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대상전에 중뢰진괘를 보면 ‘우레가 거듭되는 모습이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내 몸에 잘못이 없는가 공구하며, 자기 자신을 닦고 성찰한다.’고 되어 있다. ‘중뢰진(重雷震)’의 ‘진(震)’은 ‘우레’라는 뜻이다. 이는 ‘흔들림’, ‘사물을 흔드는 것’이라는 의미로 확대된다. 건(☰)과 곤(☷)이 만나 낳은 첫 아이가 진(☳)이다. 그래서 진(震)은 창조다. ‘흔들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무엇인가 창조하려면 우리의 뇌를 흔들어야 한다. 우리의 뇌를 흔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질문’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질문의 힘’이다. 기존의 답에 새로운 것은 없다. 오직 질문 속에 새로운 것이 존재한다. 이 세상을 변하게 하는 힘은 모두 질문의 결과로 나왔다. 창의적인 것, 이 세상에 없는 것들을 찾으려면 질문해야 한다. 한 해에 특종을 6개나 찾아낸 신문기자를 만난 적이 있다. 비결을 물었다. 자기는 항상 ‘왜’라는 질문을 가지고 기사를 찾아 쓴다는 답변이었다. 그 후로 삼성의 이건희 회장도 매일 여섯 번씩 ‘왜’라고 중얼거린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세상을 바꾸는 것들은 모두 ‘왜’라는 질문의 결과였다. 질문이란 내 안에 있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더 이상 머물지 못하고 터져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열매도 터져야 그 속에서 씨앗이 밖으로 나와 커다란 나무가 되는 것처럼, 질문은 이 세계 누구와도 공유되지 않는 자기한테만 있는 것, 어떤 이상한 것, 비밀스런 활동이다. 
 
그것이 질문이고, 이 질문의 모든 위대함이 태어나는 곳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박말례 할머니의 말 “니 춤춰라”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와서 같이 춤을 춰주는 거다. “좋은 춤을 배우려 하지 말고, 네가 좋아하는 춤을 춰라” 이것이 『장자』에서 말한 ‘자쾌(自快)’다. 네 춤을 춰라. 그러면 위대해질 것이다. 다른 사람의 춤을 따라 추면 스텝이 꼬일 것이다. 내 안에서 내가 생산해 낸 쾌락, 나 자신만의 즐거움을 만끽하라는 말이다. 
 
질문에 대해 이야기를 조금 더 확대해 보자. 요즘 Chat GPT가 유행처럼 번져 있다. Chat GPT를 잘 다루려면 질문을 잘해야 한다. 구조화된 질문이다. 질문을 바꾸면 다른 답을 알려준다. 어떻게 질문을 바꿀까. 전제를 바꾸면 된다. 평범한 생각에서 벗어나는 비결은 전제를 바꾸는 것이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에서 유지태가 “틀린 질문을 하니까, 맞는 대답이 나올 리 없잖아”라고 말하는 장면을 연상해 보라. 최민식은 “왜 15년 동안 가두었을까?”하고 생각하며 유지태에게 질문을 한 것이다. 전제를 바꾸면 “왜 15년 만에 풀어 주었을까?”가 된다. 이후 영화의 줄거리는 충격과 반전의 연속이다. 결국 최민식이 고등학교 시절에 한 말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을 알고 자기 혀를 가위로 자른다. 유지태는 고등학생 때의 충격으로 자살을 한다. ‘올드보이’란 말은 고등학교 동창회 모임의 사이트명이다. 아직 이 영화를 안 본 독자들은 도대체 고등학교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궁금하면 영화를 보시라. 
 
새로운 창의적인 어떤 것을 만들려면 열린 질문을 해야 한다. 열린 질문은 무엇일까. 올바른 질문이다. 본질적 요소에 의문을 품는 질문은 관점의 전환을 가져온다. 지동설은 천동설의 관점에 의문을 품었기 때문에 얻은 결과였다. 즉 본질에 의문을 가졌기 때문이다. 천동설은 ‘지구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대전제로부터 출발한다. 그 대전제를 바꾸면 ‘지구도 태양이나 달처럼 움직이지 않을까?’라는 의심에서부터 관점의 전환이 시작된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공부란 몰랐던 것을 새롭게 알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고정관념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 공부를 많이 한 지식인은 자기 그물에 갇혀 단단한 고정관념을 갖게 된다. 그래서 어느 정도 독서를 한 사람은 이제 그만 책을 손에서 놓아야 한다. 그래야 유연한 사고의 힘을 얻게 된다. 
 
톨스토이가 쓴 『부활』이란 작품에서 주인공 네흘류도프 공작은 젊은 시절 고모네 집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는데, 하녀 노릇을 하고 있던 카추샤를 겁탈한 일이 있었다. 카추샤는 이후 매춘부로 살아가다 끝내 범죄자가 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네흘류도프는 카추샤의 타락이 자신의 비열한 행동 때문이었음을 깨닫고, 양심의 가책 속에서 자신의 방탕하고 비도덕적인 삶을 반성한다. 또한 땀 흘리는 농민은 가난하게 살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지주와 귀족은 농민을 착취하여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는 현실의 부당함을 깨닫는다. 카추샤의 석방을 탄원하면서 감옥을 드나드는 동안, 네흘류도프는 무고한 사람들이 법률적인 도움을 받지 못해 죄인으로 갇혀있는 현실을 발견한다. 결국 네흘류도프는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는 카추샤를 따라 떠난다. 춥고 황량한 시베리아 벽지의 어느 여관방에서 그는 「신약성서」의 복음서를 읽다가 자신의 영혼을 부활시킬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네흘류도프는 공작 집안이다. 책을 읽고 현실을 망각한 삶을 살아간다. 네흘류도프의 인생에 반전이 찾아온다. 카추샤였다. 젊은 시절 자신의 욕정을 참지 못해 충동적으로 저지른 행동 때문에 카추샤의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부당함과 좌절감을 깨닫게 되면서 그동안 자신이 철저히 고수했던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고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된다. 닫힌 이념을 열린 이념으로 치환하는 인생 역전이라 할 수 있다. 중뢰진괘는 우레가 두 번이나 중첩되어 있다. 우레는 하느님의 분노다. 분노의 지수가 크다는 말이다. 이런 하느님의 진노는 백리 사방을 놀라게 한다. 효사(초9)에도 ‘하느님의 진노의 울림이 오면 혁혁하게 공구하고, 그 후에 웃으며 담소하고 화락한 삶을 즐긴다’고 되어 있다. 네흘류도프도 하느님의 분노를 알아차리고 카추샤의 석방을 탄원하게 된다. 그러고 나서 세상을 달리 보게 된다. 이전의 공작으로서가 아닌 일반인의 관점으로. 대상전에서도 중뢰진괘를 ‘공구수성(恐懼脩省)’이라 하였다. 즉 우레가 치면 내 몸에 잘못이 없는가 공구하며, 자기 자신을 닦고 성찰한다‘는 것이다. 네흘류도프도 자기 자신을 성찰하여 젊은 날 저지른 자기의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되돌려 놓으려고 노력한다. 우레는 변화의 상징이다. 나태한 사람을 부지런하게 만들고, 해만한 자를 장경하게 만든다. 자기 스스로 닦고 성찰하는 사람들에게 복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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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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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흔들림은 새로움의 시작이다(중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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