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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육우균의 周易산책] 하늘은 하느님이다(중천건괘) 上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하늘은 광활한 공간이다. 한없이 열려 있다. 현대 수학으로는 ‘∞’라 표시한다. 하늘은 무한을 상징한다. 상상으로 공간은 확장된다. 실물을 볼 수 없을 때, 우리는 눈을 감는다. 즉 하늘은 확산의 존재를 가리킨다. ‘하늘’은 ‘한+늘’(ㄴ탈락)에서 왔다. ‘한’은 ‘크다’의 의미고, ‘늘’은 ‘시간의 영속성’, 즉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져 흘러가는 시간’을 가리킨다. ‘한’은 무한 공간, ‘늘’은 무한 시간을 말한다. 한자문화권에서도 ‘우주(宇宙)’라고 할 때 우(宇)는 공간을, 주(宙)는 시간을 의미했다. 즉 ‘우주’의 순우리말이 ‘하늘’이다. 주역에서 하늘은 ‘☰’로 표시한다. 양의 성질이 세 개나 있다. 따라서 ‘하늘이란 무한히 확산되는 그 무엇’이라 정의한다. 「대상전」에 보면 “하늘의 운행하는 모습이 건강하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쉼 없이 자신의 힘으로 자기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天行, 健, 君子以自强不息)라고 씌어 있다. 하늘을 잘 관찰해 보면 천체의 운행이 잠시도 쉬지 않고 운행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하늘은 하느님이다. 즉 하늘은 완전하여 거칠 것 없이 무한히 확장하는 성질로 신과 같이 우러러본 자연이다. 우리 선조들은 해가 뜨고 지는 일, 달이 뜨고 지는 일, 12황도의 움직임, 밀물과 썰물이 끊임없이 바뀌는 일 등 그런 건강한 모습을 닮고자 했다. 모든 살아있는 생물들은 잠시도 쉬지 않는다. 움직임이 지속되어야 건강하다. 동물은 움직여야 한다. 식물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끊임없이 물을 땅 속에서 끌어올려 이파리로 올려주고 이파리들은 쉴 새 없이 광합성 작용을 한다. 건강한 사람의 몸속 세포도 쉴 사이 없이 움직인다. 용으로 상징되는 중천건괘의 효사93을 보더라도 ‘하루 종일 자강불식하는 자세로 씩씩하고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고 되어 있다. 93의 효에서 94의 효로 올라가려면, 즉 민중의 자리에서 지배의 자리로 올라서려면 하늘의 “끊임없는 운행을 본받아 잠시도 쉬지 않고 ‘자강불식(自强不息)’하는 노력을 보여야 한다는 것을 『주역』은 말하고 있다. ‘중천건괘’의 모습이 잘 나타난 소설은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의 『연금술사』이다. 『연금술사』는 개인 전설 또는 인생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양치기 소년 산티아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산티아고의 여정을 따라가 보자. 주인공 산티아고는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양 60마리를 키우는 양치기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집트 피라미드 가까운 곳에 보물이 묻혀 있다는 말을 듣는다. 여정이 시작된다. 크리스탈 가게에서 일하게 된다. 거기에서 양들이 가르쳐 주지 못한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제 피라미드에 갈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을 가지게 된 산티아고는 삶에서 여러 다양한 경험들을 하게 된다. 그는 영국인도 만나고, 낙타몰이꾼도 만나고, 대상행렬을 따라가며 사막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오아시스에서 파티마라는 아리따운 여인과 사랑에 빠지고, 환상의 꿈을 꾼다. 산티아고는 여정에서 ‘모든 일에는 결국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그 많은 시련과 시험에도 불구하고 신의 손길은 언제나 한없이 자애롭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자아의 신화’를 이루려면 단순함 때문에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던 신의 표지들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신의 표지란 나의 인생에서 만나게 된 사람들이 나에게 해준 말이다. 나와 관계된 사람들은 신의 대리인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들과 소통하게 되고, 그것이 결국 우주와의 소통이요, 신과의 대화인 것이다. 내가 하루 동안에 만난 사람들, 쓰레기 청소부, 배달하는 사람, 집주인, 직장 상사나 부하 직원 등이 모두 신의 표지가 될 수 있다. 그들이 바로 신의 대리인들이다. 산티아고가 피라미드로 가는 여정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그러므로 하루하루 자아의 신화를 살아가는 세상 모든 사람 앞에 위대한 업은 열려 있는 것이다. ‘위대한 업’은 자기가 처한 현실에서의 충실함이다. CBS에서 아침에 방송하는 ‘김용신의 <그대와 여는 아침>’ 프로그램 맨 마지막 멘트가 ‘오.하.당’이다. “오늘 하루도 당신 거예요.”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24시간. 즉 하루를 주인으로 살아내는 것이 바로 위대한 업을 만들어 가는 일인 것이다. 늙은 왕이 산티아고에게 해 준 말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된 유일한 의무지.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연금술사』에서 나온 이 말은 너무나 유명해진 말이다.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일은 곧 우리에게 예정된 진정한 보물을 찾아내는 일이고, 그것이 바로 삶의 연금술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아의 신화는 결국 주역의 중천건괘에서 말하는 ‘자강불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꽃 한 송이가 피어나려면 사계절이 모두 필요하듯이 한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 전체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진정한 보물을 찾기 위해 떠나지 마라. 현실에 얽매여서 진정한 인생의 보물을 찾을 수 없다고 변명도 하지 마라. 현재를 열심히 성실히 자강불식하면서 살아라. 그것이 자아의 신화에서 진정한 보물을 갖게 되는 길임을 『연금술사』에서 보여준다. 우리는 과거에 사는 것도 아니고, 미래에 사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현재에 사는 것이다. 생명은 지금 이 순간에만 영원한 것이다. 현재에 머물 수 있다면 행복한 것이다. 자신의 진정한 보물이 무엇이겠는가. 현실을 열심히 살아가면서 발견하게 되는 자신의 가치인 것이다. 『금강경』에서도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고서 행한 일이 아주 일상적인 일이었다. 발 씻고 방석에 가만히 앉아 밥 먹고 강의했다. 현실에 매어져 있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행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연금술사』를 쓴 파울로 코엘료가 한 말- “성모 마리아께서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수도원을 찾았을 때, 곡마단에서 일하던 아버지로부터 공을 가지고 노는 기술을 배운 게 고작이었던 볼품없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아기 예수와 성모께 자신의 마음을 바치고 싶어 했었기 때문에, 그는 주머니에서 오렌지 몇 개를 꺼내 공중에 던지며 놀기 시작했고, 그것을 본 아기 예수가 처음으로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성모께서는 그 사제에게만 아기 예수를 안아볼 수 있는 영광을 허락했다. 그가 보여드릴 수 있는 유일한 재주였다. 우리 선조들은 마음속으로 염원을 할 필요가 있을 때 달이 뜨는 밤에 장독대에 정화수 한 그릇을 떠놓고 홀로 기도를 올렸다. 그 오롯한 한 마음, 당연히 신이 함께 하지 않겠는가.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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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3
  • [김홍제의 목요칼럼] 요즘 젊은 사람들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차가 움직이지 않았다. 여러 번 시동을 걸어도 ‘딱딱딱딱’하는 소리만 나면서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3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라서 자동차 안은 모래 없는 사막이었다. 땀도 흐르고 인내심도 바닥을 쳤다. 제주해비치아트페스티벌에 참여하느라 여러 날 동안 제주도 출장을 다녀왔다. 천안에 오니 더운 날씨에 며칠 동안 자동차를 그대로 두어서인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보험회사 고장출동 서비스를 신청했다. 10여 분 후에 50대 후반의 남자가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차에서 내렸다. 사장은 푸념조로 말했다. “이제 이 일도 더 못할 것 같아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하려고 하지를 않아요. 직업 찾기가 힘들다고 아우성을 하면서도 이 일을 하려는 사람이 없어요. 혼자서 여러 가지를 하려니 힘이 들어요. 이제 이 일도 오래 못할 것 같습니다.” 사장은 시동이 걸리도록 배터리를 임시로 충전시켜 주었다. 에어컨을 켜지 말고 한 시간 이상을 시동이 꺼지지 않게 운전하며 돌아다니라고 했다. 20분이면 집에 도착을 하는데 갈 곳이 없었다. 야산 근처에 차를 대놓고 시동을 켜놓았다. 바람이 불어왔다. 아카시아 나무가 흔들리고 나무 아래에서는 차분하고 곱게 핀 망초꽃이 바람에 흔들렸다. 춤을 추는 듯 보였다. 강한 햇살에 나무와 풀들은 싱싱해 보였다. 자족이란 저런 것인가. 스스로 가진 것을 충분히 활용하고 생명력을 발산하는 식물들의 행복은 조용하고도 깊었다. 교사는 학생들의 잠재력을 찾아주어야 한다고 배웠다. 나는 학생들의 잠재력을 얼마나 잘 찾아주었던가. 그들의 행복에 얼마나 기여했을까. 요즘 젊은이들은 힘들다. 배우고 경험해야 할 것들은 과거보다 많아졌다. 갈등이 많은 시대이고 걱정이 많은 시대이다. 상대적 빈곤을 느끼고 피로감이 심한 시대이다. 진정한 스승은 보이지 않고 사방에서 경쟁적으로 몸과 능력에 숫자로 점수를 매긴다. 그들은 외모, 능력, 유머를 장착하고 로봇이나 컴퓨터 프로그램과 경쟁해야 할 수도 있다.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누구일까. 맞벌이를 하며 바쁜 부모일까. 내신 성적으로 경쟁을 하는 학교 친구일까. 소비를 조장하는 게임회사일까. 교육정책을 펴는 교육부일까. 학교홍보에 열을 올리는 대학일까. 학생이나 학부형에게 고소를 당할까 걱정하는 교사일까. 진정한 사랑이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들이 어떤 말과 생각을 하는지 들어주어야 한다. 젊은이들이 나이 많은 사람들의 말과 생각을 받아 적게만 하는 교육은 지양해야 한다. 그들이 하는 말을 진지하게 들어야 한다. 지금 있는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해야 한다. 본래 가지고 있는 것 이상을 요구할 때 관계는 힘들어진다. 욕심이 생기고 비교를 하면 서로가 불행해진다. 아기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 자기 안에서 만족감을 찾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자아실현은 자신에게 솔직하고 충실한 것이 우선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인정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존중할 수 있다. 구속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자신을 온전히 책임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가 욕망했지만 이루지 못했던 성공 욕구를 자식에게 투사하지 말아야 한다.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삶을 돌려주어야 한다. 그들이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이 처한 현실을 사랑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중요한 내용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강요의 교육이 궁극적으로 성공한 적은 없다. 강요의 교육은 노예로 만드는 교육이다. 다음 날 아침에 출근을 하려고 시동을 거니 차는 다시 딱딱거리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고장출동 서비스에 전화를 했다. 지역이 달라서 어제와는 다른 사장이 왔는데 어제와 비슷한 50대 후반의 남자였다. 아침 면도를 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차에 상황 설명을 하자 배터리를 교환해야 한다고 했다. 서비스센터 사장은 배터리를 교환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이제 이 일 오래 못할 듯합니다.” 익숙한 말이었다. 어제 들은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 일을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했는데 젊은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내 모습을 보면서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기름을 3리터 보충하면 정확히 양이 맞느냐 어떤 회사 기름이냐 속이지는 않았느냐 등 불만과 의심을 계속합니다. 자식 같은 젊은이에게 그런 말에 대해 고분고분 대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는 차분하게 배터리를 교환했다. 나는 수리비를 계좌로 송금하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고개까지 숙이며 몇 번이나 했다. 어디를 가고 있다가 차가 고장 나서 움직이지 못하면 낭패감을 느낀다. 그때 정비 기사가 와서 수리를 해 주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고마웠다. 왜 요즘 젊은 사람들은 고마움보다는 서비스의 질을 의심하고 불만을 말하는 것일까. 소비시대에 ‘손님은 왕이다’라는 기업의 광고를 정말이라고 믿어서일까. 자신의 어려움을 없애 주고 나이도 자신보다 많은 분에게 감사인사를 먼저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에게도 이런 태도라면 다른 상황에서는 어떨 것인가. 마음이 거북하다. 감사함이나 부끄러움을 아는 예쁜 마음들이 사라지고 있다. 상대방에 대한 예의보다는 나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요즘 젊은이가 많아 보인다. 가정이나 사회에서 배웠을까. 내가 손해 보지 않겠다는 마음과 내 권리주장에 충실하면 똑똑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가치관이 있는 것일까. 사회에 꼭 필요하지만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는 젊은이와 감사와 고마움을 모르는 젊은이들이 많아진다면 우리의 미래는 캄캄한 터널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우리의 교육은 경제성장을 이루는 일에 큰 기반이 되었지만 내적인 성장에 대한 교육은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젊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스승이 보여주는 지표가 보이지 않고 있다. 올바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고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을 공존하는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우리의 미래는 젊은 사람들에게 있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학생교육문화원 예술진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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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2
  • [10대인생학교 행복교육] 독자의 메세지
    [교육연합신문=전준우 칼럼] 인스타그램에서 메시지를 받았다. '전준우 작가님, 안녕하세요?'하고 시작하는 장문의 메시지였다. 연기를 전공한 27살의 젊은 청년이었다. 자기 계발과 책 쓰기에 관심이 있어서 이런저런 책을 찾아보던 중, 우연히 <탁월한 책쓰기>를 읽게 되었고, 무척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며 감사하다는 메세지를 보내왔다. 나도 '좋은 인연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하고 답장을 했고, 맞팔을 했다. 최근에 물류회사를 인수했다. 새벽 4시 반에 출근해서 저녁 6시에 퇴근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새벽 4시에 일어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책을 쓰고 독서를 하기 위해서 4시에 일어나는 것과 일을 하기 위해 4시에 일어나는 것은 꽤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생각보다 중노동이었다. 직원도 한 명 뽑았지만, 4시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일을 처리하는 데 10시간이 걸렸다. 직원관리, 일처리, 재무, 회계, 세금처리까지 어느것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너무 바빠서 육아와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 이어졌다. 일상이 지쳐갔다. 김훈 작가의 책 <연필로 글쓰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나온다. 동네에서 만난 어린 아이랑 아이의 엄마가 김훈 작가를 향해 '할아버지'하고 이야기한 것이었다. 마을 할머니들이 둘러앉아서 이야기하는 몰래 엿듣는 내용도 나온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안 나는데 대충 그런 내용이다. 흥미로웠다. 일흔이 훌쩍 넘는 노신사에게 할아버지라고 이야기한 게 뭐 그리 대수이며, 마을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행위가 뭐 그리 추천할 만한 일일까마는, 나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김훈 작가는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이며,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는 대大작가다. 김훈 작가의 책은 출간되는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고, 그만의 독특한 문체와 탄탄한 스토리 구성 능력은 상당히 뛰어나다. 수십 년간 신문 기자로 살아오면서 터득된 기술일 수도 있고, 내면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는 자신만의 독특한 능력일 수도 있다. 여하튼 평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거나 정경사문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김훈'이라는 이름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럼에도 그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는 그저 하릴없이 시간만 때우는 '할아버지'이며, 할머니들의 속내를 엿듣기 위해 곁귀를 쫑긋 세우고 연신 입을 삐쭉거리는 동네 할배에 불과한 것이다. 나를 돌아보았다. 작가는 무엇일까. 작가는 뭘 하는 사람일까. 책을 쓰는 것, 작가가 되는 것, 소설가가 되는 것. 그것은 어린 시절에 내가 가졌던 막연한 꿈이었다. 그렇기에 책을 출간해서 작가가 되고 난 뒤, 이후에도 몇 권의 원고들이 출판사와 계약이 되고 난 뒤, 소설 집필작업이 막바지에 다다른 어느 순간, 막연한 꿈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놀랍도록 즐거워하고 행복해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별다른 변화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한 권 두 권 쓰다 보니 책을 써내는 게 어렵지 않게 느껴졌고, 꿈이란 게 이다지도 시시한 것에 불과한 것인가 하는 자괴감까지 들었기 때문이다. 30도를 웃도는 날씨에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일을 하는 것도 나로 하여금 작가로서의 삶보다는 돈의 노예가 되어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듯해서 마음을 꽤 심란하게 만들었다. 그렇다 보니 글을 쓰는 행위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며 밥벌이를 하는 요즘, 내가 작가라는 사실이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에 꽤 오랫동안 마음을 두고 살아왔다. 까짓것 책 몇 권 써낸다고 해서 그 자체가 큰돈이 될 리도 없을뿐더러, 살면서 책 몇 권 써낸 사람들도 세상에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학원 강사로 일하는 아내는 오후 3시쯤 출근해서 밤 11시, 12시가 되어 들어오는데, 덕분에 저녁 시간 육아를 병행하며 글까지 써내는 것도 상당히 버겁고 힘든 일로 느껴졌다. 돈이나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매일 주야장천 글이나 쓰고 책이나 읽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랬겠지만. 그때 20대 젊은 독자의 메시지를 받은 것이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주인공은 디스토피아 세계를 향한 반항의 일환으로 노트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무척 위험한 일이다. 걸리는 순간 사형이다. 사각사각 글 쓰는 소리도 도청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그는 글을 쓴다. 체제에 대한 반항, 자유를 향한 몸부림, 숨죽여가며 글을 쓰는 행위에 그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셈이다. 난데없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물류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으나, 적어도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사형당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글을 쓰며 살고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독자가 남긴 메시지가 주는 울림은 컸다. 나는 다시 책을 손에 쥐었고, 펜을 들고 밑줄을 그으며 문장들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노트를 펴서 글을 쓰고, 노트북을 열어 브런치 창을 켜고, <작가의 서랍>에 저장해 두었던 원고들을 꺼내서 수정하기 시작했다. 밀린 칼럼을 쓰고, 묵혀두었던 소설의 퇴고를 시작했고, 출판사 등록서류도 마무리지었다.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오묘하고 놀라운 즐거움인지 모른다. 책을 출간하고 난 뒤, 무슨 일을 했던지간에, 나는 작가로 살아왔다.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나에게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고,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며, 또 그 자체 만으로도 상당히 의미 있는 일들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서두르지 않고, 그렇다고 지체하지도 않고 꾸준히 글을 써 왔다. 그 행위 자체가 나에게 있어서 가장 의미 있는, 나를 살아있게 하는 기회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살기 위해 글을 쓴다. 살아내기 위하여 글을 쓴다. ▣ 전준우 ◇ 작가, 강연가, 책쓰기컨설턴트 ◇ 前국제대안고등학교 영어교사 ◇ [한국자살방지운동본부] ◇ [한국청소년심리상담센터] 채널운영자 ◇ [전준우책쓰기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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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1
  • [전재학의 교육칼럼] 학생을 추동(推動)시키는 교육을 실현하려면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세계적인 교육학자 켄 로빈슨은 TED 강연에서 “지금의 교육 시스템은 이미 망가진 모델”이라며 “개선이 아니라 혁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현재의 교육 시스템은 인간의 잠재력과 가치를 획일적인 잣대로 정량화하고 단일한 기준으로 경쟁을 유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의 교육을 되돌아보면 개인의 개성을 철저히 무시하고 국⋅영⋅수에 몰입한 학습과 사회의 잣대에 맞는 사람이 되라고 종용해 왔다. 이는 우리 교육이 지식 축적이 주요한 산업화 시대에나 맞는 획일화를 추구한 거대한 프로세스임을 보여준 것이다. 인도의 철학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한 인간이 자기의 삶을 온전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교육이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 말의 배경은 지금까지의 교육 시스템은 사람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에 투자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님과 같다. 따라서 이제는 새로운 교육을 연구하고 고민해야 할 때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도 학생의 다양성이 존중되고 삶과 연계된 경험 중심의 교육을 실현해야 한다. 이는 일찍이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John Dewey)가 “1그램의 경험이 1톤의 지식보다 낫다”고 말한 것과도 축을 같이 한다. 하지만 이 시대는 전통적인 핵심 지식의 습득을 기반으로 여기서 더 나아가 디지털 대문명이 요구하는 창의성 기반의 뉴노멀(New Normal)의 가치 창조를 위해 새로운 교육철학으로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아쉽게도 우리 교육은 아직도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한 제도와 강의로 구성되어 운영되고 있다. 학생 개개인의 흥미나 관심은 규정된 제도를 벗어나 통제 대상일 뿐이다. 학교는 제도적으로 정해진 것을 교육하고 그것만 공부하도록 만드는 수동적인 배움터에 불과하다. 그렇다 보니 교육의 틀인 시스템만 남고 교육의 목적인 학생의 배움은 멀어져 있다.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학생의 배움이다. 당연히 배움은 학생이 주도해야 한다, 배움은 교사가 잘 가르친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잘 배우는 것으로 실행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학생 스스로 배움의 의미를 깨닫게 해서 자발성과 적극성을 유도해야 한다. 현재 우리 학생들은 점수와 평가에만 민감하게 반응해 순간의 과정이 고통스럽게 지나면 더 이상의 배움은 없다. 이는 점수로 첫째부터 꼴찌까지 줄을 세우는 우리 사회에서는 당연한 귀결이다. 그렇다면 우리 학생들이 점수가 아닌 공부의 재미를 발견하는 교육은 어떤 것일까? 현재처럼 입시라는 커다란 교육의 장애물이 존재하는 한 이는 이상(理想)에 그칠지 모른다. 마치 사무엘 베케트의 오지 않는 <고도(Godot)를 기다리며>처럼 말이다. 배움이 있는 교육 시스템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필수 과업이다. 그러기 위해서 학교는 학생들의 배움에 대한 내적 동기를 발현시켜야 한다. 즉, 교육자는 학생들이 배움의 의미를 깨닫고 배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인도의 비노바 바브의 “교육은 학생의 머리에 정보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지식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다”라는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학생의 배움은 역설적으로 교사가 많이 가르칠수록 오히려 촉발되지 않는다는데 주의할 필요가 있다. 미래학자 유발 하라리는 “미래 교육에서 가장 피해야 할 것은 ‘더 많은 정보’를 주입하려는 것이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배움이 일게 하려면 학생들을 더 많이 만나고 학생의 포트폴리오를 지속적으로 살펴주고 피드백을 해주어야 한다. 이때 교사는 학생들이 배움의 재미와 필요성을 느끼도록 만드는 ‘인에블러(enabler)’이자 배움의 과정을 돕는 ‘헬퍼(helper)’, 즉 코치(coach)이자 멘토(mentor), 조력자(facilitator)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멀티 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교육에 획기적인 선을 그은 코로나 이후의 시대를 살면서 이제 교사는 학생들에게 있는 둥 마는 둥한 존재(exist)가 아니라 선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상호작용을 이끌어가는 존재(present)로서 교육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학생을 추동(推動)시키는 교육의 근본적인 처방이라 믿는다. ▣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現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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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17
  • [육우균의 周易산책] 프롤로그 2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에도 이 ‘태극’과 ‘8괘 중 4괘’가 나타나 있다. 건(☰), 곤(☷), 감(☵), 리(☲)이다. 『주역』을 모르면 태극기의 원리나 기원도 모른다. 이렇게 『주역』은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한나라 때 괘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자연법칙을 중시하는 상수 역학이 발달했고, 인간의 법칙을 중시하는 의리 역학은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왕필의 “뜻을 얻었으면 이미지는 잊어 버려라”는 ‘득의망상(得意忘象)’에 힘입어 상수 역학에서 인간의 삶을 다루는 의리 역학으로 회귀하게 되었다. 『주역』은 사주명리학과는 다르다. 『주역』에는 ‘절대’라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세상 만물은 모두 변화하기 때문이다. 『장미의 이름』이란 소설을 낸 세계적인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도 평생을 기호학 연구에 바쳤으면서도 ‘죽어있는 기호보다 살아 움직이는 만물의 변화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지식과 질서는 언제든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고, 새로운 변화 앞에 늘 깨어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주역』도 초월적 시간의 세계는 배척한다. 현실 속에서 인간들의 일정한 법칙을 찾으려 했다는 특징이 있다. 현세 지향적인 세계관이며, 관계 철학을 추구했다. 『주역』을 일컬어 “일음일양지도(一陰一陽之道)”라 한다. 『주역』에는 남녀평등사상이 나타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인간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 오늘날의 삶 속에서 주역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지 알아볼 것이다. 다만 문학작품 속에서 살펴볼 것이다. 문학작품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만들어지는 갈등과 그 해결을 다루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삶을 추적해 봄으로써 인생에서 주역의 괘가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지 살펴볼 것이다. 『주역』은 인생 처세술이다. 지금 당신의 ‘때’는 무엇이며, 그 ‘때’라는 것이 어떤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지에 대해 깊게 사유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지. [괘와 효사 보는 법] <예시> 화천대유괘의 효사 지배 자 리 天 자리 上9 − 하늘로 도움을 얻고 신들로부터 축복을 받으리라. 길하다. 65 -- 자신을 비울 줄 알며, 아랫 사람들과 진심어린 마음의 교류를 할 줄 안다. 人 자리 94 − 성대하고 강장한 모습니다. 허물이 없다. 민중 자 리 93 − 풍요로운 산물을 천자에게 바친다. 소인들은 공적 마인드가 없다. 공적인 향연이 일어나지 않는다. 地 자리 92 − 큰 수레에 물건을 잔뜩 싣고 있다. 세상을 향해 모험을 떠난다. 허물이 없다. 初9 − 고독하다. 윗사람과 교섭이 없으니 허물이 있을 수 없다. ☲(화) ☰(천) 태양이 하늘 위에서 빛나는 모습이다. 모든 사람과 사물들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크게 풍요로운 것은 비움이고 베풂이다. 1. 민중 자리 - 아래에 있는 괘(천 : ☰) 2. 지배 자리 – 위에 있는 괘(화 : ☶) 3. 지(地)의 자리 – 힘든 민중의 자리다. 4. 인(人)의 자리 – 가장 중요한 자리다. 피지배 자리에서 지배 자리로 가야 하는 위치라서 성실, 베풂, 믿음의 자세가 있어야 한다. 천지가 무대이고 그 무대 위에서 인생이 펼쳐진다면 당연히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할 것이다. 天의 자리, 地의 자리는 그저 무대를 만들어 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人의 자리에서 그 인생의 무대가 좋을 지, 나쁠 지가 결정된다고 하겠다. 5. 천(天)의 자리 – 왕의 자리다. 6. 한 개의 괘는 6효로 되어 있다. 맨 아래 첫 번째 효가 ‘초’다, 2, 3, 4, 5, 순서대로 올라가고, 맨 위의 마지막 6효가 ‘상’이다. 그래서 괘의 밑에서부터 ‘초→2→3→4→5→상’의 순서로 효가 자리한다. ‘1’을 ‘初’라 한 것은 효가 처음 시작한다는 의미이고, ‘6’을 ‘上’이라 한 것은 효의 맨 위에 위치하고 있다는 의미에서다. 그리고 각 효의 앞에 붙는 숫자는 9와 6인데, 9는 양효(−), 6은 음효(--)다. 예를 들어 ‘62’하면 두 번째 효가 음(--)이라는 것이고, ‘93’하면 세 번째 효가 양(−)이라는 것이다. 7. 「대상전」과 각 괘의 효사는 『도올 주역 강해』를 따랐다. 8. 지면에 연재할 때는 한 괘에 2회 연재를 기본(1회는 1/2, 2회는 2/2)으로 한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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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15
  • [김홍제의 목요칼럼] 어떻게 살 것인가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새벽 5시 전에 일어났다. 초저녁에 잠을 잔 탓이다.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아 서재로 갔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부른 팝송 ‘마이 웨이(My way)’를 들었다. 가사를 음미하며 듣다가 생뚱맞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불쑥 올라왔다. 나름대로 열심히는 살아왔는데 그것이 내가 원하던 삶인가. 아니 내가 원하는 삶은 어떤 것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명예퇴직을 신청해야 하나. 새삼스럽게 사춘기 소년처럼 혼란스러웠다. 책장에서 딸이 사놓은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을 뽑아 들었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소제목을 ‘나답게 살기’로 해 놓고 ‘열정이 있는 삶을 원한다. 마음이 설레는 일을 하고 싶다. 자유롭게, 그리고 떳떳하게 살고 싶다.’라고 하면서 그렇게 사는 것이 나다운 인생이라고 썼다. 나에게 나다운 인생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단편 소설에서 가난한 구두 수선공 세몬을 등장시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질문에 ‘사랑’이라는 대답을 보여주었다. 사랑으로 사는 것이 나다운 올바른 삶을 사는 길일까. 고등학생 때 행복론에 대한 철학책을 읽었는데 머리말에서 읽은 행복에 대한 비유 이야기는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다. 물레방아로 밀을 찧어서 대대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물레방아를 잘 관리하고 조상이 가르쳐준 경험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문득 그는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원리를 잘 알아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물레방아 원리를 잘 알기 위해 방아굴대를 넓히기도 하고 방아공이의 높이를 높였다 낮추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물레와 방아는 완전히 이상해져서 삐걱거리게 되었다. 그는 더 나아가 물레방아를 돌리는 물질은 물이기에 물을 연구해야 한다고 물이 내려오는 상류로 올라갔다. 물길을 조사하고 연구했다. 물레방아는 돌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물레방아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할 정도로 망가졌다. 주변 사람들이 물레방아의 원래 기능이 잘 돌아가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충고를 했다. 그는 충고를 듣지 않았다. 자신은 물레방아를 돌리는 원리를 연구해서 조상보다 더 훌륭한 최고의 물레방앗간 주인이 되겠다는 것이다. 결국 그 사내의 물레방아는 더이상 밀을 찧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인류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조사하고 몸을 구성하는 세포를 연구했다. 핵막에 따라 진핵세포와 원핵세포를 찾아내고 효소와 아미노산과 미토콘드리아를 연구했다. 급기야 단백질이 최초로 어디에서 기원했는지를 찾아내는 것이 행복의 기원이라고 믿게 되었다. 과연 세포의 구성 물질을 알아내서 세포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면 그 세포로 이루어진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일까. 구심점이 인간을 떠나면 안 된다. 2025년부터 AI 디지털교과서를 학교에 도입해서 2028년부터 모든 교과목에서 디지털 교과서를 사용한다고 한다. 학교에 전보다 많은 돈을 투입하고 있다. 급식도 교복도 수업료도 교과서 대금도 공짜다. 그래도 학교 구성원들은 행복하지 않다. 무슨 이유일까. 컴퓨터가 발전하고 기계가 발전해서 인간의 일을 대신해 주면 인간은 행복해질까. 밥솥이 밥을 하고 세탁기가 빨래를 하고 청소기가 청소를 하고 쌀밥을 매일 먹는데도 행복하지 않다. 옛날에 서로 밥을 비벼 먹고 이웃들과 칼국수를 나누어 먹을 때보다 왜 웃음은 더 없어진 것일까. 행복은 편리함보다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행복이라는 구심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물레방앗간이 안정적으로 운영되려면 물레방아에 집중해야 한다. 물레방아에서 너무 멀어지지 않아야 한다. 물레방아를 내던지고 인간과 먼 곳에서 행복을 찾지 말아야 한다. 인간의 몸과 마음이 먼저이다. 기계와 돈과 명예가 행복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과 멀어질수록 인간은 피폐해질 것이다. 행복한 삶을 위해 세 가지를 실천하려 한다. 솔직함과 단순함과 깨끗함이다. 솔직하게 살면 세상을 온전히 살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살다보니 솔직함이 최선이었다. 할 수 있는 한 솔직한 것이 건강과 성장과 존중에 도움이 된다. 지도층이 솔직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적다. 그들은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 결과 사회적 비용이 더 들어가고 감시와 점검의 체계가 늘어나는데 불신도 함께 늘어난다. 마음 편히 사는 방법도 솔직함이다. 좋은 친구를 만드는 방법도 솔직함이다. 사람 사는 것이 거기서 거기다. 솔직하면 너무도 부끄러울 일이 많지만 나중에는 사람이기에 이해를 한다. 솔직하면 추가 비용이 필요 없다. 부모와 자식, 교사와 학생, 상사와 아래 직원, 기업과 정치가 솔직하면 얼마나 세상이 환상적이겠는가. 단순함은 복잡하게 사는 현대인의 생존 조건이다. 카드나 핸드폰을 잃어버리면 공황 상태에 빠진다. 자동차를 사면 고민해야 할 일이 많다. 보험, 수리, 관리, 법규, 기름값, 비용 등 할 일들이 생겨난다. 복잡한 관계는 심신을 괴롭게 한다. 하나씩 줄여나가야 한다. 미루지 말고 정리를 해야 한다. 인간관계, 책, 모임, 생각, 소유물을 되도록 단순하게 정리하는 것이 잘 사는 길이다. 마지막으로 깨끗함이다. 마음의 깨끗함도 있지만 주변과 몸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잘 사는 기본이다. 책상의 정돈 상태를 보면 주인의 생활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편견이겠지만 임상적으로 높은 확률을 경험했다. 깔끔한 사람 곁에는 같이 있고 싶다. 솔직함, 단순함, 깨끗함이 내가 잘 살기 위한 기본 조건이다. 이 조건을 지켜가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더 고민할 것이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이러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학생에게 더없이 좋을 듯하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학생교육문화원 예술진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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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15
  • [육우균의 周易산책] 프롤로그 1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한자 ‘易’은 日+月을 합친 글자이다. 일은 태양이고 월은 달이다. 태양은 양(−), 달은 음(--)을 뜻한다. 이 일과 월은 항상 바뀐다. 이 ‘역’은 ‘바뀐다’, ‘변화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주역』을 번역할 때 “The book of changes”이라 쓴다. 『주역』은 주나라 때의 역으로 문공이 썼다고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어쨌든 『주역』은 점치는 책, 변화를 읽는 책 정도로 알고 있다. 4서 3경 중 가장 어려운 책이고 가장 심오한 책이라고도 한다. 공자는 만년에 『주역』을 수없이 읽어서 대나무로 만든 책을 엮은 끈이 세 번 끊어졌다는 데서 ‘위편삼절(韋編三絶)’이란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정약용도 강진에서 귀양살이할 때 『주역』을 읽고 『주역사전』을 편찬했다고 알려져 있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춘추전국시대 나온 유가, 법가, 노장 사상의 뿌리가 『주역』이다. 주역을 연구한 성과를 보면 동양인보다 오히려 서양인들이 더욱 과학적 입장에서 그 성과를 빛냈다. 닐스 보어의 ‘상보성 원리’,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 칼 융의 ‘동시성’이라는 개념, 라이프니츠의 ‘2진법(0과 1, 이후 컴퓨터의 언어가 됨)’의 원리를 모두 『주역』에서 얻었다. 『주역』은 자연계를 연구하는 ‘최고의 지침서’이고, ‘세상의 지혜’다. 역은 원래 점술서였으나 이후 유학자들이 형이상학에 관한 논문으로 해석하여 심오한 철학서가 되었다. 역이 나오자 자아 중심의 세계관에서 관계 중심의 세계관으로 바뀌게 된다. 역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중시하는 철학이고, 만남과 교류의 형이상학이기 때문이다. 역은 하나라, 은나라 때에도 만들어졌으나,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역은 주나라 때 문공이 저술했다고 알려진 『주역』이다. 당시에는 농경사회라 하늘에서 비를 내려야 농사가 잘되는 천수답이었기 때문에 하늘과 땅과의 관계 그 사이에 있는 인간과의 관계가 중요했다. 8괘(건☰, 태☱, 리☲, 진☳, 손☴, 감☵, 간☶, 곤☷)는 복희씨가 문자가 발달하지 않은 시절에 이 8개의 원소를 ‘ㅡ’ ‘--’라는 2개의 부호를 3번 겹쳐서(3선) 각 상징물마다 다르게 표시하였다. 그리고 이 8개의 상징물은 자연물 그 자체가 아니라 자연계의 현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추상화되고 나아가 형이상학적 사유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우주의 변화와 자연의 변화 이치를 담고 있다. 사물을 기호로 표시하면 그 본질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주역』은 ㅡ, --으로(3선) 또는 그것의 중첩(6선)으로 된 기호로 표시한다. 세상의 근원을 보다 정확히 알아내기 위한 방법이다. 그래서 수학, 물리, 화학 등의 과학적인 학문엔 기호로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역』은 과학이다. 복희씨 이후 약 3,800년이 지날 무렵에 은・주의 교체기에 문왕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 8괘를 중첩하여 64괘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시기는 문자가 발명된 시기이므로 64괘에 괘를 설명하는 ‘괘사’도 붙이고, 나아가 괘를 이루는 6개의 효 하나 하나를 설명하는 ‘효사’도 붙였다. 8괘를 중첩하면 8괘 × 8괘 = 64괘다. 이 64괘(대성괘)를 중국 위나라 때 천재였던 왕필(226~249, 23세에 요절)이 편집하고 주를 단 것이 일반적인 『주역』이다. 그런데 64괘는 절반인 32괘만 알면 된다. 왜냐하면 반대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항상 그 반대인 것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음-양, 만유인력-만유척력, 당기는 힘-끄는 힘, 천사-악마 등. 따라서 『주역』도 하늘-땅, 연못-산, 물-불, 우레-바람 등이 반대의 괘인 것이다. 천지비의 반대괘는 지천태이고, 천수송의 반대괘는 지화명이괘인 것이다. 물론 그 의미도 당연히 반대가 된다. 천수송(날이 개인다) ↔ 지화명이(날이 흐리다)처럼. 태극에서 음과 양이 나오고 음양의 규칙적인 변화가 64괘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주역』은 64괘 384효로 되어 있다. 그런데 건괘와 곤괘는 효가 하나씩 더 있는데, 건괘는 용구(用九), 곤괘는 용육(用六)이다. 용구와 용육은 건괘와 곤괘의 특수한 경우라서 전체 효(384효)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건곤일희장(乾坤一戱場), 인생일비극(人生一悲劇)”. 건괘와 곤괘는 모든 연극을 위해 펼쳐진 무대일 뿐이고, 우리 인생은 그 무대 위에서 연출된 하나의 비극이다. 64괘 중 건괘와 곤괘에 용구(用九)와 용육(用六)의 효사가 더 있는 이유다. 그리고 나머지 62괘의 각 효사가 그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고조선의 생활사라 할 수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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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3
  • [전재학의 교육칼럼] ‘액체 현대’와 미래 교육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현대사회의 특징을 한 마디로 기술(記述)하기는 무모한 시도일 것이다. 왜냐면 현대사는 흥망성쇠로 얼룩진 질곡의 역사이고, 복합적인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다양한 사상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뿐이랴. 현대사엔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다. 매 순간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은 빛의 속도와 같이 변화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어느 한 시기에만 집중하면 이는 곧 편협한 해석으로 이내 한계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의 특성을 ‘고체 현대’와 ‘액체 현대’로 구분하여 사상적 접근을 시도한 인물이 있다. 바로 우리 시대의 큰 사상가이자 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1925~2017)이다. 그는 21세기를 한마디로 ‘불안의 시대’라 지칭하고 이를 분석하여 설명하였다. 탐구 정신이 뛰어난 그는 70세가 넘어 ‘액체 현대’ 이론을 발표했다. 그래서 ‘액체 현대’는 바우만의 사상을 대표하는 사회이론으로 고착됐다. 그는 우리가 사는 시대가 지난 20세기 후반에 ‘고체 현대’에서 ‘액체 현대’로 변화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양자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고체 현대란 계획적이고 합리적이고 안정적이고 예측이 가능한 사회를 일컫는다. 반면에 액체 현대란 우연적이고 불확실하고 끝없이 변화하고 예측 불가능한 사회를 말한다. 그럼 이러한 액체 현대를 가져온 것은 무엇일까? 바우만은 세 가지 측면을 주목했다. 첫째, 세계화의 진행이다. 세계화를 통해서 우리의 삶은 범지구적인 현상이 됐다. 둘째, 신자유주의의 등장이다. 이는 복지국가가 후퇴하고 일자리 등 우리 삶의 불안정성이 증가하는 원인이 되었다. 셋째, 소비의 영향력이다. 우리 생활 전반에서 소비가 미치는 영향이 커지면서 우리는 변덕스러운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여기서 우연성, 불확실성, 이동성, 예측 불가능성이 부각되었고 탐색의 집중 대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바우만의 사상이 던지는 현시대에의 함의(含意)는 무엇인가? 그는 우리 시대가 각자도생,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불안 사회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는 세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첫째, 액체 현대사회에 대한 정확한 인식. 둘째, 권력에 대한 정치의 통제력 회복. 셋째, 현실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회의주의적 태도, 이렇게 세 가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연대와 경쟁, 자유와 불안이 공존하는 21세기에, 우리 인류가 가야 할 삶의 방향이다. 그가 제시한 것은 자유와 연대를 회생(回生)시키는 것이다. 이는 비관적 현실에 회의적(懷疑的)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마치 철학자 데카르트가 “나는 회의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언뜻 듣기에는 역설적인 것 같지만 결국 의미 있는 삶과 사회의 방향을 모색하는 석학의 제안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우리가 2020년대에 바우만을 계속 만나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로부터 교육입국(敎育立國)을 지향하며 국가백년대계(百年大計)로서의 교육만이 대한민국의 유일한 희망이자 국가를 지탱하는 원동력이다. 이제 한국 사회는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떤 삶을 지향하는가?’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세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 여타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이런 질문을 통해 5천 년 역사 이래 가난을 극복하고 비로소 선진국으로 진입한 우리가 그동안 살아 온 삶을 성찰하고 진정한 한국인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가치와 삶의 자세를 다시금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 액체 현대의 지속적인 불안을 극복하는 새로운 표준인 ‘뉴노멀(New Normal)’이라 생각한다. 비 온 뒤에는 땅이 더욱 굳어질 것이다. 이제 역사학자이지 미래학자인 유발 하라리의 주장처럼 ‘변화만이 상수(常數)’인 미래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미래에 적합한 교육만이 확실한 변화의 힘이자 우리의 정체성을 더욱 공고하게 해줄 수단이라 믿는다. 교육은 우리의 희망이자 미래 삶의 좌표이며 생존의 전략이어야 한다. ▣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現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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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2
  • [10대인생학교 행복교육] 운명의 장난, 운명의 선택
    [교육연합신문=전준우 칼럼] 피카소가 그린 수탉(1938년작)은 수탉의 뻔뻔스러움과 공격성, 볼품없고 어리석은 모습을 잘 나타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장자에 나오는 <몽계지덕>은 점차 겸손하게 변화하다 못해 목각품과도 같은 형태를 지닌 수탉의 모습을 예로 들며 점차 익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지만, 피카소가 그린 수탉은 익기 전의 수탉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피카소가 그린 그림 치고는 엉성한 감이 있지만, '미술가가 사물의 외형을 변형시킨 이유를 알기 전에는, 화가가 그르고 우리가 옳다는 확신이 서기 전에는 섣불리 그들의 작품을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어니스트 곰브리치 교수의 명언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아가멤논의 죽음 뒤에는 이피게네이아의 죽음이 있었고, 그 죽음에 대한 복수로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칼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사람의 잘못된 선택이 가족을 죽음의 굴레로 빠져들어가게 한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은 아가멤논을 죽음으로 이끈 클리타임네스트라, 그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죽음으로 이끄는 아들 오레스테스와 그의 누이 엘렉트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다수의 글이 반면교사를 위한 마음의 활자화인 것에 반해, 고전은 그 스스로가 나, 곧 인간 자체의 내면을 활자화했다는 점에서 다른 글들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힘이 있다. 아가멤논의 죽음이 딸 이피게네이아를 위한 복수였다는 점에서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복수는 타당성을 부여받는다. 반면에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 엘렉트라는 어머니인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정부 아이기스토스를 두고 전혀 뜻밖의 이야기를 한다. 아버지께서는 부디 나와 나의 친족인 오레스테스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가 이 집을 다스리게 해 주세요. 우리는 팔린 몸이라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우리를 낳은 그 여자가 우리를 팔았거든요. 그리고 우리 대신에 살인에 동조했던 아이기스토스라는 사내를 사들였어요. 나는 노예나 다름이 없어요. 오레스테스는 재산도 물려받지 못하고 추방되어서 유랑생활을 하고 있는 데다, 아버지께서 모으신 재산은 그들이 수치스러운 환락으로 탕진하고 있습니다.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130-137절 어떤 경우에도 살인은 용납될 수 없다. 아가멤논의 선택 또한 용납될 수 없고, 마땅한 죗값을 치렀다고 봐야 옳다. 다만 고대 작품이 쓰이던 시대에서 살인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고, 역사 속 작품들이 시대상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그리스 함대를 이끄는 선장이자 왕이었던 아가멤논의 선택이 불가피한 선택일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 또한 명심해야 한다. 이란계 유목민에 속하는 스퀴타이족은 러시아 남부, 우크라이나와 중앙아시아 지역에 거주했던 유목민들의 후손이다. 스퀴타이족에 대한 일화(그들은 전투에서 죽인 자들의 머리가죽을 벗겨내서 손수건으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가죽 손수건을 가장 많이 가진 자가 가장 용감한 자로 간주되었다. 적을 죽인 경험이 없는 자는 함께 술을 마시지 못하고, 이것이 가장 큰 치욕이었다. {헤로도토스 <역사> 4권 64-66장}) 는,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해 보았을 때, 아가멤논의 선택이 반드시 틀린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일화 중 하나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친족 간의 살인이, 비록 작품 속 신화이기는 하나, 수긍할 수 있는 범위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의 독백에서, 그들은 그들의 누이인 이피게네이아의 죽음이 아가멤논에 있어서는 정당한 선택이었다는 기도를 드린다. 아버지께서는 그대(제우스)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제물을 바치셨어요. 그런데도 그런 아버지의 자식들을 당신이 죽게 내버려 두신다면, 앞으로 누가 당신에게 정성스러운 제물을 바치겠습니까?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130-137절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자식들에게서 죽임을 당하고, 이미 예언된 대로(아가멤논 1309절) 비극의 주인공과 함께 하데스 속으로 사라진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일반적으로 가장 쉬운 관계기제라고 할 수 있으나, 모든 상황에서 납득할 만한 선택기제가 될 수는 없지 않을까. 살인의 정당성에 대한 고민, 친족살해에 대한 두려움과 잔인함으로 인한 고통을 통해 오레스테스는 정신이상자가 되고 끝없는 비극 속으로 빠져든다. 어머니의 사랑과 눈물 속에서 아이들은 자라고, 꿈을 꾸고, 소망을 찾는다. 배우자는 피가 섞이지 않지만, 자식은 피로 연결되어 있다. 피는 물보다 진하며, 마르지 않는다. 피가 아닌 것과는 섞이지 않는다. ▣ 전준우 ◇ 작가, 강연가, 책쓰기컨설턴트 ◇ 前국제대안고등학교 영어교사 ◇ [한국자살방지운동본부] ◇ [한국청소년심리상담센터] 채널운영자 ◇ [전준우책쓰기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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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1
  • [전재학의 교육칼럼] 교사와 학생의 관계 회복을 위한 ‘대화의 3.2.1 법칙’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요즘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 간의 인간관계는 갈수록 힘들고 어렵다. 교권과 인권으로 대표되는 두 집단은 교권 침해, 학교폭력이란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연 언제부터 이렇게 난제였는지 기억의 추적 또한 아련하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학교 내에서의 구성원 간의 안정과 평화는 평행선을 그으며 달려갈 것인가? 일찍이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1813~1855)는 “인간 행복의 90%가 인간관계서 온다.”라고 주장했다. 학생의 경우 성장기에 친구와의 관계를 성공적으로 맺은 경험은 평생 삶의 비옥한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 이를 정확히 이해하고 가장 잘 실천한 것이 유대인의 자녀교육이다. 그렇다면 그 핵심은 무엇인가? 유대인 부모는 자녀에게 어떤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지부터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법까지 인간관계의 세상 이치를 알려주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로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말조심’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현재 학폭의 상당 부분이 언어폭력에 의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는 유대인이 세상에서 가장 말이 많은 민족으로 손꼽히고 있기에 참으로 지혜로운 것이기도 하다. 유대인의 경전 『탈무드』에서는 “혀는 그 어떤 음식보다 달콤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더 무섭다.”, “물고기는 항상 입으로 낚인다. 인간도 항상 입으로 낚인다.” 등의 교훈을 전한다. 또 다른 유대 경전 『미드 라쉬』에서는 “남을 헐뜯는 험담은 살인보다도 위험하다. 살인은 한 사람밖에 죽이지 않으나, 험담은 반드시 세 사람을 죽인다. 험담을 퍼뜨리는 사람, 험담하는 것을 말리지 않고 듣고 있는 사람, 그 험담의 대상이 된 사람이다.”라고 가르침을 전한다. 우리의 현실을 보자. 이른바 정치인 등 사회 지도층을 중심으로 혐오로 가득한 말이 넘치고 있다. 그것도 편향된 이념 논리에 의해 편 가르기에 익숙한 정치배들이 상대방을 헐뜯고 악담과 막말을 마다하지 않는다. 불행히도 일부 교사 역시 아동을 상대로 막말로 비교육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청소년 세대는 기성세대의 그 모든 행태를 보고 듣고 배운다. 그렇다면 우리의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까? 미국 경제 전문지 《포춘》은 성공 방법의 하나로 ‘대화의 3.2.1 법칙’을 제시했다. 이는 3분간 경청하고, 2분간 맞장구치며, 1분간 말하라는 것이다. 또한 『카네기 인간관계론』으로 유명한 데일 카네기(Dale Carnegie, 1888~1955)는 “진심으로 경청하는 태도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찬사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사람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존중받고 있다고 느끼며 정서적인 안정감을 느낀다. 그래서 좋은 상담사나 심리치료사는 우선 경청하고 들어주는 것부터 시작한다. 학교 현장에서는 매일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십 대 청소년들은 온갖 문제를 안고 상담실을 찾거나 교사와의 상담을 요청한다. 그들의 얼굴엔 근심과 걱정이 가득하다. 그런데 그들이 상담사나 교사 앞에서 한참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어떤 처방이나 조언을 듣기도 전에 다소 안정감을 되찾고 자유로워진 모습으로 “제 말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좀 시원합니다.”란 말을 공통으로 남긴다. 얼마나 막힌 가슴이 뚫렸으면 그럴까. 그래서 경청은 바로 유능한 소통 전문가의 상징이기도 하다. 청소년들은 성장통을 앓는 주변인(outsider)이자 이질적인 사회나 집단에 동시에 속하여 양쪽의 영향을 함께 받으면서도, 그 어느 쪽에도 완전하게 속하지 않는 경계인, 한계인이기도 하다. 그들의 문제의 답은 그들 안에 존재한다. 그러니 청소년의 말을 보다 경청하고 관심을 기울이자. 교사는 말하는 시간의 2~3배를 듣기에 할애해야 한다. 그것은 ‘대화의 3.2.1 법칙’을 실천하는 것과 흡사하다. 5월 청소년의 달을 보내며 작금의 교사, 학생 간의 불편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사부터 ‘대화의 3.2.1 법칙’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푸는 인내가 필요함을 잊지 말자. ▣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現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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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20
  • [육우균의 깨봉 칼럼] 에필로그
    [교육연합신문=육우균 교육국장] 현재 교육부는 대입 전형을 수십 가지나 나누어 놓고 국민들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어쩌다 우리 교육이 이 지경이 되었나 통탄스럽다. 복잡성은 맹점을 가져온다. 모든 것은 단순화되어야 한다. 구글에서 말한 ‘검색창과 자판만 가지고 세상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한다’는 모토는 바로 단순성의 힘을 보여준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도 단순성의 발로다. 왜냐하면 천동설을 가지고는 단순하게 천체의 운행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 이처럼 모든 것은 단순화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의 지식을 독립적, 전문적이 아닌 통합, 통섭, 융합으로 단순화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것이 교육혁명이다. 창의적 천재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며, 그들은 창의성이 학습된 능력이며, 목적이 있는 연습을 꾸준히 반복함으로써 그러한 능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즉 창의적 천재들은 두 가지 ‘자신감과 인내심’이 강했고,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격려’를 많이 받았다. 전자는 ‘역치이론(Threshold Theory)’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이 이론은 IQ 104 영역에 속한 사람들은 이른바 천재들과 같은 수준의 독창적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잠재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후자는 자신감과 인내심을 키우는 ‘멘탈 모델(Mental Model)’로 설명된다. 부모로부터의 격려를 받은 아이는 부모에게 더 인정받고 싶어 가술 연마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그로 인해 양성 피트백의 양이 꾸준히 증가하게 되어 몇 해가 지나면 그 분야에 비범한 능력을 가진 천재로 재탄생한다. 그 예가 바로 손흥민과 그의 아버지 손웅정이다. 따라서 1만 시간의 법칙을 믿고 죽어라 연습만 하지 말고, 목적이 있는 연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연습의 양이 아니라 방향성이 더 중요한 것이다. 이제 학생들을 지식수용자에서 지식창조자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가진 평면적 지식을 입체적 지식으로 옷을 입혀야 한다는 말이다. 교사가 전달해주는 지식을 무조건 수용하는 객관적 지식이 아니라, 자기가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창조적 지식이 되어야 한다. 세월호나 이태원 사고가 말해주지 않던가. 위급한 상황에서는 자신이 잘 판단해야 한다. 그냥 전문가의 말이라고 해서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잖는가. 교육의 힘은 자신이 주체적으로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단순화시켜야 한다. 이에 유목민의 삶을 본받아야 한다. 21세기다. 인터넷 시대다. 지식혁명의 시대다.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고 있다. 국가도 이제 선택하는 시대다. 언제 어디서든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거리마다 학교를 세우고, 학원을 만들고 하는 시대는 갔다. 언제, 어디에 있든 교육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미네르바 스쿨처럼. 종이와 연필, 노트북(탭), 그리고 생각과 질문만 있으면 된다. 21세기는 유목민의 인간(디지털 노마드)을 요구하고 있다. ▣ 육우균 ◇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교육연합신문 교육국장 ◇ 前중앙일보 공교육 논술자문단 자문위원 ◇ 前중등교사 임용시험 채점위원 ◇ 前영흥고등학교 교감 ◇ 前인천미추홀외국어고등학교 교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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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9
  • [10대인생학교 행복교육] 선택의 격(格)
    [교육연합신문=전준우 칼럼] 전쟁으로 일상이 무너져버린 전쟁 피해자의 일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무자비한 폭행과 살인은 전쟁만큼이나 감당할 수 없는 비극처럼 느껴질 수 있다. 심지어 솟구치는 피를 보는 것만으로도 졸도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전쟁과 싸움이 일상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세계적인 문화인류학자이며 베스트셀러 저자인 재러드 다이아몬드 UCLA대학교 교수의 저서 <어제까지의 세계(원제 The world until yesterday)>는 원시사회 혹은 문명의 흐름을 벗어난 부족의 생활과 문명세계의 영향력 아래에서 평생을 보낸 사람들의 서로 다른 삶의 형태를 비교하여 설명한다. 그중에는 전쟁 후유증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는 군인과, 어린 시절부터 적을 죽이는 것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이나 후유증에 시달리지 않는 다니족 부족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저자인 재러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뉴기니 사람들은 적을 죽였다고 마음의 갈등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잊어야 할 모순된 가르침이 애초부터 없다.(어제까지의 세계 215P, 재러드 다이아몬드, 김영사)"라고 이야기한다. 똑같은 육체를 가진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환절기 건조한 날씨 때문에 코피가 나는 걸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날카로운 창을 적의 가슴에 꽂아 넣고 피가 솟구치는 장면을 보면서 승리에 도취되어 환호성을 지르는 10대 소년도 있다는 사실, 놀랍지 않은가?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중 하나인 <아가멤논>은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남편을 죽인 여인,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그리스 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아내였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쥐고 금의환향한 아가멤논이 잠든 사이 정부인 아이기스토스와 함께 아가멤논을 죽인다. 도끼로 죽였다는 설도 있고, 칼로 찔러서 죽였다는 설도 있다. 어떤 것이든지 간에,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아가멤논의 아내가 아니었다. 탄탈로스 2세의 아내였던 클리타임네스트라는 탄탈로스 2세의 조카였던 아가멤논의 반역으로 남편을 잃고 아가멤논의 아내가 되어 이피게네이아를 낳는다. 아가멤논은 출전하면서 첫째 딸이던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쳐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이후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손에 목숨을 잃는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피는 피를 부른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남편인 아가멤논을 죽인 것에 대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전 남편과 자식을 죽인 현재의 남편, 자신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제물로 바친 남편, 그 남편을 죽인 것에 대해 정당하다고 이야기한다. 일이 이러하니 여기 있는 아르고스의 원로들이여, 기뻐할 테면 기뻐하시오. 나는 이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오. 그리고 시신에 제주를 붓는 것이 격식에 맞는다면, 이러한 내 행동은 정당하다 할 것이오. 정당하고 말고요. 이 사람은 집 안에 그토록 많은 저주스러운 악으로 잔을 채워놓고는 이제 귀국하여 스스로 그 잔을 비우고 있으니 말이오. -<아가멤논> 1394-1396, 아이스퀼로스 자식의 죽음을 목도하며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사람이 하르파고스 외에 누가 있을까. 그럼에도 <어제까지의 세계>에서는 교통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가 운전자로부터 적절한 보상을 받고 그를 용서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관계의 회복은 전통적인 뉴기니 사회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서구적 기준에 따라 유죄, 태만, 징벌을 결정하는 것이 주된 쟁점은 아니다...(중략) 목표는 보상금을 받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B가 A에게 Y만큼의 피해를 입혔으니 A가 B로부터 X마리의 돼지를 받음으로써 셈을 맞추자고 주장하는 게 아니었다. 적들과 평화적 관계를 회복하고, 고티 마을에서 다시 평화롭게 사는 것이 목표였다. -<어제까지의 세계> 132-133P, 재러드 다이아몬드 물론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다만 보이지 않는 용서 역시 자아의지로 말미암는다. 그렇기에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선택이 옳은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선택이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아가멤논의 죽음 이후, 클리타임네스트라 역시 자식인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로부터 죽임을 당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은 파리스의 결혼이었다는 점에서 클리타임네스트라 역시 피해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리스의 명장 아가멤논은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인생을 망쳐놓은 죄로 죽임을 당했고, 헬레네의 쌍둥이 언니이자 스파르타의 왕 탄다레오스의 딸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아가멤논을 죽였다는 이유로 자식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완전한 사람은 없다. 세상 어디에서도 옳고 그름의 속박 속에서 완전한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아가멤논도 완전하지 않았고 클리타임네스트라도 완전하지 않았다. 나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다. ▣ 전준우 ◇ 작가, 강연가, 책쓰기컨설턴트 ◇ 前국제대안고등학교 영어교사 ◇ [한국자살방지운동본부] ◇ [한국청소년심리상담센터] 채널운영자 ◇ [전준우책쓰기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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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5
  • [대한민국 알리기 프로젝트 Fun&Easy Guide to Korea] Guardians of the Goguryeo Tomb
    [교육연합신문=유정희 연재] ◈ 고구려 무덤의 수호신 애니) 이번 주말에 박물관에 가려고 해요. 가온) 그래요? 애니) 무덤 벽화에 대한 특별한 전시회를 열고 있거든요. 가온) 오! 저 어제 전시회 갔다 왔어요. 애니) 어땠는데요? 가온) 정말 멋졌어요. 특히 네 개의 수호신 그림이 좋았어요. 애니) 네 개의 수호신이 뭐지요? 가온) 그들은 나쁜 기운으로부터 무덤을 보호하는 신성한 동물이에요. 그들은 또한 네 방향을 상징한다고 해요. ◈ 역사돋보기 고구려 무덤의 벽화는 6세기 이전에는 죽은 후의 세계도 이 세상과 같다는 생각으로 생활 풍속도를 많이 그렸으나, 그 이후에는 무덤을 수호하는 전설적인 영물인 사신과 함께 해와 달, 연꽃, 봉황 등 신령스러운 존재를 그렸어요 사신 중 동방에 있는 청룡은 용의 뿔과 기다란 몸에는 비늘이 붙어 있어 파충류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어요. 서방의 백호는 머리는 호랑이와 같으나 몸은 용과 비슷해요. 남방을 지키는 주작은 봉황과 비슷하며 붉은 수탉이 날개를 편 모습으로 무덤의 남쪽을 지키지요. 북방의 현무는 거북과 뱀이 얼굴을 마주하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어요. 사신도는 고구려 시대 고분벽화로 크게 유행하여 90여 기의 무덤 중 34기의 무덤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데, 사신은 우주의 방위신이며 무덤 주인을 수호하는 수호신이기도 해요. ▣ 지은이 유정희 ◇ 국제교류문화진흥원 원장 ◇ 마리이야기 대표 ◇ 융합관광콘텐츠학회 국제학술대회위원장 ◇ 한국문화재지킴이단체연합회 이사 ◇ 저서 《Fun & Easy Guide to Korea》, 《담덕이야기》, 《궁파이야기》, 《창덕궁》, 《경복궁》, 《덕수궁》, 《창경궁》 ◇ 펴낸곳 응용한국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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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08
  • [아빠! 이 말이 무슨 뜻이에요?] 시장 가는 길 – 자동이체
    [교육연합신문=권승호 연재] 자동이라는 말은 ‘스스로 자(自)’ ‘움직일 동(動)’으로 스스로 움직인다는 의미인 줄은 알지? 사람이 일일이 조작하지 않았음에도 기계나 장치 등이 일정한 방식에 따라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자동’이라 해. 반대말은 수동인데 ‘손 수(手)’ ‘움직일 동(動)’으로 손을 써서 움직이게 만든다는 의미란다. 이체는 무슨 의미일까? ‘옮길 이(移)’ ‘바꿀 체(替)’로 옮겨서 바꿔놓는다는 의미야. A통장에 들어있던 돈을 B통장으로 옮겨서 돈의 주인을 바꿔놓는 일을 말하지. 그러니까 자동이체는 공공요금이나 급여 등의 지급을 위탁받은 금융기관이 정해진 날짜에 지급인의 통장에 있는 돈을 자동으로 출금하여 돈 받을 통장에 옮겨주는 제도인 거야. 지정된 날짜에 A통장에서 B통장으로 저절로 옮기는 일이지. ‘옮길 이(移)’라 했어. 권리나 의무 등을 남에게 넘기는 일을 ‘넘겨줄 양(讓)’을 써서 이양이라 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 보냄을 ‘보낼 송(送)’을 써서 이송이라 해. ‘이식’이라는 말 들어보았지? ‘옮길 이(移)’ ‘심을 식(植)’으로 옮겨 심는다는 의미인데 보통은 살아 있는 조직이나 장기를 몸의 다른 부분이나 다른 사람의 몸에 옮겨 붙이는 일을 말해. 송금은 ‘보낼 송(送)’ ‘돈 금(金)’으로 돈을 보내는 일이야. 출금은 ‘나올 출(出)’ ‘돈 금(金)’으로 돈이 나오도록 하는 일을 일컫겠지. ‘들어올 입(入)’ ‘돈 금(金)’의 입금은 돈이 들어오는 일이라는 의미로 예금을 하거나 빚을 갚기 위하여 금융기관에 돈을 들여놓는 일을 말해. 예금은 뭐냐고? ‘미리 예(豫)’ ‘돈 금(金)’으로 금융기관에 돈을 미리 맡겨둔다는 의미야, 대출은 ‘빌릴 대(貸)’ ‘내보낼 출(出)’로 빌려주기 위해 내보낸다는 의미로 돈이나 물건 등을 빌려주거나 빌리는 일을 말한단다. 복습해 볼까요? ---------------------------------------------------------------------------- 익힘 한자어 ① 자동 : 스스로 자(自) + 움직일 동(動), 반대 수동 : 손 수(手) + 움직일 동(動) 익힘 한자어 ② 이체 : 옮길 이(移) + 바꿀 체(替) 활용 한자어 이양, 이송, 이식, 송금, 입금, 출금, 예금, 대출 ▣ 지은이 권승호 ◇ 전주영생고등학교 국어교사 ◇ 저서 《삶의 무기가 되는 속담 사전》,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해주셨어야 했다》, 《공부의 기본기 한자 어휘력》, 《공부가 쉬워지는 한자 어휘 사전》, 《학부모님께 보내는 가정통신문》 ◇ 펴낸곳 도서출판 이비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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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재
    2023-05-07
  • [전재학의 교육칼럼] 불확실성의 시대, 인간의 ‘존재’와 ‘가치’에 대한 교육적 성찰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왜 인간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낄까? 왜 폭력적인 행위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까? 왜 두려움을 느끼면서 살아갈까? … 이 모든 것은 한마디로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결국 불확실한 감정을 감추려고 폭력을 행사하는 악순환의 반복이다. 문제는 이런 행위가 지속됨으로써 결국 자신과 이웃을 모두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류의 역사가 퇴보하고 마냥 폭력으로만 점철되는 것만은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빈곤과 기아가 감소했고, 아동 사망률과 문맹률도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현저히 줄어들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여성과 소수자의 권리가 당연하게 보장되고 있다. 아직 갈 길은 멀고도 멀지만, 인류는 진보했고 앞으로도 희망은 충분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들에서 거대한 분노와 불만이 화산처럼 터져 나온다. 미국, 영국, 프랑스를 비롯해 서구 사회 전역에서 정치적 불만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꿈틀거린다. 예컨대 최근 프랑스의 연금 개혁에 따른 국민의 시위와 저항을 보라. 또한 시리아, 우크라이나 난민을 비롯한 이주자들은 안전하고 부유한 서방 국가에서 살 기회를 달라고 아우성친다. 그러나 이미 약속의 땅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도 절망으로 이어질 수 있는 미래에 대해 엄청난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다. 왜 그럴까? 이것은 사람이 어떤 경우에 잘살고 있다고 느끼는지 연구한 결과에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결과는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노인은 자신이 남에게 유용한 존재라고 느끼는 노인보다 일찍 사망할 가능성이 3배나 더 높게 나타났다. 이는 인간에 대해 보다 폭넓은 진실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 인간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높여야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이기적인 자존감에 집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에 대한 타인의 세속적 평가에 집착하는 자세도 아니다. 동시대 인류를 돕는 선(善)을 실천하는 자연스러운 인간 욕망의 발로다. 그런 의미에서 “남을 위해 불을 밝히면 나의 앞길 또한 밝아질 것”이란 13세기 어느 수도승의 가르침은 울림이 많다. 불교,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 세계의 주요 종교들은 한결같이 “남을 위한 봉사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본성이요, 행복한 삶의 비결”이라고 가르친다. 철학자 레비나스도 존재의 증명은 곧 ‘선(善)’의 증명이라고 말한다. 얼마나 선한 일을 하는가에 따라 이 세상에서 더 많이, 더 의미있게 존재할 수 있다. 이는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과거 선행을 우선시하며 사는 미국인은 자기의 삶이 행복하다고 느낄 가능성이 2배나 높았다. 독일에서도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행복하다고 주장할 가능성이 5배나 높았다. 왜냐면 이타심과 기쁨은 긴밀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어느 철학자는 “당장 행복해지고 싶거든 바로 타인을 도우라”고 하지 않던가. 이타심을 가지고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존재 의식은 교육에 의한 가치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 즉 인류와 하나가 될수록 우리의 감정은 더욱 좋아진다. 최근에도 안정과 번영을 누렸던 서구 사회에서 분노와 절망이 들불처럼 번져 나가는 모습을 보며 혼란과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필자 또한 이 시대를 사는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무기력한 모습에 때로는 절망한다. 그것은 바로 인류에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은 인간의 보편적 욕망 때문에 그렇다. 이 아름다운 욕망을 충족시켜 모두가 평화롭고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를 우리는 교육으로 함께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것이 필자가 생각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이고 우리의 삶이 추구해야 하는 ‘가치’라고 믿는다. 이는 우리 인류가 영구적으로 지향하고 성취해야 할 교육적 과업이며 결코 그 어느 것과 타협하고, 양보하거나 후퇴해서는 안 되는 정언명령(定言命令)이라 생각한다. ▣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現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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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06
  • [육우균의 깨봉 칼럼] 융합적인 글쓰기 ⑤
    [교육연합신문=육우균 교육국장] 오늘은 [사회와 과학(생물)], [사회와 과학(화학)], [사회와 문학(동화)]의 융합적인 글에 대해 알아보자. 먼저 [사회와 과학(생물)]의 융합적인 글이다. 사회에서는 ‘경쟁’의 지식을, 과학(생물)에서는 ‘니치(nichi)’의 지식을 융합해서 매우 창의적인 글을 다룬다. 2006학년도 서울대 정시 논술문제는 “경쟁의 공정성과 결과의 정당성에 대해서 논술하시오.”였다. 서울대에서 제시한 예시답안은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합리적인 경쟁 질서 속에서 경쟁의 결과는 정당한 것이다” 였다. 이 답안은 보편적인 답안으로는 인정이 되지만, 창의성의 측면에서는 낙제점에 해당하는 답안이다. 다음에 제시한 글을 보면 왜 우리가 창의융합논술을 배워야 하는지 그 당위성을 알려준다. 다음은 이 문제에 대한 창의융합적인 답안이다. 「딱따구리와 동고비는 같은 나무에서 멋잇감을 구하지만 딱따구리는 나무 위쪽에서, 동고비는 나무 아래쪽에서 먹이를 찾는다. 그래서 서로 싸우지 않는다. 또한 딱새는 같은 먹잇감을 구하지만 이들은 또 각자 자기 영역이 있어서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다. 차범근과 차두리는 부자지간으로 함께 축구를 업으로 삼는 집안이다. 그러나 차범근은 차두리가 프랑스 선수인 지단에게 싸인공을 부탁하는 것을 보고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냐하면 2002년 월드컵 때 우리나라와 프랑스는 서로 경쟁하는 관계였기 때문에.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경쟁이란 함께 추구하는 것이다. 차두리는 그것을 잘 보여주었다. 축구 경기에서는 경쟁 상대지만 평소 차두리는 지단을 축구 선배로서 존경했고 경기가 끝나자 승패와 상관없이 존경의 표시를 한 것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각자 자신의 니치(nichi)가 다르기 때문에 자연의 생태계도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도 유지가 되는 것이다. 박태환은 이봉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서로의 영역(nichi)이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쟁은 초소화되어야 하고, 궁극적으로 경쟁은 상생을 모색하는 경쟁이 되어야 한다.」 다음은 [사회와 화학]과의 융합적인 글이다. 화학의 ‘주석’에 대한 지식과 사회의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 지식을 융합하여 쓴 글이다. 「1812년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64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 침략을 위한 원정을 떠난다. 프랑스군은 선진적 전술과 강력한 화력을 앞세워 몇 개월 후 손쉽게 모스크바를 점령하지만, 모스크바는 이미 도시의 45% 가량이 러시아 황제에 의해 불태워져 식량을 구할 수 없는 죽음의 도시로 존재할 뿐이었다. 결국 먼 길을 온 프랑스군은 식량을 구하지 못해 많은 군인과 군마가 죽었고 한파로 인해 모스크바에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로 귀환하는 도중 많은 병사들이 얼어 죽었으며, 12월 초가 되자 남은 병력은 1만 명 수준이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은 승승장구하던 그가 몰락하게 된 시발점이었다. 그런데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는 전선(戰線)이 너무 길고 보급품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석(Tin)이 패배의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당시 프랑스 군복의 단추는 모두 주석으로 만들어졌는데, 겨울 날씨의 낮은 온도에서 단추가 형태 변화를 일으켜 가루가 된 것이다. 추운 날씨에 단추가 없어진 옷은 제대로 보온 기능을 하지 못했고, 결국 프랑스군이 동사(凍死)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글은 [사회와 문학]과의 융합적인 글이다. 사회는 ‘정치’에 대한 지식을, 문학은 ‘동화’에 대한 지식을 요구한다. [동화와 정치]의 융합적인 글을 보자. 「아들이 어렸을 때 자주 읽어주던 ‘돌국(Stone soup)’이라는 유럽 전래 동화가 있다. 지역에 따라 좀 다르게 구전되지만 줄거리는 얼추 비슷하다. 허기진 여행자가 어느 마을에 당도해 집집마다 ‘한 끼 줍쇼’ 하고 구걸했으나 자기들 먹을 것도 없다며 냉대하자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다. 큰 솥을 하나 빌려 물을 한가득 부은 다음 강가에서 큼지막한 돌을 하나 주워다 잘 씻어 솥에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궁금해 모여든 마을 사람들에게 온 마을이 함께 먹을 수 있는 맛있는 돌국을 만드는 중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그러면서 돌국은 있는 그대로도 맛있지만 감자, 양파, 버섯에 고기와 각종 양념을 보태면 한결 더 맛있을 것이라며 아쉬워한다. 이윽고 마을 사람들이 각자 자기 집에 남아도는 식재료를 가져다 보태면서 맨 돌로 시작한 돌국은 군침이 도는 진국이 된다. 우리나라 정치도 협치하자고 한다. 그러나 협치도 손뼉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여당과 야당이 서로 하나씩 주고 받는 ‘타협의 정치’는 진정한 협치가 아니다. 모든 정치 집단이 사사건건 득실만 따지며 정쟁을 일삼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힘을 보태 함께 민생을 챙기는 ‘협동의 정치’가 진짜 아름다운 협치다. 정치인들은 한결같이 “오로지 국민만 바라보며 나아간다”고 부르짖는다. 진짜 국민만 바라보는지 이제 국민이 그들을 바라볼 것이다. 설령 대통령과 여당이 덜렁 맨 돌만 집어넣고 돌국을 끓인다 하더라도 제발 이번만큼은 모든 정당이 자진해서 국민이 원하는 식재료를 보태며 함께 진국을 끓여주길 바란다. 허구한 날 싸움만 하는 정치권에 진저리가 난다는 국민의 외침을 결코 허투루 듣지 않기를 바란다. 다음 총선 때까지 누가 협치에 어깃장을 놓는지 또는 소극적인지 잘 지켜볼 것이다. 통 크게 협치하는 정치인을 보고 싶다.」 이렇게 융합한 글을 자세히 보면 내용이 훨씬 지적이고 환상적이다. 각 분야의 죽어 있는 지식을 찾아내어 융합하면 막강한 시너지가 생겨, 마치 ‘절망 속에서 싹트는 희망’을 보는 것 같은 가슴 벅참을, ‘죽음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움틈’을 보는 것 같은 환상을 보여준다. 21세기에 필요한 융합적인 글은 이처럼 각 분야에서 죽어있는 지식을 살려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고목에 과실나무 가지를 접붙여 새로운 과일 열매를 따듯이. ▣ 육우균 ◇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교육연합신문 교육국장 ◇ 前중앙일보 공교육 논술자문단 자문위원 ◇ 前중등교사 임용시험 채점위원 ◇ 前영흥고등학교 교감 ◇ 前인천미추홀외국어고등학교 교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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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03
  • [10대인생학교 행복교육] 영웅의 전쟁, 영웅의 항해
    [교육연합신문=전준우 칼럼]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이자 그리스의 위대한 장군이다.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고향으로 귀향하는 동안 많은 어려움을 만나는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그린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만나는 귀향의 여정을 통하여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인생의 참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오디세우스가 항해하는 지중해는 신들의 노여움과 동료들의 실수를 통해 끝없는 심연과 어둠 속으로 오디세우스를 내팽개친다. 그 바닷속에서 오디세우스는 퀴클롭스를 만나 죽음의 고비를 간신히 뛰어넘고, 분별력은 살아 있으나 돼지로 변해버린 동료들을 이끌고 쾌락에 빠지기도 하고, 지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리석은 영웅들과의 담론도 이끌어낸다. 하데스, 즉 저승에서 생사고비를 함께 한 영웅들과 대화를 나누며 다시 이승세계로 돌아오는 기이한 경험도 한다. 그중에는 바다의 한가운데서 오디세우스를 부르는 불멸의 여신들, 세이렌도 있다. 스타벅스를 통해 유명해진 세이렌 여신들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은 없다. 개중에는 오디세우스의 항해를 패망으로 이끌고자 부드럽게 속삭이는 여신들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도 있을 줄 안다. 어떤 식으로든지 한 번쯤은 <오디세이아>를 읽어본, 혹은 들어본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세이렌 여신들의 대사는 민망하게도 불과 4-5행밖에 되지 않는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고대 서사시라는 점이라는 점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불과 4-5행밖에 되지 않는 바닷속 여신들의 대화가 뭐 그리 특별하다고 그다지 유명세를 타는 것일까 싶다. 세이렌 여신들은 밀랍 덩이로 귀를 틀어막은 채 밧줄로 배에 꽁꽁 묶인 오디세우스를 향해 조용히 노래한다. 어떻게 나타났는지도 모르는, 마치 오디세우스의 그림자처럼 떠오른 여신들의 노래는 무척이나 감미롭고 아름답다. 그리고 세이렌 여신들은 트로이의 전쟁 영웅인 오디세우스를 향해 "그리스군의 위대한 영광이자 칭찬이 자자한 영웅 오디세우스"라고 이야기한다. 세이렌 여신들의 노랫소리가 천상의 하모니만큼 감미롭거나 아름다웠을 수도 있다. 여신인데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오디세우스가 건너는 지중해의 거대한 파도와 맞물려 파도 위로 울려 퍼지는 세이렌 여신들의 노랫소리는, 아르고스와 트로이에게 뼈아픈 패배와 참혹한 전쟁의 결말을 전해준 전쟁영웅을 향해 "넓은 트로이에 사는 아르고스인들과 트로이아인들이 신들에 뜻에 따라 겪은 모든 고통을 알고 있어요"하고 울려퍼진다. 사실상 트로이 전쟁의 승리는 오디세우스의 활약으로 말미암은 결과라는 뜻이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노랫소리의 선율, 매혹적인 몸매의 여신들, 풍부한 고기와 달콤한 술이 있는 키르케의 궁전은 모두 오디세우스를 변하지 않는 현실에 안주하게 만든다. 세이렌 여신과 지중해라는 이름의 바다는 온갖 술수로 우리를 어둠의 심연으로 빠트리고자 노력하는 수많은 적들과 비열한 인간들의 그림자, 혹은 인생의 바다를 나타내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화려했던 인생에서의 어느 순간, 그 희열이 영원할 것처럼 느끼는 순간, 세이렌이라는 폭풍우와 바다라는 이름의 깊은 심연을 가진 인생이라는 세계는 우리를 어두컴컴한 구렁텅이로 밀어 넣기에 충분하다. 깊은 바다에서는 어느 누구도 올바른 숨 고르기를 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호메로스가 그리고 있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 속에서 오디세우스는 영웅의 모습만을 갖고 있지는 않다. 비열하고, 잔인하고, 온갖 술수를 사용하여 승리의 여신을 자신의 편으로 이끌어내는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디세우스가 빛나는 이유는 어떤 어려움이나 슬픔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추어야 할 위대한 마음의 그릇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디세우스는 바로 우리의 모습을 담고 있기도 하다. 어제를 이겨내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젊고 잘생긴 구혼자들'의 얼굴을 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뒤로 한 채 끊임없이 베틀로 '죽음과 배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수의를 짰다가 끊어내는 페넬로페를 향해 나아가는 오디세우스를 닮아가고 있다. 페넬로페는 아내이자, 고향이자, 마음의 안식처이기도 하다. 그리고 오디세우스는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어 퀴클롭스의 분별력을 멀게 한 뒤, '젊고 잘생긴 구혼자'들이라는 이름으로 모멸감과 수치심을 안겨주는 이생의 욕망을 이겨내고 아버지로, 인생의 승리자로, 불굴의 의지를 가진 한 인간으로 마땅히 가져야 할 위대한 성취를 보여주는 것이다. ▣ 전준우 ◇ 작가, 강연가, 책쓰기컨설턴트 ◇ 前국제대안고등학교 영어교사 ◇ [한국자살방지운동본부] ◇ [한국청소년심리상담센터] 채널운영자 ◇ [전준우책쓰기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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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30
  • [전재학의 교육칼럼] ‘위험사회’와 ‘플라이 아웃사이드 더 박스(Fly outside the box)’ 교육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사회학자 울리히 백(Ulrich Beck)은 현대를 ‘위험사회(Risk Society)’라고 규정하였다.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대문명이 지배하는 현대를 ‘초연결사회’라 규정하듯이 위험사회 역시 모든 게 연결돼 있다 보니 아주 효율적이지만 반면에 위험도가 굉장히 높은 사회를 지칭하는 말이다. 실제로 현대는 매뉴얼로 대응이 안 되거나 예측이 어려운 위험한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계가 매뉴얼을 넘어서거나 무용지물인 상황이 항상 일어날 수도 있는 구조적 위험사회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따라서 우리는 유연하고 종합적이며 전체를 보는 안목을 키우는 교육이 필요하다. 두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일본의 후쿠시마는 평소 지진과 쓰나미에 대비해서 세계 최고 수준의 방파제와 방제시스템, 대피 매뉴얼을 가진 지역이었다. 아주 구체적으로 매뉴얼이 준비되어 있고 주민들도 잘 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발생한 쓰나미에 주민 상당수가 사망했다. 왜냐면 매뉴얼 상황을 크게 뛰어넘는 재난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때 매뉴얼에서 정한 대피소로 대피하지 않고 상황을 보고서 높은 산으로 간 아이들은 살아남았다. 이 사건으로 우리는 무엇을 인식해야 하는가? 또 하나 2009년 US 에어웨이스 비행기가 허드슨강에 착륙한 사건을 보자. 당시 항공기는 어처구니없게도 이륙 직후 새(bird) 때문에 엔진 두 개가 꺼져버린 상태였다. 그런 긴급 상황에서 강에 착륙한다는 것은 분명히 매뉴얼에 없었다. 그런데 현명한 조종사의 판단력이 작동하였다. 당시 선택지가 없던 상황에서 ‘강에 착륙하면 어떻게 하느냐, 빨리 공항으로 계속 가야 한다’라는 판단으로 일관했다면 결과가 어찌 됐을까? 경험이 많은 기장의 훌륭한 소통과 침착한 대응에 수많은 생명이 살았다. 그 사건으로 ‘싱킹 아웃사이드 더 박스(thinking outside the box)’ 대신에 ‘플라이 아웃사이드 더 박스(fly outside the box)’라는 말이 유행했다. 이것은 박스 안에 갇혀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 바깥을 생각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는 위험한 상황에서 매뉴얼을 뛰어넘는 생각이다.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반면에 한국 사회를 보자. 2023년 참사 9주기를 맞이하는 지금도 많은 사람의 가슴 속에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세월호 이야기다. 선박 내에서 구명조끼를 입고 대피하고자 했던 어린 학생들이 ‘그대로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 방송의 지시만 믿고 위험한 상황에 따른 적절한 행동-각자 탈출을 시도하는 자유와 선택-을 취하지 않았던 결과는 수많은 인명피해를 가져온 사건이지 않았던가? 만약 차라리 개별적인 삶에의 의지와 행동을 허용했다면 어떠했을까? 역사엔 가정이 없다지만 이는 낡은 매뉴얼이 작동되지 않는 위험사회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깨우쳐준 소중한 사건이었다. 한국 사회는 너무 빨리 변해왔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도 무색할 정도다. 따라서 과거의 매뉴얼 자체가 현대적인 방식의 매뉴얼로 전환이 시급하다. 지난 아현동 KT 지사 화재 사건으로 인한 혼란과 후유증은 또 어떤가. 통신두절 상태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디지털 디톡스’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제 국민의무교육이 된 심폐소생술의 효과를 생각해 보자. 곳곳에서 접하는 절체절명의 위험한 순간에 누구나 몸에 밴 심폐소생술은 언제든 준비가 된 효과 큰 백신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이태원 참사는 기본 매뉴얼 조차 무시한 안전에 대한 무책임하고 무능한 결과였다. 결국 문제의 해결책은 교육에 있다. 이제 우리 사회는 교육시스템에서 원칙과 가치를 공유하되 나머지는 개별 주체에게 맡기는 방향으로 진화를 고려해야 한다. 그만큼 ‘위험사회’를 인식하고 대비하며 살아가는 개인의 의지와 선택이 중요한 까닭이다. 여기엔 위험사회를 극복하는 수단으로 책임감과 윤리의식의 병행은 필수다. 이제 위험사회에 대한 국민적 의식과 그에 따른 유연한 대비책은 일상에서 기본 매뉴얼의 준수를 뛰어넘어 고정된 박스(틀) 바깥을 생각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창의적인 방식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할 때이다. ▣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現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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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3
  • [육우균의 깨봉 칼럼] 융합적인 글쓰기 ④
    [교육연합신문=육우균 교육국장] [인문학과 수학]의 융합 사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슬람 예술과 건축에서 수학적 패턴의 사용 : 이슬람 예술과 건축은 종종 테셀레이션, 대칭 및 프랙탈과 같은 복잡한 수학적 원리를 통합하는 복잡한 기하학적 패턴으로 유명하다. 음악과 수학 : 음악은 미학적 특성으로 높이 평가되는 예술 형식이지만 수학적 원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음계의 구조부터 멜로디와 화음의 리듬과 패턴에 이르기까지 음악은 수학과 깊이 얽혀 있다. 예를 들어 음악적 음정과 화음을 구성할 때 비율과 비율을 사용하는 것은 음악에서 수학적 원리를 사용하는 예이다. 예술과 기하학 : 건축에서 회화에 이르기까지 많은 형태의 예술은 대칭, 비례, 원근법과 같은 수학적 개념에 의해 형성되었다. 예를 들어, 르네상스 미술에서 예술가들은 선형 원근법과 같은 기법을 사용하여 수학적 원리를 사용하여 사실적이고 생생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문헌 및 통계 : 통계적 방법을 사용한 문헌 분석은 문학 분석과 수학과 통계의 정량적 방법을 결합하는 연구 분야로 성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연구자는 통계 분석을 사용하여 대규모 문학 텍스트 세트의 패턴과 추세를 식별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문학 장르의 진화 또는 문학의 생산 및 수용에 대한 사회적 및 문화적 요인의 영향과 같은 주제에 대한 통찰력을 밝힐 수 있다. 철학과 논리 : 논리는 추론과 논증을 다루는 수학의 한 분야다. 많은 철학적 논증은 논리적 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논리적 논증의 사용은 많은 철학적 논쟁의 핵심 요소이다. 예를 들어, 일련의 전제와 결론을 사용하여 논리적 논증을 구성하는 것을 포함하는 삼단논법의 사용은 철학적 추론에서 일반적인 도구이다. 다음으로 [인문학과 수학]의 융합적인 글의 구성은 다음과 같이 한다. 1. 서론 : 인문학과 수학의 융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서론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수렴이 어떻게 경제학, 심리학 및 사회학과 같은 분야에서 새로운 통찰력과 발견으로 이어졌는지 토론할 수 있다. 2. 역사적 배경 : 인문학과 수학의 관계에 대한 역사적 배경이다. 그리스인과 같은 고대 문명이 두 분야의 중요성을 인식한 방법과 이 관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쓴다. 3. 구체적인 예 : 문학과 수학이 어떻게 교차하는지에 대한 몇 가지 구체적인 예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사회 과학에서 데이터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데 통계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또는 게임이론이 사회적 상호 작용을 모델링하는 데 어떻게 사용되는지 등을 써 준다. 4. 도전과 기회 : 인문학과 수학의 융합과 관련된 몇 가지 도전과 기회를 탐색한다. 예를 들어, 학제 간 연구에서 연구자가 광범위한 기술과 지식을 갖추도록 요구하지만 복잡한 문제에 대한 보다 포괄적이고 미묘한 이해로 이어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논의할 수 있다. 5. 결론 : 인문학과 수학의 융합의 미래에 대한 성찰로 결론을 맺는다. 학제 간 접근 방식이 향후 몇 년 동안 점점 더 중요해질 가능성이 있으며 이러한 융합이 오늘날 우리 세계가 직면한 가장 시급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 논의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융합적인 글의 구성에 따라 쓴 글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서론 : 오늘날 사회가 직면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문학과 수학의 융합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이질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분야의 강점을 결합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했을 새로운 통찰력과 솔루션을 생성할 수 있다. 역사적 배경 : 인문학과 수학의 관계는 고대 문명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곳에서 철학자와 수학자들은 종종 함께 작업하여 현실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탐구했다. 이 전통은 갈릴레오와 같은 주요 인물과 함께 수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철학적, 과학적 탐구에 수학적 원리를 적용한 데카르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17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는 수학적 원리를 철학적, 과학적 탐구에 적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수학이 자연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이며 그 방법이 철학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믿었다. 철학에 대한 데카르트의 가장 유명한 공헌은 그의 저서 "제1철학에 대한 명상"에서 발전시킨 의심의 방법이다. 이 방법은 특정 지식에 도달하기 위해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포함한다. 데카르트는 이 방법을 적용함으로써 오류가 없는 지식의 확고한 기반을 구축할 수 있다고 믿었다. 데카르트는 철학적 작업 외에도 수학과 과학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는 숫자를 사용하여 공간의 점을 그래프로 표시하는 방법을 제공하는 데카르트 좌표계를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스템은 여전히 수학, 물리학 및 공학에서 널리 사용된다. 데카르트는 또한 빛이 여러 물질을 통과할 때 굴절되는 방식을 설명하는 굴절 법칙의 개발을 포함하여 광학 연구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이 분야에서의 그의 작업은 현대 광학의 발전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전반적으로 데카르트의 철학과 과학에 대한 수학적 원리의 적용은 획기적이었고 이 분야에서 수학의 중요성을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구체적인 예 : 인문학과 수학이 어떻게 교차하는지에 대한 한 가지 예는 학자들이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분석하고 문화적 경향과 패턴에 대한 통찰력을 얻기 위해 수학적 모델을 사용하는 디지털 인문학 분야다. 또 다른 예는 기하학의 사용이다. 예술가들이 공간과 형태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도전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수학적 원리를 사용하기 때문에 예술의 토폴로지. 도전과 기회 : 융합의 잠재적인 이점에도 불구하고 각 분야의 전문 언어와 방법 간의 격차를 해소하는 등 극복해야 할 과제도 있다. 복잡한 사회 및 문화 현상을 분석하는 새로운 접근 방식을 개발한다. 결론 : 인문학과 수학의 융합의 미래를 내다볼 때, 이 분야 사이의 다리를 놓는 측면에서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두 가지 강력한 지식 영역의 교차점을 계속 탐색하면서 새로운 통찰력과 발견을 기대한다. [인문학과 수학]의 융합의 한 예는 [예술에서의 원근법 사용] + [수학에서의 프랙탈 이론의 발전]이다. 원근법은 2차원 표면에 3차원 공간의 환영을 만들기 위해 예술에서 사용되는 기술이다. 여기에는 수학적 원리를 사용하여 거리와 깊이의 모양을 만드는 것이 포함된다. 예술에서 원근법의 사용은 르네상스 시대에 널리 퍼졌고,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예술의 중요한 측면이 되고 있다. 반면에 프랙탈 이론은 프랙탈의 속성을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다. 프랙탈은 서로 다른 축척에서 자기 유사성을 나타내는 복잡한 기하학적 모양이다. 프랙탈 이론은 20세기에 개발되었으며 과학, 기술 및 예술 분야의 광범위한 현상을 모델링하는 데 사용되었다. 예술의 원근법과 수학의 프랙탈 이론의 융합은 M.C. 에셔. Escher의 예술은 종종 프랙탈과 유사한 자기 유사성을 나타내는 복잡한 기하학적 패턴을 특징으로 한다. 그의 작업에서 그는 원근법을 사용하여 깊이와 공간의 환상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프랙탈과 같은 패턴과 모양을 통합한다. Jackson Pollock과 같은 다른 예술가들도 혼돈 이론 및 프랙탈 기하학과 같은 수학적 개념의 영향을 받았다. Pollock의 작업에서 프랙탈과 같은 패턴과 모양의 사용은 그의 시그니처인 "드립" 기법에서 볼 수 있다. 전반적으로, 예술의 관점과 수학의 프랙탈 이론의 수렴은 두 분야의 학제 간 특성과 서로 다른 지식 영역이 결합될 때 새로운 통찰력과 발견의 가능성을 강조한다. ▣ 육우균 ◇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교육연합신문 교육국장 ◇ 前중앙일보 공교육 논술자문단 자문위원 ◇ 前중등교사 임용시험 채점위원 ◇ 前영흥고등학교 교감 ◇ 前인천미추홀외국어고등학교 교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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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1
  • [10대인생학교 행복교육] 일리온의 노래
    [교육연합신문=전준우 칼럼] 일리아드는 기원전 8세기에 활동한 호메로스에 의해 기록된 서사시다. 트로이 전쟁은 기원전 13세기(1,300~1,200년 전) 시대의 이야기지만, 그 뒤 일리아드라는 이름의 고전 서사시로 구전되어 오다가 호메로스가 문자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메로스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 혹은 집단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당시만 해도 제목을 염두에 두고 출판하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음유시인들이 방랑하면서 낭송하는, 흔히 이야기하는 판소리 정도의 시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일리아드는 “여신들이여 노래하소서,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이라는 구절로 시작하여 헥토르의 장례를 치르는 것으로 끝이 난다. 트로이의 명장 헥토르와 아카이오이족(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일리아드는 신들의 전쟁과 인간사에 대한 모든 희로애락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키는 자’라는 뜻을 가진 헥토르의 죽음 뒤에는 헥토르의 기도가 있었다. 트로이의 위대한 장군 헥토르가 아들을 품에 안고 내뱉은 기도는 매순간 위대한 발걸음을 내딛는 이 땅의 아버지들에게 용기와 희망이 되어 준다. "제우스여, 그리고 다른 신들이여! 내 아들도 나처럼 트로이아인들 중에서 뛰어나고, 또 나처럼 힘이 세어 일리오스를 강력히 다스리게 해주소서. 그리하여 그가 싸움터에서 돌아올 때 사람들이 '그는 아버지보다 훨씬 훌륭하구나!'하고 이야기할 수 있게 하소서!” 위대한 트로이의 명장 헥토르의 간절한 기도와 달리 헥토르의 아들 아스티아낙스(스카만드리오스)는 헥토르의 아내 안드로마케가 지켜보는 가운데 성벽 아래로 던져져 죽음을 맞이하고, 안드로마케는 남편을 죽인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옵톨레모스의 첩으로 끌려가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어두운 세상 속에서 초연한 왕처럼 홀로 위대한 걸음을 걷게 되길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담긴 아스티아낙스는 ‘도시의 왕’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아버지의 바램과 달리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아스티아낙스의 결말처럼, 일리아드는 인간생애의 끝없는 비극과 슬픔을 담고 있다. 일리아드가 전쟁의 어두운 면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 전차를 타고 싸우는 위대한 네스토르는 모사를 통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연륜의 지혜를 가진 노년의 아름다움이 어떤 것일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아가멤논의 겸손을 통해 왕이 갖추어야 할 내적 자질에 대해 숙고할 기회를 제공한다.(다만 딸을 제물로 바친 이유로 트로이 전쟁 이후 아내였던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내연관계에 있는 아이기스토스를 통해 죽임을 당한다는 점에서, 왕의 권위로 말미암은 결정과 선택들이 다수를 위한 올바른 정의였는가에 대하여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아들을 죽인 원수이자 그리스군의 위대한 영웅 아킬레우스에게 무릎을 꿇고 은혜를 구하는 프리아모스(헥토르의 아버지, 헤카베의 남편)의 모습에서는 아버지의 순수한 사랑을, 또 다른 면에서는 아킬레우스의 칼같은 냉정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일리아드가 쓰여진 시점으로부터 수천년의 역사와 시간을 뛰어 넘어 21세기에 접어들기까지 인류는 많은 파고를 만났으나, 변하지 않는 삶의 본질은 항상 존재하고 있으면서 역사의 큰 축을 굳건히 지탱해나갔다. 그 중심에 일리아드가 있고, 오디세이아가 있으며, 그 뒤에 호메로스가 세워져 있다. ‘앞날을 결정짓고자 하면 옛것을 공부하라’는 공자의 말씀처럼, 인간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하고 경험해야 할 삶의 지혜와 본질이 담긴 글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던 헤라클레이토스가 “호메로스가 가지는 한계가 인간이 가진 삶의 한계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을 정도로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그리스 문학작품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꼽힐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 준다. 고전이 전파되고 읽히워졌던 이유는 넷플릭스가 상용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재미를 붙이기가 어렵고, 쉽지 않다는 말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재미를 붙일수록 얻을 수 있는 것도 많다’. 아주 터무니없는 행동이 아니라는 조건하에 도전은 항상 옳다. 때가 되면 한번쯤 읽어보겠노라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오늘부터라도 일리아드를 ‘읽어내며’ 트로이 전쟁의 서막을 삶 속에 녹여내보자. 아참, 물론 넷플릭스가 좀 더 재밌긴 하다. ▣ 전준우 ◇ 작가, 강연가, 책쓰기컨설턴트 ◇ 前국제대안고등학교 영어교사 ◇ [한국자살방지운동본부] ◇ [한국청소년심리상담센터] 채널운영자 ◇ [전준우책쓰기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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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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