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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제의 목요칼럼] 계엄 선포의 시대와 교육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처음에 눈을 의심했다. 오랜 시간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계엄’이라는 단어는 다시는 안 보고 싶은 단어였다. 이 단어가 파생시킨 역사적 퇴행을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에서 본 것이 얼마 전이었다. 한밤에 국회로 달려가 군인을 막아선 시민들이 있었다. 국회의 창문을 부수고 공수부대 군인들이 국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텔레비전 생중계로 보았다.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계엄법에 따라 처단한다’는 포고문은 전쟁의 언어들이었다. ‘이것이 현실인가’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상처를 입은 것은 국회 집기만이 아니다. 경제, 대외 국가신뢰도, 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 평범한 일상에 대한 기대도 모두 크나큰 상처를 입었다. 경제는 곤두박질하고 외신은 한국의 계엄 선포 상황을 실시간 보도했다. 나치 독일 친위대 장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1961년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전범 재판을 받고 이듬해 처형됐다.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의 유대인 집단학살 정책 가담자로서 유럽 각지의 유대인을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열차 수송의 관리 책임자였다. 아이히만은 재판에서 “법률을 준수하는 것은 공직자가 당연히 지켜야 할 덕목”이라며 “저는 상부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했을 뿐”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상명하복'의 주장이 이 시대에도 반복된다는 것이다. 명령을 준수했을 뿐이라거나 시키는 대로 했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여인형 전 국군방첩사령관은 12·3 계엄 사태 당시 방첩사 활동에 대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위기 상황에 군인들은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명령에 따라야 하는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른 것일 뿐’이라는 말로 자신은 책임이 없다는 태도였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말했다. 끔찍하고 엄청난 악행을 저지른 사람은 특별히 괴물이나 악마가 아니었다. 그들의 특징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사유불능성이다. '사유불능성'은 '어떤 선악에 대한 구별이나 고민을 못하는 정신상태'다. 악행은 평범한 사람이 잘못된 목표를 위해 열정적으로 일을 하면서 발생한다고 했다. 지금 한국 사회는 과연 '악의 평범성'에서 벗어나 있을까. 그것을 교육에서 올바로 감당하고 있을까. 이러한 혼돈의 시대에 어떤 것이 올바른 태도인지 직시해야 한다. 혼란의 시대일수록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사마천이 한국의 계엄 사태를 보고 있었다면 무엇이라 기록할 것인지 우리 교육자는 되새김질해야 한다. 정치의 기본이 국민 행복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교육도 인간의 존중에서 벗어나면 위험하다. 교육이 인간 존중보다 편의주의나 행정을 우선하면 위험하다. 교육은 그 후유증이 더 오래 지속되고 깊숙이 가기에 교육에서는 백년대계와 신중함과 정도(正道)를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 김홍제 ◇ 충청남도천안교육지원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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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12
  • [전재학의 교육칼럼] ‘아이는 어른의 축소판이 아니다’는 교육적 함의(含意)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얼마 전까지 우리는 ‘아이는 어른의 축소판’이라는 말에 강한 믿음을 견지했다. 아이와 어른은 모든 면에서 같지만 단지 아이가 어른보다 작고 약하고 미숙한 것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아이를 어른처럼 대하고 심지어 노동, 전쟁에 내몰고 참혹한 형벌로 다스리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 인간발달학 연구가 뇌과학에 기반을 두면서 ‘아이는 어른과 다르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즉, 뇌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사고방식과 발달 과정마저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교육적으로 함의하는 바는 무엇인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유럽과 미국에서조차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가 공장과 농장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모습이 흔했다. 이는 결국 어린이를 특별 보호대상으로 간주하는 ‘아동인권법’이 제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잘못된 인식은 여전히 만연한 상태였다. 21세기에 진입한 현재도 학교에서조차 이와 같은 잘못된 행태가 진행 중이다. 이는 신체적으로 아이를 어른의 축소판으로 여기고 두뇌도 아이와 어른이 같고 단지 두뇌에 담긴 지식의 양적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믿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은 이미 형성된 두뇌에 지식을 채워 넣는 역할을 한다고 여긴다. 이는 교육으로 두뇌라는 그릇 자체를 만든다는 생각에는 못 미치는 것이다. 아이를 어른의 축소판으로 보면 어떤 문제들이 발생할까? 한마디로 아이는 그저 미성숙하고 부족하고 아쉬운 존재로 간주하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아이에 대한 희망을 찾기 어렵다. 따라서 아이에게서 희망을 발견하려면 뇌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 뇌과학에 의하면 뇌는 유연하며 외부와 상호작용하는 것이어서 교육 방법과 내용, 환경에 따라 발전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서 학교에 자기주도학습, 체험학습, 학습자중심교육 등 아이의 다양성을 고려하고 특성을 존중하는 교육 방식이 새롭게 등장했고 확산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어른의 축소판으로 보는 시각은 학교 현장에 여전하다. 예컨대 진로 지도만을 보아도 그렇다. 아이의 꿈을 존중하고 지지해 주어야 한다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진로 지도가 흔히 진학과 직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놀이와 친구 사귀기에 열중해야 할 나이에 월급과 취업률을 따지고 경쟁자를 의식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진로 지도다. 이의 가장 큰 병폐는 아이들을 너무 빨리 어른의 세계로 안내하는 것이다.(조벽, 『요즘 교사들에게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 중에서) 그렇다면 그 결과는 어떤가? 이는 우리가 목격하는 바와 같다. 아이가 어른 흉내 내기를 넘어서 어른 행세를 한다. 초중등학교에서의 학생 임원(회장, 반장) 선거를 보라. 어른을 뺨치는 선거 공약과 표를 얻기 위한 각종 행위는 세상의 어른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학교 폭력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어른을 뺨칠 정도다. 그뿐이랴. 교실 밖을 벗어나면 아이들은 온갖 못난 어른 행세를 한다. 욕설을 내뱉고, 폭력도 휘두르고, 화장도 하고, 성범죄를 저지른다. 인간 발달과정에 아름답고 바람직한 성숙과는 무관한 처참한 모습의 집합체다. 아이는 어른의 축소판이 아니다. 아이가 어른 취급받으면 결국 축소된 어른이 될 뿐이다. 아이는 아이답게 대우받고 자랄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곧 아이에 대한 교육의 책임이자 역할이다. 교육은 아이가 아이답게 자랄 수 있도록 맘껏 도와야 한다. 놀이를 빼앗기고 생각할 여유조차 없이 학원가로, 각종 사교육으로 뺑뺑이 돌면서 학교에 정(情)을 떼이고 매년 5만 명을 넘나드는 학교 밖 청소년을 양산하고 특정 학교와 직업을 선호하는 N수생을 육성하고 있다. 또 세계 최고 수준의 청소년 자살률은 어떤가? ‘이생망’ ‘헬조선’은 그저 나온 말이 아니다. 이제 학교에서의 진로진학 지도는 아이들에게 꿈과 적성, 희망에 따라 선택하고 이를 키우는 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는 세상의 온갖 삶에 지치고 찌들은 어른의 축소판이 아닌 순수한 동심을 간직한 아이답게 교육받으며 성장해야 한다. 세상살이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희망을 간직하고 전진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敎) 길러야(育) 한다. ‘아이는 어른하기 나름’이라는 교육적 관점을 곱씹어 봐야 하는 우리 교육이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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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11
  • [10대인생학교 행복교육] 문장의 구조와 성격
    [교육연합신문=전준우 칼럼] 각 언어마다 문장의 구조가 다르다. '동수는 학교에 갔다'처럼 주어와 목적어와 동사 순으로 이어지는 언어가 있는가 하면, 'he goes to school'처럼 주어와 동사와 목적어 순으로 이어지는 언어도 있다. 글을 쓸 때도 그렇다. 주요 주제나 결론이 서두에 제시되는 두괄식 글이 있는가 하면, 주제와 결론이 마지막에 들어가는 미괄식 글도 있다. 글을 쓰는 데 있어서 옳다, 그르다를 판단할 만한 필요가 있을까마는, 상황에 맞는 적절한 표현방식은 좋은 글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질문형식의 글과 주장하는 글은 두괄식이 도움이 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질문형식의 글은 '~에 대하여 문의드립니다, 여쭙고 싶습니다.'라는 내용이 우선적으로 들어가는 게 일반적이다. 주장하는 글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왜냐하면~'하고 이야기가 이어지는 게 일반적이다.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면, 주장하는 글은, 서론 : 주장하는 내용 본론 : 주장하는 내용의 의미와 이유, 사례, 논증 결론 : 주장하는 내용의 확증 순으로 진행되는 반면, 질문형식의 글은 서론과 본론만으로 끝맺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미괄식은 일반적으로 소설, 수필 형식에 많이 쓰인다. 기-승-전-결 구조를 띄고 있는 소설 특성상 핵심 내용이 되는 부분이 서론에 등장하면 글의 맛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문법적인 오류, 다양한 법칙과 기준, 맛깔나는 필력 등등 너무 세세한 방법론과 이론들 앞에 위축되기 때문에 글쓰기를 어려워하고 힘들어한다. 글쓰기의 기본은 앉아서 펜을 드는 것부터 시작이며, 글쓰기의 마지막은 퇴고라고 믿는 나에게 있어서, 위에서 언급한 이론적인 부분은 많은 글을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터득되는 부분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두괄식이니, 미괄식이니 하는 방법들이 모든 글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부분들도 아니다. 질문형식의 글과 주장하는 글이 미괄식으로 진행되는 경우도 있고, 소설, 수필이 두괄식으로 진행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요점은 간단하다. 많은 글을 써보고 많은 글을 읽는 것이 문장의 구조와 성격을 익히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된다는 것. 많은 이론을 갖고 있어서 도움이 되는 분야는 운전면허증 취득밖에 없다. ▣ 전준우 ◇ 작가, 강연가, 책쓰기컨설턴트 ◇ 前국제대안고등학교 영어교사 ◇ [한국자살방지운동본부] ◇ [한국청소년심리상담센터] 채널운영자 ◇ [전준우책쓰기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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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06
  • [김홍제의 목요칼럼] 우리 교육에 자기반성의 오답노트라는 것이 있는가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202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났다. 비행기도 멈추고 공사장 일도 멈추고 구급차 소리도 멈추게 하는 수능이다. 입시 전문가들은 수능공부에서 오답노트를 활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한다. 학교는 원래 올바른 인성을 기르고 학문을 배우는 곳이라는 것이 상식이었다. 지금 학교는 내신점수를 따거나 보육원 같은 기능을 더 중시하고 있다. 수많은 학생이 학교를 즐거워하지 않고 교사들이 힘들다고 해도 행정관계자는 귓등으로 듣는다. 개선을 한다고 하고 법도 만든다고 했지만 실질적인 체감 온도는 낮기만 하다. 권리는 없고 권한과 책임만 무거워진다. 무엇보다 보람을 느끼는 교사가 없어지고 있다. 현재의 학교가 정상적인 학교의 기능을 다한다고 볼 수 있을까. 물론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교육자와 사명감으로 학생을 잘 성장시키는 학교도 많다. 하지만 학교는 이미 학원에 많은 부분을 빼앗기고 있다. 인성교육은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학교폭력을 전담하는 변호사는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 수도 있다고 한다. 인성교육은 법적 처벌이라는 지뢰밭으로 인식되고 있다. 오답노트를 작성하는 것은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는 작업이다. 교육이 일회성 행사가 되면 안 된다. 한 학년을 보내고 나서 교원들이 만나서 학생의 생활지도와 수업과 행사내용을 반성하고 새롭게 개선하는 일들에 형식적인 면이 많다. 몇몇 혁신학교를 제외하고는 진정한 피드백은 보지 못했다. 그저 행사를 하듯이 수업이 끝나고, 시험이 끝나고, 행사를 끝내고, 졸업을 시키면 그걸로 끝이다. 1년 교사와 30년 교사의 차이는 얼마나 누적하고 반성하고 오류를 분석해서 새롭게 자신의 수업과 태도를 개선하는가에 달려있다. 1년 교사는 일 년 동안 그저 그때그때 시간을 보내고 나면 점검이 없다. 30년 교사는 자신의 수업을 점검하고 자신을 끝없이 개선하고 성장하는 교사이다. 전 주의 수업과 전 달의 수업을 점검해서 새롭게 업그레이드를 하는 그런 교사는 드물다. 인간을 가르치는 교사는 부단한 자기반성과 개선을 해야 한다. 그런 제도가 필요하다. 과학은 끝없는 축척과 개선을 통하여 목성에까지 위성을 보내는 성과를 만들고 있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능력에 근접할 정도이다. 하지만 인간을 직접적으로 대하는 교육에서는 정작 반성과 개선이 드물다. 부끄러움도 없다. 개선하지 않으니 같은 실수를 해마다 반복한다. 교육에서의 오답노트는 양심의 문제다. 학생 자살율이 높고 학교에서 우울증을 느끼고 경쟁과 반목과 열등감과 열패감을 느끼고 있는 것을 보면서 반성하지 않는다. 행동하지 않는다. 인간을 올바로 키우는 것은 임시방편으로 안 된다. 끝없는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수능 시험생만이 아니라 교육계에서도 철저한 자기반성의 오답노트를 작성하고 오류를 실천해 나가야 교육이 교육다운 교육의 얼굴을 지닐 수 있다. ▣ 김홍제 ◇ 충청남도천안교육지원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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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8
  • [전재학의 교육칼럼] 학교에서의 진로 지도, 이대로 괜찮은가?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바야흐로 전국의 고등학교는 2025년 고교학점제의 의무적인 전면 시행을 앞두고 있다. 그동안 수년에 걸쳐 연구학교 및 시험학교를 거쳐 장단점을 분석하고 숱한 논쟁을 거치면서도 아직도 한편에서는 그 실행의 시기를 놓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마침내 본격적인 실행을 눈앞에 둔 것이다. 이는 ‘학생중심의 교육과정’ 운영이라는 시대를 거스를 수 없는 대의에 이제는 그 장단점 분석과 실행의 머뭇거림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게 되었다. 문제는 아직도 당사자인 고등학생들이 진로 선택을 두고 망설이거나 머뭇거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많은 학생들이 꿈 많은 학창시절을 지나면서도 명확한 진로 선택의 방향을 잡거나 원하는 직업에의 결단을 내리지 못해 갈팡질팡하는 모습 말이다. 이는 어쩌면 긴 인생여정에서 쉽게 결단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적지를 정하지도 않고 무작정 이동 수단부터 선택하려니 막막한 것은 당연하다. 이런 학생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까? 학생들에게 진로 선택에서 진학과 직업은 삶의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어야 한다. 이는 진로 선택은 현시점에서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학생이 원하는 미래에서 현시점을 바라보도록 해야 한다. 왜냐면 자신이 원하는 미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오늘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판단해야 정답이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생은 먼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행복한 삶을 보내는 미래 모습을 먼저 머릿속에 그려야 한다. 그리고 그 행복한 미래의 모습에 크게 이끌려야 한다. 직업을 뜻하는 영어 단어에 ‘vocation’이나 ‘calling’이 있다. 그런데 이의 어원은 ‘부른다’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자기를 부르는 사람이 ‘미래의 나’라면 더없이 반갑고 즐겁고 듬직한 마음이 생길 것이다. 왜냐면 행복한 미래의 나 즉, Future Self를 만나기 위한 과정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설렘과 즐거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학교에서 진로 지도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학생들은 먼저 희망을 가슴에 꼬~옥 품어야 한다. 비전과 꿈을 간직하고서 말이다. 지금은 인생 100세 시대라 부르지 않는가. 하지만 우리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하루하루 버티기에 온 몸과 마음을 다 소진한다. 그만큼 치열한 경쟁교육에 생사를 걸고서 숨조차 쉴 틈도 없이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분주하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10년, 20년... 후의 모습에 대한 사색은 차라리 사치라 부를 만큼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다. 학생은 자신의 진로 선택을 위해 꿈과 비전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미래를 내다보는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다시금 진로 지도의 핵심이어야 한다. 학생들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목적을 정하기 어렵고 인생에서 성공하기 어렵다. 이는 곧 10년, 30년, 50년, 그 이후의 자신의 모습에 일관성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목적지를 먼저 정하고 그에 따른 수단을 선택하는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진로 지도에서 흔히 중요한 점은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에 대한 선택이다. 문제는 이것이 대개 다르기 때문에 갈등이 따른다는 것이다. 운이 좋아 양자가 일치한다면 매우 다행이고 복이 주어진 것이다. 학생들은 대개 부모나 교사가 권하는 ‘해야 할 일’과 자신이 택하는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최선의 방법은 이 양자를 만족시키는 것이고 이는 성공과 행복을 부르는 비결이라 할 수 있다. 진로 지도에서 유념할 것은 학생들이 단지 자신이 좋아하거나 하고 싶은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삶의 목표가 지극히 이기적이면 훗날 혼자 남아 외롭거나 고독하게 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사는 이 땅, 이 세계를 보다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누군가 해야 할 일’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의 전통적인 명문 대학들은 타인과 공동체, 나아가 세계 인류에 기여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비전과 목표를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 N수생이 고3 재학생보다 많게는 164%, 적게는 114%에 이르는 의대 진학 상위 10개 고교에 과연 진로 지도는 존재하는가? 의사에 매몰된 비정상적인 진로교육은 자랑이 아닌 방향 전환이 절실하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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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7
  • [10대인생학교 행복교육] 분석하면서 읽기
    [교육연합신문=전준우 칼럼] 어떤 면에서 봤을 때 글쓰기는 같다고 할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다르다. 가변적이라는 뜻이다. 이를테면 앉아서 펜을 잡고 생각하면서 쓰는 행위를 한다는 의미에서 글쓰기는 같다. 반면에 칼럼 쓰기, 책 쓰기, 단편소설 쓰기 모두 글쓰기의 방법이 다르다. 칼럼은 짧은 글 안에 함축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선별된 주제와 의견, 주장을 담아야 하고, 출간을 위한 원고 쓰기는 목차에 따라 좀 더 세밀하고 꼼꼼하게 내용을 담을 필요가 있다. 단편소설은 더 어렵다. 아주 짧은 분량 위에 인간의 희로애락을 모두 담아야 한다. 그에 비하면 장편소설은 더 할 말이 없다. 글쓰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많은데, 분석하면서 읽기도 그중 하나다. 다양한 작품을 읽으면서 분석하는 습관을 기르면 다양한 글을 쓸 수 있다. 일례로 황순원의 <소나기>나 김유정의 <동백꽃>은 국내에서 발표된 단편소설 중에서도 가장 수준 높은 단편소설로 꼽힌다. 나무를 한 짐 잔뜩 지고 산을 내려오려니까 어디서 닭이 죽는 소리를 친다. 이거 뉘 집에서 닭을 잡나, 하고 점순네 울 뒤로 돌아오다가 나는 고만 두 눈이 뚱그래졌다. 점순이가 저희 집 봉당에 홀로 걸터앉았는데 이게 치마 앞에다 우리 씨암탉을 꼭 붙들어 놓고는, "이놈의 닭! 죽어라, 죽어라." 요렇게 암팡스레 패주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대가리나 치면 모른다마는 아주 알도 못 낳으라고 그 볼기짝께를 주먹으로 콕콕 쥐어박는 것이다. -<동백꽃>중에서, 김유정 짧은 소설 속에서 애틋한 사랑을 깊고 풍부하게 표현해 내는 단편소설과 달리, 신문은 다르게 작성된다. 마을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모여 춤을 추고 있었다. 지역 댄스 대회에 나갈 준비를 한단다. 이 학교에서 바트와 아이들도 함께 공부한다. '바트와 아동교육기금'이라 쓰인 티셔츠를 입은 크리스마스는 바트와를 비롯한 마을 주민들을 위해 일한다. "어떤 사람들은 왜 저들을 위해 나서느냐고 저를 비난해요." 그는 개의치 않는다. 동네 유기농 커피 협동조합 일에서부터 바트와 아이들의 교육을 돕는 일까지, 할 일이 너무 많다. -<한겨레신문> 2024년 7월 13일자 15쪽 '동물보호' 이유로 터전 잃은 '숲사람들의 희망가' 중에서 분석하면서 읽기는 퇴고 작업을 진행할 때 무척 많은 도움이 된다. 어떤 사람이라도 한 가지 방면에 전문가일 뿐,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기란 어렵다. 정보전달용 글쓰기가 익숙해지면, 소설 쓰기와 단편산문 쓰기에도 도전해 보자. 좁고 깊은 주제로 글을 쓰기보다는, 넓고 얕은 주제로 글쓰기를 배워두면 요긴하게 쓰일 데가 많다. ▣ 전준우 ◇ 작가, 강연가, 책쓰기컨설턴트 ◇ 前국제대안고등학교 영어교사 ◇ [한국자살방지운동본부] ◇ [한국청소년심리상담센터] 채널운영자 ◇ [전준우책쓰기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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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15
  • [김홍제의 목요칼럼] 폭압의 힘이 지배하는 시대 건너기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미국의 47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민자에 대한 강한 어조와 상대방에 대한 공격적 태도에도 예상보다 수월하게 승리를 했다. 한국 대통령은 국회와 협치를 원한다고 선언했지만 24번의 거부권을 행사했다. 유럽에서도 이민자에 대한 증오의 보수 정당이 호응을 얻고 있다. 힘의 논리가 다시 세계를 휘감고 있다. 두 개의 전쟁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은 1년이 넘어가고 있는데 복구 기간으로는 350년을 예상한다. 이제 가자지구에서 수십 명의 민간인이 죽는 것은 큰 뉴스도 아니다. 크로아티아와 러시아의 전쟁은 점입가경이다. 전쟁으로 인한 비참한 피해는 가난한 자, 약한 자에게 더 크게 다가온다. 남과 북의 대결 양상에 국민은 불안을 느끼고 있다. 과거에 폭력과 강한 톤의 목소리로 학교를 지배하던 시대가 있었다. ‘사랑의 매’라는 역설적 말이 있었다. 과거에 교육은 폭압의 현장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교문 앞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단체기합이나 체벌은 일상이었다. 교칙을 크게 어기지 않았어도 학교는 공포의 공간이었다. 모의고사 성적에 따른 등수를 모두가 보는 복도에 붙여 놓는 것도 당시는 학생에게 성취동기와 자극을 준다는 명목이었을 것이다. 교사나 교장의 순위를 게시판에 붙이면 더 잘 업무를 수행할까. 이러한 개념은 교원능력을 학생과 학부모, 동료가 평가해서 동기유발을 시킨다는 해괴한 논리와 다르지 않다. 열린 사회를 지향할 때 국가와 사회는 번영했다. 하지만 패망으로 가는 조짐이 보일 때는 폐쇄적이고 폭압과 불평등이 커질 때이다. 이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폭압은 퇴행의 조짐이다. 우리가 소망하는 시대는 성숙한 민주주의 시대이다. 폭압의 시대는 불행한 어둠의 시대이다. 성숙한 민주시민을 기르기 위한 기반은 폭압이 없는 올바른 교육이다. 이재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유신반대 운동을 하다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간 이야기를 했다.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이라는 죄명으로 극심한 고문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재오 이사장은 “40일간 물고문, 전기고문, 몽둥이찜질 등 고문이란 고문은 다 받아봤다. 사람으로 태어난 게 한스러워 죽고 싶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노벨위원회는 예상을 뒤엎고 왜 젊은 한강을 수상자로 정했을까? 한강이 인류의 보편적 고민거리인 인간의 폭력성에 천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2024년은 어떤 시대로 기록될 것인가. 그 안에 사는 우리는 인간의 폭력성에 둔감해지고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트럼프의 나라가 나온다. 트럼프 병사들은 하트 여왕의 명을 받아 흰 장미를 붉게 칠한다. 흰 장미를 붉게 색칠하는 ‘이상한 나라’가 현실에서 재현되지 않게 해야 한다. 상식과 배려와 공정이 있는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이다. 인간에 대한 폭압을 멈추게 해야 한다. 그것이 장기적으로 교육이 해야 할 과제이다. 우리는 이 폭압의 시대를 건너는 방법은 상생의 교육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실천이 필요할 뿐이다. ▣ 김홍제 ◇ 충청남도천안교육지원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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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14
  • [전재학의 교육칼럼] 학교 교육에서 갈수록 중요해지는 하이터치(High Touch)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오늘날 대한민국은 ‘하이테크(high tech)’가 압도적인 사회가 되었고 더 나아가 세계의 흐름을 선도하고 있다. 최근 세계 최대 규모의 가전제품 박람회인 CES 2024에 참여한 4,000여 세계적인 첨단기술 기업 중 한국 기업이 무려 20퍼센트를 차지한 것은 이를 방증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 사회가 동시에 ‘하이터치(high touch)’를 지향하는 사회로 나아가 가정이나 학교, 사회가 물리적 성장⋅발전 위주에서 정서적⋅감성적 차원에서의 동반성장을 강력히 추진해야 한다. 40여 년 전 1982년, 미래학자인 존 나이스비트는 『메가 트렌드』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하이터치 하이테크(high touch high tech)라는 개념의 신조어를 강조했다. 이는 첨단 기술의 발전과 함께 인간의 감성과 따뜻함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곧 첨단 기술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인간관계가 얼마나 좋은가에 달려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로써 우리의 행복과 안전, 평화... 등 소중한 정신적 가치에 대한 ‘하이터치’ 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잠시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자. 대한민국은 기술적 측면에서 이미 세계 10위권의 최첨단 하이테크 사회를 이루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각 가정은 하이터치가 아니라 노터치(no touch) 사회가 되고 있다. 왜냐면 대가족이 핵가족이 되더니 이제는 혼족 사회가 되어 혼자 사는 1인가구가 이미 30퍼센트를 넘었고 매해 증가하면서 탈가족 상태를 더욱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갈수록 차갑고 딱딱한 돌처럼 굳어져 간다는 것이다. 우리말에 ‘마음 씀씀이’라는 말처럼 마음은 쓰라고 있지만 이제 그 고유의 의미는 점차 퇴색하고 있다. 왜냐면 서로 마음을 주고받으며 관계와 연결을 섬세하고 따뜻하게 조율하는 것이 날로 퇴보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자라나는 아이들이다. 따라서 아이들의 배움터이자 생활의 터전인 학교에서라도 하이터치 교육의 필요성은 더욱 부각되고 있다. 인간의 성장⋅발달과정에서 아이는 따뜻하고 섬세한 관심과 손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는 곧 학교에서는 따뜻한 하이터치로 아이의 마음건강을 지켜주어야 하고 이를 혁신교육으로 연계해야 한다. 매번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교육개혁을 강력하게 부르짖었으나 그것은 주로 한두 가지의 입시 정책을 손질하는데 그쳤다. 현 정부 역시 이러한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디지털 교과서 등 하이테크 측면보다 사람다운 사람, 마음 씀씀이가 보다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을 기르는 하이터치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현재 우리의 학교는 학교폭력, 청소년 자살률, 게임 중독, 스마트폰 중독, 약물 중독 및 마약 복용까지 심각한 상태다. 이는 마약을 할 때 느껴진다는 평온함과 안전감, 연결감을 가정과 학교에서 충분히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대책조차 학교 정규 교과과정 내에서 다루지 않고 방과 후 프로그램, 위(Wee) 센터, 정신과 등 외부 기관에 의존하고 있다. 이처럼 학생의 문제를 외부 기관에 맡기면 편리는 하지만 학교가 점점 무의미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학생의 문제는 학교 안에서 해결되어야 하고 학교는 법이 아니라 교육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이제 학교에서 아이가 단절감과 불안감을 극복해 마음건강을 찾기 위해서는 첫째, 학교는 마음건강을 위한 방법과 기술을 정규 교과과정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행복’ 교과를 개설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예비교사는 교과과정으로 철저하게 배우고 준비해야 한다. 여기엔 교대, 사대의 교육과정에 회복탄력성 같은 자기 조율, 감정코칭과 같은 관계 조율, 연결실천 같은 갈등 조율 등 하이터치와 관련된 이론과 실용 기술이 포함되어야 한다. 셋째, 하이터치 기술을 교사, 학부모에게 교육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교사부터 생각과 감정 사이를 조율하고, 행동과 욕구 사이를 조율하는 마음의 기술을 연수해야 한다. 학교에서의 하이터치 교육은 우리 사회가 날로 빈부격차가 심화됨에 따라 그늘진 사회와 인간의 소외가 악화되는 것을 대응하는 측면이기도 하다. 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이제 우리 교육이 지나친 하이테크 의존에서 벗어나 마음과 정신건강의 하이터치 시대로 가는 용기와 결단, 추진력이다. 이제 학교의 교육방식이 변할 때이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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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12
  • [10대인생학교 행복교육] 미지의 세계를 향한 동경과 탐구
    [교육연합신문=전준우 칼럼] 유클리드 기하학에는 다양한 명제와 수식이 등장한다. 이름도 그리스어로 쓰여 있는데 코덱스 codex, 피거 figure, 다이아그램 diagram 등등 다양하다.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하학 저서이자 수학의 기초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유클리드 기하학은, 그러나 원론을 펼쳐보면 단순해 보이는 명제, 이론적 지식과 정보만을 전달하는 듯한 논리 때문에 약간은 실망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유클리드 기하학, 혹은 고등수학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점은 사고의 깊이를 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는 이미 오래전 위대한 철학자에 의해 그 정당성을 인정받은 바 있다. 입법자가 보편적인 원칙으로 인정해야 할 것은 수의 나눔과 변화는 수에 내재하는 것도 평면과 입체와 소리와 상하운동과 회전운동에 내재하는 것도 모든 분야에 유용하다는 것입니다.(중략) 가정 살림을 위해서든 정체를 위해서든 모든 전문 기술을 위해서든 아이들을 위한 어떤 교과목도 산술 공부만큼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산술 공부의 가장 큰 이점은 꾸벅꾸벅 조는 무식꾼을 깨우고 쉬 배우게 하고 기억력이 좋게 하고 총명하게 만들어, 그가 이 신적인 기술에 힘입어 타고난 능력 이상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들 지식은 훌륭하고 적절한 교과목이 될 것입니다. -<법률 Nomoi> 747b, 플라톤 글쓰기와 기하학의 공통점을 찾기란 초등학교 3학년 학생에게 '고전문학의 즐거움에 대한 논문을 써서 제출하라'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다만 글을 쓰는 사람에게 있어서 사고의 크로스체크를 반복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무슨 일에서든지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자세는 좋은 글을 쓰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핵심이 된다. 연필과 지우개를 들고, 유클리드 기하학의 명제들을 하나하나 노트에 옮겨 적으면서 생각을 정리해가다 보면 명제 위의 명제를 발견하게 된다. 이를테면 A와 B가 직선이고, B와 C가 직선일 때 AB=AC라는 명제가 나온다면, AB=AC=BC라는 명제도 만들어낼 수 있고, 새로운 한 점, 즉 BC사이의 D라는 가상의 점 Imaginary point을 만들어서 AD라는 새로운 가설을 세우고 입증해 내는 결과물을 만들어볼 수도 있다. 명불허전이라고 하지 않던가. 위대한 저서들이 위대한 이유는 창의적인 데다 깊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유 없이, 뜻 없이 시대의 낙숫물을 견뎌낸 것이 아니다. 굳이 유클리드 기하학이 아니어도 된다. 다양한 방면으로의 교착훈련은 좋은 글을 만드는 데 분명히 도움이 된다. ▣ 전준우 ◇ 작가, 강연가, 책쓰기컨설턴트 ◇ 前국제대안고등학교 영어교사 ◇ [한국자살방지운동본부] ◇ [한국청소년심리상담센터] 채널운영자 ◇ [전준우책쓰기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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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01
  • [김홍제의 목요칼럼] ‘흑백요리사’ 같은 수업경연대회는 불가능한가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넷플릭스 요리 서바이벌 ‘흑백요리사’가 인기 상한가이다. 20명의 유명 요리사 ‘백수저’와 재야의 고수 ‘흑수저’ 80명이 요리 대결을 펼치는 이 프로그램의 인기몰이 이유는 무엇일까. 출연자들의 공정한 진검승부로 시청자 관심을 사로잡았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 결과이다. 처음 착상은 셰프 100인의 요리 서바이벌이었다고 한다. ‘무명 요리사’라는 제목으로 발전한 기획은 ‘발상 전환’을 거쳐 ‘흑백요리사’를 만들었다. ‘계급 전쟁’을 표제로 걸고 매회 ‘스타 셰프’를 만들었다. 요리에 대한 진심, 공정에 대한 관심, 결과에 대한 보상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본다. 수업연구에도 그러한 진심과 관심과 보상이 있는 대회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과거에 수업연구대회라는 것이 있었지만 승진 가산점을 따기 위한 보여주기 수업이 많았다. 수업연구대회로 하는 수업을 볼 때 학생을 관객으로 하는 잘 짜여진 한편의 보여주기 수업이라는 인상을 받았었다. 수십 년 수업을 해도 수업의 최고전문가라고 자신하기 어려운 것이 수업이다. 우리는 얼마나 수업에 진심이었던가. 우리에게도 요리 고수의 셰프처럼 전국적으로 내세울 만한 수업전문가 교사는 많이 있을 것이다. 재야 고수라 할 수 있는 훌륭한 교사의 교수방법이 사장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학교에서 수업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학교의 진심이 과연 수업에 방점이 있는지 의문이다. 학교에서 수업을 잘하는 교사가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 분명 잘못된 것이다. 수업으로 존경받고 수업으로 학생의 성장을 돕는 교사가 평교사로 남는 일이 많다.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교감, 교장이 되려면 대부분 승진 점수와 윗사람에게 좋은 근평을 얻어야 하는 승진 제도를 통과해야 한다. 교사에게 수업이 최고라고 하지만 현실은 최고의 수업을 하는 교사가 뒷자리에 있다. 흑백요리사와 같은 수업경연대회를 개최하여 연간 최고의 수상자 100명에게 교장을 시켜준다면 수업 현장은 활기를 띨 수 있을 것이다. 수업 개선에 대한 진정성이 있으면 할 수 있는 방안이다. 승진 가산점수, 윗사람의 비위 맞추기로 승진에 연연하는 사람들만이 중요한 위치를 맡게 하는 제도는 개선이 필요하다. 제도는 필요하면 만들면 된다. 흑백요리사처럼 공정과 기회와 보상을 주는 수업경연제도는 교원능력개발평가보다 훨씬 도움이 되는 제도라고 여겨진다. AI 교과서나 고교학점제에 따른 공간 개선도 중요하지만 교사의 수업에 초점이 더 맞추어지기를 바란다. 보여주기 위한 화려한 요리보다 진정한 맛으로 경쟁하기 위해 눈을 가리는 흑백요리사의 평가방식은 많은 호응을 받았다. 수업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학생에게 어떤 것이 가장 이해가 잘 되는 교수방법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흑백요리사’처럼 계급장 떼고 교장과 교감이 교사와 수업에서 대결할 분을 모집한다면 얼마나 지원자가 있을까 궁금하다. ▣ 김홍제 ◇ 충청남도천안교육지원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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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31
  • [전재학의 교육칼럼] 대한민국 교육, 입시(入試)보다 입지(立志)를 우선해야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우리 교육은 표류(漂流)하고 있다. 표류란 무엇인가?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물 위에 떠서 정처 없이 흘러감’이라 정의하고 있다. 즉, 확고한 목적지가 없이 그저 파도에 의해 이리저리 휩쓸리는 것이다. 그러니 암초에 부딪히고 조난당하고 온갖 풍파에 시달리며 결국은 너덜너덜 형체만을 유지한 채 간당간당하게 목숨을 부지하는 형체가 된다. 그곳에는 선장은 있으나 그는 이미 리더십을 상실했고 선원들은 각자도생하며 오직 제 살 길만을 좆기에 연대와 협력이란 공동체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겨우 명맥을 유지할 뿐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오직 힘이 세고 강한 자만이 눈길을 끌고 또 전체를 압도하게 된다. 이미 시스템이 붕괴된 가운데 누군가 목소리 크고 군림하는 자의 주변에 모여 그에게 부역하면서 철저히 자신만 출세하면 된다는 가치관이 우선한다. 이런 조직에 타인과 공동체를 위한 이타적인 삶의 가치는 희소할 뿐이다. 그저 적자생존의 정글법칙에 의해 기득권층에 편입하려는 성공 전략만이 존재한다. 이것이 표류하는 우리 교육이 낳은 엘리트들의 적나라한 모습이고 그 중심에 ‘입시(入試)’라는 괴물이 굳건하게 똬리를 틀고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문제는 그 입시가 낳은 온갖 후유증과 부작용이 갈수록 정상적인 교육을 위협하고 방해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입시 중심의 교육을 어떻게 바람직한 교육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 역사에서 그 해법을 찾을 수 있다. 선조 때 율곡 이이(李珥)는 학문을 시작하는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격몽요결』이란 교과서 격인 책을 편찬했는데 그 첫 장 제목을 ‘입지(立地)’라 했다. 이는 ‘뜻을 세워라’는 가르침으로 모든 교육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훗날 인조는 전국에 있는 향교에 이 책을 내려 보내 교재로 삼게 했다. 이는 뜻을 세우는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으로 조선 500년이라는 국가의 기틀을 다진 것으로 후대의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 교육은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다. 그만큼 우리 교육은 아직도 낡은 방식에 집착해 과거 산업화 시대의 인재를 키우는 방식과 경쟁교육에 의한 시험능력주의를 고집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21세기 교육은 ‘창의적 인재 육성’으로 결집된 교육 목표를 설정하고 있지만 이의 가장 큰 걸림돌이 입시라는 괴물인 것이다. 입시는 인간성회복을 외치는 인성교육과 OECD 최하위권의 학생 행복도를 바꾸는 데도 가장 큰 방해물이다. 이제는 우리 교육의 관점을 입시에서 입지로 달리해 근본을 살려야 할 때다. 이는 곧 학생들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공부를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등등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자신들의 꿈과 비전을 세우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입시는 교육을 위한 여러 수단 중의 하나일 뿐이고 입지가 주요한 목적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입시 교육에는 초지일관 하나의 가치관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교육이 출세와 성공지향의 강력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는 배워서 남 주자는 우리의 전통적인 홍익인간(弘益人間: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 사상과는 반대로 타인 위에 군림하고 자신만이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이다. 현재 SKY 대학 서열체제를 공고히 하는 입시 시스템, 의사라는 특정 직업만을 선호는 천박한 진로교육으로 변질되고 있다. 이에 각종 귀족학교라 칭하는 자사고, 영재고, 과학고, 예술고 등은 특별한 교육과정 운영을 내세우고 있으나 실상은 변칙적 운영으로 세속적 야망을 부추기는 결정체일 뿐이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입시교육이 배출한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을 보라. 그들의 공부머리는 사회에서 기대하는 만큼의 역량 있는 일머리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이는 단지 무엇이 되어 자신과 가문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출세와 성공지향의 가치관에 몰입되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이 세상을 보다 좋은 곳으로 만드는 이타적인 인재가 되고자 뜻을 세우는 입지에 지나치게 소홀하거나 무시한 결과다. 이제 우리는 입시라는 작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타인의 행복과 세상을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입지로 나와 공동체, 국가를 더불어 행복하게 만드는 교육으로 나가야 한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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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29
  • [10대인생학교 행복교육] 낯선 경험을 통한 배움
    [교육연합신문=전준우 칼럼] 나의 어린 시절 꿈은 작가였지만, 정확한 목표 없이 막연한 꿈을 꾸는 정도였다. 어느 날 의도하지 않은 책이 덥석 출간되고 난 뒤에도, 글쓰기 자체에 관한 관심 이외에 더 나은 원고를 출간해야 한다는 압박은 별로 가지지 않았다. 그러다 새로운 원고를 꾸준히 쓰는 일에 도전하는 것이 글을 쓰는 일을 함에 있어서 실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색다른 경험이 색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듯이, 늘 똑같은 패턴의 글을 쓰는 것보다 새로운 경험을 통한 글쓰기를 하는 것이 글쓰기 실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장편소설, 희극, 방송대본, 부동산, 세법, 심리학 등등 다양한 분야의 글쓰기는 확실히 좋은 기회가 된다. 탐사보도 기자 출신으로 일본 최고의 지성인으로 알려진 故다치바나 다카시는 10만 권이 넘는 책을 소장한 고양이 빌딩의 소유주였으며, 공산당 연구, 천체물리학 등 정치, 사회, 과학을 막론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상당히 깊이 있는 저작들을 많이 남겼다. 미지의 경계를 철저히 파고들어야 하는 '어려운 문제'를 푸는 것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한 다치바나 다카시는 저서 한 권을 집필할 때마다 평균 500여 권의 논문과 관련도서를 탐독한다고 밝힌 그는 평생 3만 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고 술회한 적 있다. 다독이 다작으로 이어지고, 다작은 곧 다양한 저서를 출간하는 데 도움이 된 셈이다. 교육분야와 독서에 약간의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뿐, 어떤 분야의 책이나 원고도 평소부터 깊은 관심을 갖고 읽어왔거나 쓴 경험은 별로 없다. 다만 낯선 경험을 좀 더 새로운 지식으로 벼르고 익히기 위한 노력이 활자로 남기는 과정이었던 것은 맞다. 나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경험을 하고, 평소에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고, 평소에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던 책을 읽고,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논문을 검토하는 일들이 모두 세계관을 확장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기회들이었던 셈이다. 글을 쓰는 일 앞에서 기준점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세계관에 국한되기 마련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배운 만큼 아는 법이다. 신문, 책, 논문, 잡지 가릴 것 없이 눈과 귀를 열어놓는 열린 마음이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이유다. 5일장, 7일장에서도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들이 많다. 심지어 시대의 흐름을 따라 활성화되고 있는 SNS에서도 보고 배울 게 많다. 유튜브, 블로그, 인스타그램뿐만 아니라 웹툰, 스레드, 릴스, 쇼츠에서도 사람들의 이야기가 넘쳐흐른다. 글은 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모두 사람을 향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어디에든지 사람들은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는 곧 낯선 경험이 되고, 낯선 기회로 이끈다. ▣ 전준우 ◇ 작가, 강연가, 책쓰기컨설턴트 ◇ 前국제대안고등학교 영어교사 ◇ [한국자살방지운동본부] ◇ [한국청소년심리상담센터] 채널운영자 ◇ [전준우책쓰기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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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18
  • [김홍제의 목요칼럼] 노벨 문학상 수상과 한국 교육의 독서 지평 넓히기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소설가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탔다. 의대 정원, 정치권 다툼, 교사 이탈, 경제 어려움 등 우울한 뉴스가 많던 가을날에 한줄기 신선한 계곡 바람 같은 소식이다. 번역이 아닌 한국어로 노벨 문학상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감격이 밀려온다. 이제 한국 문학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고 있다는 기쁨도 크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그는 소설, 에세이 등을 통해 가부장제, 폭력, 슬픔, 인간애 등의 주제를 다양하게 탐구해 왔다"고 소개했다. 이제 우리 문학이 세계의 언어로 번역되고 한국의 문화와 생활과 생각이 수출될 것이다. 우리가 과거 유럽이나 북미의 문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처럼 말이다. 역대 노벨 문학상 수상자 국적은 프랑스가 16명, 미국 13명, 영국 12명, 스웨덴 8명, 독일 8명 등 대부분이 미국과 유럽이다. 한강 작가는 2016년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분류됐던 작가였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은 과거에 특정 단체 명단을 작성하고 이들을 정부 지원에서 배제하도록 한 사건이다. 한강 역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다룬 '소년이 온다'로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지원하는 해외 문화교류 행사 지원 배제 지시 대상이 됐었다고 한다. 우리가 더 넓은 세계로 뻗어나가려면 종교나 정치적 편향에 따라 문학이나 교육을 재단하고 강제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오늘날 글은 많이 읽지만 책은 거의 읽지 않는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3년 국민독서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인 독서율은 43.0%에 불과하다. 한 해 한 권도 책을 읽지 않는 어른이 절반이 넘는 셈이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거의 핸드폰을 보고 있다. 최근 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이 책을 멀리하는 이유는 '시간이 없다'기 보다는 '책을 읽어야 하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경로가 많은데 굳이 책을 읽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왜 책을 읽어야 하는 걸까. 이 전환시대에 학교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정책은 ‘책 읽는 학교’이다. 정치·경제·사회·환경·교육·언론 등 위기에 처하지 않은 곳이 없다. 과도기의 전환시대이다. 이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책 읽는 문화에 있다. 미친 경쟁을 계속 독려하는 나라에 무슨 미래가 있겠는가. 다양한 독서를 하지 않으면 창의적인 학습은 불가능하다. 책을 읽으며 토론하고 성찰하는 시민이 없다면 민주주의도 없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책을 꼭 읽어야 하나?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의 내적 요인은 ‘독서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으며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에서 아무리 많은 글을 읽어도 훑어보기를 통해서는 깊은 사고가 생성되지 않는다. 김누리 교수는 『경쟁교육은 야만이다』라는 책에서 세계 최악의 경쟁 교육이 대한민국을 망치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국의 학생들은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아이들이라는 내용을 인용하기도 한다. 그 불행에서 학생을 구해낼 방안도 책읽기라고 단언한다. 미래의 핵심은 ‘창조’이다. 문화창조, 창조경제, 4차산업, 미래창의교육의 기본이 창조이다. 책을 읽지 않고는 창조를 못 한다. 입시 시험만 준비하는 나라가 아니라 책 읽는 나라로 바꿔야 한다. 책을 읽지 않는 국가는 몰락한다. 위대한 시대는 책의 시대였고 독서의 시대였다. ▣ 김홍제 ◇ 충청남도천안교육지원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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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17
  • [전재학의 교육칼럼] ‘내 새끼 지상주의’, 우리 교육의 블랙홀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부모의 ‘자식 사랑’에는 끝이 없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것은 약과에 불과하다. 자식을 위해 ‘우골탑’ 신화는 물론 ‘기러기 아빠’로 가족과 생이별하고 때로는 자식을 위해 한 목숨 기꺼이 바치는 것이 부모의 ‘자식 사랑’이다. 이런 마음에 누가 돌을 던지고 비난의 화살을 쏟을 것인가? 문제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하듯이 지나침은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고 오히려 해를 끼치는 것으로 과도한 맹목적인 사랑이 문제다. 여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 이면의 국민적 묻지마식 관용과 포용은 물론 묵언의 지지와 동의가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자식 사랑’을 넘어 차라리 ‘내 새끼 지상주의’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내 새끼 지상주의’ 배경은 무엇일까? 우리는 민주화가 가져다준 권리의식의 성장, 수요자 중심주의가 낳은 교육수요자의 권리확대로 인해 자녀에 대한 절제 없는 사랑을 정당화시켰다. 어떤 형태의 권리침해도 허용하지 않는 ‘금쪽이’의 탄생, 내 자식의 안전과 이익을 최우선에 놓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 IMF 구제금융 이후 혹독한 환경에서 각자도생의 형질을 획득했고, 그것이 부모가 된 뒤 자식의 안전한 환경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과보호로 나타났다.(송원재, 『교사가 아프다』) 오늘의 학교 현장은 “우리 아이가 싫어한다”, “우리 아이를 중심으로 해 달라”... 등의 민원으로 모든 아이의 평등한 권리를 부정하고 자기 자식에 대한 특별한 대우를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다. 더 나아가 국가가 정한 교육과정에 담긴 내용을 다루지 말 것을 요구하는가 하면, 내 새끼를 돌보기 위해 다른 아동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행위를 자기 자식의 정당한 권리로 여기고, 이에 반(反)하는 교사의 행위는 아동에 대한 부당한 폭력이나 정서 학대로 간주하여 학부모가 교사를 공격하는 핵심 논리로 둔갑한다는 것이다. 소설가 김훈은 ‘내 새끼 지상주의’는 “자기 자식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남의 자식을 해치는 육아원리이자 이데올로기이며, 작은 불이익을 견디지 못하고 사회관계망 전체를 왜곡하는 반사회적 행위”로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내 아이가 털끝만한 손해도 입지 않게 하려는 생각은 학교라는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관계를 축소시킴으로써 자녀의 사회화를 지체 내지 정체시키고 있다. 주목할 사실은 이런 특성이 특히 자녀에게 투자할 자산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중⋅상류층에서 더 두드러진다는 사실이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자기 자녀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배려를 위해 다른 아이에게 돌아가야 할 기회를 빼앗고 교사의 정당한 지시와 통제를 무력화함으로써 학교질서를 무너뜨린다. 설상가상으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교사에 대한 공격을 서슴지 않는다. 이것이 ‘내 새끼 지상주의’가 결국 아동의 성장을 방해하는 근본적 이유다. 이런 행위는 자녀를 무균실에서 키우려는 부모에게서 나타난다. 그들은 아이가 교사에게서 어떤 싫은 소리라도 들어서도 안 되고, 친구들과 크고 작은 갈등을 겪어서도 안 되며, 손해를 보고 지는 느낌 역시 경험해서도 안 된다고 여긴다. 이는 결국 무균실 밖에서는 도태하고 다른 아이들보다 뒤처지게 만든다. 학교는 애벌레가 나비로 태어나기 직전에 겪어야 하는 중간 단계인 번데기와 흡사하다. 이 과정을 겪지 않고는 아름답고 성숙한 성체인 나비가 될 수 없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아동의 이런 정상적인 성장⋅발달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재 학부모들이 교사를 대상으로 정서적 아동학대라고 우기는 대부분의 것이 자기 아이를 영영 번데기로 살게 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이를 원하는 부모가 갈수록 늘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위기로부터의 면제가 아니라 그에 대한 면역력이다. 부모는 제 자식 귀한 줄만 알지 자신들의 행위가 종국적으로 자식을 망치는 교육의 블랙홀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이제 부모도 마음의 훈련이 필요하다. ‘좋은 부모 되기’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것임을 깨닫고 내 새끼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하다는 마음의 수양과 내 새끼에 대한 욕망의 절제, 타인의 자녀를 배려하고 존중하며 균형을 이루는 부모로 탈바꿈하길 기대한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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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16
  • [전재학의 교육칼럼] 학부모 ‘민원처리 시스템’을 신속히 제도화해야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오늘날 우리의 초중고 학교마다 학부모의 악성민원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가히 민원공화국이라 불릴만하다. 문제는 한두 명의 ‘악성 민원러’만으로도 학교가 거의 압사 상태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에 학교는 학부모가 제시하는 의견의 내용과 방식이 교육을 위해 바람직한 것인지, 아니면 학교의 교육활동에 심각한 해를 끼치는 것인지의 선별과 이에 대한 원만한 해결이 급선무다. 왜냐면 현재 우리의 학교는 악성민원으로 교권이 바닥으로 추락하고 모든 교육활동에 제동이 걸리며 심지어 교사가 자살을 최후의 해결책으로 선택하는 것이 무한 반복될 정도로 매우 심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반 공공기관은 어떤가? 민원이 들어오면 민원 담당자가 먼저 검토해서 타당성 여부를 판단하고, 심사위원회로 넘겨 수용 여부를 결정해서 회신을 보낸다. 민원인이 회신 내용에 불복하면 행정심판을 청구하거나 행정소송을 낸다. 민원인이 담당자를 찾아와 고성을 지르거나 폭행을 하면 공무집행방해, 업무방해죄로 처벌받는다. 따라서 일반 공공기관에서는 그런 일이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다. 유독 학교라는 공공기관에서만 민원인이 교실에 쳐들어와 교사를 폭행하거나 학생들 보는 앞에서 온갖 불미스러운 일이 자행되고 있다. 과연 이런 불공정을 언제까지 감수하고 교사만이 그 희생양이 되고 생존의 문제로 비화될 것인가? 학교는 일반 공공기관과 달리 민원실도 없고 민원처리 담당자도 없다. 따라서 필자는 학교에 ‘민원처리 시스템’을 즉각 도입할 것을 제기 한다. 학교의 민원은 교사 개인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가장 신속하고 효과적인 수단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것이 지나쳐 이제 학교는 민원으로 죽어 가는 가장 대표적인 공공기관이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원인이 교사를 직접 만나 압박을 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민원인과 교사가 대면하지 않게 하는 시스템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이제 학교 민원도 ‘민원처리 시스템’으로 접수하고 교사에게 찾아와 항의하거나 요구하고 심지어 협박과 폭행을 가하는 일이 없도록 예방해야 한다. 또 접수된 민원은 당사자가 직접 답변하지 않고 ‘민원처리 시스템’에 의해 담당자나 전담팀이 대신하도록 해야 한다. 이에 대한 교육당국의 예산 확보와 대응책이 매우 시급하다. 이미 교육선진국들은 민원처리의 주체를 학교장 또는 위임을 받은 전담자나 전담팀이 해결하고 있다. 따라서 교사는 학생 수업을 위한 교육력을 최대로 확보하여 교육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를 우리는 한없이 부러워하기만 할 것인가? 우리 교육은 단지 교사의 사명감에만 호소하거나 강제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학교는 강력한 민원처리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한다. 만약 민원인이 회신에 불복한다면 상급 기관에 이의신청하는 절차를 친절하게 안내하고 그것이 민원인의 정당한 권리이자 공공기관인 학교의 의무라는 점을 인식시켜야 한다. 여기엔 적법절차에 따르지 않고 같은 내용의 민원을 반복 제기하거나 당사자 개인에게 해결을 요구하는 것은 반드시 기각 처리된다는 사실도 널리 주지시켜야 한다. 어떤 경우든 교사 개인에 대한 항의나 보복은 불법이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각인돼야 한다. 이렇게 해야 교권침해를 차단하는 합법적이고 유효한 수단으로 정착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 교육의 ‘내 새끼 지상주의’에 의한 민원은 반드시 제동이 필요하다. 이는 지나치면 없는 것만 못하거나 오히려 독이 되는 ‘과유불급’의 표상이다. 이제 학부모에게 격앙된 감정을 폭발하지 않고 자신을 객관화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이른바 ‘한 박자 쉬어 가는’ 해결의 지혜다. 교사 또한 과도한 방어에 의존하지 말고 교육활동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우리 학교에도 학부모가 민원 전화 한 통에 만사 오케이라는 잘못된 행태에 제동을 걸고 적법한 절차에 의해 교사와 머리를 맞대고 대화하여, 그간 거친 말과 폭행으로 감정을 드러내거나 무작정 교장실로 직행하던 방식을 폐기해야 한다. 학교가 더 이상 악성민원으로 고통의 근원지가 되고 교사가 안타까운 죽음으로 이어지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이것이 현재 우리의 학교 현장에 무엇보다 급선무인 교육적 과업이라 믿는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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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03
  • [김홍제의 목요칼럼] 다시 돌아보는 학교 존재 이유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무엇인가 잘못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전자교과서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붇고 늘봄사업에 돈과 인력을 쏟아 붓는다. 수업보다는 홍보와 보육이 우선으로 보인다. 입시와 점수와 기계적인 평가가 학교에 가득하다. 학교에 희망적이고 건전한 미래가 있는가. 신명이 나지 않는다. 일을 안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전자교과서나 늘봄사업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반대의 의견이나 준비부족을 말해도 무시되고 밀어붙이면서 교육계에 심리적인 파열음이 커지고 있다. 학교는 왜 필요한가.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이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 교육이 국가미래보다 정권이나 민간자본에 휘둘리면 본질에서 멀어진다. 호모 사피엔스가 30만 년 전 출현한 이래 가장 번영을 누리고 있지만 점차 불평등은 커지고 있다. 미래역량을 키우고 민주시민으로 성장시키는 교육은 표면적 목표이다. 실질적인 이면적 목표는 인정받는 직업을 얻기 위한 과정이다. 학교는 국가, 자본가, 대기업, 산업체를 위한 정치적, 경쟁적 교육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함께 조화롭게 사는 ‘공동체 협력’ 교육을 해야 한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 참여와 소통, 예술과 운동, 독서와 토론, 봉사와 기부 등의 개념이 기반이 되는 교육을 해야 한다. 기후위기와 생태교육과 과학교육, 윤리교육이 필요하다. 코로나19 상황에서 학교는 단순히 지식전달이 아니라 친구와 공동체가 어우러지는 경험의 장소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제 다시 지식교육이 전부인양 돌아서고 있다. 인터넷이 되지 않는 컴퓨터는 효용성이 없다. 미래사회는 ‘연결과 소통’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홀로 1등을 추구하는 한국교육은 연결과 소통을 외면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학교는 왜 존재하는가. 근대공교육으로 서구와 대한민국은 크게 성장했다. 이제 목표를 달리해야 한다. 명실상부한 민주시민으로 성장하기 위해 함께 사는 시민의식, 깨어있는 시민의식, 주인의식을 지닌 책임을 지닌 민주시민, 사회에 도움을 주는 민주시민으로 성장시켜 나가는 교육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학교는 근대국가건설과 산업일꾼의 깃발을 달고 경주마처럼 달렸었다. 다양성이나 개인의 성향은 돌볼 여유가 없었다. 이제 그런 달리는 일은 자동차나 기계가 더 잘할 수 있다. 개인이 행복하지 않게 만드는 학교는 필요 없다. 증오와 갈등과 경쟁과 점수가 인간답고 행복한 사회를 만든다고 생각하는가. 정권의 정치이념이나 학벌조장이나 대학선발의 하부기관, 기계부속품을 만드는 교육이 되어서는 미래가 없다. 존중과 배려와 협력과 합리적 이성이 있는 사회가 행복한 사회이고 학교는 그런 사회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 책상에 앉아서 답을 외우거나 인공지능과 대화하는 학생이 아닌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모둠토론을 하고 동아리활동과 운동으로 심신을 단련하고 지역사회와 연결하는 학습으로 사회와 함께하며 배우는 모습을 보고 싶다. 학교는 교육다운 교육을 해야 한다. 학교는 왜 존재하는가. ▣ 김홍제 ◇ 충청남도천안교육지원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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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03
  • [육우균의 周易산책] 에필로그(주역산책을 마무리하며)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내 나이 50 무렵. 인생의 절반을 넘어선 그때. 그것도 인생의 절정기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다시 일어서기가 어려웠다.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지점에서 내가 잡은 동아줄은 바로 『주역』이었다. 『주역』의 문장들은 고조선 대륙의 벌판을 스치고 지나가는 흙바람 속에 실린 싯귀들이었다. 태고의 바람은 『주역』의 지혜를 싣고 고조선의 광활한 평원을 누비며 비밀을 속삭인다. 『주역』은 변화를 향한 64가지 경로다. 그 경로는 회복을 향한 문학적 생명선이다. 인생에 실패한 젊은이가 변화하는 삶 속에서 복귀로 전환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면 알게 된다. 그 길들이 고전이라는 사실을. 64개의 경로에서 우리는 만물의 상호 연결성과 존재의 순환적 본질에 대한 깊은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주역』은 우리에게 적응성과 탄력성의 중요성을 알려준다. 바람이 갈대를 휘게 하듯이 우리도 도전과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변화를 수용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만 우리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다. 갈등 관계로 뒤엉킨 인생의 고단한 길을 무사히 걸어갈 수 있게 한 동무가 바로 『주역』이었다. 『주역』은 물질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와의 만남이다. 물질적 세계는 8괘 즉 하늘, 연못, 불, 우레, 바람, 물, 산, 땅으로 이루어진 자연 현상이다. 그것들을 겹쳐서 8 × 8 = 64. 64괘로 정신적 세계를 만들었다. 물질에 의미를 부여하면 철학이 된다. 『주역』도 물질적 세계를 먼저 만들고 이어서 정신적 세계로 승화시켰다. 즉 SEIN의 세계(물질적 세계)에서 SOLLEN의 세계(도덕적 의무)로 전환된다. 물질의 세계가 인간의 감각에 의해 뇌 속으로 들어가 의식 작용을 일으켜 정신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하늘, 연못, 불, 우레, 바람, 물, 산, 땅은 물질계를 대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그것들을 바라보는 문화적, 사회적 맥락에 따라 철학적 의미를 가진다. 하여 물적 영역과 영적 영역 사이의 경계에 서서 상호 연결성을 살펴보았다. 경계에 서서 그 너머를 보았다. 『주역』의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면 ‘건곤일희장(乾坤一戱場) 인생일비극(人生一悲劇)’이다. 건괘(乾卦)와 곤괘(坤卦)는 모든 연극을 위해 펼쳐진 무대일 뿐이고, 우리 인생은 그 무대 위에서 연출된 하나의 비극이라는 말이다. 이 칼럼은 물질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의 만남, 그리고 그들 간의 유기적인 연결성에 대한 인사이트를 제공한다. 물질적 세계의 8괘를 시작으로 64괘의 정신적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은 우리가 인생의 여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또한, 『주역』은 우주의 음양 조화를 통해 우리가 자연의 일부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강조한다. 이 칼럼은 우리가 어떻게 환경과 조화롭게 공존하며, 우리의 생명을 순환시키는 데에 필요한 지혜와 미덕을 찾아가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지혜를 통해 우연과 필연, 하늘과 땅, 음과 양, 그리고 모든 삶의 순환적 본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현대인들은 자극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겨 자신을 잊고 산다. 욕망이란 결국 더 자극적인 것을 찾고 즐기는 일이다. 그리고 그 자극은 극단으로 치닫는다. 인간의 마음이 지니는 표준이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그 표준을 지켜주는 것이 바로 『주역』이다. 인간다운 삶의 표준은 자기 자신을 위한 성실함(誠)과 남을 위한 배려(孚)다. 성(誠)과 부(孚)가 주역의 핵심 알갱이다. 이 두 가지를 좌우로 삼아 인생길을 걸어가야 한다. 표준에서 멀어지는 자극적인 욕망으로 인해 샛길로 가는 것이다. 성적 자극, 금전적 자극 등에 의해 정도에서 빗나가는 삶을 살게 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회복할 수 없는 차이가 생긴다. 자신의 삶 자체를 후회하게 된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의 주인공처럼 소설의 마지막에 다락방에 올라 기차 소리가 들려오자 울음을 터트리는 후회의 눈물, 자신이 목표로 한 추상적인 것을 이루려 하지만, 잠깐의 한눈을 팔면 목표는 저만치 물러나고, 시간이 흘러 나 혼자만 경계선 밖에서 경계선 안의 생활을 그리워한다. 그렇게 생은 간다, 봄날처럼. 그렇지만 인생에서 잠깐의 한눈팔이가 문학작품의 좋은 소재가 되고, 그것이 사람을 울린다. 목표가 확실한 사람은 성(誠)과 부(孚)를 가슴에 새기고 실천하면 모두 성공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삶에 사람들은 감동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희생하는 삶에 박수친다. 예수가 그랬고, 간디가 그랬다. 마지막으로, 『주역』은 우리가 앞으로 직면하게 될 많은 과제와 도전에 대한 안내서다. 우리는 이 칼럼을 통해 환경오염, 생태계 파괴, 인류와 지구 생물의 미래에 대한 책임과 역할을 깨달을 수 있으며, 지구와 우주 안의 모든 존재와 함께 공생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주역』은 과거와 미래, 물질과 정신, 음과 양, 인간과 자연 사이의 조화와 연결성에 대한 깊은 철학적 고찰을 제공하며, 우리가 이 세계에서 어떻게 더 나은 생명을 유지할지에 대한 영감을 준다. 이 칼럼은 우리의 삶에 대한 고찰과 탐구를 지속할 가치 있는 동반자다. 의식을 좀 더 확장하여 문학이 바로 우리 인간들의 갈등과 화해를 이야기하는 예술 장르라 할 때 문학작품을 64괘의 렌즈를 통해 살펴보는 것도 매우 뜻깊은 일이라 여겨진다. 그것이 변화하는 세상에 먼지와도 같은 인간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책무일 것이다. 아직도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산티아고 노인의 말이 귓전을 때린다.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어. 죽을 수는 있지만 패배할 수는 없지” 인간의 삶은 실수와 후회로 점철되어 있지만, 시간이 다할 때까지 싸우고 견뎌야 한다. 그것이 삶에 대한 예의다. 『주역』은 묻는다. 바람 같은 인생(人生), 당신이 이 세상에 다녀간 이유는 무엇인가?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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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02
  • [전재학의 교육칼럼] 교사는 어떻게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되어야 하는가?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한때 ‘세계의 교사 상’을 수상한 케냐 출신의 피터 타비치는 훌륭한 교사가 되려면 “행동을 더 많이 하고 말을 더 적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로서 자기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 철학을 실천하고 있다. 과거, 케냐의 시골 지역에 있는 작은 학교에서 과학, 수학, 물리학을 가르치는 교사 역할을 맡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교육, 지속가능성, 평화에 초점을 맞추는 지역 공동체프로그램에 매월 월급의 80%를 기부했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교사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자라면서 교사로서의 길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 진흙으로 만든 오두막이 학교였어요. 어느 것도 충분치가 않아서, 도서실도 없고, 불을 켤 전기도 없고, 신발도 없고, 심지어는 탄탄한 나무 바닥도 없었어요. 어디나 먼지투성이였어요. 항상요. 우리가 침을 뱉으면 먼지가 가득했죠. 우리가 배우는 모든 것은 우리 앞에 서 있는 선생님들한테서 나오는 것이었어요. 우리는 선생님들께 의지했죠.”(안드리아 자피라쿠 지음, 장한나 옮김 『세계의 교사』) 피터 타비치는 자신을 가르쳐주었던 바로 그 선생님이 되었고, 또 그 이상이 되었다. 그는 여러 동아리를 설립해 학교의 다양한 영역과 더 넓은 공동체에 도움을 주었고, 하나하나 모두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과학 동아리는 2018년에 케냐에서 높이 평가 받는 과학 엔지니어링 대회에 나가 전국에서 손꼽히는 다른 학교들을 제치고, 청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에게 도움을 주는 측정 장치 발명품으로 우승을 했다. 이 동아리는 계속해서 미국에서 열린 국제 대회에서도 실력을 드러내어, 식물로 전기를 만드는 기술로 수상했다. 그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안, 학생 수는 두 배로 늘어났고 학생들의 행동도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이는 그의 향기가 만 리까지 퍼져 나가는(人香萬里) 스승의 표상이자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할 수 있다고 힘을 실어줌으로써 가능했다. 즉, 가능성을 향해 눈을 뜨도록 한 것이다. 또 학생들에게 그치지 않고, 더 넓은 공동체도 눈을 뜰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시대가 바뀌면서 젊은 세대는 교육이 가장 중요한 기회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많은 여자아이를 학교에 나오도록 했다. 이른바 ‘교육무류(敎育無類)’의 실천에 앞장섰다. 지극히 가난한 환경을 극복하고 오늘의 케냐 젊은 세대들에게 수없이 많은 자극과 동기를 제공하여 각자의 위치에서 나름 성공한 사람으로 키운 피터 타비치의 교육관 덕분에, 케냐는 아직도 선순환을 이루어 곳곳에서 제자들이 인재로서 살아가고 있다. 이는 그의 교육자로서의 헌신과 봉사의 삶에서 소중한 결과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사람을 키우고 공동체의 발전을 이끄는 교사로서의 역할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증명해 보였다. 그로 인해 교사는 공인(公人)으로서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큰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피터가 교육자로서 걸어온 삶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오늘날 우리의 교육 환경은 과거 케냐처럼 빈곤의 그늘에 가려 어렵게 생활하던 시절에 비해 물질적, 사상적으로 부족함이 없고 또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진취적인 의식과 성장 동력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기러기 아빠’를 탄생시킨 높은 교육열의 민족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밑바닥에 존재하던 그야말로 순수한 배움과 가르침 즉, 교육에의 열정과 신념, ‘배워서 남 주자’는 교육 가치는 얼마나 우리 사회에 지속가능한지 이 시대는 끊임없이 성찰하고 반성해야 할 때다. ‘영감을 불어 넣는다’는 영어 inspire는 원래 ‘숨을 들이 마신다’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교사는 바로 학생에게 “성장의 공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왜냐면 교사는 학생들이 살아가고 성장할 수 있는 공기를, 생명의 힘을, 희망의 메시지를 불어 넣어 주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학생을 만나는 모든 교사는 그들에게 낙관주의와 열정, 연대와 협력, 창의력과 상상력, 나눔과 배려, 봉사와 헌신 등 핵심 교육 가치들이 흠뻑 스며들도록 해야 한다. 이 시대의 교사는 단순히 과거에 교육받은 것을 뛰어 넘어서 미지의 세계로 발을 내딛는 선구자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되어야 할 것이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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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24
  • [육우균의 周易산책] 마음에 성(誠)이 없으면 대축해도 허망하게 끝나기 쉽다(산천대축괘)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산천대축괘는 위에 산(☶)이 있고, 아래에 하늘(☰)이 있는 모양이다. 하늘이 산 속에 온축되어 있는 모습이다. ‘대축(大畜)’의 ‘축(畜)’은 玄(실타래) + 田(농작물)을 쌓아둔다는 말로 ‘크게 축적케 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쩨쩨하게 살지 말고 커다란 스케일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자칫 허망해지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마음에 ‘성(誠)’을 지니지 못한 채 대축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재물을 쌓으려 하지 말고, 덕성을 온축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내용의 문학작품이 바로 1925년에 출판된 F.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의 소설인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다. 『위대한 개츠비』는 소설의 주인공 제이 개츠비가 아메리칸 드림을 구현한 인물이기 때문에 대모험의 삶과 관련이 있다. 그는 모험과 야망의 삶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개츠비의 초기 생애는 수수께끼에 쌓여 있지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유하고 성공적인 사업가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의 부를 이용하여 그의 인생의 사랑인 데이지 뷰캐넌을 되찾는 가장 큰 소망을 추구한다. 데이지를 쫓는 개츠비는 자신의 저택에서 화려한 파티를 열고 자신의 부와 성공으로 그녀에게 깊은 인상을 주려고 하는 대모험을 시작한다. 『위대한 개츠비』는 열정과 결단력으로 자신의 꿈을 좇아 위험을 무릅쓰고 최선을 다해 인생을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큰 모험의 삶과 관련이 있다. 개츠비는 부와 축적의 동기가 대동 사회를 열어가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과거 자신의 사랑이었던 데이지 뷰캐넌을 되찾는 것이었다. 그것도 조직범죄와 연루된 대축이었다. 개츠비의 마음속에 ‘성(誠)’ 없었다. 성(誠)이 없는 결과는 비극이다. 개츠비의 삶이 모든 외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으로 끝나는 소설의 결말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그의 부와 그가 창조한 거창한 인물은 그를 구원할 수도 없고 그가 추구하는 행복을 가져다줄 수도 없다. 그가 깊은 인상을 주려고 노력한 사회에서 크게 무시된 그의 죽음은 그의 노력의 궁극적인 허영심과 불성실한 기초 위에 세워진 삶의 공허함을 상징한다. 개츠비의 불성실함과 피상적인 이상에 대한 집착은 실패로 이어지며, 이는 진실한 마음 없이는 진정한 성공과 성취를 이룰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면 부자의 성(誠)은 무엇인가? 다름 아니라 봉사와 기부다. 그리고 그것을 몸소 체감하여 육화시키는 것이다. 성실함을 바탕으로 문명의 편견을 넘어 인간의 보편에 도달해야 한다. 산천대축괘의 93효사에도 매일 수련하고 연마해야만 모험을 감행하여 앞으로 나아가는데 실패하지 않으리라고 말하고 있다. 92효사에도 수레의 바퀴살이 빠졌다. 바퀴살이 없으면 수레는 굴러가지 않는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국민이 없으면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군자(리더)는 국민을 잘 살게 만들어야 한다. 재물이 많으면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도와야 한다. 조선시대 경상도 지방에 조씨라는 아주 짠돌이가 살았는데, 재벌이었다. 그런데 평소 먹는 음식도 평민들이 먹는 음식으로 매일 똑같은 반찬만 먹는 짠돌이였다. 마을에 산사태가 올 것을 미리 안 조씨는 자기집 쌀 창고를 불태워 마을 사람들을 대피시켰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기가 그동안 모았던 쌀을 내주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좋은 사례다. 그 외에도 경주 최부잣집 이야기처럼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며 삼백 년을 넘는 시간 동안 이웃을 위해 곳간 문을 활짝 열였던, 그리고 그 때문에 행복했던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는 산천대축괘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부의 축적은 도덕적 의무를 다해야 정당성을 확보한다. 자신들의 삶의 질을 높여 준다. 철저하게 근검 절약했고, 나라와 이웃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썼던 경주 최부잣집 이야기는 세계 역사를 통틀어 삼백 년이나 부를 유지했던 가문은 거의 유일하다. 부불삼대(富不三代)란 말이 무색할 만큼 졸부가 아닌 명부의 면모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최부잣집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단순히 한 번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무려 300년 동안 유지했던 것이다. 그것은 매일 수련하고 연마했다는 말이다. 산천대축 효사 93을보면 “한 발자국 물러나 매일 수련을 하라. 수레몰이를 연습하고 호위무술을 연마해라. 실패하는 일이 없으리라”고 했다. 우리는 왜 삼성가나 현대가를 보면 욕부터 하는가. 그들이 졸부라서 그런가. 아니다. 그들은 수레로부터 빠진 바퀴살을 찾아 넣는 연습과 훈련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을 보면 영국 국민이 왕실에 존경심을 표하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영국 왕실은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정신을 몸에 체득하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지원하여 목숨을 걸고 싸우고, 늘 봉사와 기부를 생활화 한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을 체화·육화될 때까지 연마하고 수련한다. 기쁜 대축의 마음으로 대동 사회를 열어가려면 매일 수련과 연마가 이루어져야 한다. 산천대축괘의 효사를 보자. 지(地)의 자리다. 자연과 벗삼아 소몰이하던 목동이 자라 청년이 되었다. 그런데 수도권 지역에 개발이 되어 아파트를 짓고 도로를 놓고 하는 현대화의 바람이 불었다. 청년의 집과 땅 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 결국 청년은 졸부가 되었다. 인(人)의 자리다. 그 청년은 돈방석에 앉았다. 내심 그동안 해보지 못한 일들이 생각났다. 도박, 여자, 마약 등을 일삼으며 아주 불성실하게 살았다. 그렇게 인생을 낭비했다. 그 결과 가족, 친지, 친구와도 헤어지고 거리를 헤매이는 노숙자가 되었다. 그는 졸부가 되었을 때부터 성실과 중부를 버렸다. 그리고 유혹을 취했다. 목동으로 자랄 때 가졌던 성실함과 자연이 베풀어 준 중부의 마음을 내팽개친 결과였다. 천(天)의 자리다. 늙으막에 자신의 인생을 반성하며 살아야 한다. 다시 성실함과 중부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 보아야 한다. 욕심을 버리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반성하며 삶을 살아야 한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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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23
  • [김홍제의 목요칼럼] 교사의 정치기본권 보장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교사에게서 교권은 고사하고 인권도 보장이 안 된다는 자조 섞인 말을 듣는다. 청운의 꿈을 안고 들어온 교직에서 떠나고 싶다는 젊은 교사의 목소리도 들린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을 수 없다. 교사가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자존감마저 없어진다면 사명감이 생길 수 없다. 입시, 경쟁, 법적 고발, 민원에 교육 현장은 갇혀있고 의견수렴은 형식적이었다. 초중등 교사는 정치기본권을 제한받고 있다. 63년이면 연필 문화에서 스마트폰 문화로 바뀔 만큼 긴 시간이다. 통제 당시는 군사 쿠데타 이후로 정치적으로 예민한 국민통제시대였다. 교육현장과 사회, 경제도 괄목상대할 만큼 변화하였다. 교육을 하는 학교는 가장 민주적 기제가 작동해야 함에도 정권의 휘둘림에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교육백년대계는 먼 이야기이다. “교사의 교육활동 보장과 공교육 정상화를 위한 교원의 정치적 기본권 보장의 목소리에 이제 국회와 정부가 응답해야 한다.” 백승아 국회의원이 지난 7월에 교원 정치기본권 보장을 위한 7건의 법안을 발의하면서 한 발언이다. 교원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로 60년 이상 정치적인 기본 권리에서 벗어나 있다. 50만 현장 교사의 교육 전문성이 국가 교육정책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OECD 소속 38개 나라 중 교사에게 투표권 이외의 대부분의 정치적 기본권을 보장하지 않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라고 알려져 있다. 미국, 프랑스 등 OECD 국가에서는 교사가 출마를 위해 사직서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전국 유·초·중등·특수 교원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에서 응답한 교사의 98.2%가 '교사의 목소리가 국가 정책에 반영되지 않는 주된 이유는 정치기본권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지금 학교는 정치에서 온전하게 자유로워졌는가? 교육계는 정치적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입시제도, 교과서, 미래교육에서 실질적으로 정치적인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교육공무원이라는 이유로 더구나 정치적 중립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기본적인 권리를 침해당하고 있다. 정치적 중립이 문제가 된다면 캐나다의 경우처럼 정치적 중립에 대한 법률을 만들어 적용하면 된다. 차 사고가 우려되어 아예 운전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비이성적 태도이다. 그러한 위험성을 미래 예견하고 법을 만들고 적절한 제재를 하는 것이 법과 정치가 할 일이다. 60년이 넘도록 정치 청정지역으로 남은 교사와 교육계는 지금 무기력하다. 정치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은 민주주의 시대에서 중요한 권리를 상실한 것이다. 문제는 교육에서 정치를 배제하면서 정당한 국민 청원이나 국민 발의도 불온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풍토가 되었다는 것이다. 정치는 국민의 세금으로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올바른 정책을 실현하는 일이다. 교원에 대한 권리 박탈로 교육을 위한 정당한 발언이나 의견에도 힘이 실리지 못하고 있다. 언제까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시대적 역행을 계속할 것인가. ▣ 김홍제 ◇ 충청남도천안교육지원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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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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