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7(화)
 

[교육연합신문=문덕근 미래교육포럼 공동대표]

퇴직을 한 후 요즈음은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고등학교 동창들과 매주 수요일이면 무등산으로 산행을 하는 재미가 삶이란 무엇일까 하는 의문과 함께 포근함을 준다. 오랜 삶과 철학 속에서 나오는 그들의 인생 역정을 들어보면 모두가 대하소설 속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에까지 미친다. 

 

대하소설의 멋진 지속과 마침을 위한 길은 ‘自我’를 버리고 虛像인 내 자신을 낮추려는 자세가 절실하다는 생각에 행동으로 옮기려고 하는데 이제까지 쌓아온 여정의 단단함에 그리 녹녹치는 않다.

 

어제는 산을 오르다가 절에 있는 종을 보면서 우리가 흔히 일이라고 하는 ‘事’는 절의 ‘종’이 걸려 있는 모양을 그렸다는 유래를 떠올려 보았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주어진 일을 성실한 종의 모습을 보면서 ‘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라는 생각에까지 미쳐 혼자 피식 웃었지만 마음 한 구석으로 다짐을 하고 또 한다.

 

이제 얼마 있으면 지방자치단체의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해야 한다. 저마다 자신만이 나라와 지역을 이끌 인재라고 소리치며, 자신이 아니면 안 되는 이유를 달곤 한다. 그 사람들은 저 높은 곳에서 누릴 수 있는 자리에만 온통 가 있는 것은 아닌지? 그들이 가고 싶은 地位라는 말의 유래와 뜻을 생각해 본적은 있을까? 아마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도 또한 우리 교육의 맹점 중의 하나일 것이다. 새로운 내용을 접하면 먼저 모르는 낱말을 사전에서 찾고, 그 낱말이 어떤 상황과 맥락에서 쓰이고 있는지를 살피는 개념 정립이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  

 

地位란? 가장 낮은 곳에 처하며 천지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높은 데 오르려면 낮은 데부터 시작해야한다는 登高自卑의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일에는 순서와 차례가 있다는 엄숙하고 엄연한 삶의 철학인 것이다. 우리말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어쩌다가 경험은 무시되고, 뿌리도 없는 말과 선전만이 난무하게 된 원인은 누구에게서 찾아야만 하는가?

 

속담을 그저 시험 점수 올리기에 급급한 오늘의 현실 또한 위정자들의 몫이고, 오늘의 선거에 뛰어든 일부 사람들의 부추김에 힘입는 바 클 것이다. 산정에 오르려면 낮은 곳에서 출발하는 것이 정석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꿈과 사랑 등 인생사 자체가 등고자비 과정의 연속이다. 일의 순서와 차례 그리고 경험이 무시되는, 말만의 盛饌 時代가 열리고, 그런 지도자 상은 언제부터인가?

 

김수현이 부른 'Dreaming'(작사: 박진영, 작곡: 박진영·개미) 노랫말은 꿈을 쫒는 발걸음을 등고자비 과정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윤종신이 부른 '오르막길'(작사: 윤종신, 작곡: 윤종신·이근호) 노랫말도 등고자비의 예를 적절히 보여준다.

 

마음 속 저 밑바닥 깊고 낮은 곳부터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내딛을 준비를 한다. 고공을 향해 그리고 목표 실현을 위해 과감히 도전을 선언한다. 누구든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지금부터 서서히 활용해보자. 마지막에 기회의 최고 정점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을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나라와 지역의 지도자가 되기를 꿈꾸어야 한다. 

 

때가 되면 피고, 또 때가 되면 지고 말뿐, 집착을 하지 않는 저 야생화가 가르쳐주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고, 지도자들의 삶이 되며, 또한 그러한 삶을 외치는 지도자가 나올 때는 언제일까? 무작정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야 하는가? 아니면 각자의 자리에서 그러한 문화와 철학을 두드리고 몸부림만을 쳐야 하는가?

 

우리 교육은 아이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돕는 교육, 진로교육만 했지 퇴로교육은 하지 않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어떻게 내려올 지에 대한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 아이들에게 나아가는 방법만 가르치는 교육은 결국 정당한 절차는 무시한 채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만을 강요하는 약육강식의 동물적 행태만을 쫓는 것은 아닌가? 나아가서 물러나고, 다시 나아갈 수 있는 사회적 제도 마련은 요원한 일인가?

 

사람으로서 가장 큰 바람은 至善(지극히 선한 사회)의 사회를 꿈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至善의 사회는 차별이 없는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앞장서야 할 사람은 지도자이고 지식인이여야 한다. 앞장을 서기 때문에 차가운 바람도, 날선 비판도, 혼자만의 외로움도 견뎌왔던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사람을 찾고 신뢰하며 존경하는 문화 시민을 키워가는 것은 누구의 몫이어야 하는가?
 
지금 우리 사회를 위험과 위기라고 말하고 있다. 위험이란 ‘내가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가장 무서운 적은 자포자기의 마음인 것이다. 위험에 자신의 전체를 내 맡길 때, 과거의 나는 죽고 새로운 내가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맹자’에서 ‘행하고도 얻지 못함이 있거든 모두 돌이켜 자기 자신에게서 구하라(行有不得者 皆反求諸己).’는 말과 같다. 내 앞에 놓인 험한 길과 고통도 사실은 내가 만들어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깨달을 때 비로소 자신이 극복하고자 하는 온갖 어려움이 스스로가 만든 것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어려움은 결국 진정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기 위한 것임도 알게 된다.

 

나부터 어려움에 봉착하면 그 원인을 항상 밖에서 찾는다. 모든 어려움은 ‘구조적으로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이 착취하기 때문’이라는 등의 이유를 달고 억울해 했던 사람이 바로 지난날의 나였다. 어려움의 원인을 밖에서 찾으며 사람과 사회를 미워하고 나를 무던히 학대했었다. 그러나 괴물과 싸우는 왕자는 필연적으로 괴물이 될 수밖에 없다. 진정한 변화는 증오심과 적대감이 아니라 오직 ‘현재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오늘날의 학교는 아이들에게 논리적으로 따지는 법만 가르치지 사랑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교육! 국어사전을 놓고 ‘사랑’이라는 낱말의 뜻을 찾고, 사랑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을 감고 그려보며, 짝꿍과 서로의 생각을 교환해보며 깨달아가는 수업! 그래서 말과 행동에서 사랑이 묻어나는 변화된 자신의 모습에 ‘내가 이렇게 달라졌어요.’하고 느끼게 하는 교육은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 工夫란 여러 상황을 잘 살펴서 어떻게 해야 나와 너를 보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일에 ‘먼저 그리고’를 생활화하는 나와 너를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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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먼저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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