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3(금)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연말연시다. 구세군의 자선냄비가 눈에 들어오는 계절이다. 자신의 한 해 농사가 잘 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시기다. 산택손괘를 생각나게 한다. 

 

「대상전」에 산택손괘를 보면 ‘산 아래에 못이 있는 모습이다. 못의 흙을 파내어 산을 더 높게 만드는 것이니 자기 몸을 깎아 이상을 드높게 만드는 이미지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나의 몸에 내재하는 분노와 욕망을 덜어내어 버린다. 즉 분노를 억제하고 사욕을 제압한다.’고 되어 있다. ‘산택손(山澤損)의 ‘손(損)’은 ‘扌(손)으로 鼎(솥)의 음식물을 덜어내다’에서 나왔다. 그래서 ‘손해보다’, ‘던다’, ‘덜어내다’, ‘줄이다’의 의미다. 손괘는 연못 바닥의 흙을 준설하여 산의 흙에 보태어 더 높게 만든다는 의미를 가진다. 즉 못이 깊으면 깊을수록 산은 높아진다. 따라서 기쁨으로서 위를 받든다는 의미가 있다. 특히 손(損)은 아래를 덜어 위를 보탠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임시방편이라는 뜻이 아니라, 아래 민중의 것을 빼앗아 자기를 살찌우게 하면 그것은 곧 손이 되는 것이다. 어차피 인간 세상도 집단생활을 하고 국가 사회의 유지를 위하여 세금을 거둬들인다. 손(損)은 현실이다. 덜어내고 보탬으로 나아가는 것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을 덜어내고 보태며 현실적 평등을 실현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성실함과 성찰을 통해 가능하며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현실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힘이다. 

 

덜어냄과 보탬에 대해 정민 교수는 ‘덜어냄은 등잔에 기름이 줄어듦과 같아 보이지 않는 사이에 없어진다. 보탬은 벼의 싹이 자라는 것과 한가지라 깨닫지 못하는 틈에 홀연 무성해진다. 그래서 몸을 닦고 성품을 기름은 세세한 것을 부지런히 하기에 힘써야 한다’고 했다. 또 ‘대숲이 빽빽해도 물을 막지 못한다. 구름은 높은 산을 탓하는 법이 없다. 하루하루를 허투루 살지 않아야 삶의 기쁨이 내 안에 고인다’고 전했다. 

 

‘절미통’이란 말을 아는가. 절미통은 부뚜막 옆에 놓여있는 항아리를 가리킨다. 옛날 어머니들이 밥을 지을 때마다 쌀 한 주걱씩을 절미통에 넣었다가 나중에 난리가 나서 쌀이 떨어졌을 때 요긴하게 쓸 수 있게 만든 항아리다. 절미통에 쌀을 조금씩 덜어놓았던 우리 어머니들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고 했다. 필자가 지금도 존경하는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었던 임완수 선생님(그때 우리 반 급훈은 ‘책임완수’였다)은 점심시간이 되면 빈 도시락 뚜껑을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학생에게 주신다. 그러면 차례로 자기가 싸 가지고 온 도시락에 반찬 한 가지를 그 빈 도시락 뚜껑에 담는다. 반찬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밥을 한 숟가락 덜어놓는다. 그리고  뒤로 전달. 그렇게 한 바퀴 돌고 나면 선생님 책상 앞에 놓은 도시락 뚜껑에 반찬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선생님은 좋겠다, 저렇게 맛있는 반찬을 많이 먹을 수 있으니까’ 생각했다. 선생님은 “자아, 식사 끝났으면 운동장에 나가 놀아라” 하셨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우루루 밖으로 나갔다.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반 아이들 중 점심을 못 먹는 가난한 아이들 세 명을 불러 선생님 책상에 둘러 앉힌다. 그렇게 밥을 같이 먹는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다. 복도에서 유리창으로 그 광경을 본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소문을 낸 것이다. 지금은 안 계시지만 필자의 가슴 속에선 늘 선선한 미소를 짓는 담임 선생님이 살아계신다. 그리고 담임 선생님의 습관 하나. 수업 시간에 설명하시다가 학생이 딴짓을 하거나 잡담을 하면 분필을 세 번 천장으로 던졌다 받곤 하신다. 처음에는 왜 그러나 했는데, 본인의 화를 참고 계신 중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요즘엔 정말 보기 드문 스승이셨다. 자전거 타고 출퇴근하시며 지나가시다가 아이들에게 손짓으로 인사하시던 우리 담임 선생님. 그때 이미 우리 선생님은 산택손괘를 아셨으리라. 아니 모르셨어도 이미 실천하고 계셨던 것이리라. 

 

사회 생활을 하면서 위로 올라가려면 점점 좁아지는 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 문을 통과하려면 자신이 아껴온 것들을 덜어내야 한다. 다 덜어내고 나면 자존심 하나가 남는다. 그 자존심마저 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덜어내고 보태는 방법은 성실함에 있다. 「대상전」에서도 산택손괘는 ‘징분질욕(懲忿窒慾)’이라 했다. ‘분노를 억제하고 사욕을 제압하라’는 의미다. 이것은 인민에 대한 손(損)을 완화시키는 것이다. 군자는 이러한 손괘의 ‘자기 깎음’을 본받아 내 몸에 내재하고 있는 분노와 욕망을 덜어내어 버려야 한다. 겉으로 화려한 장식보다 덜어내어 내면에 깃든 진실한 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여기서 잠깐! 샛길로. 산택손괘의 효사를 보자. 지의 자리다. 산택손의 괘는 모든 일이 형식에 있지 않고 성의에 있음을 말한다. 성의만 있다면 두 개의 대나무 그릇에 곡식을 담은 간소한 제물만으로도 신에게 제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머니가 호스피스 병동에 계실 때 병동 안에 차려진 성당에 미사를 보러 천주교인들이 찾아왔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흘러 나중에 도착한 사람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뒷문에 기대어 서서 기도를 드렸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히 기도드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필자는 그곳 복도를 지나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그의 기도가 이루어졌으면 하고 바랐다.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도 그의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랐는데, 하나님이야 당연히 들어주시지 않겠는가. 그의 성의가 진실되었으므로. 산택손은 덜어내는 것을 상징한다. 그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웃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선의를 수행하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아랫사람이 웃사람을 위하여 받들어 섬기는 일이다. 전자는 자발적인 것이고, 후자는 당위적인 것이다. 

 

인의 자리다. 그러기에 진정한 웃사람에게 보탬이 되는 일은 그 나타난 형식이나 눈에 보이는구체적 이익의 크고 작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참된 성의에 있는 것이다. 

 

천의 자리다. 결국 이 괘는 소아(小我)를 희생하여 대아(大我)를 살리고, 사사로운 이익보다 공공의 이익을 중시함으로써 손(損)하여 도리어 커다란 익(益)을 성취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산택손괘는 뒤가 길한 괘다. 당신이 상대자를 봉사해 줌으로써 장래에 그것이 몇 배로 되돌아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손(損)은 익 (益)이다. 


육우균.jpg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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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현실적 평등의 실현(산택손)–덜어내고 보탬으로 나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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