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6-11(목)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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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령이 되는 순간인 대전환의 시기엔 그 어느 때보다 섬세한 지식과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닌 지도자가 필요하다. 지도자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찾지 않고 그 사회와 시대가 앓는 병을 함께 아파해야 한다. 시대의 병을 시대 문제라고 하고, 그 병을 치료하는 의지가 통치 내지는 정치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지도자는 어떠한가? 또 우리 조직, 단체의 지도자는?


현재 우리에게 보이는 지도자는 ‘운명공동체’의 지도자가 아니고 ‘이익공동체’의 대표자라는 느낌이 든다.’ 일인자로서 책임과 반성이 없고 교만하며 무절제한 자신감만 있는 ‘아무 말, 행동 대 잔치’라는 연속극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보통 우리가 민주주의 정치에서 채택하는 어떤 규칙, 관행, 문화가 적용되지 않는 지도자를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옌쉐퉁 중국 칭화대 국제관계연구원장(72)은 이런 세계적인 현상을, “앞으로 10년 동안 탈세계화는 더 심해지고, 인권은 더 억압되며, 전제 지도자는 더 많이 나타날 겁니다.”라는 말로 변론했다. 


갈등 부추기와 편 가르기, 혐오가 자신의 존재감을 키우는 기본적 장치가 되고, ‘탈진실이라는 배경과 맞물려 편 가르기와 상대를 죽이는 행태가 도를 넘고, 상대를 교묘히 헐뜯는 낱말 찾기 대행진의 기획처가 되어버린 우리의 현실’, 이것이 우리 지도자들의 민낯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참 뻔뻔한 세상이다. 부끄러움을 모른다. 의롭지 못한 행위에 대해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자신에게 이로우면 그만이라는 태도를 취하는 이들이 널린 사회다. 그들을 추종하는 세력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마음이 이들을 떠난 지 이미 오래다. 그저 깃발을 따라 좌충우돌할 뿐이다. 특히 정치 지도자들만 그렇고 다른 지도자들은 그렇지 않은가? TV 뉴스에 나오는 사람도 그런그런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아첨과 변신의 최전선들 달리는 사람이다.’라는? 


논어 위정편에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라는 글이 있다. 이 내용을 축약한 것이 ‘유치차격(有恥且格)’이다.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품격이 갖추어진다’는 의미다. 그러기 위해서 정치는 덕(德)이 있어야 하고 교육은 예(禮)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지금 우리 사회의 이 같은 모습을 경계한 공자의 예견이었다. 논어 위정편의 부끄러움(恥)이란 낱말을 보며 지금 우리 사회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회’라는 생각을 해본다. 거리낌과 두려움이 없는 사회를 일컫는다. 無忌憚의 사회다. 


덕치를 하지 못하고 유치한 싸움만 일삼는 정치도 책임이 크다. 윤리와 도덕을 바탕으로 한 예(禮)를 가르치지 못한 교육의 책임은 더 크다. 결국 예(禮)를 가르치지 못한 사회가 직면할 모습이 지금 우리 사회다. 공자가 예견한 옳은 사회와 정반대에 와있다.


사회의 근간을 세우는 기본은 말과 문자이다. 따라서 말과 문자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 말에 대한 기초적인 개념에 대한 이해를 위한 교육이 절실하다. ‘말’을 왜 ‘말’이라고 하지? 하는 물음의 일상화가 필요하다. ‘말은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라는 생각이다.


문제는 이제 시작이라는 것이다. 학교 교육이 잘못됐다는 것을 사회가 인지하고도 바꾸거나 고치지 못한 것이 이미 30년이 넘었다. 문제는 지금 당장 교육이 바뀌어도 상식이 정상화되는 데도 최소한 20~30년이 걸리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아직도 학교 교육이 인성교육은 고사하고 교권 회복도 하지 못하고 있는 처지다. 이제 사회가 인성교육이 무너진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 시작했다.


민본사회 건설을 꿈꾸었던 조선의 대유학자 정도전에게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만 올바르게 사는 것이냐 하는 인간론적 물음’이 그의 삶을 집요하게 지배했다. 그에게는 삶의 철학이 정권의 쟁취보다 앞서는 것이었다. 사유의 결론은 지도자의 위(位)는 인(仁)으로만 확보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치자(治者)가 치자의 위치를 보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천지가 끊임없이 만물을 생성하듯이, 仁한 마음을 지닐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작금의 지도자들은 삶의 철학보다는 정권의 쟁취가, 국민의 삶보다는 지도자 자신의 안위와 부귀, 더 나아가 아첨꾼들과의 동거동락, 연회가 더 중요하다. 불신의 정권이 지속되는 유일한 방법은 국민을 전쟁의 위협을 느끼게 몰고 가는 것이라는 얄팍하고 낯 뜨거운 지식을 만천하에 과시하고 있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다.  


정도전은 말하고 있다. 단 한 번이라도 그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참으로 크게 걱정할 만한 일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아래에 있는 뭇 백성은 지극히 약하게 보이지만 힘으로 겁줄 수 없는 것이요, 지극히 어리석게 보이지만 지혜로써 속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얻으면 그들은 복종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그들은 곧 이반해버린다. 떠나고 붙는 것이 터럭만큼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옌쉐퉁 중국 칭화대 국제관계연구원장(72)은 갈등을 조장하는 정부 정책에 용감하게 목소리를 내는 시민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독재자의  정책 방향을 바꾸라는 일반 시민의 요구도 거세져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향후 10년간 국제질서는 어떤 모습으로 진행될까?’라는 물음에 대해서, “탈세계화는 더 심해지고 국제규범을 어기는 경우도 늘어날 것이다.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일이 더 많아지고 전제 지도자는 더 많이 나타날 것이다.” “일단 좋은 성품을 가진 최고지도자가 당분간 많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변화를 바란다면, 먼저 정책이 곳곳에서 벽에 부딪혀야 한다. 정책 방향을 바꾸라는 사회적 요구가 거세져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子曰: ”舜其大知也與! 舜好問而好察邇言. 『繫辭傳』6-1

道行, 道明의 사례를 孔子는 舜이라는 탁월한 지도자의 大知(큰 지혜)를 들어 말하고 있다. 道는 정치권력으로 행하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만 행하여질 수 있는 것이다. 큰 지혜란 자기 스스로 큰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그 제1의 조건이다. 자기가 아는 것을 남에게 하달하거나 명령하거나 강요하는 일방적 방식은 우선 지혜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변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누구의 스승이 된 적이 없습니다. 오직 물었을 뿐입니다. 묻는 것을 중단할 수는 없습니다.” 위대한 지도자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문제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묻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의미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儒敎의 물음은 자신을 깨우치기 위한 물음이다. 끊임없이 자신은 무지한 존재라는 전제를 가지고 죽을 때까지 노력하는 존재, 이것이 修身의 과정이다. 孔子는 “나를 믿으라.” “나를 따르라.”라는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스승으로서의 삶의 도리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易 』도 점이 아니라 삶의 “물음”이었을 뿐이다.


청와대에 있었던 사람이건, 용산에 앉은 사람이건 처음부터 끝까지 묻기만 해야 한다. ‘내가 다 아노라.’ ‘국민들이여 나를 따르라.’라는 행태를 보여서는 아니 된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자신에게 가장 가깝고 시시하게 보이는 말들을 잘 살펴야 한다.’ ‘아녀자들의 말이라도 그게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어린애가 말하는 그 소리에 하나님의 소리가 들어 있다.’라는 해월 최시형 선생의 말씀이 귓전을 맴돈다.


묻지 않는 자는 배울 수가 없다. ‘내가 다 해봤어.’라는 말은 천지자연의 이치인 『易』에 대해 공부해야 함을 웅변한다. 노동판에서 놀았다고 해서 노동자를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지금 노동자와 그때 노동자의 형편은 다르다. 모든 게 달라지고 있는데, 어떻게 다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해본 것은 현시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다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지금 우리는 끊임없이 새롭게 묻지 않으면 뒤지는 사람이 되고 만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태에 대해서 물어야 한다. 끊임없이 묻고 배우는 것을 공유하는 사람이야말로 지도자의 자질을 갖추는 것이다. 모든 교육은 학생이 아니라 지도자를 기르는 것이다. 『學記』 


자기를 비우고 아는 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는 것이 없는 것처럼 그 상황 상황에서 묻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위대한 지식의 획득 방법이다. 모든 지식은 반드시 살아 있는 時中의 지식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죽은 지식은 도서관의 서가에 얼마든지 꽂혀 있다.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삶의 상황 속에서 우리의 앎 그 자체를 끊임없이 되물어야 한다. 孔子에게서 문제 시 되는 것은 “궁극적 앎”이 아니라 “삶의 상황”이다. 상황의 매 순간마다 닥쳐오는 삶의 문제 해결을 묻는 것이다. 


敎育의 목적은 “것”이 아니라 “함”이다. 배울 學의 어원은 ‘하다.’임을 아는 것은 지도자로서 철 발걸음을 떼는 것이다. “信在言前也” 『淮南子』「繆稱」편에 나오는 이 말에 사람이 있고 지도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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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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