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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부산 크루즈관광의 허와 실, 크루즈관광객 100만 시대 부산은 무엇을 얻을 것인가
[교육연합신문=이상헌 기고] 크루즈선이 부산항에 입항하면 항구는 활기를 띤다. 거대한 선박과 수천 명의 외국인 관광객은 부산이 세계적인 해양관광도시로 도약하고 있다는 기대를 높인다. 부산항만공사는 2030년까지 크루즈선 520항차, 관광객 100만 명 달성을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제시된 전망에 따르면 2026년에는 상반기에만 219항차, 약 32만 명이 부산항을 찾았고, 연간 이용객은 약 7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부산을 찾는 크루즈 관광객이 늘어나는 것과 부산 시민의 삶이 나아지는 것은 과연 같은 일인가. 크루즈관광의 성공을 입항 횟수와 방문객 수만으로 판단한다면 정작 중요한 경제적 가치를 놓칠 수 있다. 이제 부산의 크루즈관광은 양적 성장의 성과를 넘어 질적 성장의 실효성을 검증해야 할 시점이다. 숫자는 성장하지만, 지역경제의 체감 효과는 별개의 문제다. 크루즈관광은 일반적인 숙박형 관광과 구조가 다르다. 관광객들은 선박 안에서 숙박과 식사를 해결하고, 기항지에서는 제한된 시간 동안 관광과 쇼핑을 즐긴다. 선박이 몇 시간 정박하는 동안 수천 명이 부산을 방문하더라도 이들이 실제로 부산 지역 상점과 식당에서 얼마를 소비하는지는 별도로 살펴봐야 한다. 관광객 수가 증가했다고 해서 지역경제의 수익도 같은 비율로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관광객이 대형 관광버스를 타고 주요 명소 몇 곳을 둘러본 뒤 다시 선박으로 돌아간다면, 방문객 수는 통계에 잡히지만 동네 식당과 전통시장, 골목상권이 얻는 경제적 효과는 제한적일 수 있다. 관광상품의 구성과 소비 경로에 따라 수익이 일부 대형 사업자에게 집중될 가능성도 있다. 이는 부산 크루즈관광이 실패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관광객 증가라는 기회를 지역경제의 실질적 성장으로 연결하는 장치가 얼마나 잘 마련돼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는 뜻이다. 앞으로 부산은 방문객 수뿐 아니라 관광객 1인당 지역 내 소비액, 체류시간, 지역 소상공인 매출 기여도, 지역 고용 효과, 재방문 의향 등을 함께 측정해야 한다. 그래야 크루즈관광이 부산에 얼마나 큰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지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부산의 매력은 충분하다. 문제는 관광상품을 만드는 방식이다. 부산에는 크루즈관광의 경쟁력이 될 만한 자산이 풍부하다. 해운대와 광안리의 해안 경관,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의 생활문화, 감천문화마을의 독특한 풍경, 한국전쟁의 역사를 간직한 원도심, 부산 특유의 해양문화와 음식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산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관광객이 그 가치를 충분히 경험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관광객이 유명 관광지 몇 곳에서 사진만 남기고 떠나는 것과 부산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이해하고 지역 음식을 맛보며 도시의 이야기를 경험하는 것은 전혀 다른 관광이다. 부산은 관광지를 단순히 연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경험을 설계해야 한다. 외국인 관광객이 자갈치시장에서 부산의 해산물 문화를 이해하고, 원도심에서 도시의 역사와 산업 발전을 배우며, 지역 상점에서 부산의 생활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특히 관광 안내와 해설의 품질이 중요하다. 언어를 단순히 번역하는 수준을 넘어 부산의 역사와 문화, 음식의 의미를 외국인의 눈높이에 맞춰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관광객이 도시를 깊이 이해할수록 관광 경험의 만족도와 소비의 폭도 커질 가능성이 높다.결국 관광의 경쟁력은 관광지의 개수보다 그곳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어떤 기억을 가져가는가에 달려 있다. 체류시간을 늘리는 것이 경제적 가치를 높이는 출발점이다. 부산시가 크루즈관광 활성화 전략에서 체류 확대와 재방문 설계를 강조하고, 24시간 크루즈터미널 운영을 기반으로 오버나잇 크루즈 유치에 나선 것은 주목할 만하다. 부산항만공사 역시 기항 중심에서 모항 중심으로 전환하고 1박 2일 체류형 상품을 확대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크루즈관광의 경제적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방향이다. 낮에 잠시 방문하는 관광객보다 밤까지 머무는 관광객에게는 저녁 식사, 야간 관광, 공연과 문화체험, 숙박 전후의 추가 소비 기회가 더 많이 생긴다. 물론 체류시간이 늘어난다고 소비가 자동으로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관광객이 실제로 이용할 수 있는 콘텐츠, 편리한 교통, 안전한 이동 환경이 함께 갖춰져야 한다. 부산은 광안리 야경과 해변 문화, 원도심 역사 탐방, 지역 미식, 공연과 전시를 결합한 시간대별 관광상품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크루즈 입항 시간에 맞춰 시장과 음식점, 문화시설이 연계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관광객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다국어 안내와 교통정보도 제공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관광객을 더 오래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다. 부산에서 더 많은 가치를 경험하도록 만들고, 그 경험이 지역 소비와 재방문으로 이어지게 하는 일이다. 크루즈 모항 육성은 관광을 넘어 산업의 문제다. 크루즈관광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부산을 잠시 들르는 기항지에서 출발과 도착이 이뤄지는 모항으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모항은 관광객의 승선과 하선뿐 아니라 항공·철도 연계, 숙박, 식음료, 선박 정비, 연료와 식자재 공급, 물류와 전문서비스 등 다양한 산업과 연결된다. 부산에서 출발하는 크루즈가 늘어나면 관광산업의 파급효과가 선박 운항과 관련 서비스 분야로 확대될 수 있다. 다만 모항 육성에는 국제선 연결성, 선사의 운항계획, 안정적인 수요, 터미널 수용능력, 출입국 절차의 효율성 등 여러 조건이 필요하다. 시설 확충만으로 경쟁력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부산은 크루즈 선사 유치와 함께 지역기업이 선용품 공급, 관광서비스, 운송, 콘텐츠 제작 등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관광객이 부산에 와서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크루즈 산업의 공급망 자체가 부산에서 성장하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모항 전략의 경제적 의미다. 다섯 가지 전환이 필요하다. 부산 크루즈관광이 지속 가능한 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 전환이 필요하다. 첫째, 방문객 중심에서 지역경제 가치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 입항 횟수와 관광객 수에 더해 지역 내 소비액, 소상공인 매출 기여도, 체류시간, 재방문율을 함께 공개하고 평가하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둘째, 단체 관광 중심에서 선택형 체험관광으로 확대해야 한다. 부산의 음식, 역사, 해양문화, 전통시장, 예술과 지역 생활을 연결한 다양한 상품을 개발하고 관광객이 자신의 관심에 맞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셋째, 낮 중심 기항에서 야간·체류형 관광으로 전환해야 한다. 야간 콘텐츠와 대중교통, 다국어 안내, 안전관리 체계를 함께 구축해 체류 확대가 실제 소비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넷째, 관광 유치에서 산업 생태계 육성으로 발전해야 한다. 지역기업과 선사 간 거래를 확대하고, 부산의 식품·수산물·서비스·문화콘텐츠가 크루즈 산업의 공급망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다섯째, 관광객의 만족을 재방문과 추천으로 연결해야 한다. 크루즈 여행에서 부산을 경험한 관광객이 다음에는 부산에 며칠간 머무는 개별여행객으로 돌아오도록 후속 관광상품과 맞춤형 홍보를 설계해야 한다. 크루즈는 부산을 세계에 알리는 첫 번째 관문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전략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부산시와 부산항만공사, 관광업계, 지역 상인, 교통사업자, 문화기관이 함께 성과를 관리해야 한다. 관광객 증가의 혜택이 지역사회에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지속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부산 크루즈관광의 진정한 성공은 배가 떠난 뒤에 결정된다. 크루즈관광은 부산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국제적인 접근성, 해양도시라는 정체성, 풍부한 문화자산을 활용한다면 부산은 동북아 크루즈관광의 주요 거점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크루즈선이 많이 들어온다는 사실만으로 관광도시의 성공을 선언할 수는 없다. 관광객이 부산을 얼마나 깊이 경험했는지, 지역 상권이 얼마나 혜택을 얻었는지, 부산의 기업과 시민에게 어떤 새로운 기회가 생겼는지를 함께 물어야 한다. 크루즈관광의 성패는 배가 몇 척 들어왔느냐가 아니라, 배가 떠난 뒤 부산에 무엇이 남았느냐로 판단해야 한다. 관광객의 발길이 지역 상권의 매출로 이어지고, 일회성 방문이 재방문으로 연결되며, 관광 수요가 부산의 일자리와 연관산업의 성장으로 이어질 때 크루즈관광은 비로소 지속 가능한 산업이 된다. 2030년 관광객 100만 명이라는 목표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그러나 부산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는 그 숫자 자체가 아니다. 부산을 찾은 세계인이 다시 방문하고 싶어 하는 도시, 지역기업이 관광산업의 성장에 참여하는 도시, 시민이 관광의 혜택을 체감하는 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부산의 크루즈관광은 이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왔는가”에서 “얼마나 큰 가치를 함께 만들었는가”로 질문을 바꿔야 한다.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때 부산은 단순한 크루즈 기항지를 넘어 세계인이 기억하고 다시 찾는 해양관광도시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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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건물은 세워진다, 도시는 기획된다
[교육연합신문=이상헌 기고] 세계적인 관광도시를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화려한 야경일까, 유명한 축제일까, 아니면 세계인의 시선을 사로잡는 랜드마크일까. 물론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세계적인 도시의 경쟁력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다른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은 건물만 보러 도시를 찾지 않는다. 그 도시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순간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계획한다. 그리고 그 경험이 기대 이상일 때, 도시는 관광지를 넘어 목적지가 된다. 부산은 이미 적지 않은 것을 갖추고 있다. 국제적인 축제와 다양한 공연, 해변과 항구가 만들어 내는 독특한 풍경, 역동적인 음식문화가 있다. 부산콘서트홀이 문을 열었고, 2027년에는 부산오페라하우스 개관도 예정돼 있다. 이제 부산 관광의 과제는 무엇을 더 지을 것인가보다, 이미 가진 자산으로 어떤 도시의 미래를 만들어 낼 것인가에 있다. 세계적인 관광도시는 명소의 숫자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 도시를 찾아야 할 이유가 얼마나 분명한가에 따라 완성된다. 파리의 문화적 매력은 에펠탑 하나로 설명되지 않는다. 런던의 관광 경쟁력도 빅벤이나 버킹엄궁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두 도시에는 예술과 공연, 전시와 스포츠, 미식과 일상이 끊임없이 새로운 방문 동기를 만들어 내는 구조가 있다. 관광객은 특정 장소를 방문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신이 여행하는 시기에 그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을 경험하기 위해 움직인다. 여기서 부산이 주목해야 할 지점이 있다. 부산에도 축제는 많고 공연도 열린다. 문제는 행사의 유무가 아니라 개별 행사가 도시 전체의 매력으로 얼마나 연결되는가에 있다. 각각의 축제와 공연이 저마다의 성과를 내는 것과, 그 모든 경험이 ‘부산에 가야 하는 이유’로 축적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관광객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부산을 여행하려는 외국인이 특정 공연을 발견하고, 그 일정에 맞춰 항공편과 숙박을 예약하며, 낮에는 도시를 둘러보고 저녁에는 공연을 관람한다면 공연은 단순한 문화행사가 아니다. 여행을 결정하게 만든 핵심 동기가 된다. 반대로 공연이 열려도 해외에서 정보를 접하기 어렵고, 예약과 관람이 불편하며, 여행 일정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 잠재력은 충분히 발휘되기 어렵다. 이 차이가 부산 관광의 다음 단계를 결정할 수 있다. ■ 오페라하우스가 부산의 미래를 대신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2027년 개관을 앞둔 부산오페라하우스는 부산의 문화와 관광에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세계적인 수준의 공연을 유치하고, 부산의 예술적 위상을 높이며, 북항을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발전시킬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건축물이 완성되는 순간 세계적인 오페라 도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적인 공연장은 외관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 평가받는다. 어떤 작품을 올리는가, 어떤 예술가를 키우는가, 얼마나 지속적으로 수준 높은 공연을 선보이는가, 시민과 관광객이 얼마나 자주 그곳을 찾는가가 중요하다. 개관 기념 공연이 세계적인 관심을 끄는 것도 의미가 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다음 해, 그다음 시즌에도 사람들이 부산오페라하우스의 공연을 기다리게 만드는 일이다. 한 번의 화려한 개관보다 오랜 시간 축적되는 예술적 신뢰가 도시의 브랜드를 만든다. 또한, 오페라하우스가 독립된 섬처럼 운영되어서는 안 된다. 부산콘서트홀과 기존 공연장, 영화제와 지역 축제, 전시공간과 관광업계가 서로의 관객을 연결해야 한다. 클래식 공연을 보러 온 사람이 부산의 다른 문화공간을 찾고, 축제를 즐기러 온 관광객이 다음 공연을 예약하는 순환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부산오페라하우스의 진정한 성공은 그 건물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들어오는가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그 공간이 부산 전체의 문화적 활력을 얼마나 확장하는가로 평가해야 한다. ■ 축제의 도시에서 ‘문화적 목적지’로 부산은 축제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하는 도시라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축제와 공연을 새로운 관점에서 연결해야 하는 도시다. 필요한 것은 행사 목록의 확대가 아니라 도시 전체를 하나의 문화 프로그램처럼 기획하는 발상이다. 봄에는 어떤 예술을 경험할 수 있고, 여름에는 바다와 음악이 어떻게 만나며, 가을에는 영화와 공연이 어떤 분위기를 만들고, 겨울에는 부산에서만 즐길 수 있는 문화적 경험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계절별 축제를 배치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부산을 방문하는 사람이 자신의 관심사와 여행 시기에 따라 도시의 문화를 발견할 수 있도록, 흩어진 프로그램을 하나의 이야기로 편집하자는 것이다. 예컨대 해외 관객이 부산의 오페라 공연을 예약하면 인근 전시와 관광 프로그램을 함께 발견할 수 있고, 영화제를 찾은 방문객이 지역 공연과 미식 경험으로 자연스럽게 관심을 넓힐 수 있어야 한다. 서로 다른 행사가 관객을 놓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부산 체류를 함께 풍성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이러한 연결은 홍보의 문제인 동시에 산업의 문제다. 공연 기획자와 관광업계, 숙박업계, 지역 상권이 일정과 상품을 함께 설계한다면 문화행사의 효과는 공연장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 문화예술은 관광 소비를 이끌고, 관광은 다시 예술의 관객과 재원을 넓히는 관계가 될 수 있다. ■ 세계인의 시선보다 먼저, 관객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세계적인 관광도시를 지향할수록 해외 유명 공연과 국제적인 이벤트에 관심이 쏠리기 쉽다. 그러나 외부의 명성을 빌려오는 것만으로는 도시의 문화적 자립성을 확보할 수 없다. 세계적인 예술단체를 초청하는 일과 함께 부산의 예술가들이 성장하고, 지역의 공연단체가 새로운 작품을 만들며, 부산에서 제작한 콘텐츠가 다른 나라의 무대에 오르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세계의 예술이 부산에 도착하는 도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부산의 예술이 세계로 나가는 도시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시민의 역할도 중요하다. 시민이 일상적으로 공연장을 찾고 축제를 즐기며 지역 예술을 지지할 때 문화 인프라는 비로소 살아 있는 자산이 된다. 관광객만을 위해 만들어진 문화공간은 특정 시기의 방문객에 의존하기 쉽지만, 시민과 관광객이 함께 이용하는 공간은 도시의 문화적 기반을 더 튼튼하게 만든다. 결국 관광객에게 제공하는 경험의 수준은 그 도시가 평소 축적해 온 문화의 수준과 무관하지 않다. 관광객을 위한 특별한 장면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시민이 평소에도 좋은 공연과 예술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 관광객 수를 넘어, 도시의 선택받는 힘으로 관광객 수는 분명 중요한 지표다. 부산이 세계적인 관광도시들과 경쟁하려면 방문객 규모를 확대하는 노력도 지속해야 한다. 다만 숫자의 성장만으로 도시의 국제적 위상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부산을 방문한 사람이 왜 이곳을 선택했는지, 여행 중 무엇을 가장 인상 깊게 경험했는지,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 다시 방문할 의향이 있는지까지 살펴야 한다. 특히, 공연과 축제가 실제로 숙박 예약과 지역 소비, 재방문으로 이어지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문화행사의 관객 수와 관광객의 만족도, 지역경제에 미친 효과를 함께 분석해야 다음 기획도 정교해질 수 있다. 이제 부산 관광정책에는 관광과 문화예술을 따로 바라보지 않는 관점이 필요하다. 공연장은 문화시설이면서 관광 동기이고, 축제는 시민의 문화행사이면서 도시의 국제적인 홍보 자산이다. 이 둘을 연결하는 능력이 앞으로 부산의 경쟁력을 좌우할 수 있다. 부산은 더 이상 세계적인 관광도시가 되기 위해 무엇인가를 처음부터 만들어야 하는 도시가 아니다. 이미 가진 자산을 어떤 순서와 방식으로 연결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도시다. 오페라하우스의 개관은 그 가능성을 시험할 중요한 기회다. 건물의 완공을 도시의 성취로 끝낼 것인지, 새로운 문화관광 시대의 출발점으로 만들 것인지는 앞으로의 운영과 기획에 달려 있다. ■ 도시는 건축으로 모습을 갖추지만, 기획으로 기억된다. 부산이 지향해야 할 세계적인 관광도시는 명소가 많고 축제가 화려한 도시만이 아니다. 세계인이 부산의 공연을 보기 위해 여행을 계획하고, 축제의 일정에 맞춰 방문하며, 그 경험 때문에 다시 돌아오는 도시다. 부산에는 이미 무대가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 무대들을 하나의 도시적 경험으로 연결하는 안목과 실행력이다. 오페라하우스의 불이 켜지는 날, 부산의 관광도 함께 새로운 막을 올릴 수 있어야 한다. 그때 부산은 세계적인 관광도시를 꿈꾸는 데 머물지 않고, 세계인이 찾아올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도시로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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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늘봄학교 전면화의 명암
[교육연합신문=박진우 칼럼] 초등 방과 후와 돌봄을 통합한 '늘봄학교'가 전국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초등 1~2학년까지 정착되며 학부모의 양육 부담 완화와 국가 책임 돌봄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고 있다. 기존 돌봄교실의 높은 대기 수요를 흡수하고 다양한 맞춤형 프로그램을 제공해 아이들에게 안전한 일상을 보장하겠다는 정책적 취지는 교육 가족 모두가 깊이 공감하는 바다. 그러나 제도가 현장에 안착해 가는 과정에서 학교가 겪는 공간의 과밀화와 관리 체계의 과부하는 지속가능성을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엄중한 과제다. 실제로 교육부가 발표한 「2026년 늘봄학교 추진 현황」에 따르면, 초등 1~2학년으로 대상이 확대된 이후 참여율은 80%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기존의 돌봄 대기 수요를 사실상 해소하는 가시적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양적 성장의 이면에서 나타난 공간 여건의 격차는 여전히 깊은 고민을 안겨준다. 공간이 턱없이 부족한 대도시 과밀 지역의 경우 일반 정규 교실을 늘봄과 함께 쓰는 '겸용 교실' 비율이 늘면서 교사의 수업 연구 및 학생 상담 공간이 잠식되는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반면 농어촌 및 원도심 학교는 전문 강사 수급의 어려움과 방과 후 안전 관리 인력 부족이라는 상반된 난관에 직면해 있다. 학교 담장 안으로 모든 돌봄 수요를 흡수하려는 물리적 집중이 낳은 구조적 한계다. 학교는 통계표 위의 숫자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배움의 터전이자 아이들의 삶이 자라나는 공간이다. 모든 돌봄과 보육의 책무를 학교라는 단일 기관의 울타리 안에만 가두려 한다면, 교원은 본연의 교수·학습 연구와 학생 지도에 온전히 집중하기 어렵고 돌봄 서비스의 질적 도약 또한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질 높은 교육'과 '안정적인 공공 돌봄'이 조화롭게 공존하기 위해서는 학교와 지역사회가 유기적으로 역할을 나누는 패러다임의 확장이 요구된다. 우선, 학교 중심의 돌봄을 넘어선 '지자체 책임형 협력 거버넌스' 확대가 절실하다. 학교 밖 유휴 공공시설, 청소년수련관, 주민자치센터, 도서관 등을 거점형 늘봄센터로 적극 발굴·연계해야 한다. 공간이 부족한 학교의 아이들이 안전하게 이동해 질 높은 예체능 및 놀이 프로그램을 누릴 수 있도록 지자체가 통학 및 공간 운영을 전담하는 '온 마을 돌봄 체계'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와 함께 학교 내 '교육'과 '돌봄'의 운영 체계를 행정적·공간적으로 정교하게 분리해야 한다. 정규 교육과정을 담당하는 교원 조직과 늘봄 프로그램을 총괄하는 늘봄지원실 전담 인력의 업무 경계를 명확히 확립해야 한다. 늘봄전담사 및 관리 인력의 고용 안정성과 전문성을 높이고, 안전 관리와 시설 유지보수, 예산 집행 등의 행정 부담이 일반 교사에게 전가되지 않도록 제도적 지원을 빈틈없이 갖추어야 한다. 나아가 '양적 수용'을 넘어 아이들의 정서적 쉼을 보장하는 '돌봄 질의 내실화'가 필요하다.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학교에 머무는 아이들에게 단순한 시간 때우기식 프로그램이나 과도한 특별활동을 강요하기보다, 자유 놀이와 쉼, 또래 간의 정서적 교감이 가능한 아동 친화적 쉼터를 조성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종일 이어지는 빽빽한 통제가 아니라 안전 속에서 마음 놓고 숨 쉴 수 있는 편안한 품이다. 국가가 책임지는 돌봄의 완성을 위해서는 학교에만 모든 짐을 지우는 방식에서 벗어나, 지자체와 지역사회가 함께 아이들의 성장을 보듬는 성숙한 교육 생태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 박진우 ◇ 교육학 박사 ◇ 부산 칠암초등학교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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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의 왕 김광휘] 2027 대입논술 비법 - 고려대학교 논술
[교육연합신문=김광휘 논술] 고려대학교 논술은 단순히 글을 잘 쓰는 시험이 아니다. 주어진 제시문과 자료를 정확히 읽고, 문제의 요구에 맞게 핵심 개념을 뽑아내며, 그것을 논리적인 답안 구조로 연결하는 시험이다. 김광휘 ‘논술의 왕’식으로 정리하면 고려대 논술의 핵심은 다음 한 문장으로 압축된다. “문제의 요구를 먼저 파악하고, 제시문을 요약이 아니라 논거로 바꾸어라.” 수험생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고려대 논술 대비 비법은 다음과 같다. ■ 제시문보다 문제를 먼저 읽어라 논술 답안의 방향은 제시문이 아니라 문제의 명령어에서 결정된다. ‘비교하라’, ‘분석하라’, ‘비판하라’, ‘평가하라’, ‘설명하라’, ‘해결방안을 제시하라’는 지시어에 따라 답안의 구조가 완전히 달라진다. 예를 들어 ‘비교하라’는 문제에서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모두 밝혀야 하고, ‘비판하라’는 문제에서는 대상의 한계나 논리적 약점을 지적해야 한다. ‘해결방안’을 요구하는 문제에서 제시문 요약만 반복하면 좋은 답안이 될 수 없다. ○ 비법 포인트 문제를 읽을 때 명령어에 밑줄을 긋고, 답안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먼저 결정하라. ■ 제시문은 따로 읽지 말고 관계 속에서 읽어라 고려대 논술에서 중요한 것은 제시문 하나하나의 단순 요약이 아니다. 여러 제시문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는지 파악해야 한다. 제시문들은 보통 다음과 같은 관계로 연결된다. ▲같은 문제를 서로 다른 관점에서 설명한다. ▲한 제시문이 다른 제시문의 한계를 보완한다. ▲두 제시문이 서로 대립하는 가치관을 보여준다. ▲하나의 제시문은 원인을, 다른 제시문은 해결 방향을 제시한다. 따라서 제시문을 읽을 때는 “이 글이 무슨 내용인가?”에서 멈추지 말고, “다른 제시문과 어떤 관계인가?”까지 파악해야 한다. ○ 비법 포인트 고려대 논술의 핵심은 제시문 요약이 아니라 제시문 간 상관관계 파악이다. ■ 공통 개념을 뽑아라 여러 제시문과 자료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을 찾아야 답안의 중심이 잡힌다. 예를 들어 자유, 평등, 공정성, 경쟁, 연대, 공동체, 다양성, 책임, 효율성, 인간 존엄, 기술 발전, 사회적 약자, 불평등 같은 개념들이 자주 활용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키워드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제시문 속에서 어떤 가치가 충돌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 예시 ▲자유 vs 평등 ▲경쟁 vs 연대 ▲효율성 vs 공정성 ▲개인의 권리 vs 공동체의 책임 ▲성장 vs 분배 ▲기술 발전 vs 인간성 ▲다양성 vs 사회 통합 ○ 비법 포인트 주제를 외우지 말고, 주제 속에 숨어 있는 가치 대립 구조를 찾아라. ■ 자료는 나열하지 말고 한 문장으로 묶어라 표, 그래프, 통계, 사례 자료가 나올 경우 수험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자료를 하나씩 설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좋은 답안은 자료들을 관통하는 공통 의미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예를 들어 여러 자료가 소득 격차, 교육 기회 차이, 지역 불균형을 보여준다면 다음과 같이 묶을 수 있다. “제시된 자료들은 사회적 불평등과 기회 격차가 여러 영역에서 구조적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자료를 종합해 핵심 문제를 규정해야 이후 원인 분석과 해결방안 제시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 비법 포인트 자료를 설명하지 말고, 자료가 함께 가리키는 사회문제를 찾아라. ■ 제시문은 요약하지 말고 논거로 바꿔라 논술 답안에서 제시문은 단순히 정리하는 대상이 아니다. 자신의 주장이나 판단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활용해야 한다. ▲나쁜 답안 : 제시문 A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좋은 답안 : 제시문 A가 강조하는 공동체적 연대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문제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 없으며 사회적 협력과 제도적 지원이 함께 필요하다. 이처럼 제시문의 내용을 자신의 논리 안으로 끌어와야 한다. ○ 비법 포인트 “이 제시문은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이 제시문을 내 주장에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를 생각하라. ■ 답안은 결론부터 설계하라 논술 답안을 처음부터 써 내려가면 논지가 흔들리기 쉽다. 먼저 결론을 정하고, 그 결론을 뒷받침할 근거를 배치해야 한다. 예를 들어 결론이 다음과 같다고 하자. “사회적 불평등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 없으며, 제도적 개선과 공동체적 연대가 함께 필요하다.” 그러면 본론은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불평등의 원인 분석 ▲개인 책임론의 한계 ▲사회적·제도적 해결방안 제시 ○ 비법 포인트 답안은 쓰는 것이 아니라 설계하는 것이다. 결론을 먼저 정하고 본론을 배치하라. ■ 해결방안은 개인·사회·제도 차원으로 구체화하라 해결방안 문제에서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 “정부가 노력해야 한다”와 같은 추상적 표현만 쓰면 설득력이 약하다. 해결방안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효과적인 방식은 세 층위로 나누는 것이다. ▢ 개인 차원 개인은 편견과 고정관념을 줄이고, 타인의 권리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 사회 차원 사회는 공감, 연대, 협력의 문화를 확산하고, 차별과 배제를 줄이는 공론장을 마련해야 한다. ▢ 제도 차원 국가와 제도는 교육,복지,노동,지역 정책 등을 통해 구조적 불평등을 완화해 공정한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 ○ 비법 포인트 해결방안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드러나야 한다. ■ 옹호·비판형 문제는 입장을 끝까지 유지하라 특정 주장에 대해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문제가 나오면 입장의 일관성이 중요하다. 처음에는 비판한다고 해놓고 본론에서 옹호 논리를 쓰거나, 결론에서 애매하게 “둘 다중요하다”고 마무리 하면 답안의 힘이 떨어진다. ■ 안정적인 구성은 다음과 같다. ▲ 대상 주장의 핵심 정리 ▲자신의 입장 제시 ▲제시문을 근거로 활용 ▲반대 입장 간단 검토 ▲자신의 결론 재확인 ○ 비법 포인트 어느 입장을 선택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 입장을 끝까지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 반드시 피해야 할 답안 유형 고려대 논술에서 피해야 할 답안은 다음과 같다. ▢ 제시문 요약형 답안 ▲제시문 내용을 반복하지만 자신의 논리로 연결하지 못하는 답안 ▢ 자료 나열형 답안 ▲표와 그래프를 하나씩 설명하지만 공통 의미를 찾지 못하는 답안 ▢ 입장 혼란형 답안 ▲옹호와 비판이 뒤섞여 논지가 흔들리는 답안 ▢ 구호형 답안 ▲ “노력해야 한다”,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만 반복하는 답안 ▢ 배경지식 과시형 답안 ▲ 문제와 직접 관련 없는 이론이나 시사 사례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답안 ○ 비법 포인트 논술은 많이 쓰는 시험이 아니라 정확히 쓰는 시험이다. ■ 실전 답안 기본 공식 고려대 논술 답안은 다음 공식으로 정리할 수 있다. 문제 명령어 확인 → 제시문 핵심 파악 → 공통 개념 추출 → 자료 종합 → 입장 결정→ 근거 배치 → 결론 정리 사회문제 해결형 문항이라면 다음 틀을 활용할 수 있다. 제시된 자료들은 ○○ 문제가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문제의 원인은 ○○에 있으며, 제시문 A는 이를 □□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또한 제시문 B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접근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인식 변화, 사회적 연대, 제도적 개선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옹호·비판형 문항이라면 다음 틀이 안정적이다. 제시된 주장의 핵심은 ○○이다. 나는 이 주장을 옹호한다/비판한다. ▲첫째, 제시문 A는 ○○의 측면에서 이 주장의 타당성/한계를 보여준다. ▲둘째, 제시문 B는 □□의 관점에서 이를 뒷받침한다. 물론 반대 입장에서는 ○○라고 볼 수 있으나, 이는 ○○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따라서 이 주장은 옹호/비판되어야 한다. ■ 최종 정리 김광휘 ‘논술의 왕’식 고려대 논술 비법은 결국 다음 세 가지로 압축된다. 정확히 읽고, 관계를 파악하고, 구조적으로 써라.고려대 논술은 예상 주제를 맞히는 시험이 아니다. 낯선 제시문과 자료가 나오더라도 문제의 요구를 정확히 파악하고, 핵심 개념을 뽑아내며, 제시문을 자신의 논거로 전환할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시험이다. 따라서 수험생은 배경지식 암기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문제 독해, 제시문 분석, 자료 해석, 논거 구성, 답안 구조화 훈련을 반복해야 한다. ● 한 줄 비법 고려대 논술은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주어진 자료를 정확히 읽고 논리적으로 연결하는 사람이 이긴다. ▣ 김광휘 ◇ 前현광문리학원 원장 ◇ 前부산종로학원 원장 ◇ 前부산학원 부원장 ◇ 언어영역 문학(창과창) ◇ 언어영역 독해(한샘출판사) ◇ 홀로서기 논술(대학진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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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학생 감소 시대, 특수교육의 새로운 해법을 찾아야 한다
[교육연합신문=신동현 칼럼] 우리나라 학생 수는 계속 줄고 있습니다. 학교마다 빈 교실이 생기고 소규모학교도 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흐름과 반대로 빠르게 늘어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바로 특수교육대상자입니다. 「2026 특수교육통계」에 따르면 특수교육대상자는 2022년 10만 3,695명에서 2023년 10만 9,703명, 2024년 11만 5,610명, 2025년 12만 735명, 2026년 12만 4,195명으로 해마다 증가했습니다. 4년 만에 2만 500명, 19.8%가 늘어난 것입니다. 특히 자폐성장애 학생은 같은 기간 1만 7,024명에서 2만 8,798명으로 69.2% 증가했습니다. 학생들이 배우는 곳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2026년 특수교육대상자 가운데 특수학교에서 배우는 학생은 3만 1,993명인 반면, 일반학교 특수학급 학생은 7만 2,784명, 일반학급에서 통합교육을 받는 학생도 1만 9,202명입니다. 전체의 74%가량이 일반학교에서 생활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제 특수교육은 특수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학교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특수교육 체계는 이렇게 빠르게 늘고 다양해지는 교육수요를 제대로 감당하고 있을까요? 현행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 시행령」 제22조는 특수교육 담당 교원을 특수교육대상자 4명마다 1명씩 배치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네 명이라도 필요한 지원은 전혀 다릅니다. 수업지원만 필요한 학생이 있는가 하면 의사소통, 이동, 신변처리, 행동·감각조절 등에 지속적인 도움이 필요한 학생도 있습니다. 교사가 한 학생의 위기상황이나 신변처리를 지원하는 동안 다른 학생의 수업이 멈출 수도 있습니다. 결국 교사와 지원인력의 부족은 학생이 받아야 할 교육의 부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특수학교를 계속 늘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습니다. 2022년 192교였던 특수학교는 2026년 199교로 7교 늘어난 데 그쳤습니다. 반면 일반학교 특수학급은 같은 기간 1만 2,712학급에서 1만 5,426학급으로 2,714학급, 21.3% 증가했습니다. 우리는 2017년 서울 강서구에서 특수학교 설립을 둘러싼 일부 주민의 반대 과정에서 장애학생 부모들이 무릎을 꿇고 학교 설립을 호소했던 일도 경험했습니다. 특수학교가 필요하다고 해서 필요한 지역에 곧바로 세울 수 있는 것은 아닌 현실도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 특수학교를 더 짓고 특수학급을 하나씩 늘리는 기존 방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변화한 교육환경에 맞는 새로운 해법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의 대안은 학생 감소로 여유 공간이 생기는 일반학교, 특히 소규모학교를 활용한 ‘거점형 특수학급’입니다. 지역의 특수교육 수요와 접근성을 고려해 몇몇 학교를 거점으로 정하고, 일반 특수학급보다 충분한 특수교사와 지원인력을 배치하는 것입니다. 감각조절실·심리안정공간·신변처리시설을 갖추고 행동·의사소통 지원 등 전문적인 기능도 함께 두는 것입니다. 거점의 전문인력이 인근 학교를 찾아가 학생과 교사를 지원하는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을 한 학교에 모으자는 것이 아닙니다. 특수교육의 전문성과 인력을 거점에 모아 여러 학교가 함께 활용하자는 것입니다. 해외에서도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영국은 일반학교 안에 ‘SEN Unit’과 ‘Resourced Provision’을 두어 전문적인 인력과 시설을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모든 학교가 모든 전문인력과 시설을 각각 갖추기 어렵다면, 일반학교 안에 전문성을 집중하면서 일반교육과 특수교육을 연결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도 이제 ‘일반학교냐 특수학교냐’라는 두 가지 선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학급과 순회지원, 일반 특수학급, 거점형 특수학급, 특수학교로 이어지는 촘촘한 지원체계를 만들고 학생 수뿐 아니라 실제 지원요구도에 따라 교사와 지원인력을 배치해야 합니다. 한쪽에서는 학생이 줄어 교실이 비어가고, 다른 한쪽에서는 특수교육을 받을 공간과 교사, 전문인력이 부족합니다. 이 두 문제를 따로 바라볼 이유가 없습니다. 학생이 줄어드는 학교의 공간과 특수교육의 전문성을 연결하는 것. ‘한 명의 특수교사가 모든 것을 책임지는 특수교육’에서 ‘여러 교사와 전문가, 지역의 학교가 한 아이를 함께 지원하는 특수교육’으로 바꾸는 것. 그곳에서 학생 감소 시대, 우리 특수교육의 새로운 해법을 찾아야 합니다. ▣ 신동현 ◇ 부산 강서초등학교 교장 ◇ 前 부산 장서초등학교 교감 ◇ 前 부산광역시교육청 학교정책과 장학관 ◇ 前 부산광역시교육청 초등교육과 장학관 ◇ 前 부산광역시교육청 정책연구소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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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지구가 보낸 경고장…국가와 교육이 답할 '기후재난'의 골든타임
[교육연합신문=박진우 칼럼] 해마다 지구촌을 강타하는 이상기후는 이제 일시적인 자연현상이 아닌 인류의 일상을 파고드는 복합 재난으로 고착화되었다. 올해만 보더라도 유럽 전역에서는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폭염으로 수만 명의 초과 사망자가 발생했고, 북미와 아시아 곳곳은 기습적인 집중호우로 도시 전체가 침수되는 비극을 겪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기존의 장마 공식은 무너진 지 오래며, 예고 없는 국지성 폭우와 폭염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세계기상기구(WMO)와 UN이 "지구 온난화(Global Warming)를 넘어 '지구 열열화(Global Boiling)' 시대가 왔다"고 경고했듯, 기후재난의 발생 빈도와 피해 범위가 매년 가파르게 확산하는 현상에 대해 우리는 엄중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이상기후는 단지 어쩌다 찾아오는 계절적 불운이 아니라 인류와 미래 세대의 생존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국가적 재난이다. 과학자들은 오늘 우리가 겪는 혹독한 더위와 기습 폭우가 앞으로 맞이할 수많은 날 중 ‘가장 온화했던 날’일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프랑스의 저명한 사회학자 브뤼노 라투르가 언급했듯 인류는 이미 '기후적 난민'의 시대에 진입했다. 이러한 시점에서 교육현장의 학사 운영 중 폭우나 폭염이 엄습할 때 단축수업이나 휴업을 안내하고 주의를 당부하는 수준의 임시방편으로는 다가올 미래를 감당할 수 없다. 국가 차원에서 기후위기를 '국가 안보 및 국민 생존'의 문제로 규정하고, 이에 발맞추어 미래 세대를 길러내는 교육의 방향성을 근본적으로 재정립해야 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학교 현장과 사회가 체감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대책은 무엇인가. 첫째, 국가 차원의 '기후적응형 학교 인프라 표준화'와 재정 지원이다. 학교 건물 자체의 단열 성능을 극대화하고 옥상 녹화 및 빗물 저류 시설을 의무화하는 '그린 스마트 건축 기준'을 수립해야 한다. 또한 폭염 시에도 학생들이 안전하게 신체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모듈러형 실내 체육/놀이 공간' 확충을 국가 예산으로 우선 지원해야 한다. 둘째, 체계적인 '기후 데이터 기반 학사운영 예측 시스템' 구축이다. 각 지자체 및 기상청과 연계하여 지역별·학교별 기후 위험도를 실시간 측정하고, 이에 따른 단계별 대응 매뉴얼(체육 수업 전환, 등하교 시간 자율 조정, 온라인 수업 전환 기준 등)이 현장에서 혼선 없이 작동하도록 행정적·법적 근거를 명확히 정비해야 한다. 셋째, 지식 전달을 넘어선 '실천형 기후 안보·생태 교육'으로의 대전환이다. 기후변화 교육을 단순한 환경 과목의 일부가 아니라, 아이들이 생존 역량을 키우고 탄소중립 사회를 이끌어갈 '기후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필수 교육과정으로 재편해야 한다. 학교 내 에너지 소비를 학생들이 직접 측정하고 줄여보는 실천형 프로젝트 교육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중국의 고전 『서경』에는 "사전에 대비가 있으면 근심이 없다"라는 가르침과 함께, "망한 뒤에 도모하면 이미 늦다"는 경고가 전해진다. 교육의 본질은 우리 아이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마음껏 배우며 미래를 꿈꾸도록 울타리가 되어주는 데 있다. 이상기후라는 엄중한 시대적 경고 앞에서, 국가의 선제적 장기 대책과 교육 현장의 과감한 실천을 통해 국민과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든든히 지켜내야 할 때다. ▣ 박진우 ◇ 부산 해빛초등학교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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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질문하는 교실, 세계를 향한 첫걸음
- [교육연합신문=이재웅 기고] 부산 해운대구에 위치한 좌동초등학교가 최근 세계적 교육과정인 국제 바칼로레아(IB) 초등 프로그램(PYP) 인증을 공식 획득하며, 대한민국 공교육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번 인증은 단순한 학교의 성취를 넘어, 공립학교에서도 세계 수준의 교육이 가능함을 보여준 상징적 사례로 평가된다. 좌동초는 지난 2년간 관심학교 및 후보학교 과정을 거쳐 교사 연수, 커리큘럼 재구성, 학부모 협력 체계를 구축하며 학교 전체가 변화하는 과정을 실천해 왔다. IB는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글로벌 교육과정으로, 창의적 사고와 탐구 중심 학습, 다문화 감수성을 핵심 가치로 한다. 그간 일부에서는 ‘귀족 교육’으로 여겨졌지만, 좌동초의 도전은 공교육 내에서도 IB가 실현 가능함을 입증한 첫 사례로 주목받는다. 좌동초 교실에서는 "왜요?"라는 학생의 질문이 허용되고, 토론과 사고가 중심이 되는 수업 환경이 조성되었다. 교사는 지식 전달자가 아닌 학습의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학부모 또한 달라진 아이들의 모습에 긍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 학부모는 “점수를 위한 공부가 아닌,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과정이라는 걸 알게 됐다”며, “IB는 단지 수업 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학교 전체가 함께 성장하는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학교는 교사 연수의 정례화, 학부모 대상 설명회, 서포터즈 활동 등을 통해 가정과 함께하는 교육공동체 모델을 정착시켰다. 그러나 좌동초의 성과가 전국으로 확산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첫째, 탐구 중심 수업을 설계·운영할 수 있는 교사의 전문성 강화가 필요하다. 둘째, 연수비, 평가비용, 자료 개발 등 재정적 지속 가능성을 확보해야 한다. 셋째, 창의성과 사고력을 중시하는 IB 교육과 입시 중심의 현실 간 괴리를 해소해야 한다. 이는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지만, 좌동초의 사례는 충분히 넘을 수 있는 벽임을 보여준다. 좌동초의 IB 인증은 한 학교의 성공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부산을 시작으로 전국 학교들이 새로운 교육 흐름에 동참할 수 있는 신호탄이다. 학생의 질문을 소중히 여기는 교사, 변화를 지지하는 학부모, 이를 뒷받침하는 교육청의 정책적 지원이 조화를 이룬다면, 대한민국 공교육은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정답을 말하는 교육에서 질문을 기르는 교육으로, 성적을 올리는 교육에서 사고를 키우는 교육으로, 경쟁 중심의 구조에서 공동체 속 배움으로 나아가는 전환점. 좌동초의 도전과 성취는 대한민국 공교육의 미래를 밝히는 이정표다. 이 작은 교실에서 시작된 “왜요?”라는 질문이 더 많은 학교로 퍼져나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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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질문하는 교실, 세계를 향한 첫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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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특수학교 개교, 그때의 목발과 여정 - 김미영 부산한솔학교 초대 교장
- [교육연합신문=편집국] 해마다 6월이 오면, 제 마음속엔 하나의 장면이 조용히 떠오른다. 병원 침대 위에서 바라보던 흐린 창밖 풍경과 제 다리에 채워져 있던 석고 붕대. 그리고 그 이후의 믿기 어려운 여정. 그 모든 시작은 바로 한 아이도 포기하지 않는 학교, 부산한솔학교의 개교에서 비롯됐다. 2013년 봄, 명지에 문을 연 부산한솔학교는 유치원부터 전공과정까지 갖춘 특수학교였다. 그러나 그 ‘문이 열리기까지’의 시간은, 누군가에겐 설계도에 그려진 건물 하나였을지 모르나, 저에겐 기적을 바느질하듯 하나하나 꿰매며 만든, 눈물과 기도의 시간이었다. 개교 두 달 전, 저는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계단에서 미끄러져 다리를 골절했고, 침대에 누운 채로 ‘초대 교장’ 임명장을 받았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는 병실을 박차고 일어나 목발을 짚었다. 누군가 시작해야 할 일이었고, 그 누군가는 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저는 아침 6시면 목발을 짚고 공사 현장으로 향했다. 건물은 아직 덜 지어졌고, 담장 하나에도 수많은 허가와 설득이 필요했다. 교직원은 모이지 않았고, 책상 하나도 조달이 늦었다. 하지만 저는 포기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교실마다 들어설 아이들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처음 입학할 예정인 110명의 아이들, 그리고 그들과 동행할 80명의 교직원. 저는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외웠다. 책상 위에 앉을 작은 손, 복도 끝에서 휠체어를 밀고 올 엄마의 손길, 첫인사를 건네며 눈을 피하던 학생의 수줍음까지… 그 모든 것이 제게는 기도로, 사명으로, 힘으로 다가왔다. 개교식 날, 아이들이 무대로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며 스크린에 상영된 준비 과정 영상을 보는 순간, 제 마음이 무너졌다. 흘린 땀이 다 의미 있었음을, 그들이 제게 보여주었다. 그날 이후, 저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교육이란 ‘가르침’이 아니라, 함께 걸어주는 것임을. 그것이 목발을 짚고라도 제가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였다. 세월이 흐르고, 이제는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스스로 작아지는 날도 많다. 그러나 그 시절, 목발을 짚고 첫 출근을 하던 아침의 공기와 아이들의 눈동자 속 따뜻한 희망이 여전히 제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그때의 목발과 여정은 제게 가르쳐주었다. ‘누군가의 시작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두려운 일인가를.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 곳곳의 교사들과 아이들이 또 다른 시작의 문 앞에 서 있다.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그 자리에서, 누군가는 다시 용기를 내고, 누군가는 함께 손을 잡아 줄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뜨거웠던 그날의 교장으로서, 저는 오늘도 그날의 기억을 품은 채, 조용히, 그러나 흔들림 없이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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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특수학교 개교, 그때의 목발과 여정 - 김미영 부산한솔학교 초대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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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왜, 아이들은 함께 떠났을까
- [교육연합신문=황오규 기자] 6월 어느 새벽, 부산의 한 아파트에서 고등학생 세 명이 함께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같은 학교에 다니던 친구들이었다. 누군가는 먼저 아팠고, 누군가는 그 아픔에 함께 울었고, 결국, 세 아이 모두 같은 곳을 향해 걸어갔다. 아직 정확한 사망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유서가 남겨졌다는 소식은 이들이 오랜 시간 고통을 견디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한 명도 아니고, 셋이었다.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야 한다. 왜 아이들은 함께였을까. 그리고 왜, 아무도 몰랐을까. 아이들은 말하지 못했다. 아마 아이들은 여러 번 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지각이 잦아졌을지도 모른다. 말수가 줄고, 눈빛이 흔들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조용한 구조 요청은 어른들의 바쁜 일상 속에 파묻혔다. 혹은, 누군가 보았지만 그 사실은 ‘공유’되지 않았다. 학교는 너무 바빴다. 수업, 평가, 행정, 민원에 쫓기느라 정작 아이들의 ‘마음’을 돌볼 시간이 부족했다. 그리고 교사들 사이에도, 아이들에 대한 정보와 감정이 흐르지 않았다. 교사 간 소통은 왜 단절되었는가. 이제 교육 현장은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복잡한 곳이 됐다. 한 반의 담임이 아이의 모든 신호를 감지하긴 어렵다. 하지만 그 조각들을 교사들 간에 나눌 수 있다면, 그리고 서로 신뢰하고 함께 바라본다면, 그 조각은 하나의 '위험 신호'로 이어질 수 있다. 교사들도 ‘말할 수 있는 동료’가 필요하다. 학생에 대해 걱정되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공간, “나 혼자 감당하고 있진 않은가”라는 두려움을 털어놓을 수 있는 교무실. 이제 학교는 교사들을 위한 회복 공동체로도 거듭나야 한다. 결국, 필요한 것은 ‘관심’이었다. 어쩌면 그 아이들은 딱 한 명의 따뜻한 관심만 있었어도 다른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 “요즘 많이 지쳐 보여”, “힘들면 언제든 얘기해” 그 짧은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겐 살아갈 이유가 된다. 관심은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의 태도에서 시작된다. 눈빛 하나, 말투 하나, 하굣길 발걸음 하나에 스며든 감정의 진심. 우리의 ‘조금 더 보는 눈’, ‘조금 더 듣는 귀’가 누군가의 생명을 지킬 수 있다. 대책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학생, 교사, 학부모, 행정, 정치권, 언론 모두의 역할이 있다. 학교는 심리적 안전지대가 되어야 한다. 교사들은 학생과, 서로와 연결되어야 한다. 학부모는 결과보다 아이의 감정에 먼저 귀 기울여야 한다. 행정은 예산과 제도로 관계를 뒷받침해야 한다. 언론은 자극보다 성찰을, 소문보다 구조를 보도해야 한다. 무엇보다 지금, 우리는 다시 말해야 한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 너에게 필요한 건 경쟁이 아니라 관계야”, “넌 혼자가 아니야.”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몰랐다”는 말로,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그 어떤 죽음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세 명의 아이가 한꺼번에 떠났다는 이 사실은, 사회 전체가 무너진 거울 앞에 서 있다는 경고다.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또 다른 누군가의 이름이 잊히듯 보도될 것이고, 또 다른 부모가 울부짖게 될 것이다. 이건 그저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우리 교육의 민낯이며, 우리 사회의 현재이며, 그리고 바로 ‘내일의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이다. 이제는 말만의 애도가 아니라, 구조를 바꾸는 행동, 사람을 살리는 시스템, 마음을 보듬는 학교로 나아가야 한다. 아이들이 더 이상 죽음을 ‘함께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그것이 우리가 반드시 만들어야 할, 진짜 ‘대책’이다. 그리고, 남겨진 우리에게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하지만 애도는 시작일 뿐, 끝이 아니다. 이제 우리에겐 책임이 남았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 우리 곁에 있는 단 한 명의 아이라도 놓치지 않도록. 이 사건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애도이자, 가장 큰 대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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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왜, 아이들은 함께 떠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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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질문과 수고하는 습관, 행복한 삶을 만든다!
-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모든 수양과 수련은 필요한 수고를 일부러 찾아서 하는 일들이다. 합당한 수고를 하지 않고, 나아지는 일은 없다. 孔子와 플라톤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으면, 孔子나 플라톤의 행위를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졌던 자세와 시선(생각)의 높이를 보는 것이다. 그들의 자세와 시선의 높이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자세히 살피고, 깊이 태도를 배양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바람직한 것’, ‘해야 하는 것’, ‘좋은 것’에는 ‘내’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자발성이나 자율성이 피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통치술(지식)을 팔러 여기저기 제일 열심히 돌아다닌 사람이 공자였다. 공자가 한 그런 활동을 ‘周遊天下’라고 한다. 공자는 전쟁으로 피폐한 백성들의 삶을 구원하고 전쟁 종식을 위한 자신만의 정치 철학을 전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어려운 14년 동안의 周遊天下를 할 수 있었던 저력은 ‘바라는 것’,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지시받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지시하는 사람이었다. 지시하는 사람이란 권력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지시하는 사람이다. 남이 시키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만이 몰입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시간을 지배할 때 미치도록 행복해진다. 시간을 지배하는 방법은 오직 몰입이다. 시간이 훌쩍 지났다는 경험만이 사람을 생기 있게 만드는 보약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일을 자신에게 묻고 결정하는 습관을 몸에 익히는 것이 먼저다. 다른 사람의 책을 읽었다면, ‘너 생각은 어때?’ ‘너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이렇게 물어야 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지치지도 않고 쉼도 없다. 이것은 자기 쾌락, 자기만족, 자기 희열을 느끼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결국에는 자신의 길을 찾고 그 길을 따라 자유롭고 주체적이면서 창의적이며 주도적으로 살 수 있는 실력을 갖추기 위한 여정의 길인 것이다. 길은 예측 가능해야 한다. 예측 가능해야 자신과 타인으로부터 신뢰를 받는다. 그 신뢰가 자신을 길을 가는 동력이 되는 것이다. 예측 가능한 모습이 사람이다. 『莊子』에 나오는 말이다. “非吾罪也, 人之罪也. 내 죄가 아니다. 사람들의 죄다.” 사람들은 입장이 같으면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입장이 서로 다르면 반대한다. 생각이 같으면 옳다 하고, 생각이 다르면 틀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옳은 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대개는 듣고 싶어 하는 말만 들으려 하고, 옳은 소리라 하더라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같을 때만 긍정적으로 동조한다. 즉 듣는 사람들이 대부분 자기 생각에 갇혀서 듣는 것조차 거부하는 것이다. 상대방은 ‘악마화’하고 자신들은 ‘천사화’ 하는 사태에 이른다. 깊이 듣기는 힘이 든다. 『장자(잡편)』第27篇 寓言(우언)에 나오는 말이다. “是爲耆艾, 年先矣, 而無經緯本末以期年耆者, 是非先也.” 옛날에는 어른들이 한 말은 대개 옳은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年先矣’, 즉 ‘나이가 앞서면서도,’ ‘無經緯本末’, 즉 말이나 태도에 ‘질서가 없고 앞뒤가 안 맞으면서’ 나이가 많은 것 가지고 대접을 받으려고 한다면 ‘是非先也’ 즉 ‘앞선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가끔 보면 어른이 나이만 믿고 함부로 하는 경우가 많다.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모범을 보이더라도, 말로만 하면 꼰대가 되니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전화를 받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어른이 있다. 큰 소리로 전화를 받는 젊은 사람한테 모범을 보여야 한다. 모범을 보이려면 힘이 많이 들고 어렵다. 그래서 그렇게 하는 어른이 많지 않다. 모범을 보이는 것을 ‘德’이 있다고 한다. 장자는 어른이 어른으로서 대접을 받으려면 젊은 사람보다 나은 점이 있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젊은 사람보다 공공질서를 잘 지키고, 독서를 더 많이 하고, 신용을 더 잘 지키고, 더 예의를 잘 지키고, 더 단정하고 의연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더 많이 반성하고 더 많이 경험하고 더 많이 살았으니까. ‘不言則齊’, ‘不言’ 하면 세상의 흐름과 가지런히 잘 맞게 된다는 것이다. 노자 『道德經』에도 나온다. ‘不言之敎’. 여기서 ‘不言’은 ‘특정한 의미로 정해서 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딱 정해서 말하지 않는 것을 ‘無言’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言’은 특정한 의미를 담아서 하는 말이다. 이는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보거나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과 관계된다. 소유적 태도라고 한다. 세계를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을 ‘존재적 태도, 무소유’라고 한다. 그래야 삶의 질과 양을 높일 수 있다. 남이 싫어하는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한 경우가 있는가? 처음에는 아주 힘들다. 하지만 인생은 자기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색칠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 과정은 지난하고 생각보다 많은 장애물이 등장할 수도 있다. 세상의 문명은 인위적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인생도 인위적으로 살아야 한다. 어려운 일을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면서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은 경지에 이른 것을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하는 것이다. 자연스러워지면 지치지 않고 생기 있는 삶이 된다. 가장 단순한 일상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 삶이다. 반복은 사람에게 고통과 번뇌와 고달픔을 준다. 하지만 반복은 높은 수준의 達觀과 達道를 가져다 준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반복하게 되어 있는 일이다. 오늘부터 자신이 반복하고 있는 일을 생각하고 기록하고 뚝심으로 밀고 나간다면 행복하고 자유롭고 만족스러운 즉, 自快, 자기만족, 자기 희열의 순간순간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하루에서 하루도 빼먹어서는 안 되는 일이 무엇일까? 그것을 싫증 내지 않고 행하는 것이 가장 먼저고 최선을 다해야 하는 천지자연의 섭리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을 하는 당신을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 꾸준히 그렇게 일하는 당신을 보고 사랑하게 되고, 존경하게 된다.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나서서 해보라. 남이 하기 싫은 일을 즐기며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면 당신의 삶은 쉬워진다. 송창식의 노래처럼 당신은 ‘피리 부는 사나이’로 태어날 수도 있다. 성공과 행복은 어려운 길로 들어서서 쉬운 길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이게 인생의 선순환이다. 어려운 길을 택하라. 시간이 지나면 루틴이 생기고 그 어렵던 길도 편하고 즐겁게 느껴진다. 즐거움은 지치지 않는 생명수가 되고, 즐거움은 자신이 바라고,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혼자 즐기고 혼자 행복할 수 없다. 그건 잠깐의 행복이다. 도스토옙스키가 말한 것처럼 “전체로부터 자신을 하나의 개체로 떼어놓고서는” 절대 행복할 수 없다. 우리는 전체를 위해서 나아가야 한다. 전체를 위해 성장하고 성장을 통해 얻은 것을 전체에게 계속 나눠야 한다. 이것이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다. 우리는 성장과 나눔을 통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자신만의 성장으로 행복할 수 없고, 전체를 위한 나눔이 없이도 행복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왜냐?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고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내가 조금 젊었으면’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할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시간에 갇히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지금부터 당장 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하다. 나도 하기 싫을 때는 핑계부터 찾는다. 진즉 했어야 하는데, 이제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이 부질없는 짓을 왜 하지?’라는 생각을 한다. 나도 변명과 핑계를 대지 않겠다고 몇 번을 다짐한다. 모든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 대처하는 길만이 있을 뿐이라고 다그친다. 이 세상은 ‘色卽是空 空卽是色’일 뿐이기 때문이다. ‘듀크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의 행동 중 45%는 결정이 아니라 습관에서 나온다고 한다.’ 이처럼 습관은 우리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우리는 습관의 힘을 인식하고 살아가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물론 습관은 쉽게 우리에게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수많은 수고와 노력이 있어야 하고 어떤 경우에는 나면서부터 천부적으로 습관이 재능으로 나타날 때도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들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삶을 바꾸기 위해서 쉬지 않고 습관을 길들이기 위해서 훈련에 힘쓰기도 한다. 별생각 없이 보내는 자투리 시간도 모으면 어마어마한 양의 시간이 된다. 무엇보다 그 시간을 반복적으로 습관(루틴)을 훈련하는 시간으로 활용하게 되면 새로운 나 자신이 만들어지게 된다. “잘 다스려지고 있는 나라에서는 떠나고, 잘 다스려지지 않은 나라로 가라.”는 말은, 잘 다스려지는 나라에 안주하지 말고, 혼란스러운 나라에 가서 바로잡는 역할을 하라는 의미다. 세상의 어지러움을 바로잡는 선비의 자세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 말은 공자와 그의 제자 안회 사이의 대화에서 비롯되었다. 안회는 스승에게 “잘 다스려지는 나라에서는 떠나고, 어지러운 나라로 가서 그 폐단을 바로잡는 것이 선비의 도리”라고 말했다. 최진석 교수의 글을 종합해 끝맺음을 한다. 지식인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시대의 병을 함께 아파하는 사람이다. 한 나라가 돌아가려면 정치와 교육, 두 톱니바퀴가 필요하다. 어떤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어떤 정치를 하는가다. 정치하는 사람을 공급해 주는 게 교육이니, 교육은 나라를 움직이는 근본 문제다. 지금 우리나라의 모든 상황은 우리나라 교육이 만들어 낸 결과다. 우리나라 사람은 질문이 아니라 대답에 익숙하게 적응됐다. 과거형 교육이란 얘기다. 이미 있는 지식을 가지고 누가 빨리, 누가 원래 모습 그대로 뱉어내느냐만 따진다. 과거를 사는 사회가 된 거다. 미래에 좋은 것은 스스로가 ‘좋아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 무엇을 좋아하느냐, 어떨 때 제일 행복한가, 이런 것을 물어야 한다. 모든 문제를 자신에게 물어서 결정하는 습관이 몸에 밸 때, 종속국에서 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 묻는 것은 힘이 드나 열매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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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질문과 수고하는 습관, 행복한 삶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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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책 읽기, 저자의 자세와 태도를 배우는 것이다.
-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경전을 읽으면서도 거기에서 얻은 감동과 삶이 하나 되지 못해 감동이 삶으로 체화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좋은 책을 읽었다고 문구를 외는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왜 그럴까? 읽은 감동이 자신에게서 솟아난 것이 아니라 저자가 부과하는 숙제 같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숙제처럼 하는 삶은 쉽게 지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것에서는 지치지 않는다. 지치지 않는 삶이야말로 주체적이고 독립적이며 자유롭고, 행복한 삶의 동력이다. 경전과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로 있는 것이어야 한다. 경전이 있기에 내 삶이 풍요로워져야 한다. 이것이 ‘不二, 즉 둘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성현의 삶이 내 삶의 연료가 되어 내가 거기에 스며들고 섞이어 하나가 되어야 한다. 경전을 읽고 느낀 감동이 그 사람의 삶으로 들어와야 한다. 경전의 내용이 그 사람의 길을 만드는 재료가 되어, 자신의 발전이 공동체의 발전에 이어지고 결국에는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인생은 어느 순간에, 누구를 만나느냐다. 사람의 생각도 태어나서 자라고 성숙한다. 인생이란 어쩌면 생각의 구체화다. 누군가가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가 머릿속에 깊숙이 박히고, 그것이 방향타가 되어 내가 생각하던 방향과 방식이 서서히 바뀌던 경험, 인생의 몇몇 지점에서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다 보니 내가 변하는 느낌을 받고, 그들과의 만남 뒤에 성장이 있었음을 이제야 느낄 수가 있다. 똑같은 흙을 사용해도 그것을 만지는 도공의 손길에 따라 도자기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처럼, 누군가와의 만남은 천천히, 하지만 결정적으로 만남의 상대를 바꾼다. 인생에서 만난 누군가가 반드시 사람만은 아니다. 누구는 책이기도 하고 연극이기도 하고 영화, 자연이기도 하다. ‘지적 능력’이란? 인간이 자연스러운 감정과 본능을 극복하고 얻어지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감정에 따르면 사람은 조그마한 것도 자랑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겸손은 수준 높은 지적 능력이라는 것을 알지만 손해 본다는 느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실천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사람들은 겸손한 사람을 좋아한다. 따라서 겸손한 사람은 성공할 확률도 더 커지고 더 나은 사람이 될 기회도 많아진다. 용기, 절제, 생각도 지적 능력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용기를 ‘지적 인내’로 정의한다. 어떤 사람이 아무런 보답을 바라지 않고 뭔가를 베풀었다면, 보답을 기대하는 자연스러운 감정과 본능을 극복해 보는 경험을 한 것이다. 이러한 경험이 쌓이고 쌓이면 내면이 단단해지고 두께가 굵어져서 지적으로 성장하고 시선이 높아진다. 겸손함이 내공으로 쌓인 사람에게는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진다. 따라서 성공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우리는 선배들이나 책으로부터 좋은 내용에 감동도 하고, 다짐도 한다. 하지만 아는 것으로부터 지혜를 얻기도 하지만 앎을 실천함으로써 지혜가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선현들의 책이나 말씀은 실천행으로 제시되고 있다. 선현들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외우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을 가끔 본다. 씁쓸하다! 성현들의 말씀을 숙제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청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에 대한 간절한 물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자기가 간절하게 하고 싶은 것이 동력으로 전개될 때만이 활기찬 삶을 만들고, 지치지 않은 인생을 만드는 것이다. 자청한 것은 오래 할 수 있고 지치지 않을 수 있으며 행복한 인생을 기약하는 것이다. 성공하는 일의 특징은 반복에 있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싶고, 더 자유롭고 창의적이고 주도적이며 주체적인 삶은 자신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이어야 한다. 깨달음도 단순한 행위를 오랫동안 반복하느냐로 결정된다. 자신이 규칙을 만들어서 평생 반복하는 것이다. 그 규칙이 자신의 삶이 될 때까지. 인생이란? 누가 단순한 행위를 오랫동안 반복하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그래서 삶은 즐거운 과정이다. 어떨 때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욕됨, 치욕, 비난도 견뎌내야 한다. 공자도, 붓다도, 예수도 다른 사람들이 가하는 치욕을 견디며 자신만의 진리의 세계를 구축한다. 욕됨, 치욕, 비난을 이기고 나면 이전의 자신과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되고 싶은 자기가 분명할 때가 견디는 힘을 길러준다. 수고하는 습관을 몸에 익혀야 한다. 솔선수범을 먼저 하는 습관이 지혜롭고 겸손한 사람으로 만드는 비결이다. “내 곁에 있는 사람, 내가 자주 가는 곳, 내가 읽는 책들이 나를 말해준다.” 괴테가 한 말이다. 내가 어제와 다르게 살아본 만큼만 생각도 어제와 다르게 잉태된다. 한 사람이 겪어낸 경험은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일반화시켜 적용하거나 반복해서 겪을 수 없다. 그래서 한 사람이 이루어낸 성공 스토리나 부자가 된 성취경험은 누가 언제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인지를 깨달을 때 나에게 교훈이 될 수 있다.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이다(86-87쪽).”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에 나오는 말이다. 인간관계의 깊이가 성장할 수 있는 인간의 높이를 결정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가 내가 성장할 수 있는 높이를 결정한다. 나의 성장 높이는 내가 맺는 인간관계의 높이가 결정한다. 존재가 관계를 결정하지 않고 관계가 존재를 결정한다. 같은 키의 벼 포기가 관계를 포기하고 자기 혼자 독불장군식으로 성장하는 높이를 추구하면 바람에 휘말려 줄기가 꺾인다. 어깨동무하는 잔디가 자기 욕심으로 높이 자라면 잔디 깎는 사람에게 순식간에 베인다. 나는 혼자 성장하는 독립적 개체가 아니라 더불어 성장하는 관계의 다른 이름이다. 나의 실력도 나 혼자 발휘하는 독립적 역량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함께 주고받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산물이다.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 신영복의 《강의》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서 어제와 다른 사람으로 거듭난다. 오늘의 나는 내가 지금까지 맺어온 인간관계의 사회 역사적 합작품이 되는 이유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나인 이유는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이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관계가 인간이라는 존재를 만들어간다. 존재는 관계의 부산물이다. 존재인 인간은 그 인간이 만들어가는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오늘과 다른 나로 내일 거듭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만난 사람의 관계를 넘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넓혀서 맺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관계라는 양면 거울은 타인에 대한 경종이자 나 자신을 향한 반성이며 성찰이다. 격변하는 시기일수록 수많은 이론들이 득세하면서 저마다의 주장으로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고 평가한다. 그 이론들에는 저마다의 문제의식과 위기의식이 스며들어 있어서 어떤 사연과 배경으로 이론 구축을 시작했으며 무엇을 궁극적으로 해결하고 싶은지에 대한 절박한 목적의식을 담고 있다. 그렇지 않고 흔들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남의 개념과 이론적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삶을 무의식적으로 살아간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이 구축한 사유의 식민지에 종속되어 평생을 남들의 사유에 물들어 살아갈 것이다. 책을 읽어도 마찬가지다. 자기 생각과 문제의식으로 각자의 관점을 재해석하는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아무리 책을 읽고 낯선 사람을 만나더라도 남의 생각에 물들어 내 생각을 다르게 잉태시킬 수 없다. 깊은 주체적 사고 없는 경험이나 독서 그리고 인간관계로 깨닫는 각성은 맹목일 수 있다. 좌우명이나 인생론에는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리적 근거나 이유가 없다. 하지만 자기만의 인생 이론에는 자신의 신념과 철학에 근거, 왜 특정한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경험적 통찰력을 논리적으로 해명하는 근본적 원리나 이치가 담겨 있다. 결국 자기만의 성장 이론은 경험의 텃밭에서 경전을 일궈내는 가운데 독서와 인간관계로 나의 경험적 한계와 문제점을 극복하면서 탄생되는 이론이다. 자기만의 이론적 깊이와 넓이는 가장 우선적으로 경험의 깊이와 넓이가 좌우한다. 여기에 독서와 인간관계로 체득하는 깨달음의 깊이와 넓이가 상승작용을 하면서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만의 판단 근거나 행동 규범을 갖고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닦아나가는 것이다. 수많은 자기 계발서들이 저마다의 성공 방정식을 만들어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는 성공보장 담론을 사회 곳곳에 뿌리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게 그걸 따라가는 욕망의 물결에 휩쓸리기 시작한다. 공자도 이런 욕망과 유혹의 물결에 저항하면서 비로소 자기 주관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순간을 논어(語)에서 ‘불혹(不惑)’이라고 했다. 불혹은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마음이 아니라 스스로 옳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모색하고 추구하는 진정한 `나'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일에 몰두할 때 비로소 생기는 삶의 지혜다. 이제 나를 흔드는 뿌리가 타자의 욕망이 아니라 주체인 `나의 욕망'에 있다는 점이 불혹 이전과 구분된다. 저자의 생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경전을 쓰는 데 활용했던 저자의 자세와 태도를 배우는 것이다. 부딪힌 현실의 문제, 즉 병을 발견하고 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모습, 그 고뇌와 태도를 자신과 공동체의 발전에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배우는 것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그 실천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실천은 처음 생각했던 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시종일관 자신에게 묻고 또 묻는 과정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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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책 읽기, 저자의 자세와 태도를 배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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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존중칼럼] 부족했던 자살예방 활동 참회합니다
- [교육연합신문=김대선 기고] “우리나라 자살률이 왜 이리 높나요?”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6월 5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취임 후 첫 국무회의에서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한국의 자살률 관련 질문을 했으며, 지난 10일에도 대책을 주문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공약집을 통해 자살 예방을 위해 향후 5년간 초·중등 전 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생 정서·행동 특성 검사’를 실시해 자살 위험군 학생에 대해선 전문 기관과 연계해 치료가 되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또 ‘청소년 상담 1388 통합 콜센터’를 신설해 24시간 전화상담이 가능하도록 하겠다‘라고 해 미래를 밝게 열어줬다. 한국의 자살예방은 복지부가 2004년 시작된, 자살예방기본계획이 5차(2023~2027)까지 시행해 왔으나, 매번 목표 자살률은 달성되지 못했다. 알다시피 2024년 우리나라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5.2명으로 OECD 국가 평균(11.1명)의 2배 수준이다. 2004년 이래 줄곧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자살은 우리나라 10~30대 사망 원인 1위이며, 40~50대에서는 사망 원인 2위다. 특히 자해·자살 환자 중 10~20대 비율이 10년 새 15.4%포인트 늘어날 정도로 증가세가 가파르다. 정책의 실효성이 떨어지고 있는 이유는 그동안 총리실에 둔 자살예방정책위원회를 대통령실에 자살대책위원회 신설 운영이다. 또한 지방자치단체의 자살예방센터 운영과 종교계의 참여가 매우 중요하다. 그간 종교계는 생명존중문화 확산을 위해 개별적으로 활동을 전개해 왔으나 자살문제는 매우 소극적이다. 2019년 6월 18일 한국종교인연대는 한국이 경제개발도상국가(OECD)중 1위인 자살공화국의 오명을 벗어나고자 ‘부족했던 자살예방 활동 참회합니다’라고 반성과 참회로 ‘생명살리기, 자살예방을 위한 종교인 선언’을 했다. 이후 다행히 종교계는 자살예방 인식개선 사업을 종교인연대 소속 7대 종단(불교, 원불교, 천주교, 개신교, 천도교, 유교, 민족종교협의회)이 ‘생명존중 문화확산 생명살리기 교육사업’을 전개, 고무적이나 아직도 자살률 낮추는 교육·홍보사업은 미흡하다. 턱없이 부족한 예산이지만 정부와 지자체의 정책, 예산 등이 확충되리라 확신한다. 따라서 종교계는 선교, 포교, 교화에 우선하기보다는 설교나 설법, 강론을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데 앞장서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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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존중칼럼] 부족했던 자살예방 활동 참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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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사각지대에 내몰린 자영업자들…청주시 이자 지원정책, 누구를 위한 것인가?
- [교육연합신문=유기성 기자]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며 청주 지역 자영업자들이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다. 이를 지원하겠다며 청주시가 내놓은 '저신용·저소득 소상공인 대출 이자 지원 사업'이 정작 가장 도움이 절실한 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문제는 신청 자격 요건이다. 이자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국세 체납, 지방세 체납, 건강보험료 및 4대 보험료 미납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장사가 안 되는데, 뭘 먼저 내야 합니까" 청주시 상당구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최모 씨(55)는 올해 초 은행 대출로 월세와 인건비를 겨우 맞췄다. 하지만 3개월 전부터 건강보험료가 밀리기 시작했다. "2년째 매출은 줄어드는데 월세는 그대로예요. 알바도 못 쓰고, 새벽부터 밤까지 부부가 나와 일하는데도 매달 적자입니다. 카드 돌려막기 하다가 4대 보험료, 세금까지 손댈 수 없었어요. 대출 이자도 감당이 안 돼서 청주시 지원을 신청하려 했더니 건강보험료 체납으로 자격이 안 된다고 하더군요. 너무 허탈했어요." "이자 감면만 돼도 숨통이 트일 텐데" 청원구에서 헬스장을 운영하는 이모 씨(39)도 비슷한 상황이다. 코로나19 이후 한동안 버티다 시설을 리모델링하며 대출을 받았고, 신용등급이 6등급까지 떨어졌다. 이자 부담을 덜 수 있을까 싶어 시청의 이자 지원 정책을 찾아봤지만, 지방세 체납 1건이 발목을 잡았다. “아파트 관리비도 밀리고 있는데 세금이 우선일 수가 없죠. 이런 상황에서 자격 요건이 너무 까다로우면 정책 의미가 없지 않나요? 정작 필요한 사람은 아예 문턱에도 못 가는 구조예요.” "진짜 지원이 필요한 사람은 자격이 없다" “현장에선 지원 조건이 오히려 '낙인효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체납이 있는 사람은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라, 살기 위해 순서를 정한 사람입니다. 행정기관이 실질적 상황을 반영한 융통성을 가져야 진짜 도움이 됩니다.” 실제 경기 불황으로 인해 자영업자의 70% 이상이 건강보험료나 4대 보험료 납부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체납으로 인해 각종 금융지원에서 배제되는 악순환에 빠지고 있다. 특히, 신용등급이 낮거나 소득이 불안정한 계층일수록 체납 가능성이 높아, '저신용·저소득'을 위한 제도가 오히려 그들을 소외시키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청주시 관계자는 "성실 납세자에게 혜택을 주기 위한 기준"이라고 밝혔지만, 전문가들은 "정책의 실효성을 따져볼 때 자격 조건을 완화하거나, 체납자에 대해서도 일시적 사유가 입증되면 예외를 적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청주시뿐 아니라 전국 지자체에서 시행 중인 유사 정책들도 대부분 동일한 한계를 보이고 있어, 전국 단위의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지원이 절실한 이들을 제도 밖으로 밀어내는 현실. '저신용·저소득 소상공인 지원'이라는 이름 아래,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다시 한번 되돌아볼 때다. 전국 자영업자 절반 이상이 체납 위험으로 실제로 국민건강보험공단이 2024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자영업자의 약 52.3%가 최근 1년 내 건강보험료 납부에 어려움을 겪은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또한 중소기업연구원이 발표한 '2023년 소상공인 금융접근성 실태조사'에서도, 응답자의 58.6%가 "대출은 필요하지만 체납 등으로 지원받기 어렵다"고 했고, 이 중 40% 이상이 “정책금융의 자격 요건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답했다. 청주시 소상공인의 현실도 다르지 않다. 청주시청 자료에 따르면, 2024년 상반기 기준 청주시 내 사업자등록 소상공인 약 6만여 명 중 1만 3천여 명(약 21.7%)이 국세·지방세 체납이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건강보험료나 4대 보험료까지 포함하면 전체 소상공인의 30~35% 이상이 지원정책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현재 경기침체로 하루 매출이 100만원 하던 매출이 10~20만원으로 줄어 투잡, 쓰리잡을 해야 되는 현실이 안타깝고 그렇다고 직원 인건비를 줄일 수도 없고, 매달 생활비도 되지 않는 현실에 점포 폐업을 고민하는 최모씨의 안타까운 사연이 뇌리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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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사각지대에 내몰린 자영업자들…청주시 이자 지원정책, 누구를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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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제대로 된 꿈 교육! 왜 해야 하는가?
-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요즘 사회 병폐 중의 하나는 걱정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사회와 나라 발전 그리고 자신의 문제에 미리 생각하고 자신에게 물어보는 일, 즉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일에 너무 게으르다는 것이다. 걱정은 위대한 말이다. 나와 공동체를 지키고 하나 되는 가치관과 행복한 삶을 만드는 최고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해 자신에게 던지는 끊임없는 自問自答, 자기의 일을 자신에게 묻고 설명, 결정하는 태도가 먼저다. 걱정과 관련, 공자께서는 『繫辭傳』5-6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위태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그 자리를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망할 것이라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은 그 존재를 보호하는 것이다. 危者, 安其位者也; 亡者, 保其存者也.” 이것은 자신과 나라, 사회를 지키는 양면의 지혜, 즉 실력과 임기응변할 수 있는 유능함과 순발력 있는 자가 미래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과 시대정신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은 ‘걱정이네.’ 이런 말을 듣기도 참 어렵다. 특히 大人의 걱정은 공동체에서는 중요하다. 갈등이나 분열, 증오 나아가 혐오가 빈번한 사회에 대해, ‘나 몰라라’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는 등 하나 되는 공동체 가치관과 어긋나는 사람이 늘어감에도 말이다. 사회나 국가, 지역 의 문제에 걱정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여야 건강하다고 할 수 있다. 영화 매트릭스의 명언 중 최고의 명언이 있다. 모피우스가 니오에게 하는 말인데, “길을 아는 것과 그 길을 걷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There’s a difference between knowing the path and walking the path)”라는 명언이 있다. 교육 현장에서 가장 문제가 된다고 회자되는 문제와 병폐가 ‘문해력’이라고들 한다. 문해력 신장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과 문해력을 해결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문해력 신장 연수’를 하고 사진을 찍고 언론에 게재하는 것으로는 절대 부족하다. 그런데 교육 기관에서는 지금도 전시행정이라고 할 수 있는 일만 하고 있다. ‘지적 게으름’의 표본이다. ‘본질에는 멀고 표는 가깝다.’는 국민들의 시각을 외면만 하고 있을 것인가? 그 결과는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그 길을 아는 것과 고통을 안고 몸부림치며 그 길을 걷는 것은 하늘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그 길을 알고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드물다. 자신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를 묻는 습관이 절실하다. 길을 아는 것과 걷는 것이 하나가 되는 것이 誠이다. 성이란 자신의 소명을 알고 책임감 있게 하나하나 실천하는 일이다. 왜 성실하면 다 된다. 우주가 성실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성실한 언어생활을 가지고 우주의 질서를 체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실의 일차적 의미는 말의 성실함에 있다. 우리말을 제대로 알려면 한자와 한글이 만나야 한다. 우리말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사용하고 있는데도 누구 하나 불편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병이다. 아는 것은 생각이고, 걷는 것은 행동이다. 우리는 알면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행동을 했을 때만 그 길이 어떠한 길인지 알게 된다. 그리고 앞서 간 사람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고, 그때 가서야 안다고 할 수 있다. 문해력이 중요하다는 것은 모두 알겠다고 한다. 그런데 하기가 힘들다고 말한다. 왜 힘들다고 말하느냐? 힘이 들어서 못하겠다는 말이다. 왜 못할 정도로 힘이 드느냐? 힘쓰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인위적인 것으로 이루어져 있느냐? 자연적이냐?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위적으로 되어 있다. 인위적인 세상에 맞추려면 우리는 인위적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각성해야 할 것 하나는 문명은 인위적이라는 것이다. 일부러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자연이란 우리가 인위성을 발휘하고 발휘하고 발휘하고 또 발휘하다가 원래 그랬던 것 같은 경지에 이른 것을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하는 것이다. 조직의 리더가 숙명처럼 가지고 가야 하는 ‘우환(憂患) 의식’에 대하여 맹자는 ‘종신지우(終身之憂)’라고 표현한다. 그러니까 내 몸 다할 때까지 종신토록 잊지 말아야 할 숙명 같은 지도자의 근심이다. 그 근심은 개인의 근심이 아니라 지도자로서 백성들을 위해 봉사하고 혼신을 다하는 근심 즉, 평생 이웃과 함께 고민하는 우환 의식이 군자의 덕목이며, 내 안위와 출세만 생각하는 일조지환(한나절 짧은 고민)은 소인의 근심이라고 맹자는 말한다. 과연 ‘大人之憂’를 따를 것인가? 유교는 교육을 중시하는 학문이자 지도자를 키우는 큰 가르침이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려면 절대로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인류가 인간의 고통 문제를 감정적으로 외면하지 않고 仁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유학의 문제의식이다. 교육을 통해서 사회의 보편적 규범인 義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고, 우리 사회가 이렇게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유교적 현자들의 삶의 전통이 곳곳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유림들의 시대정신은 유교적 전통을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고 실천하는 일이다. 실천을 통해서 유교의 참뜻을 알아가는 수행의 과정이 필요한 이유다. 유교는 존재의 책임을 자신이 지는 것이다.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과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지”라는 헤르만 헤세의 말이 생각난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병은 무엇이고, 그 병을 치유하기 위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누가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하면,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본다. 그 몸의 움직임이 표현하는 의미를 생각한다. 그래서 身을 ‘몸 신’이라고 읽는다. 여기서 ‘신’이란 ‘신다’, ‘담다’의 뜻이다. 그 행동이 마음을 담고 있는지를 알려 준다는 뜻이다. ‘마음’은 ‘하늘’의 상대적 의미다. 몸이란 하늘을 닮아야 하고, 하늘을 담아야 한다는 명령이다. 삶의 격, 삶의 효율성, 삶의 생산성, 삶의 진실성은 생각에 의존한다. ‘나는 지금도 헤어진 첫사랑을 생각한다.’ ‘지금도 이 생각 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은 잡념이다. 생각은 일단 목적이 분명하고 지속적이며 일정 의식 수준 이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생각하는 삶을 살지 않는가? 곰곰이 생각하는 것은 감각과 본능을 넘어서는 일이기에 수고가 많이 들고 어렵다. 따라서 수고하는 것을 버거워하는 사람들은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생각하는 일을 하느냐? 안 하느냐의 일은 그 사람이 부지런한지 아닌지도 알게 해 준다. 생각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은 문화적 존재라는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인간이 해야만 하는 근본적인 일이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물건, 제도, 철학까지도 문제와 불편함을 해결한 결과다. 생각한다는 것은 불편함, 문제를 느끼거나 발견해서 고쳐가는 일이다. 생각하는 사람은 문제와 불편함이 보이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문제와 불편함이 보이지 않는다. 생각이 없다. 우리는 간혹 남의 일에 박수치면서 나도 그 사람처럼 살고 있다는 착각을 한다. 『論語』를 읽으면 자기가 공자가 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道德經』을 보면서 자신이 마치 노자가 된 사람처럼 생각한다. 다이어트를 고민하면 자신이 실제로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가끔 우리는 ‘책 속에 길이 있다.’라는 말을 보고 듣는데, 어쩌면 책 속에는 저자의 길이 있는 것이지, 그 길이 독자의 길은 아닌 거다. 자신의 길은 자신에게만 있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길을 닦고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을 받을 수는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인간의 삶은 이 세계를 이해하고, 관리하고 통제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이 세계를 이해하고 관리하고 통제하는 존재다. 인간의 생존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장치는 지식보다 더 큰 것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지식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존의 질과 양을 증가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래서 지식은 이 문명을 지배하는 힘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식을 만드는 일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지식을 수입하고 수용하는 일에만 참여하고 있다. 그래서 지식 생산보다는 지식 수입에 더 의존하고 있다. 지식 생산 국가는 선도 국가라고 한다. 종속 국가, 추격 국가, 전술 국가는 지식 수입국이다.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탐욕이 먼저고 중요하다. 지금 우리나라 교육 상황은 어렵다. 우리나라 전체가 꿈을 꾸지 않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어서다. 우리나라가 꿈이 없는 나라가 돼버렸다. 할 일이 없어진 거다. 그러니까 싸울 일밖에 없는 거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다. 기자가 되는 것이 꿈인 사람은 기자가 된 다음에는 성장이 멈춘다. 꿈이 없어진 거다. 검사가 되겠다. 검사가 된 다음에는 성장이 멈춘다. 지금 성장이 멈춘 사람을 많이 보게 된다. 우리나라도 성장을 멈추게 될 수 있다.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필리핀이 그 예다. 꿈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은 어떤 낭만적인 선택이 아니다. 심각한 사회 문제이자 존재론적 문제다. 삶에서 효율성이 높은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구체화하는 사람이다. 자기의 꿈, 판타지를 구체화하는 사람이다. 꿈으로 자기 현실을 해석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결정하는 삶이다. 모든 일은 자신에게 물어서 결정하는 습관이 성장의 해법이다. 예를 들어, ‘꿈이 뭐에요?’ 하고 물으면 ‘기자가 되는 것입니다.’라고 답한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 아니라 꿈을 이루기 위한 디딤돌이다. 우리나라가 말의 질서가 무너져서 사회 분열, 갈등, 혼란이 지속되고 있다고 하자. ‘아! 말의 질서를 바로 한번 세워보겠다.’ ‘말의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기자를 하는 것이 좋고 유용하겠다.’ 하는 것이 꿈이고 포부다. 왜 배우는가? 자신에게 갖춰지지 않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갖춰지지 않은 것을 갖추기 위해서다. 왜 갖추는가? 생존의 질과 양을 높이기 위함이다. 매체를 잘 다루는 사람은 남에게 의존하는 양이 줄어든다. 그래서 더 자유롭고 더 주도적이고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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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제대로 된 꿈 교육! 왜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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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코로나19와 눈높이 안전교육이란
- [교육연합신문=서동욱 기고] 최근 다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해서 각국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방역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것은 마스크와 손소독제였다. 마스크는 많은 이들의 호흡기를 지켜냈으며 손소독제는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사멸시켰다. 하지만 손소독제는 꽤나 많은 사고를 일으키기도 했다. 어느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의 버튼은 공용 부분이니 많은 사람들이 누르게 되고 이로 인해 엘리베이터 안에 손소독제 비치의 필요성이 커졌다. 그 아파트의 관리사무소에서는 아무런 생각 없이 손소독제를 엘리베이터의 손잡이 부근에 고정시켜두었다. 이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어린아이가 그 손소독제를 사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통상 엘리베이터의 손잡이는 중간 부분 즉 성인의 허리 부분에 위치한다. 이 위치가 허리를 덜 굽혀도 되니 효율성 측면에서는 좋은 위치인 것은 맞다. 그러나 그 높이는 아이의 입장에서는 눈높이다. 손소독제는 에탄올과 이소프로판올이 주성분이며 눈에 들어갈 경우 각막화상을 일으킬 수 있다. 그날 아파트에 탑승한 아이는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였다. 그 아이는 부모님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가 학교에서 가르쳐 준 손 소독의 필요성이 떠오른 듯 보였다. 손소독제로 다가가 그 학생은 버튼을 눌렀는데 그 순간 손소독제 입구에서 에탄올이 그 아이의 눈으로 튀어들어갔다. 아이는 눈을 손으로 비비며 고통을 호소했고 보호자는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자, 과연 관리사무소에서 선택한 그 손소독제의 높이가 합당한 높이인가. 효율성 측면에서는 합당한 높이지만 안전 측면에서는 합당하지 않은 높이라고 봐야 한다. 이 사건은 눈높이 안전교육의 필요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우리는 성인의 입장에서 어린이 안전교육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접근 방식이다. 어린이들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예상하고 대처해야 한다. 나는 교실에서 손소독제는 가급적 구석 쪽에 비치하여 사방으로 튀는 것을 막고 높이는 아이들 기준 무릎 높이 정도로 낮춘다. 그리고 손소독제를 사용할 때 학생들이 반드시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누르도록 지도한다. 손소독제가 튀어도 손안에서 튀도록 해야 옆의 학생들 눈으로 손소독제가 들어가는 화상사고를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높이 안전교육은 우리의 시각을 학생의 눈높이로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때로는 이러한 과정에서 비효율적인 부분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효율성과 안전을 맞바꿀 수는 없다. 효율성의 반대말은 비효율성이지만 안전의 반대말은 위험 또는 부상 또는 생명의 위협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경제규모에서는 선진국이지만 아직도 안전분야에서는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느낀다. 눈높이 안전교육이 일상화된 그런 나라가 되어 안전에서도 당당하게 선진국이라고 외칠 수 있는 날이 다가오기를 기원해 본다. ▣ 서동욱 ◇ 초등학교 교사 ◇ 미국 화재폭발조사관(CFEI) ◇ 소방안전교육사 및 소방학교 외래강사 ◇ 한국119청소년단 지도교사 ◇ 소방안전교육사 국민안전교육실무 교재 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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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코로나19와 눈높이 안전교육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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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중도층이 움직이면 세상이 바뀐다…21대 대선 ‘결정권’은 유권자에
- [교육연합신문=유기성 기자] 21대 대선이 단 3일 앞으로 다가왔다. 정국은 치열하게 요동치고 있고, 여야 모두 총력전에 돌입했다. 각 진영의 지지층 결집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이번 대선의 승부를 가를 결정적인 열쇠는 바로 중도층 유권자의 손에 쥐어져 있다. SBS-입소스의 2차 여론조사에 따르면, 자신을 중도 성향이라고 밝힌 유권자는 전체의 37%로, 보수(33%)나 진보(23%)보다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유권자 3명 중 1명은 '중도'로 이념 양극화가 극심한 현재 정치 지형에서 중도층의 무게감은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중간에서 중심을 잡는 표, 그 힘이 이번 선거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중도층 유권자들이 새 대통령에게 가장 기대하는 국정과제는 중도층이 가장 원하는 건 ‘경제’와 ‘통합’ 단연 ‘경제 살리기’(45%)와 ‘국민통합 및 정치갈등 해소’(32%)다. 진영 논리나 이념보다 민생과 상식, 실용을 우선하는 민심이 중도층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바람은 표로 표현될 때만 실현된다. 전체 응답자의 89%가 “반드시 투표하겠다”고 밝혔지만, 중도층은 여전히 선택을 망설이고 있다. 과거 대선에서도 중도층의 투표율은 낮은 경향을 보였고, 그 결과는 때로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한 표 차로도 승패가 갈릴 수 있는 접전 구도에서 유권자의 표가 대세를 뒤집을 수 있다. 정치에 실망했든, 모든 후보가 마음에 들지 않든, 기권은 더 나은 대안을 만들지 않는다. 중도층의 침묵은 결국 극단의 목소리만을 남기고 만다. 변화는 선택에서 시작된다. 이번 대선은 이념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 지도자를 고르는 기회다. 침묵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중도층의 표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민심의 중간값이며, 대한민국의 균형을 잡는 소중한 무게추다. 어느 한 쪽의 승리가 아닌, 모두를 위한 중심을 선택하라. 유권자의 한 표가 대한민국의 중심을 바로 세운다 투표는 권리가 아닌 책임이며, 국가의 주인은 투표하는 국민이다. 투표하는 국민이 진정한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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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중도층이 움직이면 세상이 바뀐다…21대 대선 ‘결정권’은 유권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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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문제는 사람이야, 바보야!
-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인간은 성실하게 노력해야만 먹고 산다. 특히 농경 문화에서 사는 사람들은 치열하게 일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인생은 막대한 노력의 양에 비례한다. 공자는 말한다: 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한국 사람들처럼 好學의 사상이 몸에 밴 사람들은 세계에서 드물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길을 가다가 모르는 사람이 물으면, 어떻게든 가르쳐주려고 백방으로 노력한다. 물으면 뛸 듯이 기뻐하며, 묻는 사람에게 어떻게든 보답하려는 방법을 찾는다. 세계 어느 나라 사람에게도 없는 한국인만의 특징이다. 끌어당김의 따뜻함이다. 이런 문화야말로 선도 국가로 나가는 바탕이다. 세계가 한국을 찾는 이유다. 이것이 하늘 사상이고 천지인적 사고다. 공동체적 정신은 천지인적 사고로부터 출발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먼저 있어야 세 번째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상이다. 그래서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와 두 번째를 살리는 정신이다. 이것이 ‘살이’고 ‘살림’이고 ‘살림살이’다. 影(그림자 영)자에서 보듯이 그림자는 해빛이 있고 햇빛을 가리는 사물이 있으면 저절로 생겨난다. 한글과 한자도 음양과 천지인적 사고를 설계도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우리말을 제대로 알려면 한자와 한글이 서로 만나야 한다. 우리말과 글은 우주 질서를 표현하고 있다. 우주 질서는 절제를 요구한다. 현대를 절제를 상실한 시대라고 말한다. 무절제는 혼란과 갈등을 수반하게 되고 증폭시킬 뿐이다. 그 상황에 어울리는 말과 행동을 생각하는 전략적이고 선진적인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이 필요하다. 말과 행동을 절제하는 교육이 필요한 때다. 무슨 결정을 할 때마다 자신에게 물어보는 태도를 습관화해야 한다. ‘이게 나한테 무엇이지?’ ‘내가 원하는 것인지?’ 등을 자신에게 설명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남이 부여한 일을 맹목적으로 수행하는 종속적인 삶이 아니라, 자기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 수 있는 전략적이고 충실한 삶을 살 수 있다.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지’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 먼저 학교에서부터 아이들이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어른들이 많다는 생각이 미치도록 말과 행동, 태도를 지녀야 한다. 천지자연에 대한 아름다움과 경외감이 몸에 배도록 하는 교육이 절실하다. 함부로 말하고 글을 쓰는 것에 대한 자제력을 길러야 한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예찬禮讚이 사람의 길인 것을 아는 것은 자신의 인생길에 나침반이 될 것이다. 장자는 『大宗師』편에서 “有眞人而後有眞知”라는 말을 한다. 참된 지식은 그 사람이 참된 사람이어야 가능하다는 뜻이다. 사람을 나타내는 ‘人(사람 인)’ 자는 ‘사람의 형상’을 이용하여 만들었으므로 사람의 내면적 가치는 ‘인’이라는 음가에 달려 있다. 사람을 ‘인’이라 부르는 것은 사람을 해와 같은 뿌리로 여긴다는 뜻이다. 해는 세상 만물의 ‘중심’이므로 사람이 곧 세상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待其人而後行(中庸, 27-4). 모든 것이 사람을 기다린 후에 행하여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인재를 키워놓지 않으면 모든 조직은 파멸한다. 그것은 인간세의 만고불변萬古不變의 법칙이다. 그런데 아직도 사람을 키우지 않고 조직만을 키우려 하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孝라는 말도 가치의 계승과 전통이라는 말의 다름 아니다. 사람은 말귀를 알아먹을 때, 집안 어른 특히 어머니와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그 사람의 좌우명이 되는 경우가 많고, 그 말씀이 그 사람의 사람됨의 기저가 된다. 그래서 부모님을 보면 자녀를 알 수 있고, 자녀를 보면 그 부모를 헤아릴 수 있다는 말이 생겨난 것 같다. 제 어머니는 6남매를 낳아 기르셨다. 지금도 제가 가는 길에 등불이 되었다. 제가 어렸을 때 항상 하셨던 말씀이다. ‘사람이 그러면 쓴다냐?’ ‘그러면 못 써야!’ 이 말은 어렸을 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까지 제 말과 행동의 지침으로 작동되었다. 한 사람이 개개인을 대하는 태도는 공동체에 대한 태도로 직결되기 때문에, 타인들과의 상호작용에서 어떤 몰인정, 무시, 일말의 폭력성을 노정하는 사람은 그 어떤 전문성이나 능력 등을 가졌는지와는 상관없이 한겨레의 사람으로서 자격이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공자의 어록이라고 하는 ‘논어’의 ‘안연 편’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자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는 “양식을 풍족하게 하고, 군비를 충실하게 하고, 백성들이 위정자를 믿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자공이 “어쩔 수 없이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뭘 버려야 합니까(必不得已而去, 於斯三者何先)”라고 질문을 하자, 공자는 ‘군비’라고 답한다. 자공이 또 다시 “남은 둘 중에 또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무엇을 버리오리까”라고 묻자, 공자는 “양식을 버려라. 예로부터 사람은 모두 죽게 마련이었으나, 백성들의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설 수 없다.(去食.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고 답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경세(經世)에 있어서 핵심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실상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 정책과 경영에서 ‘사람’이 배제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반 프레드릭 테일러가 '과학적 관리법'을 들고 나오면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겠지만, 기실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열리면서 국가와 기업은 물론 개인마저도 무서울 정도로 무한 경쟁체제에 놓이면서라고 분석하는 이들이 많다. 흔히들 '역지사지'란 말을 많이 하는데, 이는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사람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라.’는 뜻과 다름 아니다. 많은 정책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정책의 대상인 사람을 고려치 않고, 시스템을 유지하는데 더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볼로냐 대학 정치학 교수이자 킹스 칼리지 런던 법학 명예교수인 신디 L. 스카흐(C.L. Skach)는 그의 저서 <하우 투 비어 시티즌, How to be a citizen>에서 성문화된 규칙 및 법질서의 존재가, 사람들이 규칙 없이 내던져지면 서로 죽이고 훔치는 야만인으로 되돌아갈 거라는 암시를 함축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어 오늘날 민주주의의 문제를 더 많은 규칙, 더 세목으로 들어가는 법의 제정으로 해결하려 하는 시도는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초래한다고 지적한다. 그가 가장 심각한 문제로 꼽은 것은 시민들이 정치 엘리트와 사법 엘리트에게 더 의존함에 따라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 하는 무기력에 빠지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스카흐는 의원내각제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난 바가 없다는 사실 등을 근거로, 민주주의의 공고화에 대통령제보다 의원내각제가 더 적합하다는 것을 입증한 연구를 내놓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두 체제의 비교를, 훗날 스카흐 자신이 부정하면서 규칙·제도·체계를 바꿈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리라는 기대와 의지 자체가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글자로 쓰인 규칙만 잘 준수하면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아래서 지도자로 부상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과연 대중의 지지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질문하는 법을 망각하게 된다고 말한다. 즉 리더십에 대한 비판의식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스카흐는 민주주의의 리더십을 구상하는 데 있어서, 입헌주의만큼 중요한 또 다른 이념을 근간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키케로(고대 로마의 정치가)의 의무론에서 가져온다. 여기서 중요한 것으로 제시되는 것이 인류애와 동료에 대한 의무, 공감과 연민을 포함한 ‘태도’를 꼽고 있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헌법을 부정하고 국민의 생명도 가볍게 여기며 시민성을 완전히 결여한 사람들이 시스템을 운용하는 자리에 앉았을 때 벌어지는 참극을, 충분히 방지할 수 있었던 비극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는 자고 나면 잊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타인을 대하는 태도, 공동체에 대한 태도를 위시한 '시민성'의 여부를 지도자에 대한 평가의 제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이 기준에 완벽히 미달한 사람들이 아직 한국의 지도자에 남아있다. 이들을 축출하는 일부터 완수해야 비로소 제대로 된, 더 나은 제도와 체제를 위한 논의의 여건이 마련될 수 있다. ‘착각하는 CEO’라는 책이 있다. 경영 현장에서 부딪치는 각종 정책적 판단 오류의 원인과 해결 방안을 다양한 심리학 자료로 풀어내고 있는데, 전체를 관통하는 내용은 ‘새로운 시스템과 제도를 아무리 많이 도입해도 그것이 뿌리내리는 토양(사람)이 비옥하지 않다면 의미 없는 시도’라는 것이다. 정책 입안자나 경영자는 사람에 대한 자신만의 신념과 고집을 내려놓고 과연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가슴과 귀를 열어 놓으라고 말하고 있다. 子思는 말한다:『中庸』 27-4에서 ‘故君子尊德性而道問’, 인간 존재의 당위성은 問學과 德性의 겸비에 있다. 인간은 물어서 배울 줄 알고 덕성을 높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問學은 외부를 향한 묻고 배움이다. 묻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다 안다고 하는 사람이다. 덕성은 인간이 내면의 수양을 통해서 절제, 극기, 솔선수범, 불편감수, 불편자초 등 내면적 자질을 함양하는 것이다. 학문만 있는 사람을 존경하지 않는다. 아울러 덕성만 있고 학문이 없는 인간도 인정하지 않는다. 배움과 덕성은 사람다움을 숙성시키는 토양이다. ‘바둑아, 바둑아, 이리 오너라.’보다는 ‘至誠無息’, ‘利見大人’, ‘天命之謂性’ 등 동양철학을 내면화하는 교육이 실천된다면 후학들의 가치관에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예전처럼 기승을 부리지는 않고 있지만, 여전히 치열한 경쟁사회인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구호는 이것이 아닐까? “문제는 사람이야, 바보야.” 한자한글연구원장 고전연구가․ 교육학박사 전 강진교육장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 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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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문제는 사람이야, 바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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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존중칼럼] 경제생활문제로 인한 자살 크게 늘어
- [교육연합신문=김대선 기고] 생명존중시민회의(상임대표 김대선)는 3월 31일 국내외 통계자료들을 분석해 2025년 자살대책 팩트시트(factsheet)를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2023년 자살 사망자 수는 1만 3978명으로 1일 평균 자살 사망자 수는 38.3명이며 인구 10만 명당 자살 사망자 수는 27.3명, 전년 대비 2.2명(8.5%) 증가했다(통계청, 2023년 사망원인통계 결과). 이 증가율은 자살자 수가 가장 많았던 2011년 이래 2018년 9.5% 증가에 이어 지난 10년 사이에 두 번째로 높은 증가율을 기록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2020년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24.1명으로 OECD 국가 42개국 가운데 압도적 1위의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다. OECD 자살률 통계비교(2020년 기준)에서 인구 10만 명당 15명 이상의 높은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에 이어 리투아니아(20.3명), 헝가리(16.1명), 슬로베니아(15.7명), 일본(15.4명), 에스토니아(15.1명) 등 6개 나라다(OECD DATA, Suicide rates). OECD 홈페이지에 올려져 있는 그래프는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2021년 기준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는 25.8명으로 세계에서 4번째로 많다. 그린란드(59.6명), 가이아나(31.3명), 리투아니아(27.9명)에 이어서 4번째이다. 러시아(24.1명), 수리남(23.6명)이 뒤를 잇는다. 경찰청의 자살 원인 분석에 따르면 경제생활 문제로 인한 자살은 2023년 3656명으로, 자살 원인의 25.9%를 차지한다.(2023 경찰통계연보, 경찰청) 경제생활 문제로 인한 자살은 2021년(3190명, 24.2%), 2022년(2868명, 22.5%)에 비해 큰 폭으로 증가했다. 10대, 20대, 3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며, 40대, 50대 사망원인 2위가 자살이다. 2023년 기준 50대 사망원인의 11.1%, 40대 사망원인의 23.4%, 30대 사망원인의 40.2%, 20대 사망원인의 52.7%, 10대 사망원인의 46.1%를 자살이 차지한다.(2023년 사망원인통계 결과, 통계청) 2023년 도·특별자치도의 인구 10만 명당 연령표준화 자살자 수는 충남 29.4명, 충북 28.6명, 제주 27.3명 순으로 많고, 특별시·광역시는 울산 28.3명, 인천 24.6명, 대구 24.4명 순으로 많다.(2023년 사망원인통계 결과, 통계청) 1만 8449가구 3만 5304명을 대상으로 이뤄진 사회조사 결과, 자살 충동을 느꼈다는 사람은 4.8%에 달하는데, 이것은 2년 전보다 0.9% 감소한 것이다. 여자가 5.9%로 남자(3.7%)보다 자살 충동을 더 많이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살 충동의 이유는 신체ㆍ정신적 질환, 우울감, 장애(37.2%), 경제적 어려움(25.8%), 직장문제(11.2%), 외로움·고독(9.0%), 가정불화(8.0%) 순이다(2024년 사회조사 결과, 통계청). 자살 충동 이유로 10대는 학교성적과 진학문제, 20~30대 및 50대 이상은 질환․우울감․장애, 40대는 경제적 어려움이 주된 이유이다. 전국의 800개 학교 5만 8285명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실시한 청소년건강행태조사에 따르면 2024년 청소년 자살 시도율은 2.8%로 중학생 3.1%, 고등학생 2.4%이며 남학생 2.2%, 여학생 3.3%에 달한다. 자살 시도율은 2018년 3.1%, 2019년 3.0%, 2020년 2.0%로 낮아졌다가 다시 꾸준히 높아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제20차 청소년건강행태조사 통계, 질병관리청) 같은 조사에서 스트레스를 ‘대단히 많이’ 또는 ‘많이’ 느끼는 여학생은 49.9%, 남학생 35.2%로 나타났다. 스트레스 인지율은 지난 10년간 꾸준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2023년 여학생 44.2%, 남학생 30.8% 대비 5% 이상 높아졌다. 지난 12개월 동안 2주 내내 일상생활을 중단할 정도로 슬프거나 절망감을 느낀 적이 있는 우울감 경험률은 27.7%(여학생 32.5%, 남학생 23.1%)로 이것도 10년간 증가 경향을 보였다. 전국 1만 9000가구 3만 60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3년 통계청 사회조사 결과, 낙심하거나 우울해서 이야기 상대가 필요한 경우,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비중은 79.8%로 2년 전보다 0.2%p 증가했다. 사회적 관계망이 취약한 사람이 20%를 상회한다.(2023 사회조사, 통계청) 자원봉사 참여 경험률(지난 1년 동안 자원봉사활동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10.6%로 2년 전 대비 2.2%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급격히 감소했던 자원봉사 경험률이 약간 회복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1년 동안 기부 경험이 있는 사람은 23.7%로, 2년 전 대비 2.1% 증가했다. 향후 기부 의사가 있는 사람은 38.8%로, 2년 전 대비 1.6% 증가했다. 자원봉사 참여 경험률, 단체활동 참여율, 기부 경험률 등 지속적인 감소 추세를 보이던 이들 사회자본 관련 항목이 증가 추세로 돌아선 것은 상당히 바람직한 반전이다. 하지만 자원봉사 참여 경험률이 10년 전 대비 절반 수준이고, 기부 경험률 현저하게 낮아진 것은 사회적 자본의 복원을 위해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높은 자살률은 경제적 압박, 학업 스트레스, 정신 건강 치료 시 낙인에 대한 과도한 우려, 미디어의 영향, 문화적 역동성, 법 제도의 미비 등 여러 요인의 복잡한 상호 작용의 결과이다. 생명존중시민회의는 자살을 근본적으로 줄이기 위해서는 개인의 정신건강 차원의 접근이 아닌, 국가 및 지역사회 차원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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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존중칼럼] 경제생활문제로 인한 자살 크게 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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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높은 시민 의식’과 ‘무형의 가치 교육’
-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우리는 지금 보여주는 정치, 보여주는 교육에 더 치중하는 감이 없지 않다. 자연의 성실함과 인간의 성실함을 일치시켜 나가는 정치, 교육이 더 강조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삶의 철학적 기저를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유형의 변화를 추구하는 정치 지도자와 교육 지도자보다는 무형의 변화, 즉 형이하학적 변화보다는 형이상학적 변화를 추구하는 지도자를 뽑아서 나라와 교육을 이끌도록 해야 한다. 모든 국가의 질서는 무형의 질서로 유지되는 것이다. 그 무형의 질서를 뒷받침하는 것은 성誠이다. 즉 우주적 질서와 인간의 법칙을 일치시켜 나가는 것이 성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하는 우리 조상들의 삶이야말로 우주적 법칙대로 산 사람들이다. 삶의 의미는 삶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면 산다고 하는 것이 괴롭게 된다. 자사子思는 삶에서 성誠을 강조하는데, 천지天地의 성실함에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교육은 지도자를 기르는 것이다. 지도자에게는 보이는 것 이상의 가치관, 철학, 윤리 등의 무형의 자산이 필요하다. 미국의 대학에서는 지도성을 발휘하는 학생에게는 수시 모집 대상의 우선권이 주어진다. 지도성은 삶의 마디마디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 지도성은 성誠에 바탕을 두는 것이며 공동체적共同體的이다. 자신만을 앞세우기보다는 전체를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는 솔선수범을 말한다. 천지天地의 성실함이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최고의 가치다. 그 가치는 선한 영향력이다. 선한 영향력은 우리 사회를 지탱해 줄 버팀목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스승이 되어야 한다. 四書 중의 하나인 大學에서도 교육은 학생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승을 기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스승의 자질 중의 자질은 ‘선한 영향력’이다. 국민의 스승이 될 수 있는 사람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025. 4월 4일(금) 11시 22분 문형배 헌법재판소 소장권한대행이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라고 선고한 뒤, 김장하 선생을 함께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사회관계망서비스에 많은 사람들이 관련 글을 올리고 있다. 문형배 대행이 2019년 4월 국회 청문회 때 했던 말이 이번에 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 “저는 경남 하동에서 가난한 농부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독지가인 김장하 선생을 만나 대학 4년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학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사법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은 제게 자유에 기초하여 부를 쌓고 평등을 추구하여 불합리한 차별을 없애며 박애로 공동체를 튼튼하게 연결하는 것이 가능한 곳이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몸소 깨우쳐 주셨습니다. 제가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인사하러 간 자리에서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사회에 있던 것을 너에게 주었으니 갚으려거든 내가 아니라 사회에 갚으라'고 하는 말씀을 하셨고, 저는 그 말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법관의 길을 걸어온 지난 27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한민국 헌법의 숭고한 의지가 우리 사회에서 올바로 관철되는 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것만이 선생의 가르침대로 우리 사회에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길이라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지금까지 간직한 저의 초심은 언제나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김장하 선생은 한약방에서 머슴살이하다가 18살에 국가에서 시행한 한약사 자격시험에 합격해 한약방을 열어서 생활하셨다. “내가 돈을 벌었다면 결국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번 건데, 그 소중한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똥은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뿌려 버리면 거름이 돼 꽃도 피고 열매도 맺는다.”고 하셨다고 한다. 어른 김장하 선생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이런 마음이 들었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 열심히 돈을 벌어야겠다.’는 마음. 선생님의 선한 마음과 실천으로 많은 꽃과 열매를 맺었듯이 나도 세상에 그런 일을 하다 죽고 싶다는 포부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담담하게 기다려 주고 지켜줄 수 있는 큰 어른이 되고 싶다는 소망도 갖게 되었다. 김장하 선생과 문형배 재판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배가 부르고 살맛이 난다, 그리고 생각한다. 인재를 키우는 것이 교육에 있고, 그 교육은 사람에게 달려 있다. 김장하 선생이 계시기에 문형배 재판관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 또한 문형배 재판관의 선한 영향력은 수많은 선인을 낳게 할 씨앗이다. 그래서 子思는 ‘기법其法’ 아니라 ‘기인其人’을 강조한 것이다. 저의 조부모님과 부모님도 ‘착하게 살아라.’는 말씀을 귀에 못이 닿도록 하셨다. 그 말씀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 ‘착하게 살아라.’는 ‘하늘의 마음으로 살아라.’는 뜻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착하다’라는 뜻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인생이란? 성誠이라는 종착역을 향하여 ‘성지誠之’호의 기차를 타고 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성誠’해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사람의 길이다. '사회 대개혁'의 시작은 학교여야 한다. 학교가 지닌 모든 교육적 자산을 명문대 진학에만 쏟아부었던 관행에서 과감히 탈피해야 한다. 더 많은 '윤석열'을 길러내는 것이 학교 교육의 목표여서는 곤란하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감수성을 갖추고 공공선을 행하는 성숙하고 올곧은 시민을 육성하는 것이 우리 교육의 본령이 되어야 한다. 윤 대통령의 집권과 파국은 우리가 지도자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학벌과 벼슬을 기준 삼는 게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윤 대통령의 파면은 오로지 명문대 진학에 애면글면해 온 학교 교육의 방향타를 돌리라는 준엄한 명령이다. 미래의 '윤석열들'이 주인 행세를 하는 학교를 더는 두고 볼 수 없다. 孔子는 말한다. 국민을 다스리는 데 억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강제로 하거나 법에 의해 국민을 지배하는 것은 부작용만 만들게 된다. 위정자가 스스로 모범을 보이고 솔선수범한다면 국민도 언젠가는 따르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상명하복이 유교의 본질이 아니다. 물이 위로부터 아래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듯 윗사람의 귀감이 되는 언행이 다른 사람에게 스며들게 해야 한다. 사회의 지도자나 어른들의 덕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고 스스로 따라오게 하는 방법이다. 집안에서 효에 대해 모범을 보이는 부모가 있다면 자녀들도 분명히 효도를 배우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 실제 행동으로 옮길 것이다. 윗사람이 모범적인 언행을 하는 것보다 좋은 교육은 없다. “서울대 많이 보내는 학교가 아니라,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동문이 많은 학교가 명문”이다. 지도자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공부는 문해력이다. ‘치治’의 ‘다스리다’라는 말은 ‘하늘이 와서 하는 일’이라는 의미이며, 하늘이 하는 일은 하늘이 낸 만물을 살린다는 뜻이다. ‘治(다스릴 치)’자는 ‘氵’와 ‘台’로 되어 있으며 ‘台’는 ‘별 태’, ‘나 이’라는 의미로, 속뜻은 ‘하늘이 내려오다’, ‘하늘에서 내려오다.’의 뜻으로 쓰이고, 그리고 ‘氵’는 ‘물 수’, ‘삼 수’라고 하며 속뜻은 ‘작용’을 나타낸다. ‘치治’는 하늘의 마음으로 백성을 살리는 일을 최우선 하라는 하늘의 명령, ‘천명天命’이다. 한겨레가 세계에서 빼어난 정신문화를 가졌다는 것은 한마디로 웅변하는 말이 ‘살림’이고 ‘홍익弘益’이다. 갈등이 만연한 혼탁한 오늘의 세계에 인류를 살릴 한줄기 샘물과도 같은 말이 ‘살림’이고 ‘홍익弘益’이다. 우리는 그런 영웅들의 후예다. 자부심을 가지고 세계를 바라보며 힘차게 살림과 홍익을 외쳐야 한다. 우리 민족을 자랑하면 국수주의國粹主義라고 폄훼하며 백안시白眼視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는 국수國粹의 뜻도 모르고 우리의 ‘살림살이’ 정신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우리는 살림살이의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민족주의를 아무리 강조해도 그것은 인류를 위한 살림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자신 있게 외치고 펼쳐 나가자. 오늘의 정치에서 ‘治’자의 의미만 회복해도 서로를 살림의 대상으로 여기게 될 것이니 궁극적으로 인류의 삶은 달라질 것이다. 여기에는 교육의 바탕이 바뀌어야 한다. 학교에서 ‘治(다스릴 치)’로 외우기만 하는 공부에서, ‘治’자는 ‘다스리다’를 왜 ‘치’라고 할까를 생각하는 방법으로, ‘다스리다’와 ‘치’를 알아야 ‘治’자를 제대로 알 수 있다. 즉 우리말인 ‘다스리다.’와 ‘치’를 알아야 ‘治’를 제대로 알 수 있다. 어떤 경우든지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흔들리지 않는 원칙과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한때의 실패나 고뇌는 미래의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 필수 과정이다. 이 시기에 여러 직접적인 경험과 책이나 매체와 같은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앞서간 현인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키워야 하며 자신만의 세계관을 정립해야 한다. 그래야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스스로 깨치고 그 확고함에서 성공을 만드는 에너지를 얻게 될 것이다. 남이 옳다고 하는 것이 누구에게는 옳을 수 있으나 내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때로는 당장에 이익이 되는 것도 자신의 원칙이나 가치에 부합하지 않으면 버려야 한다. 그리고 항상 자신을 살펴서 바르게 가고 있는지를 수도 없이 살펴봐야 한다. 또한 자가당착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나의 문제를 짚어줄 수 있는 믿을만한 친구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마음속 깊은 곳에 확고하게 내재화된 좋은 가치 기준들이 확고하게 자리 잡아서 필요에 따라 작동하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이 모든 것들을 지탱해 줄 자신만의 원칙과 기준, 본질적인 가치를 내면화해야 한다. 당장에 좋아 보이는 유행과 같은 것들에 흔들리지 않고 많은 고뇌를 통해 자기만의 성공의 법칙을 완성해야 한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마음가짐이나 태도를 잘 살펴보자. 미래에 바라는 것에 비춰 현재 당신 모습을 점검하라. 당신 삶에 필요한 정답이 되어 줄 것이다. ▣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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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높은 시민 의식’과 ‘무형의 가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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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바른 인성人性’, 天命과 교섭 속에서 진화하는 것이다
-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막스 베버는 관료제에서 강조해야 할 요소로 ‘비인격성(impersonality)’을 제시했다. 그 자리에 어떤 사람이 앉는다고 하더라도 개인적인 판단, 연줄, 관계에 끄달려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오로지 그 자리에서, 그 직분에서 합리적으로 결단하고, 그 법질서에 따라서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즉 비인격성이란 조직에서 업무를 행하는 경우 인간적인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하면 행정을 수행하는 사람은 공공 서비스를 받는 당사자와 친하든 그렇지 않든 그들을 차별 없이 공정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公)과 사(私)를 철저히 구분해 행정을 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역이란 하늘의 뜻으로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고, 사람의 입장에서 하늘을 헤아리는 것은 아니다(易之所以天治人, 而非以人測天也).”라는 왕부지(王夫之, 1619년 ~ 1692년)의 역설은 막스 베버의 입장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즉 주관적인 오류가 많이 생길 수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서 더하여 “吉凶者, 貞勝者也. 天地道也, 貞觀者也(『繫辭傳』하편 1-2.)에서 말하는 것은, 길흉이라는 것은 바르게 극복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며, 천지의 도는 바름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의미다. 길흉과 천명을 잘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를 함의한다.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는 천명天命과의 교섭 속에서 진화하는 것이다. 잘못된 판단을 내렸더라도 개선을 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말과 행동을 해야 한다. 즉 하늘이 끊임없이 나에게 명하는 것을 듣고 실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天命之謂性이라는 것이며, 性(성품 성)은=忄+生의 글자로 만물을 生하게 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 천명天命이고 사람의 본성이다. 그 본성을 회복하는 일에 우리는 게을리해서는 아니 된다. 그렇게 되면 인성교육人性敎育이 말로만이 아니라 그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실천하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천지天地와 성인聖人의 가슴을 만나야 한다. 그 가르침을 일용의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 모든 국민들이 이 계사전의 글귀를 가슴에 담고 살기를 소망한다. 우리 청소년들도 하루 한 번 낭송하면서 그 의미를 되새겼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특히 고등학교 3학년생들이 수능이 끝나면 조금은 여유가 생긴다. 이때 ‘사람의 길’, ‘사람의 정체성’ 등과 같은 시간을 마련할 수도 있다? 누군가 지방자치를 시작했는지는 시시콜콜하게 말하고 싶지 않지만, 이때부터 교육감분들이 ‘교육’보다는 ‘표’로 눈길이 쏠리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다시 최소한 교육감들이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사람이 제 자리에 서고, 몸소 보여주는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바른 교육을 위한 길을 찾아야 한다. 나는 날마다 이 문장을 암송하고 있다. "天地之大德曰生, 聖人之大寶曰位; 何以守位曰仁, 何以聚人曰財, 理財正辭, 禁民爲非曰義” 『繫辭傳 下篇』1-4. 천지는 끊임없이 생명을 창조한다는 그 사실 때문에 그 大德을 유지하는 것이다. 성인의 위位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유지되는 것이다. 인민이야말로 국가의 근본이다. 인민의 마음이 모아지지 않으면 국가도 유지 안 되고 位도 유지되지 않는 것이다. 성인은 국가의 재화와 관련해 세 가지를 확실하게 운영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준엄한 하늘의 명령이다. 하늘이 없으면 아무것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그래서 하늘이 모두고, 전부다. 그래서 동양 사상, 그리고 한자와 한문의 설계도는 ‘하늘로부터’가 그 본연의 시작이고 끝이다. 그 첫째는 理材, 국가의 부의 혜택이 공평하게 국민 모두에게 돌아가도록 질서 있게 다루어야 한다. 그 둘째는 正辭, 국가를 운영하는 자는 시와 비가 엄정해야 한다. 아니면 아니고 기면 기다. 그 언어를 바르게 써야 한다. 그 셋째는 禁民爲非, 백성들이 비리를 저지르는 것을 용인해서는 아니 된다. 예나 지금이나 관권의 비리가 민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천이었다. 법률을 공평하게 적용해야 하고, 도덕적인 목표를 향해 써야 한다.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 너무 처참하다. 너무 슬프다. ‘나는 누가 임명해 준 자리이니 임명권자의 입장을 지켜줘야 한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상식이 되어버렸고, 이 논리가 국가의 상부뿐만 아니라 하급 기관까지 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러한 논리가 우리나라 방방곡곡 구석구석까지 범람하고 있다고들 대놓고 말한다. 이러한 비정상의 상식을 국민의 상식으로 만든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는 이 부정의를 정의라고 가르칠 것인가? 이 순간에도 이해관계에만 귀를 기울일 것인가? ‘내 편, 네 편’만이 있고, 옳고 그름은 없다? 따지지도 않는다. 누가 나를 임명했는가만이 중요한 사회가 돼버렸다. 인간은 땅을 걸으면서 생명을 다하는 존재다. ‘나는 걷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도울 김용옥 교수는 말한다. “윤석열의 계엄은 우리를 경악하게 했다. 그리고 우리를 깨닫게 했다. 민중이 방심하면 단단하다고 여긴 민주주의에 균열이 생기고, 그 균열에 윤석열과 같은 독버섯이 생긴다는 것”을, 제주 4·3 사건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소설 <순이 삼촌>을 쓴 작가 현기영 작가(84)는 이달 발간한 에세이 <사월에 부는 바람>(한길사)에서 한 말이다. 나는 ‘윤석열의 계엄’을 통해, 우리 사회에 윤석열이 많이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 혹시 나도 ‘윤석열’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무섭고 섬뜩하다. 나는 “이들이 갑자기 나타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승만 정권 이전부터 계속돼 온 기득권 세력, 정치적 이익 때문에 모인 이들이 그간은 도덕적 흠결로 인해 자신을 억누르고 있다가, 이제 ‘우리도 옳다’며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에 불어온 이승만 전 대통령 우상화 현상 등이 잠복해 있던 극우가 모습을 드러낸 시초라 할 것이다. 다만 한강 등 작가 400여 명이 윤석열 탄핵을 촉구하는 성명을 낸 문학계에서는 희망을 발견했다. “한강이 노벨상을 받게 된 요인 중 하나가 민주화의 문제, 사회 정의를 주제로 한 소설을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광주와 제주를 다룬 두 작품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가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좋았다. 계엄령이 문학계에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2030 여성 등 젊은이들이 내란에 맞서기 위해 광장으로 나선 모습에도 놀랐다. 기성세대로서,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겪은 사람으로서 현시대 젊은이들이 사회 현상에 대한 인식보다는 일상에 함몰돼 있다고 생각했던 면이 있었다. 계엄령 이후 바람처럼, 기적처럼 젊은이들이 나타난 모습을 보고 놀랍고 반가웠다. ‘내가 젊은 세대를 많이 오해했구나’ 자괴감까지 느꼈다. 아기가 태어나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배우는 것은 아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문화다. 말을 빨리 배우는 아이도 있고 걸음마가 늦은 아이도 있다. 말이나 글은 공동체 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문화다. 다른 나라에 가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화인 말은 소용이 없다. 말이나 글이란 모르면 불편하다. 말을 잘한다거나 글을 잘 쓴다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말이 어둔하고 글씨가 단정하지 못하다고 인격적으로 무시당하지는 않는다. 왜 뜬금없이 다 아는 소리를 하느냐고? 다 아는 사실, 그걸 사람들은 상식이라고 한다.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기에 하는 말이다. 그가 만들고 싶은 세상은 정말 그 ‘다 아는 사실이 통하는’ 세상일까?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좀 더 살기 좋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기에 하는 말이다. 말이 어렵지요? 상식적으로 얘기해 보자. 교육을 왜 받아야 할까요? 교육을 ‘사회화’ 혹은 ‘재사회화’라고도 한다. ‘사회화’란 사람이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사회생활에 필요한 가치, 기술, 지식, 규범 들을 학습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사회화를 통해 인간다운 품성과 자질을 획득해 나가며 사회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이 사회화를 서울에서 하면 훌륭한 사람이고 광주나 부산에서 하면 덜 훌륭한 사람인가? 서울에 소재한 대학을 나오면 더 훌륭한 사람이고 부산이나 광주에 있는 학교에 다니면 덜 훌륭한 사람인가? 우리는 언제부터 그 사람의 외모나 성, 학교, 직업, 경제력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기 시작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똑똑한 사람, 유능한 사람일 수는 있지만 훌륭한가 아닌가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이완용이나 히틀러 같은 사람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 물론 이런 사람은 똑똑하기는 하겠지만 훌륭하다고 하지는 않는다. 대통령이 될 사람을 SKY 출신이어야 하거나 변호사나 판검사를 지냈던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도 있을까?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세상을 보는 안목이 원칙과 기준이 없이 뒤틀린 가치관으로 보고 판단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공정과 상식, 정의를 내걸고 당선되지 않았는가? 공정과 상식,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면서 그의 말과 행동을 보면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 부모의 경제력으로 자녀의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는 사회. 어느 학교 출신인가에 따라 사람의 가치까지 달라지는 현실을 어뗗게 생각하는가?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 사람이 SKY에 합격하면 학교 정문이나 시내 곳곳에 “축 000 서울대학교 합격” 이런 플래카드가 나붙기도 했다. 내가 가고 싶은 학교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해서 남과 더불어 오순도순 사는 것!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음양과 천지인적 사고다. 人性敎育, 天命을 아는 것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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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바른 인성人性’, 天命과 교섭 속에서 진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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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학교에 ‘엔클리어(EnClear) 소화기’ 도입이 시급한 이유
- [교육연합신문=정용규 기고] 학교 교실은 이제 단순한 학습 공간을 넘어 다양한 전자기기가 밀집된 디지털 학습 환경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태블릿PC, 노트북, 전자칠판, 태블릿PC 충전함 등 다양한 기기가 수업에 활용되면서 학습의 효율성이 높아졌지만, 동시에 전력 사용량 증가와 전기적 과부하로 인한 위험도 커지고 있다. 이는 학생과 교직원의 안전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특히, 하나의 충전함에 20~30대의 태블릿PC가 동시에 충전되는 사례가 흔해지면서 전력 집중으로 인한 발열, 과충전, 배터리 폭발 등의 위험이 증가하고 있다. 한국교육시설안전원의 조사에 따르면, 최근 3년간 발생한 학교 화재의 46.3%~51.4%가 전기적 요인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디지털 학습 환경이 확대됨에 따라 전기적 위험 또한 커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태블릿PC와 노트북과 같은 리튬이온 배터리를 사용하는 전자기기는 충전 중 과열, 내부 단락, 충격 등에 의해 발화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국내외에서 과충전으로 인한 배터리 폭발 사고가 자주 보고되고 있으며, 학교에서도 전자기기 과열로 인해 교실 내 연기가 발생하거나 소규모 화재가 일어난 사례가 종종 보고되고 있다. 특히, 전자기기 사용이 증가하면서 충전 관련 사고가 점점 더 빈번해지고 있다. 부산의 태블릿PC 충전함 화재, 서울에서 발생한 노트북 과열 화재와 다중 충전 케이블로 인한 사고 사례들은 모두 전자기기 사용이 증가하는 디지털 환경에서 전기적 안전관리가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특히, 학교와 같은 공공 교육시설에서는 다수의 전자기기가 동시에 사용되는 환경이므로 전력 과부하 방지대책, 정기적인 점검, 적절한 소화장비 마련 등의 안전 조치가 필수적이다. 학교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태블릿PC와 노트북은 리튬이온 배터리를 에너지원으로 활용한다. 이 배터리는 과충전, 충격, 내부 단락 등의 이유로 발열 및 화재로 이어질 위험성이 있다. 특히, 배터리에서 발생하는 고온은 유독성 가스와 함께 화재를 급속히 확산시킬 수 있어 밀집된 교실 환경에서 치명적일 수 있다. 현재 학교 교실에 배치된 분말소화기는 전기화재 진압에 적합하지 않다는 한계를 지닌다. 분말소화기는 화재 발생 시 불꽃을 진압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소화 후 남는 잔여물이 전자기기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다. 특히, 태블릿PC, 노트북, 전자칠판과 같은 정밀 전자기기에 분말이 침투하면 내부 회로가 부식되거나 기능이 저하될 위험이 크다. 반면, 비전도성 액체 소화약제를 사용하는 ‘엔클리어(EnClear) 소화기’는 전기화재에 특화된 솔루션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 소화기는 전기를 사용하는 환경에서도 감전 위험 없이 화재를 신속하게 진압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액체 형태의 소화약제는 불꽃과 열을 효과적으로 냉각시켜 재발화를 방지하며, 분말소화기와 달리 소화 후 잔여물이 남지 않아 전자기기의 손상을 최소화하는 장점이 있다. 특히, 리튬이온 배터리에서 발생하는 화재는 일반적인 소화기로는 진압이 어렵지만, 엔클리어 소화기는 배터리 열폭주를 억제하고 불꽃을 빠르게 진압할 수 있는 효과적인 대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엔클리어 소화기는 학교 교실뿐만 아니라 전기차 충전소, 데이터센터, 연구실 등 다양한 전자기기 밀집 공간에서의 필수적인 화재 대응 장비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디지털 학습 환경이 확산됨에 따라 전자기기 화재 대응 방식도 변화해야 한다. 기존 분말소화기의 한계를 보완하고, 전자기기의 손상을 최소화하면서도 화재를 안전하게 진압할 수 있는 비전도성 액체 소화기(엔클리어 소화기)의 도입이 시급한 이유다. 인천시교육청은 디지털 학습 환경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엔클리어 소화기를 시범 도입하였으며, 기존 분말소화기의 한계를 보완하는 대안으로 주목하고 있다. 특히, 감전 위험 없이 안전한 진압이 가능하다는 점과 소화 후 잔여물이 남지 않아 전자기기의 추가 손상을 방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이에 따라 추가 도입을 적극적으로 검토 중이다. 또한, 공항철도 역시 전동차 내 전기화재 발생 위험을 줄이기 위해 엔클리어 소화기를 도입하였다. 열차 내부는 밀폐된 공간으로 화재 발생 시 연기와 유독가스가 빠르게 확산될 수 있어, 기존 분말소화기 사용이 적절하지 않은 환경이다. 엔클리어 소화기의 배치는 승객 안전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 전동차 내 정밀 전자기기를 보호하면서도 효과적으로 화재를 진압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비전도성 액체 소화기(엔클리어 소화기)의 도입이 단순한 화재 진압 장비 보급을 넘어, 전자기기가 밀집된 환경에서의 안전성을 높이는 핵심적인 방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디지털 학습 환경의 확대는 교육의 혁신을 이끄는 중요한 변화이지만, 동시에 전기화재라는 잠재적인 위험요소를 함께 가져왔다. 학생과 교직원의 안전을 지키면서도 디지털 교육을 지속 가능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비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 분말소화기의 한계를 보완하는 비전도성 액체 소화기(엔클리어 소화기)를 교실과 충전시설에 배치함으로써 전기화재 발생 시 신속하고 안전하게 진압하는 한편, 정기적인 전자기기 점검과 체계적인 화재 예방 교육을 병행하여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고, 위기 발생 시 신속한 대응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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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학교에 ‘엔클리어(EnClear) 소화기’ 도입이 시급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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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유교儒敎는 교육종교敎育宗敎다!
-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유교는 治世치세의 근본을 교육에 두고 있다. 모든 사람을 교육시키야 한다 것이다. 공자는 “유교무류有敎無類”라는 말로 유학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즉 “가르침이 있을 뿐 유별은 없다(신분과 지위를 구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균등하게 교육의 기회를 준다).” 유교의 근본은 모든 국민을 교육시켜 국민의 소리가 하늘의 소리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길을 여는 것이다. 유학은 天命천명을 민명民命으로 바꾸는 일이다. 대중교육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혁명이다. 국민 전체가 집현전 학자들의 수준이 되었을 때야말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될 수 있다. 이때가 되면 좌파, 우파들이 득세를 하더라도 국민들의 수준이 나라를 바르게 이끌 것이다. 『大學』「學記」편에서도 ‘교육은 학생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를 기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여성 교육’은 집안의 지도자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하고 있다. 교육을 생명처럼 여기고 수신했던 ‘신비 교육’의 부활이 시급하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분별된 상식과 수준을 가진 국민으로 태어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로마서 12:2가 주는 가르침이 내 마음을 뻥 뚫리게 한다. 현재 국제 역학관계들이 어렵게 돌아가고 있다. 우리 민족이 우리 운명에 대해서 독자적으로 우리 운명을 끌고 갈 수 있는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정치와 교육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정치와 교육의 기본이 바로 서지 않고 있기 때문에 모든 국민들이 방황하고 있고, 겪지 않아야 할 ‘憂患病’을 앓고 있다.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 정치와 교육에서 수준 이하의 논의만 무성하게 되풀이하고 있다. 논의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행위들도 국민들의 생각과는 동떨어진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 민족은 바른 도道를 구현해야 한다. 율곡 선생이 임진왜란을 앞두고 ‘十萬養兵說’을 외쳤는데, 우리는 지금도 그 상황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다. 그 당시에 십만 양병을 했더라면 우리 국민이 그 고통을 덜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근대화를 아름답게 맞이했을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사명감을 가지고 ‘十萬 養士’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성균관과 전국 모든 향교에서 진정한 선비를 길러야 한다. 나라를 걱정하고 역사의식을 가지고 유학을 공부해야 한다. 우리 민족이 이 절박한 상황에서 어떻게 ‘십만 양병’의 의미를 진실로 받아들이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래서 지금 바로 ‘十萬 養士’ 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야 한다. 공자와 애공의 대화에서 보듯이 유학의 가르침은 책자에 널브러져 있다. 그러나 유학의 가르침이 널리 시행되지 않는 것은 진짜 유학자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子曰: “文․武之政, 布在方策. 其人存, 則其政擧; 其人亡, 則其政息.” 『中庸』20-2. 다시 말해 “方策”과 “其人” 사이에는 깊은 의미의 단절이 있다. 정치의 객관적 사고, 제도적 이념이나 현실태, 행정제도, 그 모두가 “그 사람其人”이 없으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실태를 보라! 헌법으로부터 선거제도나 행정 체계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고안한 모든 훌륭한 법제들이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그러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최고의 지도자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사기꾼이나 양아치 수준에도 못 미치는 파렴치한들이요, 고위 관직에 앉은 사람들이 청문회를 통해 점검해 보면 서민들의 수준에서 꿈도 꿀 수 없는 범법행위들을 수없이 자행한 인간들이다. 그럼에도 법망이나 도덕적 평가를 교묘하게 왜곡해 대중의 인기와 사적인 치부를 갈취하고 있다. “그 사람其人”이 근원적으로 잘못되어 있으면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그것은 끊임없이 악용될 수밖에 없다. “그 사람其人”은 오로지 “교육”에 의해서만 배양될 수 있다. 그것은 너무도 완만히 진행되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정의로운 가치관의 사회 저변에 의하여 훈도되어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의 연속성이 결여된 사회는 희망이 없다고 보는 것이 유교의 입장이다. 공자는 말한다: “사람이 도를 넓힐 수는 있으되, 도가 사람을 넓힐 수는 없다. 人能弘道, 非道弘人, 『衛靈公』 28.” 그리고 순자는 이어서 또 말한다: “질서를 어지럽히는 임금은 있을 수 있으나, 질서를 어지럽히는 나라는 있을 수 없다. 질서를 잘 다스리는 사람은 있을 수 있으나 질서를 잘 다스리는 법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법이란 홀로 설 수가 없는 것이요, 공동체란 스스로 굴러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을 얻으면 흥하는 것이요, 그 사람을 잃으면 망하는 것이다. 법이란 다스림의 말단이요, 君子야말로 법의 근원이다. 荀子: 有亂君, 無亂國, 有治人, 無治法. 之法非亡也, 而羿不世中, 禹之法猶存, 而夏不世王. 故法不能獨立, 類不能自行, 得其人則存, 失其人則亡. 法者, 治之端也, 君子者, 法之原也.” 아무리 못났어도 내 자식이요, 내 부모요, 내 아내다. 그러나 이러한 사적인 감정만으로는 인간 사회의 질서는 성립할 수가 없다. 따라서 공적인 공간, 객관적 감정, 이성적 판단의 세계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마땅함宜”이다. 그 마땅함을 우리가 사회 정의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사회 정의의 핵심을 儒家는 “존현尊賢”이라는 한마디로 규정한다. 모든 사회적 가치의 마땅함에는 현인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賢者를 愚者와 가리는 객관적 잣대가 있어야 하며 주관적 감정이 배제되는 엄격한 등급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확고한 차별성의 세계이며 이성적 판단의 세계인 것이다. 현인을 현인으로서 대접하는 공적 판단력이 없이는 사회 질서는 돌아가지 않는다. 국가 사회를 잘 돌아가게 만드는 모든 행정 체계의 밑바닥에도 항상 이 “尊賢”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유가는 믿는다. 鮮末 大儒 이제마도 천하天下의 수병受病이 모두 투현질능妬賢嫉能에서 나오고 천하天下의 구병救病이 모두 호현낙선好賢樂善에서 나온다고 일갈한 바 있다. 유교적 정서의 궁극적 본질은 민과 더불어 우환을 공유하는 것이다. ‘與民同患’(『繫辭傳』11-1.)이다. 이러한 憂患意識이 없는 자는 성인의 자격이 없다. 장횡거의 스승인 范仲淹범중엄(989~1052)의 유명한 격언, “선천하지우이우先天下之憂而憂, 후천하지락이락後天下之樂而樂”이야말로 시대정신이 아니겠는가? 누군들 근심하기 좋아하고 즐기기 싫어하겠는가? 그런데 남보다 앞서 근심하여 대책을 마련하고, 남이 즐긴 뒤에야 비로소 즐기는 이는 누구인가? 남을 위하는 숭고한 이상을 지닌 사람이며,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통감하는 선비이다. 앞서 근심하지 못하고 뒤에 즐기지 못하더라도 함께 근심하고 즐거워하기만 해도 좋으리라. 그래서 與民同樂(여민동락·대중과 더불어 즐김)도 관리의 미덕 중 하나라고 본다. 어찌 관직에 있는 이에게만 해당되는 말이겠는가! 송나라 때 范仲淹(범중엄)은 거대한 호수 옆에 세운 중국 3대 누각의 하나라는 岳陽樓(악양루)에 이 말을 써놓아 천고에 이름을 남겼다. 공자와 자사는 달도達道와 달덕達德을 知와 行의 측면에서 논의하는데, 인식 능력적 차별이나 실천 경지적 차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차별이나 차등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知行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하는 격려에 두고 있는 것이다. 유학에 깔려 있는 위대한 사상으로 인간은 “일상적 노력”의 유무로 보는 보편적 인간관에 근거하고 있다.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이 쓴 『아웃라이어Outliers』라는 책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성공적 천재들이 선천적 재능 때문이 아니라 피눈물 나는 노력의 결실로 그 천재성을 이룬다는 사실에 대한 섬세한 분석을 해 놓고 있다. 어느 분야에서든지 1만 시간만 집중적으로 투자하면 아웃라이어가 될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남이 열 번에 능하거든 나는 천 번을 하십시오.”라는 공자와 자사의 입론(人一能之, 己百之)은 현대 인지과학의 선구적 학설일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격려를 발하고 있다. 안세영(23·삼성생명)은 전영 오픈 우승 뒤 세계배드민턴연맹(BWF) 등 현지 인터뷰를 통해 "반복에 지치지 않겠다."라고 했다. 안세영은 여자 프로농구 선수 김정은이 한 말을 가슴에 새겼다. "쉴 때 선배 언니가 어린 선수들에게 '반복에 지치지 않아야 한다'라는 그 말이 너무 와닿았다"라고 했다. 모든 일이 그렇다. 쳇바퀴를 도는 삶은 육체적·정신적 피로감을 주게 마련이다. 그런 삶은 피하면, 일시적으로는 위안을 얻을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발전하기 어렵다. 안세영은 "경기 중간에도 반복적인 플레이를 하게 된다. 지치는 순간에 지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걸(반복을) 잘 이겨내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김정은 선배님의) 그 말이 더 정말 와닿았다."라고 했다. 지난해부터 안세영이 메시지는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웃음을 되찾은 스물 셋 배드민턴 선수는 자신의 세계 가장 높은 자리에 '반복의 고통'을 이겨내야 웃을 수 있다고 전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몸값. 스포츠 스타들의 삶은 화려해 보인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그야말로 고된 반복의 연속이다. 지루한 일상에 지치기는 다른 직군도 다르지 않지만, 그런 반복을 더 잘 해내야 신체와 기량을 더 강해진다는 것이 유자들의 수신이다. 유교는 인간의 구원이나 그 경지에 관한 것을 인간 스스로에게 맡긴다. 일상日常의 철저한 수행만이 “그 사람其人”을! “그 위대함其政擧”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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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살림, 살림살이’ 철학, 세계인의 상식으로 거듭나야 한다!
-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학교는 왜 존재할까? 학생들에게 자기 내면의 가능성을 발견해서 밝고 힘차게 살아가는 힘을 길러주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남의 생각이나 물건 그리고 남의 제도를 따라 하면서 살았다. 남의 것을 가져다 썼다. 따라 하고 가져다 쓰면서 그것을 만든 사람들을 숭배하며 살았다. 그러다 서양의 것은 위대하고 우리 것은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풍조도 생겨났다.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고, 어떤 때는 더 심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크다. 우리들에게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가 중요하지 않았고, 거기에 더해서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은 서양 철학자들의 먼 이야기로만 들렸었다. ‘나’로 살지 않은 그런 삶이 대부분이었다. 이제까지 ‘내’가 분명하지 않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따라 살았다.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 살았으며, 또 나에게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묻지도 않았다. 원하는 것이 분명하면 거기에 맞춰서 모든 일이 질서를 가진다. 더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 지금 당장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도 될 일이 차례를 갖는다. 우주도 질서를 갖고 있으며, 작은 질서는 큰 질서 속에서 움직여야 한다. 몸에는 언제나 마음이 함께 한다. 그 사람의 마음을 알려면 그 사람의 몸의 움직임을 보면 알 수 있다. 종종 우리는 그 사람의 말과 몸이 일치하지 않을 때를 만나게 된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내 몸속의 가능성을 그대로 발현하는 것이다. 身(몸 신)이라는 글자의 형성 과정을 이해하면 우리 동양 철학의 이치를 깨칠 수 있다. 몸을 신이라고 하는 것은 몸은 마음을 신고(담다.) 있다는 말이다. 마음과 몸이 따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살이’, ‘살림살이’, ‘弘益홍익’의 개념을 알게 되고, 우리 민족의 철학이 세계 철학으로 태어나야 할 까닭을 알게 되고, 우리 민족의 위상을 세계에 펼쳐야 할 당위성을 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지금 憂患意識의 일종인 大人의 憂患病을 앓고 있다. 즉 스트레스성 근심병이다. 노자는 『道德經』11장에서 “當其無有器之用”라는 말을 남겼다. 사람의 마음도 비어 있어야 쓰임이 있듯이, 그릇도 비어 있을 때만이 그릇의 쓰임이 있다는 말이다. 신영복 교수는 노자의 이 말을 ‘當無有用’으로 쉽게 명확하게 말했다. 진흙을 반죽해서 그릇을 만들지만, 그릇은 그 속이 비어있음(無)으로 해서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有가 이로움이 되는 것은 무無가 용用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고질병 중의 하나는 ‘자신은 다 알고 있다.’라는 자만심, 그래서 상대방의 말은 듣지 않으려고 한다. 찻잔 한 개를 고를 때에도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모양, 색깔, 무늬에 한정되어 있을 뿐, 그 비어 있음에 생각이 미치는 경우는 드물다. ‘도무수유道無水有’, 도는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은 물이다. 지엽枝葉에 마음앗기는 일이 없이 항상 근본을 잊지 않아야 한다. 색色과 공空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다. 그리고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비어 있지 않은 사람은 배울 수가 없다. 그래서 겸손이 무기인 것이다. 무엇이 한 나라를 부강하고 선도적인 나라로 만들까? 무엇이 한 나라를 강대국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들까? 무엇이 한 사람을 능력 있고 지도자로 만들까? 무엇이 한 사람을 지도자 자리에서 내려오게 할까? 자신과 국민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관심을 갖지 않으면 국가와 정부는 언젠가 국민의 저항을 받게 되고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 어느 시대나 시대정신(時代精神)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시대정신이란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를 알아차리고 대응하는 공동체적 공감 능력을 일컫는 것으로, 공동체의 영속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비교적 평화로운 시절을 살아가는 오늘 우리도 이 시대 우리가 지키고 추구해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늘 깨어 ‘자신’과 ‘우리’를 돌아보아야 한다. 공자는 예를 논하는 데 있어서도 “삼무사三無私”를 말한다. 子夏가 묻는다: “삼무사란 무엇이오니이까? 何謂三無私?” 공자께서 대답하시었다: “하늘은 만물을 덮어주는데 사사로움이 없으며, 땅은 만물을 실어주는데 사사로움이 없으며, 일월은 만물을 비추는데 사사로움이 없다. 天無私覆, 地無私載, 日月無私照.”(『家語』「論禮」) 이 말은 무엇인가?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부모의 보편적 사고는 하늘과 땅이라는 것이다. 부모는 私覆, 私載를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것은 태양이 선인․악인을 가리지 않고 다 비추듯이 사심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효孝의 본질은 大公대공을 향한 마음에 있다. 유교의 본질은 가까운 윤리의 실천을 통하여 “天下爲公”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효孝의 공적인 측면이 망각 되면 유교의 윤리는 왜곡된다. 누구든지 자기의 자식이 위대한 가치의 전승자와 담지자가 되기를 갈망하면서 자식 교육을 시킨다.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든지 간에 그러한 믿음이 없다면 사람들은 자식 교육에 헌신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인문 문명을 유지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편은 사라진다. 유교는 한자와 한글, 천부경의 설계도인 하늘, 음양, ○□△, 天地人적 사고에 따른 철학을 펼치고 있다. 유학은 세계에서 가장 보편적인 철학인 셋의 사고로 세상을 본다. 상대방을 살려주지 않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인식이다. 예를 들어 影(그림자 영)에서, 그림자가 존재하려면 빛(日)이 있어야 하고, 또 빛을 가리는 사물(京)이 있으면 저절로 그림자(影)는 생기게 마련이다. 따라서 천지인적 사고는 ‘상대방을 살리지 않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살림, 살림살이’의 철학으로 세계 어디에도 없는 인류 보편의 철학이다. ‘살림, 살림살이’를 한자로 표현하면 ‘弘益’이라는 말이다. ‘홍익인간’이 되려면 道를 깨우쳐 德을 실천해야 한다는 말이다. 도道는 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치는 질서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이 세상은 온갖 질서로 가득 차 있다. 작은 질서는 항상 큰 질서에 예속될 수밖에 없다. 사람의 마음은 어떤 이치로 움직이는지를 알아야 한다. 天時, 地理, 人和가 이치다. 지구가 아무리 마음대로 돌고 싶어도 해가 끌어당기는 힘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지구는 자전을 하면서도 태양의 궤도에 따라서 도는 공전을 하게 된다. 이것이 대질서다. 따라서 만물은 해와 지구의 운행에 순응을 해야 살아갈 수가 있다. 그래서 크고 작은 질서를 알아야 한다. 태양계에서는 99.86%가 해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살아간다고 한다. 이 세상 천지간에 존재하는 만물은 해로부터 오는 영향을 받아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천지자연의 이치를 실천하는 것이 ‘德’이다. 세상의 큰 질서가 운행되도록 내가 스스로 실천해야 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태양을 닮은 사람, 해와 하나 되는 사람, 해처럼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을 이른다. 해가 하는 일은 만물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태양이 되어서, 태양처럼 만물을 살리려는 철학을 가진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말이 동이족東夷族이라는 이름이다. 그래서 日(해 일)은 ‘너, 해와 같이 되어야 해’, ‘너, 해와 같이 되도록 노력해야 돼’라는 말이다. 우리들은 지금도 자기 마누라를 ‘우리 마누라’라고 한다. 이런 말과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세계 어느 곳에도 없다. ‘나=우리’라는 의식, 이것이야말로 공공동체 의식의 발로, 별도의 존재는 없다는 사고 체계다. ‘我(나 아)’ 자는 自我라는 쓰임이 있으며, 오로지 나의 나다움 즉 ‘나’의 정체성과 관련된 의미를 나타낼 때 사용한다. 초기의 我 자는 형과 동생이 무기를 들고 공동의 재산을 보호한다는 것이 我 자의 본 의미로, 형제로 표현된 이 모양은 우리 겨레가 즐겨 사용하는 ‘우리’를 나타낸다. 그래서 ‘나쁜 놈’이라는 말은 공동체를 저버리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고대 조선인이 생각한 ‘나’는 ‘우리’였던 것이다. ‘나의 나다움’은 ‘우리의 우리다움’이었던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나의 의식을 키우는 일이다. 의식을 키우는 방법은 책임감이다. 나의 가족, 공동체, 나라, 인류와 자연에 대한 책임 의식을 키우는 일이 급선무다. 해는 우리를 위해서 일을 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일을 할 뿐이다. 그 자신의 일이 다른 사람, 만물을 살리는 일인 것이다. 이제는 해처럼 우리의 의식을 바꾸어야 한다. 해처럼 밝게 빛나 세상을 밝혀야 할 해 같은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과 땅을 하나 되게 하여야 할 연결 고리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생활 용어로는 ‘살림살이’다. 자기 삶의 목표를 ‘살림’에 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지구상에 이런 삶의 철학을 가진 종족은 우리 한겨레가 유일하다. 우리가 바로 그런 위대한 조상들의 후손이다. 우리 한민족 최초의 나라 조선의 건국 이념이 성통공완性通功完 재세이화在世理化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이 홍익인간은 우리나라 국민교육이 지향하는 지표이기도 하다. ‘弘益’은 ‘해의 영향은 크고 미치는 영역은 넓다’라는 의미다. 홍익이라는 말이 ‘해’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天符經’은 태양과 같은 사람이 되라고 하고 태양을 닮으라고 말한다. 사람이 태양과 밀접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저 그렇게 묵묵히 자기 길을 갈 뿐이지만 세상에서는 태양이 만물을 살아가게 한다. 태양과 같아져야 한다는 의미는 이것이다. 해처럼 그저 자기의 일을 할 뿐인데 결과론적으로 그것이 다른 생명체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태양이 말하는 홍익이다. 세계인을 하나로 품을 수 있는 ‘살림살이’ 철학의 이해와 실천! 너와 내가 하나 되는 행복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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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살림, 살림살이’ 철학, 세계인의 상식으로 거듭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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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전이 답했다! 그런데 우리는?
-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유학처럼 위대한 가르침은 없다. 유학자는 공동체의 윤리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유학은 ‘하늘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윤리이며, 한자와 한글의 제작 원리도 하늘을 기반으로 한다. 즉 ‘하늘’, ‘음양’, ‘천지인’ 사고를 근본으로 한다. 하늘처럼 만물을 살리는 ‘살림’ ‘살림살이’라는 철학적 사고를 배경으로 한다. ‘나쁜 놈’이라는 낱말도 공동체를 지향하지 않고 사리사욕만을 생각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孟子는 ‘孺子入井’이라 말했다. 우물가에 놀던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하면 누구나 손을 뻗어 아이를 도우려 한다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주인공의 입을 빌려 말했다.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 길은 남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남을 위해서 살라는 말이 아니다. 내 삶을 완성하기 위해서 남을 위해 살라는 말이다. 모든 존재는 자신 외의 다른 존재에게 이롭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한다. 나무도, 풀도, 물고기, 곤충도 모두 다른 존재에게 이로움을 주며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만이 아니다. ‘대장부는 중후함에 처하지 얄팍한 곳에 거하지 않는다. 그 참된 모습에 처하지 그 꾸며진 곳에 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305쪽. 최진석 교수의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구절이다. 저것은 무엇이고 이것은 무엇인가? 고명환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아침에 알람을 끄고 좀 더 자는 것이 저것이고, 바로 벌떡 일어나는 것이 이것이다.’ ‘출근하며 월급날이 며칠 남았나 세어보는 게 저것이고, 오늘 할 일을 미리 계획해 보고 자발적으로 일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구상하며 출근하는 것이 이것이다.’ 최진석 교수의 목소리로『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329쪽을 읽어보자. ‘가장 높은 단계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그것을 성실하게 실천하지만, 중간 단계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반신반의하고, 가장 낮은 단계의 선비는 도를 듣고서도 그것을 크게 비웃어 버린다.’ 인간은 누구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다. 그런데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이유는 삶의 기준이 없어서다. 실행에 옮기려면 힘이 든다. 당신이 뭔가를 할 때 고통스럽지 않다면 의심하고 점검하라. 자, 일단 오늘 당장 휴대전화를 저 멀리 던져버리고 책을 가까이 하자. 이것만 바꿔도 인생이 성공한다. 놀자를 버리고 노자를 취하라! 고전은 우리보다 먼저 살아본 선배들이 남겨놓은 실패하지 않는 법에 대한 매뉴얼이다. 고전은 온통 실패와 고난과 역경의 이야기다. 선배들이 창피한 얘기를 기록 해놓은 데는 다 이유가 있으리라. 유성룡은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했다. 신립은 날쌔고 용맹한 장수였으나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에서 패한 장군이다. 유성룡은 신립의 이야기를 기록하며 명나라 장수가 신립을 향해 한 말, “이런 천혜의 요새지를 두고도 지킬 줄 몰랐으니 신총병(신립)도 참으로 부족한 사람이로구나.”를 그대로 옮겨 놓았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아무 소용이 없으나 후손에게 경계가 될 곳이라 여겨 상세히 적어둔다는 평가도 거침없이 기록했다. 여기에 너무도 정확한 삶의 매뉴얼이 있는데 우리는 고전을 읽지 않는다. 물건을 사면 매뉴얼이 있는데 읽지 않고 AS부터 찾아간다. 고전에 해답이 있는데도 엉뚱한 곳에서 답을 찾고 있다. 고전의 답은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변한다. 그래서 고전이다.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실패할 수 없는 해답을 제시해 준다. 그러나 고전은 치열하게 읽어야 한다. 수천 년의 고통과 고난과 시련을 이겨낸 삶의 비밀은 한눈에 바로 볼 수 있는 해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읽고 또 읽고, 받아쓰고, 생각해서 자신에게 맞는 해답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고전은 미래의 답안지다! 대체 불가능한 ‘나’를 만드는 것이다. 대체 불가능한 ‘나만의 스타일’을 구축해야 한다. ‘나만의 스타일’이란 무엇일까? 고명환은 말한다. ‘나만 할 수 있는 일이며, 남들이 따라 할 수 없어야 한다.’ ‘당신은 오늘 어떤 문장을 맛있게 먹었는가? 고전은 정신이 건강해지는 가장 정갈한 음식이다.’ 인간의 본성은 변함이 없기에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문제로 고통을 받는다. 이런 정신적인 고통을 미리 겪어보고 깨달아 후대 사람들은 같은 고통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적은 글이 고전이다. 홍삼, 산삼보다 우리에게 좋은 것이다. 말(言)과 행동(行)은 서로 교차해서 생각하면서 인생의 윤리를 그려나간다. 인생이란 말과 행동이 서로를 규제하고 발전시키면서 살아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言顧行, 行顧言은 우리 사회를 지키는 원리다. 특히 신(信)은 현실에서 입증가능해야 하며, 구체적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 아무런 근거도 없이 질러대는 말로 인해 국력을 낭비하고 있음을 목도하는 상황이 벌어져도 지도자, 특히 유림 지도자들의 言行은 어떠한가? 묻고 또 묻고 싶다. 더 나아가 인생의 방향을 ‘나’ 중심에서 ‘남’ 중심으로 바꾸는 것이다. ‘가치’는 ‘같이’ 사는 것이다. 나도 살고 남도 살 수 있는 방법, 그것이 ‘가치’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주인공의 입을 빌려 말했다.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 길은 남을 구하려고 애쓰는 겻이다.” 최진석 교수님도 책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우리가 가진 생각의 높이만큼 이미 발전했다. 더 발전하려면, 선진국이 되려면 더 높은 수준의 생각이 필요하다.” 나 하나만을 위한 작은 생각에서 벗어나라. 남을 위한, 더 나아가 인류를 위한 생각을 하라. 고민은 사색이다. 내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걱정과 불안은 잡념이다. 내 삶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붙잡는다. 독서를 통해 걱정하지 말고 사색하라. 『마태복음』에서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즉 ‘네가 좋아하는 것을 남들도 좋아해야 한다’는 긍정형의 황금률이 존재했다. 1988년 영국 브라이튼에서 열린 제18차 세계 철학자 대회에서, 인류의 황금률(golden rule)로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투표를 한 결과 『論語』의 ‘己所不欲 勿施於人’이 투표율이 더 높았다고 한다. 즉 ‘네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마라.’ 서양의 황금률에 대한 반동으로 동양 사상에서 생겨난 것이 『論語』의 ‘己所不欲 勿施於人’이다. 이래야 나라에 대한 원망이 없고, 집안에 대한 원망이 없다. 따라서 보다 더 보편적인 인류의 가치관임을 증명하는 결과다. 인류의 권한을 진술하는 문장도 긍정형보다는 부정형의 진술이 더 타당하다. 긍정형의 진술은 내가 옳다고 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고는 제국주의로 흐를 수 있다. 이러한 사고의 흐름이 『12. 3. 윤석열 계엄』으로 나타난 것이다. 의식이 높은 사람은 책임감이 큰 사람이다. 사람의 책임감은 의식의 크기에 비례한다. 또한 책임감은 공동체적이다. 선비 역시 공동체적 개념이다. 이것이 싹으로 선비를 나타내는 까닭이다. 밝고 환한 세상으로의 진출을 희망하는 공동체의 염원을 시대적 과제로 삼아 실현해야 하며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우리가 일컫는 ‘선비’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적 염원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아서 그 염원의 실현을 위해 기꺼이 몸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고 실제로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선비’다. 이 선비의 모습이 식물의 싹과 같다는 의미에서 ‘싹(士)’으로 ‘선비’를 나타냈다. 유교의 가르침은 내가 스스로 본을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해라.’는 말로서가 아니라 teaching by example이다. 세상에서 가장 건강한 음식이 고전이다. 꾸준히 섭취해야 한다. 고전의 지혜로 내 몸을 만들어야 한다. 고전의 지혜는 온갖 풍파를 이겨내는 갑옷이 될 것이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수천 년의 지혜가 녹아 있는 고전이 아니고서는 내 약점을 막아줄 그 어떠한 것도 없다. 그러니 사람에게 묻지 말고 고전에 물어라. 한 문장이라고 들고 끝까지 물어라. 묻고 또 물어라. 그 고전이 답해줄 것이다. 고전을 읽으면 고전의 내용이 나로 변한다. 그 고전은 어떤 무기보다 단단한 갑옷이 되어서 나를 이끌어줄 것이다. 고전은 직접 가르쳐주지 않는다. 스스로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줄 뿐이다.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당시의 교육자를 비판한다. “교육자는 아이에게 스스로 인식하고 판단하고 사고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대신 다른 사람의 완성된 생각을 머릿속에 잔뜩 주입하려고 애쓸 뿐이다.” 우리 유학자들에게 주는 회초리(回初理)는 아닐까? 문덕근이에게 주는 회초리다! 공자가 노나라에서 실각을 하고 14년간 열국을 편력할 때 했던 말이다. 이 천하주유의 시기에 공자를 시종 굳건히 지킨 것은 자로와 안회였다. 이 때 공자가 제안을 하나 했다. “제자들아! 우리가 제각기 인생에 품고 있는 이상이 있지 않겠니? 심심한데, 우리 그것을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이때 공자가 했던 말이 무엇일까? 子曰: “老子安之, 朋友信之, 少子懷之.” “늙은이들에게는 편안하게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친구들에게는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 되며, 젊은이들에게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老子는 과거요, 朋友는 현재요, 少子는 미래다. 그러나 과거도 미래도 다 현재를 반성하고 개방하면서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 3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少子懷之”다. 우리 유림은 과연 “少子懷之”를 말할 수 있겠는가? 儒學者들을 그리움의 대상으로 삼는 젊은 세대가 있을 것인가? 어른들이 자기의 생각을 少子들의 머릿속에 잔뜩 주입하려고 애쓰고 있지는 않는가? 누가 교육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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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전이 답했다! 그런데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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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어휘력 부족,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 [교육연합신문=윤도연 기고] 새 학기가 어느덧 한 달 뒤로 다가왔다. 처음 유치원에 들어가는 두려움, 초등학생이 되었다는 설렘, 중학교에 입학하는 기대감, 고등학생이 되었다는 긴장감. 혹은 벌써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는 걱정과 곧 어른을 앞두고 있다는 들뜸. 새로운 학생이 되어 새로운 공간에 가는 건 아이에게도, 학부모에게도 색다른 감정을 준다. 이렇게 우리는 학생으로서든 학부모로서든 혹은 교육자로서든 매년 새로움을 경험한 적이 한 번 이상은 있다. 예전의 학생이든 지금의 학생이든 우리는 학교를 통해 정해진 교육 과정에 밟으며 차근차근 학년마다 알맞은 지식을 습득한다. 분명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요즘 애들은’이란 말이 나올까. 요즘 가장 문제가 되는 것 중 하나로 꼽히는 건 바로 ‘요즘 애들’의 ‘어휘력’이다. 금일을 금요일로 오해했다는 일화, 심심한 사과를 정말 지루한 사과라는 의미로 이해했다는 사건 등은 이제 널리 퍼진 이야기다. 해당 뉴스를 접한 소위 ‘어른들’은 당황하며 놀란다. 그리곤 말한다. ‘요즘 애들 어휘력이 정말 심각하구나.’ ‘어른들’의 입장에서 보면 다소 놀라운 일이긴 하다. 필자 역시 중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다 당황한 적이 몇 번 있다. 문학을 읽다 “여기서 며느리가 누굴까?”라는 질문에 아이들이 머뭇거리길래, 설마 싶어 며느리의 정의를 물어보자 “아내요?”라는 답이 나왔다. 그 이야기를 들은 동료는 중학교 학생들이 ‘첩’이란 단어를 ‘간첩’이라 착각하더란 경험을 들려주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자. 아이들이 일생 ‘며느리’와 ‘첩’이란 단어를 접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아이들이 태어난 시점의 한국은 이미 핵가족화가 되었으며, 이혼이란 제도가 이미 실생활에 익숙해진 뒤였다. 따라서 해당 단어들은 중학생들에게 고릿적 단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다. 요즘 아이들의 어휘력을 비판하는 어른들은 어릴 적에 무엇을 하고 놀았을까. 책을 읽거나 나가서 뛰어놀았을 것이다. 당연히 스마트폰 또한 없었다. 자연스럽게 풍부한 어휘를 접하고 타인과 의사소통할 기회가 많았던 것이다. 이웃 간 공동육아 또한 대가 없이 이루어졌던 시기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또래와 교류하고, 다른 어른들과의 의사소통할 기회가 많았다. 이는 또래 언어뿐만 아니라 다양한 단어와 고급 어휘 등을 쉽게 익힐 수 있는 경로가 되었다. 반면 지금은 당연한 맞벌이에, 부족해진 공동육아로 인해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휴대폰 세상과 익숙해진다. 매일 같이 새로운 콘텐츠가 나오는 인터넷 세상 속에서 ‘며느리’와 ‘첩’이란 단어를 배울 기회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아이들이 단어를 모른다고, 아이들 탓만 할 수 있을까. 혹은 휴대폰 탓만, 가정교육 탓만, 학교 탓만 할 수 있을까. 어휘력 문제가 심각하다고 ‘MZ세대’라는 명칭으로 한 세대를 싸잡아 이야기하며 정작 이면의 원인과 해결책은 장막 속에 덮어둔다. 바쁜 현실로 인해 유아기 아이들에게 유튜브를 쥐여준 부모를, 책 대신 이미 익숙한 영상 매체를 택한 학생을, 독서를 강제하지 않는 학교를 손가락질 하는 것으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학부모에겐 아이들에게 유튜브 대신 소통할 수 있는 체력과 시간을, 학생에겐 스스로 책을 선택할 수 있도록 활자에 대한 익숙함을, 교사에겐 자연스럽게 어휘력과 의사소통 능력 강화 교육을 할 수 있는 여력을 주어야 한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제도, 가정, 학교 모두가 3인 4각 달리기를 해야 한다. 교육은 바쁘게 바뀌는 세상 속, 창의적이고 글로벌한 인재를 기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서·논술형 확대, 디지털 교과서, 고교 학점제 등. 그러나 부족한 어휘력으로 인해 세대 간 소통 갈등을 겪는 시대, 균형적인 미래 인재를 만들기 위해선 교육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부족하다. 바뀐 교육과정의 옆에 아이를 자발적 독자로 만드는 가정과, 그러한 가정이 가능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 지원이 함께 해야 할 것이다. 3월, 새 학기의 시작과 함께 자신만의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나갈 아이. 한 쪽에 글이라는 새로운 간접 경험의 세계가 자연스럽게 함께 할 수 있는 사회를 바란다. ▣ 윤도연 ◇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과 석사 졸업 ◇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전공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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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어휘력 부족,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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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독서, 토론 및 토의와 발표, 그리고 주제탐구보고서: 미래 역량을 위한 필수 교육
- [교육연합신문=유정걸 기고] 실리콘밸리의 리더들은 기존의 교육 방식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반영하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미래 인재 양성을 위한 새로운 교육 모델을 실험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애드아스트라(Ad Astra) 학교다. 이 학교는 기존의 주입식 교육을 벗어나 창의적 문제 해결, 논리적 사고, 실전 프로젝트 기반 학습을 중심으로 운영되며, 학생들이 직접 질문을 설정하고 탐구하는 과정에 중점을 둔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단순한 지식 암기를 넘어 비판적 사고력과 문제 해결 능력을 배양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이는 현재 한국 교육에서도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교육은 더 이상 단순한 지식 전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학생들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표현하며 실제 문제 해결에 적용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이를 위해 독서, 토론 및 토의와 발표, 그리고 주제탐구보고서는 필수적인 교육 활동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이러한 활동은 학생들의 사고력을 깊게 하고, 창의적 문제 해결 능력을 길러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최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연구와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미래 사회에 필요한 창의적 사고력과 문제 해결 능력을 기르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특히 논·서술형 수능 도입 논의는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력과 표현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평가 방식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시도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성과와 발전 방향" 보고서에서는 현재의 선다형 수능 체제가 단순 암기식 학습을 유도하고 있으며, 창의적 문제 해결력과 논리적 사고력을 평가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논·서술형 평가를 단계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독서는 사고력과 창의력의 원천이다. 다양한 텍스트를 접하며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습관을 기르고, 여러 관점을 비교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연구에 따르면, 주제독서를 활용한 학습법이 학생들의 논리적 사고력과 자기주도적 학습 역량을 키우는 데 효과적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특히, 전국진학지도협의회에서 펴낸 "교과서를 활용한 탐구활동 안내서"에서는 독서와 탐구가 결합될 때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력이 더욱 강화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학교에서는 주제별 통합 독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가정에서는 가족 독서 시간을 마련해 자연스럽게 독서 습관을 형성하도록 해야 한다. 토론 및 토의와 발표는 논리적 사고력과 의사소통 능력을 키우는 데 필수적인 과정이다. 자신의 의견을 조리 있게 정리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능력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핵심 역량이다. 교육부의 "미래형 교육과정 개편 방향"에서는 창의적 문제 해결력을 기르기 위해 토론 및 토의와 발표 중심의 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학교에서는 정기적인 토론 및 토의와 발표 활동을 포함한 수업을 운영하고, 학생들의 발표 능력을 평가하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가정에서도 뉴스나 시사 문제를 놓고 토론해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연습을 하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 주제탐구보고서는 학생들이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자료를 분석하며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정보의 신뢰성을 평가하는 법을 배우고, 자신의 연구를 정리하는 능력을 기르게 된다. "교과서를 활용한 탐구활동 안내서"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주제탐구보고서 작성 과정은 학생들의 창의적 사고력과 자기주도적 학습 태도를 기르는 데 필수적인 과정이다. 교육부는 고교학점제와 연계해 탐구 중심 교육을 더욱 강화할 계획이며, 이에 따라 학교에서는 탐구과제 기반 평가를 도입하고, 자료 조사 및 분석 방법을 교육해야 한다. 가정에서는 아이들이 관심 있는 주제를 깊이 탐색하고 탐구 과정을 기록하는 습관을 기르도록 지원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대입 개편과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2025년 전면 도입될 고교학점제는 학생 맞춤형 학습을 강조하며, 이에 따라 평가 방식 역시 창의적 사고와 탐구 역량을 반영해야 한다. 교육부는 "대입제도 개편안"에서 학생들의 다양한 학업 경험을 반영할 수 있도록 평가 방식의 다변화를 추진하고 있으며, 논·서술형 평가 도입이 이를 뒷받침할 것으로 기대된다. 따라서 독서, 토론, 주제탐구보고서 작성 능력을 기르는 것은 단순한 교육 활동이 아니라, 향후 대입과 연계하여 반드시 필요한 역량 개발 과정이 될 것이다. 미래 사회에서는 창의적 문제 해결력이 가장 중요한 역량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교육은 지식 암기를 넘어 사고력, 논리력, 그리고 탐구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논·서술형 수능 연구 보고서에서도 이러한 교육적 변화가 불가피하며, 이를 대비한 교육 체계 개편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학교 교육과정은 독서, 토론 및 토의와 발표, 탐구 중심으로 개편되어야 하며, 평가 방식도 창의적 사고력을 반영할 수 있도록 개선되어야 한다. 또한, 교사 연수와 교육 지원이 강화되어야 하며,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독서와 토론, 탐구를 수행할 수 있는 교육 문화가 조성되어야 한다. 단순한 지식 습득에서 벗어나,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탐구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학교와 가정이 함께 변화해야 한다. 독서, 토론 및 토의와 발표, 주제탐구보고서는 미래 인재 양성을 위한 가장 중요한 교육 방식이며, 이를 실천할 때 학생들은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표현하고 사회 속에서 능동적으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될 것이다. ▣ 유정걸 원장 ◇ (주)인무늬교육공동체 대표이사 ◇ 문해력부트캠프 운영 대한문인협회·창작예술인협회 회원 ◇ ONN닥터TV 열려라 의문 MC ◇ [나만 알고 싶은 공부법], [한뼘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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