴 정담을 나누었다. 선후배가 학교에 근무하면서 겪는 어려움만이 아닌 성장과정과 가족 간 어려움까지 토로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던 시대가 있었다. 학교는 상품보관 창고가 아닌 사람을 키우는 곳이다. 학생에 대한 애정과 고민이 없다면 견디기 힘든 곳이다. 정부와 기관에서 교권 붕괴에 대한 방안으로 교사면담예약제, 학생생활기록부 기재, 학생인권조례 개정, 소송비 지원 등 다양한 안을 만들고 있다. 양측 법적 대립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칼로 덤비는 사람을 총으로 제압하면 상대는 총보다 더 강한 무기를 가지고 나올 것이 명약관화하다. 학교공동체가 서로 소통하고 학교 스스로 자치와 치유능력을 가져야 한다. 선후배 교사들 사이에 교류 통로가 보이지 않는다. 메마른 교사관계는 교사와 학생 사이에도 전이되고 학부모와의 사이에도 전이된다. 메마른 관계영역이 사막처럼 넓어진다. 인간관계가 없는 사막에 모래바람이 인다. 1박 2일 연찬회도 없어지고 친목회마저 없애는 학교가 늘어난다. 자가용이 많아지면서 술자리가 없어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정겨움과 소통도 같이 없어져서 안타깝다. 술이 아니더라도 서로 소통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선후배가 막걸리를 나누며 학교와 가정에서 겪은 힘든 속내를 허심탄회하게 털어 놓던 시절이 그립다. 술보다도 소통하던 마음이 그립다. 지난 한 달 동안 선배, 후배, 동료, 자녀, 학생에게 식사나 차를 함께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는가.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학생교육문화원 예술진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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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0
  • [육우균의 周易산책] 기다림은 비가 되려는 구름이다(수천수)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대상전에 수천수괘를 보면 ‘구름이 하늘 위에 있는 모습’이다.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었다. 곧 비가 온다.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인생이란 적절한 때의 기다림이다. 이럴 때 ‘군자는 사태를 밀어붙이지 않고 음식으로써 즐거운 연회를 벌이면서 기다리면 된다.’고 되어 있다. 진인사대천명이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삶에서 기다림은 피할 수 없는 감정이다. 예를 들어, 미루기 힘든 일이나 이루고 싶은 목표를 위해 오랜 기간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불안과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기다림의 괘는 이러한 기다림 속에서도 인간이 어떻게 기다림을 극복하고 즐거움을 찾아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즉 이 괘에서는 인간이 기다림을 견디기 위해 다양한 방식을 시도한다. 모임을 즐기고, 관계를 키우며, 스스로 위안을 찾고, 기다림을 이기고 행복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인간은 기다림 속에서도 자신을 위로하며 기다림을 극복하고 즐거움을 찾아낼 수 있다. 기다림에 수반되는 기대와 간절함, 그리고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한 인내와 끈기의 필요성을 동반한다. 기다림을 주제로 한 시는 김영랑이 1934년에 발표한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다. 모란의 개화와 낙화를 제재로 하여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모란이 피는 것을 간절히 기다린다. 이 작품에서 모란은 화자가 간절히 바라는 대상이나, 이상을 상징한다. 특히 마지막 구절인 ‘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을 보면 왜 찬란하고 슬픈 봄이라고 했을까. 봄에 모란이 피니까 찬란하고, 또 봄에 모란은 지니까 슬픈거다. 모란이 피니까 질 수밖에 없다. 역설적인 표현이다. 1년은 365일, 모란이 피는 기간은 5일, 그러니까 ‘360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라고 한 것이다. 기다림은 꽃이 피는 때까지다. 꽃이 피면 이내 진다. 찰나다. 순간이다. 화무십일홍이라 하지 않던가. 따라서 꽃이 피는 봄을 기다림은 꽃이 피기 시작해서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때까지만 기다림이지, 막상 꽃이 폈을 때는 기다림은 저만치 가버리고 만다. 그래서 슬프다. 그리고 찬란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은 모두 찰나에 있다. “송알송알 싸리잎에 은구슬, 조롱조롱 거미줄에 옥구슬”하는 「구슬비」라는 동요의 알토란 같은 싯구가 생각난다. 빗방울이 어느새 은구슬과 옥구슬이 되었다가 다시 빗방울로 사라진다. 그 찰나의 순간을 본 사람만이 가장 가치 있는 은구슬, 옥구슬을 마음속 깊이 가지는 것이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은 고기가 잡히지 않는 84일 동안 기다렸다. 그리고 85일째 되던 날, 바다로 나갔다. 바다에서 이틀을 보내고 노인은 낚시에 걸린 청새치가 길이 4.5m, 몸무게 900kg로 굉장히 강한 상대라는 것을 알았다. 그에 비해 노인은 자신의 힘을 장기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이틀 간의 사투에서 겨우 붙잡는다. 경망스럽게 조급히 서두르면 적과의 싸움에서 지게 된다. 장기계획을 세우고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노인이 청새치를 잡은 후가 더 큰 시련이었다. 바로 상어 떼의 습격이다. 우리 인생도 자기가 목표로 한 일을 어느 정도 성과를 냈을 때 더 큰 시련이 닥쳐온다. 필자도 동기들보다 먼저 교감이 되려고 아등바등하다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 후 가나다라, 아야어여부터 다시 배우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틈나는 대로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내뱉었다. 자신감은 제로 상태였다. 만나는 사람들이 무서웠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일도 자신감이 떨어져 망설였다. 그러다가 겨우 횡단보도를 건넌 후에 가로수를 붙들고 소리죽여 하염없이 울었다. ‘이러면 안 된다. 이렇게 살아선 안 된다.’ 하며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다. 마침내 복직해서 학생들을 가르쳐 보니 너무 힘들었다. 한 시간 수업하면 그날은 완전 녹다운(knockdown) 상태가 되었다. 학생들과 동료들에게 폐만 끼치는 것 같아 퇴직을 결심했다. 그리고 신문사 문을 두드렸다. 파출소 피하려다 경찰서 만난다고, 신문사는 학교보다 더 힘들었다. 우선 평상시 쓰는 말부터 달랐다. 무척 거칠었다. 적응하기 정말 힘들었다. 이를 악물고 벼텼다. 성실하게 적응해 나갔다. 수습기자, 교육전문기자, 교육국장을 거쳐 현재 주필이 되었다. 노인은 상어의 공격에 도망치지 않고 상어를 물리치기 위해 칼을 뽑아 든다. 시련을 회피하지 않고 용기있게 맞서는 노인이 아름답다. 노인은 여러 차례 상어의 공격에 맞서 싸운 후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다. 비록 상어에게 모든 고기는 빼앗겼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치열하게 싸운 후 맛보는 진정한 승리감, 성취감이었다. 필자를 버틸 수 있게 해 준 것은 독서와 글쓰기였다. 읽기 위한 독서가 아니라 쓰기 위한 독서를 했다. 쓰기 위한 독서를 하면 독서의 방법이 달라진다. 독자들도 한번 해보시라. 단어를 유심히 보게 되고, 동사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 강, 나무, 사랑 등의 명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흐른다, 자란다, 사랑한다의 동사가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삶은 명사가 아니라 오직 동사로 이루어진다. 실천의 중요성을 인정하게 된다. 서면 그저 땅 위일 뿐이나 걸으면 길이 된다. 삶의 시련을 겪어보면 오직 동사만이 진실이라는 지혜를 터득하게 된다.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어. 죽을 수는 있지만 패배할 순 없지”, “희망을 버리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그것은 죄와 같아”, “고기가 고기로 태어났듯이, 나는 어부가 되기 위해 태어났어” 주옥같은 명대사들이 일제히 일어서는 소리를 듣게 된다. 생텍쥐베리의 작품 『어린 왕자』에서는 기다림의 설렘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어린 왕자는 이튿날 다시 왔다. 그러자 여우가 이렇게 말했다.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벌써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지나갈수록 나는 점점 더 행복을 느낄 거야. 4시가 되면 벌써 안절부절못하고 걱정이 되고 말 거야. 행복이 얼마나 값있는 것인지를 알아낼 거란 말이야.”」 『주역』에서는 기다림의 해결책을 ‘음식연락(飮食宴樂)’하라고 했다. 음식으로 즐거운 연회를 벌이라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기다림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불안하게, 조급하게 기다리지 말고, 긍정적으로, 마음 편하게, 음식을 즐기면서 기다리라는 것이다. 기다림의 향연은 우리를 기쁨과 슬픔으로 이끌 수도 있고, 이상적인 존재를 갈망하면서도 우리 욕망의 덧없는 본성과 마주하게 한다. 삶의 본질은 기다림의 수수께끼에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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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07
  • [김홍제의 목요칼럼] 다육이 같은 사람들과 사는 삶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탱글탱글하고 귀여운 모습이 많은 다육식물은 보통 ‘다육이’로 부른다. 다육식물은 건조한 기후를 이겨내기 위하여 잎이나 줄기 혹은 뿌리에 물을 저장하는 식물을 말한다. 선인장, 알로에, 돌나물과 등의 식물군이 다육식물에 포함된다. 주된 산지는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 및 그 주변 섬이라고 한다. 코틸레돈, 에케베리아, 에오니움, 크라슐라 등 이름은 발음하기 쉽지 않다. 다육이는 햇빛이 잘 드는 공간에서 예쁘게 자란다. 살고 있는 아파트 베란다에 다육이가 많다. 아내가 좋아해서 키우고 있다. 나는 다육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탱탱하고 둥글둥글하게 나온 배를 보면 덩달아 통통한 이파리를 가진 다육이가 싫어진다. 다육이는 무엇보다 꽃도 거의 안 보이고 화려하지도 않아 볼품이 없다. 크기도 조그마하고 화려하지도 않다. 젊은 시절에는 화려한 꽃들이 좋았다. 계절의 여왕 장미, 향기의 여왕 재스민, 가을꽃 국화, 첫사랑의 빛 연산홍, 봄날의 목련과 벚꽃이 좋았다. 목련은 얼마나 그 자태가 우아한가. 벚꽃이 눈부시게 핀 봄날은 얼마나 세상이 아름다웠던가. 서리를 맞고서도 노란 꽃잎을 단 국화는 얼마나 점잖고 품위가 있는가. 영산홍의 그 처연한 꽃색은 얼마나 가슴을 흔들어 놓았던가. 라일락이 향기를 바람에 날리고 보랏빛 꽃이 햇살을 담뿍 받아 빛날 때 얼마나 매혹적이었던가. 예쁜 꽃들은 살뜰한 보살핌이 필요하다. 오죽하면 어린 왕자가 장미의 까다로운 요구에 지쳐서 자기가 살아오던 별을 떠났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관심의 중심에 서는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 젊은 사람들도 화려한 삶을 원한다. 수입차와 명품가방, 백화점VIP고객을 꿈꾼다. 화려함은 오래 아름다움이 지속되지 않는다. 한 계절이 지나가면 화려한 꽃들은 사라진다. 다육이는 평안하다. 민감하지 않다. 사계절 그 자리를 지킨다. 아내의 모습이다. 화려하지 않지만 조용하게 중심을 지키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나를 지탱하는 것은 화려한 것이 아니었다. 교사자격증이 나를 먹여 살려주었고 아내가 나를 키웠다. 내 주변에는 다육이 같은 사람들이 많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크게 나에게 요구하는 것도 없다. 그런 사람들은 언제 만나도 편안하다. 조용하고 소박하고 진실한 사람들은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다. 다육이 같은 삶은 반짝이지 않지만 든든하다. 통통한 촉감이 정스럽다. 나이가 들면 장미 같은 화려함이나 재스민의 매혹적인 향기는 부담스럽다. 가시에 찔리고 라일락과 목련을 사랑하다 이별을 하고 나서 가만히 돌아 서면 다육이 같은 친구와 가족이 나를 받아준다. 자신 주장을 강하게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런 사람들에게 믿음이 가지 않는다. 힘든 날에 떠올리기만 해도 편안하고 위로가 되는 사람이 좋다. 담담하고 건강하고 믿음직하고 진솔한 다육이 같은 사람들에게 더 믿음이 간다. 오늘은 통통한 다육이도 사랑스럽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학생교육문화원 예술진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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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03
  • [육우균의 周易산책] 교육은 옹달샘이다(산수몽)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교육은 옹달샘이다. 대상전에 산수몽괘를 보면 ‘위에 산이 있고 밑에 물이 있는 모습’이고, 이때의 물은 청정한 옹달샘을 가리킨다. ‘몽(蒙)’은 ‘어두움을 연다’는 의미다. 우리가 흔히 ‘계몽’이라고 할 때 많이 쓴다. ‘교육은 옹달샘이다’라는 은유적 표현은 교육의 의미와 가치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교육은 피교육자가 가진 작은 잠재력(옹달샘, 씨앗)을 키워 어리석음을 걷어내는 일이다. 그래서 씨앗을 커다란 나무로 만드는 일, 옹달샘이 바다로 가는 일이 바로 교육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Education’이라는 단어를 영어 어원에서 분해하면 ‘E-’는 ‘out’을 의미하고 ‘-duce + -ate’는 ‘to lead’를 의미하므로 ‘to lead out’이라는 의미를 생성한다. 즉, 인간 안에 존재하는 잠재력, 본성 등을 밖으로 끌어내는 것을 뜻한다. 소파 방정환도 교육을 ’어린이로 하여금 순결한 본성을 개성 있게 있는 그대로 발현하는 것‘이라 정의했다. 즉 교육받을 자가 가지고 있는 본성과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하게끔 가르쳐서 기르는 일을 말한다. 산수몽괘에서는 교육을 5단계로 말하고 있다. 발몽, 포몽, 곤몽, 동몽, 격몽이 그것이다. 발몽(發蒙)은 어린 아이들이 지식을 습득하고 배우는 과정을 말한다. 발몽은 인간이 태어나 성장하면서 지식과 경험을 쌓는 과정을 의미하며, 인간의 발달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때 부모는 무한한 사랑을 주어야 한다. 이때 어른들은 올바른 교육관이 필요하다. 조기교육, 선행학습을 지양해야 한다. 사교육에 기웃거릴 시간에 백과사전을 사서 자녀와 함께 소통하는 것이 훨씬 낫다. 그 외에 고전 문학작품 등을 덧보태면 정서 함양에 더할 나위 없다. 작은 일에도 칭찬하고 박수를 쳐 주어야 한다. 어린이는 이때 부모로부터 배운 각 경험을 각인하게 되고 이는 평생를 좌우한다. 포몽(破蒙)은 발몽을 극복하는 과정으로, 더욱 깊은 이해와 지식을 얻기 위해 예전에 받아들인 지식을 깨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말한다. 집 안에서 집 밖으로 나가 지식을 배운다. 즉 부모로부터 부모 이외의 사람들(선생님)들로 대체된다. 곤몽(困蒙)은 포몽을 극복한 후 발생하는 고민과 어려움을 의미한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면서 불안하고 혼란스러워지는 상황에서 마주하는 고민과 어려움을 말한다. 이때는 교육의 사춘기다. 머릿속에서 질풍노도(Sturm und Drang)의 시기를 겪게 된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면서 불안하고 혼란스러워지는 때이다. 이때 교육자의 책임이 크다. 올바른 사고를 갖도록 지도해야 한다. ‘공부는 왜 하는가?’하는 질문부터 홍익 인간의 뜻을 인식시켜야 한다. 더불어 ‘대동 사회로 가는 길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하는 인식을 통해 거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을 주어야 한다. 동몽(童蒙)은 곤몽을 극복한 후, 이전에 받아들인 지식과 새로운 지식을 융합하고 더 깊은 이해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동몽선습』도 이런 개념을 구체화한 책이다. 이때의 교육은 융합과 창의다. 프란츠 카프카도 말했다. ‘독서란 고정관념으로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고. 자신이 그동안 배운 지식들을 융합하고 나름 창의적인 결과를 도출해내는 지식이어야 한다. 그 지식을 홍익인간, 대동 사회에 도움이 되도록 손질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고정관념으로 세상을 보는 확증 편향적인 관점을 바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팩트의 힘이다. 세상을 보이는 대로,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자신이 봐야하는 대로 세상을 보면 안 된다. 그러면 매사에 짜증이 나고 될 일도 안 된다. 마지막으로, 격몽(擊蒙)은 이전의 지식과 인식을 깨고 새로운 지식과 인식을 형성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격몽은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는 과정으로, 기존의 생각과 인식을 깨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패러다임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말한다. 강 상류의 돌은 날카롭다. 하류의 돌은 둥글둥글하다. 조금 아는 자는 오만과 편견에 빠진다. 그것이 날카로운 돌이 되어 남을 해친다. 많이 아는 자는 겸손하다. 둥근 돌이다. 남과 어울리며 소통한다. 종이와 인쇄 기술의 발명으로 교육에 혁명이 일어났다. 지식을 기록하고 전파하는 능력은 인류 문명을 발전시켰다. 현대에는 디지털 기술이 더 나아가 전자책을 가져와 종이와 인쇄를 대체했다. 서양의 구텐베르크는 포도주 짜는 압축기를 변형하여 인쇄 기계를 만들어 성서를 대량으로 인쇄하여 인류의 문자 생활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다. 그보다 78년 앞서 우리나라의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짧게 말해 ‘직지’가 나왔다. 팩션 소설을 쓰는 김진명의 『직지, 아모르 마네트』는 역사의 사라진 빈틈을 메우는 김진명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거기에 직지와 서양 인쇄술의 관계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참으로 위대하다. 세종이 세계가 인정한 과학적인 글자인 한글을 만들었고, 고려말에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었으며, 지금은 반도체에 글자를 담았다. 우리 민족이 세계 문화를 그것도 지식 문명을 주도할 수 있게 된 바탕은 이런 밈(meme, 문화적 유전자)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한국 교육의 현안을 다루면서 조정래의 소설 『풀꽃도 꽃이다』에서 울림을 찾았다. 조정래는 현 교육제도를 일관되게 비판한다. 그는 40조 원 규모 사교육 시장의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믿으며 교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암울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필자는 조정래의 생각에 동의한다. 한국 교육은 조기 교육과 선행학습으로 인해 방해를 받고 있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수업에 문제 제시가 포함되어 학생들이 오해를 이해하고 토론에 참여하며 새로운 원칙을 탐구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학생들은 과외를 통해 미리 배운 지식을 가지고 학교에 오는 경우가 많아 실제 학습 과정에 대한 흥미와 재미가 떨어진다. 결과적으로 호기심이 줄어들고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악순환이 생긴다. 학생들은 개인적이고 자발적인 꿈을 꾸는 게 아니라 전체적이고 관습적인 꿈을 꾸게 된다. 조정래는 이 소설에서 “암기식, 찍기식 교육을 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밖에 없습니다. 모든 선진국은 토론식, 창의 교육, 논술 교육을 하고 있어요. 발전된 인간상을, 함께 행복하자는 상을 만드는데 우리는 이러지 못합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교육은 잠재력을 발산시키는 것이다. 마치 옹달샘이 냇물로, 강으로, 바다로 흘러가도록 그 환경(잠재력)을 잘 가꾸어 주어야 한다. 교육자는 잠재성의 계발에, 피교육자는 자발성을 전제로 교육에 임해야 한다. ‘줄탁동시(啐啄同時)’해야 한다는 것이다. ‘줄탁(啐啄)’은 의성어로 어미 닭과 알 속에 있는 병아리가 서로 알껍질을 툭툭 쪼는 소리를 나타낸 것이고, ‘동시(同時)’는 어미 닭과 병아리가 알껍질을 동시에 깨뜨린다는 뜻으로 교육자와 피교육자가 동시에 교육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서로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다. 아이를 우물가로 데리고 갈 수는 있지만 그 물을 먹느냐 안 먹느냐는 그 아이 마음이다. 목이 마르면 쉼 없이 물을 벌컥벌컥 마실 것이다.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지식을 섭취할 것이다. 이처럼 교육은 가르치는 사람의 실력도 문제겠지만 무엇보다 피교육자의 자발적인 마음이 더 중요하다. 교육을 받으려는 간절한 마음이 공부를 잘 할 수 있게 만드는 에너지다. 거기다 그것을 본 사람들의 ‘칭찬’을 조금 더하면 바랄 것이 없다. 제대로 된 교육을 위해서는 ‘과행육덕(果行育德)’을 실천해야 한다. 옹달샘의 물이 바다로 흘러가기 위해서는 많은 모험이 필요하다. 교육은 자발성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과단성 있게 행동하고, 그러한 행동을 뒷받침할 수 있는 덕을 길러야 한다. 교육은 옹달샘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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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31
  • [전재학의 교육칼럼] 사람의 향기는 교육을 추동(推動)하는 위대한 힘이다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현대인에게 고전(古典)은 특별한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교훈을 전달한다. 주지하는 바처럼 공자는 14년 동안 천하주유를 하면서 “사람을 알아보고 멀리서 찾아오게 하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라고 설파했다. 이는 사람의 향기를 중요시한 ‘인의 정치’를 대변하는 철학이기도 하다. 또 세간에서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말에 “주향백리(酒香百里), 화향천리(花香千里), 인향만리(人香萬里) :술 향기는 백 리를 가고, 꽃향기는 천 리를 가며, 사람 향기는 만 리를 간다”가 있다. 종교적으로는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도 자주 사용한다. 이 모두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인간의 향기가 멀리까지 퍼지고 그로써 사람이 사람을 끌어당긴다는 것이다. 교육 또한 다르지 않다. 사교육 공화국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는 대한민국에는 ‘일타강사’라는 특별한 존재가 있다. 그중에는 소득세만 연 130억 원을 냈다는 강사도 있다. 잘 가르친다는 소문에 전국 곳곳에서 수험생이 찾는 것은 본질은 다소 다르지만 역시 사람의 향기를 연상케 한다. 또 청(소)년들 사이에는 흔히 어느 대학을 지칭할 때 그 학교의 저명한 교수를 언급한다. 강의 잘하고 연구 역량이 뛰어난 매력적인 교수는 학생들의 존경과 끌림의 대상이다. 우리의 중·고등학교도 마찬가지다. 수업 잘하고 인간적으로 좋은 교사로 알려진 사람들이 있다. 학생들이 방과후 학교(보충학습) 신청에 몰린다. 이제 2025년, 학생의 교과 선택에 의한 고교학점제가 전면 실행되면 좋은 교사는 집중 선택의 대상이 될 것이다. 최근에도 코로나19로 온라인 수업의 정착 단계에서 수업 잘하는 교사는 역시 달랐다. 남보다 일찍 실시간 쌍방향 수업을 진행하며 철저한 준비와 전문적 역량, 학생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그의 향기는 학교의 울타리를 훌쩍 넘기도 했다. 사람이 사람과 문화를 그리워하고 찾는 것은 인류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특정 지역을 남다르게 발전시킨 역사를 보여주지 않았는가. 유대인의 하브루타 교육을 보자. 그들의 우수성은 바로 함께 모여 책을 읽고 토론하는 공부에서 시작된다. 집단지성은 그렇게 생성하여 민족의 우수성으로 정착되었다. 배움을 위해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고 발표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상호 간의 향기에서 출발한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간에는 어떠한 역경도 극복할 수 있는 저력이 생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뉴 노멀(New Normal)의 가치가 새롭게 작동해야 한다. 그동안 인간 부재가 남긴 감염병의 교훈을 바탕으로 인간은 저마다의 향기를 맘껏 내뿜는 고유한 매력을 간직하며 성장할 것이다. 그 중심에 교사가 존재함은 당연하고 마땅하다. 춘추전국시대, 중국에는 수많은 백가쟁명의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각자의 매력을 머금고 공동체 문화의 중심에 섰다. 공자, 맹자, 순자를 중심으로 하는 인의예지의 유가, 묵자를 중심으로 하는 겸애사상의 묵가, 한비자를 중심으로 법치 국가를 떠받든 법가, 무위를 내세운 이른바 노·장 사상, 그리고 18세기 조선 시대의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실학사상은 상호 간의 인간의 향기를 머금고 탄생한 대표적인 철학이자 생활 공동체 문화였다. 그들이 인류의 평화와 정의, 인류애와 물질적 번영을 추구하는 세상을 꿈꿈으로써 특유의 인간 향기를 확산시킨 것이다. <논어> ‘학이편’ 1장에 나오는 “有朋自遠方來(유붕자원방래), 不亦樂乎(불역낙호)?”는 일반적으로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또는 “뜻을 같이 하는 자가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어느 것으로도 충분한 매력이 있다. 공자의 위대함은 혼자 배우기를 즐겨 고집한 것이 아니라 함께 모여, 즉 ‘집단으로 배움을 실천’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공자학단’을 중심으로 배움이 이루어진 것이다. 주목할 것은 신분, 출신 지역, 직업 등으로 편을 가르거나 차별하지 않고 가르치는 유교무류(有敎無類)의 정신이다. 스승의 향기를 중심으로 모여들어 배우고 또 가르치면서 큰 즐거움, 즉 대자적 기쁨을 향유하는 교육이 2천 년이 지난 후대까지 살아있음을 역사는 증거하고 있다. 결국 교육은 사람의 향기가 추동하는 위대한 힘이라 할 것이다. ▣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現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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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8
  • [김홍제의 목요칼럼] 에어포켓도 없이 질식하는 교사, 공적 소통 네트워크 필요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마음이 장맛비에 젖은 이불처럼 무겁고 어수선하다. 청주 오송 지하차도에서 사망자가 14명이나 나왔다. 서울에서 작년에 교직을 시작한 초등 신규교사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자연과 인재가 빚어내는 비참한 실상이 우리 삶과 가까워 보였다. 평소 온순한 교사들이 서울 보신각 앞에서 집회를 했다. 그들은 분노했다. 교사로서 겪는 힘겨움과 두려움을 말했다. 교육부와 국회는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교권과 학생인권은 제로섬 관계가 아니다. 교육문제 진단오류는 심각하게 문제를 키운다. 왼쪽 다리의 문제를 오른쪽 다리로 진단하고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는 오류는 회복 불가능한 장애를 가져온다. 물이 빠지고 난 청주시 오송읍 궁평지하차도 천정에 걸려 있는 신발 한 짝을 보았다. 물이 차올라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절망감은 거대한 공포였을 것이다. 무릎과 허리와 어깨와 머리까지 물이 올라와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극단적 절망을 상상해 보라. 학교에 와서 극단적 선택을 한 신규교사 앞에도 무서운 절망이 있었을 것이다. 힘겨움이 무릎과 허리와 어깨와 머리까지 올라와도 손 내밀 곳을 찾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하다. 오송 지하차도 사고는 국과수 직원과 경찰과 검찰이 철저한 조사를 하고 관련자를 징계하고 대책을 논의한다고 한다. 교사 죽음은 어떻게 진행될까. 진단은 적절한가. 학부모와 학생을 교사와 대립각으로 하는 법을 만들어서 이 비극적 상황을 끝낼 수 있을까. 학교에서 담임과 나이스, 학교폭력, 학년 부장 등 어려운 일들이 마음 착한 사람, 저경력자와 기간제 교사 같은 약자에게 주어지고 있다. 어려운 일은 순환보직을 해야 한다. 너무도 많은 일을 학교가 감당하고 있다. 출산과 육아를 해야 하는 여교사가 많은 학교는 더 힘겹다. 정신과 치료를 받는 교사들이 생각보다 많다. 학부모와 학생들이 아동학대방지법을 악용하는 사례도 증가했다. 교직단체에서는 ‘교사들이 겪는 감정적, 정서적 스트레스는 전쟁 시 병동 간호사에 비유될 정도’라고까지 했다. 교사가 감당해야 하는 일은 많고 법적 보호 수단은 부족하다. 학부모 악성 민원과 수업, 공문, 생활지도 등 심신의 고통을 교사 홀로 온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에어포켓이 보이지 않는다. 구명조끼도 옆에 없다. 교육혁명 제4의 길은 네트워크에 있다. 학교와 교육청에 교사를 위한 공적 소통 네트워크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과 학생 지도와 학부모 민원 대처방안을 토의할 시간과 공간이 있어야 한다. 학교 안팎의 어려움에 대하여 토론하고 대안을 찾고 위로하고 고민하고 서로 지원해 주는 체제가 필요하다. 이러한 시스템을 바탕으로 한 세밀한 법과 지원이 귀납적 방식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경험이 거의 없는 교사에게 어려운 상황만 던져 주고 지원이 전혀 없는 것은 에어포켓이 없는 지하도에 밀어 넣는 것과 같고 위험한 급류에서 안전조끼를 지급하지 않는 것과 같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학생교육문화원 예술진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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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7
  • [육우균의 周易산책] 새싹은 우주다(수뢰준)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공간이 이 세상이다. ‘천지간’이다. 삼라만상은 하늘과 땅의 사이를 떠나서 그 어떤 개념도 존재할 수가 없다. 그 천과 지 사이에 최초로 등장하는 생물이 바로 새싹이다. 새싹은 우주다. 대상전에 수뢰준괘를 보면 ‘구름이 위에 있고 그 밑에서 우레가 치는 모습’이다. 이는 마른 번개, 헛천둥이다. 만물의 탄생이 어렵다는 것을 말한다. 하늘과 땅이 만나 즉 강(强과) 유(柔)가 만나 교합하여 생명을 잉태시키는 것이다. 수뢰준의 ‘준(屯)’은 ‘一 + 屮 +丿’의 합한 글자다. 뜻은 (땅이 비스듬히 있는 데)에 + (새싹이) + (뿌리를 내리는) 모양으로 이처럼 ‘탄생의 어려움’, ‘시작의 어려움’을 나타내는 괘이다. 하늘과 땅이 첫 무대를 펼치고 사방은 어둡다. 그 어두움을 뚫고 무대 조명이 가냘픈 새싹을 비춘다. 새싹은 스스로를 덮고 있는 흙덩이를 밀치고 올라온다. 봄. 만물이 소생하는 아름다운 계절이다. 그러나 새싹이 자라서 꽃을 피우는 것은 우주의 탄생만큼이나 힘들고 절실한 일이다. 자기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꽃을 피우는데 쏟아붓는 행위다. 마치 산모가 아기를 낳듯 기진맥진한 상태일 것이다. 꽃이 피는 어려움을 잘 나타내 주는 시가 있다. 바로 이호우의 현대시조인 「개화」다. 짤막하니까 전문을 보자.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개화(開花)란 순수 우리말로 ‘꽃 피다’이다. 한자어 ‘개화’라는 말보다 ‘꽃 피다’처럼 순수 우리말이 훨씬 본질에 가깝게 다가온다. 태어나는 것은 우주를 품에 안는 것이다. 꽃 피는 것은 한 하늘을 열어서 한 세상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새싹은 우주다. 특히 중장의 ‘마지막’ (꽃 송이 한 잎을 피기 위해) ‘떨고 있는 고비’는 바로 수뢰준괘의 ‘탄생의 힘듦’, ‘시작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 외국시 중에서 이 수뢰준괘를 나타내는 시는 T.S. 엘리엇의 「황무지」다. 엘리엇의 「황무지」 전체 5부 중 1부 ‘죽은 자의 매장’ 중에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 하면서 봄의 잔인함, 새싹이 나무로 자라는 과정의 어려움 등을 말하면서 오히려 겨울이 따뜻하고 좋았다는 역설을 보여주고 있다. ‘시작의 어려움’에 대해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을 말해보려 한다. 필자는 턱걸이를 지금은 1회에 10개 정도 하는데, 처음에는 한 개 하기도 어려워 ‘제발 한 개만 턱걸이를 할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하면서 노래를 하고 다닌 적이 있었다. 그 후로 턱걸이 한 개 하는 게 인생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턱걸이를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한 개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자기의 몸무게를 중력으로부터 들어 올리는 일이다. 우선 팔의 힘을 기르기 위해 푸시업(팔굽혀 펴기)을 꾸준히 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는 어깨 힘을 기르기 위해 운동용 고무줄을 사서 철봉대에 묶고 한쪽 발을 그 고무줄에 걸고 턱걸이를 한다. 익숙해진 다음에는 운동용 고무줄을 풀고, 맨손으로 철봉대를 잡고 해 본다. 안 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팔굽혀 펴기부터 반복한다. 이렇게 계속 반복, 반복, 반복해야 한다. 그래서 겨우 턱걸이 한 개를 마치면 그 기쁨에 소리를 지르면서 펄쩍펄쩍 뛰어다닌다. 훈련소에 입소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마치고 이등병 계급장을 받아 든 심정처럼. 그 다음부터 일등병, 상등병, 병장 계급장을 달 듯이 턱걸이를 2개, 3개……. 이렇게 차례로 턱걸이 수를 늘려가면 된다. 뭐든지 처음이 어렵고 힘들지, 겪고 나면 나머지는 비교적 쉽다. 그러므로 뭐든지 처음 시작할 때 온 에너지를 다 써야 한다. 꽃을 피우는 일도 마찬가지다. 식물이 처음 꽃을 피울 때 온 힘을 다한다. 「개화」에서도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라 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처음 경험하는 일들이 힘들지, 그 다음부터는 쉽게 적응해 가지 않던가. 그래서 우리는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경험을 한 사람에게 존경심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사람은 에드먼드 힐러리경이라 기록되어 있다. 물론 그보다 앞서 에베레스트를 3번이나 등반하다 에베레스트에 묻힌 사라진 맬러리도 기억해야 한다. "왜 굳이 에베레스트에 오르고 싶냐"는 기자의 질문에 "산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맬러리의 유명한 말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만 기억하지 말자. 역사를 만든 사람과 문명과 문화를 만든 사람들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일반 평민들이다.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도 그만의 우주를 가지고 있다. 하나의 꽃에는 하나의 우주가 있다. 우리가 눈을 감으면 우리의 우주도 사라진다. 눈을 뜨면 나만의 우주가 존재한다. 우리는 모두 각각의 우주를 안고 산다. 혹자는 ‘내가 죽어도 우주는 존재하지 않는가?’하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우주는 내 우주가 아니다. 왜? 내가 죽었으니까. 죽음의 의미를 가만히 생각해보라.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이 우주가 존재하는 것 아닌가? 나 자신이 있음으로 해서 부모가 있는 것이다. ‘부모가 있으니까 내가 존재하는 것 아닌가?’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없다. 이 세상의 중심은 나다. 나만의 우주가 있는 것이다. 땅 속 어둠을 뚫고 세상에 나온 새싹은 자기만의 우주를 길러낸다. 탄생과 출발의 어려움은 단단한 알을 깨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헤르만 헤세의 성장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새가 알껍데기에서 부화하기 위해 줄탁동시(啐啄同時)하고, 식물이 흙을 헤쳐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처럼,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행위는 매우 어렵고 도전적인 과정이 될 수 있다. 발전을 가로막는 장벽을 극복하려면 엄청난 힘, 결단력, 인내가 필요하다. 『데미안』에서 주인공 싱클레어는 가정에서 어머니의 무조건적이고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산다. 언제나 화목한 이 독실한 크리스트교 가정은 존재 양식적 삶을 대변하고 있다. 반면에 싱클레어가 사회에서 접하게 되는 아이인 크로머는 소유 양식적 삶을 살고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싱클레어가 사과를 훔쳤다고 거짓말한 것을 빌미로 싱클레어를 협박하고 돈을 갈취한다. 자신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이기주의적이고 모든 것을 가지려고 하는 소유 양식적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도 기계문명 아래 오로지 성장과 발전만을 목표로 자연과의 생태학적 관계나 다른 구성원과의 유대는 고려하지 않으며 달려나가고 있다. 껍질을 깨기 위한 몸부림처럼 탄생이나 시작의 과정은 불편함, 고통, 불확실성을 수반할 수 있지만 최종 결과는 종종 아름다운 경험으로 끝난다. 껍질을 깨는 은유는 도전을 극복하고 성공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회복력과 끈기뿐만 아니라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임으로써 오는 성장과 변화의 잠재력을 포착한다. 인간은 탄생과 함께 시작의 어려움과 마주한다. 아니, 사실 탄생 이전의 무명 단계부터 힘들었다. 어떤 것이 우리를 기다리는지,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지 모른 채 두려움과 초조함 속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수뢰준괘는 마른 번개요, 헛천둥이다. 고난의 시작이지만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에 아주 좋은 기회다. 그래서 『주역』은 이때가 경륜을 펼칠 시기라 했다. 경륜에서 ‘경(經)’이란 날실을, ‘륜(綸)’이란 씨실을 말한다. 그래서 날실과 씨실이 서로 잘 짜여지는 것 즉 세상의 틀을 짜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의 실을 엮는 시간이다. 따라서 알을 깨고 나온 새끼 때부터 경륜을 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또 다른 주인공 크로머의 소유 양식적 삶이 아닌 주인공 싱클레어의 존재 양식적 삶을 살 수 있도록 세상의 틀을 잘 짜야만 한다. 생명의 탄력성은 출생과 성장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능력에 있다. 새싹이 땅을 뚫고 새가 알에서 깨어나듯이, 우리는 벽을 뚫고 시작의 어려움을 받아들이고 우리만의 우주로 성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도전에 직면함으로써 우리는 존재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의미 있고 진정한 삶의 여정을 만들 수 있다. 어둠과 불확실성을 받아들이자. 그 순간 우리의 진정한 빛이 가장 밝게 빛난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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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4
  • [전미경의 클래식 스토리] 자연을 사랑한 베토벤
    [교육연합신문=전미경 칼럼] 이제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된 것 같다. 아침저녁은 그래도 시원한 듯하지만, 낮에는 제법 덥다. 이제 6월인데 이렇게 더우면 7, 8월은 얼마나 더울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아마도 인간의 욕심과 무관심으로 인한 이상기후의 결과인 것 같다. 자연의 시간표에 영원한 것은 없다. 시작이 있으면 언젠가는 끝도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이치인데, 그마저도 순리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옛날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던 우리의 조상들과 달리 이제는 모든 것이 기계화되고 자동화되고, 편리함이 극대화되고 빨라졌지만 그로 인한 자연의 파괴 또한 빨라지고 있다. 이제는 경각심을 느끼는 수준에서 벗어나 심각함을 깨닫고 행동해야 될 때다. 지금을 안일하게 놓친다면 이 지구에 미래는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온 인류가 두려움에 떨고 생과 사의 갈림길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무기력함도 느꼈다. 이제 그 바이러스가 좀 진정되는가 싶긴 하지만, 우리에겐 그보다 더 큰 문제가 남아있다. 바로 기후 문제인데, 이건 지구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모두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이상기후로 인한 피해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고 우리 모두가 의식하고 행동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그런 피해는 계속되고 더 가속화될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이 시작되면서 주변만 둘러봐도 곳곳에 푸르름이 넘쳐난다. 앙상했던 나뭇가지엔 초록색 잎들이 가득하고, 말라있던 공원 대지엔 잔디가 가득하다. 알록달록 가지각색의 꽃들도 만발하다. 나무와 꽃들을 눈에 담고 있으면 기분도 싱그러워지고 그 자체로 힐링이 된다. 나이가 들수록 자연이 주는 소중함에 더 겸손해지고 감사하게 된다.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 배출되는 탄소로 자연이 망가지고, 그로 인해 말 못 하는 동물들이 피해를 입는 광경을 볼 때마다 반성하게 되고 지구의 미래에 두려움이 생긴다. 자연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작곡가 베토벤도 그래서인지 자연에 대한 감동과 애정을 담은 곡들을 많이 만들었다. 베토벤의 교향곡 중 하나인 6번 교향곡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평화를 묘사하는 음악이다. 이 곡은 그의 교향곡이 영웅을 묘사하거나 드라마틱한 무엇인가를 주제로 하던 전통적인 주제 제시 방법을 쓰지 않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라는 일상을 그리는 것에 중점을 둔 새로운 음악적 표현을 시도한 작품이다. 그래서 각 악장마다 자연의 요소를 묘사하며 베토벤의 자연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작품에 반영하였다. 베토벤은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의 아름다움과 평화를 즐기는 것을 좋아했으며, 자연이 그의 음악에 영향을 주는 요소였던 것 같다. 그는 자연의 조용한 환경에서 작곡에 몰두하곤 했으며, 자연 속에서 산책을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자연의 소리나 풍경, 감정적인 상태 등을 표현하려는 시도가 그의 작품에서 많이 나타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베토벤 교향곡 6번에는 “전원”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베토벤 자신이 직접 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곡을 작곡할 당시 베토벤은 청력을 상실해 많은 시간을 숲과 들판을 산책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청력을 상실한 베토벤에게 숲과 들판, 자연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됐을지 상상이 된다. 왜 그가 자연에 그토록 많은 애정을 갖게 되었는지 더 깊이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그런 시기에 작곡된 곡이기에 이 곡은 단순히 자연을 찬양하는 것이라기보다 베토벤이 느꼈을 자연에게 받은 그의 감정적인 위로와 깊이가 같이 표현된 곡이다. 그가 귀가 아닌 가슴으로 들었던 천상의 소리를 음악에 녹여낸 가치 있는 곡이다. “전원”이라는 제목은 이 작품이 자연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고 있고, 베토벤이 작품의 각 악장에 자연의 요소를 묘사하도록 작곡했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보이지만 이 곡은 ‘전원’이라는 제목 그 이상의 감정의 깊이가 담겨있다. 따라서 “전원”이라는 이 곡에는 작품의 음악적 특징과 주제가 잘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각 악장마다 자연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베토벤의 교향곡 6번 “전원”을 들으며 이 여름의 싱그러움에 흠뻑 취하길, 베토벤이 역경을 딛고 행복을 느꼈던 그 느낌이 누군가에게도 전해지길 기대해 본다. ▣ 첼리스트 전미경 ◇ 가천대 관현악과 졸업(첼로전공) ◇ 서울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부수석 역임 ◇ 금천 교향악단 부수석 역임 ◇ 의왕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 ◇ 강동 챔버 오케스트라 단원 ◇ 롯데백화점 문화센터 첼로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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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0
  • [김홍제의 목요칼럼] 내가 교육부 장관이 된다면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교육부 장관이 된다는 것은 로또복권 1등에 당첨되는 것보다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선거에 나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복권을 사지 않더라도 ‘1등에 당첨된다면’이라는 상상은 즐겁다. 실현 가능성은 없지만 ‘내가 교육부 장관이 된다면’이라는 상상을 해 본다. 내가 교육부 장관이 된다면 이런 정책을 시행하고 싶다. 첫째, 오전 시간에는 지식 교과수업을 하고 오후는 원하는 선택 중심의 활동을 하게 하고 싶다. 필수적으로 배워야 하는 교과 교육과정을 오전에 배치하고 오후에는 동아리 중심 형태의 활동을 하고 싶다. 과학 동아리, 수학 동아리, 미술 동아리, 운동 동아리, 봉사 동아리, 독서 동아리를 매일 월, 화, 수, 목요일 오후에 실시하고 금요일에는 자율적 동아리 중심으로 심화 활동, 현장 활동, 지역사회 연계 활동을 하는 것이다. 자율성은 주도성과 주체성을 키워 준다. 둘째, 중등학교는 학년이 올라가기 전에 필수적으로 연간 5권 이상 고전을 읽게 하고 한 가지 운동과 한 가지 악기를 배우게 할 것이다. 월1회 독서토론회와 자치토의를 통하여 민주시민으로서의 실질적인 역량을 키우게 하고 싶다. 셋째, 학교 역량으로 온전하게 책임지지 못하는 것은 사회에 돌려보내고 싶다. 학교는 성적, 인성, 식사, 건강, 정서, 지식, 안전, 태도, 적성, 진로, 돌봄 등 모든 것을 떠맡고 있다. 학교 밖에서 해야 할 것까지 학교에서 모두 받아들이고 있어서 동맥경화 상태에 있고 제대로 하는 것이 줄고 있다. 학교가 할 수 있는 것만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는 척이 아닌 진정으로 학생을 변화시키는 교육을 해야 한다. 하지도 못하면서 책임만 잔뜩 짊어지고 있는 학교 모습은 안타깝다. 넷째, 방학 대신에 4계절에 일주일씩 개인적인 휴가를 인정해 주고 싶다. 좋은 계절에 자기가 원하는 날에 원하는 곳으로 가족, 친구들과 짝을 지어 여행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 싶다. 다섯째, 교장과 교감을 없애고 순환보직제도를 할 것이다. 교직원 투표를 통하여 부장처럼 교장과 교감도 순환보직으로 하여 점수를 따거나 근무평정을 잘 받는 교사보다는 교육공동체에게 인정을 받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교장과 교감을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여섯째, 학교는 반드시 정원과 숲 공간을 만들도록 할 것이다. 쉬는 시간에 숲 그늘 아래 벤치에서 쉴 수 있게 할 것이다. 걷기만 해도 위안이 되는 숲 공간을 제공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학입시는 대학에 맡기고 초·중·고는 본연의 교육과정을 하도록 할 것이다. 읽으면서 벌써 짐작을 했을 것이다. 이 소망들은 현실성이 거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연역적 사고로 강제하는 교육개혁은 성공하지 못한다. 지금처럼 점수가 지배하고 다양성이 실종된 학교는 미래가 없다. 학생에게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과감한 시도를 해 보아야 한다. 교육현장에서 나온 의견과 객관적인 자료를 종합하고 숙고해야 진정성 있는 개혁을 할 수 있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학생교육문화원 예술진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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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0
  • [육우균의 周易산책] 땅은 어머니다(중지곤괘) 下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중지곤괘의 효사] 지배 天 用6 그대에게는 이로움이 있다. 上6 -- 용이 광막한 들판의 하늘 위에서 싸우고 있다. 그들의 피가 검고 누렇다. 65 -- 그대는 누런 치마를 입었구나. 왕이 되었다. 人 64 -- 보물 주머니의 입구를 막아라. 그대의 지식이나 재능을 드러내지 마라. 민중 63 -- 빛나는 교양을 몸속에 지니고 있다. 그대를 드러내지 않도록 하라. 地 62 -- 배우지 않더라도 불리한 일이 없다. 初6 -- 그대는 서리를 밟고 있다. 견고한 빙판이 찾아 오리라. ☷ 지 ☷ 지 대지가 너르게 펼쳐진 모습이니 천지 만물의 모든 모습을 포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지(地)의 자리에서 서리와 빙판이 찾아왔다. 음의 기운이 서리는 것이다. 여성의 부드러움은 순종이 아니라 양의 건강함을 꺾을 수 있는 다른 성격의 힘이다. 유교적인 관점으로 보아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지배자와 피지배자, 지배와 순종이라는 어불성설의 관념으로 고착화시켰다. 남성과 여성은 동등하다. 그리고 다른 성격을 지녔다. 남성은 강함, 여성은 부드러움. 중천건괘와 마찬가지로 지의 자리는 비축의 자리다. 음의 기운을 비축시키는 것이다. 생명 탄생의 준비 과정이라고 보아야 한다. “배우지 않더라도 불리한 일이 없다”(不習無不利). 왜? 도덕적 인간은 지식을 많이 배운다고 실천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자기 주변의 환경에 애정을 가지고 살면 된다. 이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이를 ‘인드라의 그물’이라 한다. 요즘으로 말하면 ‘월드 와이드 웹(WWW)’을 말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를 통해 사람들이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전 세계적인 정보 공간’을 말한다. 인간은 이 인드라 그물에 걸려 있는 존재와 같아서 그 관계망에서 영향을 주고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인(人)의 자리에서는 무엇보다 자신을 드러내지 말고, 열심히 실력을 닦으라는 말이다. 매우 위험한 자리이니 만큼 자신의 보물 주머니를 꽁꽁 동여매야 한다. 아직 자신의 능력을 세상에 보여주지 말고 숨기라는 의미다. 천(天)의 자리다. 인의 자리에서 자신의 실력을 숨긴다고 하였으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인다. ‘낭중지추(囊中之錐)’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알려진다. 그래서 황상을 입었다. 황상은 누런 치마다. 즉 임금이 되었다는 뜻이다. “용이 광막한 들판의 하늘 위에서 싸우고 있다. 그들의 피가 검고 누렇다.”는 말은 천자문에 ‘천지현황(天地玄黃)’을 말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교합으로 검은 피와 누런 피를 흘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음양의 교합과 상보와 긍정을 말한다. 카오스의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코스모스의 탄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중지곤괘처럼 되려면 ‘후덕재물(厚德載物)’해야 한다. 대지가 너르게 펼쳐진 모습처럼 세상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고조선의 대륙을 머리를 흩뿌리며 말을 타고 달리는 여인을 상상해 보자. 중천건괘와 중지곤괘로 무대 장치가 끝났다. 이제 무대 위에서 펼쳐질 청정한 하늘 아래, 그 흙바람의 공간 속에 실린 싯귀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 중지곤괘는 음이 꽉 찬 기운이라,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좋은 일이 많다. 금전이나 물질은 풍부하고, 인내는 행운의 열쇠, 조급하면 불운의 시작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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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7
  • [전재학의 교육칼럼] 기업인이라면 한국 대학생을 뽑지 않겠다는 교수와 우리 교육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최근 우리 교육의 실상을 밝히는 참담한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S대 교수가 “명문대에 목매는 입시…내가 기업인이라면 한국 대학생 안뽑아”라는 제목의 신문(동아일보 2023.7.7.) 기사다. 그는 S大 국제대학원 이수형 교수다. 참담한 한국교육의 현실을 꼬집고 있다. 그는 『대한민국의 학부모님께』라는 책의 저자로서 AI 발달로 취업시장은 급변하는데 학벌 지상주의의 ‘우물 안‘을 벗어나지 못한 우리 교육에 좌절하고 학생들을 지도하는 한계를 느껴 학부모들에게 직접 호소하려고 이 책을 출판했다. 내용의 요지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성적보다 좌절하지 않는 마음을 키워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배운 ’지식‘은 세계무대에서 쓸모없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고 좌절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일반적으로 누구나 인정하는 학벌의 소유자인 이 교수는 대학 졸업 후, 고시에 차석으로 합격한 인재임에도 불구하고 ’국제기구(예컨대, 세계무역기구(WTO)‘ 회의에 참석했다가 의견을 제대로 말하지 못한 자신에 실망했다. 이는 드문 경우일까? 아니면 보편적인 경우일까? 그는 또한 미국 아이비리그 명문대학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다른 학생들과의 토론에서 밀리기 일쑤며 “한국에서 뭘 배웠나”하는 자괴감에 빠졌었다. 문제는 우리의 경우 이것이 이 교수 개인에 한정된 경우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면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한둘이 아닌 것으로 널려졌기 때문이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 이수형 교수는 학생들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주요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기업에서 채용할만한 학생들을 추천해 달라는 제안에도 선뜻 추천하지 못하는 같은 이유로 꼽고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 학생들이 이런 처지니 “한국의 미래가 어둡다”는 생각은 어쩌면 학자적 고뇌에 해당할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대학은 졸업을 늦추며 시간을 허비하는 학생들이 많다. 그들의 문제는 무엇일까?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으나 최종 결론은 바로 그들이 받은 우리의 교육 때문이다. 인공지능(AI)의 급속한 발달로 취업시장은 급변하는데 아직도 이른바 SKY, 인(In)서울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서열에 목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는 뿌리 깊은 '학벌 지상주의'에 근거한 교육 가치라 할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소위 인재라는 학생들이 S大를 나와도 하고 싶은 일이 없고 전문성이 낮아서 해외 취업도 불가능한 것이다. 그들이 누구인가? '헬조선', '이생망'을 외치는 청년 중에 상대적으로 성공했다고 인정받는 대상이 아닌가. 여기서 우리는 현재의 진로·진학 교육의 점검이 요망된다. 아직도 대학에 진학할 때 명문대에 들어가기 위해 아무 학과나 선택하는지, 특정 학과만 고집하는지 말이다. 현실은 컴퓨터공학, 반도체공학, 화학공학 등 높은 임금을 받고 취업이 보장된 이공계 대신 초등학교부터 의대 진학 사교육을 받는 망국적인 편중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학생들은 졸업 후에 특정 기업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하나 그곳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고자 말하는 학생은 거의 없다.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결정한다면 세계적인 어느 기업이든 환영받지 않겠는가. 대한민국은 공식적으로 2021년 21조 5,000억, 2022년 26조 원의 사교육비를 지출한 명실공히 사교육 공화국이다. 우리의 학교는 아이들을 학원으로 내모는 교육을 언제까지 할 것인가? 이공계를 기피하고 수포자를 양산하는 교육은 또 어찌할 것인가? 정부가 아무리 ‘킬러 문항’을 배제하여도 수능에서 비비 꼬아 변별력을 높이겠다는 착각과 질 낮은 문제를 접하는 한, 우리 교육은 낮에는 학교에서 내신을, 밤에는 학원에서 수능을 공부하는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인 교육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학생들이 삶 속에서 접하는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고 실패를 딛고 회복탄력성을 높여 정신적 건강을 굳건히 하며 연대와 협력을 추구하여 서로 상생(win-win)하는 세계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보편교육으로의 전환은 언제쯤 가능한 것인가? ▣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現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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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5
  • [김홍제의 목요칼럼] 20년 후 행복한 학교를 소망하며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올바른 사회는 오직 어린이들에게 참다운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페스탈로치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만화광이었다. 만화를 열 권 넘게 빌려서 머리맡에 놓으면 세상 어떤 것도 부럽지 않았다. 중학생이 되고 만화방 방문을 끊었다. 서기 2002년이나 서기 2020년이라는 제목을 단 공상과학 만화에 있던 몇 장면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미래는 인류가 상상하는 꿈을 실현하는 환상적 세상이었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우리는 어디에 있었던가. 교무수첩을 펼치자 주간회의록에 주번교사를 쓰는 칸이 보인다. 숙직을 하고 운동장 조회를 했고 시험문제를 손으로 써서 출제했다. 교사들은 당구를 쳤고 삼겹살로 회식을 했고 총각 선생님 집에 모여서 2차로 순대와 막걸리를 먹었다. 숙직실에서 바둑으로 자장면 내기를 했고 다른 교직원이 쓰던 이불을 덮었다. 여교사들은 공휴일에 학교로 출근하여 일직 근무를 했다. 아이들은 스승의 날에 손수건을 선물하거나 담배 한 갑을 포장지에 싸서 선물하기도 했다. 스승의 날에는 담임반 학생들이 케이크를 교탁에 놓고 스승의 날 노래를 불렀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라는 노래 가사에 교사 얼굴은 부끄러움에 붉어졌다. 칠판에는 ‘선생님 감사합니다’ 라는 글씨가 색분필로 커다랗게 있었다. 학생부는 교문에서 두발과 복장단속을 했다. 그러한 시대를 거쳐서 우리는 2023년이라는 이곳까지 왔다. 수십 년이 지나면 많은 것이 자연스럽게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경쟁 위주의 시험과 답답한 학교 시설, 틀에 박힌 교육과정, 행정 위주의 교육이 자연스럽고 멋지게 개선되리라 기대했다. 세상은 기대와 어긋나 바이러스로 학교가 휴교를 하고 사교육이 맹위를 떨치고 교사들은 학교를 떠나고 싶어 한다. 맬더스는 인구론에서 인구의 기하급수적 증가와 식량생산의 산술급수식 증가로 인류가 빈곤의 파국을 맞이할 것이라는 비관적 미래를 예언했다. 다행히 그 예언은 빗나갔다. 정부는 60년대부터 경제성장의 저해 주범이 인구로 규정하고 강력한 산아 제한 정책을 추진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2년 출생 통계에 따르면 한국 작년 합계출산율은 0.78명으로 역대 최저이다. 한국은 2013년부터 OECD 국가 가운데 합계출산율 꼴찌이다. 지금 학교는 공사 중인 공사판과 같다. 어수선하다. 고교학점제, 공간혁신, 인공지능(AI) 교육혁명, 석면철거 공사, 학생 인권, 대입시험 개선, 교육공무직 갈등 등으로 안정보다는 끓는 물에 가깝다. 세계 최고의 대학과 선진국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교육혁명을 차근차근 준비 중이다. 소망하는 세상은 올 것인가. 학교에 바라는 간절하고도 절실한 소망이란 어떤 것인가. 어릴 때처럼 로봇이 숙제를 대신해 주고 자가용 비행기로 등교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은 고속도로, 전자산업, 인천국제공항, 전자분야 인재 양성으로 먹거리를 해결하여 선진국 대열에 올라섰다. 앞으로 30년은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안개 속과 같다. 대한민국의 교육은 어떤 교육으로 어떤 인적자원을 개혁해야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을까. 가야할 미래는 불안정하고, 예측이 어렵고 복잡하고 애매모호하다. 핵심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교육이 좋은 교육이고 사람들이 행복한 나라가 좋은 나라이다. 앞으로 20년 뒤는 2043년이다. 변화라는 물살은 더 빨라 여울을 이룰 것이다. 기술과 정치와 교육이 인간답고 행복하게 만들어야 하는 방향으로 나가길 소망한다. 세월이 지나도 학교는 인간을 인간답게 성장시키며 잠재력을 발견하고 억압보다는 칭찬과 존중, 억지로 가야만 하는 학교가 아닌 가고 싶은 학교가 되어야 한다는 대전제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학교로 즐겁게 등교하는 학생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학생교육문화원 예술진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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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3
  • [육우균의 周易산책] 땅은 어머니다(중지곤괘) 上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땅은 하늘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하늘이 양의 성질인 ‘확산’의 개념이라면 땅은 음의 성질인 ‘수렴’의 개념이다. 따라서 하늘은 ‘밀어내는 힘’이 지배하기 때문에 지금도 우주는 빅뱅 이래 팽창하고 있다. ‘땅은 축소하는 성질을 가진 그 무엇’이라 정의하면 되겠다. 땅은 중력으로 이 세상 만물을 수렴한다. 일종의 ‘당기는 힘’이 지배한다. 그래서 중력에 의해 땅으로 내려오는 것은 생명을 다한 것들이요, 그에 반하는 것들은 살아있는 것이다. 인간도 살아있는 동안 땅을 디디고 서 있다. 점차 땅에 가까이 눕게 되면 생명의 불꽃이 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꿈을 꾸며 이상을 좇는다. 노천명의 「별을 쳐다보며」란 시에 보면 “나무가 항시 하늘로 향하듯이/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별을 쳐다보고 걸어갑시다.//친구보다/좀더 높은 자리에 있어 본댓자/명예가 남보다 뛰어나 본댓자/또 미운 놈을 혼내주어 본다는 일/그까짓 것이 다아 무엇입니까.//술 한 잔만도 못한/대수롭지 않은 일들입니다/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현실을 땅에 디디고도 이상을 좇으며 살자고 노래하고 있다. 대지는 부패와 생성의 철학이다. 대지의 관점에서 볼 때 부패는 평상적인 현상이며, 생성이 오히려 예외적인 현상이다. 대지는 부패됨을 기본으로 한다. 부패는 사랑이다. 모든 것은 부패되어야 생성된다.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죽는다. 그리고 부패된다. 온전히 부패되어야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도 죽어야 다른 세포가 생성된다. 역설적이다. 땅은 어머니처럼 모든 것을 길러내지만 그 전에 모든 것은 죽어야 한다. 죽어 부패되어야 새로운 생명이 자란다. 생명은 중력의 힘에 반작용해야 유지된다. 그 힘을 유지하려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부패와 생성의 과정은 일상에서 연속성을 가지고 일어난다. 원시시대 이후 토지가 사유화되면서 농지가 택지나 공장, 또는 발전소로 전용되는 사태를 초래했다. 땅도 자갈이나 아스팔트, 시멘트로 뒤덮여버린 토양에서 부패의 기능은 사라져 버렸다. 거기에 인간이 만들어내는 공산품들은 거의 부패하지 않는다. ‘부패하지 않는다’ 함은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쓰레기가 된다는 말이다. 이처럼 토지의 부패 기능이 약화 되면 먹이 사슬의 기반이 약화 되고 결국 사슬의 연결이 이완된다. 그리하여 흙이나 바다로부터 주방을 경유하여 인간의 입에 다다르는 음식이 저급화 되거나 그 양이 감소 되어 기아를 낳게 된다. 결론은 뻔하다. 인간의 죽음이다. 버려진 것에 깃드는 재생 가능성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생성과 소멸 간에 분리하기 힘든 연속성이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씨앗의 껍질이 터지며 싹이 나듯이, 알이 깨지며 유충이 얼굴을 내밀듯이, 우리가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도 분해 과정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수정란은 하나의 세포를 차례차례 분열시키면서 성장하듯이 태어났을 때 이미 분할과 붕괴로 향하고 있다. 아니 분할되고 붕괴되기 시작하는 것을 일러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바다다. ‘바다해(海)’자에 ‘어미모(母)’자가 들어 있다. 영어에도 mater를 뜻하는 ‘mate’가 있다. ‘바다’를 부르는 라틴어다. 어머니의 태 안에 있는 양수를 조사해 보면 바닷물이 함유한 미네랄 성분 비율이 거의 같다.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에 보면 ‘태아들은 양수라는 바닷물 속에서 헤엄치며 자라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 실제로 수정된 지 1~2개월된 뒤부터 태아는 물고기처럼 폐호흡이 아니라 양수 속에서 아가미 호흡을 하고 지낸다. 해수와 양수의 미네랄 화학기호를 들여다보면 어머니의 자궁 속 바다를 떠다니는 겨자씨만한 내 자신의 과거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어머니와 바다, 과학이 시가 되고, 시가 과학이 되는 환상의 드라마가 펼쳐진다.’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태초의 어머니는 땅이 아니라 바다다. 흙이란 것이 태초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원래 지구가 탄생할 때의 모습은 땅에는 바위와 모래뿐이지 유기물인 흙은 없었다. 달처럼 생물체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바다에 살던 생명체가 강을 타고 육지로 올라왔다가 죽은 시체가 흙이 된 것이다. ‘대지는 어머니다’라는 은유의 개념과 함께 살펴보아야 할 개념이 있다. 바로 ‘가이아(Gaia)’란 개념이다. 개념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다. ‘가이아’란 창으로 세상을 보면 지구는 세포 조직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생명체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개념이 창작물에 사용될 때는 영화 「솔라리스」처럼 주로 지구 자체가 일종의 생각과 자의식을 가진 존재라거나,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설정으로 자주 등장한다. 이 개념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지구의 자연 환경을 방해하는 존재는 바이러스나 세균과 같은 질병에 해당하고, 지구상에서 비정상적으로 증식하는 특정 개체군은 암세포로 간주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개체가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파멸로 몰고 갈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로부터 많은 환경 운동가들, 저술가, 그리고 창작가들은 “인류 문명은 암세포적 질병이다.”라는 컨셉을 도출해냈다. 특히 여러 가지 지구 종말론 가운데 가이아 이론을 채택하여 인류 문명의 붕괴는 지구 차원의 자정작용이라고 본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지구온난화와 관련된 것으로, 인간의 비정상적 번성으로 지구 기온이 올라가면, 자연히 인간이 살기 어렵게 되면서 개체수가 줄어들고 지구가 깨끗해진다는 논리다. 또한 병적 요소인 인류를 제거하기 위한 살인 바이러스 출현이 인류를 멸종시키고 대체하기 위한 사이보그, 안드로이드, 인형사 등의 신인류가 등장하는 등의 판에 박힌 표현도 존재한다. 펄벅(Pearl Buck)의 『대지』에서 주인공 왕룽은 부지런하고 땅을 사랑하는 가난한 농부의 자식이다. 왕룽은 본능적으로 땅을 사랑하고 있다. 흉년이 들어 굶주리게 되자, 한때 남쪽 도시로 가나 결국 다시 돌아온다. 왕룽은 작품 끝부분에서 임종의 자리에 누워 자식들이 땅을 팔기 위해 의논하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말한다. “땅을 팔기 시작하면 우리 집안은 끝장난다. 우리는 땅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땅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게야. 땅을 갖고 있으면 살아갈 수가 있다. 땅은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 만약 너희들이 땅을 팔면 그게 마지막이다.” “우리는 땅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땅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게야.” 이러한 땅에 대한 동양적 사고는 서양에서도 똑같이 인식했다. 『성경』에도 하나님은 흙(아다마)으로 사람(아담)을 빚으셨다고 말하고 있다. 아담은 고유명사라기보다는 흙의 존재인 인간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라 할 수 있다. 흙에서 나온 사람은 자연의 일부로 자연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불교에서도 ‘인드라 그물’이라 하여 수많은 구슬이 연결되어 하나가 흔들리면 다른 구슬 모두가 흔들리고, 하나의 이미지는 다른 모든 구슬에 나타나게 된다. 세상의 모든 관계가 상호 연결되어 있다. 세상 만물은 땅이라는 대지 위에서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거친다. 이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그 영향을 주고 받게 된다. 메리 올리버(Mary Oliver)의 시 「기러기(Wild Geese)」에도 이러한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는 자연 세계에 대한 축하이며 초대장이다. 이 시는 우리가 완벽을 위해 노력하거나 인식된 결점을 속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전달한다. “착해지려 할 필요 없어./참회의 심정으로 무릎으로 기어/백마일 사막을 건너려 하지 않아도 돼.” 대신, 우리는 단순히 우리 주변의 자연 세계에서 존재하고 위안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올리버는 계속해서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세상은 네가 상상하는 대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너에게 소리쳐 말하지, 기러기들처럼 들뜬 목소리로 꽥꽥 거리며 -” 당신을 부른다. 이 부분은 우리가 세상에 혼자가 아니며 우리 자신보다 훨씬 더 큰 무언가의 일부라는 생각을 강화시킨다. 이러한 생각은 백석의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이란 시에 나오는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라는 구절처럼 자유의지로도 어쩌지 못하는 운명에 이끌려 온 삶을 회한하는 장면과 오버랩된다. 기러기의 울음소리는 우리가 자연 세계와 연결되어 있고 그 안에 자리가 있음을 일깨워 준다. 세상이 만든 모든 지식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사랑은 대지처럼 넓다. 하늘처럼 높다. 위대하다. 시공간의 제약에도 관계 없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그러하고,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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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1
  • [육우균의 周易산책] 하늘은 하느님이다(중천건괘) 下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중천건괘의 효사] 지배 天 用9 − 머리가 없는 용들이 모여 있구나. 우월의식을 버리고 무아의 지혜를 발휘하라. 上9 − 극점에 도달한 용 - 욕심을 버려라. 95 − 하늘을 나는 용 – 대 스승을 만나라. 人 94 − 연못을 벗어나 뛰어오르는 용 – 도전하고 모험하는 삶을 살아라. 민중 93 − 매일 자강불식하는 자세로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 地 92 − 밭에 있는 용 – 부지런히 밭에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두어라. 初9 − 물에 잠긴 용 – 잠재력을 최대한 축적하라. ☰ 천 ☰ 천 자강불식하는 자세로 쉼 없이 자기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천(天)의 자리와 지(地)의 자리는 인생에서 무대에 해당한다. 내가 어찌 해 볼 수 없는 고정된 자리이다. 인(人)의 자리가 그 무대에서 보이는 나만의 역할이다. 그러면 먼저 지(地)의 자리를 보자. 초9와 92효사다. 이때는 자신을 성장시키려 노력해야 한다. 잠재력을 축적하고 가능성을 키워야 하는 시기다. 인의 자리(93과 94효사)는 우선 건강해야 한다. 건강한 신체뿐 아니라 정신도 올바르게 가져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세상에 한 번 내던져야 한다. 특히 93에서 94로 올라설 때는 항상 조심하고 주위를 살펴야 한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다. 천의 자리(상9)에 오르면 무조건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대 스승을 만나야 한다. 나폴레옹, 히틀러, 차우세스쿠, 후세인, 카다피 등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최고의 위치에서 대인을 못 만나서, 겸손하지 못하고 자만하기 때문에 처형당하거나 살해되었다. 용9효사에 이르면 노욕이 생기고 우월의식이 생긴다.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봉사하며 삶을 마무리해야 한다. 내가 아는 교장 중에 퇴임하고 나서 군내 버스 기사를 하시는 분이 계시다. 평소에도 존경하던 분인데 그 분이 그렇게 하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 멋진 분이라고 생각한다. 천(天)의 자리와 인(人)의 자리, 지(地)의 자리 중, 인의 자리가 가장 중요하다. 천이나 지의 자리는 우연의 원리가 지배한다. 인의 자리는 사람의 자리다. 그만큼 필연의 원리가 지배한다. 우리의 삶은 우연과 필연이 서로 교차하면서 만들어진다. 필연적인 것은 인간이 어떻게 해볼 수 있지만, 우연은 신의 영역이다. 지의 자리와 천의 자리는 『연금술사』에서 말하는 ‘어짜피 그렇게 될 일’, ‘이미 씌어있다’는 의미로 쓰이는 ‘마크툽’이다. 그래서 인의 자리에서 인간은 최선을 다해야 한다. 93과 94의 효의 자리가 인의 자리인 것이다. 민중과 지배 자리의 경계에 있다. 민중의 자리에서 지배의 자리로 올라 서려면 온 힘을 다해 잠재력을 발휘해야 한다. 우리 인생을 가만히 들여다보라. 반드시 도전해야만 할 때가 있다. 그때가 바로 인의 자리인 93에서 천의 자리인 94로 올라설 때인 것이다. 마치 엉금엉금 기던 아기가 처음으로 두 발로 서서 걷기 시작할 때처럼. 자신의 잠재력을 업그레이드하는 때이다. 대입시험을 치를 때, 취직할 때, 간부로 승진할 때 등등. 우리는 도전에 성공한 후에 그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바뀌는지 잘 알고 있다. 김연아, 손흥민, 임영웅 등은 자아의 신화에서 진정한 보물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어제와는 다른 인생을 살고 싶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도전(모험)을 해야 한다. ‘서면 그저 땅일 뿐이나, 걸으면 길이 된다’고 하였다. 머릿속으로 생각만 해서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실천해야 한다. 지성인과 지식인은 다르다. 지식인은 머릿속으로 이해하는데 그치는 사람이고, 지성인은 이해한 것을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다. 우리 모두 지성인이 되어야 한다. 그럼 도전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나. 각자에게 주어진 달란트(재능)를 계발해야 한다. ‘자강불식’해야 한다. 하늘의 끊임없는 운행을 본받아 자기가 현재 처한 위치에서 매일매일 쉬지 않고 재능을 갈고 닦아야 한다. 그리고 매일 반성하며 삶을 살아야 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했다.”로 시작하는 윤동주의 「서시」에 나타난 시적 화자처럼. 세상 만물은 하루 아침에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조금씩 점차로 천천히 바뀐다. 왜 그런가.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끊임없이 인내해야 꿈을 달성할 수 있다. 산티아고도 마찬가지였다. 자연은 쉬지 않는다. 봄에 꽃이 피는 나무들을 가만히 관찰해 보라. 그러면 보인다. 벚꽃이 지려고 할 때 어느새 새끼 손톱만한 연녹색 새로운 잎새들이 가지에 피어나 있는 것을. 매일 매일의 양적 축적은 질적 변화를 가져온다. 중요한 것은 단순하고 사소하다. 단순한 행위의 반복이 고도의 숙련을 만든다. 그러므로 자강불식해야 한다. 중천건괘를 살펴 보았다. 그 반대괘는 중지곤괘다. 하늘의 반대는 땅이다. 다음에는 중지곤괘를 살펴 본다. ☯ 점을 쳐서 중천건괘가 나오면 최고로 좋은 괘다. 중천건괘는 양의 성질이 가득하다. 남성성이 가득한 운으로 남성의 기운이 최고조에 달해 남성은 만사형통이나, 여성은 그렇지 못하다. 남성은 권력이 커지고 명예도 얻는다. 일이 척척 풀려간다. 일들이 마음 먹은대로 척척 풀려가게 하기 위해서는 건강과 도전이 필요하다. 매일 자강불식으로 건강을 지키고, 매사에 자신감과 자존감을 갖고 도전해야 한다. 여자의 경우 중천건괘가 나오면 매사에 주의하고 반성하며 삶을 살아야 한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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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01
  • [전재학의 교육칼럼] 자녀교육에서 ‘투 마취 러브(Too Much Love)’를 경계하며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우리는 ‘지나침은 부족함만 못하다(過猶不及)’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이는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많은 분야에 걸쳐서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한다. 과거 우리는 삶이 너무 빈곤해서 물리적, 정신적 공간을 구분하지 않고 비어있는 무엇이든지 채우려는 욕망이 가득했다. 그 결과 우리는 5천 년의 가난을 극복하고 지금처럼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선진국이 되었다. 정치의 민주화 역시 마찬가지다. 기나긴 독재와의 투쟁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최단기간 내에 이루어낸 민족의 위대함은 세계사에서 유례가 드문 쾌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듯이 이러한 번영과 발전의 이면에는 어두운 그늘이 존재한다. 특히 우리의 교육열에서 나타나는 부작용, 후유증이 그렇다. 우리의 전통적인 교육열은 망아지는 제주도로, 자식은 서울로 보내 제대로 키워 보겠다는 소망으로 채움에 대한 열정이 넘쳤으며 이는 곧 엄청난 성과로 이어졌다. 그런데 지나침은 항상 탈이 나게 마련인가? 과유불급의 현상이 우리 사회 전 영역에 들불처럼 번지면서 자녀에 대한 ‘투 마취 러브(Too Much Love)’는 이제 일종의 경각심마저 유발하고 있다. 최근의 ‘부모 찬스’가 낳은 각종 불법과 탈법은 사회 문제가 되어 이 땅에 진정한 자녀 사랑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게 만들고 있다. 자녀교육에 대한 지나친 열정이 시대적인 기치로 내세운 ‘정의, 공정, 평등’에 대한 의식과 대항함으로써 부모의 탐욕에 제동이 걸리는 현실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과유불급’에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논어의 해석과 시중(市中)의 해석이다. 경전에 의하면 넘침과 모자람은 적당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와 달리 시중의 해석은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이다. 후자는 생활의 경험에서 나온 평가다. 일례로 ‘십 리를 더 간 것이 덜 간 것보다 손해’라는 뜻에서 못하다고 한 것이다. 십 리를 덜 갔다면 십 리만 더 걸으면 목적지에 도달하나 목적지를 지나쳐 십 리를 더 간 사람은 목적지까지 돌아오기 위해 총합 이십 리를 더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과유불급은 투 마취 러브에 대한 시중의 생활 경험의 지혜를 따른다. 즉, 과한 행동은 모자라는 행동보다 나쁘다는 것이다. 모자라는 행동은 아쉬움을 남기지만 기회도 남긴다. 반면에 과한 행동은 마음에 상처를 입혀 기회를 잃을 뿐만 아니라 타인의 원한을 사기도 한다. 우리 사회는 두 분야에서 지나친 과유불급 현상이 지배적이다. 우선 정치적으론 ‘인사가 만사’라 했지만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흠결 없는 인사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시시비비는 가려야 하고 정당한 비판은 수용해야 한다. 부풀린 의혹과 가짜뉴스가 진실에 앞서도 안 된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념과 사상에 의해 무조건적인 지지와 반대를 위한 반대가 난무한다. 과연 정치에 중용은 없는 것일까? 하지만 교육에의 지나친 과유불급 현상은 어찌할 것인가? 자식에 대한 지나친 사랑이 결국 자녀를 망치고 국민 사이에 위화감을 조성하며 특히 교육 사다리를 통한 계층 이동의 국민적 희망마저 완전히 붕괴할 때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몇 년 전 사퇴한 한 법무부장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지나친 교육열은 그 후에도 유사한 사건들이 여기저기서 드러나고 있다. 이번에는 외형만 바꾸어 학교폭력의 징계를 모면하려 ‘부모 찬스’이자 권력의 위력을 동반한다. 어느 부모인들 자식에 대한 사랑에 차이가 있을까마는 직위와 권력, 부를 이용한 편법적이고 불법적인 지나친 사랑은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다. 이는 필자와 같은 필부필녀가 자기 연민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자녀에 대한 지나친 사랑이 불러온 불행은 부모와 자녀에게 각각 절제와 자립심, 양심, 부끄러움 등 수많은 인성적 측면에서도 성찰과 과제를 남긴다. 자녀교육이란 명분으로 부모의 영향력을 내세운 지나친 사랑은 궁극적으로 이 사회의 왕따를 길러내고 더불어 살아가야 할 민주적 가치마저 통째로 파괴하는 야만적 행위다. 지나치면 모자란 것보다 훨씬 못하고, 손해이고 위험하며 남겨둬야 할 기회마저 잃고 남의 원한을 산다는 것을 다시금 자각하자. ▣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現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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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30
  • [김홍제의 목요칼럼] 교각살우(矯角殺牛)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옛날 중국 풍습에는 종을 만들 때 짐승 피를 종에 바르는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제물로는 잘 생기고 뿔이 곧은 소를 바쳤다. 한 농부가 뿔이 조금 삐뚤어져 있어서 바로잡으려 팽팽히 뿔을 동여매었다. 그러다가 뿔 전체가 빠지는 바람에 소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유래이다. 결점(缺點)이나 흠을 고치려다 수단(手段)이 지나쳐 도리어 일을 그르치는 경우를 의미할 때 흔히 쓰는 고사성어이다. 교육계에 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백년대계라는 나무가 흔들리고 시야는 뿌옇게 흐려졌다. 교육은 공룡처럼 커다란 사회 분야이다. 이렇게 큰 분야를 수술하려면 준비가 치밀해야 한다. 사교육비를 없애기 위해 이른바 ‘킬러문항’을 없애라고 대통령이 발표했다. 발표 나흘 만에 교육과정평가원장이 사임했다. 정부에서는 대입 수능 5개월을 앞두고 평가원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사교육시장에 만연한 ‘카르텔’을 잘라내겠다는 것이다. 친척이 통증이 심해서 병원에 갔는데 피부약을 계속 바르고 약도 먹었지만 효과가 없었단다. 전문병원에 가자 대상포진이라는 진단이 금방 나와서 치료를 제대로 할 수 있었다. 잘못된 진단과 치료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되는 많은 고생을 했다고 들었다. 차량수리나 병원치료에 서 잘못된 진단으로 고생했다는 사례를 들은 경험들이 있으리라 믿는다. 진단을 잘못한 수술은 생명까지 위협한다. 살을 가르고 혈관을 자르고 내용물을 꺼내고 다시 살을 꿰매는 일에는 반드시 커다란 출혈이 있다. 그 일이 자기 몸이라면 걱정이 클 것이다. 그 의사가 최고의 전문가라 하더라도 큰 수술을 앞둔 사람들은 불안에 떨 수밖에 없다. 전문의사가 아닌 병원 관계자가 수술을 잘 안다고 내 몸에 메스를 댄다면 어떨 것인가. 지금 세계는 교육에 대하여 대변혁을 요구하고 있다. 교육에는 크고도 중요한 시기이다. ‘OECD 교육 2030’, ‘UNESCO 교육의 미래’ 보고서는 전 지구적 ‘위기’ 인식에서 교육의 변혁을 강조한다. 환경과 경제와 사회에 대한 도전은 인류가 함께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공통의 과제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기존의 경제 중심 · 경쟁주의 교육관에서 벗어나 사회를 변혁하고 미래를 만들어갈 역량을 제시한다. 다양한 교육 전망과 미래 교육 시나리오를 관통하는 핵심은 결국 ‘교육을 통해 지구를 구하라’는 것이다. 그만큼 절박한 호소를 하고 있다. 미래를 위해 교육 체질 개선이 필요한 시대이다. 학벌과 경쟁은 그대로 두고 사교육비를 줄이기 위해 변별력을 없애는 시도는 효용성에 대한 의심을 받고 있다. 대학 서열, 입시 체제,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교육 현장이 현실이다. 변혁적 교육론이 필요하다. 지구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교육의 대변혁을 요구하는 시대에 시험문제 한두 개에 얽매이기보다는 시대를 초월하는 교육 변혁에 대한 큰 계획과 실천을 준비해야 한다. 상대평가를 통한 경쟁과 불평등한 교육체제에 대한 정비가 없이 급조된 갈등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행동은 한국교육에 대한 미래를 걱정하게 한다. 수능 킬러문항을 킬(kill)하려다가 교육을 죽이는 교각살우는 없어야겠다. 섣부른 집도는 위험하다. 수술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가 크고 심각할수록 전문의가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 메스를 들어야 국민이 가지는 근심이 적을 것이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속담과 교각살우(矯角殺牛)라는 생각들이 쓸데없는 걱정이 되길 바란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학생교육문화원 예술진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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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9
  • [10대인생학교 행복교육] 누가 죄인인가
    [교육연합신문=전준우 칼럼] 기본적으로 죄의 기준은 법이다. 공동 관심사를 조정하고 보편적 평온을 유지할 능력이 있는 연방 정부를 수립하려면, 정부의 보호 및 관리·감독에 맡겨질 대상과 관련해 헌법안 반대자들이 주장하는 원칙과 반대되는 원칙 위에 연방 정부가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방 정부는 정부의 힘을 시민 개개인에게까지 확장해야만 한다. 연방 정부는 중간에 게재하는 어떤 입법의 도움 없이도 성립해야 하며, 연방 정부의 결정을 집행할 상임 집행관이라는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 중앙 권위의 통치권이 법원이라는 매개를 통해 표명되어야만 한다. -연방주의자(Federalist) 17권, 제4대 미국 대통령 제임스 메디슨 외 4인 국가체제가 형성되기 시작한 이후 법은 죄의 경계선을 지었다. 법이 없다면 죄는 죄로 성립될 수 없고, 법이 있다면 죄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도 죄가 된다. 국가 사법체제 아래에서 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 인간은 없다. 법이 있기에 안전한 사회가 만들어지고, 상호 신뢰할 수 있는 국가가 형성된다. 오레스테스의 죄는 친족살인이다. 아버지 아가멤논을 죽인 어머니 클뤼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 오레스테스는 그들을 죽인 친족살해범이다. 반인륜적 행위이며 용서받을 수 없는 죄다. 자비로운 여신들은 국가정치체제인 폴리스 police와 친족, 가족, 혈연관계인 오이코스 oicos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이며, 오레스테스의 친모살인죄를 두고 공방전을 펼치는 배심원제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가멤논이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뒤 아내인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정부 아이기스토스에게 살해당하자 그의 아들은 오레스테스와 누이인 엘렉트라는 어머니인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를 죽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어머니와 정부를 죽이고 난 뒤 오레스테스는 아테나이에서 아테네 여신에 의해 무죄 판결을 받는다. 인류사회에서 법은 정의의 실현과 정당성 부여를 위한 권력과 통제의 권한을 갖는다. 독특하게도 <자비로운 여신들>에서는 인간의 법, 혹은 보편적 진리와 사실에 대한 고찰을 장려하기보다는 아테네라는 신에 의한 직접적인 판결이 내려진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신의 직접적 개입Deus ex machina'라고 부른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론(Philon, B.C25~A.D50, 고대 유대인 철학자)은 신을 두고 "신은 선한 것보다 더 선하며 완전한 것보다 더 완전하다(Er ist besser als gut, vollkommener als vollkommen)"고 이야기한 바 있다. 결국 신의 존재유무에 대한 논쟁은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신의 뜻과 의는 인간의 이성과 감성이 닿을 수 없는 완전한 세계에 속해있다는 점에서, 아테네가 내린 친모살인에 대한 무죄 판결은 신의 직접적인 판결이며 인간의 법보다 우위에 있는 절대적 선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다소 흥미롭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해서 아테네의 무죄 판결이 절대적으로 옮거나 신이 내린 판결의 온전함을 주장하는 작품이라고 단정 짓기엔 위험할 수 있다. 아테네의 주장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인간들이 심판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 사건은 너무나 중대하다. 그렇기에 극심한 분노를 불러일으킬 이 사건을 심판할 권한은 나에게도 없다. 다만 그대(오레스테스)는 관습에 따라 이미 정화되어 아무런 해가 없는 탄원자로 나의 집에 왔노니, 내가 그대를 받아들이겠다.(중략) 사건이 이미 나에게 떨어졌으니, 나는 선서를 하되 절대 불의한 마음으로 선서를 어기지 않을 사건의 재판관들을 선정하여 영원히 그 법규를 세워갈 것이다. -아테네의 대답, 자비로운 여신들 470-484행 본 작품 속에서 여신 아테네의 개입은 인간(오레스테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갈등 상황을 해석하고 해결해 내는 능력자로서의 역할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올바른 선택이란 무엇이어야 했는가에 대해 가부동수가 나온 상황에서 아테네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이를 두고 부당한 처사라고 주장하며 맞대응하는 복수의 여신들이 자비로운 여신들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배려하는 것이 아테네의 역할이다. 마지막으로 판결을 내리는 것은 내 임무다. 나는 오레스테스를 위해 이 투표석을 던진다. 나에게는 나를 낳아준 어머니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결혼을 제외하고 모든 면에서 진심으로 남자 편이며, 온전히 아버지의 편이다. 그래서 나는 여인의 죽음을 더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녀는 집안의 가장인 남편을 죽였기 때문이다. 투표가 가부 동수라도 오레스테스가 이긴 것이다. -아테네의 판결, 자비로운 여신들 734-741행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이 지금보다 미미했을 거라는 평가는 이해할 수 있다. 당시만 해도 전쟁이 일상이었기에 강한 힘과 권력으로 가정을 지킬 수 있는 남성의 권한이 더 컸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해서 남성우월주의를 이야기하는 듯한 아테네의 주장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여성의 지위가 남성보다 낮았을 수는 있으나, 전쟁과 정치, 권력을 제외한 부분에서의 재능, 역량, 가능성에 있어서는 남성보다 뒤처졌다고 생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작품에서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우선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전쟁영웅인 아가멤논을 살해한 친족살인의 첫 번째 피의자로 등장하긴 하지만, 오디세우스의 아내이자 정절의 상징인 페넬로페와 달리 용기 있고 대담한 여성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가멤논과 클리타임네스트라 사이에 태어난 막내딸이자 오레스테스의 누나인 엘렉트라 역시 아버지를 살해한 어머니를 향한 복수심을 오레스테스로 하여금 유발함으로써 결정적인 선택을 하도록 이끄는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살인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네이아 역시 희생제물로 바쳐졌지만, 이후 재구성된 작품(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에서 아르테미스 여신에 의해 신전의 여사제로 봉사하는 역할로 등장함으로써 그리스 비극 작품 속 남성이 결코 여성보다 우위에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지는 않는다. 심지어 아테네와 아르테미스는 여신 아닌가! 유한 성격에 세상만사에 별로 걱정을 하지 않고 사는 나에 비해, 아내는 트집을 잘 잡으며 말에 졸하다. 말로 여러 사람 죽이는 모습을 꽤 많이 봐왔다. 반면 생각이 복잡한 나에 비해 단순한 아내는 일처리 능력치만 두고 봤을 때 나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다. 어느덧 결혼 10년 차에 접어들었다. 클리타임네스트라, 엘렉트라 같은 아내보다는 페넬로페 같은 아내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 전준우 ◇ 작가, 강연가, 책쓰기컨설턴트 ◇ 前국제대안고등학교 영어교사 ◇ [한국자살방지운동본부] ◇ [한국청소년심리상담센터] 채널운영자 ◇ [전준우책쓰기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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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6
  • [육우균의 周易산책] 하늘은 하느님이다(중천건괘) 上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하늘은 광활한 공간이다. 한없이 열려 있다. 현대 수학으로는 ‘∞’라 표시한다. 하늘은 무한을 상징한다. 상상으로 공간은 확장된다. 실물을 볼 수 없을 때, 우리는 눈을 감는다. 즉 하늘은 확산의 존재를 가리킨다. ‘하늘’은 ‘한+늘’(ㄴ탈락)에서 왔다. ‘한’은 ‘크다’의 의미고, ‘늘’은 ‘시간의 영속성’, 즉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져 흘러가는 시간’을 가리킨다. ‘한’은 무한 공간, ‘늘’은 무한 시간을 말한다. 한자문화권에서도 ‘우주(宇宙)’라고 할 때 우(宇)는 공간을, 주(宙)는 시간을 의미했다. 즉 ‘우주’의 순우리말이 ‘하늘’이다. 주역에서 하늘은 ‘☰’로 표시한다. 양의 성질이 세 개나 있다. 따라서 ‘하늘이란 무한히 확산되는 그 무엇’이라 정의한다. 「대상전」에 보면 “하늘의 운행하는 모습이 건강하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쉼 없이 자신의 힘으로 자기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天行, 健, 君子以自强不息)라고 씌어 있다. 하늘을 잘 관찰해 보면 천체의 운행이 잠시도 쉬지 않고 운행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하늘은 하느님이다. 즉 하늘은 완전하여 거칠 것 없이 무한히 확장하는 성질로 신과 같이 우러러본 자연이다. 우리 선조들은 해가 뜨고 지는 일, 달이 뜨고 지는 일, 12황도의 움직임, 밀물과 썰물이 끊임없이 바뀌는 일 등 그런 건강한 모습을 닮고자 했다. 모든 살아있는 생물들은 잠시도 쉬지 않는다. 움직임이 지속되어야 건강하다. 동물은 움직여야 한다. 식물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끊임없이 물을 땅 속에서 끌어올려 이파리로 올려주고 이파리들은 쉴 새 없이 광합성 작용을 한다. 건강한 사람의 몸속 세포도 쉴 사이 없이 움직인다. 용으로 상징되는 중천건괘의 효사93을 보더라도 ‘하루 종일 자강불식하는 자세로 씩씩하고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고 되어 있다. 93의 효에서 94의 효로 올라가려면, 즉 민중의 자리에서 지배의 자리로 올라서려면 하늘의 “끊임없는 운행을 본받아 잠시도 쉬지 않고 ‘자강불식(自强不息)’하는 노력을 보여야 한다는 것을 『주역』은 말하고 있다. ‘중천건괘’의 모습이 잘 나타난 소설은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의 『연금술사』이다. 『연금술사』는 개인 전설 또는 인생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양치기 소년 산티아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산티아고의 여정을 따라가 보자. 주인공 산티아고는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양 60마리를 키우는 양치기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집트 피라미드 가까운 곳에 보물이 묻혀 있다는 말을 듣는다. 여정이 시작된다. 크리스탈 가게에서 일하게 된다. 거기에서 양들이 가르쳐 주지 못한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제 피라미드에 갈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을 가지게 된 산티아고는 삶에서 여러 다양한 경험들을 하게 된다. 그는 영국인도 만나고, 낙타몰이꾼도 만나고, 대상행렬을 따라가며 사막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오아시스에서 파티마라는 아리따운 여인과 사랑에 빠지고, 환상의 꿈을 꾼다. 산티아고는 여정에서 ‘모든 일에는 결국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그 많은 시련과 시험에도 불구하고 신의 손길은 언제나 한없이 자애롭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자아의 신화’를 이루려면 단순함 때문에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던 신의 표지들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신의 표지란 나의 인생에서 만나게 된 사람들이 나에게 해준 말이다. 나와 관계된 사람들은 신의 대리인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들과 소통하게 되고, 그것이 결국 우주와의 소통이요, 신과의 대화인 것이다. 내가 하루 동안에 만난 사람들, 쓰레기 청소부, 배달하는 사람, 집주인, 직장 상사나 부하 직원 등이 모두 신의 표지가 될 수 있다. 그들이 바로 신의 대리인들이다. 산티아고가 피라미드로 가는 여정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그러므로 하루하루 자아의 신화를 살아가는 세상 모든 사람 앞에 위대한 업은 열려 있는 것이다. ‘위대한 업’은 자기가 처한 현실에서의 충실함이다. CBS에서 아침에 방송하는 ‘김용신의 <그대와 여는 아침>’ 프로그램 맨 마지막 멘트가 ‘오.하.당’이다. “오늘 하루도 당신 거예요.”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24시간. 즉 하루를 주인으로 살아내는 것이 바로 위대한 업을 만들어 가는 일인 것이다. 늙은 왕이 산티아고에게 해 준 말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된 유일한 의무지.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연금술사』에서 나온 이 말은 너무나 유명해진 말이다.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일은 곧 우리에게 예정된 진정한 보물을 찾아내는 일이고, 그것이 바로 삶의 연금술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아의 신화는 결국 주역의 중천건괘에서 말하는 ‘자강불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꽃 한 송이가 피어나려면 사계절이 모두 필요하듯이 한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 전체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진정한 보물을 찾기 위해 떠나지 마라. 현실에 얽매여서 진정한 인생의 보물을 찾을 수 없다고 변명도 하지 마라. 현재를 열심히 성실히 자강불식하면서 살아라. 그것이 자아의 신화에서 진정한 보물을 갖게 되는 길임을 『연금술사』에서 보여준다. 우리는 과거에 사는 것도 아니고, 미래에 사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현재에 사는 것이다. 생명은 지금 이 순간에만 영원한 것이다. 현재에 머물 수 있다면 행복한 것이다. 자신의 진정한 보물이 무엇이겠는가. 현실을 열심히 살아가면서 발견하게 되는 자신의 가치인 것이다. 『금강경』에서도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고서 행한 일이 아주 일상적인 일이었다. 발 씻고 방석에 가만히 앉아 밥 먹고 강의했다. 현실에 매어져 있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행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연금술사』를 쓴 파울로 코엘료가 한 말- “성모 마리아께서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수도원을 찾았을 때, 곡마단에서 일하던 아버지로부터 공을 가지고 노는 기술을 배운 게 고작이었던 볼품없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아기 예수와 성모께 자신의 마음을 바치고 싶어 했었기 때문에, 그는 주머니에서 오렌지 몇 개를 꺼내 공중에 던지며 놀기 시작했고, 그것을 본 아기 예수가 처음으로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성모께서는 그 사제에게만 아기 예수를 안아볼 수 있는 영광을 허락했다. 그가 보여드릴 수 있는 유일한 재주였다. 우리 선조들은 마음속으로 염원을 할 필요가 있을 때 달이 뜨는 밤에 장독대에 정화수 한 그릇을 떠놓고 홀로 기도를 올렸다. 그 오롯한 한 마음, 당연히 신이 함께 하지 않겠는가.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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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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