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5(일)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인간 역사와 문학 속에서 물은 끊임없는 존재의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다. 중수감괘에서는 ‘중수감’의 개념과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를 통해 물의 상징성과 인생 여정의 연결점에 대해 탐구하고자 한다. 
 
「대상전」에 중수감괘를 보면 ‘물이 넘쳐 흐르는 모습이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덕스러운 행동을 일상적으로 끊임없이 행하고, 배우고 가르치는 일들을 끊임없이 실천하라’고 되어 있다. 중수감의 ‘감(坎)’은 ‘물’이다. 『주역』 상편은 건곤으로 시작하여 감리로 끝난다. 그래서 태극기의 4괘도 건곤감리다. 감은 ‘간난’이고 중수니까 ‘간난이 중첩된다’는 뜻이다. 험난한 인생길을 배우고 익히면서 헤쳐나가야 득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감’은 물이기에 ‘빠진다’는 의미도 있다. ‘빠짐’이란 물 즉 생명의 몸체다. 생명과 물을 하나로 본다. 세상은 물로 되어 있다. 서양 철학자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고 했다. 우리가 탈레스를 철학자로 보는 이유는 인간적 사유의 힘으로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려 했다는 점이다. 그전까지는 신이나 자연 현상으로 치부했다. 이런 과학적 세계관은 동양의 『주역』에서도 나타난다. 바로 중수감괘다. 그런 감괘는 우주적 성심(誠)을 지니고 분투하는 진실한 모습(孚)을 가졌다. 계속되는 험난한 간난에 빠져 있는데, 그곳을 나오려면 성(誠)과 부(孚)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주역』은 세상의 변화를 담는다. 그 변화를 관통하는 방법은 성(誠)과 부(孚)다. 아무리 세상이 시공간으로 변해도 변치 않는 성(誠)과 부(孚)를 지니고 실천하면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게 된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 『싯다르타』가 있다. 우선 이 소설의 갈등 단계에 맞춰 싯다르타의 여정을 살펴보자. 소설의 시작은 주인공 싯다르타를 소개하고 갈등을 설정한다. 싯다르타는 브라만 계급의 일원으로서 호화로운 삶을 살고 있지만 성취감과 불안을 느끼며 삶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찾고 있다. 밤새 호화로운 파티를 하고 난 후의 환멸, 혐오, 권태를 느낀다. 29세에 출가하려 할 때 아들을 안고 싶어 아들 곁으로 다가가다가 그만둔다. 아들의 이름을 ‘라훌라(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란 뜻)’라고 짓는다. 
 
싯다르타가 편안한 삶을 뒤로하고 자기 발견의 여정을 시작한다. 그는 붓다의 가르침을 포함하여 다양한 인물과 경험을 접하지만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더 깊은 세계 이해를 추구한다. 싯다르타는 왜 끝내 구도의 길을 간 것일까? 그것은 12살 때 친경제 스토리에 담겨 있다. 친경제는 봄날에 백성들의 농사를 장려하기 위해 벌이는 일종의 페스티벌 같은 것이다. 농부들이 일하는 광경을 보면서 ‘소–농부–벌레–새’ 그 사이의 긴밀한 사슬을 보았다. 그 사슬의 공통점은 괴로움이었다. 인간은 왜 괴로움을 느끼나? 이 괴로움을 풀 수는 없을까? 싯다르타의 위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싯다르타가 여정에서 낮은 지점에 도달하고 깨달음을 향한 그의 탐구에 환멸을 느끼게 될 때, 카말라라는 창녀와 연루되어 물질주의와 욕망의 굴레에 갇히게 되고 영적 목표를 잃어버린다. 인류의 행복은 물질적, 외부적 조건을 통해서는 이룩될 수 없다. 원초적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방향타를 내부로 돌려야 한다. 외부에서 내부로, 물질에서 정신으로. 스마트폰은 모든 차별을 해체했다. 무차별의 세상이 열렸다. 그래서 인류는 이제 탐닉의 세계에 빠졌다. 탐닉의 끝은 쾌락이고, 쾌락은 고통의 원천이다. 고통은 불행이다. 
 
싯다르타가 수년간의 탐구 끝에 마침내 깨달음을 얻는다. 그는 모든 것의 상호 연결성을 깊이 이해하고 내면의 평화와 성취감을 얻는다. 깨달음은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이미지나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눈앞의 대상을 직시한다는 것이다. 싯다르타의 타고난 잠재력이 그간의 교육으로 계발된 내적 에너지가 최상으로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았던 것이다. 핵심은 괴로움이었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괴롭다. 사람도 소도 벌레도 새도.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다. 중도는 있는 그대로의 상태 유지다. 생각이 어느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편견 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 그 무주(無住)의 경지가 바로 중도다. 일체의 분별이 사라지면 실상을 깨닫게 된다. 
 
싯다르타가 자신의 지혜를, 깨달음을 찾고 있는 아들에게 물려준다. 싯다르타는 자신의 여정이 원점에 이르렀고 자신이 찾고 있던 답을 찾았다. 헤세는 『싯다르타』에서 독자를 주인공과 함께 자기 발견의 여정으로 안내하는 매력적인 내러티브 역할을 한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에서 물은 생명의 순환적 본질과 만물의 상호 연결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된다. 싯다르타는 도시와 숲 사이의 강에서 산다. 소설 전반에 걸쳐 주인공 싯다르타는 물에 이끌려 강과 개울 근처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 싯다르타는 브라만 계급의 일원으로서 사치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성취감과 불안함을 느끼며 깨달음을 찾아 안락한 삶을 뒤로 하기로 결심한다. 여행을 떠나면서 싯다르타는 강에 이끌려 강을 만물의 상호 연결성의 상징으로 여긴다. 그는 뱃사공이 되어 강 근처에서 살면서 강에서 배우고 지혜를 얻으며 수년을 보낸다. 사람들이 갈망하는 삶이란 환락과 허무를 반복하는 늪이었다. 싯다르타는 강을 건넜다. 강은 미혹의 세계와 깨달음의 세계, 그 사이에 존재한다. 허리의 칼을 들어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깨끗한 강물에 씼었다. 이안에서 피안의 세계로 건너가면 배는 더이상 필요 없다. 배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한다. 강 근처에서의 경험을 통해 싯다르타는 삶의 순환적 본질을 이해하게 되고 변화의 필연성과 무상함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건넌다’는 말은 여러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오랫동안 과거에 갇혀 있었고 이를 건너야 한다. 
 
『장자』 첫 구절에 보면 곤(鵾)과 붕(鵬)의 이야기가 나온다.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었다. 이름이 곤이고 그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모를 정도로 엄청 큰 물고기다. 그 곤은 가만히 바다에서 놀 때 잘 지내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붕이라는 새로 변신을 시도한다. 변신를 끝낸 붕새는 자신이 살던 북쪽 바다를 날아 그 반대의 남쪽 바다로 날아가려 한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변신에 있다. 변신은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만 비로소 이루어진다. 현실을 살고있는 인간도 변신을 꿈꾼다. 여행, 성형, 다른 직업, 다른 취미 등 자신을 전과 다르게 가꾸려고 애쓴다. 들레즈가 말한 ‘- 되기’다. 변신을 위해서는 용기와 도전이 필요하다. 각자의 존재는 삶의 크기와 방향이 다르기에. 싯다르타도 변신을 꿈꾸고 이루었다. 
 
그는 삶의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물은 소설에서 재생과 갱신의 상징으로도 사용된다. 싯다르타는 여정에서 최저점에 도달했을 때 절망에 빠져 강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목적의식과 명확성을 가지고 물에서 나와 깨달음을 향한 길을 계속한다. 중수감의 감(坎)은 ‘물’이고 ‘험난한 인생길을 배우고 익히면서 헤쳐나가야 득통할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싯다르타』에서 싯다르타는 기름진 음식과 아리따운 여자들과의 관계를 끊고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남들이 주는 음식을 입에 넣었다. 그런 고행을 6년간 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왕자와 거지로 비교되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변신하려면 용기와 도전도 필요하지만 절제와 결단도 필요하다. 독자들도 그런 절제와 결단을 해보시겠는가? 도전해 볼 용기가 나지 않을 것이다. 왕자라는 신분과 가족 관계를 끊어야 하기 때문에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결단과 용기가 있어야 물에 빠진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할 수 있다. 
 
여기서 잠깐! 샛길로. 중수감괘의 효사를 보자. 먼저 지(地)의 자리다. 인생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은 그 반작용으로 매일 먹고 자는 것으로 인생을 낭비한다. 
 
인(人)의 자리다. 매일 그렇게 행동했으니 배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여러 성인병을 갖게 된다. 매사에 의욕이 떨어진다. 자신감이 제로 상태다. 편한 것만 찾게 된다. 그렇게 세월이 가면 인생의 뒷자락이 처참해진다. 결단해야 한다. 절제하고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그런 결단과 용기가 없다면 인생은 실패하게 된다. 
 
천(天)의 자리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이불 개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기 방을 깨끗이 청소하는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음식의 메뉴도 조절하고 집 밖으로 나와서 햇볕도 쬐고, 뛰기를 생활화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삶의 의욕이 생긴다. 새로운 목표가 생긴다. 머리로만 생각하지 말고 실천하면 된다. 인생이 변한다. 자신이 변신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자신의 삶에 대한 의지는 더욱 강화되고 바른길로 나아가게 된다. 
 
깨달음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처한 일상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에 알맞은 꿈을 좇아서 그 꿈을 이루는 것, 그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도인들이 명산에 들어가 명상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거기에 맞춰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에는 절제와 결단, 도전과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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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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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싯다르타'를 통한 물의 상징성과 인생 여정(중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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