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7(화)
 

[교육연합신문=文德根  漢字語敎育硏究所長]

우리 사회에는 언제부터인가 외국어를 외래어로 포장해서 쓰고, 우리말을 써도 충분한데 대화 중간에 ‘외국어’를 섞어 쓰는 바람에 계층 간 , 집단 간 소통이 안 되고 있다. 더 나아가 소통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는 안타까움과 불안감마저 밀려온다.

 

이제까지 우리 사회에서 영어는 성공의 언어로 인식되어 왔다. 특히 세계화가 밀려오면서 영어의 무분별한 사용은 더욱 극성이다. 모든 분야에서 영어 낱말을 온통 남발하거나 엉터리로 갖다 붙여 사용한 나머지 한국인지 외국인지도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전담반’이라 하면 될 것을 ‘TF’, ‘왕따’를 ‘패싱’, ‘귀띔’을 ‘tip’, ‘흉내 내는’ 것을 ‘코스프레’, ‘자체 감사’를 ‘셀프 감사’, ‘학교 앞’이라고 하면 될 것을 ‘스쿨 존’이라 쓰는 등 전문가도 알아먹을 수 없는 지경이다. 

 

그래서 법정 스님이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것은 말 뒤에 숨은 뜻을 모르기 때문이다. 엄마들이 아기의 서투른 말을 알아듣는 것은 말소리보다 뜻에 귀 기울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라도 인문학 열풍이 불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인문학이란 삶 자체에 대한 탐구이기 때문에 말과 글의 어원을 아는 것은 인간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글의 어원은 상당 부분을 漢字에 말미암고 있다.

 

漢字에 있어서 말은 소리요, 글은 그림이며, 뜻은 이치이자 마음이다. 이 세 가지는 바람직한 이치로써 밝은 세상을 이끄는 축이 된다. 그래서 우리말의 바탕인 漢字의 語源을 살펴 말과 글에 담긴 이치를 깊이 파악하는 것이 먼저이다. 옳은 말과 옳은 글이 옳은 뜻으로 새겨질 때 바람직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말의 70~80%가 한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한자를 모르면 개념이 정립되지 못한다. 또한 한자는 철학, 역사, 문화를 담고 있는 글자인 것이다. 그런데 한자를 공부하면서 훈과 음만을 배우고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 현실이다. 예를 들면, 中庸이라는 한자어를 가운데 중(中,) 떳떳할 용(庸)이라고 읽고 쓰면서 그 속에 담긴 뜻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中이라는 글자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부터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中이란 과녁판을 설치해서 그 가운데에 새(鳥) 등을 그려놓고 맞추는 것이다. 거기에다 맞추기도 하지만 과녁을 뚫는 것을 貫革이라고 하다가 우리말로 과녁이 된 것이다. 그래서 과녁에 적중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中이란 가운데이면서 맞추는 것을 의미하면서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까지를 함의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운데’라는 말은 ‘中央’, ‘中心’의 뜻을 갖는다. ‘中心’은 누가 뭐라고 한다고 해도 움직이지 않음을 의미하고, 위 아래로 연결하면 ‘忠’으로 나의 중심을 바로 잡는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공변된 마음, 즉 사사롭지 않고 공정하고 정당한 마음을 일컫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中心, 즉 忠을 잡으면 누구에게나 恕(용서할 서), 즉 똑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중’이라고 말하면 ‘스님, 중요하다. 무겁다’ 등의 뜻으로 생각하게 되지만 ‘中’, ‘重’으로 쓰면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요즘 길을 걷다보면 기관의 이름을 한글로 쓰고 그 밑에 영어로 쓰는 경우를 자주 본다. 기관의 이름은 그 기관이 무엇을 하는지를 국민들이 알도록 해서 쉽게 민원을 해결하는 것이 먼저다. 그렇게 하려면 무엇이 우선인가? 한글로 써진 글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漢字語를 병기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뜻글자라는 것은 이치를 정확히 관찰해서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거의 말과 실천으로 판단한다. 조선시대 최고의 독서광인 김득신은 한유의《사설》을 1만 3천 번 정독했으며, 《노자전》과 《중용》의 서문을 2만 번 씩 읽었고, 《백이전》은 무려 11만 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자신의 부족함을 책에서 찾으려고 한 독서 대가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책만 읽은 것도 중요하지만 읽은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즉 말과 행동에 담겨져야 하는 것이다.

 

‘신독’이라는 말도 ‘신독(愼獨)’이라고 써야 그 의미가 명확해서 보는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안내할 수 있는 것이다. 愼을 파자하면 忄(心: 마음 심)과 眞(참 진)으로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즉 진실한 마음을 일컫는 것이다. 속담에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듯이,  요즈음은 온통 새와 쥐로 덮인 세상이 되었다. 즉 CCTV 등이 온 세상을 뒤덮고 녹음을 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漢字는 지금도 살아 숨 쉬는 우리말인 것이다.

 

愼獨은 중국고전 <대학>과 <중용>에 나오는 말로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혼자 있을 때 더욱 삼가고 경계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중국계 미국인인 쑤린 하버드대 교수가 이 愼獨을 '하버드대 정신'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쑤린 교수는 빌 게이츠와 전설적인 미식축구 선수 제리 라이스를 예로 들면서 하버드 정신은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자신의 행동을 단속하고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 도덕이나 규칙에 어긋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2000년 전 한자문화권에서 통용되던 덕목이 이 시대에 더 요망되는 가치로 자리를 잡은 것이지 않는가?  

 

나무의 뿌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닌 것처럼, 한글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바탕에는 한자가 있어서 그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현재의 한글 전용 정책은 그 의미를 그냥 지나치면서 읽을 줄은 알지만 뜻을 모르는 사람을 길러내는 愚民化 정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두 번째를 마다하면 첫 번째의 수고로움마저 잃게 되며, 두 번째를 하게 되면 잃어버리는 것과 두 배로 늘어나는 차이가 있다는 삼국지 유비의 말처럼 한자를 공부하지 않으면 한글의 위대함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명심할 때다. 말과 글의 근본에 대해 나지막이 물어보자. 말과 글은 무어라고 대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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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말과 글 그리고 세상 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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