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4(토)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대상전에 화수미제괘를 보면 ‘불이 물 위에 있는 모습이다. 양자는 서로 만나지 않는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신중하게 사물을 분변하고 제각기 있어야 할 장소에 사물이 있게 한다.’고 되어 있다. 해가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석양 무렵의 모습이다. 장차 밝게 떠오르는 장면을 연상하면 된다. 화수미제(火水未濟)의 미제(未濟)는 ‘아직 건너지 않았다’는 의미다. ‘미완성’이라는 말이다. 화수는 자연의 원점이다. 그것은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화수의 죽음에서 수화의 생명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순환이 시작된다. 따라서 미제는 열려진 종말이며 64괘의 새로운 출발이다. 
 
무덤(tomb)이 곧 자궁(womb)이다. 추석 때 차례를 지내려고 고향에 간 적이 있다. 그때 우리 아이가 산소를 보더니 “할아버지를 심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 말을 듣는 순간 화수미제란 말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았다. 시작이 끝이고 끝이 시작이다.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이다. 이러한 인문학적 사고는 어른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어린 아이도 느끼며 자란다. 
 
뫼비우스의 띠는 안과 밖의 구별이 있다는 생각을 일시에 무너지게 할 수 있는 띠다. 밖이 안이 되고 안이 밖이 되는 세상, 시작이 끝이고 끝이 시작이 되는 무한대의 세계, 그 신기한 공간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우주의 시작과 끝에 블랙홀이 있다. 블랙홀에 빨려든 항성들은 파괴되어 우주 공간으로 흩어지고 새로 태어날 별들의 자양분이 된다. 즉 블랙홀은 모든 별을 삼켜 버리지만, 또한 모든 별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우주의 신비다. 이런 우주의 신비를 현대 과학만이 밝혀낸 것은 아니다. 여기 미당의 「내가 돌이 되면」이란 시를 보자. 

내가/돌이 되면
돌은/연꽃이 되고
연꽃은/호수가 되고,
내가/호수가 되면
호수는/연꽃이 되고
연꽃은/돌이 되고
 
불교의 연기설을 바탕으로 한 시라는 것을 얼른 알 수 있다. 연기설은 모든 존재는 인과관계에 의해 나타난다는 법칙이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는 말이다. 이 시에서도 돌, 연꽃, 호수의 사물도 마찬가지다. 내가 돌이 되면 돌은 연꽃이 되고,연꽃은 호수가 되는 것이다. 상호 인과관계에 따라 존재의 모습이 변한다. 인간도 인과관계에 따라 자식이 되고, 부모가 되고, 손자 손녀가 된다. 자신의 존재 이름이 인과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이 시는 영원히 생성되면서 순환하는 연기론의 법칙을 몇 개의 단순한 시어로 보여주는 명시다. 
 
양자이론을 개척한 닐스 보어(Niels Bohr)는 우리의 태극기 안에 들어있는 태극을 보고 ‘대립은 보완이다(Opposition is complementation.)’라는 태극의 성질을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탁견이다. 즉 대칭, 대립으로만 설명되던 이 세상에 태극 문양처럼 대립이 보완이 되고 융합이 되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제 파동과 입자가 다르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이것이 양자의 세계에 오면 그 파동과 입자가 서로 구별되지 않고 넘나든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물리적 질서가 무너지고, 우연이 지배하고 좌우가 서로 융합하고 보완하는 관계로 바뀐다. 거기서는 생(生)이 사(死)이고, 사(死)가 생(生)이다. 
 
카메라의 종류에 따라 현실 세계는 달리 보인다. 광카메라, 초고속카메라, 열화상카메라 등 카메라의 종류에 따라 같은 사람도 모습(피사체)이 달리 보이는 것이다. 내식대로 사물을 본다는 것이다. 자기만의 카메라로 세계를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을 확장하면 이는 자기만의 고정관념, 프레임,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보는 것과 같다. 세상에 존재하는 데도 우리가 의식하지 않으면  그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칸트의 ‘인식의 12범주’도 확증편향적 보기다. 우리는 시공간 속의 매카니즘을 통해 뇌에서 조합하여 사물을 보게 된다. 이를 양자이론에서 ‘관찰자 효과’라 한다. 관찰자가 없으면 모든 세상은 파장으로 되어 있다. 물질이 안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관찰자가 있다면 파동은 입자가 되어 물질로 보이게 된다. 이것은 이중 슬릿 실험으로 입증되었다. 파동과 입자의 관계를 데이비드 봄(Bohm, David)의 양자역학으로 보면 바다에서 밀물이 밀려오면 파도가 넘실대는데 그것이 바위에 부딪쳐 포말이 되는 장면으로 설명하고 있다. 파도는 파동이고, 포말은 입자라는 것이다. 결국 파동과 입자는 같은 물질인데, 관찰자가 보고 있을 때는 입자로, 보지 않을 때는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가 관찰하겠다고 마음과 관심을 두면 파동이 입자로 바뀌어 하나의 온전한 물질로 내 눈 앞에 나타난다. 김춘수의 「꽃」이란 시 중 일부를 보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관찰하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으면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이었지만, 내가 관찰하겠다고 마음을 먹는 순간 그는 하나의 꽃이 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주파수는 나와 공명한다. 내가 결심만 하면 된다. 그러니 모든 일을 이룰 수 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심상사성(心想事成)’이다. 세상의 모든 물질이 파동의 주파수를 가지고 있다. 세상의 모든 주파수가 나의 몸과 공명하고 있다. 그러니 눈을 떠야, 즉 의식을 바꿔야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의식을 바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세계가 글로벌화 하면서 문화도, 문명도, 의식도, 몸도 하나가 되어 버렸다. 우리의 몸도 지구촌을 살아가는 사람들끼리 섞여 하나가 되었다. 70억 인구의 양자들이 우리의 몸 속에 들어와 있다. 우리 몸은 원자의 집합체다. 따라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를 불교에서는 ‘인드라망’이라 한다. 요즘 말로 하면 월드 와이드 웹(w.w.w.)을 말한다. 이 인드라의 그물 속에서 얽히고 설킨 현상을 ‘인연’이라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을 양자역학에서는 ‘양자얽힘 현상’이라 한다. 양자얽힘의 동시성 때문에 ‘우연’이 생긴다. 따라서 우연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그러므로 세밀한 음성을 들을 줄 아는 감각을 키워야 한다.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의 신음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성인이다. 에수가 그랬고, 싯다르타가 그랬다. “관세음보살”이라 할 때 ‘관세음(觀世音)’이란 말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잘 아는 ‘하인리히 법칙(1:29:300)’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실행에 옮기는 일이 중요하다. 생각하지 말라. 바로 실천해라. 그래야 양자 도약이 일어난다. 내 양자가 돌아야 동시성의 원리에 따라 저쪽에 있는 얽힌 양자가 즉각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우연을 가장한 기적이 시작되는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 완벽(完璧)이란 흠이 없는 구슬이란 말이다. 완벽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미제다.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점차 석양으로 기울어져 바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내일 다시 태양이 중천으로 떠오르지 않겠는가. 들레즈가 말했듯이 매일매일의 끊임없는 반복이 계속되어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자연은 순환한다. 하물며 인간의 일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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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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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무덤과 자궁 - 미제와 새로운 시작의 상징(화수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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