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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풀꽃 산책] 부들 - ‘나’가 사라지면 ‘함께’라는 것이 살아난다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어릴 때 연못가에 가면 핫도그가 땅에 박혀 있는 모습의 식물을 본 적이 있다. 그냥 뽑아서 먹어도 될 것 같은 비주얼이었다. 자라서 보니 그게 부들이라는 식물이었다. 꽃가루받이를 할 때 부들부들 떤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외국의 어떤 사람이 부들 줄기를 먹었는데 식감이 젖은 마분지를 씹어먹는 것 같다고 했다. 부들은 갈대와 함께 하천의 수질 환경을 개선하는 데 쓰이는 주요 식물이기도 하다. 군락을 이루는 습지식물이라는 특징을 이용해 물을 여과하고 흐름도 조절해 준다. 또한 부들 군락은 하천에 사는 수많은 새들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 꽃말은 '거만'. 서양에서는 꽃이삭이 고양이 꼬리처럼 보여서 그런 꽃말이 생겼나 보다. 꼿꼿한 꽃대가 거만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는 모습이라 붙여진 꽃말일지 싶다.(출처: 생생비즈 https://www.livebiz.today) 『시경』 「진풍(陳風)」 제10편 택피 3장(澤陂三章)에 아름다운 부들과 연꽃을 보고 사모하는 마음을 노래한 시가 있다. 연못가 저 언덕에 부들 연꽃 한창이네 멋있는 저 사나이 훤칠하고 근엄해서 자나 깨나 하릴없이 뒤척이며 지셉니다 ‘저 연못가 언덕에 피어 있는 부들과 연꽃처럼 아름다운 사람이여, 너로 하여금 내가 속상하고 병 된들 어떠하리오, 자나 깨나 네 생각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눈물 콧물만 줄줄 흐르는구나.’로 해석된다. 부들을 남성에, 연꽃을 여성에 비유하며 조화롭게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부들과 연꽃이 피어 있는 연못가에서 한 여인이 멀리 떨어져 있는 남자를 그리워한다는 내용이다. 부들의 잎과 줄기의 생김새가 호탕한 성격을 갖고 있어 남성적이고, 연꽃의 꽃잎은 여성스럽다는 점에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가까이 있으면 좋을텐데, 나는 홀로 있으니 눈물만 흐른다고 그리운 마음을 호소하고 있는 시다. 그 옛날에도 문학적인 소재로 부들이 쓰였다는 방증이다. 부들은 ‘여우의 촛불’로도 부른다. 부들 이삭에 알코올이나 석유 같은 걸 충분히 적셔서 불을 붙여보면 마치 촛불과 같은 예쁜 불꽃이 생기는 것을 볼 수 있다. 부들은 수술과 암술이 너무 가까워 수술의 꽃가루가 암술에 묻기 쉽다. 그래서 수꽃이 지고 나서 한참이 지난 후에 암꽃을 피우게 된다. 또한 부들은 풍매화이기 때문에 부들 씨앗의 아래에는 부들의 이삭털이라 하는 흰 털이 붙어있다. 마침내 때가 되면 이삭 안으로부터 부들 씨앗이 솟아오르듯 나타나 흰색의 이삭털을 이용하여 바람을 타고 날아올라 간다. 부들 이삭 하나에는 씨앗이 대략 35만 개 이상 들어있다. 작은 이삭 하나 속에서 35만 개 이상의 생명 활동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삭 하나에 35만 개의 꽃이 모여 피기는 쉽지 않으리라, 그래서 부들은 단순한 구조와 크기도 서로 양보하는 것처럼 작게 만들고 있다. 35만 개의 꽃이 모여서 틈 하나 없는 이삭 하나를 이루고 있다. 힘을 모은다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지구에 살고 있는 65억 인류에게 부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면 어떻게 65억 인류가 하나로 모아질까? 흔히 우리는 하루를 낮과 밤으로 경계 짓는다. 낮은 가시성과 더불어 좋은 것으로, 밤은 어둠과 함께 나쁜 것으로 관계지어 서로 반대쪽에 놓는다. 그러나 실제는 다르다. 하루는 태양을 기준으로 한 지구의 자전의 두 측면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실제는 하나를 가지고 둘로 나누어 경계 짓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즐거움과 고통, 성공과 실패, 선과 악에 대해 언어로 경계 짓고 한쪽의 삶에 집착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스트레스와 불만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이는 우리가 이원성의 한 면에 집착하면서 다른 면을 거부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계곡 없는 산을 가지려 하는 것과 닮았다. 악 없는 선, 고통 없는 쾌락, 실패 없는 성공은 이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해안선을 보라. 그 경계 안에는 바닷물과 모래가 뒤섞여 있다. 경계는 언어가 만들어낸 마법의 환상에 불과하다. 극과 극이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불화는 조화로 사라지고, 투쟁은 춤으로 변하며, 오랜 적들은 연인이 된다. 우리는 언어가 준 마법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면 무한한 자유의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실재하는 세상은 무경계다. 경계는 언어가 준 마법의 환상이다. 실제 위에 덧씌운 경계 속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그러면 인류는 하나가 된다. 이진경이 『노마디즘2』에서 말했다. “모든 사람의 적은 자아(自我)다. ‘나’가 사라지면 ‘함께’라는 것이 살아난다.”라고.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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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27
  • [전미경의 클래식 스토리] 기다림의 시간들
    [교육연합신문=전미경 칼럼] 연주를 하러 다니다 보면 참으로 많은 시간을 기다리게 된다. 어떤 곡을 연주하는 시간보다도 어떨 땐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 때도 있으니 나의 삶에서 기다림이란 음악의 한 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크게는 연주하는 장소까지 오고 갈 때의 기다림, 연주 순서를 기다릴 때의 기다림, 세부적으로 들어가 본다면 연주하는 순간순간에도 악장과 악장 사이의 기다림, 쉬는 부분이 나올 때, 그리고 나의 악기가 다시 나오는 부분을 연주할 때까지의 작은 기다림까지. 삶이 기다림의 연속이다. 굳이 연주자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림에 쓰고 있을까? 진정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를 기다린다던가, 로또에 당첨될 날을 기다릴 수도 있고 자신이 목표한 소망이 이뤄질 날을 기다리기도 하고 다 열거하지 못할 정도로 많을 것이다. 음악사에서도 보면 짧은 시간에 만들어진 곡들도 있고 오랜 시간의 기다림과 수정 끝에 세상에 나오게 되는 곡들도 있다. 그리고 오랜 시간 기다렸지만 세상의 빛을 미처 보지 못하는 곡들도 있다. 핀란드의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의 교향곡도 우리가 아는 7곡은 있지만 나머지 한 곡은 세상에 나오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향곡의 작곡가로 알려질 만큼 그의 7개의 교향곡은 훌륭하며, 그 자신도 교향곡은 인생의 각 단계에 대한 신앙고백과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렇기에 8번째 교향곡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대단했던 것 같다. 마지막 교향곡 7번도 작품의 구상부터 완성까지 거의 8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 걸 보면 역시 예술작품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어쨌든 7번째 교향곡을 완성한 것이 그의 나이 59세 때인데 그 이후로 91세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신곡을 세상에 내놓는 것에 큰 부담을 느낄 만큼 예민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8번째 교향곡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기다렸던 것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나오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전해지는 얘기에 의하면 작곡가 자신의 맘에 들지 않아 스스로 벽난로에 던져 태워버렸다고 한다. 시벨리우스는 그의 인생의 마지막 30년 동안 이전의 곡들보다 더 나은 곡들을 만들어야만 한다는 굉장한 부담감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 삶도 오래 준비하고 시도하고 노력하지만 결국은 긴 기다림에 보상받지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하지 않은가. 기다림이라는 오랜 시간이 반드시 해피 앤딩의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닌가 보다. 사람들은 기다림에 대해 다양한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다. 긍정적인 시각도 있을 것이고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는 즉각적인 결과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기다림에 조급함을 가지기도 하며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급하게 생각하는 것이 어떤 문제를 악화시키거나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만들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기다림은 삶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우리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을 통해 인내심을 배우고, 사색하고, 자기 성찰의 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 때로는 희망을 동반하기도 하지 않던가. 결국은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삶의 태도와 결과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 첼리스트 전미경 ◇ 가천대 관현악과 졸업(첼로전공) ◇ 서울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부수석 역임 ◇ 금천 교향악단 부수석 역임 ◇ 의왕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 ◇ 강동 챔버 오케스트라 단원 ◇ 롯데백화점 문화센터 첼로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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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26
  • [전재학의 교육칼럼] 애국과 인간 존엄 교육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일반적으로 위정자들이나 정치인들이 애국을 거론할 때는 국가의 이익과 국민의 삶을 증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이른바 가면을 쓰고 둔갑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실제로는 국가를 해치는 매국의 속성이 배어 있다. 왜냐면 뒤에서는 자신과 집단의 이익과 권력을 철저히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국민 전체를 폄훼하고 상황을 스스로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는 위정자들이 국민을 그저 ‘혜택 받는 대상’으로 전락시키기 위해 오랫동안 구가한 수법이다. 따라서 개개인의 고통과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분투는 은폐되고 개인은 말없이 희생되기 마련이다. 이런 애국은 충성과 당위만을 강요하고 국민 개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위정자들이 망치는 나라를 국민이 되찾고자 하는 것은 언제나 그 이면에 자기 삶의 존엄을 지키고자 하는 열망이 굳게 내재한다. 개인의 존엄은 누구도 뺏을 수 없고 함부로 폄훼할 수 없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의 제 1조 1항이다. 여기에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갖는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는 제10조에 대해 의무를 진다. 결국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존중은 바로 민주주의를 지키는 주춧돌인 것이다. 우리의 뿌리는 이 땅에서 일군 고단한 국민으로서의 삶에 있다. 따라서 우리의 가치는 위정자가 규정할 수 없다. 우리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개인의 삶을 존중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매우 당연한 일이지만 누구도 우리 전체를 결코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국민 개개인의 삶을, 서로를, 지극히 존중해야 한다. 일찍이 시인 김수영은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고 일갈했다. 누구에게는 더러웠는지 모르지만 고단했던 우리에게는 지금 이 시대가 그 자체만으로도 존중받을 전통과 역사라 할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우리 삶 자체는 한없이 가치 있고 소중하다. 우리는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있지만 더 이상 누군가에게 고개 숙이거나 지배당할 수는 없다. 이 땅에서 우리 개개인이 살아 온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존중받고 사랑을 받아야 한다. 왜 위정자와 정치인들이 만들어 놓은 진흙탕에 빠져 험난한 탈출을 구가하고, 가슴앓이하며 절망 속에서 한숨을 쉬어야 하는가? 우리는 이제 그만 여기서 멈추어 저 멀리 남미와 아프리카 국민들처럼 퇴락한 국가에서 살아야 하는가? 그것도 부족해 서로를 증오하고 혐오하며 살아야 하나? 인간 개개인의 존엄을 어디서 다시 찾아야 하는가? 지금 우리는 이 땅에서 하루하루 평온하고 안정된 호흡을 하며 살 수가 없다. 대통령부터 자국민에 대한 증오와 혐오가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싹 다 정리하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 전에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해 국민과 더불어 평화스럽게, 상호 존중을 하면서 존엄한 인간답게 살 수는 없는가? 왜 이렇게 국가를 위한다고 하면서, 애국을 주장하면서, 나라를 매국으로 몰고 가는가? 인간에 대한 존엄 의식이 없고, 인간을 최고의 목적으로 대우하지 않고, 출세와 성공, 권력 지향의 수단으로만 삼고 있다. 그는 대한민국 교육이 배출한 최고의 엘리트가 아닌가? 그런데 어찌 사람이 그 모양인가? 일치와 사랑을 말하는 많은 종교인들조차 등을 돌리는 현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우리의 헌법에서 인간의 존엄을 찾자.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제1조의 핵심이다. 세상이 불만족스러울 때 세상을 바꾸는 힘은 어느 개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국민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개인은 나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국가에 살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인간으로서 최고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도록 인간 존엄 교육을 보다 강화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삶이 추구하는 행복이고 인간의 권리다. 가면의 탈을 쓰고 애국을 강요하는 나라가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넘치는 나라를 우리 모두가 만들어야 한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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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21
  • [김홍제의 목요칼럼] 바람개비와 산삼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축제를 하는 곳이나 관광지에 가면 바람개비를 흔하게 볼 수 있다. 바람개비는 자기 의지로 혼자 돌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돌고 바람이 불지 않으면 서 있다. 길가에 죽 늘어서서 관광객의 눈을 즐겁게 한다. 바람개비의 삶에 고민은 없다. 그저 바람에 따라 자신의 몸을 열심히 움직이면 된다. 고장이 나는 순간까지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바람개비의 숙명이다. 바람개비의 삶은 기계적 삶이고 순종적인 삶이고 사색 없는 삶이다. 열심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일면 부지런하게 보이지만 바람개비의 삶에서 진실함을 느끼기는 힘들다. 신나게 도는 바람개비는 단지 바람이 많이 분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고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현란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바람이 그치면 바람개비는 혼자 돌지 못하고 돌고 싶은 의지도 없어 보인다. 다만 축제를 위해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바람개비처럼 사는 사람이 있다. 고민도 생각 없는 편안한 삶. 월급이라는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삶. 그런 사람은 주어진 일만 하면 자신이 할 일은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 바람이 역풍이든 순풍이든 그저 돌기만 하면 된다. 기계와 같다. 폐기가 될 때까지 그저 바람에 순응하며 살다가 낡아지면 폐기된다. 직장에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을 하지만 자신의 성장에는 관심이 없다. 축제장의 바람개비들은 빛깔이 원색으로 화려하다. 그 화려함이 내면의 허전함을 더욱 커 보이게 한다. 산삼은 새가 삼의 씨앗을 먹고 날아가다가 떨어진 씨앗에서 자연 발아한 삼이다. 씨앗이 습하고 적절한 곳에 떨어지는 확률은 매우 적다. 그러한 곳에 떨어졌어도 혼자서 곰팡이균과 수분과 햇빛과 많은 위험을 오롯이 오랜 기간 견뎌야 한다. 인삼은 온전히 인간의 재배로 밭에서 키워진 것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사람의 손이 간다. 장뇌삼은 인삼을 산에 옮겨서 심어 키우거나 인삼의 씨를 산에 뿌려 키운 인삼을 통칭한다. 다시 말해 사람 손으로 산에서 재배한 인삼을 말한다. 결국 멀리 떨어져 있어도 산삼과 다르게 관리하고 통제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고난이 산삼의 향을 짙게 하듯이 인간에게도 고난은 깊은 성찰과 성장의 기회를 제공한다. 현대는 모든 것이 자동화하고 편리한 것을 우선한다. 그러한 시대의 양상이 인삼이나 바람개비 같은 인간을 양산하고 있다. 공장에서 물품이 나오듯이 쉽고 값싸고 보람이나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삶을 만들어 낸다. 인간에게 도전과 고난과 역경은 깊고 성숙한 인품의 바탕이 된다. 살면서 어려움을 피하고 쉽게 풍족하고 편안한 삶을 추구하다 보면 껍데기만 남게 된다. 어느 순간 문득 자신을 돌아보면 공허함과 허무함만 느끼게 된다. 산삼은 자라는 속도가 인삼보다 훨씬 느리다. 산삼은 인삼보다 약효가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인삼은 빠르게 자라고 크고 굵다.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쉽게 인간을 맞춤형으로 재배하려는 인식이 몰려오고 있다. 바람개비의 인생을 살 것인가. 산삼의 인생을 살 것인가. ▣ 김홍제 ◇ 충청남도천안교육지원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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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20
  • [풀꽃 산책] 칡 - 정작 칡은 갈등하지 않는다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구상 시인의 「꽃자리」란 시를 보자.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다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다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엮여 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주어진 조건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탈출하고 싶은 바로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 자리가 행복을 가져온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해도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어느 곳이든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가 앉은 자리가 꽃자리가 된다. 칡은 낮잠을 자는 식물로 상당히 게으른 풀이다. 빛이 너무 강하면 광합성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칡은 햇살이 내리쬐는 한낮에는 잎을 세워 지나치게 강한 햇살을 피한다. 또한 밤이 되도 광합성을 할 수 없다. 잠을 자면서 광합성을 할 수 있는 것은 ‘입바늘’이라 하는 구조를 잎의 아랫부분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효율 높게 햇빛을 받아들인다. 칡꽃의 꽃말은 ‘사랑의 한숨’이다. 꽃말답게 산이든 들이든 정원이든 일단 칡에 잡히면 한숨만 나온다. 그러나 칡의 열매는 산속 굶주린 새들의 먹이가 되고 숙취 해소에도 좋다. 칡은 대단히 빨리 자라는 잡초다. 나무도 타고 나무를 탈 수 없는 환경이 되면 칡은 바로 땅 위로 줄기를 뻗어간다. 세상의 나무들이나 잡초들이 하늘로만 곧게 자랄 생각만 한다. 그래서 낭패를 보는 일이 생긴다. 칡은 생각을 바꾼다. 위로 올라갈 수 없으면 땅을 본다. 곧장 땅 위로 줄기를 뻗는다. 2022년 방송(tvN 토일 드라마)되었던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한 장면이 떠오른다. 옛 애인이었던 동석(이병헌 역)을 찾아 제주에 왔다가 떠나는 장면에서, 동석은 자기처럼 후회하지 말고, 나중이 아닌 현재를 바라보라며 선아(신민아 역)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해준다. “아버지 배 타다 죽고, 동희 누나는 물질하다 죽고, 엄마는 매일 바다만 봤어. 바로 등만 돌리면 내가 있고, 한라산이 저기 떡하니 있는데. 이렇게 등만 돌리면 아버지, 동희 누나, 죽은 바다도 안 볼 수 있는데...” 하며, 앞만 바라보는 선아에게 뒤를 보면 선아 편인 자신도 있다며 조언해 준다.(우리들의 블루스 10회) 우리는 삶을 살면서 수많은 갈등을 한다. 그런 갈등에 함몰되면 삶 자체가 망가진다. 그럴 때는 고개를 돌려 뒤를, 옆을, 아래를 바라보라. 거기엔 갈등이 없는 세상이 펼쳐져 있다. '갈등(葛藤)'은 칡과 등나무의 관계에서 나온 말이다. 인간의 삶에서 갈등이 없으면 삶 자체가 맹맹하다. 싱겁다. 그래서 소설에도 갈등 구조가 있지 않은가. 갈등이 없으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춘향이와 이몽룡이 만나서 서로 사랑하고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살다 죽었다”라고 한다면 누가 『춘향전』을 읽겠는가. 칡과 등나무의 갈등이 아무리 심해도 해소할 방법이 있다고 한다. 두 덩굴을 조금 느슨하게 감아 올라가게 해놓으면, 갈등을 해결하고 사이좋게 공생한다고 한다. 우리 사회도 이런 방법이 없는지 지혜를 모아야 하지 않을까. 갈등 속에서도 여유와 위트를 잃지 말자.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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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19
  • [전재학의 교육칼럼] 교원 감축은 교육개혁 의지의 실종과 같다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2025년 새 학년을 앞두고 17개 시⋅도 교원 정기 인사가 속속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교육개혁’을 부르짖는 정부의 개혁 의지는 있기나 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무지의 소치인가?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정부의 조치가 반복되고 있다. 차라리 교육개혁이란 말을 하지나 말지, 하는 아쉬움과 절망감이 압도한다. 이는 ‘학령인구가 감소하는데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도 당연히 줄여야 한다.’는 단순 사고에서 한 치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문제가 이처럼 간단한 것이라면 누가 교육문제와 교육개혁을 언급하겠는가? 최근 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올해 초중등교원의 정원이 3000명 가까이 줄어든다. 행정안전부는 지난 1월 31일 이런 내용을 담은 지방교육행정기관 및 각급 공립학교에 두는 국가공무원 정원에 관한 규정 개정안을 입법예고 했다. 교원정원 감축은 2022년 1,089명, 2023년 3,401명, 2024년 4,296명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올해 역시 2998명 감원이다. 교원 정원 산정 기준을 '학급당 학생수 20명 이하'로 설정할 때 지난해 학급당 학생수가 21명 이상인 초·중·고(일반고) 학급은 전체의 71.7%에 달하며, 26명 이상인 학급도 32.1%에 이른다. 이런 교원의 정원 감축은 교육부가 아닌 기획재정부 및 행정안전부 소관이다. 물론 교육부의 자료를 근거로 하겠지만 실질적인 담당 부서에서 초중고 학교 현장에 대해 느끼는 인식과 현실 감각은 크게 다를 것으로 본다. 이는 언뜻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만 보이는 각종 수치와 예산에만 집중해 탁상공론식으로 짜 맞춘 것이라 믿기에 여기에 과연 개혁이란 국가적 대과업에 대해 접근하는 자세와 태도, 즉 영혼이 없는 좀비의 행태로 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흔히 ‘정치는 생물’과 같다고 말한다. 이는 교육에도 같은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교육이 단지 숫자 놀음이나 퍼즐 맞추기와 같은 즐기는 게임이라면 누가 교육을 국가백년대계라 말하고 교사에게 사도(師道)를 요구하고 미래 세대에 대한 사랑과 봉사, 헌신을 말하겠는가? 우리는 만만한 천연자원조차 하나 없는 자연적 환경에서 오직 인재 육성에 국가의 명운을 걸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이 만큼 사는 것도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에 진입한 것도 ‘교육의 힘’이라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는가? 요즘은 전국에 걸쳐 학교를 떠나는 교사들이 늘고 있다. 이는 거두절미하고 우리의 학교 환경에 우려와 걱정이 앞선다. 특히나 유능한 2030 MZ 세대들이 처우 및 교권에 대한 불만으로 교단을 등지고 있다. 또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일당백의 중견교사들도 악화된 ‘교권추락’과 ‘교사 때리기’에 절망해 학교를 떠나고 있다. 그 자리를 비정규직(기간제 15.4%) 충원이 학교마다 전쟁을 치르듯이 학년 내내 지속되고 있다. 심지어 교과에 따라서는 한 학년에 정규직이 한 명도 없이 전원 기간제로 채우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현재 우리 학교들의 민낯이다. 대도시의 과밀학급(학생 수 28명 이상), 과대학교(학년 당 12학급 이상)는 여전하다. 교사 1인당 학생 수는 서울만 해도 13.2명이지만 강남구와 서초구는 각각 14.7명, 15.0명이다. 잠시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덩치가 큰 학생들 32~34명이 가득 찬 교실을 상상해 보라. 거기엔 숨조차 쉴 공간의 여유가 없다. 그뿐이랴. 학생 식당이 없어 먼지가 풀풀거리는 교실에서 중식 배식을 하는 학교도 많다. 그 속에서 담임교사들은 제 때에 식사도 못하고 중식지도를 한다. 가장 중요한 교육 문제는 학생들이 교사와 한 마디도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하교를 하는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많은 학생들에 비해 교사 수가 적기 때문이다. 가장 단순한 사례지만 교사의 부족으로 교육의 질 저하는 심각한 상태다. 고민이 많은 질풍노도의 청소년들에게 개별적인 따뜻한 상담 기회조차 제공할 수 없다. ‘콩나물 교실’에 교사가 부족한 서울 등의 대도시 학교들은 개인별 맞춤식 교육은 먼 나라 얘기다. 단지 숫자 맞추기로 교원 감축을 함으로써 교육개혁의 의지가 상실한 것에 우려가 크다. 학령인구 감소보다 교사 정원 감축 속도가 더 빠른 현실에서 부디 법정 교원 정원만이라도 채우는 교육개혁을 속히 실행해 안정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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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10
  • [풀꽃 산책] 달맞이꽃 -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는 밤의 촛불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이해인 수녀님의 「달맞이꽃」을 보자. 당신은 아시는지요? 달님 당신의 밝은 빛 남김 없이 내 안에 스며들 수 있도록 이렇게 엷은 옷을 입었습니다 해질녘에야 조심스레 문을 여는 나의 길고 긴 침묵은 그대로 나의 노래인 것을, 달님 맑고 온유한 당신의 그 빛을 마시고 싶어 당신의 빛깔로 입었습니다 끝없이 차고 기우는 당신의 모습 따라 졌다가 다시 피는 나의 기다림을 당신은 아시지요? 달님 - 이해인, 『시간의 얼굴』(분도출판사, 1989) 당신은 하루 중에 낮이 좋은가? 밤이 좋은가? 위 시를 읽고 있으면 밤이 낮보다 좋을 것이다.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라는노래가 있다. 이 노래는 1996년에 발표된 ‘배영준’ 작사 작곡의 곡으로, 발매 이후 지금까지 오랜 사랑을 받아온 곡이다. 최근에는 뉴진스가 리메이크해 불러 더욱 유명해졌다. 밤은 사랑을 위한 시간이다. 아름다운 밤을 만드는데 달맞이꽃도 한몫을 한다. 밤에만 꽃을 피운다고 하여 달맞이꽃이라 한다. 어둠 속에서 산뜻한 느낌이 드는 노란색 꽃을 피운다. ‘밤의 촛불’이란 독일 이름 그대로다. 달맞이꽃의 꽃말은 ‘기다림, 말 없는 사랑, 밤의 요정’이다. 기다림은 애달프고 아름다운 일이다. 달맞이꽃은 해가 저물기를 기다렸다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일제히 꽃을 피운다. 마치 해가 지고 어둠이 밀려오면 활동을 개시하는 좀비처럼. 달맞이꽃의 생존전략은 경쟁을 피하는 데 있다. 낮의 격렬한 경쟁을 피해 큰달맞이꽃은 경쟁 상대가 적은 밤에 꽃을 피우는 길을 택했다. 밤은 벌레의 수도 적지만 경쟁이 되는 꽃도 적기 때문에 벌레를 독점할 수 있다. 진한 포도주 향기로 참새나방을 유혹하여 꽃가루를 옮기는 전략이다. 꽃가루는 끈기 있는 실로 이어져 꽃가루가 실처럼 이어서 딸려 나온다. 이 장면을 보면 기다린만큼 그리움은 깊어지고 그 뒤를 잇는 이별이 꼭 이런 느낌이리라. 깜깜한 어둠 속에서 노랗게 핀 꽃을 보고 있노라면 꽃이 하나의 인격체 같다. 높은 인품과 기품을 함께 지니고 있는 선비같은 꽃이다. 세상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정의의 길을 홀로 꿋꿋이 가는 모습을 본다. 기다린다는 것은 수동적인 행동이다. 불안한 감정에 빠져드는 일도 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기품 있게 기다리고 있으면 그것이 비록 작은 풀 한 그루에 지나지 않더라도 거대한 산과 같은 존재감을 뿜뿜 내비치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큰달맞이꽃과 같은 인물은 탱크맨이다. 탱크맨은 흔히 무명의 시위자로 부르는, 1989년 6월 5일 중국에서 일어난 톈안먼 사건 직후 천안문 광장 방면에 있는 거리에서 전차의 앞길을 가로막는 영상에 등장하는 남성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천안문 광장에 전차 18대가 행진하던 도중, 맨 앞에 있던 전차가 그를 피해 전진하려고 하나 계속 전진을 막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당시 영국의 언론 선데이 타임스에서는 19세였던 왕웨이린(王維林)이라고 보도했고, 본명이 장웨이민(張為民)이라는 보도도 나왔다.(출처: 위키백과)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1979년 12·12 군사 반란 당시 육군 수도경비사령관(소장 계급)이었던 장태완 장군이 그러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전두환(황정민 분)과 유일하게 맞섰던 장태완(정우성 분)의 모습이 큰달맞이꽃에 어른거린다. 비록 실패했지만 그들의 어둠의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품 있는 정의로운 행동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모범이 된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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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07
  • [김홍제의 목요칼럼] 권력과 폭력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권력과 폭력은 어떻게 다른가? 강도가 든 총은 무서운데 경찰이 들고 있는 총은 왜 무섭지 않은가? 폭력의 시대를 걱정했던 바가 있다. 편협한 편가르기와 알고리즘에 의한 상대방에 대한 증오가 싹틀 때부터 그 조짐은 보여왔다. 상대방의 폭력은 민주주의 파괴이지만 자신들의 폭력은 방어권이라는 논리가 횡행하고 있다. ‘나는 여러분에게 충고합니다. 친구들이여 벌하고자 하는 충동이 강한 사람들을 모두 불신하십시오.’ 이 문장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구절이다. 니체는 처벌 욕구가 강한 사람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거나 정당화하려는 욕망이 있으며 이는 정의를 이루기보다 오히려 불의와 폭력을 초래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경제선진국에 들어서던 한국에게 고소와 고발을 남발하는 정치는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부분이다. 교육은 학교만 하는 것이 아니다. 미디어와 사회가 주는 교육이야말로 실제적인 산교육이다. 다른 존재를 포용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다. 서로 다르다는 것은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보완의 대상이어야 한다. 화엄경의 핵심도 다른 것을 포용하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갈등이 있다고 다른 쪽을 제거하면 세상은 무너진다. 공멸한다는 것이다. 전쟁은 항상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고 후유증도 깊었다. J.M.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라는 소설에서는 인간성과 권력의 대립을 통해 폭력의 본질과 권력의 잔혹함을 말하고 있다. 쿳시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이 두려움과 편견을 통해 만들어내는 ‘적’이 얼마나 허상적이며 폭력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경고하고 있다. 이념이 만들어내는 사랑은 고귀하게 보이지만 거기에는 반성과 사랑이 없다. 그러므로 위험한 사랑이다. 거짓 권력의 정신에는 사랑이 없다. 욕망만 있을 뿐이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1928~2016)가 1990년 펴낸 『권력이동』에서는 농업사회(제1물결)에서 산업사회(제2물결), 정보사회(제3물결)로 옮겨가면서 권력이 이동하는 현상을 탐구했다. 사회를 통제하는 힘은 물리력과 부에서 지식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제 법에 의한 판단이 권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되었다. 국가 권력은 국민 구성원의 합의된 약속이며 곧 국가 권력은 법의 형태로 발현되고 국가 권력자는 이 법을 실행하는 자이다. 이를 법치주의라고 한다. 서로를 견제하고 수용하고 포용하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의 지혜이다. 이미 오랜 기간을 통해 검증된 방법이다. 학교에서 체벌이 사라진 것도 그 방법이 교육적이지 못하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물론 어려운 길이다. 쉬운 폭력의 길이 아닌 어렵더라도 사람다운 길을 가야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생각은 결국 전 세계를 장님으로 만들 뿐이다.’ 이 말은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다. 우리가 문명사회로 오면서 쌓아온 것은 평화적인 방법을 통한 갈등의 협상이다. 그것이 폭력이었다면 가장 쉬운 야만의 길로 다시 되돌아가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 김홍제 ◇ 충청남도천안교육지원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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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06
  • [전재학의 교육칼럼] 학교는 ‘양심 교육’에 보다 집중해야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옛적에 우리는 ‘양심에 털 난 놈’, ‘양심과 엿 바꿔 먹은 놈’ 등 양심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하곤 했다. 또한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르게 하라’는 말로 정직하게 살 것을 권유함으로써 양심적인 행동을 강조했다. 최근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올해 첫 자신의 저서인 「양심」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사라진 양심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양심을 “마음 속 불편하게 꿈틀거리는 그것”으로 규정하고 본인이 직접 양심에 따라 행동했던 여러 일화들을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다. 필자는 본고에서 우리가 왜 학교에서 ‘양심 교육’이 필요한가를 밝히고자 한다. 다시 최 교수 이야기다. 그는 스스로 ‘얼어 죽을 양심’이라 말하며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겪을만한 온갖 탄압을 다 겪었으며 때로는 전국 곳곳에서 쉬지 않고 걸려 오는 전화로 수없이 쌍욕을 들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다행히 감옥살이는 피했지만, 계좌 추적, 세무조사, 연구비 박탈 등을 감내해야만 했다고도 밝혔다. 이처럼 양심은 말처럼 쉽지 않으며 특히 양심에 근거한 행동이 불러오는 결과는 이해타산에 따라 사람들로부터 극과 극의 뒷감당을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은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와 국가를 지탱하는 근간이라 할 수 있다. 일찍이 맹자 성인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성을 구분하여 4단으로 언급했다. 이는 곧 옳고 그름을 가리는 시비지심(是非之心)과, 타인에 대해 연민의 마음을 갖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인간의 옳지 못한 행동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인 수오지심(羞惡之心), 그리고 겸손히 마다하며 받지 않거나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인 사양지심(辭讓之心)이 그것이다. 성인은 이런 4가지 마음이 없으면 인간이 아님을 주장했다. 왜냐면 모두가 그 바탕에 인간으로서의 최소의 양심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맹자는 성선설의 효시(嚆矢)로 인정받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제 양심을 다시 이야기해야 한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양심이란 단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학자들은 사회에서 언어가 사라지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설명한다. 하나는 단어의 쓰임새가 아예 없어졌거나 또 하나는 다른 단어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서두의 최 교수가 양심을 대체할 단어를 억지로 찾아낸 게 ‘쪽팔리다’였다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양심을 강조하고 나선 데는 '공평+양심=공정'이란 등식을 서울대 졸업식 축사에서 말했던 것으로 올라간다. 즉, 양심을 빼고는 공정을 얘기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우리 사회는 양심을 말하는 사회로 되돌려야 한다. 특히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의 양심 회복은 그 무엇보다도 시급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우리의 단편적인 교육의 사례에서도 드러난다. 어느 부모는 자신의 딸이 외국인 노동자의 아이와 손을 잡고 내려온 후에 즉시 딸의 손을 떼어낸 뒤 아이의 손을 물티슈로 닦던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이는 우리 사회가 글로벌 인재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괴물을 키우고 있는 것으로 깊이 성찰을 요하는 대표적 사례다. 양심, 말로는 쉽지만 행동은 참 어렵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려서부터 교육을 통한 양심적인 행동을 보다 습관화하고 정착시킬 필요가 있다. 현실은 철저하게 개인 기준으로 양심을 저버려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을 다 속여도 딱 하나는 속일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자신의 양심이다.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못 속여서 불편해하다가, 시차를 두고 올바른 선택, 올바른 행동으로 복귀하지 않는가? 이는 양심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기반이자 주춧돌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학교에서 ‘공부나 잘 해!’라고 말하며 학생들의 모든 것을 무조건 감싸고 도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게 자란 엘리트들은 독불장군이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불통과 고집, 오만과 무능, 무도의 인간으로 이 사회에 배출되고 있다. 그들이 보여주는 극단적 이기주의와 패권주의, 맹목적인 권력추구는 오직 성공과 출세의 교육 가치에만 몰입되어 한 치의 양심 교육조차 부재가 가져온 결과물임을 깊이 성찰해야 한다. 누가 이를 감히 부정할 것인가?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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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31
  • [풀꽃 산책] 클로버(토끼풀) - 순간순간 몰입하라. 그것이 행복이다.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신순금님의 「세 잎 클로버」라는 시를 보자. 사람도 무리를 지어 산다. 처음에는 반가웠으나 곰곰이 살펴보니 낯익은 눈빛이 아니다. 다시 태어나라고 불 지른 잔디밭 한구석 빌려 뜻밖의 불길에 휩싸이던 계절을 버티고 돋았으니 네 잎이어도 세 잎이어도 그만하면 누군가의 마음에 진하게 남겠다. 돌연변이에 관심이 쏠려 주위는 돌아보지 않는 어떤 발자국이나 어떤 손길이 행운도 불행도 한 자리에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새파랗게 흔들리는 우린 그저 그런 풀이다. 소나기가 지나고 쌍무지개 한 장 올려놓은 한 여름 오후를 찬찬히 바라본다. 들판이나 초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클로버(토끼풀) 꽃은 단순한 꽃 그 이상을 상징한다. 클로버 꽃은 작은 꽃송이들이 모여 한 송이 꽃을 이루고 있다. 즉 흰색의 클로버 꽃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과거에 핀 꽃, 현재 피어있는 꽃, 앞으로 필 꽃이 순서에 따라 피워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오랜 기간 벌레들을 불러 모으기 위함이다. 이 점진적인 과정은 타이밍과 끈기가 핵심인 인생에서 기회가 천천히 펼쳐지는 것을 상징한다. 이 점진적인 과정은 『주역』의 53괘인 풍산점괘와 유사하고, 들레즈가 말한 차이와 반복이다. 또한 베르그송의 약진력이다. 그 약진력이 창조적 진화를 가져온다. 우리는 행복한 인생을 추구한다. 행복한 인생은 점진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로또에 당첨되는 것은 행운이다. 행복이 아니다. 이 꽃은 곤충들이 꽃에 앉으며 뒷발로 꽃잎을 내리누르면 꿀이 있는 곳으로 난 입구가 열리게 돼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꽃잎을 내리누를 수 있는 힘과 지혜를 가진 곤충만이 클로버 꽃의 꿀을 맛볼 수 있다. 꽉 막힌 인생에서도 벽(壁)이 문(門)이라는 생각을 하는 지혜로운 자에게 인생의 보물이 드러나는 것과 같다. 클로버의 꽃말은 잎의 수에 따라 다른데 세 잎은 행복, 네 잎은 행운, 다섯 잎은 대박, 여섯 잎은 건강이나 기적, 일곱 잎은 무한한 행복을 뜻한다. 그런데 네 잎 클로버가 생기는 원인 가운데 하나는 생장점이 상처를 입는 데 있다고 한다. 네 잎 클로버는 사람에게 자주 밟히는 곳에 많이 난다. 그래서 네 잎 클로버는 행운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회복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클로버의 성장과 발밑 생존은 진정한 행복과 성취가 종종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안전한 곳이 아닌 투쟁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이런 생각은 기쁨과 성취가 종종 지속적인 도전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주는 강력한 은유다. 클로버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행복은 보호된 정원이 아니라 삶이 압력을 가하는 곳에서 자란다. 회복력은 어려움을 견디고 성공하는 열쇠다. 클로버 꽃의 보잘것없는 세 개의 꽃잎은 인간 경험에 대한 귀중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네 잎의 행운의 클로버를 찾으려다가 세 잎의 행복의 클로버를 짓밟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행복이 우리 주변에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담론에 대해 이미 많은 철학자들이 해답을 제시했다. 행복은 유형이든 무형이든 그 양과 질이 증가하는 과정이 계속될 때 얻어진다고 한다. 고정된 고소득보다 소득이 증가하는 상태가 더 큰 행복감을 준다는 말이다. 양귀자의 『모순』이라는 소설에서 안진진의 이모가 너무나 행복한 일상에 지쳐 자살한다. 행복의 추구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다. 그 권리를 누리려면 스스로의 변화를 먼저 주도해야 한다. 당신 스스로 뿌듯하여질 수 있는 주체적 삶을 살아야 한다. 행복은 순간 기억이다. 순간을 붙잡아라. 괴테도 『파우스트』에서 악마인 메피스토펠레스의 말을 빌려 “순간아, 멈추어라. 너 참으로 아름답구나.”라고 했다. 순간을 붙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몰입해야 한다. 행복은 순간을 붙잡는 것이고, 그 순간은 자신이 몰입할 때 찾아오고, 찾아온 그 순간을 붙잡아야 한다. 그러니 자신이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아라. 행복은 세 잎 클로버처럼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그 행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면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많은 일 중에 몰입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행복은 그것을 찾는 사람에게 신이 주는 선물이다. 순간순간 몰입하라. 그것이 행복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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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24
  • [김홍제의 목요칼럼] 디지털 미디어 문해력 교육이 필요한 이유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눈발이 사방으로 흩어지듯 마음이 어수선하다. 현직 대통령 수감, 새해 경제 어려움 예상 등 뉴스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뉴스는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 사태를 통해 유튜버들이 많은 후원금을 번다는 뉴스였다.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문제는 정치적 음모론이나 강성 발언을 하고 자신만이 진실을 알려준다고 하며 후원금을 모으고 있다는 것이다. 대중은 자신이 믿고 싶은 뉴스를 선택하는 경향이 강하다. 양극단의 혐오와 음모론은 이제 실제적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는 가짜 뉴스로 돈을 버는 것은 성을 상품화하여 돈을 버는 포르노 사업보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더 자극적이고 더 허황된 음모론과 증오로 돈을 버는 ‘슈퍼챗(공식 후원금)’ 사업은 사회의 공적 기능을 무너뜨리고 있다. 유튜브 채널의 주장을 맹신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반대 증거가 나오더라도 자신의 의견을 바꾸지 않는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이용자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도록 하는 데 최적화한 시스템이다. ‘믿고 싶은 대로만 믿는’ 경향은 강화된다. 유튜브는 조회수가 곧바로 돈이다. 그 중심은 성향이 다른 상대에 대한 혐오이다. 독버섯처럼 자리 잡은 유튜버 폐해는 더 커지고 있다. 지금 호미로 막지 못한다면 가래로도 막지 못하게 된다. 지난해 말 영국 옥스퍼드대 출판부는 ‘올해의 단어’로 ‘뇌 썩음(brain rot)’을 선정했다. 이 단어는 청소년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중독을 경고할 때도 사용한다. 자극적인 쇼트폼 콘텐츠 과잉 소비로 인하여 집중력 저하와 문해력 약화 같은 지적 퇴화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콘텐츠를 추천하는 알고리즘은 중독성이 있어서 청소년 뇌 발달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허위와 알고리즘이 가진 편향성과 위험성을 이해하고 이를 경계하는 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체계적인 대응 방안과 교육이 필요한 시점이다. 미디어 비평가인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가 메시지'라고 했다. 그는 미디어 변화가 사고방식과 행동양식, 사회조직 방식까지 달라지게 한다고 하였다. 미디어 리터러시(Literacy)는 미디어에서 제공하는 정보의 신뢰성을 평가하고 선별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비판적 사고 능력을 말한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미디어가 주는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 대하여 대비해야 한다. 미디어에 대한 문해력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가 왔다. 디지털로 변화하는 현실에서 미디어 리터러시는 민주주의의 지표가 됐다. 국회가 관련 법을 제정하고 정부는 현실적인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 미디어 문해력 교육은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교육은 이러한 과제에 사명감을 가지고 임해야 한다. 디지털 미디어가 활성화하면서 충분히 예견된 사태였지만 그 쓰나미가 우리 눈앞까지 성큼 와 있다.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 올바르게 적응하도록 돕는 것이 교육의 할 일이다. 이와 함께 유튜브와 같은 미디어의 순기능을 활용하고 역기능을 조절할 수 있는 교육도 강화해야 한다. ▣ 김홍제 ◇ 충청남도천안교육지원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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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23
  • [전미경의 클래식 스토리] 행복의 조건
    [교육연합신문=전미경 칼럼] 시간은 참으로 빠르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2024년도가 시작 되던 때를 기억한다. 바로 엊그제처럼. 그런데 그 일 년이 언제 지나가 버리고 2025년이라는 새해가 시작되었나 싶다. 시간을 생각하면 언제나 작고 한없이 나약한, 인간이라는 존재임을 실감하게 된다. 연말이나 새해가 되면 누구든 나를 돌아보고 주위를 둘러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스스로 나는 행복한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여러 생각에 마음이 더 싱숭생숭 해지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길 원하며 그러기 위해 고민하고 새해가 밝으면 소망을 나열해 나가곤 한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왠지 더 행복해 보이고 나만 부족하고 불행한 것 같기도 하다. 정말이지 행복은 너무 멀리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행복은 어디 있는 것일까?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행복을 이렇게 정의한다.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 자, 그러면 우리는 생활에서 충분히 만족하는가? 사실 우리의 행복을 사전적 의미로만 보고 판단 내릴 수 없음을 모두 동감할 것이다. 행복은 주관적으로 보느냐 객관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 있고, 어떤 문화적 배경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질 것이며, 사람에 따라 가장 중요시하는 부분이 무엇이냐에 따라 또 달라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러니 만족이 쉽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결국 행복도 늘 멀리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원하고 바란다. 잘 생각해 보면 나 역시 늘 그러했던 듯하다. 이쯤에서 만족하고 행복을 느끼기엔 세상은 너무 복잡하고 비교대상 투성이다. 행복의 조건은 너무나 많아서 여기서 다 나열하기에도 벅차다. 사람들의 모습이 다 다르듯 각자가 원하는 행복의 조건도 다 다르니까 말이다. 하지만 새해를 맞이하면서 좀 더 만족하고 좀 더 감사하는 삶을 지향해 보면 어떨까? 비록 올 한 해가 끝나갈 때 또 후회하고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마주할지언정 한번 시도해 보는 건 어떨까? 일 년이라는 시간은 마치 빛의 속도처럼 무섭게 지나가고 매년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지나가버린다. 그렇게 우리의 한평생도 빛의 속도로 지나가는 것이리라. 그런데 감사하는 마음은 기쁨을 준다. 아침에 눈을 떠 밝은 햇살을 보는 것이, 지는 해를 볼 수 있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이,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부족한 것이 아직은 많아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우리는 삶의 위기를 한 번씩 겪고 나면 깨닫게 된다. 조그마한 감사함이 하나씩 모이다 보면 감사함이 커지고, 우리 삶에 감사함이 점점 더 많아지면, 작은 기쁨 또한 점점 더 많아져, 결국 우리의 삶은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지 않을까? 원하던 것을 손에 얻고 나서 느꼈던 기쁨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지 않았었는지 우리는 안다. 원하던 부를 이루고 나면 행복할 수 있을까? 행복은 부의 양이 아니라고 부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그건 아마도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속성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작은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는 것은 결코 멈춰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을 기쁨과 행복으로 좀 더 가까이 이끌어 줄 작은 희망이 아닐까. ▣ 첼리스트 전미경 ◇ 가천대 관현악과 졸업(첼로전공) ◇ 서울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부수석 역임 ◇ 금천 교향악단 부수석 역임 ◇ 의왕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 ◇ 강동 챔버 오케스트라 단원 ◇ 롯데백화점 문화센터 첼로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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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7
  • [풀꽃 산책] 쇠뜨기 - 지옥을 겪어본 자만이 얻을 수 있는 회복 탄력성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최화수 시인의 「쇠뜨기」라는 현대 시조를 보자. 「꽃도 아닌 네가 열매도 아닌 네가 소수서원 바깥 뜰 돌확을 확, 점령해 여봐라! 주인 행세하네 이런 일은 처음이야. 뿌리 째 뽑혀나가 변방만 돌던 네가 쇠심줄 같은 근성으로 양반가를 움키다니 천지가 뒤집혔구나 참, 당차다. 네 권속」 -『시조시학』(2019, 가을호) 우선 시조가 굉장히 역동적이다. 시인은 아마 쇠뜨기에 대한 오랜 관찰과 숙고를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이 가장 미워하는 잡초를 이렇게 의미 부여하여 아름다운 시로 빚어냈다는 것만으로도 혐오스럽게 생긴 쇠뜨기는 시인에게 감사해야 한다. 소가 풀을 뜯는 곳에서 번성하는 보잘것없는 포자 줄기 식물인 쇠뜨기(말꼬리(horse tail), 뱀밥이라고도 함)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뱀의 머리를 닮은 외모에도 불구하고 쇠뜨기는 한때 거대한 양치류가 지구를 지배하던 석탄기(약 3억년 전)의 살아 있는 유물이다.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는 잡초처럼 보였지만 인내, 변화, 조용한 회복력에 대한 더 깊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른 봄, 논과 밭두렁을 따라 걷다 보면 쇠뜨기가 땅에서 조용히 올라오기 시작한다. 뱀 같은 머리가 토양에서 나오며 약 200만 개 이상의 미세한 포자를 담고 있다. 이 포자가 바람에 흩어지면 식물은 생명주기의 다음 단계로 들어가며 계통이 계속 유지된다. 쇠뜨기의 생존은 단순히 우연의 문제가 아니라 적응의 대가다. 한때 우뚝 솟은 종이었지만, 기후 변화로 인해 쇠퇴하게 되었다. 쇠뜨기는 지금도 사람들에게 가장 미움받는 대표적인 잡초이지만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쇠뜨기의 꽃말은 “되찾은 행복”이다. 멸종 위기를 견뎌내며 살아남은 식물에 딱 맞는 표현이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히로시마에 처음으로 나타난 녹색 새싹처럼, 생명이 돌아오려면 50년이 걸릴 것이라는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생명의 회복력을 보여주었다. 그때 사람들이 받은 희망과 용기는 엄청난 것이었다. 쇠뜨기의 뿌리줄기는 워낙 강해서 염라대왕이 쓰는 화로의 부젓가락 노릇을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쇠뜨기는 조용하고 숨겨진 힘을 상징한다. 탄력성은 화려하지 않다. 그것은 장미나 연꽃처럼 주의를 끌지도 않는다. 대신, 그것은 우리에게 인내와 적응성의 가치를 가르쳐준다. 쇠뜨기는 직면한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과거 절멸 위기를 넘긴 경험 때문에 지금도 위기관리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뿌리줄기는 땅 속 깊이 뻗어나가며 말 그대로 암약을 하고 있다. 쇠뜨기처럼 우리는 가장 심오한 회복력이 종종 우리 내부의 조용한 곳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내부에서 적응하고 힘을 키우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자연은 가장 작고 예상치 못한 생물을 통해 우매한 사람들을 가르친다. 동족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쇠뜨기는 가장 혹독한 환경에서도 생명의 길이 있음을 보여준다. 뿌리줄기는 진정한 힘이 종종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는 땅 속에 있음을 상기시킨다. 쇠뜨기는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고 간과하는 잡초로 간주될 수 있지만, 그 안에는 멸종을 이기고 적응을 통해 생존하며 조용하고 깊이 구축된 강인함이 담겨 있다. 세대를 거쳐 견디는 능력은 회복 탄력성이 외적인 위엄에 관한 것이 아니라 끈기와 조용한 준비에 관한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쇠뜨기에서 우리는 자연의 지속적인 힘을 보고, 우리 역시 은혜와 용기,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힘으로 인생의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유명한 세계적인 문학 작품들 - 『노인과 바다』, 『월든(Walden)』, 『로드(The Road)』, 「풀잎」 등 -은 쇠뜨기처럼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조용한 인내와 생존이라는 주제와 깊은 연관성을 공유한다. 지옥을 겪어본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강인함은 화려하지 않다. 그것은 내면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마치 쇠뜨기의 뿌리 줄기가 땅 속에서 종횡무진 뻗어나가며 어두운 땅 속에서 암약하고 있는 것처럼. ‘쇠뜨기’를 쓴 시인은 혐오스럽게 생긴 쇠뜨기에게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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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6
  • [전재학의 교육칼럼] 2025년, 우리의 학교는 공동체 ‘정(情)’의 회복이 시급하다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한때 EBS의 <학교란 무엇인가>, KBS의 <위기의 아이들> 등 다수의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하고 『나는 대한민국의 교사』 등 저서를 남긴 이 시대 교사들의 멘토라 불리는 조벽 교수는 최근 우리의 학교를 ‘정떨어지는 학교’라 주장하고 이에 대한 시급한 회복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최근의 저서 『요즘 교사들에게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정떨어진 학교는 비정상”이라며 왜 학교가 정을 붙이기 힘든 곳이 되었는가를 분석할 뿐만 아니라, 학교에 정나미가 떨어졌다는 사람들을 꾸짖고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학교는 ‘정떨어진 학교’라는 굴레를 안고 있는가? 2025년 을사년 새해를 맞이하며 이를 회복하는 길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예비교사들은 교육학 이론을 통해 교육 목표가 인지적, 정의적, 심리행동적 영역, 즉 ‘지정체’라고 배운다. 하지만 막상 학교 현장은 ‘지덕체’를 내세운다. 이는 ABC(Affect, Behavior, Cognition)을 준비했더니 BCD(신체행동적, 인지적, 도덕적)를 가르치라는 말과 같다. 이렇게 교과서와 현실이 다른 것은 바로 A(Affect)에 해당하는 정의적 영역이 송두리째 빠졌기 때문이다. 이른바 학교에 ‘정(情)’이 떨어져 나간 근본적인 이유다. 현재 우리의 학교가 그토록 삭막하고 야박한 곳이 된 것은 그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학교는 ‘정의적 교육 목표’가 시급히 회복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2025년 새해의 학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몇 가지 실천 방안을 여기에 펼치고자 한다. 첫째, 지적(知的) 전통과 정의(情意)적 영역을 동시에 회복해야 한다. 이는 정(情)의 핵심이자 측은지심(惻隱之心)의 원천인 인(仁)을 회복해 인간관계를 복원하고 공감력을 살려 연민의 마음을 교육하는 것이다. 정서적 베풂은 주고 또 줘도 없어지지 않는 가장 위력적인 나눔이며 가장 확실하게 행복해지는 방법이다. 이로써 지적 성장에만 치중해 시비지심(是非之心)만 발달하여 사사건건 법리와 권리 주장만 하는 학교 현장을 바로 잡을 수 있다. 둘째, 학생들이 스스로 감정을 다스리고 올바른 행동을 선택하는 능력을 갖추도록 도와야 한다. 이는 우리 교육의 치명적인 중독이 된 경쟁과 시험능력주의로 인한 스트레스가 분노, 슬픔, 우울 같은 부정적 성향으로 변화하는 것을 예방하고 편안함과 감사함, 사랑 같은 긍정적 감정 상태를 통해 배려와 나눔 같은 바람직한 행동으로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곧 죽은(死) 교육을 살아 있는(生) 교육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셋째, 학생들에게 감정으로 전달되는 비언어적 소통방식을 가르쳐야 한다. 이는 문법과 글쓰기를 훈련시키는 것과 흡사하다. 표정, 억양, 몸짓 등 비언어적 방식은 움직임으로 표출되는 감정이다. 학생들 간에 SNS에 이모티콘이 넘쳐나는 이유도 결국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비언어적 소통은 상호 간의 공감으로 우호적 관계를 맺게 하는 원동력이라 할 것이다. 넷째, 감정을 조절하고 바람직하게 행동하며 좋은 인간관계를 맺도록 가르쳐야 한다. 곧, 학생들에게 사회⋅정서적 역량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하버드 대학의 ‘그랜트 연구’는 “인생 성공에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다”라고 분석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즉, 인간관계가 여러 요소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유일하게 중요하다는 결론이다. 이는 학생들이 코앞 성공에만 매달리지 않고 미래를 살아가는 지혜이자 반드시 필요한 역량이라 할 수 있다. 정떨어진 학교에서는 온정이 없고, 애정의 보살핌이 없으며, 다정한 대화가 없고, 학생의 마음에 열정은 식고 냉기만 가득하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지속되어 한국 사회 전체가 바로 인정이 없는 매정한 곳이 돼간다는 것이다. 학교가 사회를 반영하지만 사회가 학교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순환구조다. 이제 학교는 학생들에게 생각하는 방법, 머리를 쓰는 방법만 가르치지 말고, 감정을 처리하는 방법, 마음을 쓰는 방법을 교육해야 한다. 이는 우리의 학교가 정이 넘치는 다정한 곳으로 시급히 회복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2025년 을사년은 사제지간의 정을 회복해 보다 다정한 학교를 상상해 본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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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4
  • [김홍제의 목요칼럼] 재앙을 부르는 ‘한 방’에 해결하려는 욕심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많은 기대 속에 탄생한 ‘오징어게임 2’ 7부작을 보았다. ○와 ⨉로 갈라진 두 편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은 살육으로 상대방을 제거하는 행동을 한다. 상대방을 제거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한 번에 얻을 수 있다는 신념은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나라를 혼란하게 했던 ‘계엄 선포’에는 나름대로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도 상대방을 한 방에 제압하려는 욕심이 보였다. 그 ‘한 방’의 유혹은 원하는 상황으로 해결하는 쉬운 지름길이라는 믿음을 증폭시킬 것이다. 한 번에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그 ‘한 방’이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부안공항의 참사는 2024년을 마무리하는 지점에 일어난 대규모 참사이다. 많은 원인 중에는 투자한 자본을 짧은 기간에 회수하고 싶다는 욕망도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승객에 대한 안전이라는 기본을 무시된다. 작은 폐단이 모여서 결국은 어느 순간에 터지는 풍선처럼 위험한 나라를 살얼음판 다니듯 해야 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선진국 모습은 아니다. ‘벼락치기’는 벼락처럼 쉽게 무너질 수 있다. 한국 사회의 조급증이나 빨리빨리 증상은 짧은 시간에 큰 성과를 얻겠다는 욕심에서 나온 것이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겠지만 결국에는 기반 없이 높이 올린 컵처럼 일시에 전체가 파괴되는 모습은 예상되는 결과이다. 한국은 개발도상국에서 중진국으로,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성장했다. 이제 속도보다 내실을 튼튼히 하는 사회적 인식이나 태도가 필요하다. 콘텐츠 준비, 학생에 대한 면밀한 조사, 시스템 실험에 대한 경과 기간 없이 인공지능형 디지털교과서를 도입하려 하고 있다. 한 방에 모든 수준별 학습이 이루어지고 저절로 형성평가가 되고 수준별 평가가 되고 자율학습이 되어 교육 문제가 일거에 해소되리라는 것도 ‘한 방’의 욕심이다. 모든 것을 한 방에 해결한다는 약 선전이 있다. 그 약은 거의 만병통치약이고 가장 효과가 빠른 약이라고 선전을 하지만 실상은 그런 약은 과대 선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주가 하루에 이루어지지 않듯이 자연인 사물의 일에서 한 방에 해결되는 일은 극히 드물거나 거의 없다. 서서히 단계를 밟아가면서 진화하고 변화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사교육이라는 것도 결국은 남보다 한발 앞서서 가고 싶은 부모의 욕망이다.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에게 어려운 선행학습을 시키는 것도 한 줄로 높게 벽돌을 쌓아 올리는 것과 같은 매우 위험한 태도이다. 한 방에 대한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거대한 참사는 반복될 수 있다. 꽃은 하루아침의 햇살로 피어나지 않는다. 대추 한 알도 그냥 여무는 것이 아니다. 적금과 같이 차근차근 쌓아야 무너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요즘 교육정책도 한 방으로 해결하려는 모습이 보여서 위험스럽기만 하다. 수천 년을 견딘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교육정책은 하나하나 차근차근 쌓아나가야 한다. ▣ 김홍제 ◇ 충청남도천안교육지원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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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09
  • [전재학의 교육칼럼] 청소년 교육에 ‘헌법교육’을 보다 체계화하자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잠시 미국의 한 군인 이야기를 먼저 시작해 보려고 한다. 2023년 9월, 미군 내 1인자인 마크 밀리 합참의장이 전역을 했다. 그는 2019년 10월 육군참모총장으로 재직 시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 임기 4년의 합참의장에 취임했다. 2020년 5~6월, 조지 플로이드 죽음에 항의하며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를 외치는 시위대가 백악관 주변까지 몰려들자 트럼프 대통령은 군대 출동을 명령했다. 하지만 밀리 대장은 자신을 합참의장으로 발탁한 대통령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 지휘관들에게 지휘 서신을 보내 “미군의 임무는 대통령의 일방적 지시에 복종하는 게 아니라 수정헌법의 가치(종교⋅언론⋅청원⋅출판⋅집회의 자유)를 수호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반적으로 군인이라면 상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형법 제47조에서도 ‘명령 위반’ 관련, 정당한 명령 또는 규칙을 준수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 이를 위반하거나 준수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에 처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다만 단서 조항인 ‘정당한 명령’이라는 문구는 장병들이 스스로 판단하기에 애매한 측면이 있다. 군인은 중요한 순간에 머뭇거림으로써 임무 수행을 망칠 수 있다. 또한 전쟁터는 그렇게 시간이 여유롭지 않다. 비상식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수없이 벌어진다. 하지만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우선 사항이 있다. 바로 헌법이다.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헌법 준수를 맹세하는 것처럼 대한민국 장교도 임관 시 “나는 대한민국의 장교로서 국기와 국민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헌법과 법규를 준수하며 부여된 직책과 임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라고 외친다. 그만큼 군인은 군인의 기초인 제식훈련보다 먼저 교육받고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 헌법인 것이다. 주지하는 바처럼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천명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문장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군인들이 명령의 정당성에 대한 판단이 어려울 경우, 헌법 1조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 할 것이다. 12⋅3 비상계엄이 가져다 준 결과로 현재 대한민국은 헌법 관련 책에 일반인들은 물론 초중고 학생들까지도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선생님, 비상계엄이 뭐예요?” “탄핵소추권은 뭐지요?” “삼권분립은 민주주의에 반드시 필요한가요?” 이는 최근 초⋅중⋅고생들이 학교에서 교사들에게 매우 궁금하게 질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써 학교에서의 민주주의 교육과 민주시민 육성을 위한 매우 소중한 동기로 작용하고 있다. 결국 대한민국 국민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국가 존립의 근본인 헌법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공부하려고 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이는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민주시민으로 살아가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음에 의도하지 않은 잠재적 교육과정으로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 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한다. 비록 이번 12⋅3 비상계엄은 피를 부르지 않고 진화되었고 국가의 파국을 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계엄계획과 실행의 전모가 하나씩 밝혀지면서 왜 우리가 계엄에 대한 심각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가를 증명하고 있다. 역사상 군부 독재에 의한 정치의 혼란과 민주주의의 파괴는 엄청난 후유증으로 국민 모두에게 얼마나 고통과 상처, 희생을 초래했는지를 우리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2021년 당당히 선진국으로 진입한 대한민국은 명목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성숙한 선진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체제를 강력하게 견지(堅持)해야 한다. 그러려면 국가의 근간인 헌법을 지키고 준수하는 정신이 가장 중요하다. 이를 위해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교육받고 각인된 헌법 정신은 12⋅3 비상계엄과 같은 국가의 위기를 예방하고 이 땅에 일상적 삶에서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강력한 ‘국민행동강령’이 될 것이다. 이에 학교급별로 체계화된 ‘헌법교육’이 토의⋅토론과 논⋅서술식의 교육으로 이루어지면 어려서부터 이 나라를 민주공화국으로 보존하고 어떠한 강풍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가 될 것이라 믿는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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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08
  • [풀꽃 산책] 냉이꽃 - 거기 소문 없이 피어 있는 꽃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강세화님의 「나도 냉이다」란 시를 보자. 길바닥 갈라진 틈을 보아 비집고 다붙어 용쓰고 애쓰고 곁가지도 뻗으며 솔솔한 웃음기를 바람에 띄우면서 초여름 햇살을 바라지하는 거기 소문 없이 냉이 꽃이 피어 있다. 곁에서 잊고 사는 이 땅의 이름이여.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아도 서운해할 겨를도 없이 도시의 한 구석배기를 차지하고 다물고 치뜨고 하늘을 바라고 들어봐 안쓰럽게 밭은 소리를 외고 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소문 없이 우리 주위에서 쉽게 피어난 냉이꽃을 본다. 그러나 그냥 무심코 지나칠 수 없는 상큼한 향기의 봄을 가졌다. 그래서 냉이는 카이로스로 꽉 채워졌다. 냉이는 발아하기 적당하다고 한꺼번에 싹을 틔우지 않는다. 순식간에 모두 죽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잡초는 발아 시기를 늘려가면서 위험의 분산을 꾀한다. 냉이도 발아 시기가 길다. 이는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주거환경이 원인이다. 냉이는 봄날이 아니라 여름에도 가을에도 계속해서 싹을 틔우고 있다. 하지만 땅 위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냉이는 방사성 모양으로 잎을 땅 위에 납작 엎드린 채로 땅 위로 부는 찬바람을 견딘다. 땅바닥에 편평하게 누워 있기에 매서운 겨울바람을 피하면서도 광합성을 통해 영양분을 모은다. 가장 추운 달에도 계속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은 생존의 열쇠다. 마침내 봄이 오면 냉이는 꽃을 피우고 번식할 준비를 한다. 보상의 수레바퀴는 천천히 돈다. 인내와 준비는 항상 새로운 성장과 풍요로 보상된다. 잎을 펼치고 있기에 겨울 동안에도 광합성을 할 수 있다. 라이벌이 적은 시기에 조금 일찍 꽃을 피우면 꽃을 찾아오는 벌레를 독차지 할 수 있다. 냉이가 광합성을 하면서 거친 바람을 피하기 위해 땅에 가까이 붙어 있는 것처럼, 인간도 조용하고 겸손한 방법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필요는 없다. 냉이는 경쟁자가 없는 틈을 이용하여 꽃가루 매개자의 관심을 확보하기 위해 일찍 꽃을 피운다. 이것은 인간의 삶에서 타이밍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들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거나 조건이 적절할 때 기회를 포착하면 상당한 이점을 얻을 수 있다. 겨울 동안 냉이의 자세는 방어적이면서도 공격적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낮게 유지되지만 봄에 일찍 꽃을 피울 준비도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생에서도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것과 때가 되면 주도권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변화와 항상성은 삶을 살아가는 균형 인자다. 장기적인 성공을 위해서는 두 가지 조치가 모두 필요하다. 희랍어에서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는 둘이다. 하나는 ‘크로노스’이고,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다. 전자는 ‘흐르는 시간’을 말한다. 아무런 의미 없이 살아가는 시간이다. 흐르는 시간 속에 자신을 던져 넣는 삶이다. 이런 삶은 세월의 주름살만 흔적으로 남는다. 후자는 의미 있는, 가치 있는, 보람 있는 시간을 말한다. 크로노스를 카이로스로 돌려놓아야 한다. 낚시할 때 미끼를 꿰어놓고 낚싯대에 물고기가 걸려 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기다리는 시간은 크로노스다. 이것을 카이로스로 바꾸려면 대어를 낚아야 한다. 물고기를 낚아야 물고기를 잡으려고 기다리는 시간이 의미 있는 시간으로 바뀐다. 삶에서 크로노스의 굴레를 벗어나려면 미래를 위하여 투자해야 한다. 재미 없는 책도 읽어야 하고, 혹독한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도전해야 한다. 냉이도 혹독한 추위 속에서 찬 바람을 견디는 것은 크로노스를 카이로스로 바꾸려는 의도가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것은 냉이의 꿈을 실현하려는 의지의 행동이다. 이듬해 봄에 푸릇한 새순으로 피어올라, 이른 봄, 꽃들의 향연으로 만들려는 의도다. 이렇게 냉이는 카이로스로 채워진다. 냉이꽃의 꽃말은 ‘모든 것을 당신에게 바친다’이다. 이 꽃말에서 모든 것은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크로노스가 아닌 카이로스로 채워진 냉이는 당신에게 바칠 자격이 있다. 인간이 냉이꽃에 배워야 할 교훈이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푸름을 잃지 않는 냉이의 생명력과 냉이의 베풂을 기억하자.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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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02
  • [김홍제의 목요칼럼] 교장과 교감도 학교 가기 싫다는 세태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교육 현장에서 갑질이라고 하면 교장을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요즘 교장, 교감이 명예퇴직을 하는 사례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관리자들도 현장을 떠나고 있다. 그들은 젊은 시절에 돈을 받지 않고도 저녁 늦게까지 학생을 지도하고 나이 든 선배교사를 ‘모시듯’ 하며 살았던 세대였다. 젊은 시절에 어려운 것을 도맡아 하는 것도 당연시하고 살았다. 65세 정년이었던 시절에 나이가 많은 교사의 수업을 더 많이 가져가서 수업을 했다. 세태가 변했다. 나이가 많은 교사와 젊은 교사들은 이제 N분의 1로 수업시간을 감당한다. 젊은 여교사는 출산 때문에 손이 많은 가는 업무를 하기 어렵고 젊은 남교사도 워라벨을 말하며 자신의 일 외에는 관심이 없다. 돈을 주지 않는 일이나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은 기피하고 있다. 사명감으로 희생을 하면서라도 학생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철 지난 이야기가 되었다. 승진 점수, 수당이 있어야 움직인다. 교육청에 있으면 상사의 정당한 업무지시조차도 갑질로 신고하는 사례를 본다. 금요일에는 교사들이 조퇴를 해서 많은 교사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연가를 내는 것도 관리자에게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새로운 업무가 중간에 생겨서 업무조정을 하려면 관리자가 교사의 눈치를 보게 된다. 관리자가 냉가슴 앓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세상이 변하면서 학교는 많은 것을 떠맡게 되었다. 인공지능, 급식, 인성, 흡연지도, 급식지도 등과 안전과 관련된 많은 공문이나 조례가 쏟아지고 있다. 새롭게 만든 업무를 서로 맡지 않으려고 교사와 교사, 교사와 행정실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 교육행정을 감시하라고 만든 교육위원들은 많은 조례를 계속 만들어 내고 있다. 3년 간의 자료를 요구하는 의원들도 많다. 견디든지 떠나든지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은 젊은 교사와 나이 많은 교사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다. 목소리 큰 사람, 뻔뻔한 사람이 더 편안한 업무를 맡아 편안히 살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요즘 학생과 교사는 모두가 귀한 대접을 받고 자란 세대이다. 한정된 자원과 시설로 일정한 교육과정에 의해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학교에서 이들의 욕구와 요구를 모두 받아 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염증을 느껴서 수십 년간 근무했던 직장을 중도에 그만두는 것은 국가적이나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100세 시대를 말하고 있지만 100년 교육쳬계라는 말은 이제 허울적 구호조차 사라지고 있다. 인간적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일들이 교육현장에 쌓이고 있다. 대안은 학교가 인간적인 공동체로서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다. 학교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곳이어야 한다. 교사와 관리자가 서로 적대하는 문화에서는 긍정적 에너지가 나올 수 없다. 관리자도 교사도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출근할 수 있어야 한다. 교장과 교감마저 떠나고 싶어하는 학교의 교육활동이 만족스러울 리 없기 때문이다. ▣ 김홍제 ◇ 충청남도천안교육지원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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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26
  • [풀꽃 산책] 프롤로그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나이가 이순에 닿자 작은 것들이 예뻐 보인다. 산책하는 중에 어린아이가 보이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짓는다. 풀들 사이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를 작은 꽃들에 눈길이 가는 것은 아마 나이 탓인가 싶다. 이순의 나이에는 자연에 순응하라는 신의 배려인가 보다. 큰 것보다는 작은 것에, 높은 곳보다는 낮은 곳에, 승자보다는 패자에게 애틋한 마음이 간다. 송알송알 싸리잎에 은구슬 조롱조롱 거미줄에 옥구슬 대롱대롱 풀잎마다 총총 방긋 웃는 꽃잎마다 송송송 고이고이 오색실에 꿰어서 달빛 새는 창문가에 두라고 포슬포슬 구슬비는 종일 예쁜 구슬 맺히면서 솔솔솔 (하략) 권오순 선생님의 ‘구슬비’라는 시다. 동요로도 널리 알려진 노래다. 청정한 삶을 살아온 시인의 마음이 잘 나타난 시다. 특히 '송알송알', '송송송(솔솔솔)'이 주는 7음절의 시어는 수정과도 같은 깨끗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마치 시어를 동심의 바다에 빠뜨렸다가 끄집어낸 것과 같은 맑음을 준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등교하면서 늘 부르던 노랫말이다. 그땐 몰랐는데 나이가 들수록 점점 이 노래의 가사에 빠져든다. 작은 것이 만드는 거대한 세상에 대해 생각했다. E.F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에서 “하나뿐인 지구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다. 작은 것은 자유롭고 창조적이고 효과적이며, 편하고 즐겁고 영원하다”라고 했다. 작고 보잘것없는 것에 눈길이 가고 그런 환경에서 핀 풀꽃에 애틋한 시선이 간다. 특히 잡초가 그렇다. 잡초는 있어 봐야 아무 쓸모도 없으니까 다 없애버리는 게 좋지 않으냐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잡초는 인간과 한 공간에서 살도록 태어난, 본래부터 공생할 수밖에 없는 식물이다. 잡초가 잡초답게 살 수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 어떻게 인간답게 살 수 있겠는가? 인간이 정해놓은 평가 기준에 따라 좋다 나쁘다고 분별하기보다 다양성이 풍부한 쪽을 선택하고 그렇게 사는 삶의 방식을 우리는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겠다. (출처: 이나가키 히데히로, 『풀들이 전략』) 가이아(초기의 지구)는 잡초에 의해 아름다워지고, 인류에 의해 황폐해졌다. 가이아의 입장에서는 인간이야말로 잡초다. 알프레드 크로스비(Alfred W. Crosby, 미국의 역사학자)는 “잡초는 지구의 건강에 긴급사태가 생기면 달려가 처리하는 식물계의 적십자다. 그리고 자기보다 크고 튼튼하게 자라는 나무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결국 잡초는 가이아의 백혈구이자 항생제다. 사람들아 잡초라고 함부로 짓밟지 마라 쇠뜨기 명아주 애기똥풀 개망초 며느리배꼽 식물도감에 버젓이 올라 있는 고향을 지키는 민초들이다. 거친 산야 살찌게 하는 우리는 꽃이다. 한 송이 꽃도 피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잡초다. (김종익 시인의 「잡초」) 어쩌면 잡초가 인간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사는지도 모른다. 잡초는 말 그대로 잡다한 풀(雜草)이다. 그래도 사람들에게, 짐승들에게 짓밟혀도 꿋꿋이 일어나 자신의 꽃을 피우며 들판을 푸르게 한다. 인간은 자연을 어지럽히고 온갖 쓰레기를 만든다. 지구의 입장에서 누가 더 나을까? 앞으로 [풀꽃 산책] 칼럼에서는 잡초 같은 풀꽃들의 렌즈를 통해 인간들의 삶에 대한 사색과 성찰을 펼치겠다. 아울러 풀꽃에서 발견되는 탄력성과 아름다움을 살펴보는 작업을 겸하겠다. 독자들의 많은 편달을 바란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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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25
  • [전재학의 교육칼럼] 왜 ‘인간’을 넘어 ‘사람’이 되기 위한 교육이어야 하는가?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인간’과 ‘사람’은 완전 동일어인가? 아니면 현격한 의미 차이를 가진 말인가? 이에 대해 우리 사회는 별다르게 구분하지 않고 상호교환 하듯이 쓰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이란 단어는 좀 부정적인 뉘앙스(예, 개만도 못한 인간)가 있는 반면에 사람이란 단어는 다소 긍정적인 뉘앙스(예,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를 풍기고 있다. 이 단어들이 쓰인 표현들을 좀 더 비교분석해보면 인간은 선천적이고 수동적인 존재라면, 사람은 후천적이고 능동적인 존재로 판명된다. 이는 교육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또 교육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사람은 되어가는 존재이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사람이 되어가는 정도를 사람 ‘됨됨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구실’이라는 단어와 조합을 이룬다. 즉, 사람은 그냥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어떤 가치 있는 목표를 향해 제구실을 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사람이 되어야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살릴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로 간주한다. 바로 여기에 가르치고(敎) 기르는(育) 역할이 필요하고 이는 ‘사람다운 사람’ 육성이란 숭고한 교육 목표가 되는 것이다. 교육은 양육과 훈육이란 방식을 통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존재를, 사람 구실하며 가치 있게 살아가는 존재로 성장시켜 준다. 이는 인간은 명사이며, 사람은 동명사로 움직임을 전제로 양자를 구분한다. 움직임에는 시간의 흐름이 있으며 그래서 과거와 현재가 있고 그 사이에 개인의 스토리가 역사로 존재하며 꿈과 비전이 함께 목표로 존재한다. 바로 교육은 그 움직임을 사람다운 사람으로 기르기 위해 통제(돌봄)하고 관리(보호)하는 책임을 사명으로 한다. 따라서 교육자는 아이들이 어떤 비전과 열정을 품고 살아가는지, 어떤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와 앞으로 어떻게 살고자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교육은 지금처럼 단지 아이들의 스펙을 높게 쌓아주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좋은 스토리로 자신을 꾸미고 채우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렇듯 교육은 아이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고유한 이야기를 창조하도록 키우고 도와주며 보살펴 주어야 한다는 당위론에 이른다. 우리의 학생들은 고교 시절 대학입학을 위해서든, 대학 시절 취업을 위해서든 남보다 돋보이기 위해 많은 스펙을 쌓아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스펙 쌓기는 곧 양적 비교에서 남보다 더 높거나 많은 것으로 인해 이른바 베스트가 되고자 하는 경쟁이다. 이는 내신 성적, 토플⋅토익점수, 각종 수상 실적, 봉사활동 횟수 등 한정된 몇 가지 항목만의 내적 경쟁이다. 이는 인간 됨됨이나 성숙도, 그리고 품격 있는 행동으로 이끄는 봉사와 선행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오히려 피 터지는 각자도생의 경쟁에서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심과 출세와 성공의 맹목적성이 확실히 드러나 바람직한 인성, 성숙한 인격도야는 상대적으로 소홀하기 쉽다. 교육으로 기르는 학생 개개인의 스토리는 타인과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이 핵심 개념이다. 즉, 모두에게 해당하는 보편적인(Universal)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고유한 특성이 드러난 자신만의 독특한(Unique) 것이다. 이는 유사성이 아닌 유일성이 핵심이다. 또한 남과 다름으로 죽을 때까지 자신만의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개개인의 스토리는 인간의 특성을 넘어서 사람이 되어가는 품격이자 업그레이드 된 개성이다. 이는 저절로 주어지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의도하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계발하는 자세와 노력의 산물이다. 학생으로서 스스로의 인생을 진심으로 살아온 사람은 남에게 감동을 주기 마련이다. 이는 벼락치기 공부와 시험 날 컨디션에 따라 특별하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절차탁마의 수련과 학습과정이 요구된다. 여기에는 단지 인간으로서의 존재감만이 아닌 사람답게 살려는 의지와 행동, 그리고 바람직한 스토리가 각자의 역사에 녹아 들어야 한다. 결국 단순한 인간의 범주를 넘어 사람답게 살도록 하는 지속적인 교육의 뒷받침이 있어야 가능하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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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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