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7(화)
 

 [교육연합신문=文德根  漢字語敎育硏究所長]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까닭을 물어보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인 사회, 저 자리가 생겨난 이유를 묻는 사람이 이상한 나라의 사람으로 여겨지는 이 사회, 그 자리에 가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린 사회, 자신이 근무하는 기관의 존재 이유는 알 필요조차 없는 사회로 진행되고 있는 현실, 이제는 너무 잘못 나가 다시는 바름으로 돌아올 수 없는 현실에 허무함을 너머 비참함까지를 이야기 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한다.

 

公私의 구별이 없는 사회, 세금으로 주어지는 자리에서도 公的이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고, 당위성보다는 주어지는 안일만을 추구하는 인식이 보편화되고 당연시 되어지는 사회 현상에 길들여지고, 더 나아가 그러한 현상에 아파하고 걱정하는 사람이 오히려 바보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들 한다. 근본 이치는 알지도 모르면서 겉치레만 번지레한 말만 넘치는 ‘말의 성찬’, 더 나아가 말과 행동을 달리하는 사람일수록 ‘知行合一’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중요한 자질로 ‘가슴에 품은 뜻, 머리에 스치는 생각,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다른’ 사람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말은 반복되어 몸에 체화되어 가치관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글로 그 사회의 건강함과 미래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터인가 뜻을 무시하는, 뜻도 모르는 정책 추구로 말과 글, 그리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건전한 가치관의 선순환이 단절되고, 교육 현장에서도 뜻은 모른 채 일방적이고 무비판적으로 외우는 배움의 현장으로 내몰고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무조건 외우는 교육 병폐 속에서 말의 뜻을 모르는 무의미하고 건조한 대화는 사람을 멀리하게 하고 가족 간의 자리도 밀쳐내는 이 비극을 언제까지 지속할 것인가?

 

학문이란 만물이 시공간 속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밝히는 것이 다. 세상사는 의미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이 작동하는 근본 이치를 알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에는 의미가 가득 차 있다. ‘뜻’이란 사람이 그것을 듣거나 보면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은 뜻에 의해 미래가 결정되는 법이다. 사람이 안다는 건 뜻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하는 것도 뜻을 알고자 함이다. 그 뜻도 자신만의 메아리어서는 안 된다. 말과 행동에 객관성이 심히 결여되어 있다면 생명력이 없으며 소통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말과 글자를 배울 때부터 글과 낱말의 어원을 스스로 찾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서로가 뜻을 공유해서 감정과 생각이 오고갈 수 있는 것이다. 세계에서 우리 학생들의 문해력이 꼴찌라는 사실을 걱정하는 어른의 말씀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잊혀야 할 사람으로 인식되는 이 현실이 언제까지 가야할 것인가? 또 언제까지 참아야만 할 것인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이렇게까지 가슴을 먹먹하게 한 적이 없다. 혼자 아무리 울부짖고 기막혀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내 삶이 증명하고 있다. 말과 글 각각이 보여주는 正名을 깊이 깨닫고, 거기에다 실천의 깨달음이 지혜로 승화하여, 경험의 중요성을 통찰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날은 올 수 없는 것인가? 우리는 그러한 지도자와 덩실덩실 춤추는 국민은 될 수는 없단 말인가?      
 
뜻을 모르는 자는 목표를 내세워봐야 객관적으로 큰 뜻은 이룰 수 없는 법이다. 인생의 뜻을 알아야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많은 뜻을 알고 있어야 남이 가진 뜻도 알 수 있게 된다. 인간은 공부를 많이 할수록 가지고 있는 뜻이 점점 달라진다. 그래서 훌륭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은 뜻이 다른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왠지 풀리지 않는 숙제가 있다. 우리 사회는 많이 배운 사람, 자리가 높은 사람일수록 보통 서민들은 도무지 알아먹을 수 없는 말과 글을 쓴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내가 알기로는 배운 사람, 특히 지도자는 세상의 이치를 깊고 넓게 배워서 국민들이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배운 사람이 자신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말과 글을 사용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배움의 자세인지 묻고 싶을 뿐이다.

 

특히 요즘은 모든 국민들이 ‘막말 대잔치’ 행진에 참여하는 배우가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더하여 무서움까지 든다고 한다. 이치에 부합하지 않는 말을 해놓고 전혀 부끄러움과 반성도 없는 無恥의 사회로 나나아고 있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저질러 놓고, 유명 변호인에 의뢰하여 무죄를 받으면 당당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 자신의 양심도 법의 심판으로 정의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교육은 밝음을 지향하는 것이다. 말과 글에서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사용해야 한다. 말과 글을 처음 만들었던 사람들의 뜻은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화평하게 살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교육 현장에서도 왜 말과 글이 만들어졌으며, 그 이유는 무엇이고, 그런데 왜 이렇게 말과 글로 세상을 어지럽히게 되었는지를 묻고 답하는 장이 교육으로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선 되어야 할 것은 가르치는 사람과 어른들이 먼저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어른다운 어른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 가슴 아파할 어른도, 가르칠만한 어른도 없게 되는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 두렵지 않은가? 
  
‘참는다.’는 말은 어려운 중에서도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참’이냐 하고 끊임없이 ‘참’을 찾는다는 말이다. 즉 ‘참을 찾는다.’가 ‘참는다.’는 말이다. ‘참’을 이미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게 되면 참지 못하지만, 참을 가치가 있으면 참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누구를 위해 참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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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는 만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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