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대상전에 뢰산소과괘를 보면 ‘산 위에 우레가 있는 모습이다. 우레라는 작은 것이 산을 울려 천지가 진동하는 모습으로 작은 것이 큰 것을 제압하는 것이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소과의 삶을 살아야 한다. 소과의 삶이란 작은 것에 있어서도 지나칠 정도로 공손, 절약, 검소하는 모습이다’고 되어 있다. ‘뢰산소과(雷山小過)’의 ‘소과(小過)’는 ‘작은 것의 지나침’, ‘지나간다’, ‘초과하다’의 의미다. 뢰산소과의 상황 속에서는 과잉 의욕을 버려야 하고 확대와 전진을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 제각기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능력을 절약하면서 일상생활과 그 주변의 작은 일에 착실하게, 소심하게, 작게 살아가는 것이 안전하고 현명한 것이라는 지혜를 준다. 

 

‘작은 것의 지나침’이 큰 것을 파괴한다. 물방울이 커다란 바위를 뚫는 상황이다. 바위를 깨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우선 바위 위에 서너 개 정도 구멍을 낸다. 그런 다음 나무 조각으로 구멍을 메운다. 그 나무 조각에 물을 준다. 하루 정도 지나면 바위가 깨져 버린다. 물에 밴 나무 조각들이 팽창해 그런 결과를 얻는 것이다. 우리가 거대한 일을 계획하지만 작심삼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는 뇌가 모르게 아주 작게 시작해야 한다. 예를 들면 108배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하루에 1배씩만 하는 것이다. 뇌가 모르게. 뇌가 알면 힘들어서 실행을 안 한다. 우리의 뇌는 고통스러운 것을 의식적으로 피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그러니까 뇌가 모르게 아주 작은 실천을 한다. 모든 일이 그렇다. 10kg 다이어트 하기, 100일 기도, 종잣돈 100만원 만들기 등등. 작은 것 하나 얻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니 조금씩 실천해야 한다. 나의 뇌가 모르게, 아니면 습관이 될 때까지 나의 뇌와 싸워야 한다. 습관이 무섭다. 습관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다. 

 

불교에서는 찰나와 영겁을 이야기한다. 순식간, 별안간, 삽시간보다 더 짧은 시간의 단위가 바로 찰나(刹那)이다. 찰나는 75분의 1초에 해당하는 극히 짧은 시간인데 인도어인 ‘크사나’를 한자로 옮긴 것이다. 불경에 의하면 사람 둘이 명주실을 양끝에서 잡아당긴 후 명주실을 칼로 끊으면 그 순간에 64 찰나가 존재한다고 한다. ‘순식간에 아침이 찾아오고 삽시간에 점심이 지나는가 싶더니 일을 해보려는 찰나에 또 하루가 지나간다.’ 찰나의 반대말은 영겁(永劫)이다. ‘겁’은 인도어인 ‘칼파’를 한자어로 옮긴 것인데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긴 시간 단위이다. 천지가 한번 개벽한 다음 다시 개벽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말한다. 선녀가 돌산을 백년마다 한 번씩 옷을 스쳐 돌산이 전부 닳아 없어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영겁은 그야말로 끝이 없는 영원한 시간이다. 찰나와 영겁은 문학작품에서 단골 메뉴가 된다. 

 

고은의 선시집 『순간의 꽃』에 있는 「그 꽃」을 보자. 짧은 시이니 전문을 감상해 보자.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우선 길이가 짧다. 우리나라에서 쓴 시 중 가장 짧다. 헤밍웨이가 쓱 써서 건넸다는 전설의 여섯 단어 소설이 있다. “아기 신발 있음. 한 번도 신은 적 없음.” 또는 “팝니다 : 아기 신발. 사용한 적 없음.”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여섯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에 불과하지만 이 안에는 그 자리에 있었던 친구들을 울려 버릴만한 많은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사용한 적 없는 아기 신발을 판다는 뜻은 아기가 유산 또는 사산되었거나 걸음마를 떼기 전에 요절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도 모자라 이 신발을 팔아야 할 만큼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것을 뜻한다. 헤밍웨이가 썼느냐 안 썼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본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지관(止觀). 그치면 보이는 것이란 뜻이다. 모든 것을 보기 위해서는 보는 것을 그쳐야 한다는 명언이다.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가 한 말 “내가 여기 보고 있는 것은 껍질에 지나지 않아.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유지되듯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실제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반야심경에 ‘안이비설신의’라고 말했다. 안(眼)은 가장 믿을 수 없는 감각기관이다. 그렇게 이(耳), 비(鼻), 설(舌), 신(身)(피부를 말함), 의(意)(의식을 말함)의 순서로 믿음의 감각기관이 나아간다는 것이다. 즉 의식이 가장 믿을 만한 감각기관이라는 것이다. 의식은 한 번 익히면 절대 바꾸기 힘들다. 그래서 이념, 신념, 사상 등이 중요하다. 

 

고은의 시 「그 꽃」으로 돌아가자. 이 짧은 시의 내용은 간단하다. 산에 오를 때는 보지 못했던 꽃을 내려갈 때 보게 됐다는 것이 내용의 전부이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함께 생각나는 것이 성경의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마가복음 8:18)”의 구절과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는 『대학』(전7장)의 구절이다. 모든 것을 보면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는 삶의 많은 부분을 놓치며 살고 있다. 이 시에서나 성경⋅대학의 구절에서나 ‘본다’는 것은 단순히 눈에 비친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존재를 의미 있는 존재로 인식한다, 깨어있다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본다’의 의미와 가까울 것이다. 화자가 산을 오를 때도 그 꽃은 분명 같은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화자도 그 꽃을 보았을 것이다. 다만 무심코 지나쳐 갔기에 꽃이 있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을 뿐. 화자는 산에서 내려올 때에 비로소 그 꽃을 보게 된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뇌로 보는 것이다. 보이는 것이 보는 것이 아니다. 의식해야 보는 것이다. 평소에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을 어느 순간 알게 되었을 때 마음을 흥분시키고 새롭게 하는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순간이 영원이 되는 경험’, ‘찰나가 영겁이 되는 경험’ 말이다. 그런데도 인생의 많은 순간을 우리는 깨어있다고 생각하고 마치 모든 것을 보고 있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지는 않은가. 작은 것 하나에 만족할 줄 아는 삶이 진짜 아름다운 것이다. 뢰산소과괘를 보면서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본다. 

 

모든 화려하고 성대한 것은 작고 견실한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다. 하늘 높이 거만하게 버티고 선 거대한 고층 건물도 센티미터와 밀리미터로 계산되는 작은 점과 선으로 그려진 치밀하고 차근차근한 설계도에서 생겨났으며, 바다를 가로막고 있는 거창한 방파제도 하나하나의 돌과 한 줌의 모래와 시멘트의 누적인 것이다. 작고 견실한 것을 누가 감히 경멸할 수 있단 말인가. 어두운 밤이 오면 내일을 위하여 푸근히 단잠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하늘만 쳐다보고 걷다간 넘어지기 마련인 것이다. 젊어서 넘어지는 것은 그래도 낫다. 다시 일어설 수 있으니까, 나이 들어 넘어지면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하고 누워 있다 보면 욕창이 나고 척추가 휘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온다. 하늘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된다. ‘늙을수록 하늘을 보지 말고 땅을 살피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아래로 침착하게 발을 살펴 확고하게 두 다리를 세운 뒤라야 먼 산도 바라볼 수 있고 하늘도 쳐다볼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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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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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소과는 작은 것의 큰 울림이다(뢰산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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