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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AI 시대, 『사람 공부』가 던지는 관계(關係)의 메시지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지식은 넘쳐나는데, 왜 사람 사이의 마음은 더 닫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디지털 대전환의 물결 속에서 우리 교육 현장이 마주한 가장 아픈 질문이다. 아이들의 문해력 저하보다 무서운 것은 ‘관계의 문해력’ 결핍이라 할 수 있다. 상대의 의도를 읽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며, 갈등 앞에서 쉽게 무너지는 요즘의 아이들, 이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코딩 한 줄, 영어 단어 하나보다 ‘사람을 이해하는 힘’이라 할 수 있다. 중국 최고의 인문학자 진웨준(金越俊)의 저서 『사람 공부』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교육자들에게 번뜩이는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동서고금 영웅들의 흥망성쇠를 통해 ‘처세(處世)’라는 단어를 기회주의적 기술이 아닌, ‘타인과 공존하기 위한 최고의 지혜’로 격상시키기 때문이다. 진웨준은 이 책에서 조조의 일화를 통해 교육적 울림이 큰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조조가 젊은 시절, 자신을 도왔던 현령 진궁과 함께 도망치던 중 의심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내가 세상을 버릴지언정 세상이 나를 버리게 하지는 않겠다”고 말한 장면은 유명하다. 진웨준은 이를 단순한 악행으로 치부하지 않고, ‘사람을 읽는 안목’과 ‘포용의 기술’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을 하고 있다. 진웨준의 『사람 공부』를 교실에 적용하기 위해 우리는 세 가지 획기적인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첫째, ‘정답’이 아닌 ‘마음’을 채점해야 한다. 교실 내 갈등 상황에서 교사는 판사가 되기 쉽다. 하지만 『사람 공부』는 ‘현상 너머의 동기’를 보라고 조언한다. 잘못을 저지른 학생에게 벌을 주기 전, 그 아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 이면에 숨겨진 ‘두려움’이나 ‘인정 욕구’를 읽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진웨준이 말하는 영웅들의 통찰력이라 할 것이다. 둘째, ‘침묵’의 처세를 가르쳐야 한다. 책에서는 말 한마디로 천하를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는 사례가 즐비하다. 요즘 아이들은 SNS를 통해 너무 빨리, 너무 많이 말하는 성향이 강하다. 따라서 교육 현장에서 ‘멈춤과 경청’의 가치를 가르쳐야 한다. “내 주장을 관철하는 법”보다 “상대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힘”이 결국 가장 강력한 설득의 도구가 된다는 것을 아이들이 체험하게 해야 한다. 셋째, ‘패배’를 대하는 태도가 사람의 격을 결정한다. 역사 속 영웅들은 위기의 순간에 본모습이 드러난다. 진웨준은 실패했을 때 타인을 탓하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는 ‘반구저기(反求諸己)’의 자세를 강조한다. 시험 성적이 떨어졌을 때, 경기에서 졌을 때 아이들이 타인이나 환경을 원망하기보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회복탄력성’을 기르도록 돕는 것이 살아있는 사람 공부라 할 것이다. 이제 교사는 지식 전달자를 넘어 ‘관계 코디네이터’가 되어야 한다. 진웨준의 『사람 공부』가 제안하는 처세의 지혜를 교육 과정에 녹여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진웨준은 책의 말미에서 결국 “모든 공부의 끝은 사람이다”라고 단언한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최종적인 기술은 미적분 공식이나 영문법만이 아니다. 바로 곁에 있는 친구의 눈물을 닦아줄 줄 알고, 억울한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며, 타인의 성공에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낼 수 있는 ‘사람 됨의 기술’이라 믿는다. 서두에서 언급한 조조가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완벽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치명적인 결함을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자신과 반대되는 성향의 인재들을 끝없이 찾아내고 그들의 능력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사람 공부의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상대의 약점을 잡는 것이 처세가 아니라, 상대의 강점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진정한 사람 공부다.”(본문 중) 『사람 공부』는 우리에게 말한다. 처세는 남을 이기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나와 남이 함께 승리(Win-Win)하기 위한 따뜻한 전략이라고 말이다. 이 책을 읽은 교사가 교실에 섰을 때, 비로소 아이들은 책 속의 글자가 아닌 ‘살아있는 인간’의 품격을 배우게 될 것이다. 오늘, 당신의 교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사람’을 읽어보지 않겠는가? 그 공부가 시작되는 순간, 교실은 비로소 삶의 현장이자 가장 위대한 인문학의 장이 될 것이라 믿는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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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왜 다시, 문해력인가?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오늘날 우리 교육의 가장 심각한 위기는 무엇인가? 학력 저하일까? 사교육 과열일까? 아니면 교권 붕괴일까? 그러나 이 모든 문제의 뿌리에는 더 근본적인 위기가 자리하고 있다. 바로 학생들의 ‘문해력’ 저하다. 필자의 칼럼 「청소년들의 뒤처지는 문해력, 그 해결책은 무엇인가?」는 몇 년 전 발표되었지만, 오히려 지금 더 절실하게 읽혀야 할 교육적 경고가 되었다. 오늘날 교사들이 모여 교육 관련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화제가 단연코 학생들의 “문해력” 결핍의 심각성에 입을 모은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문해력이라는 말조차 학생들이 못 알아들을까 봐, 어떤 교사는 이렇게 다시 설명한다. “글을 읽고 뜻을 이해하는 힘 말이야.” 그러자 한 학생이 묻는다. “쌤, 그거 요약본 있나요?” 문해력은 단순히 글을 읽는 능력이 아니다. 글의 의미를 이해하고, 타인의 생각을 해석하며, 자신의 언어로 다시 표현하는 힘이다. 결국 인간의 사고력과 공감력, 민주 시민성의 기초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아이들은 문장을 읽지만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긴 글을 견디지 못하며, 질문보다 검색에 익숙한 세대로 변해가고 있다. 교실 현장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상 신호가 나타났다. 시험 문제를 읽고도 무엇을 묻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들, 자신의 생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지 못하는 학생들, 책 한 권을 끝까지 읽어본 경험이 거의 없는 학생들이 빠르게 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국어 과목의 문제가 아니다. 수학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사회 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도 결국 문해력의 결핍과 연결된다. 더 심각한 것은 디지털 환경이다. 짧은 영상과 자극적인 콘텐츠에 익숙해진 학생들은 깊이 읽기와 사유의 시간을 잃어가고 있다. 알고리즘은 생각을 확장시키기보다 취향만 반복 강화하고, AI는 스스로 사고하기 전에 먼저 답을 제공한다. 이제 아이들은 “왜 그렇게 생각하니?”라는 질문보다 “정답이 뭐예요?”를 먼저 묻는다. 이것은 단순한 학습 습관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 사고 체계의 위기다. 필자는 당시 칼럼에서 읽기·말하기·쓰기 교육의 회복을 강조했다. 시 동아리, 스피치 활동, 글쓰기 교육, 일기 쓰기 같은 실천을 통해 학생들이 자신의 언어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통찰은 지금도 매우 유효하다. 아니, AI 시대일수록 더욱 절박하다. 왜냐하면 인공지능이 정보를 대신 제공하는 시대에 인간에게 남는 최후의 경쟁력은 ‘생각하는 힘’이며, 문해력은 바로 그 생각의 근육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교육은 다시 질문해야 한다. 왜 우리는 아이들에게 읽는 시간을 빼앗았는가? 왜 학교는 시험 문제 풀이에만 몰두하며 사유의 교육을 잃어버렸는가? 왜 독서는 취미가 되었고, 글쓰기는 수행평가 기술로 전락했는가? 문해력 회복은 거창한 정책 이전에 교육 철학의 전환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첫째,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든 교과에서 읽기와 토론, 서술형 글쓰기를 강화해야 한다. 국어 시간에만 문해력을 맡겨서는 안 된다. 둘째, 학교는 ‘조용히 읽는 시간’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독서는 과제가 아니라 삶의 습관이 되어야 한다. 셋째, 교사들에게도 읽고 쓰는 전문성을 회복할 수 있는 지원이 필요하다. 학생의 문해력은 결국 교사의 언어 수준을 넘기 어렵다. 넷째, 가정과 지역사회 역시 책 읽는 문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부모가 스마트폰만 보는 사회에서 아이들에게 독서를 강요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쟁 중심 교육의 방향 수정이다. 지금처럼 문제를 빨리 푸는 능력만 강조해서는 문해력은 결코 자라지 않는다. 천천히 읽고, 깊이 생각하고, 서로의 생각을 경청하는 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 속도가 아니라 이해의 깊이를 평가해야 한다. 교육은 결국 인간을 만드는 일이다. 문해력이 무너진 사회는 결국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혐오와 선동에 흔들리며, 민주주의마저 약해진다. 그래서 문해력 교육은 단순한 학업 향상이 아니라 사회를 지키는 공공의 과제다. 지금 우리 교육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입시제도가 아니다. 아이들에게 다시 책을 돌려주고, 언어를 돌려주고, 생각하는 시간을 돌려주는 일이라 믿는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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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교육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아름다운 세상이란 어떤 세상일까. 아름다운 사람이 많이 사는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전쟁, 인공지능, 숫자, 비교가 어지럽게 돌아가는 세상이다. 세상은 그대로이기에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마음이 중요하다.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결국 타인을 대하는 방식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타인을 편안하게 만드는 힘’에 가깝다. 진짜 아름다움을 만들고 싶다면 먼저 ‘어떻게 보일까’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한 사회의 품격은 그 사회가 어떤 아름다움을 존경하느냐에 달려 있다. 돈과 성공만을 숭배하는 사회에서 사람의 마음은 거칠어진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하루하루의 선택이 겹쳐서 한 사람의 표정을 만든다. 배려와 품위가 있는 사회에서는 서로를 인간답게 대하려 애쓴다. 자기 자신만으로 가득 찬 사람은 타인을 위한 공간이 없다. 흥미로운 것은 아름다움이 전염된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의 친절은 또 다른 친절을 낳는다. 그 친절은 햇살처럼 세상을 아름답고 따스하게 만든다.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교육은 무엇을 해야 하나. 학교 현장에서 가장 자주 들리는 말 가운데 하나가 ‘관계가 어렵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한국 교육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공감’을 가르치는 것이다. 공감은 단순히 착해지는 교육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느끼는 능력이다. 공감은 민주주의와 공동체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이다. 학교는 점수를 경쟁하는 공간이기 전에 인간을 배우는 공간이어야 한다. 아이들은 교과서보다 어른들의 태도를 더 많이 배운다. 교사와 부모가 타인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배려를 말할 수도 없다. 교육은 말이 아니라 분위기와 태도로 이루어진다. 아름다운 세상은 인간이 서로를 소모품처럼 대하지 않는 세상이다. 아이가 실수해도 모욕당하지 않는 학교, 나이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쓸모없다고 취급받지 않는 사회. 아픈 사람이 가난 때문에 치료를 포기하지 않고, 실패한 사람이 다시 일어설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공동체. 그런 곳이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세상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지 않은 사회’이다. 사람들은 점점 타인의 불행에 익숙해지고 있다.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은 가난 때문만이 아니라 서로의 아픔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시작할 때다. 아름다운 세상은 서로를 경쟁자로만 보거나 숫자와 성과만으로 평가하지 않고 한 인간의 삶 자체를 존중하는 사회이다.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고, 울고 있는 사람 곁에 잠시라도 함께 서주는 누군가가 있는 세상. 인간다운 따뜻함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사회. 그런 세상이야말로 기술보다 오래가고 돈보다 강하며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믿는다. 교육은 아름다운 사람이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라고 믿는다. 사람다운 사람, 공감하는 사람, 함께하는 사람으로 성장시키는 교육을 만들기 위한 고민이 필요한 이유이다. 창밖은 다양한 꽃들이 서로 어우러져 세상을 환하게 만드는 모습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진로융합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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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용의 100세 칼럼] 매달 반복되는 원발성 월경통, 프로스타글란딘과 중추신경 감작의 연결고리 풀기
[교육연합신문=최윤용 기고] 1. 자궁이 보내는 경고음, 원발성 월경통의 원인과 유병률 - 원발성 월경통(Primary dysmenorrhea)은 골반 내 뚜렷한 기질적 이상 없이 월경 주기에 맞춰 발생하는 하복부의 경련성 통증을 의미합니다. 전 세계 70개국 자료를 종합한 최신 연구에 따르면, 원발성 월경통은 여성 인구에서 매우 높은 유병률을 보이며 일상생활과 학업·업무 수행 능력을 크게 떨어뜨리는 대표적 여성 건강 문제로 지목됩니다. 병태생리학적으로 이 통증의 핵심은 자궁 내막에서 과도하게 분비되는 프로스타글란딘(prostaglandin)이라는 염증 매개 물질이 자궁 근육을 강하게 수축시키고 혈류량을 감소시켜 허혈성 통증을 유발하는 데 있습니다. 월경통으로 인해 반복되는 통증 신호는 척수를 거쳐 뇌로 전달되며, 점차 통증에 대한 민감도를 비정상적으로 높이는 '중추 감작(central sensitization)' 상태를 초래하여 신경학적 만성 통증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2. 진통제만으로 월경통 관리가 어려운 이유와 숨은 위험성 - 현재 원발성 월경통의 1차 치료로는 비스테로이드성 항염증제(NSAIDs)와 경구 피임약이 주로 처방됩니다. 이들 약물은 프로스타글란딘의 생성을 차단하여 급성 통증 완화에 효과적이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많은 환자가 진통제에 충분히 반응하지 않거나, 장기 복용 시 위장관 장애, 신장 기능 저하 등의 부작용을 겪어 복용을 중단하곤 합니다. 식물 유래 한약 치료(plant-derived therapies)에 관심이 높아지는 이유도 이러한 기존 약물의 한계와 부작용 우려 때문입니다. 특히 현재 첩약 건강보험 적용 시범사업 대상 질환에 월경통이 포함되면서, 표준화된 한약 치료에 대한 치료 접근성도 점차 확대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의해야 할 점은 월경통이 동반하는 심리적 부담입니다. 매달 반복되는 심한 통증은 신경면역학적 불균형을 유발하여 우울증이나 불안장애로 이어질 위험을 크게 높입니다. 따라서 단순한 진통을 넘어 신체 전반의 신경학적 안정과 염증 제어를 돕는 다각적인 접근이 절실합니다. 3. 뇌 신경망 연구를 통한 월경통의 뇌과학적 재해석 - 최근 뇌과학 연구는 월경통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고 있습니다.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 등의 신경영상 기법을 활용한 연구에 따르면, 장기간 원발성 월경통을 앓은 여성들은 통증을 지각하고 조절하는 뇌의 특정 네트워크(대뇌피질-변연계 등) 구조와 활성도에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즉, 자궁에서 시작된 말초의 염증 신호가 뇌의 통증 조절 회로를 교란시켜, 작은 자극에도 과도한 통증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월경통 치료가 자궁 수축 억제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중추신경계의 과흥분을 안정화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시사합니다. 4. 원발성 월경통에 대한 효과적 대안: 한약과 침 치료의 현대 과학적 근거 - 이러한 맥락에서 한의학 치료는 월경통 관리에 있어 효율적인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그 효과와 기전이 최신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입증되고 있습니다. 먼저 침 치료는 뇌의 통증 조절 네트워크를 정상화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보입니다. fMRI를 이용한 연구에서 침술은 월경통 환자의 비정상적인 뇌 기능적 연결성을 조절하여 중추성 진통 효과를 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다양한 침 관련 치료를 비교 분석한 네트워크 메타분석 연구에서도 침 치료는 통증 강도를 유의미하게 낮추고 진통제 사용량을 줄이는 데 안전하고 효과적임이 입증되었습니다. 특히 대만에서 19년간 진행된 대규모 코호트 추적 연구에서는 원발성 월경통 환자에게 꾸준히 침 치료를 시행한 결과, 신경면역 조절 기전을 통해 향후 우울증으로 이행될 위험이 유의하게 감소했다는 보고가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는 침 치료가 단순 진통을 넘어 중추신경계 보호 효과를 지님을 의미합니다. 한약 역시 다양한 약리 성분이 여러 병리적 표적에 동시에 작용하여 자궁 내 염증 환경과 혈류 개선에 기여합니다. 월경통에 다용되는 대표적 처방인 온경탕은 최신의 인공지능 기반 약리분석 연구를 통해 염증 발현의 핵심 경로인 PI3K/AKT/NF-κB 신호 전달을 억제하여 하복부의 혈류에 장애를 야기하는 원인 염증을 차단할 수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또한 근래의 무작위 대조군 임상시험에서는 월경질환 치료에 오랜 기간 활용돼 온 계지복령환이 위약군에 비해 월경통 강도를 현저히 감소시키고 삶의 질을 높인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습니다. 이러한 효과는 특정 처방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가장 최근인 2026년 발표된 국내 다기관 전향적 관찰연구에서도 환자 맞춤형 한약 치료가 진통제 복용량을 줄이고 통증 지속 시간을 단축하는 데 유의한 효과를 보인 것으로 보고됐습니다. 5. 약물 의존을 줄이는 일상 속 월경통 자가 관리법 - 임상적인 한의 치료와 함께, 일상생활에서의 적극적인 관리 요법을 병행함으로써 보다 안정적으로 만성 월경통을 관리해나갈 수 있습니다. •규칙적인 운동 요법 : 운동은 가장 효과적인 천연 진통제입니다. 29개의 무작위 대조 연구를 종합한 네트워크 메타분석에 따르면, 규칙적인 요가, 스트레칭, 중등도의 유산소 운동은 골반 내 혈류 순환을 개선하고 통증 유발 물질을 배출시켜 월경통 강도를 뚜렷하게 감소시킵니다. 평소 꾸준한 운동으로 기저 체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체온 유지와 하복부 보온 : 한의학에서 말하는 '한응혈어(寒凝血瘀, 차가운 기운이 혈액을 뭉치게 함)'는 실제 생리학적 혈관 수축과 일치합니다. 하복부를 따뜻하게 유지하여 골반 근육의 긴장을 풀고 미세혈류 순환을 돕는 것이 좋습니다. 생리통을 '여성이라면 당연히 참고 견뎌야 하는 숙명'으로 받아들이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그렇다고 진통제에만 의존한 채 위장 장애와 우울감을 감내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궁의 국소적 염증을 다스리고 중추신경계의 예민함을 잠재우는 과학적인 한의 치료와 올바른 운동 습관을 통해, 매달 찾아오는 통증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건강하고 활기찬 일상을 누리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참고문헌 (References) 1.de Arruda GT, Barbosa-Silva J, Driusso P, Pathmanathan C, Armijo-Olivo S, Avila 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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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parative Effectiveness of Different Exercises for Reducing Pain Intensity in Primary Dysmenorrhea: A Systematic Review and Network Meta-analysis of Randomized Controlled Trials. Sports Med Open. 2024 May 30;10(1):63. doi: 10.1186/s40798-024-00718-4. 6.Chen B, Guo Q, Zhang Q, Di Z, Zhang Q. Revealing the Central Mechanism of Acupuncture for Primary Dysmenorrhea Based on Neuroimaging: A Narrative Review. Pain Res Manag. 2023;2023:8307249. 7.Chen B, Guo Q, Zhang Q, Di Z, Zhang Q. Revealing the Central Mechanism of Acupuncture for Primary Dysmenorrhea Based on Neuroimaging: A Narrative Review. Pain Res Manag. 2023 Feb 18;2023:8307249. doi: 10.1155/2023/8307249. 8.Liao CC, Lin CL, Tsai FJ, Chien CH, Li JM. Acupuncture's long-term impact on depression prevention in primary dysmenorrhea: A 19-year follow-up of a Taiwan cohort with neuroimmune insights. J Affect Disord. 2024 Jan 1;344:48-60. doi: 10.1016/j.jad.2023.10.013. 9.Li XL, Jin Y, Gao R, Zhou QX, Huang F, Liu L. Wenjing decoction: Mechanism in the treatment of dysmenorrhea with blood stasis syndrome through network pharmacology and experimental verification. J Ethnopharmacol. 2025 Jan 30;337(Pt 1):118818. doi: 10.1016/j.jep.2024.118818. 10.Luo Y, Mao P, Chen P, Li C, Fu X, Zhuang M. Effect of Guizhi Fuling Wan in primary dysmenorrhea: A randomized controlled trial. J Ethnopharmacol. 2023 May 10;307:116247. doi: 10.1016/j.jep.2023.116247. ▣ 최윤용 ◇큰나무한의원 대표원장 ◇ (주)으뜸생약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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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제철 음식과 탄소 중립 그리고 환경교육의 재인식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작년 겨울, “할아버지, 이 딸기 맛이 좀 이상해~.” 제철이 지난 시기에 어린 손녀가 먹던 딸기를 내려놓으며 하던 말이다. 비닐하우스에서 자란 철 지난 과일의 맛은 6살 아이의 기억과 입에도 낯설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딸기 한 알을 우리 식탁에 올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소비됐는지 우리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을 배우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교육해야 할까? 지구가 날로 뜨거워지고 있다. 최근 우리는 날로 무더운 여름을 나면서 인내의 한계를 넘을 만큼 폭염과 싸우고 있다. 이제 기후 위기는 더 이상 먼 나라 이야기나 과학 교과서 속 개념이 아니다. 가뭄, 폭우, 태풍, 식량 위기까지, 우리의 삶은 이미 기후변화의 한복판에 놓여 있다. 이런 시대, 교육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지식을 뛰어넘는 ‘지속 가능한 삶의 선택’을 가르쳐야 한다. 그 시작은 아주 작고도 가까운 곳, 바로 우리의 식탁에서 출발할 수 있다. 제철 음식은 그 자체가 탄소 중립의 실천이다.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KEI)의 2021년 보고서에 따르면, 수입 농산물이나 비제철 작물의 경우, 수송 과정에서 평균 11배 이상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한다고 한다. 특히 겨울철에 하우스에서 재배되는 작물은 인공조명, 난방, 수분조절 등에서 막대한 전력을 소비한다. 이는 곧 탄소 배출량의 증가로 이어진다. 예컨대, 2020년 녹색연합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겨울에 먹는 딸기 1kg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탄소 배출량은 약 3.4kg의 CO₂로 밝혀졌다. 반면에, 제철인 봄에 재배된 딸기는 0.8kg의 CO₂로 훨씬 적다. 같은 딸기이지만,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4배 이상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지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육 현장에서부터 ‘제철 급식’을 운영함으로써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철저한 탄소 중립 교육에 나서야 한다. 서울 성북구의 한 초등학교는 2022년부터 ‘제철 급식 주간’을 운영하고 있다. 영양교사와 학부모, 학생이 함께 참여해서 한 주일씩 제철 재료로만 구성된 메뉴를 만들고, 식사 후에는 환경에 대한 소감을 나눈다. 한 학생은 “처음엔 낯선 반찬도 있었지만, 알고 보니 자연이 지금 주는 맛이라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고 소감을 적었다. 또 다른 학생은 “내가 먹는 음식이 지구를 아프게 할 수도 있다니, 앞으로 장을 볼 때도 생각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런 교육은 단순히 환경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삶의 태도와 가치관의 변화를 이끄는 울림 있는 실용적인 교육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제철 음식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첫째, 탄소 중립의 실천이다. 계절에 맞는 재료를 소비함으로써 난방, 냉방, 장거리 운송에 드는 에너지를 절약하고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다. 둘째, 농업의 활성화이다. 식재료는 대개 지역 농산물이다. 이는 지역 경제를 살리고, 음식의 이동 거리를 줄이는 ‘로컬푸드’ 실천이기도 하다. 셋째, 식문화의 회복이다. 제철 음식은 자연이 주는 최적의 영양 상태를 가진다. 건강한 성장기 아이들에게 특히 중요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넷째, 소비자로서의 책임 교육이다. 아이들이 직접 음식 선택의 윤리성과 환경적 영향을 배움으로써, 더 넓은 차원의 ‘지속 가능한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다. 전남 순천의 한 중학교에서는 ‘제로 푸드 마일(Zero Food Mile)’ 프로젝트를 실시했고 그 결과는 한 학생이 쓴 글이 많은 교사들의 마음을 울렸다. “우리가 먹는 밥 한 그릇이 지구에 무게가 될 수도, 지구를 쉬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제철이라는 건 단지 맛있는 시기가 아니라, 자연이 숨 쉬는 시기였다.” 결론적으로 ‘제철 음식 먹기’는 단지 건강을 위한 선택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세상에서,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작은 실천이자 위대한 교육이라 할 수 있다. 탄소 중립은 거창한 기술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과 함께 계절을 느끼고, 자연의 순리를 배우고, 식탁에서 지구를 생각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환경교육이며, 지속 가능한 삶의 기초라 믿는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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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희 반려詩選] 핑계
[교육연합신문=구본희詩選] 핑계 당신은 핑계의 대가라며 아내는 불평한다. 아직 어리니, 유치원 가면, 학교 가면...... 빈자리로 남은 약속들. 자전거 타기, 공놀이, 캠핑, 놀이공원. 돌아보니 바쁘단 핑계로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미안한 젊은 날, 나는 나만을 사랑했다. 내리사랑이라 했던가. 손주가 생기면 그때는 꼭 지키리라, 또 다짐한다. 그보다 아내가 먼저. 오늘도 아내의 한마디가 조용히 가슴을 후빈다. ▣ 구본희 ◇ 前인천국제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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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중구난방(衆口難防)의 미래교육 담론, 이대로 좋은가?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한때 교육부가 “자, 이제 교육은 앞만 보고 갑니다”라고 선언하자 17개 시⋅도 교육청과 산하 교육기관은 서로 경쟁을 하듯이 모든 정책에 ‘미래’를 붙이기 시작했다. 이제 미래교육 담론이 없이는 낡은 과거 교육을 지지하거나 고수하는 보수분자가 되거나 이른바 ‘라떼’를 선호하는 꼰대의 입지를 벗어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인가? 그것은 교사와 아이들의 삶이 녹아 있는 과거의 서사를 낡아빠진 폐기물로 간주하고 현재의 삶은 미래를 위해서 버텨야 하는 희생적 가치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미래교육 담론은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과 관점이 진정한 교육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믿는다. 과연 이 말은 사실일까? 이로써 교육 현장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인가? 각종 미래교육 담론은 듣기 좋은 말처럼 들리고 또 희망적인 메시지를 기대하지만 너무 화려한 개념들을 남발하는 측면이 강한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실제로 여기에는 우리 교육이 지향할, 아니 지향할 수밖에 없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예컨대 생태환경교육, 에듀테크, 디지털 리터러시, AI 교육, 디지털 교과서, 세계 민주시민, 창의, 혁신, 공존, 자율, 역량, 상상력, 공감, 비전, 나눔, 배려, 연대, 협력 등등의 말들이 잔칫상을 연상시킨다. 여기서 잠시 현실을 직시해 보자. 만일 사교육 공화국이 되어버린 우리 교육이 근본적인 이유는 제켜놓고 ‘사교육 없는 세상’을 완전하게 실현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한다면 이는 국민들에게 어떻게 다가올까? 그 내면에 깊은 고민과 숙의된 정책, 또한 공감혁명과 같은 전 국민의 획기적인 의식의 변화를 동반하지도 않으면서 대책 없는 일방적인 공언과 하등 다르지 않다. 미래교육은 유초중등교육 현장에서 각종 합성어, 신조어를 창조하여 위세를 떨치고 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이 말의 태동을 가져온 교육부와 교육청은 과거와 견줄만한 뛰어난 안목도, 지원할 의지도, 수행할 능력이 존재하는가? 왜냐면 발표하는 모든 정책이 당사자인 교사, 학생, 학부모를 중심에 두지 않고 소위 탁상공론이자, 현상유지에 따른 책무처럼 쏟아내기에만 바쁘다는 의심 때문이다. 한마디로 아니면 말고 하는 식이다. 이제 미래교육이란 추상명사는 교육의 중추인 교사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것이 되었고 교사는 이를 견뎌내야만 하는 고문이 되었다. 초등교사 서재민은 『미래교육 이전에 내 미래가 더 걱정이다』에서 교사로서의 무력감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 바 있다. “2019년 7월, 서울시교육청은 ‘혁신학교’와 ‘미래학교’를 합친 ‘혁신미래학교’라는 새로운 학교 모델을 만드는 정책을 발표했다. 서울시교육청이 제시한 ‘혁신미래학교 4대 중점과제’에서 알 수 있듯이, ‘미래사회를 대비한 교육과정과 학교환경’(미래학교)과 ‘교원의 성장과 협력의 학교문화’(혁신학교)를 한 학교에서 구현하려는 구상이다. 정말 ‘잘 되면 좋겠다’고 먼 곳에서 박수를 쳐주고 싶다” (정철희, 『교사의 고통』, 2024) 이처럼 미래교육 담론은 그야말로 신기하고 오묘한 말들의 조합이 앞선다. 이는 현장 교사들의 삶을 더욱 지치고 어둡게 만든다. 왜냐면 미래교육 담론은 갖가지 통합적 가치들을 마치 교사들의 몸에 맞지도 않는 옷처럼 화려하게 장식하여 학교라는 쇼윈도우를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미래교육 담론은 결코 학교와 미래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교사들의 진정한 변화를 근원적으로 차단하는 공포 조성과 현상 유지의 두 부정적 측면이 매우 강하다. 교육당국은 각종 미래교육 담론을 내세워 교사에게 지나친 강요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을 숙고해야 한다. 또한 그 이면에 정책 입안자들의 현상 유지를 위한 아이디어 남발은 없는지도 살펴볼 일이다. 오늘도 학교 현장에 배달되는 각종 공문은 교사의 자발성과 교육의 자율성을 해치지 않는지 세심한 검토와 무엇보다 현장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과유불급’이라 하듯이 좋은 것도 지나치면 없는 것만 못하다. 현재 교육부가 쏟아내는 중구난방의 미래교육 담론은 하나라도 제대로 그리고 확실하게 실행할 수 있기를 바란다. 더 이상 교육 현장을 혼란케 하여 교육개혁 주체인 교사들의 정서적, 심리적 안정성과 자발적 의지를 박탈하는 일은 자제하기를 바란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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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중구난방(衆口難防)의 미래교육 담론, 이대로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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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군대는 네모로 다듬어진 기계(지수사괘)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지수사괘는 위에 땅(☷)이 있고, 아래에 물(☵)이 있는 모양이다. 땅 속에 물이 있는 모습이다. 왜 ‘땅 아래’라 하지 않고 ‘땅 속’이라 했을까? 그것은 땅 속의 물이니 냇물이나 샘물처럼 노출되어 있는 물이 아니라 숨겨진 ‘지하수’를 의미한다. 고조선 시대에는 병농일치의 사회였기 때문에 군(軍)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농(農) 속에 병(兵)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고조선 시대 농부는 평상시는 농부였다가 전쟁이 나면 병사로서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도 그랬다. 어제까지 농부였다가 오늘 갑자기 독립군이 되는 그런 시대였다. 군대는 힘을 축적해 나가야 한다. 또한 군대는 네모로 다듬어진 기계에 비유할 수 있다. 군대는 고도로 조직되고 효율적인 단위를 나타내고, 기계의 다양한 구성 요소는 군대를 구성하는 군인, 장비 및 시스템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네모는 다중의 다양한 조직을 하나로 각지게 잘 다듬는 것을 말한다. 훈련소에 가면 제식훈련을 통해 말하는 습관(-다. -나. -까.)까지 바꾼다. 마치 마모된 기계를 기름칠이 잘 된 기계로 바꾸는 것같이 잘 훈련되고 조직된 군대는 정확하게 기능할 수 있다. ‘네모로 다듬어진 기계’라는 은유는 군대가 효율적으로 기능하는 데 필요한 규율과 질서뿐만 아니라 고장을 방지하기 위해 주의 깊은 유지 관리를 의미한다. 의용소방대, 경찰, 소방대원 등 유니폼을 입은 조직도 모두 군대라는 조직처럼 하나로 움직인다. 명령에 죽고 사는 조직인 것이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요건은 다섯 가지 정도가 있다. 첫째는 정의를 위한 전쟁이라야 한다. 나폴레옹, 징기즈칸, 히틀러,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은 침략전쟁을 일으킨 장본인들이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전쟁에서 졌다. 그와는 달리 침략전쟁에 맞서 싸운 장수들도 있다. 이순신, 처칠, 맥아더 장군 등이다. 이들은 전쟁에서 대의명분이 서야 한다는 것을 증명한 훌륭한 장수들이다. 둘째는 훌륭한 지휘자가 있어야 한다. 훌륭한 지휘자란 몸가짐이 바라야 한다. 필승의 신념이 있고, 정의를 위하여는 언제든지 한 몸을 나라에 바칠 각오가 되어 있으며, 부하를 아끼고, 어려운 일에 솔선수범할 수 있고, 공정하고, 정당하고, 의젓하고, 용기가 있어야 한다. 셋째는 충분한 역량이 있어야 한다. 지혜와 식견과 전략과 판단의 현명과 실천의 과단 등등의 요건이 겸비된 탁월한 장수라야 한다. 넷째는 군대의 통솔에는 규율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 집단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질서의 확립이다. 질서의 확립은 규율에서 나온다. 규율이야말로 군대의 생명인 것이다. ‘군명여산(軍命如山)’이라 했다. 군명은 태산같이 무게가 있고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군대에 규율이 해이하면 그것은 오합지졸이고 명령 계통이 설 수 없다. 제갈량의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고사를 떠올리면 된다. 이밖에도 우수한 무기, 풍부한 보급과 경제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전쟁은 돈으로 한다는 말이 있다.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전쟁은 실패한다. 다섯째는 군인의 정신력이다. 정신력은 무기보다 중요할 수 있다. 베트남 전쟁을 보아 알 수 있지만 미국의 우수한 무기를 그렇게 쏟아 붙고도 전쟁에서 참패했다. 그 원인은 바로 월남군의 정신력이 해이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이스라엘의 6일 전쟁을 보아도 실감난다.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이스라엘 대학생과 이슬람 대학생의 행동에서 이미 이스라엘이 이길 것이라는 확신을 했다는 하숙집 주인의 말이다. 전쟁이 터졌다는 뉴스를 듣고 이스라엘 대학생은 바로 비행기표를 샀단다. 왜 비행기표를 샀냐고 했더니 내 나라에서 전쟁이 났는데 나라도 가서 도와줘야 한다고 했더란다. 모든 일은 마음에서 시작하고 끝맺는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느끼게 해 주는 일화다. 전쟁과 관련된 문학작품을 찾아보면 우선 2001년 출간된 김훈의 『칼의 노래』를 들 수 있다. 위에서 말한 훌륭한 지휘관의 요건을 갖춘 장수가 바로 이순신 장군이다. 이런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시작할 무렵부터 임진왜란 중 장렬하게 전사하기까지의 삶을 당대의 국내외적 사건 속에서 생생하게 다루고 있다. 영웅 이순신의 드러나 있는 궤적을 다큐멘터리식으로 복원하여 현실성을 부여하되, 소설 특유의 상상력으로 이순신 자신의 1인칭 서술을 일관되게 유지하여 전투 전후의 심사, 혈육의 죽음, 여인과의 통정, 정치와 권력의 폭력성, 죽음에 대한 사유, 문(文)과 무(武)의 멀고 가까움, 밥과 몸에 대한 사유, 한 나라의 생사를 책임진 장군으로서의 고뇌 등을 드러내고 있다.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은 영원한 호국정신의 한국적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명량’이란 영화로도 만들어져 천만 관객을 동원하였다. 6.25 한국전쟁을 겪은 우리 민족은 이제 징병제냐 모병제냐를 놓고 논쟁을 벌인다. 답은 나와 있다. 모병제다. 왜? 현재는 인구 절벽 시대를 넘어 인구 소멸 시대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징병제를 하려고 해도 군인으로 뽑을 사람이 없다. 대안은 모병제로 제도화하는 것이다. 모병제를 하면 일자리도 많아지고 전문적인 군인을 만드는 데도 유리하다. 양심적 병역 거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요즘 전쟁은 드론 전쟁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최첨단 현대전이다. 6・25 때처럼 백병전하는 구식 전쟁이 아니다. 우리 민족은 960여 차례 이민족의 외침을 당한 민족이다. 그러한 외침에 굴하지 않고 오천 년의 역사를 살아온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나라다. 그러한 유전적인 힘은 바로 ‘용민휵중(容民慉衆)’에 있다. ‘민중(民衆)’이란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힘 있는 군대를 육성하려면 그래서 세계 평화를 바란다면 먼저 백성을 포용하고 그러한 포용심으로 다중의 힘을 축적해 나가야 한다. 저마다 파란만장한 군대 시절이 있다. 삶을 사는 내내 저마다 경험한 군대 시절을 꺼내볼 일이다. 왜? 우리는 그때 젊었으니까. 모든 게 용서되었던 시절이었다. 나의 화양연화는 군대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도 내 인생에서 그렇게 가슴 뛰는 열정이 있었나 되새겨 본다. 최백호의 「입영 전야」를 가만히 불러본다.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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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군대는 네모로 다듬어진 기계(지수사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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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학교가 ‘애도 공동체’로 전환되어야 하는 이유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매년 7월이 되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추억의 교과서에는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로 시작되는 이육사의 ‘청포도’가 등장한다. 이는 농촌을 배경으로 하는 모든 현대인의 작은 낭만이자 소회의 시간이다. 하지만 올해는 서이초 교사의 가슴 아픈 죽음을 애도하며 그동안 누리던 소시민의 문학적 낭만을 대체하게 되었다. 왜냐면 학교 공동체가 사람의 존엄을 기르는 대체 불가의 장(場)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철학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디스 버틀러의 ‘애도의 철학’에서 출발해 학교가 만들어가야 할 ‘애도 공동체’의 탄생이다. 애도는 상실을 마주하는 것으로 떠남과 죽음에 대한 공허함에서 연유된다. 곁에서 함께 하던 사람의 죽음은 지극한 슬픔이다. 그래서 부모의 죽음은 ‘천붕지통(天崩之痛)’이라 칭하며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아픔이고 불안과 두려움의 절정을 상기한다. 이러한 상실감의 정서를 극복할 수 있는 순간이 바로 애도의 시간이다. 교육철학 전문가이자 17년차 교사이며 작가인 정철희는 저서 『교사의 고통』에서 “애도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수많은 상실을 견뎌낼 수 있는 근원적 힘”이라 말한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어떤가? 그에 의하면 ‘애도 상실의 문화’는 상실과 마주하는 시간을 ‘사치’로 여긴다. 애도가 잉여의 시간이 되면서 우리 사회의 상실에는 등급이 매겨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죽음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 묻기 시작했고, 그것이 어떤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애도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일찍이 이러한 ‘애도의 등급화’를 비판한 미국의 철학자가 바로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이다. 버틀러는 『위태로운 삶』에서 죽음을 온전히 애도하지 못하는 현대사회의 폭력성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어떤 삶은 애도가 가능하고 어떤 삶은 애도조차 할 수 없는, 즉 ‘애도 가능성의 차등적 배분’이 우리 삶을 위태롭게 만든다고 경고한다. 실례로 미국의 9⋅11 참사 이후에 벌인 생명에 대한 정치화는 테러로 인해 목숨을 잃은 수많은 희생자의 이름을 ‘공적 부고란’에 올리면서도 그 사건의 용의자들은 수용소에 무기한 감금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 살만한 가치가 없는 삶으로 정치적 구별을 당했다. 이와는 다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태원 압사 참사로 인해 156명의 희생자 역시 허망한 죽음으로 애도의 대상자 이면서도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이라도 했나?”하고 이의를 제기하며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일부 정치권과 이분법적 사고에 의한 비판자들의 비윤리성으로 인해 그들의 유가족과 젊은이들을 자녀로 둔 다수의 국민들은 그 애통함을 달랠 길 없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따라서 정확한 진상 규명은 물론 책임자 처벌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억울한 희생자들의 영혼만 구천을 맴도는 것이 아닌가, 우려할 정도다. 애도는 상실감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그 본질은 ‘영원한 변화의 인정’에 있음을 버틀러는 주장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가 마주하는 수많은 교사들의 상실(최근 6년 사이에 100명의 죽음)에 진정한 애도를 보여주려면 그 상실이 가져올 영원한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여 상실을 초래한 원인을 근원적으로 바꾸기 위한 일들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사회가 본질적인 애도를 수행하지 못한다면 학교라도 그 역할을 기꺼이 해야 한다. 이는 더 이상의 죽음을 교사가 선택하지 않도록 영원한 변화를 받아들이는 ‘애도 공동체’로 전환해야 하는 이유다. 이제 교사는 동료의 얼굴에서 눈빛이 아닌 눈치를 읽어내는 것에서 탈피하고 감정이 아닌 검증을 공식화해야 한다.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텨가는 교사들과 휴직을 청한 교사들이 건강한 마음과 몸을 회복하거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학교는 다정한 배려와 격려가 필요하다. 교사 상호 간에는 ‘너’없이 ‘나’가 존재할 수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추모와 애도의 7월을 맞으며 그동안 우리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한 동료 교사들에 대한 진정한 돌아봄의 시간을 통해 학교가 ‘애도 공동체’로 거듭나길 기대한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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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학교가 ‘애도 공동체’로 전환되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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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저주의 속삭임 "나이파이한필베"(뢰택귀매괘)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나이파이한필베” 저주의 예언이다. 김진명의 소설 『풍수전쟁』에 나오는 저주의 예언이다.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아리송하다. 책을 반쯤 읽었을 때 그 뜻을 알게 되었다. 2025년 세계 국가 경쟁력의 순위다. 즉 나이지리아, 이집트, 파키스탄, 이란, 한국, 필리핀, 베트남 순으로 국가 경쟁력을 나열해 그 첫음절을 딴 것이다. 이것이 저주의 예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인구절벽 때문이다. 이제는 ‘인구절벽’이란 말도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인구소멸’이란 신조어가 쓰인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23년 출산율이 미국은 1.87명, 한국은 0.78명이란다. 그동안 정부에서는 출산율 정책을 출산장려금으로 퉁 치려는 정책을 펴고 있다. 이런 해결책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연간 28조원의 예산을 쓰고도 올해 출산율이 0.78명이라면 그 정책은 이미 쓸모없다는 말이 아닌가. 지난 10여 년간 한국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700억 달러(약 81조 4600억 원)가 넘는 돈을 썼다. 그리고는 올해 우리나라에 초등학교 입학생이 한 명도 없는 학교가 157개교라는 성적표를 받았다. 그리고 또 올해도 출산장려금을 올렸다. 진정 이 방법밖에는 없는가. 국민 모두 심사숙고해야 한다. 이대로 간다면 2050년이 되면 지구상에 대한민국이 없어질 것이란 예측이 빗나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계용묵의 「병풍에 그린 닭이」란 단편소설이 있다. 1939년에 쓴 이 소설은 우리나라 여인의 운명적 비애를 쓴 이야기다. 이 소설의 끝부분에 애를 낳지 못해 시집에서 쫓겨난 박씨는 “병풍에 그린 닭이 홰를 치고 우는 한이 있더라도 그 집을 떠날 수 없으며, 죽어도 그 집에서 죽고, 살아도 그 집에서 살아야 한다.”면서 20리 밤길을 걸어 집으로 되돌아오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에게 부여된 운명에 대한 순종과 그 각성을 보여주는 주인공을 통해 작가는 당시 전통적 가치관의 완고함과 그로 인한 삶의 고달픈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주역』의 뢰택귀매괘를 보면서 인구소멸시대에 해결책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걸어본다. 「대상전」에 뢰택귀매괘를 보면 ‘연못 위에 우레가 있는 모습이다. 연못으로부터 수증기가 증발하여 하늘에 구름이 끼고 그것이 하늘의 기운과 방전하고 우레를 일으킨다는 것을 고대인들도 인식하였다. 그러한 번개, 천둥 현상을 음양의 교합으로 생각하였고, 우리 인간, 남녀 간의 사랑 또한 그 기쁨과 환희가 번개같고 또 천둥과도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랑의 환희처럼 더 큰 우레가 어디 있으랴!’고 되어 있다. 귀매(歸妹)의 귀(歸)는 며느리를 뜻하는 (빗자루帚) + 언덕퇴(阜) + 그칠지(止)의 합으로 이루어진 형성자다. 옛날에 여자는 본래 있어야 할 곳이 시집이었다. 원래 친정은 잠시 있는 곳이고 때가 되면 시집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즉 여자는 시집가서 평생 머물러 산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귀매(歸妹)’는 ‘시집가는 색시’다. 상고의 시대에는 남녀 차별이 일체 없었다. 고대에는 대체로 모계로써 그 성을 삼았다. 귀매괘는 결혼 그 자체를 의미하는 괘다. 여자의 입장에서 결혼하는 것을 그리고 있다. 그러면 왜 시집가는 것이 낡아져 죽음을 향하는 것인가? 고조선과 같은 옛날 풍속에서는 남자가 아내를 얻으려면 먼저 처가에 가서 살아야 했다. 그래서 장가(처가) 일을 보살피다가 첫 아이를 낳게 되면 비로소 색시를 자기 집으로 데려왔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한국의 결혼은 남녀 1 : 1의 결합이 아니라 한 가족 대 자기라는 복수적인 결합인 셈이다. 그래서 ‘시집’이라면 남편이 아니라 ‘남편 집’을 의미한다. 또한 ‘장가’(간다)는 ‘장인(장모)의 집’을 가리킨다. 원래 한국에는 개인의식이란 것이 없었기 때문에 한 가족에 있어서도 개개인의 인격이 인정되어 있지 않았다. 남편 자체가 이미 가족 전체에 예속되어 있는 존재다. 그러므로 자연히 결혼한 여인도 남편과의 독립된 관계가 아니라 그 집안 전체의 가족 관계를 한층 주시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소위 그 ‘시집살이’라는 기형적인 결혼 생활이 시작된다. 그래서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이란 말이 나왔다. 귀머거리처럼 못 들은 체, 벙어리처럼 말 못하는 체, 그렇게 6년을 살아야 시집살이를 해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시집살이 개집살이 고추 당추 맵다 해도 시집살이 더 맵더라. 외나무 다리 어렵대야 시아버지같이 어려우랴 나뭇잎이 푸르대야 시어머니보다 더 푸르랴. 동서 하나 할림새요 시누 하나 뾰족새요 시아버지 뽀릉새요 남편 하나 미련새요……. 「시집살이 노래」를 봐도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부자유스런 생활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가족과의 모든 관계가 구속과 반목으로 시종되어 있다. 그 인간관계는 불만과 억압으로 얽혀 있다. 그러한 틈에서는 남편과의 사랑도 원만할 리가 없다. 그러다가 겨우 남편을 독점할 무렵이면 이미 “메꽃 같은 얼굴이 호박꽃이 다 되고, 삼단 같은 머리털이 비싸리총이 다 되고, 백옥 같은 손길이 오리발이 다 되었을 때”이며, 아름답던 젊은 날의 의상은 “눈물을 씻다가 썩어버리고” 난 후인 것이다. 남편은 그때 첩을 얻는 게 보통이다. 여기서 시집살이의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못살게 군다. 앞에서 언급한 계용묵의 「병풍에 그린 닭이」란 단편소설에 잘 나와 있다.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뒤집어 보면 알 수 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미워하는 까닭은 자식의 사랑을 독점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시어머니 역시 젊었던 시절엔 시집살이를 했던 것이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아들은 좌절된 남편에의 사랑을 보상하는 내용물이며 모든 고통과 고독을 승화시킬 수 있는 돌파구인 셈이었던 것이다. 부부 생활의 좌절이 시집살이의 악순환을 일으키게 되고, 그러한 악순환 속에서 한국의 가족은 분열, 반목, 질시, 분란을 거듭했다. 우리는 타자(아들)를 완전히 자기 안에 흡수하려 했기 때문에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불화가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올 김용옥도 뢰택귀매괘를 설명하면서 ‘남녀의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이 괘는 음양의 교합이 얼마나 이 우주의 중심 과제인가 하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하면서 ‘남녀가 독신주의를 선호하고, 근원적으로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 인지하는 시대적 풍조에서 『주역』의 주장은 우리에게 깊은 반성을 자아낸다’고 하였다. 탁견이다. 오늘날은 발랄한 청춘의 사랑을 새롭게 구가해야만 하는 시대다. 단백질의 살아있는 최고 형태인 인간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성스러운 음양의 교합이다. 「대상전」에서는 뢰택귀매괘를 번개, 천둥의 현상을 음양의 교합으로 생각하였고, 우리 인간, 남녀의 사랑 또한 그 기쁨과 환희가 번개 같고 또 천둥과도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랑의 환희처럼 더 큰 우레가 어디 있으랴! 『주역』의 탁견은 ‘영종지폐(永終知敝)’에 있다. 남녀의 결합에는 끝이라는 것이 없다. 끝이 끝이 아니라 영속의 한 고리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성을 위하여, 종(終)(죽음)을 알면서도 결혼을 하는 것이다. 종료와 영속은 상반되는 개념 같지만 음양의 우주에서는 종료가 곧 영속되는 것이다. 끝남을 영속으로 만드는 것이 영종(永終)이다. 지폐(知敝)라는 단어에 『주역』의 날카로운 견해가 숨어 있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은 것은 새로움을 창출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자신들이 낡아져 버린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나의 존재는 새로움을 창출하는 만큼 낡아져 죽음을 향하는 것이다. 여인의 위대함은 그것을 알면서도 행하는 행위에 있다. 삶의 지혜다. “병풍에 그린 닭이 홰를 치고 우는 한이 있더라도 그 집을 떠날 수 없으며, 죽어도 그 집에서 죽고, 살아도 그 집에서 살아야 한다.”는 여주인공 박씨의 말이 공허한 메아리로 들리는 요즘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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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저주의 속삭임 "나이파이한필베"(뢰택귀매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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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우리를 슬프게 하는 오해들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하루에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으로 두 번 수염을 깎는 친구가 있었다. 그처럼 깔끔한 사람이다. 그가 연락을 끊었다. 1년 동안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는다. 처음에는 많이 아프다고 생각하고 걱정을 했다. 나중에 다른 사람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뜻밖이었다. 내가 지역 학교 방문을 할 때 자기를 반갑게 대해주지 않아 마음이 상해서 그런다는 것이다. 자존심이 상해서 그랬다는 것이다. 아직도 전화를 해도 문자를 해도 답이 없다. 평교사로서 꼿꼿하게 살아가던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친구는 저녁에 다시 만나기로 되어있기에 크게 반가워하지 못한 나의 실수였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안톤 시나크(Anton Schnack)의 글을 보면 성공한 친구의 거만한 모습이 나온다. ‘옛 친구를 만났을 때, 학창 시절의 친구 집을 방문하였을 때, 그것도 이제는 그가 존경받을 만한 고관대작, 혹은 부유한 기업주의 몸이 되어,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를 조종하는 한 시인밖에 될 수 없었던 우리를 보고 손을 내밀기는 하되, 이미 알아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할 때’라는 구절이 나온다. 친구가 성공해서 거만한 모습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모습에 작가도 상처를 입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슬픈 것은 서로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엇갈려서 마음을 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형제간에 오해가 생겨 명절에도 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며느리와 시부모와의 갈등,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갈등이 있어서 인연을 끊기도 한다. 안타까운 것은 그것이 잘못된 판단으로 벌어진 오해인데도 인연을 끊는 상황이다. 스승과 제자, 교사와 학부모, 교사와 교사 사이도 얼마나 많은 오해가 있던가.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를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의 상태와 마음을 내 마음의 상황으로만 판단하다 보면 오해가 생긴다. 부모는 자식이 행복하고 존중받고 건강하게 성장하기를 바란다. 교사, 학생, 학부모, 관리자, 교육청 모두 이왕이면 학교가 활기차고 즐겁고 보람이 있는 장소이기를 바란다. 서로가 존중하고 배려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현실은 서로에 대한 진정한 이해보다는 자신만의 판단으로 상대를 평가하고 오해를 한다. 정치이념이 다르면 밥도 함께 먹기 싫다는 극단적 편향시대이다. 북한과 남한 동포도 만나지 못한 기간만큼 오해와 증오는 커질 것이다. 가장 중요한 공동체의 할 일은 만나서 대화를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수요일 오후 수업은 하지 않고 학생에게 예체능과 동아리 활동을 하게 해 주면 좋겠다. 교사들은 오후에 소통의 시간을 갖게 해야 한다. 수업에 대한 토의, 학생지도에 대한 토의, 학교 공문과 업무에 대한 소통, 관리자와 교사, 행정실과 교무실, 학부모와 학교가 모여서 어떻게 학교에서 학생들이 행복해 질 수 있는가를 토의하는 시간을 꼭 가졌으면 싶다. 오해로 인한 관계의 단절보다 더 슬픈 일은 세상에 많지 않다. ▣ 김홍제 ◇ 충청남도천안교육지원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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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우리를 슬프게 하는 오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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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다스림의 역할과 그림자-'동물 농장'(지택림괘)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지택림괘는 위에 땅(☷)이 있고, 아래에 연못(☱)이 있는 모양이다. 연못 위에 대지가 펼쳐진 모습이다. 즉 대지 위에서 연못을 내려다보는 다스림의 상이다. 臨자는 금문에 보면 큰 눈을 가진 사람이 무언가를 보는 모습이다. 설문해자에도 臨은 내려다 보며 감독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대중을 포용하고 보호하는 자세가 대지와도 같이 넓어야 한다. 괘사에 원(元), 형(亨), 이(利), 정(貞)의 4덕(德)이 들어 있다. 『주역』에 4덕이 들어있는 괘는 중천건, 중지곤, 수뢰준, 지택림, 천뢰무망, 택화혁의 6괘다. 이 ‘다스림(~에 임하다)’과는 정반대되는 문학작품이 있다. 20세기 영미문학의 가장 중요한 작가인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동물 농장(Animal Farm)』이다. 이 소설은 ‘정치 권력을 부패시키는 근본적 위험과 모순에 대한 빼어난 우화’, ‘문학의 사회 비판적 역할에 대한 고민이 담긴 위대한 풍자소설’이라 평가받는다. 조지 오웰은 이 소설에서 인간의 속박에서 벗어나 혁명을 이루고 이상 사회를 건설한 동물공동체가 변질되는 모습을 통해 구소련의 역사를 재현하며 스탈린 독재 체제를 강도 높게 비판한다. 등장인물은 인간 주인인 존즈(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를 상징), 혁명을 호소하는 늙은 메이저(마르크스), 독재자 나폴레옹(스탈린), 나폴레옹에게 축출당하는 스노볼(트로츠키) 등이다. 혁명이 성공한 후에 그것이 어떻게 변질되고, 권력을 잡은 지도자들이 어떻게 국민을 속이고 핍박하는지를 면밀히 그린 이 우화는 특정한 시대에만 한정되어 읽히지 않는다. 이 작품은 인류가 사회를 이루고 살 때부터 벌어진 ‘독재’를 함축적인 등장인물과 사건을 통해 그려내어 시대와 관계없이 유효한 풍자를 담고 있다. 나폴레옹이 동물농장을 공산화하고 우상화가 진행된다. 동물농장은 겉으로 공화국으로 바뀌고, 나폴레옹은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선출된다. 스노볼이 만든 7계명은 단 하나의 계명으로 바뀐다. 바로 그 유명한 문구인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다만 몇몇은 더 평등하다.”로. 그런 와중에 주변 농장의 주민들이 동물농장의 초대를 받고 만찬이 벌어진다. 그 후 만찬장은 난장판이 된다. 바로 카드놀이에서 서로 속임수를 썼다고 다투었기 때문이다. 이를 지켜본 동물들은 이제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구별할 수 없다며 한탄하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마지막 장면이 『동물 농장』의 압권이다. 이는 초기 동물주의의 이념을 완전히 버렸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간접적으로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을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조지 오웰은 스탈린으로 인하여 변질된 공산주의를 비판하고자 동물농장을 썼지만 실제로 동물농장 내용과 같은 사례는 많다. 시민혁명으로 왕과 귀족을 몰아낸 부르주아들이 자본과 법으로 새로운 지배층이 되거나 독립운동으로 외세를 몰아낸 독립운동가들이 외세 못지 않는 악질적인 지배자가 되는 경우도 있으며, 노동운동으로 선출된 노조위원장이 사업자들 못지않게 같은 노동자를 착취하는 사례 등 현재 주변 갑질 사건을 보면 인간의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인(小人)은 세상을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고 본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어느 위치건 어느 환경이건 상관없다. 그것이 조직이든 나라든 말이다. 우리는 『동물 농장』의 소설을 다스림의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동물 농장』은 풍자소설로서 바로 이러한 점을 지적한다. 공산주의라는 허울 좋은 이념을 사람들에게 세뇌시켜 나라를 건설하고 그런 다음 권력을 잡고, 우상화하고, 독재가 시작되는 것이다. 김일성의 삼대에 걸친 일가의 모습이다. 북한도 공식 명칭은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다. 북한은 인민들을 위한 국가인가? 아니다. 왜? 인민을 위한 국가가 자기 아들에게 세습하는가. 인민들은 이들을 위한 희생양이자 도구다. 『주역』의 지택림괘는 말한다. 다스림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단계가 있다고. 함림(咸臨)→감림(甘臨)→지림(至臨)→지림(知臨)→돈림(敦臨)이다. 그 중에서도 최고의 다스림은 ‘돈림(敦臨)’이다. 다스림이란 남보다 높은 위치에 있어서 지혜, 공감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교만하지 않고, 정의로운 세력들을 도와 포용하는 다스림을 취해야 한다. 군자도 사익을 취하면 소인이 될 수 있고, 소인도 대의를 쫓으면 군자가 될 수 있다. 남을 다스림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필독하기 바란다. 베트남의 통일 영웅인 호치민도 평상시에 『목민심서』를 옆구리에 끼고 살았다지 않는가. 지택림괘의 효사는 ‘다스림’의 다섯 단계를 말하고 있다. 먼저 ‘함림(咸臨)’은 ‘느끼면서 임한다’는 뜻으로 감응하는 사회를 말한다. 토론하는 사회보다는 토의, 협의하는 사회라 할 수 있다. ‘감림(甘臨)’은 ‘달콤하게 임한다’의 뜻으로 자신의 운명이 잘못될 것을 걱정하여 그 자세를 뜯어고치는 자세를 말한다. 대중에게 진실로 대하지 않고 꾀를 부려 감언이설, 교언영색하며 다스리는 사회다. 이런 사회는 아무런 이득을 가져 오지 못한다. ‘지림(至臨)’은 ‘지극 정성으로 임한다’의 뜻으로 상하가 교류하고 친하게 소통하며 임하는 자세를 말한다. 유현덕이 제갈량을 찾듯이 자기를 낮추고 소통하며 교류하는 다스림이다. 이는 머리로 다스리지 않고 몸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지림(知臨)’은 ‘지혜로써 민중에게 임한다’는 의미다. 세종대왕이나 정조대왕처럼 신하들과 토론(강연)하고 거기서 얻은 지혜로 민중의 도움이 되게 다스리는 것이다. 마지막은 ‘돈림(敦臨)’인데, 이는 ‘대군의 본보기를 따라 민중에게 임한다’는 의미로 가장 높은 자리에서 교만하지 않고 정의로운 세력들을 도타운 마음으로 포섭하는 자세를 말한다. 다스림의 단계 중 가장 높은 위치의 자세다. ‘허명(虛明;텅 빈 햇살)’처럼 본인이 다스리지만 대중은 누가 다스리는지 알 수 없는 다스림이다. 중국의 삼황오제의 요순시대처럼. 보다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 대중을 다스리려 하지 말고, 바다와 같은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가 대중과 함께 어깨동무하고 가는 다스림이어야 한다고 『주역』은 말한다. 김민기의 독백으로 시작되는 노래 「봉우리」라는 가사에도 ‘산봉우리’와 ‘바다’와의 비교를 통해 높고 뾰족한 산봉우리를 오르려 하지 말고, 저 아래 낮은 데로 흘러 고인 바다를 봐야 한다고. 기독교에서도 말하지 않는가.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고. 오늘 밤에는 김민기의 「봉우리」 노래에 취해 봐야겠다. “… 허나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저기 부러진 나뭇등걸에 걸터 앉아서 나는 봤지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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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다스림의 역할과 그림자-'동물 농장'(지택림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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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원영적 사고’ ≧ 전화위복 ≒ 긍정적 사고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요즘 Z세대들의 초긍정적인 ‘원영적 사고’가 화두다. 이는 걸그룹 ‘아이브(IVE)’의 멤버인 장원영의 특별한 곳에서의 특별한 사고에서 명명된 사고방식이다. 사연인즉, 스페인의 어느 빵집에서 자신이 사려던 빵이 품절돼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놓이자 불평하는 대신에 “앞 사람이 제가 사려던 빵을 다 사가서 너무 럭키(lucky)하게 제가 갓 나온 빵을 받게 됐지 뭐예요? 역시 행운의 여신은 나의 편이야”라고 말 한데서 출발했다. 이런 초긍정적인 사고가 조금은 낯설게 느끼지만 Z세대는 열광하고 있다. Z세대는 1997~2010년대 초반 출생으로 통칭 만 11세에서 24세를 일컫는다. 'Z'는 알파벳의 마지막 글자로, '20세기에 태어난 마지막 세대'라는 의미다. 이들은 디지털에 익숙한 부모 세대의 영향을 받아 IT에 대한 이해도 자체가 높다. 어릴 때부터 디지털 환경에 노출되어 자라 이른바 ‘디지털 원주민(Digital Native)’이라고도 불린다. Z세대는 페이스북, 유튜브, 아이폰의 발전 과정을 지켜본 세대로, SNS에 가장 친숙한 세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인스타그램, 스냅챗, 유튜브, 틱톡 등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그야말로 눈이 부시게 빛나는 디지털 신세대다. 이들은 일상에서 짜증이 날 법한 상황에서도 결코 부정적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 모두(冒頭)의 일화에서와 같은 상황에서 ‘원영적 사고’라는 신조어를 낳았으며 현재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기성세대들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따라 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는 현재 장원영의 말투를 흉내 내는 인터넷의 밈(meme:유행 콘텐츠)으로 빠르게 퍼졌고 조회 수도 수백만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몇 년 전 ‘흙수저’ ‘이생망’ ‘3포 세대’란 말이 난무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Z세대는 왜 이런 사고방식에 열광하는 것일까? 심리학자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이런 사고가 유행하는 이유로 학업, 취업 등으로 어려운 현실에 허덕이는 젊은 세대가 자신들의 상황을 합리화함으로써 돌파구를 찾으려는 심리를 그 배경으로 주목한다. 이는 철저하게 실용주의를 선호하는 Z세대의 특성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마틴 셀리그만의 ‘긍정 심리학’과 같은 맥락을 기반으로 하되 우리가 예부터 극과 극의 상황에서 긍정의 결과를 기대하며 기회로 삼던 전화위복(轉禍爲福)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라 할 것이다. 요즘 Z세대는 교육의 효과에서 그 빠르기가 마치 스펀지와 같다. 그들은 통상적으로 외부에서 주어지는 새로운 요소를 신속하게 흡수하여 일상에서의 많은 실수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빠른 회복력을 기반으로 재도전하거나 새롭게 기획하고 한 단계 높게 디자인하는 등 회복탄력성을 최대로 높이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 이는 냉혹한 경쟁 교육을 받고 살아남은 그들 부모 세대에서 받은 영향력도 크지만 자체적으로 어려서부터 보고, 듣고, 체험(경험)하고, 전문가로부터의 직간접적 교육을 받아서 획득한 우수한 역량을 갖춘 세대라고 평가받는다. 이제 우리 교육은 청소년들의 사회적 관계 및 회복탄력성 배양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사회를 좀 더 건강하게 만드는 정책 구현이 필요하다. 여기에 바로 그 의식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원영적 사고’가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만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듯이 지나친 낙관성으로 현실을 회피하는 역효과를 경계하는 것이 요구된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어니 J 젤린스키에 의하면 우리는 평소 96%의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그중에 40%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며 30%는 이미 일어난 사건이며, 22%는 사소한 것, 4%는 바꿀 수 없는 것이라 한다.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무장한 Z세대의 장점을 더욱 살리는 것은 21세기 우리 교육이 감당해야 할 과업이라 믿는다. 학령인구가 급감하는 이 시대에 우리 모두가 나서 ‘원영적 사고’로 무장하도록 청소년들을 습관화시키고 조기에 정착될 수 있도록 교육에 나서는 것은 세계적으로 불명예스런 청소년 자살률을 비롯한 Z세대의 행복지수를 높이는 비결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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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원영적 사고’ ≧ 전화위복 ≒ 긍정적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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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어둠 속에 묻혀진 새로운 시대-'장미의 이름'(지화명이괘)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지화명이괘는 위에 땅(☷)이 있고, 아래에 불(☲)이 있는 모양이다. 땅 속으로 태양이 들어가, 그 밝음이 가려져 버린 모습이다. ‘지화명이(地火明夷)’의 ‘명이’는 ‘어둠’을 뜻한다. 일몰 후 어둠이 깔리는 것과 같다. 즉 먼동이 트기 직전의 암흑이다. 암흑의 시대, 난세다. 이럴 때는 자신의 밝음을 숨겨야 한다. 노자의 『도덕경』 15장에 “누가 능히 자기를 흐리게 만들어 더러움을 가라앉히게 물을 맑게 할 수 있겠는가?(孰能湯以 靜之徐淸)”라고 했다. 이 말은 지화명이괘의 상(象)에서 말한 ‘자신의 지혜를 밝게 빛내기보다는 흐리게 만들어 오히려 그들과의 관계를 여유롭고 명료하게 만든다(用晦而明)’는 말과 유사하다. 이로 보면 지화명이괘의 본질은 도광양회(韜光養晦-자신의 재능이나 명성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다. 도광양회(韜光養晦)란 말은 덩샤오핑이 내세운 외교정책으로 유명해졌지만, 사실은 『삼국지』에 나오는 일화에서 유래했다. 거지가 된 유비에게 조조가 찾아와 식사하던 중, “이 시대 영웅이 나, 조조와 자네 유비다”라고 말하자, 유비는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한다. 이때 조조는 유비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다. 이처럼 그믐밤 같은 어둠 속에서 칼빛을 감춘다는 의미로,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배양해야 할 때 쓰는 말이다. 도광양회하려면 ‘맞서지 말라’, ‘적을 만들지 말라’, ‘깃발을 올리지 말라’, ‘선두에 서지 말라’의 4가지를 하지 말아야 한다. 지화명이괘와 관련 있는 작품으로는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장미의 이름』이 있다. 움베르토 에코는 20세기 최고의 지성이라 불리던 작가이자 기호학자, 철학자이자 평론가다. 그는 평생을 기호학 연구에 바쳤으면서도 죽어있는 기호보다 살아 움직이는 만물의 변화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지식과 질서는 언제든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고 새로운 변화 앞에 늘 깨어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장미의 이름』은 신앙 중심의 중세에서 인간과 자연과학 중심의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작품 안에는 시대의 변화 앞에서도 신 중심의 중세적 세계관을 지켜야 한다는 맹목적인 신념에 사로잡힌 눈먼 노 수도사(호르세)가 등장한다. 그는 신앙심을 무너뜨릴 수 있는 새로운 지식을 이단으로 취급하며 이 지식의 전파를 막기 위해 파국으로 치닫는다. 작가는 이렇게 변화를 등지고 자신의 신념만이 진실이라고 믿는 태도가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장님 호르세 수도사는 맹목적인 신념에 사로잡힌 인물로 나타난다. 그는 변화를 허용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만을 고집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태도는 새로운 지식과 변화를 거부하며 마침내 파국으로 이끈다. 작가는 이를 통해 변화에 대한 고집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 것인지를 보여준다. 호르세는 소크라테스의 『시학』을 하느님의 세계를 위협하는 이단으로 규정하고 오랫동안 장서관의 가장 깊숙한 밀실에 감춰뒀던 것인데, 수도사들 사이로 이 책의 위치가 새어나가자 그는 측근을 통해 책장에 치명적인 독을 묻혀둔다. 남몰래 이 『시학』을 읽은 사람은 죽게 된다. 습관처럼 손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기 때문이다. 한편 윌리엄은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게 되자 호르세와 실랑이를 벌인다. 그러다가 등잔불을 치며서 붙은 불이 양피지로 옮겨붙게 되고, 이어 장서관과 수도원 전체를 집어삼킨다. 그 불길을 뚫고 나온 윌리엄이 제자 아드소에게 하는 말, 여기에 이 소설의 주제가 있다. “가짜 그리스도는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믿음과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자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궁극적인 지리가 아니겠느냐?”하면서 “우리가 상상하는 질서란 그물 아니면 사다리와 같은 것이다. 목적을 지닌 질서이지. 그러나 고기를 잡으면 그물을 버리고, 높은 데 이르면 사다리를 버려야 한다.” 『장미의 이름』에는 자신의 재능이나 명성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명이괘와 윌리엄이라는 인물이 연결되어 있다. 윌리엄은 예리한 지성과 연역적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의도적으로 자신의 진정한 재능을 숨기고 숙련된 조사자이자 사상가로서의 명성을 경시한다. 이야기에서 윌리엄은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단순한 프란체스코 수사로 가장하여 지적 능력을 가장한다. 그의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거나 관심을 끌지 않고 수도원의 다른 수도사들과 섞이는 것을 선호한다. 그의 비밀 전략은 그가 조사를 방해하는 사람들로부터 의심이나 저항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수도원 내의 미스터리를 밝히면서 신중하게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수도원의 벽 안에 숨겨진 금지된 지식과 살인 뒤에 숨겨진 진실을 점차 밝혀낼 수 있게 된다. 이는 자신의 재능이나 명성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명이괘의 모습과 유사하다. 작품 속 인물들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 하며 변화를 거부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지를 작가는 경계한다. 작품 속의 인물들은 자신의 명성을 드러내지 않고, 변화의 흐름을 조심스럽게 따른다. 이는 어둠에 가려진 밝은 지혜와 영리한 전략을 상징한다. 우리가 맹목적으로 지켜내야 할 영원한 질서,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고 세상의 변화 앞에서 지금 당장 질서와 진리라고 믿는 것들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더 높은 곳, 더 넓은 곳으로 다가갈 수 있는 모험을 하게 된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색(色)도 공(空)도 아닌, 현상(現象)을 보아야 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을 통하여 내 머릿속을 꽉 채운 변치 않는 신념보다 눈 앞에 피어난 한 송이 장미의 변화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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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어둠 속에 묻혀진 새로운 시대-'장미의 이름'(지화명이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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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어둠의 시대, 교사가 걷는 '광야'를 밝히려면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어둠이 칠흑 같던 일제 강점기, 고뇌하고 번민하며 수도자처럼 살아갔던 저항시인 이육사는 그의 시 <광야(廣野)>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모든 산맥들이/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곳을 범하든 못 하였으리라/끊임없는 광음을/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주지하는 바와 같이 민족시인 이육사의 삶은 해방 직전까지, 39세의 나이로 끊임없이 저항하고 실제 영어(囹圄)의 몸으로 모진 고문에 의한 극도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민족을 위한 희망의 씨앗을 뿌렸다. 그의 유물 속에서 발견된 <광야>는 부끄럽지 않게 이 시대를 살아가려는 교사들에게도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크다. 그것은 단지 비정상적인 교육에서 정상적인 교육을 향한 그리고 이상적인 교육만을 상상하고 기다리지 않고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것부터 실천해보자는 결의를 다지게 만든다. 정철희는 『교사의 고통』에서 ‘리더는 흙을 가꾸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교사는 이 시대의 리더 중의 한 사람이다. 이는 교사가 마치 정원사처럼 단지 꽃을 가꾸는 사람이 아니라 흙을 가꾸는 사람이라는 사유에서 빗댄 말이기도 하다. 왜냐면 교사들이 매일 하는 일이 즉석 효과가 나타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예쁜 꽃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흙을 가꾸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교사의 사명이다. 이육사는 자신의 시에서 생명을 기르는 ‘땅’에서 다시 시작하자고 말한다. 땅의 회복을 원하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바로 ‘가난한 노래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다. 이육사가 누구인가? 그는 바로 일제가 빼앗은 땅을 다시 우리 민족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 선구자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이 시대 교사들은 어떻게 공교육 붕괴의 어둠을 극복하고 당당하게 사도(師道)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 교육의 척박한 땅과 생명을 살리는 과업을 견지하는 것이다. 교육의 본질을 되찾고 끝없이 공회전하는 공교육을 살리기 위한 수많은 교육정책들을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이다. 현 정부가 내세우는 3대 개혁 과제 중의 하나인 교육개혁은 아직 뚜렷한 방향과 궤적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 대신 각종 설익은 정책들이 중구난방으로 발표됐다가 이내 곧 교사와 교원단체의 저항에 부딪혀 사라지곤 한다. 왜냐면 사전에 어떤 대화와 소통, 타협의 시간이 없이 그저 상명하달식으로 전달되고 강제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교사들이 무턱대고 침묵하고 저항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교육 정책의 중심에 학생과 교사를 두고서 기타 기성세대의 이기심과 기득권을 배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작년 서울의 서이초등학교 교사의 죽음 이후 이제는 교사의 생명을 살리자는 운동이 전국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그간의 줄기찬 노력으로 ‘교권 5법’도 통과되었다. 하지만 실제는 어떤가? 아직도 교사는 그 변화의 체감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으며 학부모는 여전히 악성 민원과 갑질, 아동 학대 소송을 불사하고 있다. 최근에는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1,3학년)이 지각 지도에 반발해 담임교사를 폭행하고 교실에서 밀쳐내었고, 무단 조퇴를 지도하는 교감을 폭행하고 심지어 뺨을 때리는 패륜까지 저지르고 있다. 이제 교사는 우리 교육의 풍토를 바꾸는 고독한 선구자가 되어야 한다. 이대로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학생들에게는 경쟁교육과 입시에 찌들어 우울과 폭력의 정서를 협력과 연대의 씨앗을 뿌려 상생하는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학교에게는 관료제의 오랜 병폐를 주체성과 다양성이 충만한 문화의 씨를 뿌려야 한다. 대한민국에는 생명 존중과 인간 존엄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 이는 결코 어느 한 사람만의 힘으로는 절대 불가하다. 교사의 집단 지성과 교원단체의 연대의 힘이 필요하다. 교사가 가꾸어야 할 광야는 학생, 교사의 생명이 존중 받고 상호 간에 존경의 씨앗을 뿌리는 배움의 터전이어야 한다. 이 땅의 고독한 교사 제위여, 교직이 척박한 광야가 되어 버린 이 시대에 그래도 교육이 희망임을 노래하고 미래를 여는 선구자가 되는 깨어있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되자.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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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어둠의 시대, 교사가 걷는 '광야'를 밝히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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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방패연은 왜 가슴에 구멍을 내었는가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는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갈등이 존재하고 관리가 필요하다. 무풍지대인 직장은 없다. 학교도 마찬가지이다. 학생, 학부모, 교사의 보이지 않는 갈등이 존재한다. 갈등이 미풍일 때도 있지만 상식이 통하지 않는 태풍을 몰고 와서 공동체의 마음을 다 찢어 놓기도 한다. 교직에 온 것을 후회하는 교사도 있고 드물게는 관리자가 된 것을 후회하는 이도 있다. 요즘은 마음이 심란하다. 상대방 입장은 고려하지 않는 자기중심주의 민원, 일에서 완벽함을 추구하는 직원과 인간성을 중시하는 직원 사이의 갈등, 분노 조절을 하지 못해 사업이 진행되는 도중에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감정을 폭발시키는 사람. 저급한 언어와 높은 목소리로 자기를 높이려는 사람.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여 말없이 연락을 끊고 응답을 하지 않는 사람 등 사람과의 갈등은 크고 작은 물결로 마음에 생채기를 남긴다. 연이 되어 하늘을 날고 싶다. 연은 바람을 이용해 하늘에 띄우는 놀이 기구이다. 방패연은 방패를 닮은 연이라고 해서 방패연이라고 한다. 방패연은 연 가운데 구멍이 크게 뚫려있다. 방패연은 연에서 3분의 1쯤을 지름으로 한가운데를 오려내어 구멍을 뚫는다. 이것을 방구멍이라고 한다. 방구멍은 바람이 약할 때는 연 표면에 닿는 공기가 방구멍을 통과하면서 상승 에너지를 발생시켜 연이 떠오르게 한다. 바람이 강할 때는 방구멍으로 바람을 내보내서 바람에 대한 저항을 줄여준다. 그 덕분에 연줄은 끊어지지 않고 연은 오래 날 수 있다. 유연성과 상황인식이 필요하다. 지금 세대는 태어날 때부터 컴퓨터를 켜고 게임을 하던 디지털세대이다. 산천을 뛰놀고 전봇대 주변에서 놀던 아날로그 세대와는 경험치가 다르다. 정신을 구성하는 원소와 세포가 다르다. MBTI를 보면 인간의 성향은 정말 다양하다는 것을 느낀다. 지시와 훈계보다는 경청과 질문과 피드백으로 합리적 대안을 찾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나의 철로 만든 무쇠는 강하지 않다. 다양한 재료가 모여서 합금이 되었을 때 금속은 더 강해진다. 리더십에 정답은 없다. 사람도 환경도 조직도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탄력성과 적응력이 필요하다. 갈등을 항상 바람처럼 맞으며 조화롭게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이 지도자(리더)의 숙명이다. 방향도 없이 바깥과 안에서 갈등의 바람이 분다. 바람 따라 멀리 떠나고 싶은 심정이 들 때가 있다.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연이 되고 싶다. 손동연 시인은 ‘방패연’이라는 동시에서 ‘방패를 버리고서야 하늘을 품었습니다’라고 했다. 하늘 높이 떠올라 가는 방패연은 방패를 버리고 하늘을 품는다. 그 순간은 나를 버림으로써 더 큰 나를 얻는다. 넓은 하늘을 품으며 날기 위해서는 적당량의 바람이 필요하다. 모두가 날고 싶지만 갈등은 싫어한다. 갈등이라는 바람이 있어야 더 높이 하늘로 오를 수 있다. 방패연의 방구멍이 연을 떠오르게 한다. 가슴에 포용이라는 큰 구멍을 내고 오늘도 힘차게 비상해 보자. ▣ 김홍제 ◇ 충청남도천안교육지원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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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방패연은 왜 가슴에 구멍을 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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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함부로 의심하지 말라-'심문'(화택규괘)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대상전」에 화택규괘를 보면 ‘불이 위에 있고 연못이 아래에 있는 모습이다. 불은 위로 타오르는 성질이 있고, 물은 아래로 흐르는 성질이 있어, 이는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는 이질성을 보여준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근원적인 대세의 흐름이나 비전의 궁극적 목표에 관해서는 동일성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자기가 걸어가는 구체적인 삶의 자세에 관해서는 이질성을 고수한다.’고 되어 있다. ‘화택규(火澤睽)’의 ‘규(睽)’는 ‘반목하다’, ‘서로 등지다’의 의미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생각이 화합되지 않으면 큰 일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하다. 반목은 괴리를 낳고, 불통으로 이어진다. 불통은 확증 편향적인 사고를 부르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 증오는 부메랑처럼 나에게 되돌아온다. 화택규괘와 관련있는 소설로는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단편소설인 '심문'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의심으로 인해 살인 사건이 발생하는 내용이다. 플로베르의 탁월한 심리 묘사와 세밀한 상황 전개를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로, 인간의 불안과 의심이 어떻게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다룬다. 이 이야기는 주인공이 범죄 혐의를 받으며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주인공은 억울하게도 살인 혐의를 받게 되고, 심문 과정에서 그의 내면의 갈등과 두려움이 점점 커져간다. 심문관은 주인공을 끊임없이 몰아붙이고, 그의 증언의 모순점을 파고들며, 결국 주인공은 극심한 심리적 압박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살인을 자백하게 된다. 플로베르는 이 작품을 통해 의심과 불신이 얼마나 쉽게 사람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감정들이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심문 과정에서의 긴장감과 심리적 압박은 독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며, 인간의 연약한 심리 상태와 사회적 구조가 어떻게 한 개인을 파멸로 이끌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괴리의 시대, 꼴 보기 싫은 놈들도 과감하게 만나야 한다. 함부로 의심해서는 안 된다. 동이이(同而異)나 화이부동(和而不同)하는 자세를 견주해야 한다. 보편적으로는 타자들과 같은 길을 가지만 구체적으로는 자기만의 다른 색깔을 보여야 한다. 마치 민주주의라는 커다란 길을 함께 가는데, 저마다 개성에 맞는 옷 색깔을 입은 것처럼. 그룹 들국화의 '그것만이 내 세상'이란 노래가 있다. 세상을 너무나 모른다고 나보고 그대는 얘기하지 조금은 걱정된 눈빛으로 조금은 미안한 웃음으로 그래 아마 난 세상을 모르나 봐 혼자 이렇게 먼 길을 떠났나 봐 하지만 후횐 없지 울며 웃던 모든 꿈 그것만이 내 세상 하지만 후횐 없어 가꿔왔던 모든 꿈 그것만이 내 세상 그것만이 내 세상 (중략) 이주엽은 '이 한 줄의 가사'에서 80년대 들국화의 앨범은 한 권의 교양서였다고 찬양했다. “하지만 후횐 없지/울며 웃던 모든 꿈/그것만이 내 세상”이라고 전인권의 목소리가 홀연히 솟구칠 때, 역사와 이념의 격정이 들끓던 광장과는 또 다른 세상이 열렸다. 그곳은 존재의 고독, 불안, 결핍으로 가득했다. 80년대 서울의 봄은 아직 멀었고 갈 길은 많이 남았으나 청춘의 열정은 계속된다. 불운과 맞닥뜨릴 때 삶은 갱신된다. 생의 기쁨은 언제나 한 쌍으로 따라오는 불안에 자리를 내주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만이 내 세상이다. 화택규괘는 큰길은 잘못되고 있으나, 작은 길에는 희망이 있고 길하다. 전략은 승리했으나 전쟁에는 진다는 말처럼, 하지만 후회는 없어야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노자의 무위와 유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노자는 세상을 보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봐야 하는 대로’ 보는 방식이다. ‘봐야 하는 대로’ 보는 사람은 과거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여지는 대로’ 보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간다. 무의 태도를 지녀야만 변화하는 진실과 접촉할 수 있게 된다. 내가 ‘봐야 하는 대로’ 보는 사람은 항상 일을 그르치게 된다. 예를 들어 ‘내 아들을 반드시 의사로, 검사로 만들어야겠다’는 부모의 선의가 자녀를 탈선의 길로 접어들게 만든다. 이 세상을 살면서 ‘보이는 대로’ 살아야지, ‘봐야 하는 대로’ 살면 인생 자체가 피곤해진다. 정류장에 도착했는데, 타야 하는 버스가 막 지나쳐버린 적이 있잖은가. 이럴 때 어떤 생각을 하는가. ‘아이, 좀 기다려주지’ 하거나 ‘내가 조금 빨리 왔더라면’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또는 아무 생각 없이 그 환경을 보이는 대로 수용해버리는 사람이 있겠다. 어떤 사람이 스트레스 안 받고 살아가는 사람일까, 바로 맨 마지막 사람 즉 ‘보이는 대로’ 보고 사는 사람일 것이다. 이렇게 내가 ‘봐야만 하는 대로’ 세상을 보고 산다면 모든 일을 망치게 된다. 그것은 그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져 결국 사회를 망치게 된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명심하라. 노자의 무위의 원칙을 지키는 한 만사는 저절로 형통해진다는 사실을. 화택규괘의 효사를 보자. 먼저 지(地)의 자리다. 화택규는 불과 물이 함께 있는 상태를 상징한다. 불은 위로 타오르는 성질이 있고 물은 아래로 흐르는 습성이 있다. 불과 물의 마음, 서로 어그러져 일치하지 못한다. 인(人)의 자리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불과 물처럼 그 천성이 다르고 생활의 신조가 다르고 마음의 방향이 다르고 재능이 다르면서 어느 같은 공동체 속에 묶여져 공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어떤 가족도 마음이 꼭 같은 사람만이 한 가족으로 탄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모순과 괴리와 대립과 반목이 공존하는 것이 인간 사회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이러한 일치할 수 없는 인간관계에 대처하는 길은 세 가지다. 첫째는 무조건 참고 견디며 고민과 갈등을 주어진 운명대로 살아가는 길이다. 둘째는 서로 대립하고 반목하고 투쟁하는 과정을 통해서 한 단계 높은 경지로 발전하면서 부단히 정반합의 법칙을 반복하는 길이다. 셋째는 상이하고 모순되는 너, 나의 특성을 각각 살리면서 한 개의 커다란 목적 속에 종합시키어 조화를 이룩하는 대승적 방법인 것이다. 천(天)의 자리다. 주역에서는 ‘하늘과 땅은 서로 다르나 그 영위하는 일은 같고,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르나 그 뜻은 서로 통하고, 만물이 제각기 서로 다르지만 그 작용은 유사하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괴리와 상반이 반드시 인류 사회에 비극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선용하고 조화함으로써 도리어 인류 사회는 다채롭고, 흥미있고, 싫증나지 않고, 각자의 삶을 즐길 수 있고, 각자의 힘을 진심으로 다할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다. 그리하여 행복과 발전과 번영을 거기에서 얻을 수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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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함부로 의심하지 말라-'심문'(화택규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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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인재육성 교육으로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석학으로 미국의 아이비리그인 다트머스 대학교의 최초 동양인 총장을 역임하고 세계은행 총재까지 봉직한 김용 교수는 높은 지명도를 가진 학자였다. 그런데 그가 성공을 거둔 배경은 다소 특이하다 할 수 있다. 무엇일까? 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철저한 가정교육 아래 “세계를 향한 너의 꿈은 무엇인가?”를 슬로건으로 내세워 공부에 임했으며 결국 자기 자신을 넘어서 ‘보다 나은 세계’를 만든 이타적인 지식인이었다. 세계의 유명 대학들은 진리와 정의의 전당인 캠퍼스 곳곳에 ‘세계를 이롭게 하는 이타적인 인간 육성’을 교육비전으로 내세우고 있다. 필자가 수년 전에 우연한 기회에 방문했던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교(미국 전 대통령 부시의 모교)의 본부인 오스틴 캠퍼스는 대학 건물에 이 목표를 세기고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의 전당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당시 필자는 공무원 임용 시험에 높은 합격률을 성과로 내세우는 국내 명문대학들과는 달리 미국 내 최고 수준의 대학은 아니지만 당당하게 자신을 넘어서는 이타적 인재를 육성하는 교육에 크게 감동했다. 우리는 예로부터 ‘배워서 남 주자’를 실천하는 이타적인 행동주의자, 정의로운 인간이 되기를 꿈꾸던 학창시절을 간직하고 있다. 필자를 비롯한 베이비부버 세대들은 이를 교육의 목표이자 개인적 삶의 지향점으로 삼았다. 이는 필자가 교육자의 길로 입문한 계기였다. 재직 중에도 이런 의식으로 학생교육에 우선하였으며 학생들의 진로⋅진학지도에도 단골메뉴였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던 경제 구루 고(故) 김우중 회장을 모델로 소개하곤 했다. 당시 이타적인 인재로의 성장을 응원하고 격려했던 것과 제자들이 현재 다수의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이나 금융기관에 근무하며 세상에 기여하는 것은 그들이 감히 자기를 넘어선 교육의 힘이라 믿는다. 필자는 평생 동안 중등교육에 헌신한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하고자 한다. 그럴 때마다 과거 학생들이 필자가 짐작하는 것보다 더 위대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현재 사회의 곳곳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당당하게 살아가는 그들이 놀랍기만 하다. 이는 필자가 무엇보다 먼저 강조했던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국가와 세계를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이타적인 인간이 되도록 교육한 것에 대한 보상이란 생각에 더욱 학생들에게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 일전에 한국 마이크로소프트와 아마존의 이사가 된 제자들이 필자에게 수시로 분에 넘치는 예의와 행동을 보여 주어 지난 삶에 강한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그들은 말하기를 “제가 자신을 넘어서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만큼 저는 그동안 밤잠을 줄여가며 공부했습니다. 이것이 타인과 회사의 인정을 받는 비결인 것 같습니다. 그러한 삶을 살도록 선생님이 저희들에게 동기부여를 하셨습니다.”라고 비슷한 취지로 고백했다. 이 고백은 아직도 필자 자신에게도 유효하다. 지금도 새벽 시간에 심혈을 기울여 작성하는 모든 글은 공동체와 국가를 위한 목적을 우선한다. 그 배경에는 가톨릭 신앙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엄사상을 담고 있다. 이는 필자부터 주어진 여건에서나마 이타적인 인간으로 세상을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드는데 일조하고자 하는 신념을 실천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다소 버겁다고 느껴질지라도 솔선수범의 자세를 잃지 않고, 공부에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며, 특히 이 나라의 희망인 청소년을 비롯한 젊은이들을 온 마음으로 응원하고 격려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행동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교육자는 늘 십대의 청소년이 이기적이고 뻔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들은 기후변화와 인종차별과 도시 빈곤, 사회적인 사안들을 제법 어른스러운 방식으로 생각하고 다루며 실제로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단지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는 단적인 예이다. 이들이 기후위기 대처와 생태⋅환경 보존에 나설 때 진심어린 격려와 응원, 칭찬과 지지를 보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며, 세계시민으로 살아가도록 교육해야 한다. 그들이 자신들만의 고유한 욕구와 바람과 필요를 넘어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교육의 위대한 힘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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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인재육성 교육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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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가정의 화목은 성(誠), 부(孚), 애(愛)의 조화로부터-'여자의 일생'(풍화가인괘)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대상전」에 풍화가인괘를 보면 ‘불이 바람을 타고 잘 타오르는 모습’이다. 불이 타면 따뜻한 바람이 일듯이, 한솥밥을 먹으며 화목한 집안을 가꾼다는 뜻이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평소의 언행을 정의롭게 한다.’고 되어 있다. 가인(家人)은 가족을 의미한다. 가족에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은 여성이다. 가정의 평화는 결국 여성에 의하여 유지되기 때문이다. 옛 고조선의 가인(집을 지키는 사람)들은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잘 간수하는 것이 생활의 중대사였다. 남자가 사냥을 하러 나가면 여자가 집에 남아 불을 지켰다. 정지용의 「향수」에 나오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火),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風) 말(馬)을 달리고” 이 시에도 풍(風), 화(火)가 그대로 드러난다. 이러한 전통으로 가정에서 원만한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저마다의 본분을 지키고 맡은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여야 한다. 이를 일컬어 ‘언행유항(言行有恒)’이라 했다. 결국 퐁화가인괘는 집 안에서 축적된 도덕성이 밖으로 미치게 되었다는 인간 세상의 원리를 밝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밥상머리 교육이 유지되고, 이것이 있기 때문에 세상읜 윤리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언행유항(言行有恒)을 잘 보여주고 있는 문학작품이 있다.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이다. 모파상은 19세기 유럽의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자연주의 문학은 인간의 삶을 아무런 의도 없는 객관적인 자연 현상처럼 바라보는 문학을 말한다. 『여자의 일생』은 모파상을 프랑스 문학의 스타로 만들어준 대표작이다. 사랑에 대한 환상을 가진 잔느라는 여인이 온갖 삶의 비극을 거치며 그 환상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냉정하게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여주인공 잔느를 너무 많은 풍파 속으로 밀어넣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환상과 낙관이란 예측할 수 없는 자연 현상 같은 삶 앞에서 얼마나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준다. 또 이렇게 삶의 풍파에 나약하게 흔들리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모두의 숙명이란 것도 보여준다. 17살 잔느는 노르망디 지역의 푀플성을 소유한 남작 부부의 외동딸이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처녀다. 어느날 마을 사제의 소개로 매혹적인 외모의 귀족 청년 줄리앵을 만난다. 곧 사랑에 빠지고 결혼한다. 결혼 후에도 줄리앵은 백작부인과 불륜은 맺고, 시녀인 로잘리도 겁간한다. 그 사건 후 잔느는 그의 아들 폴을 집안에서만 애지중지 키우고 있다. 폴은 그런 잔느의 숨막히는 치마폭 속에서 아는 것도 별로 없는 정신적 유아로 머물게 된다. 청년이 된 폴은 기숙학교에 입학하고 창녀와 사랑에 빠지며 빚을 지고 방탕한 생활을 한다. 폴의 빚 때문에 두 농장까지 저당 잡히게 된다. 홀로 남은 늙고 지친 잔느 앞에 어느날 남편의 사생아를 낳았던 로잘리가 찾아온다. 로잘리는 자신이 잔느의 아버지가 지참금으로 준 토지재산 덕분에 성실한 남편을 만나 평탄하게 아이를 키울 수 있었고 얼마 전 아들을 장가보내고 남편과 사별한 후 혼자 지내고 있었다. 로잘리는 잔느의 집 살림도 하고 돈 관리도 알뜰하게 대신해 준다. 폴에게서 편지가 온다. 내용은 함께 지내던 창녀가 사흘 전에 자신의 딸아이를 낳고 죽어가는데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으니 아이를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기차역에서 아이를 받아 온 로잘리는 잔느에게 안겨준다. 죽음 같디 절망적인 삶을 살다가 너무나 오랜만에 생명의 환희를 느낀다. 아이에게 키스하는 잔느를 보며 로잘리는 말한다. “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좋은 것도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랍니다.” 잔느의 삶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그 어떤 불행한 삶이 건 행복한 삶이 건 해가 뜨는 날도 있고 소나기가 내리는 날도 있다는 것 그렇게 통제할 수 없는 변화무쌍한 자연 현상처럼 흘러가는 게 우리네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절망에 빠진 잔느를 구한 것은 신이 아니라 과거의 유부남과 부정을 저질러 사생아까지 낳은 여인(로잘리)이었다. 모파상은 이를 통해 진정한 구원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부정을 저지르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주변 사람들을 통해 온다고 말해 주는 듯하다. ‘자모(慈母)에 패자(敗子)가 많다’는 우리의 속담이 있다. 이 말은 지나친 자애가 넘치는 어머니의 슬하에서는 도리어 방자하고 버릇없는 자식이 나온다는 말이다.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에서도 주인공 잔느는 그의 아들 폴에게 치마폭 사랑을 쏟아붓는다. 그것에 아들 폴은 질려 버리고 삐딱한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훌륭한 부인은 집안을 잘 이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남편하기 나름이다. 결국 가정의 화목은 부부가 서로 소통하고 사랑하고 서로를 위할 줄 알아야 한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란 말이 흔한 말이지만 그 말처럼 위대한 말도 없다. 공기처럼 흔하지만 되새겨 보아야 할 말이다. 가정이 잘되어야 사회가 잘되고 나라가 잘 된다. 그래서 맹자는 가인의 출발이며 종착지는 성(誠)이라 했다. 풍화가인괘의 효사 중 上9에 “유부위여(有孚威如)”라 했다. 집안을 다스리는 최초의 원칙은 성실함(誠), 마음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 그리고 사랑이라는 말이다. 조화로운 가정 생활을 조성하는 데 있어 이해, 용서 및 의사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풍화가인괘의 효사를 보자. 먼저 지(地)의 자리다. 初9 효사다. 결혼을 하면 3년 동안은 서로의 집안에 대해 배운다. 남남이 만났으니 서로의 집안에 대해 모른다. 무조건 양보하고 배우려 해야 한다. 그래야 집안이 평안하다. 그리고 부부지간도 서로의 법도를 세우며 지내야 한다. 3년 동안 그렇게 하면 된다. 그리고 집안의 여자(부인, 며느리)는 음식을 잘 만드는 일에 열중해야 한다. 음식을 잘 만들면 집안 사람들이 그 음식 곁으로 모이게 된다. 음식은 소통의 기본이다. 거기다 가정의 화목은 덤이 된다. 인(人)의 자리다. 누차에 걸쳐 말하지만 인의 자리는 매우 중요한 자리다. 민중계급에서 지배계급으로 뛰어오를 수도 있어서다. 남편의 집안이 매사에 너무 엄격하면 집안 사람들이 헉헉댄다. 숨통이 조여 온다. 또한 집안이 엄격함이 없이 너무 너그러워도 안 된다. 며느리와 자식이 희희덕거리면 집안 꼴이 남사스럽다. 「사랑이 뭐길래」라는 주말 드라마가 MBC방송에서 인기를 끈 적이 있다. 김수현 작가와 박철 PD 연출로 만들어진 엄격한 현대판 자린고비 이 사장 집안과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박 이사 집안이 사돈을 맺으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코믹하게 그린 홈드라마다. 당시 평균 시청률이 59.6%라는 경이적인 기록이었다. 이 사장네(김혜자와 이순재, 그의 아들 최민수)와 박 이사네(김세윤과 윤여정, 그의 딸 하희라)의 서로 다른 생활 양식을 대비시키는 가운데 부모 세대의 전통적 가치관과 자식 세대의 자유분방한 가치관의 조화를 추구한 드라마다. 당시 세대갈등을 해결하는 모태가 된 드라마다. 上9 효사에도 나오듯이 가정을 잘 돌보려면 ‘유부위여(有孚威如)’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드라마였다. 천(天)의 자리다.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은 집안을 잘 다스린 사람들이다. 『대학』에 나오는 ‘수신체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다. 작은 집안도 분란을 만드는 사람이 어떻게 그보다 큰 나라를 다스릴 것인가.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았던 것 같다. 우리가 훌륭한 왕이라 일컫는 세종이나 정조도 그의 아들을 그렇게 잘 다스리지 못했다. 그래서 上9 효사에 ‘유부위여(有孚威如)’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즉 집안을 다스리는 최초의 원칙은 성실함(誠), 마음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孚), 그리고 사랑(愛)인 것이다.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야 즉, 풍화가인괘는 아버지의 엄격함과 어머니의 자애로움이 조화를 이루어야 집안을 평화와 행복이 가득하게 만들 수 있다는 평범한 지혜를 우리에게 준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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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가정의 화목은 성(誠), 부(孚), 애(愛)의 조화로부터-'여자의 일생'(풍화가인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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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No Problem’과 ‘Big Problem’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미국 환경운동가가 히말라야 기슭에서 티베트 승려와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파리 한 마리가 그녀의 찻잔 속에 빠졌다. 찻잔에 빠진 파리를 보자 그녀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티베트 승려는 그녀에게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단지 내 찻잔에 파리가 빠졌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평정심을 잃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승려는 ‘오오 찻잔에 파리가 빠졌군요!’라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노 프라블럼’이라고 강조했다. ‘아무 문제없어요. 건져 내고 마시면 되요.’하고 손짓으로 말했다. 티베트 승려는 몸을 숙여 그녀의 찻잔에 손가락을 넣고 조심스럽게 파리를 건져 밖으로 나갔다. 회의는 재개되었다. 얼마 후 환한 얼굴로 승려가 회의장으로 돌아와서 기쁜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파리는 이제 아무 문제없을 겁니다!’ 그는 문밖의 나무 잎사귀 위에 파리를 올려놓고 파리가 날갯짓을 할 때까지 지켜보았으며 조만간 무사히 날아갈 것이니 염려하지 말하고 말했다. 조에나 메이시가 쓴 『내가 사랑한 세상』에 나오는 일화를 유시화 작가가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라는 책에서 옮겨 쓴 이야기이다. 문제가 되는가 아닌가의 기준이 자신인가 파리인가에 대한 문제를 말한 것이다. 자기 자신은 노 프라블럼이지만 찻잔 속 파리의 입장에서도 노 프라블럼인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기중심에만 머물러 있는 관점은 ‘빅 프라블럼’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나’의 자리에 ‘너’와 ‘세상’을 앉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기준이 아직 ‘나’에게만 머물러 있다면 일차원적 인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유시화 작가는 말하고 있다. 오늘날 세상의 모든 문제는 이 자기중심의 기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도 했다. ‘난 괜찮아’에서 벗어나 ‘너도 괜찮은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방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초임 때 수업준비를 엄청나게 해서 열심히 가르쳤지만 학생에게 수업 후에 형성평가를 해 보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나름 열심히 준비했지만 그것은 지나친 욕심이었다. 학생의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업준비를 하지 않는 것은 ‘큰 문제’였던 것이다. 그 이후로 쉽고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업이 가장 좋은 수업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나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노 프라블럼’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중심에서만 머물러 있는 관점은 결코 ‘노 프라블럼’일 수 없다. 나 자신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존재가 소중함을 인식해야 한다. 사람은 모든 상황을 자기중심, 자기 관점에서만 인식하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자기중심에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나를 둘러싼 타인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진정한 ‘노 프라블럼’의 세상이 될 것이다. ‘빅 프라블럼’은 나 아닌 다른 존재를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세상에서 점차 몸집을 키워 갈 것이다. ▣ 김홍제 ◇ 충청남도천안교육지원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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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No Problem’과 ‘Big Prob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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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개과천선(改過遷善)은 바람과 번개처럼 실천해야 한다(풍뢰익괘)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대상전」에 풍뢰익괘를 보면 ‘바람과 우레가 같이 있는 모습이다. 바람은 좇는 성질이 있고, 우레는 움직임을 상징하고 있어, 아래의 움직임을 위에서 좇는 형상이 된다. 바람이 격렬하게 불면 우레의 소리도 신속하게 되고, 우레의 소리가 격렬해지면 바람도 격노하여 양자가 서로 도와가면서 그 세(勢)를 보태는 모습이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자기를 보태는 방편으로써, 타인의 선함을 보면 바람처럼 즉각 실천에 옮기고, 자신의 과실을 자각하면 번개가 치듯 즉각적으로 자기의 잘못을 고친다. 개과천선(改過遷善)이야말로 내 몸을 보태는 최대의 도다.’라고 되어 있다. ‘풍뢰익(風雷益)’의 ‘익(益)’은 皿(그릇) 위에 水(물)이 넘쳐 흐르는 모양이다. ‘보탠다’, ‘은혜를 베푼다’는 의미다. 아래를 더해줌이 진정한 보탬이다. ‘지배자의 부를 덜어내어 민중에게 보태준다’는 의미로 확대된다. ‘풍뢰익괘’의 ‘익’은 보태다, 더하다의 뜻이다. 윗것을 덜어서 아래에 보태는 것이니 국가가 큰 토목공사를 하여 주민에게 이익을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기보다 아랫사람, 자기보다 약한 위치의 사람을 돕는 일은 성의에서 하는 일이요 남의 강요나 또는 갚음을 바라고 하는 마음은 아닌 것이다. 이 순수한 정성이 남을 감동하게 한다. 그러기에 손(損)하는 것 같으면서 결국은 큰 이익을 얻는 것이 이 괘의 모습이다. 자기 것을 남에게 보태주려면 우선적으로 자기 것이 많아야 한다. 보태주려는 마음만 가지고서는 도와줄 수가 없다. 남을 도우려면 우선 자기가 열심히 살아 재산이나 실력을 쌓아야 한다. 오래전에 필자가 중국 계림(桂林)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거기에서 중국 사람들의 삶을 가까이서 보게 되었는데, 무슨 집의 지붕을 건설하는 현장이었다. 그런데 마을 사람 대부분이 그 일에 참여했다. 이상했다. 우리나라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일의 효율적인 면에서 능률이 거의 없었다. 노인들, 여자들도 그 일을 돕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렇게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도와야 그 건설에서 번 돈을 골고루 나눠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자리 창출 효과, 불교에서는 이를 자비라 한다. 자비는 동정심과 다르다. 동정심은 자칫 잔혹한 마음으로 변치된다. 동정심에 연민을 느끼면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가해자를 미워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비는 사물을 나와 평등한 존재로 사고하는 것이다. 사물, 예를 들어 노트북이 여기 있다고 하자. 노트북은 내가 원하는 정보를 다 처리해 주고, 나중에 쓸모가 없어서 버릴 때도 군소리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떠난다. 만약 노트북이 사람이라면 그는 성자다. 남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사물들을 대할 수 있을 때 자비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보다 못한 남을 위해 보태 준다는 것은 그들에게 선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선물할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옛날 정나라의 정승이 겨울에 찬물을 건너는 백성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자기의 수레로 건너게 하니 정나라 사람이 모두 칭송하였다. 그러나 맹자는 그러한 태도는 은혜나 인덕이 아니라고 질타했다. 백성들을 깨우쳐 다리를 놓게 해야지 임시방편으로 수레를 빌려주는 것은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이었다. 이와 비슷한 일은 유대인에게서도 일어나는데, 유대인은 성인식을 하고 나면 으레 그 가족이나 지인들이 돈을 모아 성인식을 한 사람에게 선물로 준다는 것이다. 그 돈은 자립할 수 있는 행상 밑천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독립이다. 잘 자란 교목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을 독립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 교목에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땅에 떨어져야 독립이다. 그런 의미에서 풍뢰익의 익(益)은 ‘노블리스 오블리제’와는 다른 것이다. ‘하늘은 에너지를 아래로 보내고 땅은 이것을 받아 사물을 낳으니 그 익(益) 되게 함이 비할 데 없다’고 『주역』은 말한다. 여기서 ‘이것을 받아 사물을 낳으니’라는 말에 주의하여야 한다. 하늘로부터 보탬을, 도움을 받지만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여 실력을 쌓아 자기와 같은 남을 도와주어야 한다. 남을 도와줄 때도 항상 생각해야 한다. 값싼 동정심이 아니라 도움을 받는 사람이 실력을 쌓아 또 다른 남을 도와줄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대동사회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러려면 개과천선(改過遷善)해야 한다. 개과천선이란 앞에서 말했듯이 자기를 보태는 방편으로써, 타인의 선함을 보면 바람(風)처럼 즉각 실천에 옮기고, 자신의 과실을 자각하면 번개(雷)가 치듯 즉각적으로 자기의 잘못을 고쳐야 한다. 풍뢰익괘는 말한다. 개과천선(改過遷善)은 내 몸을 보태는 최대의 도라고.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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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개과천선(改過遷善)은 바람과 번개처럼 실천해야 한다(풍뢰익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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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우리 사회가 단성(單性) 학교를 넘어서야 하는 이유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대한민국은 남녀가 분리된 단성(單性) 학교를 선호하는 이유가 매우 단순하다. 어찌 보면 그것은 매우 비교육적이고 비인간적이기도 하다. 왜냐면 남녀공학일 경우 이성교제를 우려하고 남학생이 여학생에 비해 내신 성적이 불리하다는 단순한 인식을 하는 학부모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단성 학교는 관리가 쉽고 상대적으로 면학분위기도 좋다고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학교 배정 후에 전학을 불사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그 교육열이 놀라울 정도다. 초등학교에서 14년 차 근무하는 송은주 교사는 최근 그의 저서 『다시 일어서는 교실』에서 다음과 같은 직접 인터뷰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좋은 대학 진학률도 높은, 꽤 이름난 학교였습니다. 그런데도 30명이 넘는 남학생들을 한곳에 몰아넣으니 매일, 매시간 살아남아야 하는 전쟁터 같았어요. 그냥, 애들이 미친 사람 같았어요. 약간은 동물적인 본능인지, 스트레스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쉬는 시간이면 늘 싸우는 애들이 있었어요. 저도 주기적으로 정말 미친 척하고 책상을 엎는 것 같은 난리를 피우지 않으면 먹잇감이 되어버리는 그런 환경이었어요.”(30대 남성 박재준) 이처럼 남성, 여성으로만 구성한 단성 학교는 억압적인 분위기가 압도적이고 학생의 스트레스와 교사의 억제력이 충돌하면 갈등이 더 심화됨을 말하면서 구체적인 단점을 아래와 같이 첨언하고 있다. “한 성만 모여 있는 학교에서 학창시절을 거의 다 보냈어요. 성별에 상관없이 어울리는 사회 경험을 전혀 하지 못하고 졸업을 하니 그 이후도 사회생활에 영향이 있어요. 성격에 따라서는 여자한테 말도 못 걸거나 그 여파가 큰 사람도 있고요. 공존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거예요.” 우리 사회는 이처럼 단성 학교의 후유증이 사회적으로 꽤 큰 편이다. 예컨대 남녀 간의 성 역할과 자연스러운 소통과 표현을 배우지 못하고 성인이 되어 그들이 만드는 사회는 여전히 소통과 공존이 어렵다. 학교에서 그랬듯이 사회에서도 약육강식, 각자도생의 법칙에 익숙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렇게 단성 학교를 운영하는 것일까? 그것은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과거 신문물을 도입하던 시기인 구한말에 여권 신장과 여성 교육에 집중하는 학교 환경이 필요했다. 이는 지금도 남녀 구분의 뿌리 깊은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보수와 폐쇄성이 강한 우리 교육은 이렇게 과거의 역사와 전통을 오히려 자랑하는 경우가 아직도 흔하다. 현재 우리 사회는 보다 문명화됨에 따라 남녀 구분의 이분법을 넘어 다양한 성정체성을 존중하고 있다. 이는 다양한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며 상호 존중하는 민주사회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남녀구분과 교복 착용을 철저하게 실행하던 시절에는 어른들의 인식은 학생들을 통제하여 헤게모니를 작동시키려는 경향이 강했다. 이는 학생을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성향이 아직도 21세기의 디지털 대문명 사회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적용된다는 것은 어쩌면 ‘고인 물은 썩는다’는 자연의 이치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언뜻 보아도 ‘변화만이 유일한 상수’라는 미래학자 유발 하라리의 진단에도 역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교육은 최근 특정한 성을 비하하는 말이 난무하고 혐오를 조장하는데 유야무야로 일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즉, 경직된 학창시절이 편협한 어른을 만드는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다 나은 교육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학생들의 희생을 넘어 교사는 깨어있어야 한다. 그것은 아직도 이런 단성 체제를 선호하는 교사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는 학교 현장에서 교사의 지도 방식이나 학교 방침과도 연계된다. 중요한 것은 남녀 학생의 차이를 이해하고 특성을 존중하며 개별화된 맞춤식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갈수록 단일성 집단의 정체성은 곳곳에서 깨지고 있다. 직업상으로도 남성으로 대표되던 군대, 경찰 조직이 단적인 예다. 이제는 양성으로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가운데 합리적인 공존의 원리를 배우며 상호 간에 인간존중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이는 학교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시작함이 순리이며 학교의 존재 이유나 목표, 다양한 교육과정 운영에도 꼭 필요한 시대적인 요구이자 흐름이다. 이제 일방적인 성별 분리에 의한 ‘고인 물 학교 정책’과 뿌리 깊은 ‘교육 가치’ 또한 변화만이 상수(常數)임에 틀림없음을 잊지 말자.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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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우리 사회가 단성(單性) 학교를 넘어서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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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죽음의 수용소에서'-간난의 시작과 인간의 의지(풍수환괘)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대상전」에 풍수환괘를 보면 ‘바람이 물 위를 간다. 모든 것을 흩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간난이 생긴다. 환난의 시기에는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야 한다. 그래서 흐트러진 인심을 다시 규합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풍수환(風水渙)’의 ‘환(渙)’은 ‘흩어지다’라는 의미다. 물이 흩어지는 모습이다. 어려움을 흩날려버리고, 험난한 고비를 근원적으로 풀어버리는 것을 일컬어 ‘환(渙)’이라 한다. 능히 험난을 풀어버릴 수 있으므로 형통하다. 이 괘사에도 형(亨), 이(利), 정(貞)이 있다. 괘의 격이 높다. 풍수환괘를 보여주는 문학작품으로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에세이가 있다. 이 에세이의 작자인 빅터 프랭클은 유대인으로 정신과 의사다. 그는 20세기 인류 최대의 비극인 홀로코스트를 경험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수감되었다가 1945년 종전과 함께 극적으로 수용소에서 해방된 인물이다. 정신과 의사답게 아주 담담하고 사실적으로 수용소 생활에서의 고통과 그 고통을 이겨 내는 과정들을 기술하고 있다. 죽음의 수용소로 떠나기 위해 유럽 전역에서 온 1,500명의 유대인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하자 그들 중 90%는 곧장 가스실로 갔고, 나머지 10%의 사람들은 짐승처럼 온몸이 벌거벗겨진 채 털이 깎이고 이름이 아닌 수감번호로 불리며 나치 감시자들의 폭력과 욕설에 시달리게 된다. 가축우리 같은 수용소에서 추위와 굶주림과 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하루 한 번 배급되는 빵과 묽은 수프가 그들이 먹는 음식의 전부였다. 이제 그들은 자신이 갖고 있던 명성이나 재산은 더이상 아무 의미가 없고 학대당하는 몸뚱이 하나만이 그들이 가진 전부가 되었다. 그들은 ‘집행유예 망상’이라는 정신상태가 된다. 수용소의 생활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고 믿고, 금세 이 고통이 끝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게 된다. 그러나 수감자들은 시궁창 오물을 치우는 일에 배정되어 똥물이 얼굴에 튀어서 닦으면 감시자들이 가차없이 주먹질을 해대고, 조금만 힘든 모습을 보여도 동료 수감자들 앞에서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제 ‘무감각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2시간 전에 자신과 얘기를 나누던 동료 수감자의 끔찍한 시체를 보고도 바로 수프를 먹을 수 있게 되고, 맨발로 눈길을 걸어야 하는 동료 수감자가 어린애처럼 엉엉 우는데도 아껴둔 빵을 개걸스럽게 먹느라 정신이 없다. 동료 수감자보다 건강하게 보여서 가스실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매일 깨진 유리로 면도를 하기도 한다. 이들은 오로지 생존의 문제에만 집중하게 된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지옥같은 순간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여전히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른바 고통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다. 첫째로 과거로의 도피, 둘째 어딘가 있을 나의 아내 생각, 셋째 정신적 영역으로의 도피다. 필자도 군대에서 겨울에 혹한기 훈련을 받을 때인데 밤에 보초를 서야 했다. 날씨가 너무 추워 2시간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때 대학 시절과 시골 생활 등 과거를 회상했다. 또한 미래의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면 2시간이 훌쩍 가버린 기억이 있다. 또한 논산 훈련소 훈련병일 때 배가 너무 고파서 낮에 나눠준 건빵을 먹고 싶어 주머니에 한 줌 건빵을 넣고 화장실로 갔다. 문을 잠가 놓고 건빵을 개걸스럽게 먹었다. 3분이 지났다. 선임하사가 화장실로 왔다. 점검했다. 필자는 그것도 모르고, 건빵 먹는데 정신이 팔려 목이 매이는 것을 참으며 꾸역꾸역 건빵을 허겁지겁 먹고 있었다. 갑자기 화장실 문이 활짝 열리며 문에 채여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건빵이 여기저기 흩어져 버렸다. 선임하사에게 끌려 나온 뒤 취조가 시작됐다. “사회에서 뭐하다 왔냐?”, “왜 화장실에서 건빵을 먹었나?” 등등을 묻고, 필자는 간단히 대답했다. “예, 사회에서 교사하다 왔습니다.”, “예, 배가 고파서 그랬습니다.” 선임하사는 필자를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면서 “내일 공급병을 뽑는데, 네가 손을 먼저 들어라.” 필자는 공급병이 뭘 병사인지도 모르고 손을 번쩍 들었다. 이후 공급병이 되어 훈련병들의 식기, 숟가락, 젓가락, 총에 꽂는 칼을 창고에서 공급받아 훈련병들에게 나눠주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 대신 공급병은 대부분의 훈련에서 예외가 되었다. 그 후 마음 편히 훈련병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인간은 고통을 가져다주는 외부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그 고통을 자신의 태도에 따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련으로부터의 자유는 본인의 의지에 따라 달라진다. 성자가 될지 돼지가 될지는 결국 본인의 삶에 대한 의지로 결정나게 된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는 니체의 말처럼 수용소에서 꾼 꿈과 나의 미래에 대한 생각이 지옥같은 수용소에서도 살아날 수 있는 힘이 되어준다. “인간은 가스실을 만든 존재이기도 하지만 가스실에 들어가며 주기도문을 외울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줄지 기대하지 말고, 우리가 삶의 과제들을 어떻게 책임져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는 문학작품이다. 우리네 인생은 모든 것이 모일 때도 있지만 모든 것이 흩어지기만 할 때도 있다. ‘흩어짐’ 그 자체는 우리에게 긍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우리 삶의 과제는 이러한 흩어짐 속에서 오히려 간난을 흩날려버리고 건공입덕(建功立德)하는 데 있다. 빅터 프랭클은 정신과 의사였다. 그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오게 되자 그의 인생은 흩어지게 된다. 가족을 잃고 자신의 쌓아온 명예와 부를 모두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러한 지옥 속에서도 사람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명확히 깨닫게 되자, 그는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풍수환의 괘사에도 ‘과감한 행보의 모험을 감행해도 이(利)가 있다’고 했다. 풍수환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작을 찾을 수 있는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환(渙)은 어려움을 흩어버리는 것을 나타내지만 이는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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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죽음의 수용소에서'-간난의 시작과 인간의 의지(풍수환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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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우리 교육에 대한 진단과 처방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가 시사하는 바
-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대한민국의 진보교육학자인 중앙대 김누리 교수는 일찍이 독일 유학의 경험과 수 차례의 일시적 체류를 통해 독일 교육에 대한 연구와 실태를 목격하고 이를 몇 권의 책을 출간했다. 또한 수많은 강연을 통해 우리 교육개혁에 던지는 줄기찬 함의는 어느 진보학자를 능가하고 있다. 한때는 전임 촛불정부에서 국무위원과 정부 각료를 대상으로 우리 교육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 땅에 진보학자들이 많지만 그처럼 집요하게 선진 독일 교육의 실태를 공개하고 이를 통해 우리의 교육이 살 길을 제시하는 실천적인 지식인은 그리 흔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최근에 유럽의 68혁명과 그 일환으로 1970년 독일의 교육개혁에 의거하여 ‘신독일인’의 양성과 그로 인해 놀라운 교육 선진국으로 변모한 독일의 교육에 대한 진단과 처방인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해냄출판사, 2024)를 출간하였다. 이는 이전의 저서를 기반으로 더욱 구체적이자 상세한 설명을 곁들인 독일과 대한민국의 교육 비교 저서로 이 땅의 교육자들과 교육계의 관료들이 읽고 정책 개발 및 새로운 교육의 구현에 참고할 매우 유용한 자료이기도 하다. 김 교수는 우리 교육의 패러다임을 어떻게 전환할지를 크게 3가지 관점에서 제안하고 있다. 첫째, 교육의 원리 측면이다. 능력주의(Meritocracy)가 만능이 된 우리 교육이 이제는 인간에 대한 존엄주의(Dignocracy)로 탈바꿈해야 함을 강조한다. 능력주의가 낳은 부작용은 오늘날 우리 교육이 ‘반인권적’이고 ‘반교육적’인 모습으로 정착된 근본 이유라 할 수 있다. 최근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한국인’이라는 진단은 어느 한 사람만의 의견이 아니다. 이제 우리 교육은 존엄한 인간이 유능한 인간보다 앞선 가치가 되어야 한다. 왜냐면 존엄성은 본질적 원리이고, 유능성은 기능적 원리이기 때문이다. 둘째, 교육의 목표이다. 한때 우리는 교육부를 인적자원부로 개칭한 적이 있다. 이는 경제 분야의 신자유주의를 교육에 접목하여 인간을 하나의 자원으로 판단하고 이를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키워야 한다는 정부의 철학이었다. 이제 우리 교육은 학생을 경제 사상의 연장선에서 바라보는 인적 자원이 아니라 민주시민을 기르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더 이상 자유시장의 요구가 아니라 민주사회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야 성숙한 사회와 인간으로 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교육의 방식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시(國是)가 되어 버린 경쟁은 연대와 협력으로 전환해야 한다. 즉, 경쟁교육의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디지털 대문명을 낳은 4차 산업혁명의 요구 또한 ‘경쟁형 인간’이 아니라 ‘융합형 인재’를 필요로 한다. 왜냐면 타인과 소통하고 협력하고 연대하는 능력을 가진 인간이 융합이라는 현대적 창조를 잘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교육은 열등감이나 우월감에 젖은 불행한 ‘수직형 인간’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존중하는 행복한 ‘수평형 인간’을 길러내야 한다. 이상의 교육 패러다임의 전환은 이제 우리에게 더 이상의 꿈과 불가능한 목표가 아니다. 우리는 빈곤의 상징국가이자 식민지를 경험한 개발도상국에서 꿈에 그리던 선진국으로 진입하였다. 2021년 7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195개 회원국은 만장일치로 한국을 선진국으로 승인하였다. 하지만 성공의 덫에 걸린 대한민국은 주입식 경쟁 교육과 시험능력주의에 발목이 잡혀 낡은 교육제도를 과감히 탈피해야 한다는 것이 미래학자나 세계 석학들의 중론이다. 그 방법은 바로 김누리 교수가 진단하고 처방한 방식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경쟁에 의한 한국식 대학입학시험과 계급의 세습을 부추기는 SKY 중심 대학서열을 폐지하여 13퍼센트를 차지하는 국립대의 네트워크화 및 87퍼센트를 차지하는 사립대의 공영화를 주장하고 있으며 국가가 책임져야 할 교육이 세계에서 가장 비싸기로 악명 높은 대학등록금의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이는 결코 현재 대한민국의 경제 환경에서 이상주의적 허무맹랑한 백일몽이 아니며 국민과 국가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한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일부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극복하고 대다수 국민의 공감을 전제로 한 강력한 개혁을 통해 교육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이루어 21세기에 적합한 새로운 교육을 시작해야 할 때임을 잊지 말자.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 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공동저자 ◇ 학습지 [노스트라다무스] 집필진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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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학의 교육칼럼] 우리 교육에 대한 진단과 처방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가 시사하는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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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스크루지 효과(scrooge effect)
-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밤하늘을 보다가 저 많은 별이 있는 우주에서 나는 어떤 존재일까를 생각한 적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우주에서 인간 개인은 먼지보다 작은 존재다. 오직 존재하는 그 자체 로 가치와 의미가 있다. 별 하나가 아니라 크고 작은 무수한 별이 함께 어우러질 때 더 아름답다. 동화의 이야기처럼 우리도 죽으면 저렇게 하나의 별이 될까. 죽음이 임박한 것과 같은 큰 고비를 넘기고 나서 이타적인 태도로 바뀌는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스크루지 효과’라고 한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 주인공 스크루지는 수전노였다. 그는 이웃과 단절한 채 돈만 생각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언제나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남 등쳐먹기 좋아하고 교활하고 악랄하고 치사하고 탐욕스럽고 추잡한 늙은이’였다. 스크루지는 크리스마스 이브 날 7년 전 죽은 동업자 친구 말리 유령의 도움으로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보여주는 유령을 차례로 만난다. 죽은 후 비참한 취급을 받는 게 누구인지 모르던 스크루지가 자신의 묘비를 보고 그 망자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알고 큰 충격을 받는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잘못 살았는지를 깨닫고 개과천선하여 타인을 생각하는 따뜻한 사람이 된다. 세상을 떠날 때 더 많이 일하지 않았다고 후회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더 사랑하지 못함’을 후회한다고 한다. 누구든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살다가 세상을 떠난다. 어떤 일을 하고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기억을 남겼느냐가 그 사람에 대한 정체성을 결정한다.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 지금 있는 교육현장에서 우리는 얼마나 학생을 사랑하고 있는가. 스크루지는 돈만을 위해 살아왔기에 결혼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렸을 적에는 책을 좋아하는 순하고 착한 소년이었다.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돈을 계속 벌어야 했으며 돈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성장한다. 부모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학교에서도 가난하다고 외톨이가 된다. 스크루지는 돈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반드시 부자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한국 사회의 가정이 건전한 교육적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삭막한 경쟁 속에서 사랑이 부족했던 학생은 어릴 적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지 못하고 경쟁 속에서 경제적 성공이 유일한 성공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사랑에 인색한 ‘현대판 스크루지’가 이 사회에 점점 많아지는 것을 보고 있다. 교육은 어린 영혼들의 앞날을 밝혀주는 보람 있는 일이다. 힘든 교육현장의 현실이 앞에 있지만 이타심을 발휘해서 ‘착한 스크루지’를 많이 육성해 보자. 마음을 바꾸면 상황도 바뀐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다. 학교가 즐거운 곳이 되려면 학생을 사랑의 시선으로 보자. 하루의 기분도 바뀔 것이다. 굳이 죽음이 임박해서야 깨달을 필요가 없다. 만약 내일 죽는다면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 잠시 서서 ‘나만을 위한 사랑’에서 ‘타인을 위한 행복’도 생각하는 삶이 되었으면 한다. ▣ 김홍제 ◇ 충청남도천안교육지원청 중등교육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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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제의 목요칼럼] 스크루지 효과(scrooge eff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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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예비는 미래를 밝게 비추는 등불(뢰지예)
-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우리 삶은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어떤 일이 우리에게 다가올지, 미래에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예측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 해답은 ‘예비’라는 개념에 있다. 「대상전」에 뢰지예괘를 보면 ‘우레가 땅속에 갇혀 있다가 지축을 박차고 뛰어나와 호령하는 모습’이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레의 기운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이미지다. 예술이란 이렇게 뭉쳐있던 감동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것이다. 음악이 없으면 예가 성립하지 않는다. ‘예(豫)’는 북을 본뜬 ‘予(북여, 줄여, 미리예)’와 ‘象(코끼리 상)’으로 이루어졌다. 북(予)을 왔다갔다 하며 옷감을 짤 때는 미리 무늬를 예상해야 하고, 코끼리도 죽을 때를 예감해 미리 자기들의 공동 무덤으로 찾아가기 때문에 ‘미리’라는 뜻이 되었다. 예괘의 ‘예’는 예비하다, 준비하다는 의미와, 기쁨을 나타내는 열락의 의미가 있다. 예비란 간단하게 말하면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삶에서 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그렇다. 홍수가 올 것을 예측하고, 미리 준비한 노아의 행동이 그 이야기의 핵심이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노아는 배를 만들고, 동물을 태워 자신과 동물들의 생존을 확보한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대재앙이 다가올 때 예비와 준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 준다. 예비를 통해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시험을 보기 전에 준비를 하면 좋은 성적을 얻을 확률이 높아진다. 금융 상황에서도 재정 계획과 투자를 예비하는 것은 안정적인 재정 상태를 만들어 준다. 또한, 재난 상황에서 음식과 물을 미리 준비하고, 비상 연락 수단과 의약품을 준비하는 것은 생명을 지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예비는 불안한 미래에 대한 안전망을 구축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노력이다. 하지만 예비는 더 나아가 도전정신과 자신감을 키우는 데도 기여한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 대비하고, 미래를 예상하며 계획을 세워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더 강해지고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다. 필자의 청춘시대. 국어교사 시절. 교재 연구를 철저히 하여 다음 수업에 대비가 되었을 때는 수업 시작종이 왜 그렇게 늦게 치는지, 빨리 교실로 들어가 수업을 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마치 경주마가 트랙으로 들어서서 앞발을 들어 올려 막 질주하려는 바로 그 순간처럼 수업이 기다려졌다. 예비를 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또한 걱정이 줄어든다. 자신감이 생긴다. 예비를 반복하게 되면 습관이 된다. 결국 인생이 자신감으로 가득차게 된다. 자신감은 도전정신을 가져오고, 도전정신은 긍정적 성과를 가져다준다. 그러면 인생이 바뀐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크면 행동으로 옮길 때 조심해야 한다. 인간은 멀리 볼 수 없다. 기껏해야 2.0의 시력의 거리만큼만 볼 수 있다. 그래도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는 인간의 손엔 각자의 등불이 들려 있어 그 등불의 밝기만큼 앞을 비춰주고, 그 비춰주는 범위 안에서 안개와도 같은 앞길을 조심조심 걸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 한다.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사라지게 할 치트키는 바로 예비다. 유비무환이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미래를 대비하는 데 방해 요소가 아니다. 예비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안정성을 제공하며, 미래의 불안감을 줄여 준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에는 더 나은 결정을 내리고, 더 나은 결과를 얻게 된다. 우리 삶의 여러 측면에서 예비는 미래를 밝게 비추는 등불이 되고, 그 결과로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따라서 예비는 우리 삶에서 꼭 갖추어야 할 중요한 도구 중 하나다. 뢰지예괘는 예(기쁨)의 종류를 5가지로 말하고 있다. 먼저 명예(鳴豫)다. 술에 취해 고성방가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혼자만의 기쁨이 아니라, 만인의 기쁨이어야 한다. 소인과 군자의 차이다. 다음은 62의 개우석(介于石)이다. 지조와 정절을 지키는 고고한 삶의 태도다. 중국의 장개석 총통의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 다음으로 우예(盱豫)다. 눈알을 굴리면서 아첨하는 모습이다. “딸랑딸랑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이렇게 남에게 아첨하는 행동으로 기쁨을 누리는 자는 지배계급이 될 수 없다. 지배계급이 되더라도 피지배계급으로 언제든지 강등될 것이다. 유예(由豫)는 정당한 사유로 말미암아 즐거운 기쁨이다. 크게 얻음이 있고 성의를 다하여 자기의 소임을 밀고 나가라. 그러면 지배계급으로 승격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6(上6)의 효사는 명예(冥豫)다. 지배계급이 되어 오래도록 자리를 보존하면 안일의 열락에 빠지기 쉽다. 마치 아편쟁이들처럼 모여서 아편을 태우며 혼미스런 기쁨에 빠져든다. 여기서 『주역』에서는 ‘이런 때는 우레처럼, 죽비처럼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 박차고 일어나야 한다’고 지혜를 말하고 있다. 그렇지 못하면 저 밑바닥으로 떨어진다. 날개로 하늘 높이 날다가 날개가 부러져 추락하는 모습과 같다. 상급의 지배계급자들이 늘 경계해야 할 기쁨이 바로 명예(冥豫)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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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균의 周易산책] 예비는 미래를 밝게 비추는 등불(뢰지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