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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연의 고용정책 칼럼] 사람을 위한 기업이 미래를 만든다
[교육연합신문=이수연 칼럼] 기업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무엇일까?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것,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는 것 모두 중요한 가치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업에게는 한 가지 역할이 더 요구되고 있다. 바로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하며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우리 사회는 청년 일자리, 기업의 인력난, 취약계층의 고용, 지역 간 교육과 일자리 격차 등 다양한 과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정부나 기업 어느 한쪽의 노력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공공과 민간, 지역사회가 함께 협력할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해결책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사회적기업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사회적기업은 단순히 수익을 창출하는 기업이 아니라, 기업 활동을 통해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함께 추구한다는 점에서 일반 기업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사회적기업의 가치는 '사회적기업'이라는 인증 자체에 있지 않다.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기회를 만들었는지, 얼마나 많은 기업과 지역사회를 연결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지속 가능한 변화를 만들어 냈는지가 더 중요하다. 우리가 만나는 참여자들은 모두 다른 출발선에 서 있다. 첫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도 있고,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중장년도 있으며, 경력단절여성, 북한이탈주민, 장애인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기업 역시 인재 확보와 조직문화 개선, 교육훈련 등 저마다 다른 고민을 안고 있다. 사회적기업이 해야 할 일은 이들을 각각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기업과 사람, 정책과 현장을 연결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교육이 새로운 시작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취업이 삶의 전환점이 되며, 기업에게는 필요한 인재를 만나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연결이 쌓일수록 지역사회는 더욱 건강한 성장 기반을 갖추게 된다. (주)채움에이치알디 역시 이러한 사회적기업의 철학을 바탕으로 사람과 기업, 지역사회를 연결하는 다양한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국민취업지원제도와 청년도전지원사업, 기업탐방형 일경험, 채용박람회, 기업교육, 평생교육 등 사업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그 목적은 하나이다. 사람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기업의 성장을 지원하며, 지역사회가 함께 발전할 수 있는 연결을 만드는 것이다. 특히, 현장에서 가장 크게 느끼는 것은 사회적 가치는 거창한 사업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 사람의 취업을 돕고, 한 기업의 인재 채용을 지원하며, 한 번의 교육을 통해 누군가가 자신감을 회복하는 작은 변화들이 모여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된다. 앞으로 지역사회가 더욱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공공과 민간, 교육기관과 기업이 더욱 긴밀하게 협력하는 생태계가 필요하다. 사회적기업은 그 중심에서 서로의 전문성을 연결하고, 정책이 현장에서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돕는 가교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지속 가능한 지역발전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기업의 성장은 사회의 성장과 함께할 때 더 큰 의미를 가진다. 사람의 변화를 믿고 지역사회와 함께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사회적기업이 존재하는 이유이며 (주)채움에이치알디가 앞으로도 꾸준히 실천해 나갈 가치이다. 다음 회차에서는 지역과 기업, 공공이 함께 만드는 협력 네트워크와 상생의 고용 생태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 이수연 ◇ 인천대학교 경영대학원(MBA) ◇ (주)채움HRD 대표이사 ◇ 고용·교육정책 및 HRD 분야 전문가 ◇ 인천지방고용노동위원회 사용자위원 ◇ 인천출입국·외국인청 사회통합협의위원 ◇ 인천해양경찰서 정책자문위원회 위원 ◇ 인천발달장애인훈련센터 전문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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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가수 지드래곤에게서 배우는 ‘남다름’의 힘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최근 베트남의 한 천재 소녀가 우리 교육에 던진 시사점은 매우 깊게 다가선다. 호앙 흐엉 지앙 학생은 2026년 베트남 고교 졸업시험 A01 계열에서 30점 만점에 29.75점을 받아 전국 공동 수석에 올랐고, SAT에서도 만점을 받았다. 세계의 전통적인 명문대학들을 비롯해 서울대의 입학 허가를 받았으나 최종 KAIST라는 선택지를 택했다. 9월 학기에 입학하여 놀랍게 디자인된 KAIST 캠퍼스 적응에 익숙해지고 과학 연구에 의지를 불태우는 가운데 그가 주목한 인물 한 사람이 뜻밖에도 초빙교수인 가수 지드래곤이었음을 각종 언론은 보도한 바 있다. 지앙 학생은 지드래곤에게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남들과 다른 길을 선택하는 도전 정신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이 한마디는 우리에게 묻는다. “과학 영재가 가수에게서 배울 것이 있는가?”,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가?”… 매우 의아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답은 간단하다. 창의성에는 전공의 국경이 없기 때문이다. 지드래곤은 2024년 KAIST 기계공학과 초빙교수로 임명됐다. KAIST는 그의 대중문화 경험과 창작 역량을 과학기술과 문화산업의 융합에 활용하고자 했다. 이후 KAIST와 함께 AI·미디어 기술을 활용한 작업을 진행했고, 2025년에는 미디어아트와 우주 연구를 결합한 음원 송출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과학의 언어로 예술을 상상하고, 예술의 방식으로 과학을 바라본 사례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청소년 교육이 주목해야 할 것은 ‘지드래곤’이라는 유명인의 이름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한 사람이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방식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하듯이 남들이 하니까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무엇을 다르게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묻는 태도다. 이는 ‘퍼스트 펭귄(First Penguin)’이라는 말로 치환하여 이 시대 우리 교육의 중요한 화두로 다시 소환할 필요가 있다. 무리 지은 펭귄들이 얼음 끝에서 바다를 바라본다. 물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 모두가 머뭇거리는 순간 한 마리가 먼저 뛰어든다. 그 한 번의 도약이 무리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교육에서 퍼스트 펭귄은 어떤 학생인가? 정답을 가장 빨리 맞히는 학생이 아니라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을 던지는 학생이다. 실패하지 않는 학생이 아니라 실패를 새로운 배움으로 바꾸는 학생이다. 남보다 앞서가는 학생이 아니라 남들이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을 찾아가는 학생이라 할 것이다. KAIST가 2026학년도 학사과정에서 ‘창의도전전형’을 운영하고 있는 것도 이런 시대적 흐름과 맞닿아 있다. KAIST는 해당 전형을 통해 과학영재를 선발하고 있으며, 대학 입시 자체에서도 기존의 성취만이 아니라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잠재력을 바라보는 흐름을 선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흔히 오해하기 쉬운 것은 퍼스트 펭귄 교육이 무모함을 가르치는 것으로 왜곡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용기와 무모함은 다르다. 지드래곤에게서 청소년이 배워야 할 것은 그가 입는 옷도, 부르는 노래도, 얻은 명성도 아니다. 지드래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는 법이다. 누군가는 음악으로 자기 길을 만들고, 누군가는 과학으로, 누군가는 문학으로, 누군가는 인공지능과 로봇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분야가 아니라 태도다. “남들이 이렇게 하니까 나도 이렇게 한다”가 아니라, “나는 이것을 어떻게 다르게 해볼 수 있을까?”라고 묻는 태도다. 베트남의 한 천재 소녀가 지드래곤에게서 발견한 것은 결국 유명인의 화려함이 아니었다.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고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하는 인간의 자세였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남보다 높은 점수를 받는 방법인가, 아니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는 방법인가? 교육은 아이에게 완성된 지도를 건네주는 일이 아니다. 아직 길이 그려지지 않은 백지 한 장을 건네고, 그 위에 자기만의 길을 그릴 용기를 갖게 하는 일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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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연의 고용정책 칼럼] 함께 일할 때 더 큰 가능성이 열린다
[교육연합신문=이수연 칼럼] 기업의 경쟁력은 뛰어난 기술이나 자본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경험과 다양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일하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때 조직은 더욱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조직문화는 이제 선택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중요한 경쟁력이 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장애인 고용의 중요성을 꾸준히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장애인 고용은 단순히 의무를 이행하는 차원을 넘어, 누구나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라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를 가진다. 사람을 장애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역량과 가능성으로 바라볼 때 기업과 사회는 함께 성장할 수 있다. 현장에서 기업들을 만나 보면 장애인 고용에 대한 의지는 있지만 실제 채용과 근무환경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적지 않다. 채용 이후의 직무 배치, 조직 구성원의 이해, 소통 방식 등은 제도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결국 포용적인 조직문화는 교육과 이해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공공기관과 협력하여 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교육, 슈퍼바이저 역량강화 교육, 대기업 장애인 고용 담당자 역량강화 교육 등 다양한 교육을 운영하며 장애인 고용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해 왔다. 단순히 법과 제도를 설명하는 교육이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 발생하는 사례를 공유하고, 조직이 함께 고민하며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있도록 실무 중심의 교육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ESG 경영이 기업의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으면서 장애인 고용 역시 사회적 책임을 넘어 지속 가능한 경영의 핵심 요소로 인식되고 있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조직은 더 넓은 시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서로 다른 경험을 가진 구성원들이 협력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혁신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장애인 고용은 특정 계층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성장하는 조직문화를 만드는 과정인 것이다. 포용적인 일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구성원 모두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장애의 유무와 관계없이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 교육은 이러한 변화를 시작하는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며, 조직이 함께 성장하는 기반이 된다. 앞으로의 고용정책은 채용 숫자를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누구나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일터를 만드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다양한 역량이 발휘되는 조직이 결국 더 큰 경쟁력을 갖게 될 것이다. 좋은 일터는 모두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곳이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서로의 가능성을 믿는 조직은 더 큰 혁신을 만들어 낸다. 사람 중심의 교육과 포용적 조직문화를 통해 모두가 함께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현장에서 실천하고 있는 HRD의 또 다른 가치이다. 다음 회차에서는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사회적기업의 역할과 지역 협력 네트워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 이수연 ◇ 인천대학교 경영대학원(MBA) ◇ (주)채움HRD 대표이사 ◇ 고용·교육정책 및 HRD 분야 전문가 ◇ 인천지방고용노동위원회 사용자위원 ◇ 인천출입국·외국인청 사회통합협의위원 ◇ 인천해양경찰서 정책자문위원회 위원 ◇ 인천발달장애인훈련센터 전문가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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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희 반려詩選] 슴베 사랑
[교육연합신문=구본희詩選] 슴베 사랑 나무 자루 속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어둠 칼날의 뿌리가 산다. 번득이는 날 아래 깊숙이 몸을 감춘 채 칼과 자루 사이 다리를 놓는다. 자루가 부서지면 칼날은 제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슴베는 허공에 홀로 남는다. 서로 다름을 품어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 비로소 한 몸으로 산다. ▣ 구본희 ◇ 前인천국제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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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변종 폭력 ‘야차룰’에 대한 교육적 대응책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오늘날 학교 현장은 갈수록 가관이다. 본래의 기능을 잃고 끔찍한 변종 폭력의 실험장으로 변질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최근 10대 청소년들 사이에서 폭발적으로 번지고 있는 ‘야차룰’은 우리 교육 공동체가 직면한 매우 충격적인 단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은어는, 아이들끼리의 단순한 다툼을 넘어 사전에 면밀하게 기획되고 잔인하게 이루어지는 구조적 야만성을 띠고 있다. 교실의 질서가 무너진 자리에 고개를 든 이 기괴한 폭력의 실태를 냉정히 직시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획기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할 때다. 먼저 ‘야차룰’의 어원부터 살펴보자. ‘야차(夜叉)’는 본래 산스크리트어 ‘야크샤(Yakṣa)’에서 유래한 말로, 불교 신화나 민속에서 사람을 해치거나 두려움을 주는 흉폭하고 사나운 귀신(또는 괴물)을 뜻한다. 이로부터 파생되어, 인터넷 격투 콘텐츠나 대중문화 속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싸우는 격투 방식’을 일컫는 은어로 쓰이게 되었다. 여기에 ‘규칙(Rule)’이 결합하여 ‘제한 없이 맨몸으로 붙는 싸움 규칙’으로 진화한 것이다. 이런 신조어가 생겨난 배경은 유튜브 및 격투 콘텐츠의 모방으로 인터넷 방송이나 종합격투기 콘텐츠 등에서 보호장구 없이 거칠게 싸우는 모습이 밈(Meme)처럼 청소년들 사이에 유행하면서 이를 모방하려는 심리가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또한 학교 폭력 처벌 회피의 목적으로 생겨난 변종 수법으로 아이들이 고안해 낸 얄팍한 꼼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가장 교활한 것은 철저하게 ‘합의된 결투’라는 명목으로 위장된 점이다. 당사자 간에 민형사상의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거나, 교실 구석, 화장실, 학교 인근 공터 등 교사의 눈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맨주먹으로 상대를 제압하도록 강요한다. 더 큰 문제는 이 싸움이 단순히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아이들이 이를 휴대전화로 촬영해 SNS나 단체 대화방에 유포하고, 심지어 이를 흥행 콘텐츠처럼 소비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변종 폭력이 일상화된 배경은 무엇인가? 먼저 사법적 눈속임과 솜방망이 처벌이다. 가해 학생들은 “우리끼리 합의하여 싸운 것”이라며 학교 폭력의 범주를 교묘히 빠져나가려 한다. 실제로 관련 통계에 따르면 신종 학교 폭력 심의 건수가 급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해 학생의 10명 중 8명가량은 서면사과나 접촉 금지 등 가벼운 ‘조치’에 그치고 있다. 학생부에 기록조차 남지 않거나 졸업과 동시에 삭제되는 솜방망이 처벌은 아이들에게 “폭력은 잠시 스쳐 가는 유희일 뿐”이라는 비교육적 확신을 심어주고 있다. 또한 공동체 의식의 실종과 방관의 문화다. 경쟁 지상주의 교육 속에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은 퇴화하고, 자극적인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에 익숙해진 청소년 문화가 ‘구경꾼’과 ‘방관자’를 양산하며 폭력을 부추기고 있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야만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가담 형태별 처벌의 세분화 및 무관용 원칙 적용이다. ‘합의된 싸움’이라는 명목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꼼수를 원천 차단해야 한다. 직접적인 폭력 행사는 물론이고, 싸움을 주선하거나 관전하며 촬영하고 유포한 모든 방관자에게도 엄중한 책임을 묻도록 법제화해야 한다. 둘째, 디지털 2차 가해 방지 및 플랫폼 정화 시스템이다. 폭력 영상이 유포되는 즉시 학교와 경찰이 실시간으로 차단하고, 플랫폼 사업자에 대한 법적 책임을 강화하여 아이들이 디지털 공간에서 폭력을 소비하지 못하도록 원천 봉쇄해야 한다. 셋째, 관계 회복 중심의 인성 교육과 신고 시스템의 개혁이다. 은밀하게 이뤄지는 변종 폭력의 특성을 고려해 학생들이 익명으로 두려움 없이 고발할 수 있는 신속 감시 체계를 구축하고, 교실 내에서 타인과 공존하는 법을 가르치는 근본적인 인성·시민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야차룰’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학교 안에서 활개 치는 한, 대한민국 교육의 미래는 암울하다. 아이들의 주먹질을 방관하고 가벼운 처벌로 눈감아주는 것은 학교가 폭력의 공범을 양산하는 것과 같다. 이제 차가운 방관과 솜방망이 처벌의 그늘을 거두고, 한편으로는 강력한 법과 원칙, 다른 한편으로는 따뜻한 공감의 교육으로 교실을 정화할 때 비로소 학교는 다시 배움과 성장의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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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부캉이 열풍과 진정한 위로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몸길이 약 3미터 암컷 흑상어 한 마리가 9월 18일 부산 동구 북항 친수공원 인공 수로로 들어왔다. 그 이후 이 상어는 시민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9월 19일부터 10월 9일 오후 6시까지 이 상어를 보기 위해 친수공원을 찾은 누적 방문객은 120만 명을 넘어섰다. 열풍이다. 이 상어는 북항에 나타났다는 의미에서 '부캉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부산시는 부캉이를 명예 홍보대사로 공식 위촉한다고 밝혔다. 사람들은 왜 상어 한 마리를 향해서 이렇게 열광하는 것일까. 뉴스 내용을 보다 보면 부캉이와 늑구 같은 야생동물의 모습에 사람들이 더 열광하는 것을 느낀다. 사람들은 이름을 붙이고 이야기를 만들며 환호한다. 배우자나 노부모는 돌보지 않아도 반려동물에게는 극진하게 대하는 요즘 세태를 듣고 있었지만 야생동물에 대한 대중의 유별난 관심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텔레비전과 휴대전화 화면에는 하루에도 수많은 비극이 지나간다. 전쟁으로 집을 잃은 사람, 폭력 앞에서 무너지는 약자,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 진실을 밝히기 위해 오랜 시간을 견디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기후 위기로 사라지는 생태계와 멸종의 벼랑에 선 야생동물도 있다. 현실 생활의 비루하고 비참한 현실이 우리 앞에 있지만 부캉이에게 보내는 관심만큼은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말 없는 야생동물은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그들은 나의 입장을 요구하지도 않고,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지도 않는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위로한다. 반면 인간은 다르다. 인간의 고통에는 원인과 책임이 있으며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그곳에 마음을 기울이는 순간 우리는 판단해야 하고 때로는 감정의 불편함을 느끼며 무엇인가 행동해야 한다. 부캉이 뉴스와 다른 생각을 하게 하는 뉴스가 있다. 무연고 사망자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작년 무연고 사망자는 7,190명이라고 한다. 무연고 사망자의 53.4%는 기초생활수급자였다. 46.6%는 정부의 복지 수혜 대상이 될 정도의 가난에 놓이지는 않았는데도 무연고로 처리되었다. 작년에 전국에서 법적인 연고자(배우자, 직계 존·비속, 형제·자매 등)가 있지만 무연고로 삶을 마친 이는 74.9%였다. 무연고 사망자가 한 해 만 명이 넘어가는 시대가 머지않았다. 우리는 무연고 사망자가 누구인지 왜 무연고가 되는지도 모르고 관심이 없다. 현대인의 관심은 ‘깊이 생각해야 얻는 감동’에서 ‘즉시 소비할 수 있는 감정’으로 이동하고 있다. 우리는 위로를 너무 쉽게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정한 위로는 귀여운 것을 바라보며 잠시 웃는 데 있지 않다. 진정한 위로는 사람을 만나고 책을 읽고 자연을 바라보며 결국 다시 자신의 삶을 사랑하게 되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 부캉이에 대한 열광은 너무 복잡하고 지친 세상에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존재에게서 위로받고 싶어 하는 마음의 표현일 수 있다. 우리가 정말 회복해야 할 것은 불편하고 아픈 인간의 현실을 끝까지 바라보는 힘이다. 그런 힘에 교육이 한 줌이라도 도움을 주어야 한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진로융합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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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흑백요리사’ 같은 수업경연대회는 불가능한가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넷플릭스 요리 서바이벌 ‘흑백요리사’가 인기 상한가이다. 20명의 유명 요리사 ‘백수저’와 재야의 고수 ‘흑수저’ 80명이 요리 대결을 펼치는 이 프로그램의 인기몰이 이유는 무엇일까. 출연자들의 공정한 진검승부로 시청자 관심을 사로잡았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 결과이다. 처음 착상은 셰프 100인의 요리 서바이벌이었다고 한다. ‘무명 요리사’라는 제목으로 발전한 기획은 ‘발상 전환’을 거쳐 ‘흑백요리사’를 만들었다. ‘계급 전쟁’을 표제로 걸고 매회 ‘스타 셰프’를 만들었다. 요리에 대한 진심, 공정에 대한 관심, 결과에 대한 보상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본다. 수업연구에도 그러한 진심과 관심과 보상이 있는 대회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과거에 수업연구대회라는 것이 있었지만 승진 가산점을 따기 위한 보여주기 수업이 많았다. 수업연구대회로 하는 수업을 볼 때 학생을 관객으로 하는 잘 짜여진 한편의 보여주기 수업이라는 인상을 받았었다. 수십 년 수업을 해도 수업의 최고전문가라고 자신하기 어려운 것이 수업이다. 우리는 얼마나 수업에 진심이었던가. 우리에게도 요리 고수의 셰프처럼 전국적으로 내세울 만한 수업전문가 교사는 많이 있을 것이다. 재야 고수라 할 수 있는 훌륭한 교사의 교수방법이 사장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학교에서 수업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학교의 진심이 과연 수업에 방점이 있는지 의문이다. 학교에서 수업을 잘하는 교사가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 분명 잘못된 것이다. 수업으로 존경받고 수업으로 학생의 성장을 돕는 교사가 평교사로 남는 일이 많다.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교감, 교장이 되려면 대부분 승진 점수와 윗사람에게 좋은 근평을 얻어야 하는 승진 제도를 통과해야 한다. 교사에게 수업이 최고라고 하지만 현실은 최고의 수업을 하는 교사가 뒷자리에 있다. 흑백요리사와 같은 수업경연대회를 개최하여 연간 최고의 수상자 100명에게 교장을 시켜준다면 수업 현장은 활기를 띨 수 있을 것이다. 수업 개선에 대한 진정성이 있으면 할 수 있는 방안이다. 승진 가산점수, 윗사람의 비위 맞추기로 승진에 연연하는 사람들만이 중요한 위치를 맡게 하는 제도는 개선이 필요하다. 제도는 필요하면 만들면 된다. 흑백요리사처럼 공정과 기회와 보상을 주는 수업경연제도는 교원능력개발평가보다 훨씬 도움이 되는 제도라고 여겨진다. AI 교과서나 고교학점제에 따른 공간 개선도 중요하지만 교사의 수업에 초점이 더 맞추어지기를 바란다. 보여주기 위한 화려한 요리보다 진정한 맛으로 경쟁하기 위해 눈을 가리는 흑백요리사의 평가방식은 많은 호응을 받았다. 수업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학생에게 어떤 것이 가장 이해가 잘 되는 교수방법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흑백요리사’처럼 계급장 떼고 교장과 교감이 교사와 수업에서 대결할 분을 모집한다면 얼마나 지원자가 있을까 궁금하다. ▣ 김홍제 ◇ 충청남도천안교육지원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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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흑백요리사’ 같은 수업경연대회는 불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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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대한민국 교육, 입시(入試)보다 입지(立志)를 우선해야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우리 교육은 표류(漂流)하고 있다. 표류란 무엇인가?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물 위에 떠서 정처 없이 흘러감’이라 정의하고 있다. 즉, 확고한 목적지가 없이 그저 파도에 의해 이리저리 휩쓸리는 것이다. 그러니 암초에 부딪히고 조난당하고 온갖 풍파에 시달리며 결국은 너덜너덜 형체만을 유지한 채 간당간당하게 목숨을 부지하는 형체가 된다. 그곳에는 선장은 있으나 그는 이미 리더십을 상실했고 선원들은 각자도생하며 오직 제 살 길만을 좆기에 연대와 협력이란 공동체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겨우 명맥을 유지할 뿐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오직 힘이 세고 강한 자만이 눈길을 끌고 또 전체를 압도하게 된다. 이미 시스템이 붕괴된 가운데 누군가 목소리 크고 군림하는 자의 주변에 모여 그에게 부역하면서 철저히 자신만 출세하면 된다는 가치관이 우선한다. 이런 조직에 타인과 공동체를 위한 이타적인 삶의 가치는 희소할 뿐이다. 그저 적자생존의 정글법칙에 의해 기득권층에 편입하려는 성공 전략만이 존재한다. 이것이 표류하는 우리 교육이 낳은 엘리트들의 적나라한 모습이고 그 중심에 ‘입시(入試)’라는 괴물이 굳건하게 똬리를 틀고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문제는 그 입시가 낳은 온갖 후유증과 부작용이 갈수록 정상적인 교육을 위협하고 방해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입시 중심의 교육을 어떻게 바람직한 교육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 역사에서 그 해법을 찾을 수 있다. 선조 때 율곡 이이(李珥)는 학문을 시작하는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격몽요결』이란 교과서 격인 책을 편찬했는데 그 첫 장 제목을 ‘입지(立地)’라 했다. 이는 ‘뜻을 세워라’는 가르침으로 모든 교육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훗날 인조는 전국에 있는 향교에 이 책을 내려 보내 교재로 삼게 했다. 이는 뜻을 세우는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으로 조선 500년이라는 국가의 기틀을 다진 것으로 후대의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 교육은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다. 그만큼 우리 교육은 아직도 낡은 방식에 집착해 과거 산업화 시대의 인재를 키우는 방식과 경쟁교육에 의한 시험능력주의를 고집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21세기 교육은 ‘창의적 인재 육성’으로 결집된 교육 목표를 설정하고 있지만 이의 가장 큰 걸림돌이 입시라는 괴물인 것이다. 입시는 인간성회복을 외치는 인성교육과 OECD 최하위권의 학생 행복도를 바꾸는 데도 가장 큰 방해물이다. 이제는 우리 교육의 관점을 입시에서 입지로 달리해 근본을 살려야 할 때다. 이는 곧 학생들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공부를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등등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자신들의 꿈과 비전을 세우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입시는 교육을 위한 여러 수단 중의 하나일 뿐이고 입지가 주요한 목적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입시 교육에는 초지일관 하나의 가치관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교육이 출세와 성공지향의 강력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는 배워서 남 주자는 우리의 전통적인 홍익인간(弘益人間: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 사상과는 반대로 타인 위에 군림하고 자신만이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이다. 현재 SKY 대학 서열체제를 공고히 하는 입시 시스템, 의사라는 특정 직업만을 선호는 천박한 진로교육으로 변질되고 있다. 이에 각종 귀족학교라 칭하는 자사고, 영재고, 과학고, 예술고 등은 특별한 교육과정 운영을 내세우고 있으나 실상은 변칙적 운영으로 세속적 야망을 부추기는 결정체일 뿐이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입시교육이 배출한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을 보라. 그들의 공부머리는 사회에서 기대하는 만큼의 역량 있는 일머리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이는 단지 무엇이 되어 자신과 가문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출세와 성공지향의 가치관에 몰입되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이 세상을 보다 좋은 곳으로 만드는 이타적인 인재가 되고자 뜻을 세우는 입지에 지나치게 소홀하거나 무시한 결과다. 이제 우리는 입시라는 작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타인의 행복과 세상을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입지로 나와 공동체, 국가를 더불어 행복하게 만드는 교육으로 나가야 한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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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대한민국 교육, 입시(入試)보다 입지(立志)를 우선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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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인생학교 행복교육] 낯선 경험을 통한 배움
- [교육연합신문=전준우 칼럼] 나의 어린 시절 꿈은 작가였지만, 정확한 목표 없이 막연한 꿈을 꾸는 정도였다. 어느 날 의도하지 않은 책이 덥석 출간되고 난 뒤에도, 글쓰기 자체에 관한 관심 이외에 더 나은 원고를 출간해야 한다는 압박은 별로 가지지 않았다. 그러다 새로운 원고를 꾸준히 쓰는 일에 도전하는 것이 글을 쓰는 일을 함에 있어서 실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색다른 경험이 색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듯이, 늘 똑같은 패턴의 글을 쓰는 것보다 새로운 경험을 통한 글쓰기를 하는 것이 글쓰기 실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장편소설, 희극, 방송대본, 부동산, 세법, 심리학 등등 다양한 분야의 글쓰기는 확실히 좋은 기회가 된다. 탐사보도 기자 출신으로 일본 최고의 지성인으로 알려진 故다치바나 다카시는 10만 권이 넘는 책을 소장한 고양이 빌딩의 소유주였으며, 공산당 연구, 천체물리학 등 정치, 사회, 과학을 막론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상당히 깊이 있는 저작들을 많이 남겼다. 미지의 경계를 철저히 파고들어야 하는 '어려운 문제'를 푸는 것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한 다치바나 다카시는 저서 한 권을 집필할 때마다 평균 500여 권의 논문과 관련도서를 탐독한다고 밝힌 그는 평생 3만 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고 술회한 적 있다. 다독이 다작으로 이어지고, 다작은 곧 다양한 저서를 출간하는 데 도움이 된 셈이다. 교육분야와 독서에 약간의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뿐, 어떤 분야의 책이나 원고도 평소부터 깊은 관심을 갖고 읽어왔거나 쓴 경험은 별로 없다. 다만 낯선 경험을 좀 더 새로운 지식으로 벼르고 익히기 위한 노력이 활자로 남기는 과정이었던 것은 맞다. 나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경험을 하고, 평소에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고, 평소에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던 책을 읽고,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논문을 검토하는 일들이 모두 세계관을 확장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기회들이었던 셈이다. 글을 쓰는 일 앞에서 기준점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세계관에 국한되기 마련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배운 만큼 아는 법이다. 신문, 책, 논문, 잡지 가릴 것 없이 눈과 귀를 열어놓는 열린 마음이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이유다. 5일장, 7일장에서도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들이 많다. 심지어 시대의 흐름을 따라 활성화되고 있는 SNS에서도 보고 배울 게 많다. 유튜브, 블로그, 인스타그램뿐만 아니라 웹툰, 스레드, 릴스, 쇼츠에서도 사람들의 이야기가 넘쳐흐른다. 글은 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모두 사람을 향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어디에든지 사람들은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는 곧 낯선 경험이 되고, 낯선 기회로 이끈다. ▣ 전준우 ◇ 작가, 강연가, 책쓰기컨설턴트 ◇ 前국제대안고등학교 영어교사 ◇ [한국자살방지운동본부] ◇ [한국청소년심리상담센터] 채널운영자 ◇ [전준우책쓰기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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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인생학교 행복교육] 낯선 경험을 통한 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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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노벨 문학상 수상과 한국 교육의 독서 지평 넓히기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소설가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탔다. 의대 정원, 정치권 다툼, 교사 이탈, 경제 어려움 등 우울한 뉴스가 많던 가을날에 한줄기 신선한 계곡 바람 같은 소식이다. 번역이 아닌 한국어로 노벨 문학상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감격이 밀려온다. 이제 한국 문학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고 있다는 기쁨도 크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그는 소설, 에세이 등을 통해 가부장제, 폭력, 슬픔, 인간애 등의 주제를 다양하게 탐구해 왔다"고 소개했다. 이제 우리 문학이 세계의 언어로 번역되고 한국의 문화와 생활과 생각이 수출될 것이다. 우리가 과거 유럽이나 북미의 문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처럼 말이다. 역대 노벨 문학상 수상자 국적은 프랑스가 16명, 미국 13명, 영국 12명, 스웨덴 8명, 독일 8명 등 대부분이 미국과 유럽이다. 한강 작가는 2016년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분류됐던 작가였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은 과거에 특정 단체 명단을 작성하고 이들을 정부 지원에서 배제하도록 한 사건이다. 한강 역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다룬 '소년이 온다'로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지원하는 해외 문화교류 행사 지원 배제 지시 대상이 됐었다고 한다. 우리가 더 넓은 세계로 뻗어나가려면 종교나 정치적 편향에 따라 문학이나 교육을 재단하고 강제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오늘날 글은 많이 읽지만 책은 거의 읽지 않는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3년 국민독서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인 독서율은 43.0%에 불과하다. 한 해 한 권도 책을 읽지 않는 어른이 절반이 넘는 셈이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거의 핸드폰을 보고 있다. 최근 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이 책을 멀리하는 이유는 '시간이 없다'기 보다는 '책을 읽어야 하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경로가 많은데 굳이 책을 읽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왜 책을 읽어야 하는 걸까. 이 전환시대에 학교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정책은 ‘책 읽는 학교’이다. 정치·경제·사회·환경·교육·언론 등 위기에 처하지 않은 곳이 없다. 과도기의 전환시대이다. 이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책 읽는 문화에 있다. 미친 경쟁을 계속 독려하는 나라에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다양한 독서를 하지 않으면 창의적인 학습은 불가능하다. 책을 읽으며 토론하고 성찰하는 시민이 없다면 민주주의도 없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책을 꼭 읽어야 하나?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의 내적 요인은 ‘독서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으며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에서 아무리 많은 글을 읽어도 훑어보기를 통해서는 깊은 사고가 생성되지 않는다. 김누리 교수는 『경쟁교육은 야만이다』라는 책에서 세계 최악의 경쟁 교육이 대한민국을 망치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국의 학생들은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아이들이라는 내용을 인용하기도 한다. 그 불행에서 학생을 구해낼 방안도 책읽기라고 단언한다. 미래의 핵심은 ‘창조’이다. 문화창조, 창조경제, 4차산업, 미래창의교육의 기본이 창조이다. 책을 읽지 않고는 창조를 못 한다. 입시 시험만 준비하는 나라가 아니라 책 읽는 나라로 바꿔야 한다. 책을 읽지 않는 국가는 몰락한다. 위대한 시대는 책의 시대였고 독서의 시대였다. ▣ 김홍제 ◇ 충청남도천안교육지원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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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노벨 문학상 수상과 한국 교육의 독서 지평 넓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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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내 새끼 지상주의’, 우리 교육의 블랙홀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부모의 ‘자식 사랑’에는 끝이 없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것은 약과에 불과하다. 자식을 위해 ‘우골탑’ 신화는 물론 ‘기러기 아빠’로 가족과 생이별하고 때로는 자식을 위해 한 목숨 기꺼이 바치는 것이 부모의 ‘자식 사랑’이다. 이런 마음에 누가 돌을 던지고 비난의 화살을 쏟을 것인가? 문제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하듯이 지나침은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고 오히려 해를 끼치는 것으로 과도한 맹목적인 사랑이 문제다. 여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 이면의 국민적 묻지마식 관용과 포용은 물론 묵언의 지지와 동의가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자식 사랑’을 넘어 차라리 ‘내 새끼 지상주의’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내 새끼 지상주의’ 배경은 무엇일까? 우리는 민주화가 가져다준 권리의식의 성장, 수요자 중심주의가 낳은 교육수요자의 권리확대로 인해 자녀에 대한 절제 없는 사랑을 정당화시켰다. 어떤 형태의 권리침해도 허용하지 않는 ‘금쪽이’의 탄생, 내 자식의 안전과 이익을 최우선에 놓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 IMF 구제금융 이후 혹독한 환경에서 각자도생의 형질을 획득했고, 그것이 부모가 된 뒤 자식의 안전한 환경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과보호로 나타났다.(송원재, 『교사가 아프다』) 오늘의 학교 현장은 “우리 아이가 싫어한다”, “우리 아이를 중심으로 해 달라”... 등의 민원으로 모든 아이의 평등한 권리를 부정하고 자기 자식에 대한 특별한 대우를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다. 더 나아가 국가가 정한 교육과정에 담긴 내용을 다루지 말 것을 요구하는가 하면, 내 새끼를 돌보기 위해 다른 아동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행위를 자기 자식의 정당한 권리로 여기고, 이에 반(反)하는 교사의 행위는 아동에 대한 부당한 폭력이나 정서 학대로 간주하여 학부모가 교사를 공격하는 핵심 논리로 둔갑한다는 것이다. 소설가 김훈은 ‘내 새끼 지상주의’는 “자기 자식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남의 자식을 해치는 육아원리이자 이데올로기이며, 작은 불이익을 견디지 못하고 사회관계망 전체를 왜곡하는 반사회적 행위”로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내 아이가 털끝만한 손해도 입지 않게 하려는 생각은 학교라는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관계를 축소시킴으로써 자녀의 사회화를 지체 내지 정체시키고 있다. 주목할 사실은 이런 특성이 특히 자녀에게 투자할 자산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중⋅상류층에서 더 두드러진다는 사실이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자기 자녀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배려를 위해 다른 아이에게 돌아가야 할 기회를 빼앗고 교사의 정당한 지시와 통제를 무력화함으로써 학교질서를 무너뜨린다. 설상가상으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교사에 대한 공격을 서슴지 않는다. 이것이 ‘내 새끼 지상주의’가 결국 아동의 성장을 방해하는 근본적 이유다. 이런 행위는 자녀를 무균실에서 키우려는 부모에게서 나타난다. 그들은 아이가 교사에게서 어떤 싫은 소리라도 들어서도 안 되고, 친구들과 크고 작은 갈등을 겪어서도 안 되며, 손해를 보고 지는 느낌 역시 경험해서도 안 된다고 여긴다. 이는 결국 무균실 밖에서는 도태하고 다른 아이들보다 뒤처지게 만든다. 학교는 애벌레가 나비로 태어나기 직전에 겪어야 하는 중간 단계인 번데기와 흡사하다. 이 과정을 겪지 않고는 아름답고 성숙한 성체인 나비가 될 수 없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아동의 이런 정상적인 성장⋅발달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재 학부모들이 교사를 대상으로 정서적 아동학대라고 우기는 대부분의 것이 자기 아이를 영영 번데기로 살게 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이를 원하는 부모가 갈수록 늘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위기로부터의 면제가 아니라 그에 대한 면역력이다. 부모는 제 자식 귀한 줄만 알지 자신들의 행위가 종국적으로 자식을 망치는 교육의 블랙홀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이제 부모도 마음의 훈련이 필요하다. ‘좋은 부모 되기’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것임을 깨닫고 내 새끼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하다는 마음의 수양과 내 새끼에 대한 욕망의 절제, 타인의 자녀를 배려하고 존중하며 균형을 이루는 부모로 탈바꿈하길 기대한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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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내 새끼 지상주의’, 우리 교육의 블랙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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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학부모 ‘민원처리 시스템’을 신속히 제도화해야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오늘날 우리의 초중고 학교마다 학부모의 악성민원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가히 민원공화국이라 불릴만하다. 문제는 한두 명의 ‘악성 민원러’만으로도 학교가 거의 압사 상태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에 학교는 학부모가 제시하는 의견의 내용과 방식이 교육을 위해 바람직한 것인지, 아니면 학교의 교육활동에 심각한 해를 끼치는 것인지의 선별과 이에 대한 원만한 해결이 급선무다. 왜냐면 현재 우리의 학교는 악성민원으로 교권이 바닥으로 추락하고 모든 교육활동에 제동이 걸리며 심지어 교사가 자살을 최후의 해결책으로 선택하는 것이 무한 반복될 정도로 매우 심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반 공공기관은 어떤가? 민원이 들어오면 민원 담당자가 먼저 검토해서 타당성 여부를 판단하고, 심사위원회로 넘겨 수용 여부를 결정해서 회신을 보낸다. 민원인이 회신 내용에 불복하면 행정심판을 청구하거나 행정소송을 낸다. 민원인이 담당자를 찾아와 고성을 지르거나 폭행을 하면 공무집행방해, 업무방해죄로 처벌받는다. 따라서 일반 공공기관에서는 그런 일이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다. 유독 학교라는 공공기관에서만 민원인이 교실에 쳐들어와 교사를 폭행하거나 학생들 보는 앞에서 온갖 불미스러운 일이 자행되고 있다. 과연 이런 불공정을 언제까지 감수하고 교사만이 그 희생양이 되고 생존의 문제로 비화될 것인가? 학교는 일반 공공기관과 달리 민원실도 없고 민원처리 담당자도 없다. 따라서 필자는 학교에 ‘민원처리 시스템’을 즉각 도입할 것을 제기 한다. 학교의 민원은 교사 개인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가장 신속하고 효과적인 수단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것이 지나쳐 이제 학교는 민원으로 죽어 가는 가장 대표적인 공공기관이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원인이 교사를 직접 만나 압박을 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민원인과 교사가 대면하지 않게 하는 시스템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이제 학교 민원도 ‘민원처리 시스템’으로 접수하고 교사에게 찾아와 항의하거나 요구하고 심지어 협박과 폭행을 가하는 일이 없도록 예방해야 한다. 또 접수된 민원은 당사자가 직접 답변하지 않고 ‘민원처리 시스템’에 의해 담당자나 전담팀이 대신하도록 해야 한다. 이에 대한 교육당국의 예산 확보와 대응책이 매우 시급하다. 이미 교육선진국들은 민원처리의 주체를 학교장 또는 위임을 받은 전담자나 전담팀이 해결하고 있다. 따라서 교사는 학생 수업을 위한 교육력을 최대로 확보하여 교육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를 우리는 한없이 부러워하기만 할 것인가? 우리 교육은 단지 교사의 사명감에만 호소하거나 강제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학교는 강력한 민원처리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한다. 만약 민원인이 회신에 불복한다면 상급 기관에 이의신청하는 절차를 친절하게 안내하고 그것이 민원인의 정당한 권리이자 공공기관인 학교의 의무라는 점을 인식시켜야 한다. 여기엔 적법절차에 따르지 않고 같은 내용의 민원을 반복 제기하거나 당사자 개인에게 해결을 요구하는 것은 반드시 기각 처리된다는 사실도 널리 주지시켜야 한다. 어떤 경우든 교사 개인에 대한 항의나 보복은 불법이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각인돼야 한다. 이렇게 해야 교권침해를 차단하는 합법적이고 유효한 수단으로 정착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 교육의 ‘내 새끼 지상주의’에 의한 민원은 반드시 제동이 필요하다. 이는 지나치면 없는 것만 못하거나 오히려 독이 되는 ‘과유불급’의 표상이다. 이제 학부모에게 격앙된 감정을 폭발하지 않고 자신을 객관화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이른바 ‘한 박자 쉬어 가는’ 해결의 지혜다. 교사 또한 과도한 방어에 의존하지 말고 교육활동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우리 학교에도 학부모가 민원 전화 한 통에 만사 오케이라는 잘못된 행태에 제동을 걸고 적법한 절차에 의해 교사와 머리를 맞대고 대화하여, 그간 거친 말과 폭행으로 감정을 드러내거나 무작정 교장실로 직행하던 방식을 폐기해야 한다. 학교가 더 이상 악성민원으로 고통의 근원지가 되고 교사가 안타까운 죽음으로 이어지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이것이 현재 우리의 학교 현장에 무엇보다 급선무인 교육적 과업이라 믿는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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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학부모 ‘민원처리 시스템’을 신속히 제도화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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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다시 돌아보는 학교 존재 이유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무엇인가 잘못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전자교과서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붇고 늘봄사업에 돈과 인력을 쏟아 붓는다. 수업보다는 홍보와 보육이 우선으로 보인다. 입시와 점수와 기계적인 평가가 학교에 가득하다. 학교에 희망적이고 건전한 미래가 있는가. 신명이 나지 않는다. 일을 안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전자교과서나 늘봄사업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반대의 의견이나 준비부족을 말해도 무시되고 밀어붙이면서 교육계에 심리적인 파열음이 커지고 있다. 학교는 왜 필요한가.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이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 교육이 국가미래보다 정권이나 민간자본에 휘둘리면 본질에서 멀어진다. 호모 사피엔스가 30만 년 전 출현한 이래 가장 번영을 누리고 있지만 점차 불평등은 커지고 있다. 미래역량을 키우고 민주시민으로 성장시키는 교육은 표면적 목표이다. 실질적인 이면적 목표는 인정받는 직업을 얻기 위한 과정이다. 학교는 국가, 자본가, 대기업, 산업체를 위한 정치적, 경쟁적 교육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함께 조화롭게 사는 ‘공동체 협력’ 교육을 해야 한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 참여와 소통, 예술과 운동, 독서와 토론, 봉사와 기부 등의 개념이 기반이 되는 교육을 해야 한다. 기후위기와 생태교육과 과학교육, 윤리교육이 필요하다. 코로나19 상황에서 학교는 단순히 지식전달이 아니라 친구와 공동체가 어우러지는 경험의 장소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제 다시 지식교육이 전부인양 돌아서고 있다. 인터넷이 되지 않는 컴퓨터는 효용성이 없다. 미래사회는 ‘연결과 소통’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홀로 1등을 추구하는 한국교육은 연결과 소통을 외면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학교는 왜 존재하는가. 근대공교육으로 서구와 대한민국은 크게 성장했다. 이제 목표를 달리해야 한다. 명실상부한 민주시민으로 성장하기 위해 함께 사는 시민의식, 깨어있는 시민의식, 주인의식을 지닌 책임을 지닌 민주시민, 사회에 도움을 주는 민주시민으로 성장시켜 나가는 교육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학교는 근대국가건설과 산업일꾼의 깃발을 달고 경주마처럼 달렸었다. 다양성이나 개인의 성향은 돌볼 여유가 없었다. 이제 그런 달리는 일은 자동차나 기계가 더 잘할 수 있다. 개인이 행복하지 않게 만드는 학교는 필요 없다. 증오와 갈등과 경쟁과 점수가 인간답고 행복한 사회를 만든다고 생각하는가. 정권의 정치이념이나 학벌조장이나 대학선발의 하부기관, 기계부속품을 만드는 교육이 되어서는 미래가 없다. 존중과 배려와 협력과 합리적 이성이 있는 사회가 행복한 사회이고 학교는 그런 사회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 책상에 앉아서 답을 외우거나 인공지능과 대화하는 학생이 아닌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모둠토론을 하고 동아리활동과 운동으로 심신을 단련하고 지역사회와 연결하는 학습으로 사회와 함께하며 배우는 모습을 보고 싶다. 학교는 교육다운 교육을 해야 한다. 학교는 왜 존재하는가. ▣ 김홍제 ◇ 충청남도천안교육지원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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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다시 돌아보는 학교 존재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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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에필로그(주역산책을 마무리하며)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내 나이 50 무렵. 인생의 절반을 넘어선 그때. 그것도 인생의 절정기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다시 일어서기가 어려웠다.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지점에서 내가 잡은 동아줄은 바로 『주역』이었다. 『주역』의 문장들은 고조선 대륙의 벌판을 스치고 지나가는 흙바람 속에 실린 싯귀들이었다. 태고의 바람은 『주역』의 지혜를 싣고 고조선의 광활한 평원을 누비며 비밀을 속삭인다. 『주역』은 변화를 향한 64가지 경로다. 그 경로는 회복을 향한 문학적 생명선이다. 인생에 실패한 젊은이가 변화하는 삶 속에서 복귀로 전환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면 알게 된다. 그 길들이 고전이라는 사실을. 64개의 경로에서 우리는 만물의 상호 연결성과 존재의 순환적 본질에 대한 깊은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주역』은 우리에게 적응성과 탄력성의 중요성을 알려준다. 바람이 갈대를 휘게 하듯이 우리도 도전과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변화를 수용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만 우리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다. 갈등 관계로 뒤엉킨 인생의 고단한 길을 무사히 걸어갈 수 있게 한 동무가 바로 『주역』이었다. 『주역』은 물질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와의 만남이다. 물질적 세계는 8괘 즉 하늘, 연못, 불, 우레, 바람, 물, 산, 땅으로 이루어진 자연 현상이다. 그것들을 겹쳐서 8 × 8 = 64. 64괘로 정신적 세계를 만들었다. 물질에 의미를 부여하면 철학이 된다. 『주역』도 물질적 세계를 먼저 만들고 이어서 정신적 세계로 승화시켰다. 즉 SEIN의 세계(물질적 세계)에서 SOLLEN의 세계(도덕적 의무)로 전환된다. 물질의 세계가 인간의 감각에 의해 뇌 속으로 들어가 의식 작용을 일으켜 정신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하늘, 연못, 불, 우레, 바람, 물, 산, 땅은 물질계를 대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그것들을 바라보는 문화적, 사회적 맥락에 따라 철학적 의미를 가진다. 하여 물적 영역과 영적 영역 사이의 경계에 서서 상호 연결성을 살펴보았다. 경계에 서서 그 너머를 보았다. 『주역』의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면 ‘건곤일희장(乾坤一戱場) 인생일비극(人生一悲劇)’이다. 건괘(乾卦)와 곤괘(坤卦)는 모든 연극을 위해 펼쳐진 무대일 뿐이고, 우리 인생은 그 무대 위에서 연출된 하나의 비극이라는 말이다. 이 칼럼은 물질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의 만남, 그리고 그들 간의 유기적인 연결성에 대한 인사이트를 제공한다. 물질적 세계의 8괘를 시작으로 64괘의 정신적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은 우리가 인생의 여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또한, 『주역』은 우주의 음양 조화를 통해 우리가 자연의 일부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강조한다. 이 칼럼은 우리가 어떻게 환경과 조화롭게 공존하며, 우리의 생명을 순환시키는 데에 필요한 지혜와 미덕을 찾아가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지혜를 통해 우연과 필연, 하늘과 땅, 음과 양, 그리고 모든 삶의 순환적 본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현대인들은 자극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겨 자신을 잊고 산다. 욕망이란 결국 더 자극적인 것을 찾고 즐기는 일이다. 그리고 그 자극은 극단으로 치닫는다. 인간의 마음이 지니는 표준이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그 표준을 지켜주는 것이 바로 『주역』이다. 인간다운 삶의 표준은 자기 자신을 위한 성실함(誠)과 남을 위한 배려(孚)다. 성(誠)과 부(孚)가 주역의 핵심 알갱이다. 이 두 가지를 좌우로 삼아 인생길을 걸어가야 한다. 표준에서 멀어지는 자극적인 욕망으로 인해 샛길로 가는 것이다. 성적 자극, 금전적 자극 등에 의해 정도에서 빗나가는 삶을 살게 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회복할 수 없는 차이가 생긴다. 자신의 삶 자체를 후회하게 된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의 주인공처럼 소설의 마지막에 다락방에 올라 기차 소리가 들려오자 울음을 터트리는 후회의 눈물, 자신이 목표로 한 추상적인 것을 이루려 하지만, 잠깐의 한눈을 팔면 목표는 저만치 물러나고, 시간이 흘러 나 혼자만 경계선 밖에서 경계선 안의 생활을 그리워한다. 그렇게 생은 간다, 봄날처럼. 그렇지만 인생에서 잠깐의 한눈팔이가 문학작품의 좋은 소재가 되고, 그것이 사람을 울린다. 목표가 확실한 사람은 성(誠)과 부(孚)를 가슴에 새기고 실천하면 모두 성공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삶에 사람들은 감동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희생하는 삶에 박수친다. 예수가 그랬고, 간디가 그랬다. 마지막으로, 『주역』은 우리가 앞으로 직면하게 될 많은 과제와 도전에 대한 안내서다. 우리는 이 칼럼을 통해 환경오염, 생태계 파괴, 인류와 지구 생물의 미래에 대한 책임과 역할을 깨달을 수 있으며, 지구와 우주 안의 모든 존재와 함께 공생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주역』은 과거와 미래, 물질과 정신, 음과 양, 인간과 자연 사이의 조화와 연결성에 대한 깊은 철학적 고찰을 제공하며, 우리가 이 세계에서 어떻게 더 나은 생명을 유지할지에 대한 영감을 준다. 이 칼럼은 우리의 삶에 대한 고찰과 탐구를 지속할 가치 있는 동반자다. 의식을 좀 더 확장하여 문학이 바로 우리 인간들의 갈등과 화해를 이야기하는 예술 장르라 할 때 문학작품을 64괘의 렌즈를 통해 살펴보는 것도 매우 뜻깊은 일이라 여겨진다. 그것이 변화하는 세상에 먼지와도 같은 인간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책무일 것이다. 아직도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산티아고 노인의 말이 귓전을 때린다.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어. 죽을 수는 있지만 패배할 수는 없지” 인간의 삶은 실수와 후회로 점철되어 있지만, 시간이 다할 때까지 싸우고 견뎌야 한다. 그것이 삶에 대한 예의다. 『주역』은 묻는다. 바람 같은 인생(人生), 당신이 이 세상에 다녀간 이유는 무엇인가?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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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에필로그(주역산책을 마무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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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교사는 어떻게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되어야 하는가?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한때 ‘세계의 교사 상’을 수상한 케냐 출신의 피터 타비치는 훌륭한 교사가 되려면 “행동을 더 많이 하고 말을 더 적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로서 자기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 철학을 실천하고 있다. 과거, 케냐의 시골 지역에 있는 작은 학교에서 과학, 수학, 물리학을 가르치는 교사 역할을 맡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교육, 지속가능성, 평화에 초점을 맞추는 지역 공동체프로그램에 매월 월급의 80%를 기부했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교사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자라면서 교사로서의 길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 진흙으로 만든 오두막이 학교였어요. 어느 것도 충분치가 않아서, 도서실도 없고, 불을 켤 전기도 없고, 신발도 없고, 심지어는 탄탄한 나무 바닥도 없었어요. 어디나 먼지투성이였어요. 항상요. 우리가 침을 뱉으면 먼지가 가득했죠. 우리가 배우는 모든 것은 우리 앞에 서 있는 선생님들한테서 나오는 것이었어요. 우리는 선생님들께 의지했죠.”(안드리아 자피라쿠 지음, 장한나 옮김 『세계의 교사』) 피터 타비치는 자신을 가르쳐주었던 바로 그 선생님이 되었고, 또 그 이상이 되었다. 그는 여러 동아리를 설립해 학교의 다양한 영역과 더 넓은 공동체에 도움을 주었고, 하나하나 모두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과학 동아리는 2018년에 케냐에서 높이 평가 받는 과학 엔지니어링 대회에 나가 전국에서 손꼽히는 다른 학교들을 제치고, 청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에게 도움을 주는 측정 장치 발명품으로 우승을 했다. 이 동아리는 계속해서 미국에서 열린 국제 대회에서도 실력을 드러내어, 식물로 전기를 만드는 기술로 수상했다. 그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안, 학생 수는 두 배로 늘어났고 학생들의 행동도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이는 그의 향기가 만 리까지 퍼져 나가는(人香萬里) 스승의 표상이자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할 수 있다고 힘을 실어줌으로써 가능했다. 즉, 가능성을 향해 눈을 뜨도록 한 것이다. 또 학생들에게 그치지 않고, 더 넓은 공동체도 눈을 뜰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시대가 바뀌면서 젊은 세대는 교육이 가장 중요한 기회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많은 여자아이를 학교에 나오도록 했다. 이른바 ‘교육무류(敎育無類)’의 실천에 앞장섰다. 지극히 가난한 환경을 극복하고 오늘의 케냐 젊은 세대들에게 수없이 많은 자극과 동기를 제공하여 각자의 위치에서 나름 성공한 사람으로 키운 피터 타비치의 교육관 덕분에, 케냐는 아직도 선순환을 이루어 곳곳에서 제자들이 인재로서 살아가고 있다. 이는 그의 교육자로서의 헌신과 봉사의 삶에서 소중한 결과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사람을 키우고 공동체의 발전을 이끄는 교사로서의 역할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증명해 보였다. 그로 인해 교사는 공인(公人)으로서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큰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피터가 교육자로서 걸어온 삶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오늘날 우리의 교육 환경은 과거 케냐처럼 빈곤의 그늘에 가려 어렵게 생활하던 시절에 비해 물질적, 사상적으로 부족함이 없고 또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진취적인 의식과 성장 동력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기러기 아빠’를 탄생시킨 높은 교육열의 민족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밑바닥에 존재하던 그야말로 순수한 배움과 가르침 즉, 교육에의 열정과 신념, ‘배워서 남 주자’는 교육 가치는 얼마나 우리 사회에 지속가능한지 이 시대는 끊임없이 성찰하고 반성해야 할 때다. ‘영감을 불어 넣는다’는 영어 inspire는 원래 ‘숨을 들이 마신다’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교사는 바로 학생에게 “성장의 공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왜냐면 교사는 학생들이 살아가고 성장할 수 있는 공기를, 생명의 힘을, 희망의 메시지를 불어 넣어 주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학생을 만나는 모든 교사는 그들에게 낙관주의와 열정, 연대와 협력, 창의력과 상상력, 나눔과 배려, 봉사와 헌신 등 핵심 교육 가치들이 흠뻑 스며들도록 해야 한다. 이 시대의 교사는 단순히 과거에 교육받은 것을 뛰어 넘어서 미지의 세계로 발을 내딛는 선구자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되어야 할 것이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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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교사는 어떻게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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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마음에 성(誠)이 없으면 대축해도 허망하게 끝나기 쉽다(산천대축괘)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산천대축괘는 위에 산(☶)이 있고, 아래에 하늘(☰)이 있는 모양이다. 하늘이 산 속에 온축되어 있는 모습이다. ‘대축(大畜)’의 ‘축(畜)’은 玄(실타래) + 田(농작물)을 쌓아둔다는 말로 ‘크게 축적케 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쩨쩨하게 살지 말고 커다란 스케일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자칫 허망해지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마음에 ‘성(誠)’을 지니지 못한 채 대축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재물을 쌓으려 하지 말고, 덕성을 온축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내용의 문학작품이 바로 1925년에 출판된 F.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의 소설인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다. 『위대한 개츠비』는 소설의 주인공 제이 개츠비가 아메리칸 드림을 구현한 인물이기 때문에 대모험의 삶과 관련이 있다. 그는 모험과 야망의 삶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개츠비의 초기 생애는 수수께끼에 쌓여 있지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유하고 성공적인 사업가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의 부를 이용하여 그의 인생의 사랑인 데이지 뷰캐넌을 되찾는 가장 큰 소망을 추구한다. 데이지를 쫓는 개츠비는 자신의 저택에서 화려한 파티를 열고 자신의 부와 성공으로 그녀에게 깊은 인상을 주려고 하는 대모험을 시작한다. 『위대한 개츠비』는 열정과 결단력으로 자신의 꿈을 좇아 위험을 무릅쓰고 최선을 다해 인생을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큰 모험의 삶과 관련이 있다. 개츠비는 부와 축적의 동기가 대동 사회를 열어가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과거 자신의 사랑이었던 데이지 뷰캐넌을 되찾는 것이었다. 그것도 조직범죄와 연루된 대축이었다. 개츠비의 마음속에 ‘성(誠)’ 없었다. 성(誠)이 없는 결과는 비극이다. 개츠비의 삶이 모든 외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으로 끝나는 소설의 결말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그의 부와 그가 창조한 거창한 인물은 그를 구원할 수도 없고 그가 추구하는 행복을 가져다줄 수도 없다. 그가 깊은 인상을 주려고 노력한 사회에서 크게 무시된 그의 죽음은 그의 노력의 궁극적인 허영심과 불성실한 기초 위에 세워진 삶의 공허함을 상징한다. 개츠비의 불성실함과 피상적인 이상에 대한 집착은 실패로 이어지며, 이는 진실한 마음 없이는 진정한 성공과 성취를 이룰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면 부자의 성(誠)은 무엇인가? 다름 아니라 봉사와 기부다. 그리고 그것을 몸소 체감하여 육화시키는 것이다. 성실함을 바탕으로 문명의 편견을 넘어 인간의 보편에 도달해야 한다. 산천대축괘의 93효사에도 매일 수련하고 연마해야만 모험을 감행하여 앞으로 나아가는데 실패하지 않으리라고 말하고 있다. 92효사에도 수레의 바퀴살이 빠졌다. 바퀴살이 없으면 수레는 굴러가지 않는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국민이 없으면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군자(리더)는 국민을 잘 살게 만들어야 한다. 재물이 많으면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도와야 한다. 조선시대 경상도 지방에 조씨라는 아주 짠돌이가 살았는데, 재벌이었다. 그런데 평소 먹는 음식도 평민들이 먹는 음식으로 매일 똑같은 반찬만 먹는 짠돌이였다. 마을에 산사태가 올 것을 미리 안 조씨는 자기집 쌀 창고를 불태워 마을 사람들을 대피시켰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기가 그동안 모았던 쌀을 내주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좋은 사례다. 그 외에도 경주 최부잣집 이야기처럼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며 삼백 년을 넘는 시간 동안 이웃을 위해 곳간 문을 활짝 열였던, 그리고 그 때문에 행복했던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는 산천대축괘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부의 축적은 도덕적 의무를 다해야 정당성을 확보한다. 자신들의 삶의 질을 높여 준다. 철저하게 근검 절약했고, 나라와 이웃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썼던 경주 최부잣집 이야기는 세계 역사를 통틀어 삼백 년이나 부를 유지했던 가문은 거의 유일하다. 부불삼대(富不三代)란 말이 무색할 만큼 졸부가 아닌 명부의 면모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최부잣집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단순히 한 번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무려 300년 동안 유지했던 것이다. 그것은 매일 수련하고 연마했다는 말이다. 산천대축 효사 93을보면 “한 발자국 물러나 매일 수련을 하라. 수레몰이를 연습하고 호위무술을 연마해라. 실패하는 일이 없으리라”고 했다. 우리는 왜 삼성가나 현대가를 보면 욕부터 하는가. 그들이 졸부라서 그런가. 아니다. 그들은 수레로부터 빠진 바퀴살을 찾아 넣는 연습과 훈련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을 보면 영국 국민이 왕실에 존경심을 표하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영국 왕실은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정신을 몸에 체득하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지원하여 목숨을 걸고 싸우고, 늘 봉사와 기부를 생활화 한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을 체화·육화될 때까지 연마하고 수련한다. 기쁜 대축의 마음으로 대동 사회를 열어가려면 매일 수련과 연마가 이루어져야 한다. 산천대축괘의 효사를 보자. 지(地)의 자리다. 자연과 벗삼아 소몰이하던 목동이 자라 청년이 되었다. 그런데 수도권 지역에 개발이 되어 아파트를 짓고 도로를 놓고 하는 현대화의 바람이 불었다. 청년의 집과 땅 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 결국 청년은 졸부가 되었다. 인(人)의 자리다. 그 청년은 돈방석에 앉았다. 내심 그동안 해보지 못한 일들이 생각났다. 도박, 여자, 마약 등을 일삼으며 아주 불성실하게 살았다. 그렇게 인생을 낭비했다. 그 결과 가족, 친지, 친구와도 헤어지고 거리를 헤매이는 노숙자가 되었다. 그는 졸부가 되었을 때부터 성실과 중부를 버렸다. 그리고 유혹을 취했다. 목동으로 자랄 때 가졌던 성실함과 자연이 베풀어 준 중부의 마음을 내팽개친 결과였다. 천(天)의 자리다. 늙으막에 자신의 인생을 반성하며 살아야 한다. 다시 성실함과 중부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 보아야 한다. 욕심을 버리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반성하며 삶을 살아야 한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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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마음에 성(誠)이 없으면 대축해도 허망하게 끝나기 쉽다(산천대축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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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교사의 정치기본권 보장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교사에게서 교권은 고사하고 인권도 보장이 안 된다는 자조 섞인 말을 듣는다. 청운의 꿈을 안고 들어온 교직에서 떠나고 싶다는 젊은 교사의 목소리도 들린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을 수 없다. 교사가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자존감마저 없어진다면 사명감이 생길 수 없다. 입시, 경쟁, 법적 고발, 민원에 교육 현장은 갇혀있고 의견수렴은 형식적이었다. 초중등 교사는 정치기본권을 제한받고 있다. 63년이면 연필 문화에서 스마트폰 문화로 바뀔 만큼 긴 시간이다. 통제 당시는 군사 쿠데타 이후로 정치적으로 예민한 국민통제시대였다. 교육현장과 사회, 경제도 괄목상대할 만큼 변화하였다. 교육을 하는 학교는 가장 민주적 기제가 작동해야 함에도 정권의 휘둘림에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교육백년대계는 먼 이야기이다. “교사의 교육활동 보장과 공교육 정상화를 위한 교원의 정치적 기본권 보장의 목소리에 이제 국회와 정부가 응답해야 한다.” 백승아 국회의원이 지난 7월에 교원 정치기본권 보장을 위한 7건의 법안을 발의하면서 한 발언이다. 교원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로 60년 이상 정치적인 기본 권리에서 벗어나 있다. 50만 현장 교사의 교육 전문성이 국가 교육정책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OECD 소속 38개 나라 중 교사에게 투표권 이외의 대부분의 정치적 기본권을 보장하지 않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라고 알려져 있다. 미국, 프랑스 등 OECD 국가에서는 교사가 출마를 위해 사직서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전국 유·초·중등·특수 교원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에서 응답한 교사의 98.2%가 '교사의 목소리가 국가 정책에 반영되지 않는 주된 이유는 정치기본권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지금 학교는 정치에서 온전하게 자유로워졌는가? 교육계는 정치적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입시제도, 교과서, 미래교육에서 실질적으로 정치적인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교육공무원이라는 이유로 더구나 정치적 중립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기본적인 권리를 침해당하고 있다. 정치적 중립이 문제가 된다면 캐나다의 경우처럼 정치적 중립에 대한 법률을 만들어 적용하면 된다. 차 사고가 우려되어 아예 운전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비이성적 태도이다. 그러한 위험성을 미래 예견하고 법을 만들고 적절한 제재를 하는 것이 법과 정치가 할 일이다. 60년이 넘도록 정치 청정지역으로 남은 교사와 교육계는 지금 무기력하다. 정치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은 민주주의 시대에서 중요한 권리를 상실한 것이다. 문제는 교육에서 정치를 배제하면서 정당한 국민 청원이나 국민 발의도 불온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풍토가 되었다는 것이다. 정치는 국민의 세금으로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올바른 정책을 실현하는 일이다. 교원에 대한 권리 박탈로 교육을 위한 정당한 발언이나 의견에도 힘이 실리지 못하고 있다. 언제까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시대적 역행을 계속할 것인가. ▣ 김홍제 ◇ 충청남도천안교육지원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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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교사의 정치기본권 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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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우리 교육이 배출한 엘리트들의 ‘공부 머리’와 ‘일 머리’ 유감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왜 대한민국 교육이 배출한 대다수 엘리트들은 ‘공부 머리’와 ‘일 머리’가 크게 다른 것일까? 매번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입각하는 국무위원들을 비롯한 장⋅차관급 엘리트들은 대한민국 학벌(學閥)의 정점에 있는 S대 출신들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S대 법대 출신인 현 대통령조차 인사를 단행할 때마다 대상의 인사들을 놓고 첫 마디가 “어느 대학 출신인가?”라고 물을 정도로 기본부터 특정 대학 출신들이다. 특히 S대 법대 출신의 전⋅현직 법조인(판⋅검사⋅변호사)들이 집중적으로 발탁되는 이유다. 이들은 대한민국 교육이 낳은 ‘공부 머리’가 탁월한 엘리트들이다. 대개는 예비고사 출신인 60대 이상과 학력고사 출신인 50대 이상으로 고교 재학 당시엔 뛰어난 학력(學力)을 소유한 ‘공부의 달인’으로 불렸다. 그들은 대학 재학 중에 사법고시를 통과하고 각종 국가고시에서 두각을 나타낸 영재들이다. 문제는 국민들이 그들에 거는 기대만큼 ‘일 머리’에는 많은 부실함과 도덕적, 양심적인 인성조차 결여상태를 보인다는 점이다. 특히 그들은 집단 토론문화에 약하고 상명하복식 명령체계, 권위의식에 매우 익숙하다. 필자는 1983~1985년 사이 26개월 동안 미 육군(ARMY)에 증원된 한국군, 소위 카투사(KATUSA)로 근무한 적이 있다. 매번 중대, 또는 대대 단위에서 부대의 현안(이슈)을 놓고 전체 협의(미팅)를 할 때 비록 그들의 상당수가 고졸의 학력을 가진 지원자들이었지만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발표하며 진지하게 토론하고 경청하는 문화에는 깊은 울림과 감동이 있었다. 그때마다 “이것이 세계 최강대국의 힘이구나”하며 한껏 부러워했다. 그것은 일방적인 상명하달의 지시나 명령이 아닌 민주적인 방식의 소통과 의결에 따라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는 응집력이자 규율의 정착된 모습이었다. 우리는 집단의 토의⋅토론 문화에 한없이 약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주입식 암기 교육에 의해 대화와 토의⋅토론 없이 일방적인 각자도생의 경쟁교육에 의해 길들여진 결과다. 특히 우리 교육이 낳은 엘리트들은 대개 성실한 모범생들이나 그들은 그저 교사가 가르치는 내용을 토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메모해서 그대로 시험지에 옮겨 우수한 성적을 거둔 이른바 ‘공부의 달인’들이다. 한때 널리 소개된 S대 최우등 졸업생들의 비결은 바로 교수의 설명을 하나도 흘리지 않고 통째로 메모하고 암기해 거둔 결과라는 사실에는 씁쓸한 마음마저 들었다. 여기엔 소위 창의성과 상상력, 자기 생각과 의견이 개입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직도 우리 교육이 배출하고 있는 엘리트들의 내면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교육의 실상이다. 그것도 부족해 이른바 대학수학능력시험은 기계적으로 주어진 시간 내에 빠르게 문제풀이 기술을 습득한 학생만이 고득점을 할 수 있는 최악의 평가 시스템이다. 매년 수능에서 발군의 성적을 거둔 졸업생들은 자신들이 고교 시절에 받은 교육은 “그저 시험문제풀이 기술을 배워 익숙하게 풀어낸 것밖에 없다”는 절망적인 선언을 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은 ‘공부 머리’와 ‘일 머리’가 따로따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런 결과의 배경은 결국 출세와 성공 지향의 맹목적인 교육가치가 우리 교육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배워서 남 주자’는 교육가치는 이제 ‘배워서 남을 지배하고 잘 살자’는 가치로 바뀌었다. 이는 S대 법대 출신들이 국가의 주요 요직에 대거 포진해 있지만 그들의 ‘일 머리’는 ‘공부 머리’에 한참이나 못 미치는 것으로 입증된다. 그것은 ‘무엇이 되고자 하는 것’에 몰입된 까닭에 ‘어떻게 살 것인가’는 아예 무시하거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대통령이나 장관, 고위직에 오르는 것이 가문의 출세와 영광을 드러내는 것보다 먼저 이 나라를 어떻게 경영하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어떻게 봉사하며 이타적인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개인철학을 확실히 정립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교육은 엘리트들이 이 세계를 더 살기 좋은 곳(better place)으로 만드는 이타적인(beneficial) 존재로 살아가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것이 우주에서 바라본 ‘창백한 푸른 점’에 지나지 않는 하나 밖에 없는 이 지구를 위한 최소한의 의무와 책임이라 믿는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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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우리 교육이 배출한 엘리트들의 ‘공부 머리’와 ‘일 머리’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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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바람 따라 춤을 추는 나무(중풍손괘)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중풍손괘는 위와 아래에 공통으로 바람(☴)이 있는 모양이다. 중풍손은 바람의 특징 중 하나인 무질서한 흐름과 나무의 겸손한 모습을 상징한다. 풍은 나무와 바람의 상징이다. 이것이 두 번 겹쳤다. 나무에 바람이 불어 마치 나무가 춤을 추는 모습이다. 바람의 특징은 구석구석 아니 미치는 데가 없이 분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바람은 신바람이다. 옛 임금들이 쓰는 왕관에도 나무 모양의 장식이 3개에서 5개 정도가 조각되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을 시각적으로 표현해 낸 예술작품이다. 또 이 왕관을 쓴 임금이 걸을 때 짤랑짤랑하는 소리를 낸다. 바로 이것이 바람의 청각적 표현이다. 임금이 정치를 할 때 바람이 불어 나무가 춤을 추듯이 그렇게 백성들을 잘 살게 만들어 준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중풍손(重風巽)’의 ‘손(巽)’은 갑골문에 보면 위에 있는 쌍의 뱀사(巳)자 모양은 나중에 생긴 것이고, 원래 두 사람이 춤을 추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손(巽)자 아래에 있는 함께 공(共)자는 제단을 뜻했다. 그것이 세월이 지나자 원래의 의미는 사라지고 부수자로 글자를 만들었던 『설문해자』에 와서 모양이 변조됐다. 따라서 중풍손은 제단 위에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나무’의 모습이다. 오늘날 무대 위에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모습이다. ‘받아들이다’의 의미도 지녔다. 또한 손괘는 겸양・겸손을 나타낸다. 종교는 신과 인간의 소통이다. 임금과 백성의 소통은 정치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잘 아는 훈민정음의 창제도 결국 소통의 문제 해결이었다. 옛날에는 백성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정책의 변화가 있는지도 모르고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상황이 많았다. 정보가 소통되지 않았다. 그래서 세종대왕도 훈민정음을 제정 반포했다. 세종대왕은 백성들을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나무처럼 생각했다. 당시의 어문 생활은 사대부 양반층의 한문과 서리인 중인층의 이두로 나누어진 이원 체제였다. 따라서 왕의 어명이 백성들에게 제대로 전달되기 어려웠고, 백성들도 양반들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어서 매우 답답했다. 세종의 ‘신명행사(申命行事)’ 로 문자와 철자법이 완성되었다. 한글 28자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두루 쓰게 하여 소통의 나라가 될 수 있게 하였다. 소통의 나라가 되면서 점차 민주주의라는 의식이 쌓이게 되었다. 한글은 자음은 사람의 발음기관을 본 떠 만들고, 모음은 천지인 삼재(三才) 즉 ・(하늘은 둥글다), ㅡ(땅은 평평하다), ㅣ(사람은 서 있다) 는 3재를 기초로 적절히 조합하여 초출자(ㅏ, ㅓ, ㅗ, ㅜ), 재출자(ㅑ, ㅕ, ㅛ, ㅠ) 등을 만들었다. 중풍손괘와 관련있는 문학작품은 김수영의 시 「풀」이다. 김수영은 신동엽과 더불어 1960년대 한국시에 있어 쌍두마차로 평가된다. 투철한 역사 인식과 건강한 민중성에 기초를 둔 신동엽에 비해, 김수영은 모더니즘 속에서 자라난 모더니즘의 비판자로서 4.19를 계기로 강한 현실 의식에 바탕을 둔 참여시에 가담하였다. 그러한 맥락 위에 놓인 작품이 바로 「풀」이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 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누구나 풀의 움직임을 관찰한 적이 있겠지만 바람이 불면 풀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땅에 몸을 누인다. 그런데 바람이 지나가면 언제 그랬나 싶게 풀은 다시 몸을 일으킨다. 바람이 불 때만 잠시 몸을 누일 뿐이고 풀은 다시 일어서며 생기발랄한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이렇게 풀은 바람과의 관계 속에서 눕고 일어서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이러한 풀의 모습에 착안하여 시인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민중들의 생명력을 노래하고 있다. 즉 ‘풀’이라는 연약하고 수동적인 듯한 존재를 통해 고통스런 현실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잃지 않고 강인한 생명력을 발산하는 민중들의 모습을 본다. 『논어』에도 “통치자의 덕은 스치는 바람과도 같고, 백성들의 덕은 풀과도 같다. 풀 위에 바람이 스치면, 풀은 누울 뿐이로다”라고 말하고 있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우선 명령을 계속해서 바람처럼 발하여 아니 미치는 곳이 없이 충분히 숙지시켜야 한다. 다음에 실제로 그 명령을 시행하는 사업을 행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다. 바람이 나무의 이파리까지 구석구석 부는 것을 보고 ‘신명행사(申命行事)’하라는 말이다. 즉 명령을 계속해서 바람처럼 발하여 아니 미치는 곳이 없이 충분히 숙지시켜야 하고, 실제로 그 명령을 시행하는 사업을 행하여야 한다. 민주주의가 보편화 되면서 민중들의 힘은 커진다. 순자의 ‘군주민수(君舟民水)’다. 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즉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다. 그런 민중의 힘을 노래한 작품이 「풀」이다. 중풍손괘는 결국 흉으로 끝난다. 고정된 가치관에 복속되면 흉운이 된다. 변통없는 진리는 없다. 고정관념에 딱딱해지면 굳은 바위가 된다. 우리의 뇌를 항상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야 한다. 겸손은 유순하다는 말이 아니다. 유순하면 우유부단한 인간이 된다. 우유부단한 인간이 모든 것을 망친다.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다. 겸손함이 극에 달하면 강건함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세종도 겸손하고 유순했지만 백성을 위한 일에는 강건했다. 최만리 등 사대부의 훈민정음 반대 상소에도 굴하지 않고 훈민정음을 제정하고 반포했다. 이때 만약 굴복했다면 오늘날 지식 정보화 시대에서 한글 없이 헤쳐나갈 수 있었을까?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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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바람 따라 춤을 추는 나무(중풍손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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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생명의 축복은 어디에 있나(중택태괘)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중택태괘는 위와 아래에 공통으로 연못(☱)이 있는 모양이다. 연못 두 개가 나란히 있는 모습이다. 두 개의 연못은 지하 수맥을 통하여 연결되어 있고 서로의 수량을 도와주고 있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붕우들과 더불어 앉아 서로 강론하고 서로 학습하고 서로의 배움을 돕는다.’고 되어 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관계 즉 연결함으로써 의미를 갖는다. 인간 존재의 즐거움도 연결과 교섭에 있다. 이것은 공감, 협력, 상생을 통해 그 의미를 더욱 확충한다. 중택태(重澤兌)의 ‘태(兌)’는 ‘八+口+人’의 회의자다. 兄은 ‘사람의 입’이고, 八자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숨’이다. 그래서 ‘신적인 떨림’의 엑스타시 상태의 신기(神氣)의 모습이다. ‘들어가다(入)’의 의미다. 들어간다는 말은 단순히 형이상학적 관념적 개념과는 다르다. 느낌의 세계에서는 들어감이란 실제로 물리적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수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태(兌)가 들어가는 한자어로는 說, 悅, 脫이 있다. 설(說)은 말의 주고 받음에서 느끼는 즐거움이다. 혼자서 말을 하면 아무런 즐거움이 없다. 말을 주고 받음으로써 서로의 기쁨이 되는 것이다. 배움에도 이 괘가 관련이 있다. 배움이라는 것도 스승이 말을 하고 제자가 말을 받음이다. 또한 붕우끼리 말을 교환하면서 서로 배운다. 연결이다. 서로에게 들어감이다. 열(悅)은 붕우강습(朋友講習)을 말한다. 즉 공부를 친구와 더불어 함께 하는 즐거움이다. 공부를 할 때 독학하면 안 된다. 독학은 배움이 고루하고, 듣는 것이 너무 적어 자칫 왜곡과 망상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탈(脫)은 자기를 버린다는 의미다. 무아나 몰아를 말한다. 신과의 소통은 일종의 엑스타시 상태다. 우리가 흔히 신기가 있다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상태를 말한다.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 즉 무아(無我)와 몰아(沒我)는 즐거움을 준다. 내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기쁨이다. 중택태는 인간 존재의 즐거움에 대한 괘이기 때문에 중택태 괘사에도 ‘형(亨), 이(利), 정(貞)’이 나와 있다. ‘원(元)’만 없다. 존재의 기쁨, 생성의 기쁨이다. 괘의 격이 높다. 생명의 축복은 공감, 협력, 상생을 통해 존재한다는 중택태괘의 주제를 잘 보여주는 문학작품이 있다. 1960년에 씌여진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라는 성장 소설이다. 원래 앵무새가 아니라 ‘흉내쟁이 자빠귀’라는 새인데, 이 새는 다른 새들의 소리를 잘 흉내낸다는 것이다.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새여서 ‘앵무새’라는 이름으로 번역했다. 작품의 배경은 1930년대의 경제 대공황이다. 미국은 대공황의 여파로 같은 일자리를 두고 백인과 흑인이 서로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 인종 차별의 골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작품의 배경인 메이콤은 1930년대 미국 남부의 축소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작품의 작가인 넬 하퍼 리는 앨라배마 주 먼로빌에서 1남 3녀의 막내딸로 태어난다. 이 작품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스카웃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루이즈 핀치가 바로 작가 자신이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스카웃이 초등학교 입학하기 직전부터 초등학교 2학년까지의 3년 동안에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다. 그 3년이 물론 육체적으로도 성장하지만, 무엇보다 정신적 성장과 영혼의 개안을 가져온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변호사인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의 역할이 무척 크다. 그리고 스카웃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 안내자로 역할을 한다. 어떻게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나? 바로 남에 대한 공감, 협력, 상생을 통해서다. 이것은 중택태괘의 주제와 일치한다. 먼저 공감이다. 애티커스 핀치는 스카웃에게 “그 사람의 피부 속으로 들어간 그 안에서 돌아다닐 때까지 말입니다.”라고 말하는 결정적인 장면이 그렇다. 이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례 중 하나는 스카웃이 처음에는 아이들에게 두려움과 미스터리의 인물이었던 은둔 이웃인 부 래들리(Boo Radley)와의 상호작용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스카웃은 부의 관점(그의 외로움, 수줍음, 핀치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열망)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그를 두려워하는 것에서 그에게 공감하는 것으로 옮겨진다. 이러한 공감은 평화로운 공존으로 이어지며, 부는 스카웃과 그녀의 남동생 젬을 위험에서 구하게 된다. 다음으로 협력이다. 톰 로빈슨의 재판은 협력이라는 주제를 탐구하는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이다. 메이콤의 뿌리 깊은 인종 차별로 인해 법률 시스템이 톰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티커스 핀치는 톰과 그의 가족이 패할 가능성이 있음을 알면서도 진실성과 헌신으로 그를 대표하여 협력한다. 법정에서의 묵묵한 존중 표시와 재판 후 음식 선물로 상징되는 애티커스와 아프리카계 미국인 공동체 간의 협력은 일종의 연대와 상호 지원을 보여준다. 이러한 협력은 법정을 넘어 확장됩니다. 핀치 가족의 가정부인 캘퍼니아는 흑인과 백인 공동체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며 스카웃과 젬을 교회로 데려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공동체 지원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협력 감각은 인종 차별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더라도 변화와 상호 존중의 씨앗을 심는, 인종을 초월한 더 깊은 이해와 존중을 촉진한다. 마지막으로 공존이다. 특히 소설의 결론은 부 래들리라는 인물을 통해 공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한때 두려움과 오해를 받았던 부는 핀치 아이들을 조용히 지켜보며 온화하고 보호적인 인물로 밝혀진다. 부가 밥 이웰에게서 스카우트와 젬을 구해내면서 두려움이나 편견이 아닌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공존의 힘을 보여준다. 결국, 밥이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밥 웰을 죽인 후 부가 자신의 칼에 쓰러졌다고 말하는 데 동의함으로써 부를 대중의 눈으로부터 보호하기로 한 커뮤니티의 결정은 자비와 존경의 행동이었다. 이는 취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사생활을 존중하며, 차이에 관계 없이 모든 사람이 지역사회에서 자리를 갖는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공존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따라서 『앵무새 죽이기』는 도덕적, 공동체적 번영으로 대표되는 삶의 축복이 공감과 협력, 공존을 통해 달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애티커스 핀치나 스카우트처럼 이러한 가치를 구현하는 캐릭터는 개인적인 성장을 경험하고 더욱 공정하고 이해심 많은 커뮤니티에 기여한다. 편견과 불의가 만연한 사회에서도 소설은 이러한 가치가 진정한 번영, 평화 육성, 상호 존중, 인류애 공유로 이어질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즐거움이란 마음속으로부터 솟아나는 만족감이다. 만족한 마음이 나란히 있다는 말은 서로 공감하는 마음의 연결을 의미한다. 공감으로 연결하는 마음은 협력할 수 있는 마음이다. 이렇게 즐거움에서 출발하는 노력, 그것은 한 사람의 힘만으로도 이미 사회를 움직이고 국가를 움직이고 나아가서는 천하를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하물며 다수의 이러한 마음들이 공감으로 연결되어 어느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협력할 수만 있다면 인간의 어떠한 일도 어려운 것이 없다. 인간 사회에 있어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복잡하다. 인간은 하루도, 또 누구도 고립하여 살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부단히 서로 접촉하고 교섭을 가지고 어떠한 관계로 서로 연결된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관계가 모두 유쾌하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사회 구조의 고도화는 어느 사이에 인간을 집단 속의 개인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그들 상호 관계는 거대한 기계의 회전 속에 하나하나의 톱니바퀴로서의 연결이 강요되는 경우가 더욱 많다. 그것은 연대감, 의무감, 중압감을 느끼게 하고 어쩔 수 없는 체념을 가지게 하는 관계다. 인간은 점점 노예로 변해 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즐거운 협력이란 꿈은 이 이해관계 앞에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가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은 기쁜 마음을 서로 연결하며 살 수 있을까? 그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도자의 인격이다. 지도자는 외유내강(外柔內剛)하는 미덕을 갖추어야 하고, 스스로 선두에 서서 실천하는 선구자적인 용감성이 있어야 한다. 외유(外柔)한다는 것은 겸손한 태도와 몸에 밴 예절과 수양에서 오는 세련됨으로, 남과의 사교를 부드럽고 선의에 찬 분위기로 이끌어 가는 것을 말한다. 내강(內剛)이란 것은 마음 속에 바르고 선한 것에 대한 부동의 신념이 있어서 한결같이 의젓하여 변함이 없음을 의미한다. 남을 즐겁게 하려면 먼저 자신의 마음이 즐거워야 한다. 매슬로우(Meslow)의 욕구 5 단계설을 무시하고서라도 잠깐의 쾌락적 즐거움은 진정한 즐거움이라 보기 어렵다. 선두에 서서 실천한다는 것은 진정 남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남의 마음이 자기의 마음을 따라오게 할 수 있는 길이다. 자신이 진정 즐거워하는 마음이라면 남도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따라오게 된다. 『맹자』에 ‘여민동락(與民同樂)’이라 하였으니, 언제나 백성을 먼저 기뻐하도록 해주면, 백성이 자기의 수고로움을 다 잊어버리고 나라를 위해 힘껏 일하고, 어려운 일에 임금이 솔선수범하여 뛰어들면, 백성은 죽음을 불사하고 앞장서서 뛰어든다. 그래서 백성들이 모두 권장할 만한 일이 된다. 중택태괘는 공감하고 협력해서 상생하는 괘다. 『앵무새 죽이기』란 작품은 제목이 큰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애티커스는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엽총을 사주면서 다른 새를 죽이는 것은 몰라도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된다”고 말한다. 다른 새들과 달리 앵무새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줄 뿐 곡식을 먹거나 창고에 둥지를 트는 등 해를 끼치지 않는다. 인간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새를 죽이는 것은 죄가 된다는 것이다. 부 레들리나 톰 로빈슨은 바로 앵무새와 같은 인간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데도 다른 사람들의 편견이나 아집 때문에 고통을 받고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 『앵무새 죽이기』는 스카웃이 숙녀가 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깨달아가는 과정을 다룬 성장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첨가하자면 작품의 처음 배경이 여름이었는데, 작품의 후반부에 와서는 가을이 중심적인 시간적 배경이 된다. 가을은 조락과 소멸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성숙과 결실의 계절이기도 하다. 하퍼 리가 문학적 장치를 아주 치밀하게 배열해 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을과 더불어 스카웃은 비로소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다. 중택태괘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도 계절의 변화처럼 정신적으로 성숙하는 계기가 되는 것은 생명의 축복은 공감, 협력, 상생의 길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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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생명의 축복은 어디에 있나(중택태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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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불법 합성물 딥페이크 범죄에 대한 교육의 책임은 무엇인가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딥페이크 범죄가 떠오르고 있다. 뉴스는 의료대란보다 즉각적이고 요란하다. ‘한국, 딥페이크 음란물 취약국 1위’, ‘딥페이크 성착취물 등장 53%가 한국인’, ‘딥페이크 성범죄 피해자 60%가 미성년자’, ‘가해자도 피해자도 10대’ 이런 기사 제목이 마른 벌판에 들불 퍼지듯 불붙고 있다. 한국이 세계 1위라는 것과 10대가 주축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딥페이크'는 '딥 러닝(deep learning)'과 가짜를 의미하는 '페이크(fake)'를 합쳐 만든 조어다. 딥페이크 기술은 더욱 범위를 넓혀가며 기승을 부릴 것이다. 이를 막는 인공지능 기술이나 법적 대응도 함께 발전하겠지만 한계는 있을 것이다. 문명의 이기가 인간을 해치는 도구가 될 때 그것은 생명을 위협하는 총기류와 같게 된다. 위험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사태는 예견된 것이다. 교내방송을 통한 10분 안팎의 예방교육으로 인성교육과 성교육이 해결되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인간다움을 상실하고 상대를 무너뜨려야 하는 상대평가와 경쟁교육 속에서 예견할 수 있는 재앙이다. 인간 존엄성 침해를 ‘장난’이나 ‘호기심 대상’으로 여긴다면 생명에 대한 침해가 되는 날도 멀지 않다. 상대를 인격체로 대한다면 딥페이크는 있을 수 없는 사건이다. 처벌 강화, 예방 교육이라는 원론적 방안은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이 문제가 인간에 대한 철학적 인식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안은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이다. 학교에서 토론, 행사, 발표, 교육과정을 통하여 인간 존중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을 실현해야 한다. 이는 애초에 교육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교육덕목이었다. 학교는 ‘인력사무소’ 역할을 그만두어야 한다. 인간적 품위를 지키고 민주적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기본인성과 철학적 기반교육을 학교가 강화해야 한다. 인성의 뿌리가 썩어가고 있는 것이 학교현장의 현실이다. 소수에게 필요한 심화과목은 선택적이어야 한다. 다수에게는 남을 배려하는 인성과 철학적 기반의 독서토론과 체력단련을 위한 운동시간과 집단협력을 위한 다양한 캠프 활동이 필요하다. 이 난국을 해결할 중심은 교육부, 국가교육위원회, 대통령이다. 하지만 이 중심주체는 사회적 합의에 기반한 철학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단순히 킬러문항을 없애고 입시과목을 이리저리 재배치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많은 국민이 한국교육에 진취적 비전이 필요하고 미래사회에 대한 거대한 담론이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하고 있다.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에도 학교폭력 건수는 오히려 증가했다. 타인을 인격체가 아닌 ‘놀이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학교폭력과 일맥상통한다. 왕따를 하거나 몰래카메라를 설치하는 범죄도 마찬가지다. 모습만 다를 뿐이다. 딥페이크도 놀이가 아니라 심각하고 중대한 범죄임을 분명하게 각인시켜야 한다. 사람은 어떤 상황에도 도구가 될 수 없다. 교육이 인간존중이라는 본래의 길에서 벗어나면 길을 잃게 된다. 적대적 불신관계에서 벗어나 신뢰와 공감으로 행복한 인격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에 교육 관계자 모두가 책임감을 느끼고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 김홍제 ◇ 충청남도천안교육지원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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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불법 합성물 딥페이크 범죄에 대한 교육의 책임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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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다시금 청소년의 가슴에 ‘큰 바위 얼굴’을 품게 하자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청춘,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이 말은 성인이면 누구나 그 시기를 거친다. 청소년의 특징 중 하나는 타자에 대한 관심이 증폭이다. 특히 자신이 닮고자 하는 사람을 대표적 이미지로 삼거나 롤모델로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이는 꿈 많은 청소년기에 나타나는 표징이다. 그러나 요즘은 꿈이 없고 심지어 꿈꾸기가 두렵다고 말하는 청소년들이 많다. 이제 그들에게 다시금 소설가 나다니엘 호돈(1804~1854)의 <큰 바위 얼굴>을 소환할 필요가 있다. 특히 지금처럼 우리 사회에 뜨끈한 아랫목과 같은 스승이나 사회의 사표가 될 만한 어른이 없는 시대는 더욱 그렇다. <큰 바위 얼굴> 주인공 어니스트(Ernest)는 올곧고 근면하며 자비로운 성격을 가진 캐릭터로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큰 바위 얼굴’의 전설을 듣고 자란다. 그러면서 그를 닮은 위대한 인물이 나타나기를 흠모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 대한 실망이 커지는 가운데 어느 순간, 자신이 그 모습을 닮아가는 것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이 소설은 사람은 자신이 가슴에 품고 있는 위인의 모습으로 자신도 모르게 닮아가고 성장하며 성숙해지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 교육에 시사할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누구나 꿈꾸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사람은 청소년기에 꿈꾸고 소망하는 인물로 변모되어 간다. 이는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꿈의 실현(R=VD)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어려서부터 각자의 마음속에 생생하게(Vivid) 꿈을 꾸면(Dream) 실현된다(Realization)는 것이다. 특히 마음에 소중히 간직한 인물은 개인의 성장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살아있는 교육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청소년들이 닮고 싶은 역사상 또는 현실의 ‘큰 바위 얼굴’은 누구일까? 필자는 몇 해 전에 학생들에게 3가지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누구를 가장 닮고 싶습니까? 여러분의 꿈을 이루는데 롤모델이 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가장 좋아하거나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이에 학생들(응답자 40명)의 반응은 역사 속의 인물로는 김구, 이순신, 마하트마 간디, 마더 테레사, 비스마르크 등이었으며 현실 속 인물로는 스포츠 스타인 김연아, 코비 브라이언트, 메시, 힙합 가수인 트레버스 스캇, 걸그룹의 태연, 외과 의사인 이국종, 웹툰 작가인 자마, 프로게이머 페이카, 그리고 연예인으로 유재석을 선호했으며 그 외에 법조인, 기업인, 교사 등을 거론하였다. 그야말로 1인 1색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의외의 사실은 부모님과 할아버지, 할머니 같은 가족을 상당수(8명-20%)의 학생들이 선택했다. 이는 평소에 자주 만나면서 사랑을 주고받는 대상이 그만큼 친근해서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청소년답게 소박하고 인정이 넘치는 사실이었다. 그들에게 보는 만큼,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인 것 같다. 우리의 유구한 역사에는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의연히 일어서 백성을 이끈 지도자가 많다. 최근 인기리에 방송된 ‘고려거란전쟁’의 양규, 강감찬 장군과 영화 ‘노량’의 이순신을 보라. 역사를 통해 후손들이 아직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는가. 그러나 지금은 분명히 위기 시대, 절망 시대, 상처 시대, 위험 시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앞장서 극복하고 이끌어주며 솔선수범은 물론 국민통합을 이끄는 보이는 지도자에 대한 갈증이 심하다. 오히려 온갖 혐오만 조장하고 사상적으로 국민을 갈라치기 한다. 시나브로 온전한 ‘큰 바위 얼굴’의 부재 시대다. 우리는 청소년에게 꿈과 끼와 낭만을 심어주고 바람직한 인성을 갖춘 이타적인 인물로 성장하도록 교육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제 우리는 청소년들에게 ‘큰 바위 얼굴’ 스토리를 재소환해야 한다. 이는 그들에게 다양한 진로지도와 같다. 모든 어른이 청소년의 큰 바위 얼굴이 될 수는 없지만 언행일치와 실천궁행으로 청소년들이 보고, 듣고, 배우고, 본받아 그런 삶을 꿈꾸며 도전하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기성세대의 관점과 시선으로 매사 꾸중과 비난을 앞세우기보다는 청소년을 널리 이해하고 연대하고 함께 꿈꾸는 어른이자 스승이 되길 소망한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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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다시금 청소년의 가슴에 ‘큰 바위 얼굴’을 품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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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신의 뜻을 따르는 열락의 기쁨(택뢰수괘)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택뢰수괘는 위에 연못(☱)이 있고, 아래에 우레(☳)가 있는 모양이다. 못 속에 우레가 들어있는 모습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군자는 낮에는 활발히 움직이지만 저녁이 되면 집으로 들어가 편안히 휴식을 취해야 한다. 택뢰수의 수(隨)는 ‘따른다’의 뜻이고 따른다는 ‘때’를 말함이다. 못 속에 우레가 들어있는 모습, 그 때에 맞춰 군자도 저녁엔 집에 들어가 편안히 휴식을 취해야 한다. 현대의 바쁜 일상 중에 저녁이 있는 삶을 고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미 『주역』에서는 저녁이 있는 삶을 택뢰수에서 말했다. 향회입연식(嚮晦入宴息)이다. 고대에는 해마다 봄이면 제사 음식을 싸서 가까운 산과 언덕에 오르기도 했다. 우리의 단오를 생각하면 된다. 여기서 나온 게 수(隨)다. 수(隨)는 “阝(언덕)에 辶(오르는데) 左(손에는 주술 도구)와 月(肉-고기)를 든 모습”이다. 줄줄이 행렬을 이루던 데서 수행한다는 의미가 나왔다. 수시로 있는 일이 아닌 만큼, 이때는 아름다운 옷들을 차려 입었고 산과 들에서 남녀의 교제도 자유로이 행해졌다. 실제로 남녀가 자유분방하게 어울리는 일도 허용되어, 이로부터 야합(野合)이라는 말도 나왔다. 인생은 언제나 미래로 향하는 여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여정이 때로는 우레로 덮인 연못같은 어러움과 도전으로 시작된다. 택뢰수괘는 우리에게 인생의 출발점에서 알아야 할 교훈을 제시한다. 이처럼 수(隋)는 ‘따름’이다. 따름은 신의 뜻을 묻는 것이며, 신이 계신 곳을 따라가는 것이다. 결국 택뢰수괘는 신이 사는 곳을 따라가서 그곳에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를 지닌다. '신의 뜻을 묻는 것, 신이 계신 곳을 따라가는 것'은 종종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표현이다. 이와 관련된 문학 이야기 중 하나는 유명한 신화인 『오디세이아(Odyssey)』다.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의 노래’라는 뜻이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고향 이타케로 떠난 지 10여 년째 되는 어느 날로부터 시작하여 40여 일에 걸친 이야기가 모두 12,110행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이루어진 장편 서사시다. 그리스 알파벳 순서대로 24권으로 나뉘어 있다. 이야기는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목마를 이용한 전략으로 트로이를 멸망시킨 후 전리품을 챙겨 금의환향하면서 시작된다. 당시 오디세우스는 600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12척의 배로 트로이를 출발했다. 하지만 그는 도중에 배와 부하들을 모두 잃었고, 고향인 이타케로 돌아가기까지 무려 10년의 세월을 온갖 고난과 맞서 싸워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고향인 이타케로 귀향하여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아내를 괴롭히고 자신의 재산을 탕진한 구혼자들에게 통쾌한 복수를 한다. 『오디세이아(Odyssey)』는 서양 인문학의 뿌리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택뢰수괘의 전형을 이루는 이야기로도 활용된다. 택뢰수괘는 ‘군자는 낮에는 활발히 움직이지만,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 편안하게 휴식을 취한다’고 되어 있다. 오디세우스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온갖 고난과 맞서 싸워야 했다. 예를 들면 외눈박이 거인 커클롭스, 마녀 키르케, 괴물 스칼라와 카립디스 등을 물리치고 집에 도착하지만, 그의 집에는 불한당 무리들이 몰려와 행패를 부리고, 그의 재산을 허락도 없이 멋대로 탕진하고 있었다. 오디세우스는 자기 아내에게 구혼한 자들을 모두 죽였다. 신과 인간들이 뒤섞여 이야기를 풀어가는 파란만장한 모험과 복수의 대서사시다. 아테나 여신과 제우스신 등의 조력을 받아 싸움을 그만두고, 화해와 평화의 서약을 맺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집에 들어가 편안과 휴식을 취한다’는 말처럼 오디세우스는 집을 나와 모험을 겪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데 20년이 걸렸다. 집에 돌아와 제반 정리를 하고 평화를 유지시킨 뒤 편안하게 휴식을 취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의 길고 힘든 여정은 그의 성품, 지혜, 신앙을 시험하는 수많은 시련으로 특징지어진다. 또한 여행 내내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욕망과 신의 뜻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예를 들어, 키클롭스 폴리페모스의 눈을 멀게 했을 때 포세이돈의 분노를 샀고, 이로 인해 여행이 길어졌다. 그러나 포기하거나 절망에 굴복하는 대신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신, 특히 아테나의 인도에 대한 인내와 신뢰를 보여준다. 아테나는 오디세우스에게 시련을 헤쳐나가는 데 필요한 지혜, 힘, 보호를 제공한다. 오디세우스의 귀향은 재회와 회복의 기쁨이 핵심인 성경의 탕자의 비유될 수 있다. 탕자가 아버지로부터 두 팔 벌려 환영을 받은 것처럼, 오디세우스도 정당한 자리로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정한 길을 따를 때 은총과 은총의 상태로 돌아가는 기쁨을 상징한다. 다시 말하면 『오디세이아(Odyssey)』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기쁨, 즉 믿음으로 시련을 견디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궁극적으로 더 높은 목적에 따른 여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함으로써 평화와 기쁨, 성취를 찾는 기쁨에 대한 우화로 볼 수 있다. 수괘의 수는 ‘따르다’는 의미다. ‘수필’도 ‘붓을 따른다’는 의미로 자유롭게 쓰는 문학의 한 양식이다. 무엇을 따르는가? 바로 신을 따르는 것이다. 신이 계신 곳을 따라가는 것이다. 결국 『오디세이아(Odyssey)』는 신이 함께 하고 신이 계신 곳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그 끝엔 무엇이 있나? 평화와 휴식이 있다. 하늘의 뜻에 따라 산다는 것은 자기의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말한다. 이순신처럼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것이 부당한 결과로 돌아왔을 때도 백의종군하듯이 자신의 삶에서 성실한 자세로 임하여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한산도, 명량, 노량해전에서 대첩을 거두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그의 여정을 보라.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스스로 용이었던 사람이었다. -비록 내게 주어진 것이 작고 소박할지라도 성실하게 자기의 역할에 충실하면 결국은 인생에서 승리한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남과 비교하여 작다고 불평하면서 함부로 행동하면 승리는커녕 이미 가진 것마저 빼앗기고 만다. 『주역』의 핵심 요소는 성실함과 베풂이다. 성실함과 베풂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꿋꿋이 삶을 버텨나갈 수 있게 해주는 버팀목이라고 말해 주고 있다. 가수 강산에의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은 택뢰수괘의 가르침과 공감이 잘 어울린다. 이 노래는 무엇이든 극복하며 나아가는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고 있으며, 그 끝에는 축복과 휴식이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특히 “여러 갈래길 중 만약에 이 길이/내가 걸어가고 있는/돌아서 갈 수밖에 없는 꼬부라진 길 일지라도/딱딱해지는 발바닥/걸어 걸어 걸어가다 보면/저 넓은 꽃밭에 누워서 난 쉴 수 있겠지”의 부분이 그렇다. 택뢰수괘는 하늘이 준 운명에 순응하라는 것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하늘의 뜻으로 믿고 언제나 성실한 자세로 일한다면 반드시 기쁜 일이 찾아오리라는 믿음이다. 우리의 인생길도 그 끝엔 평화와 휴식이 놓여 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도 노인이 청새치를 잡고 그 청새치를 상어들이 먹어 뼈만 남은 청새치를 배에 매달고 항구에 도착한 후 깊은 잠에 빠지는 마지막 장면이 바로 택뢰수괘의 모습이다. 인내하고 모험과 도전정신을 가지고 그 앞에 놓인 온갖 장애물을 뛰어넘어 집으로 돌아와 평화와 휴식을 즐긴다. 그것이 열락의 기쁨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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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신의 뜻을 따르는 열락의 기쁨(택뢰수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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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어미 새가 사랑으로 알을 품고 있는 모습(풍택중부괘)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풍택중부괘는 위에 바람(☴)이 있고, 아래에 연못(☱)이 있는 모양이다. 못 위에 바람이 있는 모습이다. 못 위로 바람이 불면 파랑이 인다. 이는 바람이 불 듯이 사람이 진실로 사람에게 다가가면 자연스럽게 감복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풍택중부(風澤中孚)의 중부(中孚)는 우리의 가슴 속에 진실함이 있어 사람을 감동시킨다는 의미다. 부(孚)는 새알의 부화다. 알이 깨어나 생명이 움트는 모습이다. 결국 중부의 마음은 연민의 마음이요, 배려의 마음이다.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느낌이다. 갓 태어난 병아리를 어미닭이 보듬고 부화시키는 모습이다. 어미의 사랑과 헌신이다. 배철현의 『인간의 위대한 여정』에 보면 어미닭과 병아리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인간(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도 그렇다. 태아는 세상에 나와 스스로 걷기까지 1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출산한 여성은 미성숙한 상태로 태어난 자식을 1년 이상 젖을 먹여 키우고, 그 이후 자립할 수 있도록 12∼13세까지 양육을 책임진다. 이때 인간만의 고유한 문화가 형성되는데 바로 ‘교육’이다.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헌신과 사랑을 경험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정신적이며 영적인 씨앗인 사랑을 심어 놓는다. 공자가 말한 인(仁)의 개념과 유사하다. 인(仁)은 무엇인가. 씨앗이다. 살구씨를 한자로 ‘행인(杏仁)’이라 한다. 그러면 인(仁)은 어떤 씨앗인가? 바로 ‘사랑의 씨앗’이다. 즉 자기 희생적 배려다.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사피엔스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바로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이다. 배려라는 씨앗을 심은 인종이다. 이들이 살았던 곳(시마 데 로스 우에소스)을 뒤져보니 화로, 주먹도끼, 나무창이 발견되었다. 특히 쇠닝겐창의 발명은 더 빠르고 더 날카로운 무기였다. 이 쇠닝겐창을 창조한 이면에 폭력성도 피어나기 시작했다. 기술이란 서로 다른 것들을 선별해서 엮어내는 능력이다. 쇠닝겐창은 나무와 가죽, 돌을 서로 엮어내어 자신들의 도구를 한층 더 혁신시켰다.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는 자신보다 훨씬 큰 육식동물을 사냥할 수 있는 상상력을 실현했다. 그러나 이것은 동료 인간을 위협하는 무기이기도 했다. 강력한 무기를 손에 넣은 인간은 얼마든지 무자비하고 이기적인 존재로 변해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폭력성을 다스리면서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이타심을 동시에 길러 나갔다. 이를 카렌 암스트롱은 『축의 시대』에서 ‘황금률(Golden rule)’이라 칭했다. 인류는 함께 모여 살면서 갈등이 생겨나고 자신들이 개발한 무기로 폭력을 행사하지만 동시에 가족과 사회의 약자를 돌보는 배려의 문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인간은 이기적인가 이타적인가라는 논쟁이 심화되고 있다. 사람을 포함해 생물은 다 본성이 자기중심적(이기적)인데, 왜 이타 행동을 할까? 『이기적 유전자』를 쓴 리처드 도킨슨은 생존 경쟁을 통해 이루어지는 자연선택의 단위를 개체나 집단이 아니라 유전자로 보았다. 결국 그가 쓴 책의 핵심 내용은 ‘유전자 선택론’이다. 그러나 유전자는 그 무엇도 설계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를 복제할 뿐이다. 자연선택은 어떤 종, 어떤 개체한테도 특권을 주지 않으며 진화는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 가족뿐만 아니라 유전적 연관도가 전혀 없는 타인에게도 이타 행동을 한다.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고등동물일수록 더 확실하게 이타 행동을 한다. 이기적인 행동보다 이타적인 행동이 훨씬 고귀하다. 철학자 밀이 “남에게 부당하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기가 원하는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대로 사는 게 바람직하다”는 말은 유전자는 복제할 뿐이고, 인간 개체는 인생을 나름의 의미로 채우며 살아가는 것이란 뜻으로 확대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의 위대한 여정은 스스로 이기적인 동물을 이타적 동물로 변모시켰다는 데 있다. 자기 희생적인 사랑은 후대 등장하는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된다. 그 후 성인들의 각성과 전파로 이타적 유전자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어주는 마음이 바로 중부(中孚)의 마음이요 이타적인 발효다.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일은 중심을 잘 잡는 일이다. ‘명학재음(鳴鶴在陰)’이라 했다. 학이 눈에 띄지 않는 그늘에 있어도 그 울음소리로 학의 가치를 알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늘에서 우는 학처럼 중부란 드러나지 않아도 그 힘이 엄청나다. 중부는 가족과 사회의 약자를 돌보는 배려 문화의 정수다. 그래서 조직의 리더는 흔들리면 안 된다. 흔들리는 순간, 그 조직은 무너진다. 리더는 중심을 잡고 믿음을 주어야 한다. 무게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중부(中孚)에 관해 「대상전」에서는 ‘의옥완사(議獄緩死)’라 했다. 인간의 생명을 말살시키는 옥사에 관한 말인데, 특히 사형은 한번 집행되면 돌이킬 수가 없고, 주변의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게 된다. 이때 중부의 마음이 필요하다. 연민의 정을 살려, 사형의 죄를 경감시키는 인(仁)의 마음을 베풀도록 노력해야 한다. 현대에 와서 뜨거운 논쟁이 된 사형폐지에 관해 이미 고조선 시대에 있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현대의 의식 수준이 고조선 시대 옛 선조들의 의식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요즘 묻지마 범죄 등의 인륜적으로 말이 안 되는 범죄가 행해지고 있어 사형제도를 다시 도입하자는 여론이 조성되고 있지만 그런 범죄에 있어서는 죄인에게 감형 없는 무기징역을 판결해서라도 사형 폐지론을 유지해야 한다. 누쿠이 도쿠로가 쓴 중편 소설 『종이 올빼미』(직선과 곡선)를 읽어보시라. 이 소설은 사람을 한 명 죽이면 사형당하는 일본의 사형제도를 비판한 이야기다. 섣불리 사형제를 시행하자고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판결의 형법주의가 아니라 우리 옛 선조인 고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중부(中孚)의 마음, 어미닭이 병아리를 품는 마음이 현대에도 이어져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중부(中孚)는 성(誠)과 경(敬)과 신(信)을 한 마디로 줄인 말이라는 도올의 견해는 탁견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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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어미 새가 사랑으로 알을 품고 있는 모습(풍택중부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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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교사의 체념을 부추기는 현실에 우려를 표명하며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회에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는 소위 ‘복지부동(伏地不動)’ ‘체념(滯念)’이라는 말과 혼용되면서 쓰이기도 한다. 그 어느 것이든 이들은 부정적인 현상으로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왜냐면 당연히 자기의 책임을 지지 않거나, 주위 사람 눈치 보는 얍삽한 처신으로 일관하는 매우 소극적인 행위이며 또한 조직의 업무를 정체시키거나 침체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명제의 핵심이다. 이는 대개 정권 말기나 권력 누수기에 공무원들 사이에서 흔한 일로 알려져 있다. 이를 질책하는 국민이 늘고 있지만 최근에는 교육계에서조차 교사들 사이에 이 말이 널리 보편화되고 있다. 이는 바람직한 교육활동에 경종을 울리면서 우리의 미래 세대 청소년 교육에 심히 우려할만한 일이다. 적어도 십대의 공교육을 책임지는 학교에서만큼은 교사들이 눈치 보거나 직무를 유기하는 업무 태만은 없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이를 마냥 나무라기에는 한계가 있다. 최근 학부모의 힘이 강해지면서 일부 학부모들의 악성 민원, 갑질, 아동학대 신고로 인한 소송, 교권 침해나 추락을 유발하는 과도한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이를 직면하는 교사들이 오죽하면 마지막 해결책으로 목숨을 내놓는 일이 벌써 최근 6년 사이에 100명이나 되며 이중 절반은 초등학교 교사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 이젠 생명 보존을 위해 어떤 수단이라도 강구하는데 거기엔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체념이 압도적이다. “올해만 잘 버티면 내년에는 또 새로운 아이들을 만날 거라는 희망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최근 몇 년 전부터 내년에는 더하면 더했지 더 나아지지는 않을 거라는 두려움이 있어요. 저만 그런 건 아닌 거 같아요”. “아이에게 좀 전문적인 조치가 필요할 것 같아서 상담 때 조심스럽게 ADHD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다고 부모님께 권했어요. 그런데 부모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르며 몹시 불해하시더라고요. 제가 무슨 모욕을 했다는 것처럼요. (…) 교사는 아이가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게 당연한데, 그렇게 불쾌해하시니 그냥 그 아이에 대해서는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송은주, 『다시 일어서는 교실』) 안타깝게도 교사는 자기 결정권이 많지 않은 업무 환경에서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경우 교사는 자기 효능감이 떨어지거나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현실 인식은 크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코로나19의 위기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 어느 교육부 관계자는 “학교자율권이 제대로 작동했으면 비상시 학교별 대응을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학교가 자율에 대한 적응이 되지 않아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고 은근히 비난의 화살을 학교나 교사로 돌렸다. 평소 상명하달, 위계에 따른 일방적 지시로 일관한 교육부가 교사나 학교의 자율권에 신경이나 쓰면서 이런 말을 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우리 교육은 여기저기서 교육 자치를 말하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학교의 자율성도 인정하지 않을 때가 많다. 실제로 몇몇 특수목적교나 혁신학교를 제외하고는 의사결정에 교사의 영향력이 아주 미미한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자기결정이 거의 불가능한 현실에 교사들은 이미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잔뜩 웅크리고 있거나 새로운 정책이나 조치에 일단 부정적으로 일관하고 행동조차 체념한 채, 묵묵히 지켜온 관행만을 철저히 고수하려고 한다. 최근에는 교사의 체념이 명예퇴직으로 급증하고 있다. 이래저래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여 차라리 가만히 있고자 하나 양심상 이를 묵과할 수는 없는 고통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학부모나 국가가 이를 조장하고 교사의 체념을 확대시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자기결정권이 없는 교사가 체념이외에 무슨 다른 수단이 있을까? 우리는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교사의 성찰과 자성에만 맡기기에는 이미 늦었다. 획기적인 교육개혁으로 교사의 체념을 과감하게 회복할 수 있는 정책이나 계기를 수립하지 않으면 우리 교육은 무한 답보상태에서 맴돌 것으로 심히 우려하는 바이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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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교사의 체념을 부추기는 현실에 우려를 표명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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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교육은 불가능한가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35도를 넘나드는 폭염 속에서 한겨울의 따스한 붕어빵 온기를 상상한다. 얼음바람이 몰아치던 한겨울 그때는 얼마나 온기가 그리웠던가. 이제 내리꽂는 햇살이 살갗에 따갑게 닿으면 한겨울 얼음바람이 그리워진다. 인간의 몸은 이토록 간사하다. 달콤하고 고소한 붕어빵은 중년에게 추억의 아이콘이다. 붕어빵의 노점 숫자는 불황의 지표가 되기도 하고 붕어빵 먼저 먹는 부위로 성격을 추측하기도 했다. 붕어빵에는 붕어대신 달콤한 팥이 들어 있다. 따스한 붕어빵을 손으로 감싸면 따스한 온기가 온몸에 전해졌다. 호두과자는 충청남도 천안시가 원조 지역이다. 고속도로 휴게소, 터미널의 대표 간식이다. 내가 사는 지역은 천안이다. 천안에서 왔다고 하면 사람들은 호두과자를 떠올린다. 천안 호두과자 속에는 호두가 있다. 팥도 있지만 호두가 씹히는 맛이 없다면 원조호두과자라 할 수 없다. 명실상부란 내용과 모양이 일치할 때 쓰는 말이다. 붕어빵 교육은 사람들이 입에 잘 올리는 말이다. 틀에 넣고 찍으면 같은 형태의 빵이 나온다. 사람은 풀빵이 아니다. 제각기 다른 잠재력과 성향이 있다. 붕어빵틀 교육은 정말 벗어나야 한다. 빠른 시간에 효율적으로 순응형 인간을 양성하는 교육은 퇴행적 교육이다. 21세기 인공지능시대에도 큰 틀에서는 붕어빵틀 교육을 하고 있다는 자괴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떤 절대적 기준을 정해 놓고 모든 것을 거기에 맞추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교육은 잔인한 교육이다. 성격과 환경과 경험과 성향이 모두 다른데 틀 안에 우겨넣고 머리와 다리를 자르는 교육은 크게 바뀌지 않고 있다. 경제성과 인력 부족과 편리성으로 미화하면서 전국이 단일한 틀로 학생을 구워내고 있다. 붕어빵틀에 넣고 졸업장을 주는 교육은 이제 과거의 추억이 되었으면 한다. 호두과자에 호두가 있듯이 교육에는 인간의 삶이 있어야 한다. 배려와 존중이 있어야 하고 책임과 합리적 이성이 있어야 한다. 미래역량과 민주시민교육을 지향하면서 명문대입시를 지상최대의 목적으로 하는 줄세우기 입시교육은 그만해야 한다. 내년 3월부터 학교 현장에 인공지능 디지털 교과서(AIDT)를 도입한다. 지식 교육은 생성형 인공지능(AI)에게 맡기고 ‘개인 맞춤교육’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디지털 교과서 대체로 선진국 교육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선진화된 교육은 매체보다 삶의 질에 초점을 두는 교육이다. 삶을 사랑하고 타인을 배려하고 소통하는 교육을 지향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우리가 보아왔던 시대와는 전혀 다른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데 일률적인 교육과정 틀을 고집하면 안 된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교육은 불가능한가. 정답을 찾고 정형화된 교육만이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틀은 이제 버려야 한다. 학벌과 직업만을 위한 붕어빵틀 교육은 버려야 한다. 아직도 스스로의 삶과 소통과 협력으로 자신이 대면하는 세상과 풍요롭고 조화로운 삶을 위한 교육은 한국에서 불가능한가. 한국 교육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도록 가르치고 있는가. ▣ 김홍제 ◇ 충청남도천안교육지원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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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교육은 불가능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