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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글자는 누가 만들었나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 ‘한자’라는 이름의 기원, 그리고 잊힌 흔적들 우리는 흔히 문자를 ‘한자(漢字)’라고 부른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은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쓰던 글자를 결코 ‘한자’라 부르지 않았다. ‘한(漢)’이라는 이름은 훗날 한나라가 들어선 뒤에야 생겨났기 때문이다. 심지어 진시황이 소전으로 문자를 통일했을 때조차 그런 명칭은 없었다. ‘한자’라는 말이 굳어진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원나라 시기 몽골 문자와 구별하기 위해 조금씩 쓰이기 시작했고, 일본에서 가나와 구분하려 ‘漢字’를 적극 사용하면서 널리 퍼졌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도 1920년대 이후, 식민지 교육 과정에서였다. 그렇다면 그 이전 사람들은 문자를 뭐라고 불렀을까? 조선과 고려, 삼국, 더 멀리 은·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은 ‘서계(書契)’, ‘문자(文字)’, 혹은 ‘진서(秦書)’라 불렀다. ‘한자’라는 이름은 없었다. □ ‘문(文)’ - 무늬에서 학문으로 ‘문(文)’은 흔히 ‘무늬’나 ‘문신’을 뜻한다고 배운다. 하지만 갑골문을 보면 원형은 조금 다르다. 가축 암컷의 발정 상태를 표현한 흔적과 닮았다. 발정 → 색 변화 → 무늬. 이 과정을 상징하면서 ‘문(文)’은 ‘표식’, ‘무늬’를 뜻했고, 나중에는 ‘글’과 ‘학문’으로 확장됐다. 글자가 처음부터 지적 상징이었던 게 아니라, 몸과 생활의 흔적에서 출발했다는 점이 흥미롭다.([그림 9] 참조) □ ‘자(字)’ - 집에서 아이를 낳다 ‘자’는 갑골문에는 없고, 금문에 와서야 등장한다. 모양은 ‘집(宀)’과 ‘아이(子)’의 결합이다. 원래 뜻은 ‘집에서 아이를 낳다’였다. 여기서 파생해 ‘아이를 낳는다 → 문장을 낳는다 → 글자를 낳는다’로 발전했다. 즉 ‘글자’라는 개념 자체가 주나라와 진나라 시기를 거치며 서서히 정착된 셈이다.([그림 9] 참조) □ ‘서(書)’ - 점괘를 적던 손길 ‘서’는 오늘날 ‘쓰다’, ‘책’을 뜻한다. 하지만 은나라 시절에는 아직 붓도, 벼루도 없었다. 갑골문 속 ‘서’는 손, 나뭇가지, 먹물, 입의 조합이다. 점을 치고 나온 괘를 나뭇가지나 먹물로 기록하는 행위를 표현했다. 즉 본래 의미는 ‘점괘를 기록하다’였다. 훗날 붓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글을 쓰다’라는 뜻을 덧입게 된 것이다. 글쓰기가 처음에는 고상한 학문이 아니라, 점술과 제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그림 9] 참조) □ ‘계(契)’ - 약속의 흔적 ‘계’는 지금도 ‘계약’의 뜻으로 쓰인다. 갑골문을 보면 칼과 나무·뼈를 새긴 표시가 그려져 있다. 동이족은 약속을 맺을 때 나무나 뼈 조각을 쪼개 나누었는데, 두 조각이 맞아야 약속이 확인됐다. 여기서 ‘약속하다’라는 의미가 생겼다. 소전에 이르러 ‘팔 벌린 사람(大)’이 추가되면서, ‘성인 앞에서 맺는 약속’이라는 의미가 더해졌다. 주역의 “옛날에는 매듭으로 다스리다가 서계로 발전했다”는 구절도 이 맥락과 이어진다.([그림 9] 참조) □ 문자 속에 남은 동이의 기억 이 네 글자의 기원을 모아보면 공통점이 뚜렷하다. 모두 생활문화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발정기의 징표, 아이를 낳는 장면, 점괘를 기록하던 손길, 나무를 쪼개 나누던 약속. 그리고 이 문화적 배경은 은나라를 비롯한 동이계 전통과 깊게 연결돼 있다. 즉, 갑골문은 단순히 중국 한족의 창작물이 아니라, 동이계 문화권 속에서 태어나 공유된 문자 체계였다. □ 이름 하나가 바꾸는 역사 인식 오늘날 우리는 ‘한자’를 당연히 중국 문자로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그 명칭은 20세기 이후에야 굳어진 것이다. 만약 지금도 ‘서계’라고 불렀다면, 글자를 한족만의 유산으로 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문자란 생활의 언어에서 태어나 권력에 의해 통일되고, 후대의 이름 붙이기 속에서 재구성된다. ‘문·자·서·계’라는 글자들은 생활의 흔적이자 동이와 화하가 함께 남긴 기억이다. □ 마무리 문자 기원을 더듬어 보면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삶과 정치, 민족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인 ‘한자=중국 문자’라는 등식에 작은 균열이 생긴다. 역사는 언제나 이름 붙이는 자의 것이다. 하지만 갑골문과 금문 속 글자들은 묵묵히 다른 목소리를 전한다. 문자란 권력의 기록이 아니라, 생활에서 비롯된 흔적이었다. 그 사실을 기억하는 순간, 동아시아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도 한층 넓어진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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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4
  • [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권력은 어떻게 역사를 조작했는가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 역사는 왜 늘 패배자를 탓하는가 역사를 읽다 보면 늘 반복되는 장면이 있다. 무너져가는 왕조의 마지막 군주가 술과 여색에 빠져 나라를 망쳤다는 이야기다. 『삼국사기』의 백제 의자왕,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은나라 주왕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정말로 그들이 방탕했기 때문에 나라가 무너졌을까? 사실 당시 모든 군주는 사냥과 연회, 술자리를 즐겼다. 그것은 권위를 과시하고 신하들과 결속을 다지는 통치 행위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망한 나라의 군주만 “향락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라는 낙인이 찍혔다. 후대 사관이 새 정권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만든 정치적 이야기였던 셈이다. □ 폭군 대 성인 - 오래된 이분법 사마천은 진시황을 ‘정신병자 같은 군주’로 묘사했다. 김부식은 신라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고구려와 백제의 왕들을 깎아내렸다. 진수 역시 한나라의 권위를 세우려 진나라 군주를 매도했다. 새로운 권력이 옛 권력을 비난하는 방식, 이것이 역사의 오래된 패턴이다. □ 진시황과 공자, 정통성의 싸움 이 패턴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 바로 분서갱유다. 진시황이 책을 불태우고 유생들을 구덩이에 묻었다는 사건이다. 흔히 ‘광기의 폭군’ 이미지로 소개되지만, 그 본질은 지식인 탄압만이 아니었다. 공자와 유생들은 화하족 중심의 정통 서사를 세우려 했다. 반면 진시황은 동이족과 연결된 뿌리를 지니면서도, 자신을 화하 문명의 적자로 자리매김하려 했다. 공자가 순임금의 입을 빌려 “한나라는 야만”이라고 폄훼한 기록은 진시황에게 치명적인 도전이었다. 분서갱유는 곧 정권의 정체성과 역사적 위치를 둘러싼 충돌이었다. □ 1917년, 땅속에서 나온 반격 이 갈등을 비춰주는 증거가 1917년 중국 감숙성에서 드러났다. 진나라 선조의 제기에서 “혁사만하(虩事蠻夏)”에서 온 말이다. 즉 공자보다 앞서 100년 전에 공언한 진목공의 “혁사만하(虩事蠻夏)”를 뒤집은 말이다. 진목공이 ‘하족의 나라를 야만스러운 놈들’이라고 지목한데 대한 반발로 공자는 거꾸로 100 년 후에 나타나 진나라가 속한 이(夷) 족을 오랑캐라고 한 것이다. 그것도 이(夷) 족 출신의 순(舜) 임금이 말한 것처럼 꾸며서 완전범죄를 기도했다. '혁사만하(虩事蠻夏)'는 “오랑캐 하나라를(蠻夏) 두려워 떨게 하고 괴롭히라”는(虩事) 말이다. 공자가 태어나기 1세기 전에 새겨진 글자였다. 여기엔 진나라가 이미 화하 중심의 정통 서사와 긴장 관계에 놓여 있었음이 기록돼 있다. 제기에는 12대 조상의 이름도 적혀 있는데, 동이족 시조인 소호와 연결되는 흔적이 보인다. 진나라의 기원이 화하족만의 계보가 아니라는 증거다. □ 글자 속의 갈등 흥미로운 건 ‘혁사 만하(虩事蠻夏)’라는 네 글자다. ‘만(蠻)’은 원래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뜻했지만, 후대로 갈수록 뱀이 덧붙으며 ‘야만’으로 굳어졌다. 반면 ‘하(夏)’는 원래 ‘여름 더위에 지쳐 앉은 사람’을 뜻했는데, 유가 지식인들이 이를 문명의 상징으로 끌어올렸다. 결국 동이와 화하의 긴장은 문자 자체에 각인됐다. 혁사 만하라는 표현은 진나라가 화하 중심 서사 속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려 했는지 보여주는 상징이다. □ 유물의 목소리 은허의 갑골문 발견 이전까지 중국 학자들은 하·은 시대를 전설로 치부했다. 그러나 발굴된 갑골문과 청동기 명문은 사마천의 기록이 얼마나 정치적이었는지를 드러냈다. 진시황을 왜곡한 서술과 달리, 유물은 진나라가 동이와 화하의 경계에서 성장한 집단이었음을 증언한다. 혁사 만하 명문은 지금도 논란의 대상이다. 학계에서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불편한 증거가 우리가 역사 서술의 이면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 역사는 누구의 목소리인가 진시황은 폭군으로, 공자는 성인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립은 단순히 ‘폭군 대 성인’의 구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정권 정통성과 민족 정체성을 둘러싼 치열한 싸움이었다. ‘혁사 만화’라는 명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누구의 목소리인가? 사관의 기록인가, 아니면 땅속 유물이 남긴 증언인가? 역사는 늘 권력에 의해 쓰인다. 하지만 글자와 유물은 권력이 지우려 한 또 다른 목소리를 들려준다. 이제 우리는 교과서 속 정통 서사 너머, 실제로 남겨진 기록을 다시 읽어야 한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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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7
  • [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글자가 말해주는 권력의 역사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 글자 속에 숨어 있는 권력의 흔적 우리는 매일 한자를 만난다. 신문 지면에 실린 사자성어, 관공서 현판, 옛 비석의 문구까지. 그런데 그 글자들, 단순히 의미만 전달하는 도구일까? 강준식 선생은 최근 강의에서 “문자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사회와 권력의 이야기를 담은 역사적 장치”라고 말했다. 실제로 ‘만(蠻)·이(夷)·하(夏)’ 같은 글자에는 동아시아 고대사의 정체성과 권력 관계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 말이 꼬여 들리던 이방인, ‘만(蠻)’ 오늘날 ‘남만(南蠻)’이라고 하면 흔히 남쪽 오랑캐를 뜻한다. 하지만 원래 ‘만’자는 그렇게 험악한 뜻을 지니지 않았다. ‘만(蠻)’은 갑골문에는 없고, 금문엔 있는데, 재미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양쪽에는 실타래 같은 선이 있고, 가운데엔 혀 모양이 들어가 있다. 마치 말소리가 얽혀 뒤죽박죽 들리는 듯한 모습이다. 즉,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뜻했던 셈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글자에 뱀 모양이 추가됐다. 단순히 언어가 다른 집단이었던 ‘만’은 어느 순간 “사악하고 위험한 오랑캐”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정치적 긴장과 갈등이 고스란히 글자의 변천에 반영된 사례다.([그림 8] 참조) □ 활로 규정된 타자, ‘이(夷)’ ‘동이족’ 하면 중국 동방의 집단을 떠올린다. 글자의 변화 과정을 보면 그 이미지가 어떻게 굳어졌는지 알 수 있다. 초기의 ‘이’는 단순히 사람을 뜻하는 기호였다. 그런데 주나라 말기로 가면 활과 화살, 주살 모양이 들어간다. 동이족이 활을 잘 다루는 집단으로 인식되면서 글자 속에 “활의 민족”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진 것이다. 하지만 동이족은 단순한 전사가 아니었다. 철기·청동기 문화와 사상 형성에 중요한 흔적을 남긴 집단이기도 했다. ‘이’자는 활로 대표되는 타자 이미지이자 동시에 동방 문화의 흔적을 담은 표식이었다.([그림 8] 참조) □ 여름에서 문명의 이름으로, ‘하(夏)’ ‘하(夏)’ 하면 떠오르는 건 중국 문명의 대명사다. 화하(華夏)라 부르면 곧 스스로를 ‘문명의 중심’이라 칭하는 호칭이다. 그런데 갑골문 속 ‘하(夏)’는 달랐다. 원래는 ‘태양 아래 지쳐 앉아 있는 사람’의 그림이었다. 말 그대로 ‘무더운 여름’을 나타낸 글자였다. 하지만 춘추전국 시대 이후, ‘하(夏)’는 단순한 계절 이름에서 벗어나 ‘중원의 문명’을 뜻하는 상징이 됐다. 후대 학자들은 ‘하(夏)’를 ‘크고 중심적인 것’이라 풀이하며, 아예 중국 국가의 기원을 ‘夏 왕조’에 두려 했다. 여름 더위를 뜻하던 글자가 곧 정통성의 이름으로 변한 것이다.([그림 8] 참조) □ 글자가 말해주는 것 세 글자의 변천을 따라가다 보면 알 수 있다. 글자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다. 한 줄, 한 점이 추가되면서 집단의 정체성, 권력의 시선이 담겼다. ‘만(蠻)’은 뱀을 품고 오랑캐가 되었고, ‘이(夷)’는 활을 들고 타자가 되었으며, ‘하(夏)’는 더위를 넘어 문명의 이름이 되었다. 문자는 언제나 중립적이지 않다. 권력이 필요로 하는 서사를 품었고, 후대의 해석은 그것을 정당화하는 장치가 됐다. □ 우리가 읽어야 할 것 오늘 우리가 쓰는 글자에도 오래된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다. 단순히 언어학적 기호로 볼 게 아니라, 고고학과 문헌학, 정치사상사와 함께 읽어야 비로소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다. ‘만(蠻)’의 뱀, ‘이(夷)’의 활, ‘하(夏)’의 태양 아래 앉은 사람. 이 작은 그림들은 모두 시대의 목소리다. 글자를 다시 읽는 일은 곧 우리가 어디서 왔고 누구였는지를 묻는 일이기도 하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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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0
  • [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은나라와 주나라, 그리고 동이족의 뿌리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중국 고대사의 서막을 장식한 두 나라가 있다. 은나라(상商)와 주나라(周). 중국인들에게는 오랫동안 이 두 나라가 "중국 문명의 뿌리"처럼 이야기되어 왔다. 그런데 최근 수십 년간 축적된 고고학 연구와 고문헌 해석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두 나라가 사실상 “동이족의 나라”였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동이족’ 하면 곧바로 중국이 말하는 ‘오랑캐’ 이미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건 진실의 절반만 보여주는 시선이다. 동이는 단순한 주변 세력이 아니라, 황하 문명과 어깨를 나란히 한 고대 동방의 주역이었고, 심지어 은과 주, 즉 중국 국가사의 출발점에 깊숙이 관여한 주체였다. □ 알에서 태어난 시조, 은나라와 동이 신화의 닮은꼴 은나라 시조 이야기는 아주 흥미롭다. 『사기』 은본기에서 사마천은 은나라의 시조를 “설(契)”이라 적는다. 설의 어머니 간적(簡狄)은 하늘에서 떨어진 검은 새의 알을 삼켜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이른바 “난생(卵生) 신화”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익숙한 장면이 보인다. 고구려 건국 시조 주몽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 신라 혁거세가 알에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은나라와 한반도의 신화가 같은 원형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이는 은나라가 분명히 동이 문화권 속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단서다. 물론 은나라 시조가 누구냐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죽서기년』은 순(舜) 임금의 아들 의균(義均)이 상(商)에 봉해져 시조가 되었다고 하고, 『노사』에서는 그가 노래와 춤을 즐겼다고 전한다. 『금문신고』 같은 다른 기록에서는 설의 부친이 곤(鯀), 조부가 전욱(顓頊)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계보가 조금씩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된 흐름이 있다. 바로 은나라와 주나라 시조의 뿌리가 모두 “제곡(帝嚳)”이라는 사실이다. 제곡은 누구인가? 바로 동이족의 대표적인 제왕, 소호(少昊)의 손자다. 즉, 부계 혈통에서 은과 주는 모두 동이족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 은과 주, 형제의 나라 주나라의 시조는 후직(后稷, 棄(기))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농업의 신으로도 숭배되었다. 그런데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은의 시조 설과 주의 시조 후직은 아버지가 같고 어머니만 다른 형제다. 다시 말해, 은과 주는 처음부터 같은 씨족 혈통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라는 것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시조의 이름이 설이든 의균이든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은나라는 동이족의 나라였고, 주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순(舜) 임금 역시 맹자가 ‘동이족 출신’이라고 못박았으니, 그의 아들이 시조가 되었다는 『죽서기년』의 기록 역시 같은 결론을 가리킨다. 즉, 중국 고대사의 첫 장을 연 두 나라, 은과 주의 뿌리는 동이족이었다. □ 은허의 발굴과 불편한 진실 문헌만으로는 믿기 어렵다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고학 증거가 이를 다시 확인시켜준다. 은허(殷墟). 하남성 안양에서 발굴된 이 유적은 은나라가 실존했던 국가임을 처음으로 입증한 현장이었다. 20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 학계는 하(夏)와 은(殷)을 “전설 속 왕조”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은허가 모습을 드러내자, 은나라는 실제로 존재했던 국가임이 명백해졌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은나라가 실재했다는 사실은 곧 중국 국가사의 출발점이 "동이족 국가"라는 사실을 뜻했기 때문이다. 한족(漢族) 중심의 역사관을 강조해온 중국 입장에서는 매우 불편한 결과였다. 그래서 나온 것이 ‘역사공정’이다. 하나라(夏)를 실존 국가로 만들려는 국가 차원의 프로젝트 말이다. 왜냐하면 은을 첫 국가로 인정하면, 중국사의 출발은 동이족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 중국은 실체가 불분명한 하나라를 억지로 실존 국가로 끌어올리고 있는 셈이다. □ 동이족, 잊혀진 주인공 결국 고대 문헌 기록, 신화 전승, 고고학 증거를 종합하면 분명한 결론이 나온다. 은나라, 그리고 주나라까지, 이 두 왕조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였다. 물론 학문적으로는 여전히 세부 논쟁이 많다. "은나라의 실제 시조가 설이냐, 의균이냐" 같은 문제 말이다. 하지만 이는 가지의 문제일 뿐, 뿌리는 변하지 않는다. 두 나라 모두 동이족의 피와 문화에서 나왔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거의 없다. 이 사실을 직시하는 순간, 중국 고대사의 풍경은 크게 달라진다. 동이는 더 이상 ‘주변부 오랑캐’가 아니라, 문명의 동반자이자 때로는 중심이었다. 황하의 문명과 요동·한반도·산동의 문화가 서로 얽히며 만들어낸 다중적 기원이 바로 동아시아 고대사의 출발점이었다. □ 기억을 되살리며 오늘날 "동이"라는 말은 중국의 시각에서 주변을 부르던 호칭일 뿐이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역사적 실체는 오히려 우리가 찾아야 할 기억이다. 우리가 쓰는 문자, 신화, 언어의 뿌리 곳곳에 은과 주, 그리고 동이의 흔적이 남아 있다. 고구려와 신라의 건국 신화가 은나라의 신화와 닮아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갑골문과 청동기 문양 속에서 동이계 도상의 흔적을 발견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언어로 쓰인다. 오랫동안 동이는 ‘남이 적은 역사’ 속에서 주변인으로 왜곡됐다. 그러나 문헌과 신화, 그리고 땅속에서 나온 유물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은과 주, 중국 국가사의 출발점에서 동이는 결코 주변이 아니었다. 중국의 역사공정은 하나라를 내세워 은나라의 동이적 뿌리를 가리려 하지만, 땅속에 묻힌 증거와 오래된 신화는 여전히 그 사실을 증언한다. 은과 주, 중국사의 두 시원은 동이족의 나라였다. 이름이 무엇이든, 시조가 누구든, 그 뿌리만은 변하지 않는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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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3
  • [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뼈 위에 새겨진 동이의 기억, 오늘을 비추다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역사를 돌이켜보면, 언어와 문자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정체성의 뿌리였다. 종이에 활자를 찍고, 휴대폰 자판 위에 글자를 두드리는 오늘 우리의 일상은 사실 수천 년 전 뼈와 거북등에 새겨진 문자에서 시작되었다. 그 시작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동이(東夷)’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바다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남긴 흔적과 맞닥뜨리게 된다. □ 거북등 위의 언어 상나라 말기, 제사의 밤을 떠올려 보자. 제관이 붉게 달군 쇠침을 거북등 위에 갖다 대면, 번개처럼 균열이 번진다. 왕은 그 무늬 속에서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제관은 그 내용을 뼈 위에 상형으로 새겨 넣는다. 오늘날 ‘갑골문(甲骨文)’이라 불리는 세계 최초의 문자 기록 장면이다. 날씨, 수확, 전쟁, 병세, 사냥. 삶의 모든 것이 그 위에 적혔다. 그러나 이 문자는 단지 ‘중원의 문자’만은 아니었다. 고고학은 말한다. 상나라 이전, 이미 요하 유역과 산동 반도, 한반도 서북부에서 동이계의 상징과 문양이 나타났다고. 그 무늬가 글자가 되고, 글자가 체계가 되어 상나라 제사의 언어 속으로 스며들었다. 갑골문은 곧, 동이와 중원이 만난 지점에서 태어난 언어였다. □ 바다와 강의 사람들, 동이 동이는 고대 중국 문헌에 ‘동쪽의 활 잘 쏘는 사람들’로 기록된다. 『산해경』은 그들을 ‘해가 뜨는 곳의 사람들’이라 불렀고, 『사기』는 요서와 요동, 산동에 흩어진 부족들을 그렇게 묘사했다. 그들의 삶은 물과 함께였다. 농사도 지었지만,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조개껍질과 옥으로 장신구를 만들었다. 남방과 북방을 잇는 해상 교역에도 능했다. 당연히 이런 삶은 기록 체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항로, 계절풍, 물고기 떼, 조류. 단순한 그림처럼 보이는 기호가 사실은 공동체 전체가 공유하는 언어였던 셈이다. 오늘 우리가 갑골문에서 물결(氵), 배(舟), 물고기(魚)를 발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동이의 세계관이 새겨진 자취다. □ 제의의 언어, 정치의 권력 동이와 중원에서 문자는 곧 권력이었다. 제사를 통해 왕은 통치의 정당성을 얻고, 균열무늬 속에서 미래를 읽었다. ‘풍년’, ‘전쟁’, ‘사냥’ 같은 글자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왕국의 운명을 가르는 질문이었다. 동이 사회에서도 제사는 중심 의식이었다. 바다와 강의 신에게 제물 바치고, 조상 영혼에게 곡식과 짐승을 올렸다. 그때 쓰인 상징은 돌, 뼈, 옥에 새겨졌고, 훗날 갑골문 속으로 흡수됐다. 문자란 곧 신과 인간을 잇는 계약서였다. □ 자연과 함께 숨 쉬던 언어 갑골문을 보면 자연과 인간이 얼마나 긴밀했는지 알 수 있다. 해(日), 달(月), 산(山), 바람(風), 비(雨). 동이 사람들에게 자연은 단순한 자원이 아니었다. 해는 어머니였고, 바람은 메신저였으며, 비는 은총이었다. 글자는 이를 담았다. ‘雨’의 갑골문은 빗줄기와 받치는 그릇을 그렸고, ‘風’은 바람 속에 깃든 벌레를 표현했다. 인간과 자연이 한 호흡을 나누던 시절의 언어였다.([그림 7] 참조) □ 증거는 형태와 유물 속에 중국 은허에서 출토된 갑골문을 확대해보면, 단순한 직선과 곡선이 아니다. 해와 달이 겹쳐 있는 독특한 조형이 있다. 그런데 그 모양은 요하 유역 홍산문화 옥기 무늬와 닮아 있다. 고고학자 장광지는 “문자는 하루아침에 생긴 게 아니라, 도상문화의 축적 위에서 세워진다”고 했다. 갑골문의 해(日) 점 하나, 달(月) 곡선 하나는 신석기 도상에서 이어진 것이다. 문자 탄생은 단순한 발명이 아니라 긴 문화적 기억의 집합이었다. 산동 반도의 토기, 요동의 청동기, 홍산의 옥기에서 발견된 기호들 역시 갑골문과 겹친다. 중국 학계도 인정하듯, 문자는 ‘황하 문명 단일 중심’에서만 나온 게 아니라 여러 곳에서 동시에 피어난 다중 중심의 산물이었다. □ 언어의 흔적, 이동하는 문화 언어학자들은 갑골문 속 일부 발음이 현대 중국어보다 오히려 한국어나 일본어의 옛말과 가깝다고 말한다. ‘바다(海)’, ‘물고기(魚)’, ‘배(舟)’ 같은 어휘가 그렇다. 갑골문은 문자일 뿐 아니라, 언어의 교류 흔적이기도 하다. 동이계 부족이 남하하거나 동진하면서 한반도와 일본 열도로 이주했을 때, 그 언어와 문자가 함께 전해졌다. 고조선과 삼한, 일본 고훈 시대 유적에서 발견된 기호들이 이를 뒷받침한다.([그림 7] 참조) □ 문화의 흡수와 소멸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융합과 동시에 소멸을 불러왔다. 주나라가 변방 부족을 제후국으로 편입하면서 언어와 문자는 표준화되었다. 동이 제관이 새기던 갑골문은 궁정 속 전서체로 바뀌었고, 그의 아들은 그것을 ‘옛 글자’라 부르며 읽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문화는 흡수되고, 기억은 단절되었다. □ 다시 발견된 동이의 목소리 20세기 초 은허 발굴 이후 갑골문은 ‘중국 최초의 문자’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 요하문명과 산동·요동 해안, 한반도 서북부에서 연이어 발견된 부호들은 그 통설에 균열을 냈다. 어떤 연구자는 발굴 현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건 중원의 언어가 아니라, 동이족의 목소리입니다.” 그 말은 곧, 갑골문이 특정 왕조의 소유물이 아니라 동아시아 문명 전체가 공유한 유산이라는 선언이었다. □ 문자, 정체성의 뿌리 왜 오늘날 우리가 다시 갑골문을 읽으려 하는가? 그것은 단순한 고대학자의 호기심 때문이 아니다. 문자는 정체성의 뿌리이자,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다. 우리가 쓰는 언어가 어디서 왔는지를 아는 것은 곧 우리가 누구인가에 답하는 일이다. 동이의 문자 전통을 복원하는 것은, 잊힌 세계관을 복원하는 것이다. □ 뼈 위의 기억에서 미래의 언어로 문자는 과거의 유물인 동시에 미래의 가능성이다. 뼈 위에 새겨졌던 갑골문이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어, 오늘의 한글과 디지털 코드로 이어졌다. 언젠가 우리는 다시, 우리 손으로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낼 것이다. 뼈 위에 새기던 그 날카롭고 간절한 손길을 기억하는 한, 우리의 언어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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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7
  • [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한국인의 문자 DNA, 갑골문에서 한글까지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역사를 돌이켜보면, 때때로 우리는 스스로를 작게 여기곤 한다. 국권을 빼앗기고, 가난에 시달리며, 세계의 변방에서 소외되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우리나라의 1인당 GDP는 세계 최하위권이었고, ‘가난의 대명사’로 불리던 시절이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을 보라. K-팝과 K-드라마가 전 세계를 누비고, 첨단 반도체와 IT 기술이 지구촌의 심장을 뛰게 만든다. 누군가는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 부른다. 하지만 과연 기적일까? 아니면 오랜 시간 축적된 저력의 발현일까? 나는 후자라고 믿는다. 한국인의 창의성과 생명력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래된 역사와 문화, 그리고 무엇보다 문자와 기술의 발명에서 이어져 온 정신의 결실이다. 갑골문, 금속활자, 한글. 이 세 가지는 한국인의 저력을 증명하는 가장 선명한 흔적이다. □ 거북선과 금속활자, 그리고 한글 우리는 종종 창의성과 발명 정신을 이야기할 때 이 세 가지를 빠뜨리지 않는다. 거북선은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기발한 발상이었고, 금속활자는 구텐베르크보다 수 세기 앞서 문자 대중화의 길을 열었다. 한글은 더욱 독보적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문자라 불리는 이 발명은 문자 해방과 평등을 가능하게 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우연일까? 아니다.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더 오래된 ‘문자 DNA’가 우리 역사 속에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열쇠가 바로 갑골문이다. □ 갑골문의 발견과 충격 1899년, 중국의 학자 왕의영은 ‘용골(龍骨)’이라 불리던 약재에서 우연히 낯선 문양을 발견한다. 후에 밝혀진 것은 그것이 상나라 사람들이 거북 껍질과 소의 뼈에 새긴 문자, 곧 갑골문이었다. 이후 안양 일대에서 수십만 조각의 갑골이 발굴되면서, 상나라의 정치·사회·종교가 구체적으로 되살아났다.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문자와 기록으로 확인된 최초의 역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갑골문이 문자 발명의 출발점이었는가? 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더 오래된 흔적이 있다. 도자기에 새긴 도문, 뼈에 새긴 골각문자가 그것이다. 홍산문화 유적지에서 출토된 도문은 갑골문보다 천 년 이상 앞서는 원시 문자로 추정된다. 2000년대 들어 재조명된 골각문자 역시 갑골문의 전신으로 평가받는다. 즉, 문자의 역사는 점에서 선으로, 선에서 글자로, 끊임없는 진화를 거쳐온 것이다. □ 동이족과 문자, 그리고 전파의 길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 이런 문자 흔적이 발견되는 지역이 바로 만주, 산동, 홍산 등 동이족이 살던 영역과 겹친다는 점이다. 학계 일각에서는 이 지역의 문자 전통이 남하하면서 중국 상나라의 갑골문으로 정착했다고 본다. 또 해상로를 따라 한반도와 일본에까지 전해졌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수많은 복골(점복용 거북 껍질)이 출토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창원, 부산, 김해, 경산, 무산 등지에서 ‘무자 갑골’이 보고되었다. 글자가 남지 않은 경우가 많지만, 이것이 단순한 공백인지, 혹은 소실된 흔적인지는 아직 논란 중이다. 어쨌든 이 발견들은 문자와 의례가 동아시아 전역에서 활발히 교류했음을 시사한다. □ 논쟁의 중심, 홍도관 사건 문자와 유물 연구가 늘 순탄한 것은 아니다. 몇 해 전 한국에 들어온 한 붉은 도자기(홍도관 [그림 6] 참조)는 학계의 뜨거운 논쟁을 불러왔다. 그 표면에 갑골문이 새겨져 있었는데, 감정 결과가 엇갈렸기 때문이다. 어떤 기관은 “진품, 고대 유물”이라고 했고, 또 다른 기관은 “근대의 모조품”이라 단정했다. 심지어 어떤 연구팀은 방사성 연대 측정을 통해 더 오래된 시기로 판정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진위 논란을 넘어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고고학은 감각이나 직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과학적 분석과 국제적 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 말과 글, 정체성의 근원 결국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왜 우리는 갑골문, 도문, 골각문자 같은 오래된 문자에 주목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단순하다. 말과 글은 정체성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한 민족이 언어를 잃으면 기억을 잃고, 기억을 잃으면 존재의 뿌리마저 흔들린다. 한글이 오늘날 한국인의 자존과 자부심의 근원이 되는 이유도, 문자 없는 백성은 목소리 없는 백성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갑골문과 그 전신들을 탐구하는 일은 단순한 고고학적 흥밋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정체성의 깊은 뿌리를 더듬는 작업이며, 동아시아 문명의 복잡한 혈맥을 밝히는 일이다. □ 미래를 향한 희망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다. 한반도에서 출토된 복골의 진정한 성격은 무엇인지, 일본 대량 출토와의 관계는 어떠한지, 홍산문화의 도문이 어떤 경로를 거쳐 갑골문으로 이어졌는지는 여전히 미완의 질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다. 더 많은 발굴, 더 정밀한 과학적 분석, 더 넓은 국제 협력이 이어진다면, 이 고대 문자의 비밀은 조금씩 열릴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동이족의 피와 한국인의 저력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갑골문에서 금속활자, 한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문자와 기술의 발명족이었다. 지금의 성취는 기적이 아니라, 오랜 시간 이어온 저력의 자연스러운 결실이다. 과거의 문자가 미래의 길을 밝히듯,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이 유산을 더 깊이 연구하고, 다음 세대에게 온전히 전하는 일이다. 그 길 위에서, 한국인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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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2
  • [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한민족 문화와 갑골문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도시의 새벽, 버스 정류장 전광판에 깜빡이는 문장을 보며 생각한다. 이 짧은 문장은 어디에서 왔는가. 소리의 결로만 설명하기엔 뭔가 모자라다. 우리의 언어는 물론 한글이지만, 우리의 문화적 문장은 그보다 오래된 심층에서 떠오른다. 거북의 등과 짐승의 뼈에 불을 대어 균열을 읽던 시간, 그 균열 따라 새겨진 선과 점이 우주의 질서를 불러오던 순간. 갑골문은 그 선과 점의 고향이고, 한민족 문화는 그 고향에서 길어 올린 상상력으로 오늘을 말한다. 이 글은 그 뿌리의 언어가 어떻게 한반도의 삶과 신화, 오늘의 감각으로 이어졌는지, 한 편의 칼럼으로 더듬어 본 기록이다. □ 언어와 문자, 문화의 뿌리 언어는 소통의 도구 이전에 세계를 자르는 칼날이다. 무엇을 하나의 ‘것’으로 보고, 어디서 경계를 긋는가에 따라 문화는 다른 얼굴을 얻는다. 문자란 그 칼날을 눈으로 보이게 만든 도면이다. 갑골문은 하늘과 땅, 해와 달, 짐승과 사람을 몇 획으로 표상하는 법을 발명했다. ‘日’의 원과 점, ‘月’의 초승, ‘人’의 단순한 두 다리, ‘巫’의 교차하는 팔과 기립한 몸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압축한 결정체였다.([그림2, 4] 참조) 한글은 훨씬 훗날, 소리의 뼈대를 정교하게 설계한 위대한 발명이다. 그러나 소리가 박히는 의미의 그릇, 말의 길을 내는 상징체계는 이미 오래전에 형성되었다. 조상들은 해를 ‘오른다/진다’가 아니라 ‘나타난다/숨는다’로 느꼈고, 새의 궤적을 길의 표식으로 삼았다. 이 감각은 언어의 은유로 축적되고, 문자의 상형으로 굳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이 답답하다”라고 할 때 가슴을 쥐어짜는 손의 느낌으로 말하고, “하늘이 높다”라고 할 때 가을의 빛을 떠올린다. 소리의 언어(훈민정음) 위에 의미의 언어(상형과 관념)가 겹쳐진 이중 구조, 그것이 한민족 문화의 문장법이다. □ 동이족의 문화가 한반도에 전한 것 ‘동이’라는 이름은 지도 바깥의 사람을 가리키는 낙인이 아니라, 바다와 숲의 질서 속에서 살아가던 생활인의 또 다른 호칭이었다. 그들의 세계관은 물의 길을 따라, 새의 길을 따라 흘러들었다. 해안을 타고 건너온 것은 단지 옥과 패물, 활과 배가 아니었다. 제천(祭天)의 감각, 백의(白衣)의 간결함, 옻칠과 목공의 손끝, 해와 새를 기호로 새기는 미감이 함께 전해졌다. 한반도의 여러 공동체가 계절을 맞아 하늘에 제사하고, 노래와 춤으로 공동체의 시간을 묶었던 기억은 이 전승의 결을 닮는다. 바다에서 온 사람에게 태양은 절대의 시계였고, 숲의 사람에게 새는 소식을 전하는 사자였다. 그래서 우리는 축제를 ‘놀음’이 아니라 ‘하늘에 보이는 일’로 삼았고, 흰옷을 단지 검소함이 아니라 빛을 받는 표면으로 여겼다. 물건의 기술과 신앙의 형식, 생활의 미학이 함께 다리를 건너와, 한반도에서 새로운 질서를 키웠다. 문화는 언제나 사물과 상징이 함께 이동할 때 깊게 뿌리내린다. □ 한민족 신화와 갑골문적 상상력 신화는 공동체가 자신을 설명하는 첫 번째 문장이다.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 하늘의 아들이 나라를 세우며, 알에서 태어난 영웅이 활을 쏘아 길을 연다. 이 모티프들은 갑골문이 그려낸 자연의 도면과 정확히 맞물린다. ‘弓’의 곡선은 단지 무기의 형상이 아니라, 하늘과 인간을 잇는 장력의 기하학이다. ‘鳥’는 땅과 하늘을 횡단하는 매개이자, 태양의 길을 표시하는 움직이는 점이다. ‘日’과 ‘月’은 신화 속 영웅의 출생과 죽음, 계절의 전환과 국가의 제사를 이끄는 표지판이었다.([그림 2, 4] 참조) 곰과 호랑이, 사슴과 물고기. 이 동물들은 갑골문에서 몸의 특징으로 간명하게 표상되고, 신화에서는 길을 여는 지혜로 재해석된다. 동굴과 산, 강과 바다의 문턱에서 행해졌을 통과의례는 신화 속 금기와 시험으로 형태를 바꾸고, 제사의 시간표는 별자리의 순환과 함께 영웅 서사의 배경이 된다. 갑골문적 상상력이란, 자연의 형상을 기호로 변환하는 기술이면서 인간의 삶을 우주의 질서에 포갤 줄 아는 감각이다. 신화는 이 감각을 서사로 만든 기록이다.([그림 5] 참조) 그래서 우리의 옛이야기에는 유난히 하늘을 우러르는 장면이 많다. 활을 들어 첫 화살을 하늘로 쏘고, 새의 비상을 보며 길일을 재고, 해무리와 달무리의 변화를 날씨와 운명의 언어로 읽는다. 문자 이전에 먼저 익힌 해석법이 있었고, 그 해석법을 문자로 굳힌 것이 은자였다. 신화는 그 문자에 살을 붙여, 공동체의 기억을 노래로 만들었다. □ 문화의 원형, 오늘의 울림 오늘 우리의 눈앞에는 뼈 대신 스크린이 있다. 그러나 원형은 사라지지 않는다. 원형이란 형태의 과거가 아니라 감각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몇 가지 울림만 짚어본다. 첫째, 세계 읽기의 태도다. 갑골문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어제의 전쟁은 왜 졌는가, 내일의 비는 올 것인가, 아이의 병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균열을 읽어 답을 얻으려는 태도는 오늘의 데이터 분석과 닮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질문이 언제나 공동체의 안녕과 하늘의 질서를 함께 고려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효율의 숫자만이 아니라, 공존의 징후를 함께 읽는 훈련이 필요하다. 둘째, 몸의 언어다. 눈·입·손·발의 글자가 기록하듯, 몸은 사유의 첫 도구였다. 설계도와 보고서가 넘치는 시대일수록, 손의 감각과 발의 리듬이 만드는 지식이 중요하다. 장인의 손끝, 농부의 허리, 무용수의 호흡은 사전 없는 문장이다. 교육은 다시 몸의 문해력을 회복해야 한다. 글자를 안다는 것은 몸을 통해 세계를 느끼는 법을 되찾는 일이다. 셋째, 축제의 문법이다. 제천의 기억은 오늘의 축제로 되살아날 수 있다. 하늘을 기쁘게 하던 의식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사람의 관계를 새로 묶는 공공의 시간으로서. 지역의 바다와 산, 별이 잘 보이는 밤을 무대로 삼아, 음악과 공예, 농사와 시장이 한데 엮이는 축제는 현대판 동맹·영고·무천이 될 수 있다. 축제는 소비의 이벤트가 아니라 공동체의 시간표여야 한다. 넷째, 디자인의 문맥이다. 원과 점, 선과 획으로 세계를 환원한 갑골문은 오늘의 시각 언어로도 살아 있다. 도시의 표지판, 공공 브랜드, 학교와 도서관의 그래픽에 해·달·물·새의 최소 단위 기호를 응용하면, 장소는 말없이 자신을 설명한다. 말이 너무 많은 도시에서, 말하지 않고도 전달되는 기호의 질서는 미덕이다.([그림 5] 참조) 마지막으로, 기억의 방식이다. 뼈에 새겼던 기억은 지워지기 어렵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쉽게 쓰고 쉽게 잊는 시대에, 무엇을 어떻게 남길지를 다시 묻자. 기록은 많아졌지만 공명이 적다. 오래 남길 문장, 함께 돌아볼 문장을 고르고, 남기는 행위 자체를 의식으로 삼아야 한다. 학교든 가정이든 ‘기억의 의식’을 회복하는 작은 의례가 필요하다. 칼럼의 지면은 늘 모자라다. 그러나 부족한 지면 속에서도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한민족 문화의 깊은 문장법은 갑골문이 열어 둔 상상력의 문간에서 시작했다. 자연을 기호로 만들고, 몸을 문장으로 삼고, 공동체를 하늘과 연결하던 그 질서. 우리는 이제 뼈 대신 픽셀에, 제단 대신 광장에, 옻칠 대신 코드에 새긴다. 방식은 달라졌지만 질문은 같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남기며,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 그 질문을 품고 새벽의 전광판을 다시 본다. 점멸하는 빛의 점과 선이, 문득 오래된 획처럼 보인다. 먼 옛날 불의 균열을 읽던 눈빛으로, 오늘의 문장을 다시 읽는다. 그리고 다짐한다. 뿌리의 문장으로 미래를 쓰겠다고.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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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12
  • [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문자 이전의 기억, 은자(殷字)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우리가 알고 있는 문자 이전의 시대는 어둠처럼 흐릿하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도 인간은 흔적을 남기고 싶어 했다. 바위 위의 동굴벽화, 나무껍질에 새긴 무늬, 그리고 동방의 옛사람들이 택한 특별한 매개체, 거북의 등과 짐승의 뼈가 바로 그것이다. 기원전 13세기 전후, 은(殷) 왕조의 제사장은 거북 등껍질과 소의 어깨뼈를 정성껏 손질해 그 위에 글자를 새겼다. 불에 넣어 금이 가면, 그 균열을 하늘의 목소리로 해석했다. 이때 새겨진 문자가 바로 은자(殷字)다. 은자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과 대화하려는 시도의 흔적이자, 초월과 소통하려는 간절한 몸짓이다. 우리는 오늘날 종이에 활자를 찍어 지식을 전하지만, 최초의 문자 창조자들은 하늘의 뜻을 묻기 위해 살아 있는 생명의 뼈와 껍질을 빌려 썼다. 그 뼈마디에 새겨진 글자는, 인간이 얼마나 절박하게 자연과 신을 향해 귀 기울였는지를 보여준다. □ 갑골문 속에 남은 동이족의 발자취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갑골문이 단지 은(殷) 왕조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고고학자들은 그 문자 속에 동이족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음을 지적한다. 예컨대 갑골문에 등장하는 새, 활, 태양을 상징하는 글자들은 동이족의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 동이족이 숭배하던 태양과 새의 상징, 활을 든 인간의 형상은 갑골문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실제로 은 왕조는 동이와 끊임없이 교류하며 때로는 충돌했다. 은의 제사에 사용된 옥, 조개껍질 화폐, 바닷새 문양은 동이 해안 문화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갑골문 속 ‘이(夷)’는 단순히 변방의 타자가 아니라, 문자 탄생의 공동 증인이었을지도 모른다. 문자가 탄생하는 순간, 그 자리에 동이족도 함께 있었던 것이다. □ 해, 달, 별 - 자연을 새긴 최초의 상형 갑골문을 들여다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자연이다. 해(日)는 가운데 점이 찍힌 원으로, 달(月)은 초승달 모양으로, 별(星)은 나무에 점이 모여 있는 형상으로 그려졌다. 인간은 하늘의 빛을 문자로 옮겨 적었다. 그것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의 기록이었다. 오늘날 과학은 태양을 뜨겁게 불타는 가스 덩어리라 설명하지만, 고대인에게 태양은 생명의 근원이자 신의 얼굴이었다. 갑골문에 새겨진 해와 달은 우주의 시계였고, 인간 삶의 리듬을 결정하는 힘이었다. 달의 주기는 여성의 몸과 연결되었고, 별자리의 움직임은 계절과 농사의 주기를 알려주었다. 문자 이전의 기억은 곧 자연의 기억이었고, 갑골문은 그것을 형상화한 첫 번째 시도였다.([그림 2] 참조) □ 몸과 삶을 새기다 - 인간 형상의 등장 자연만 기록된 것은 아니다. 갑골문에는 인간의 몸과 삶 또한 깊이 새겨졌다. 눈(目), 입(口), 손(手), 발(足) 같은 글자들은 놀라울 만큼 사실적이다. 사람의 형상(人) 역시 단순하지만 강렬하다. 이 글자들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인간 존재를 인식하고 정리한 최초의 시도였다. 더 흥미로운 것은, 몸의 글자들이 사회적 관계와도 연결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父(아버지)’는 손에 도끼를 든 모습으로, 가문의 권위를 상징한다. ‘女(여자)’는 무릎을 꿇은 여인의 모습으로, 가정과 생명의 근원을 의미한다. 몸의 형상은 곧 관계의 형상이고, 삶의 질서를 반영하는 기호였다.([그림 3] 참조) 갑골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들고, 입으로 기원하며, 발로 걸어가는 존재. 그것을 고대인은 문자로 남겼다. 문자는 단순히 기록의 수단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 기억을 불러내는 뼈의 언어 오늘 우리는 종이에, 혹은 디지털 스크린에 문자를 남긴다. 그러나 문명의 첫 기억은 종이가 아니라 생명의 뼈에, 살아 있는 껍질에 새겨졌다. 갑골문은 문자 이전의 기억을 불러내는 매개체다. 칼럼의 자리에서 우리가 갑골문을 다시 소환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고대 문자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갑골문은 인간이 자연과 대화하려 한 기록이었고, 동이족의 흔적이 스며 있는 공동의 문화유산이었다. 그 속에는 해와 달, 별을 바라보며 시간을 새기고, 인간의 몸을 그려내며 존재를 확인하려 했던 원초적 충동이 담겨 있다. 갑골문은 말한다. 문자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깊은 사유와 신앙을 담는 그릇이라고. 뼈와 껍질 위에 남겨진 그 글자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묻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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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05
  • [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다섯 차례의 동북공정, 그 긴 그림자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역사는 흔히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거울은 언제나 투명하지 않다. 권력을 쥔 자가 의도적으로 색을 입히면, 우리는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린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 역시 그러하다. 많은 이들은 이것이 최근에 벌어진 사건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동북공정은 오래전부터 다섯 차례나 반복되어 온 역사 왜곡의 연속극이었다. 첫 번째 막-공자의 논리 동북공정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공자에게 닿는다. 춘추전국 시대, 화하족과 동이족은 대립과 충돌을 거듭했다. 공자는 화하족의 입장에서 역사를 해석했다. 『시경』에는 “화하와 동이가 모두 주나라를 따른다”는 구절이 있다. 공자는 이 문장을 근거로 동이족을 ‘화이불변(華夷不辨)’의 틀 속에 가두었다. 다시 말해, 동이는 독자적인 문화를 가진 주체가 아니라 화하에 흡수되어야 할 주변부로 규정된 것이다. 이 순간부터 동이 문화는 문명과 야만의 경계선 바깥으로 밀려났고, 그 빛은 의도적으로 희미해졌다. 공자의 위대한 사상 뒤편에는, 이렇게 타자의 문화를 지워버린 배타적 논리가 숨어 있었다. 두 번째 막-사마천의 『사기』 그 뒤를 잇는 왜곡의 주인공은 사마천이었다. 그는 『사기』라는 방대한 역사서를 통해 동이족의 시조인 ‘현원’을 중국 하나라의 시조로 둔갑시켰다. 동이족의 기원을 아예 중국사의 일부로 끌어들인 것이다. 『사기』 이후의 정사들은 모두 이를 본보기로 삼았다. 결국 동이의 역사는 자기 이름을 잃고, 중국 역사에 종속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사마천은 스스로를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이라 자처했지만, 사실상 그는 기록을 통해 권력을 행사한 셈이었다. 역사의 기록이 곧 권력이라는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세 번째 막-김부식의 『삼국사기』 놀랍게도 세 번째 동북공정은 중국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일어났다. 바로 김부식의 『삼국사기』다. 그는 신라 중심의 관점으로 역사를 재편했다. 발해와 신라가 나란히 남북조 시대를 형성했던 사실은 사라졌다. 발해는 역사에서 지워졌고, 우리 민족의 무대는 만주와 대륙에서 한반도로 축소되었다. 이는 단순한 기록의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역사적 날개를 잘라낸 비극이었다. 이후 한반도 중심의 협소한 역사관은 우리의 시야를 좁히는 데 오랫동안 영향을 끼쳤다. 네 번째 막-일본 제국의 만선사관 네 번째 막은 일본 제국주의가 연출했다. 식민지배기 일본 학자들은 ‘만선사관(滿鮮史觀)’을 내세웠다. 만주와 조선의 역사는 본래 하나이며, 한국의 문화는 만주에 종속되었다는 논리였다. 그들은 이 이론으로 만주 침략을 정당화하고, 조선의 주체성을 지워냈다. 만주족의 독립성도, 한국 문화의 독창성도 모두 지워졌다. 식민사관은 결코 단순한 학문적 견해 차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주의의 칼날만큼이나 날카로운 정치적 무기였다. 다섯 번째 막-오늘의 동북공정 마지막 다섯 번째 막은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이다. 중국의 역사공정은 동북, 서북, 서남 공정으로 분류되는데, 특히 동북공정은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에서 일어난 과거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하는 역사 공정이다. 이에 따라 중국은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 지방정권의 역사로 격하시켰다. 더 나아가 한복, 김치, 심지어는 K-팝과 K-드라마 같은 현대 문화까지 중국 기원이라는 억지를 주장한다. 과거 동이족의 역사를 빼앗던 방식이 이제는 한국의 현대 문화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고대에서 현재까지, ‘문화 강탈’은 일관된 패턴으로 반복되고 있다. 역사를 지켜야 하는 이유 그렇다면 왜 우리는 역사를 지켜야 하는가. 역사는 한 번 빼앗기면 되찾기가 어렵다. 이름을 잃은 민족은 뿌리를 잃고, 뿌리를 잃은 민족은 미래를 설계하기 힘들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세계 문명의 중요한 토대를 지켜온 민족이라는 사실을. 갑골문과 금속활자, 그리고 한글은 모두 문자와 기록 문명의 혁신을 이끌었다. 오늘날 반도체가 인류의 디지털 시대를 열어가듯, 우리는 언제나 ‘문자의 민족’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해왔다. 동북공정의 다섯 막을 되짚는 일은 단순한 과거사 논쟁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미래를 지켜내기 위한 싸움이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지만, 그 기록을 온전히 지켜내는 힘은 결국 우리 스스로에게 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동북공정의 그림자를 직시하고,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올곧게 지켜내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짊어진 가장 큰 과제다. 역사는 결코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향해 묻고 있다. “너희는 스스로의 이름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는가?”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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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30
  • [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프롤로그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대한(大韓)’이라는 이름 속에 들어 있는 ‘한(韓)’이라는 글자를 마주할 때면, 마음 깊은 곳에서 오래된 질문이 되살아난다. 이 ‘한’은 누구의 한인가. 왜 우리는 이토록 당연하게 ‘한자(漢字)’를 중국의 것이라 믿으며 살아왔는가. 조선 500년의 사대 질서, 국문보다 한문이 출세의 사다리였던 시대의 기억이 몸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일까. 그러나 글자를 조금만 더듬어보면, 익숙한 상식은 쉽게 흔들린다. 한자의 간판보다 먼저, 더 오래된 목소리가 그 속에서 들려오기 때문이다. 1899년, 북경의 교수들과 학자들이 하남성 안양으로 달려갔다. 은(殷)의 수도, 은허(殷墟)에서 삽이 땅을 가르자, 흙 속에 묻힌 가장 오래된 문명의 기억이 드러났다. 거북 등껍질과 소의 뼈에 새겨진 글자들. 갑골문(甲骨文). 그것은 불타는 제단 옆, 인간이 처음으로 하늘에 바친 기도이자, 세계를 향한 외침이었다. 그러나 곧 발굴의 소식은 끊겼다. 은허에서 드러난 유물과 풍습들이 ‘한족(漢族) 중심’의 역사 도식과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궁궐이 남향이 아닌 동북을 향하고 있었고, 무덤의 형식과 뼈의 생김새가 달랐다는 증언들이 쏟아졌다. 동북, 곧 발해만을 바라보는 방향. 그것은 은의 뿌리가 다른 데 있었다는 암시였다. 바로 동쪽, 태양이 떠오르는 땅, 동이(東夷)의 기억과 맞닿아 있었다. 문자는 단순한 기록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흔적이고, 뿌리의 노래다. 바람풍(風) 자의 고음을 더듬으면 오늘의 우리말 ‘바람’의 숨결이 스친다. 백두산은 중국어의 ‘바이또우산’이 아니라, 옛 발음의 ‘백두산’에 가까운 메아리를 품고 있다. 갑골문 속에는 소리와 기호만이 아니라, 인간의 몸 기억과 방향 감각, 하늘을 향한 경외가 새겨져 있다. 그 기억의 결이 동이족의 풍습과 닿아 있고, 만주-발해만-한반도로 이어지는 문화의 물길과 연결된다. 이 책은 잃어버린 뿌리를 더듬는 여정이다. 국수주의를 부추기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진짜 자존은 남의 그늘을 빌려 세우는 깃발이 아니라, 자기 질감의 시간을 겸손히 확인하는 데서 온다. 우리가 ‘한자’를 배울 때, 그 글자가 한(漢)의 간판을 달기 전, 은과 동이의 시간 속에서 어떤 얼굴로 태어났는지를 함께 묻고자 한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함이 아니다. “누구의 것만도, 누구의 것이 아니기도 한, 인류의 공동 유산 속에서 우리의 몫을 찾기” 위함이다. 역사는 오늘을 위한 독해다. 오늘의 우리가 더 단단해지고, 내일의 우리가 덜 흔들리기 위해, 우리는 상식의 틀을 깨뜨려야 한다. 은허의 동북향을 따라, 바람풍의 옛 소리를 따라, 갑골문(은자)이라는 오래된 지도를 손에 쥐고. 길은 거꾸로도 읽힌다. 길은 기억을 향해 열린다. 갑골문은 동이족의 외침이었다. 뼈에 새겨진 칼끝의 떨림, 하늘과 강과 별을 향한 기도의 울림. 이 책은 그 외침을 다시 듣기 위한 시도다. 잃어버린 뿌리를 찾는 여정은 결국, 우리 존재의 근원을 다시 묻는 여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오늘의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질문이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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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22
  • [에듀人] 김미애 의원, '추석 떡값' 전액 기부…나눔과 베풂 실천
    [교육연합신문=이정현 기자] 민족의 명절 추석 연휴의 긴 여정이 시작됐다. 새로운 정부 출범 이후 맞는 명절에다 미국과의 관세협상부터 정지적, 경제적 모든 상황에 국민들의 지갑은 얇아지고 열리지도 않고 있다. 추석명절이 다가올 때마다 화제가 되는 주제가 국회의원 명절 떡값이다. '떡값'이라는 단어는 친절한 명절 선물의 의미이지만, 매일 정쟁만 일삼는 국회의원에 지급되는 명절휴가비가 알려지면서 국민들은 이를 곱게만 보지 않고 있다. 국회의원 명절 떡값은 공식적으로 '명절 휴가비'라고 불리며, '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제18종의 3에 근거해 지급된다. 설날과 추석 명절 전후 부수지급일에 맞춰 월 기본급에 60%가 책정되고, 2025년 기준 425만 7940원이 지급된다. 국회의원 1인당 연간 850만 원이 지급되며, 국민세금이 총 25억 원 정도에 달한다. 국회의원 명절 떡값은 월봉의 60%가 법적으로 보장돼 연간 850만 원 가까이 지급되는 반면 직장인 명절수당은 기업 재량으로 평균 100~200만 원 수준에 불과하고 절반 가까이는 아예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요즘 인터넷에 아이를 상대로 인터뷰한 동영상이 유행하고 있다.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국회의원이 되고 싶다"라고 이유를 물으니 "놀고먹고 있는 것 같아서"라고 답했다. 아이들에 눈에 비치는 국회의원들 모습이 정확한 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러한 시점에 항상 약자와 동행하는 국회의원이 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간사로 있는 김미애 의원(국민의힘 부산해운대구을)이다. 약자와의 동행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김미애 의원은 정쟁에 지친 국민들에게 항상 따뜻한 희망을 항상 선물처럼 안겨 준다. 나눔 실천 일환으로 2020년 12월부터 세비를 30%씩 아껴 2023년 12월에는 국회의원이 돼 아낀 세비 1억 2000만 원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지정기탁기부를 했고 그 후 매년 30% 세비를 아껴 역시 지정기탁기부를 통해 필요한 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이번에도 김미애 의원은 국회의원에게 주는 일명 '떡값'을 국민들에게 받기에 너무 민망스럽다고 전액 기부를 했다. 쉬운 일인 것 같지만 이 모든 것이 약자의 편에 서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동들이다. 선한 나눔을 실천하는 것을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들도 있다. 또한, 김 의원은 가슴으로 낳은 아이를 키우고도 있다. 누구나 할 수 없는 일들을 김미애 의원은 진심으로 나눔과 베풂을 실천하는 몇 안 되는 정치인이다. 태광실업 여공 출신으로 어렵게 공부한 것에 한이 맺혀 이렇듯 나눔과 베풂을 몸소 실천하는 듯하다. 중앙과 지역구를 오가면서 항상 주민들과 함께 숨쉬며 행동하는 김 의원은 토요일이 되면 힘들어하는 소상공인들을 돕고자 '미애가 간다 알바출발'로 앞치마를 매고 중요 시간대 알바를 자처하면서 소상공인들에게 다른 어떤 정책보다 더 좋은 선물을 해 주곤 했다. 정치는 국민을 위하는 정치가 돼야 하는데 작금의 형태는 국민들에게 실망만 안겨주는 정치인들 때문에 가족이 함께하는 추석 밥상이 무겁게 느껴진다. 김미애 의원 같은 나눔과 베풂을 몸소 실천하는 정치인들이 여의도에 꽉 들어찬다면 대한민국의 더 밝은 미래가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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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06
  • [책소개] 나주 지역 사회와 산업의 이해 - 동신대 김춘식 교수
    [교육연합신문=편집국] 동신대학교 김춘식 교수(에너지경영학과)가 지역 사회를 다각적으로 살펴본 저서 『나주 지역 사회와 산업의 이해』를 출간했다. 이번 책은 나주의 사회적 특성과 산업, 역사, 문화, 교육 등 지역 전반을 폭넓게 조명한 종합 안내서로, 지역학적 관점을 토대로 나주의 과거와 현재를 분석하고 미래 발전의 가능성까지 탐구하고 있다. 이 저서는 특히 지역 청년과 시민들이 나주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기획됐다. 이론적 학습과 더불어 현장 체험, 토론, 조사를 결합해 지역 현안에 대한 실천적 문제 해결 능력을 기르고, 나아가 참여와 실천을 통한 성숙한 시민의식을 함양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지역의 가치와 중요성이 날로 부각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이 책은 지역 공동체의 역량을 강화하는 지침서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된다. 책은 총 11개 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제1장 ‘지역학의 이해’를 시작으로 나주의 자연환경, 산업, 경제, 정치·행정, 교육, 문화 등 다양한 영역을 폭넓게 다룬다. 이를 통해 나주의 복합적 사회 구조와 기능을 해석하는 한편, 미래 발전 전략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또한 이번 저서는 오는 2025학년도 2학기 동신대학교 글로컬자율전공대학 개설 교양 교과목 [지역 산업과 사회의 이해]의 교재로 활용될 예정이다. 이를 통해 지역의 미래를 이끌 대학생들이 최소 4년 이상 나주에서 생활하며 공동체 의식과 책임감을 기르고, 지역 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창의적 인재로 성장하는 데 소중한 기반이 될 전망이다. 김춘식 교수는 “지역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미래 인재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핵심 역량”이라며, “특히 지역 소멸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교육’과 ‘문화’가 중요한 역할을 하며, 실천적 교육과 문화에 기반한 연대가 이뤄질 때 지역 정체성을 강화하는 시민들의 의지가 굳건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이 책이 많은 이들이 나주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계기가 되며, 나아가 지역 발전을 이끄는 창의적 인재로 성장하는 든든한 길잡이가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저자 김춘식 교수는 독일 함부르크대학교에서 역사학·교육학·정치학 석사와 서양근현대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 대학 역사학과 강의교수 및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를 거쳐, 현재는 동신대학교에서 창의유합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독일의 역사와 문화, 직업교육 및 평생교육, 지역학, 그리고 직접 개발한 창의·융합 발표토론교육프로그램(CCEP) 분야에서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2014년 한-독 정부 간 직업교육 및 고등교육 교류 협약 체결에 기여했으며, 한·독 교사, 학생 및 연구 교류를 꾸준히 지원해 왔다. 2024년에는 독일 연방교육연구부(BMBF)와 아헨공대(RWTH Aachen)가 주관하는 '칼만 해외 석학(Theodore von Karman Fellow)'에 인문학자로는 최초로 선정되었다. 또한 한국독일사학회 제19대 회장으로서의 학술 활동과 더불어, 독일 미텔슈탄트대학교(FHM) 시니어 펠로우이자, 칼스루에 공과대학교(KTT)와 슈투트가르트대학교(USTUTT)의 공동 캠퍼스(ICM) 시니어 펠로우로 선임되어 한·독 간 대학의 공동 연구와 교육교류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김춘식 교수는 교육연합신문 논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교육부 고등교육 및 직업교육 정책 자문위원, 국가교육위원회 미래과학인재양성특위 전문위원, 한국전문대학평가인중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는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한국독일네트워크(ADeKo) 이사 겸 인문교육위원장, 농어촌 '우리동네 예술학교' 총괄운영위원장, 건강보험사사평가원 열린경영위원장, 녹색에너지연구원 운영위원, 전라남도 국제교류자문관, 도정평가위원, 인재육성분과 정책자문위원장, 전라남도교육행정협의회 위원, 전라남도교육청 및 나주교육지원청 민관산학교육협력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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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28
  • [책소개] 신선 두꺼비가 지키는 전통 사찰 이야기 - 권오만 교수
    [교육연합신문=편집국] “세상을 품어 낸 지혜의 공간” 도교의 상징, 신선 두꺼비를 왜? 불교 사찰에 그려놨을까? “사찰은 단지 종교적 공간이 아니다. 천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앞으로 천년이 더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 공간 철학과 유연한 사회적 포용력, 그리고 지혜를 담아낸 곳이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오래된 사찰.겉으로는 소박하지만 그 안에는 깊은 ‘매력’이 숨어 있다. 비밀은 비틀린 나무와 옹이 많은 재료조차 그대로 살려내는 안목에서 비롯된다.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는 유연하고 창의적인 건축 철학, 그렇게 지어진 건축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은 멋을 드러낸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 속에 부처의 형상을 담은 ‘공조불’은 종교적 사유를 공간에 녹여낸 특별한 설계이다. 경사진 지형을 장점으로 활용한 점승법, 무단한 권력의 횡포를 제어하는 누하진입 방법 등은 사찰이 단순한 수행 공간을 넘어 깊은 지혜와 통찰이 구현된 공간임을 말해 준다. 이 책 『신선 두꺼비가 지키는 전통 사찰 이야기』는 월정사를 중심으로 안동 봉정사, 구례 화엄사, 부안 내소사, 서산 개심사 등 다양한 사찰의 사례를 통해, 한국 전통 사찰의 건축 기술과 공간 철학, 그리고 그 속에 스며든 종교적 포용력과 사유의 깊이를 풀어낸다. 사찰은 종교와 사회가 상호작용하며 형성한 문화적 장면이자, 세월을 넘어 전해진 지혜의 저장소이다. 오늘날, 다양성과 공존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대에 전통 사찰이 전하는 포용과 존중의 메시지는 더없이 귀중한 통찰을 안겨준다. ▣ 저자 권오만 인하대학교 무기재료공학과를 졸업한 후, 국민은행 본점에 입행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대학 시절부터 바다와 자연을 좋아해 스킨스쿠버 동아리 활동을 해 왔고, 강원도 원통의 휴전선 인근 북한강 발원지에서 인제 상남, 소양강, 의암호, 청평댐, 두물머리, 여의도 한강까지 수영으로 종주하였다. 이어 일본의 최장 하천인 신농천(信濃川, しなのがわ)의 발원지에서 니가타시(新潟市) 바다까지 완주하며, 자연과 환경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사회적 활동으로 확장해 나갔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삶과 진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를 바탕으로 환경과 자연 생태에 대한 관심을 본격화하였고, 사단법인 무지개세상(한국환경생태계연구협회)에서 활동하며 KBS 자연 다큐멘터리 「북한산은 살아있다」, SBS 「월악산」 등의 제작에 참여하였다. 이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환경계획 및 조경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상명대학교 환경조경학과에서 강의를 시작으로 학문적 활동을 병행해 왔다. 경동대학교 산학협력단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같은 대학 메트로폴 캠퍼스에서 건축디자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22년에 창작산맥 시 분야 신인문학상 당선으로 등단하였고, 저서로는 디자인과 철학의 공간 우리 궁궐(밥북, 2022), ‘잊혀진 문화유산 해자와 풍류이야기(솔과학, 2018)’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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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24
  • [책소개] 풀꽃은 길이 되고, 삶은 피어난다
    [교육연합신문=편집국] 《풀꽃은 길이 되고, 삶은 피어난다》는 생태적 관점에서 본 잡초의 생존 전략을 인간 삶의 통찰로 풀어낸 인문 에세이다. 잡초는 환경에 순응하고, 경계를 넘으며, 억압을 견디고, 끝내 피어나는 ‘살아 있음’의 진실이 담겨 있다. 이 책은 식물 생태학적 정보와 문학적 상상력이 결합된 글을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에게 ‘버티는 힘’, ‘존재의 의미’, ‘삶의 방향’에 대해 새로운 시선을 제안한다. 삶이 흔들릴 때, 길을 잃을 때, 이 작은 풀꽃의 이야기가 새로운 방향을 열어줄 것이다. 독자 여러분이 이 책을 통해 자신만의 뿌리를 발견하고, 어디서든 피어나는 용기를 얻기 바란다. ■ 《풀꽃은 길이 되고, 삶은 피어난다》를 출간한 소감을 듣고 싶다. 《풀꽃은 길이 되고, 삶은 피어난다》를 세상에 내놓는다는 것은, 마치 작은 들꽃 한 송이를 조심스레 길가에 놓아두는 마음이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것 같은 그 풀꽃 한 포기에도, 거센 바람과 햇살, 비를 견디며 살아온 이야기가 있다. 나는 그 이야기를, 인간 존재의 삶에 겹쳐 쓰고 싶었다. 출간을 마친 지금,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고요한 떨림이다. 세상의 화려한 꽃들 사이에서, 들풀 한 포기의 생을 말하는 일이 어쩌면 너무 미미하고 사소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 책장을 넘기다 문득 멈춰 서서, 자신의 삶에도 그렇게 조용히 피어난 어떤 순간을 떠올린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스스로 길이 되었구나 싶다. 이 책은 삶의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여정이었다. 풀꽃이 길이 되듯, 나도 누군가에게 조용한 위로의 길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지나온 모든 땅 위에, 풀꽃처럼 소리 없이 피어났다가, 흔적 없이 지는 삶일지라도, 그 생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고, 그 존재는 눈부셨다고 말하고 싶었다. ■ 《풀꽃은 길이 되고, 삶은 피어난다》를 집필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풀꽃은 길이 되고, 삶은 피어난다》를 집필하게 된 계기는, 작고 미약한 존재가 삶을 뚫고 나아가는 힘에 대한 깊은 경외심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날, 바람에 쓰러진 들풀을 보았다. 비에 젖고 발에 밟혔지만, 그 풀은 어느새 다시 일어나 있었다. 그 모습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거창한 성공이나 위대한 서사보다, 묵묵히 살아내는 존재의 힘, 그것이야말로 진짜 삶이 아닐까 하는 물음이 생겼다. 풀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피고, 누구의 인정을 받지 않아도 사라진다. 하지만 그 짧은 생 안에, 계절을 살고 햇살을 기억하고, 바람을 통과하며 길이 된다. 나는 그런 풀꽃을 통해 인간의 삶을 다시 바라보고 싶었다. 작은 생명의 전략 속에 숨은 큰 통찰, 그 안에서 오늘을 견디는 우리의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은 나 자신의 회복이기도 했다. 지치고 흔들리던 어느 시기에, 나는 자연에게 귀 기울였고, 그 속에서 말을 건네 오는 풀꽃들을 만났다.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들이, 나를 다시 걷게 했고, 그렇게 피어난 사유를 한 줄 한 줄 적어간 끝에, 이 책이 태어났다. 결국, 이 책은 나와 누군가를 향한 조용한 응원이자, 살아가는 모든 존재를 향한 존중의 기록이다. ■ 책을 집필하면서 겪은 에피소드, 또는 즐거웠거나 어려웠던 점은? 《풀꽃은 길이 되고, 삶은 피어난다》를 집필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한 자리에 오래 앉아 풀 한 포기를 바라보던 시간이다. 글을 쓰기 위해 일부러 산이나 들로 나간 것이 아니라, 무심코 지나던 길에서 문득 멈춰 서게 되었고, 그 작은 식물 하나를 바라보다가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풀꽃은 말을 하지 않지만, 그 형상과 자세, 주변의 바람과 어우러지는 움직임이 하나의 문장이 되었고, 그것이 글의 시작점이 되곤 했다. 즐거웠던 순간은, 의외의 단어들이 나를 찾아올 때였다. 예를 들어, ‘잡초’라는 말을 곱씹다 보면 그 안에 ‘잡다한 생의 조각들’이 숨어 있고, ‘뿌리’라는 말 속에는 버티고, 얽히고, 견디는 모든 시간이 있다. 이렇게 자연이 주는 언어와 내 사유가 만나는 순간들은 매번 신비로웠고, 그만큼 글쓰기가 참 따뜻하게 다가왔다. 반면, 어려웠던 점은, 풀꽃의 생을 빌려 인간의 삶을 말한다는 것이 자칫 억지스러운 비유로 흐를 위험이 있다는 점이었다. 너무 감상적으로 흐르지 않으면서도, 생명의 결을 섬세하게 살리고 싶었다. 그래서 문장 하나를 다듬기 위해 며칠씩 고민하기도 했고,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는 시간이 길었다. 또 하나의 고민은, 자연을 해석하는 나의 시선이 ‘교훈’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책은 정답을 주는 책이 아니라, 그저 독자와 함께 자연 앞에 앉아 조용히 바라보는 시간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에, 어떤 단정도 피하고 싶었다. 지금 돌아보면, 가장 큰 배움은 자연이 아니라 침묵에서 비롯되었다. 말보다 앞선 침묵, 그 속에서 들려온 풀꽃의 언어가, 내 글의 뿌리가 되었다. ■ 책 내용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나 애착이 가는 구절이 있다면?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은 프롤로그에 적어둔 한 문장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거대한 힘이 아니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이 모여 만들어 내는 조용한 물결이다.” 이 문장은, 제가 풀꽃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삶의 진실을 가장 잘 담고 있다. 풀꽃은 늘 땅에 바짝 엎드려 피어나고, 누구에게도 과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람의 발길 아래에서조차 묵묵히 살아간다. 그렇기에 제가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장면은 봄비에 젖은 들길에서 작은 민들레 한 송이를 마주했던 순간이다. 그 풀꽃 하나는 말없이 피어 있었지만, 저는 그 안에서 “끝내 꺾이지 않는 생명의 의지”를 보았다. 이 문장은 작은 풀꽃이 가진 힘이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 조용한 존재감, 그 미세한 떨림이 모여 결국 삶을 밀어내고, 시간을 열어가는 힘이 된다. 우리는 흔히 변화나 의미를 거대한 것에서 찾으려 하지만, 풀꽃은 묻는다. "정말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을 만큼 작고 조용한 것들이 아닐까?" 그 질문이 제 마음에 오래 남았고, 이 책을 끝까지 이끌어가는 등불 같은 문장이 되어 주었다. ■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는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셨나요? 글이 막힐 때면, 일부러 바람 부는 곳에 나가거나, 나무 그림자 아래 조용히 앉아 있었다. 눈으로 풀잎을 따라가고, 귀로 바람의 소리를 듣고, 마음으로 사라지는 꽃잎을 느끼다 보면, 말보다 먼저 감각이 깨어났고, 그 감각이 글의 실마리를 열어 주었다. 또 하나의 방법은, 글을 쓰지 않고 오래 바라보는 일이었다. 풀 한 포기, 뿌리의 흔적, 그늘 속의 작은 생명을 그냥 바라만 보는 시간. 마치 글을 '써야 한다'는 의무를 내려놓고, 글이 나를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식이었다. 그 기다림은 때로 며칠씩 이어지기도 했지만, 묵은 침묵 속에서 나온 한 줄은, 억지로 쓴 열 줄보다 더 깊고 진실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쓴다는 것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라는 걸 스스로에게 자주 상기시켰다. 내 안의 어떤 소리, 자연의 미세한 기척, 존재가 보내는 침묵의 언어들. 그것들을 충분히 듣지 못한 채 쓴 글은 늘 가볍고 얇았다. 그래서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땐, 오히려 펜을 내려놓고 이렇게 되뇌었다. “지금은 쓸 때가 아니라, 들을 때다.” 그러면 어느 순간, 조용히 문장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풀꽃처럼. ■ 이 책을 접할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풀꽃은 길이 되고, 삶은 피어난다》를 펼쳐들게 될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당신의 삶도, 지금 그 자리에서 충분히 피어나고 있습니다”라는 고요한 응원이다. 이 책은 거창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세상의 중심에서 외치는 소리보다, 길가에 조용히 피어 있는 들꽃 한 송이처럼, 작고 미세한 삶의 진동에 귀 기울이는 이야기다. 우리는 종종, 더 크고 빛나는 삶을 꿈꾸느라, 자신의 뿌리가 뻗고 있는 ‘지금 이 자리’를 잊곤 한다. 하지만 풀꽃은 말한다. 바람 부는 자리에서도 피울 수 있고, 밟히는 자리에서도 향기를 낼 수 있다고. 삶이 버거워 지칠 때, 누군가의 말보다 한 줄기 바람, 한 줄의 문장이 더 깊은 위로가 될 수 있다. 이 책이 그런 순간에,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조용한 그늘이 되기를, 그리고 다시 걷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작은 길이 되기를 바란다. 끝으로, 이 책을 읽는 당신도 누군가에게는 조용히 피어 있는 풀꽃 같은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세상은 그 작은 존재들 덕분에, 오늘도 여전히 아름답다. ■ 바른북스와 함께하면서 인상 깊었던 점 혹은 만족한 부분은? 바른북스와 함께한 출판 여정은, 마치 한 권의 책이 아닌 한 송이 꽃을 함께 피워낸 시간처럼 따뜻하고 정성스러웠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점은, 책의 방향성과 결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존중해 주셨다는 점이다. 《풀꽃은 길이 되고, 삶은 피어난다》는 작고 섬세한 감각의 언어들로 이루어진 책이기에, 자칫 소홀히 다루면 그 고요한 울림이 흐려질까 걱정했지만, 바른북스는 그 고요를 함께 들으려는 태도로 곁에 있어 주었다. 상담 과정에서도 진심 어린 피드백과 세심한 안내, 그리고 무엇보다 ‘작가의 마음’을 중심에 두는 접근이 큰 힘이 되었다. 단순한 계약 관계가 아니라, 책이라는 생명체를 함께 길러낸 동반자라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담당 편집자님께는 깊이 감사드린다. 원고의 숨결 하나하나를 함께 호흡해 주셨고, 때로는 지나친 문장을 다듬어 주고, 때로는 미처 보지 못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해주셨다. 한 문장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통할 때, 글쓰기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는 걸 느꼈다. 출판은 책을 완성하는 일인 동시에, 작가 자신을 다시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 여정을 바른북스와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함께 피운 이 한 권의 ‘풀꽃’이, 누군가의 마음에도 조용히 피어나길 바란다. ▣ 우진(宇塵) 육우균 ◇1965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남 ◇ 충남고등학교 졸업(1983년) ◇ 공주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1987년) ◇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1997년) - 석사논문 「논술문 쓰기 지도 방법 연구」 ◇ 인천 영흥고등학교 교감 퇴임(26.6년 교직생활) ◇ 중앙일보 공교육 논술자문단 자문위원 ◇ 중등교사 임용시험 채점위원 ◇ 前 경기신문 교육전문기자 ◇ 前 교육연합신문 교육국장 ◇ 現 교육연합신문 주필 ▣ 펴낸곳 바른북스
    • 기획·연재
    • 기획
    2025-07-20
  • [특별기획] 인공지능시대, 질문하는 인간이 이끄는 창의·융합 교육의 미래
    [교육연합신문=안용섭 기자] 문화예술교육 분야에서 인공지능 활용에 관한 국제적 연구 교류는 단순한 기술 도입을 넘어, 창의성과 예술성, 교육의 다양성 및 포용성 증진을 위한 실질적 대안을 모색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본지는 서울대학교에서 음악학 박사논문을 쓰고 있는 독일 출신 음악교육 연구자인 마들렌 포군트케(Madlen Poguntke) 씨가 교육 현장에서의 AI 도입 가능성과 한계, 그리고 미래지향적 방향성에 대해 다양한 시각을 제시해 온 교육연합신문의 김춘식 논설위원(동신대학교 교수)와 나눈 인터뷰 내용이 한·독 양국의 문화예술교육 현장과 인공지능 활용에 대한 생생한 경험을 담고 있으며, 미래 교육의 방향을 고민하는 독자들에게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 편집자 주 ■ Madlen Poguntke 교수님, 간단한 자기소개와 인공지능(AI)과 교육의 접점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를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ㅁ 김춘식 교수 저는 독일 함부르크대학교에서 역사학, 교육학, 정치학을 공부했고, 현재 동신대학교에서 창의융합교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교육이 단순 지식 전달을 넘어 미래 핵심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고민에서 AI와 교육의 접점에 주목하게 됐습니다. 인간 중심 교육 가치와 AI 활용의 균형이 제 연구의 중요한 화두입니다. ■ Madlen Poguntke 교육 분야에서 AI 활용과 관련한 직접적 경험이나 현장에서 느낀 변화, 도전 과제가 있으신지요? ㅁ 김춘식 교수 공학적 AI 연구는 직접 하지 않았지만, AI와 교육 관련 연구와 강연, AI 디지털 교과서 현장 적용 사례 분석 등 다양한 경험이 있습니다. AI는 교육의 효율성과 접근성을 높이지만, 비판적 사고 저하, 정서적 고립, 교육 격차 심화 등 부정적 영향도 체감하고 있습니다. ■ Madlen Poguntke AI가 교육 현장에서 활용되는 구체적 사례를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ㅁ 김춘식 교수 Gradescope, Riiid Labs 같은 자동 평가 도구는 교사의 채점 부담을 줄이고, Help Me See, Nuance 등은 장애 학생 맞춤형 지원에 활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Magic School AI, Eduaide.AI 등은 행정 자동화와 수업 자료 제작에 기여하고, Blippar(AR/VR), Duolingo, Blue Canoe 등은 몰입형 학습과 언어교육에 AI를 접목하고 있고요. ■ Madlen Poguntke AI가 앞으로 음악교육 전공 교사 양성과정에 가져올 변화와 중요해질 새로운 역량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ㅁ 김춘식 교수 꼭 음악교육 교사에게만 국한되는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음악교육 교사에게는 AI 도구 활용 능력, 데이터 분석, 디지털 콘텐츠 제작, 윤리적 판단력 등이 필수적입니다. AI는 행정·평가 업무를 보조하지만, 정서적 지지, 동기 부여, 예술적 감수성 지도 등 인간적 교육의 본질은 대체할 수 없습니다. 교사는 학생의 창의성과 다양성, 개성을 이끌어내는 멘토 역할에 집중해야 합니다. ■ Madlen Poguntke AI와의 협업이 교사를 대체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시나요? 교사의 역할 변화는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ㅁ 김춘식 교수 AI가 행정·평가 등은 보조하겠지만, 인간적 교육의 본질은 대체 불가합니다. 오히려 교사는 학생의 성장, 창의적 문제해결력, 비판적 사고를 키우는 멘토로서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 Madlen Poguntke AI 도입 과정에서의 어려움과 교사 연수, 인프라 측면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ㅁ 김춘식 교수 가장 큰 도전은 접근성과 형평성 문제입니다. 인프라 격차 해소, 체계적 교사 연수, 윤리·데이터 보호, 주체적 성장 환경 조성이 필요합니다. 학생·교사가 기술에 종속되지 않고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합니다. ■ Madlen Poguntke 한국 학교의 AI 도입 인프라 현황과 필요한 조치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ㅁ 김춘식 교수 네트워크, 디지털 기기, 지원 인력 등에서 지역 간 격차가 큽니다. 단순 하드웨어 지원을 넘어 소프트웨어, 연수, 컨설팅 등 종합적 지원 체계가 필요합니다. ■ Madlen Poguntke 독일과 한국의 AI 및 개인정보 보호 인식 차이는 무엇입니까? ㅁ 김춘식 교수 독일은 데이터 보호와 윤리, 사회적 합의를 중시하며 신중하게 접근합니다. 한국은 AI 기술 진흥과 신뢰 기반 조성을 동시에 추진하며, 보다 실용적이고 유연한 정책을 펼칩니다. 두 나라의 정책 우선순위와 사회적 가치관이 다릅니다. ■ Madlen Poguntke 문화적 차이가 AI 수용에 미치는 영향과, 사회적 수용성 측면에서 두 나라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ㅁ 김춘식 교수 독일은 신중하고 사회적 합의를 중시해 도입이 느릴 수 있지만, 신뢰를 바탕으로 안정적으로 정착합니다. 한국은 빠른 실험과 현장 적용이 특징이며, 디지털 혁신에 대한 기대와 수용성이 높습니다. ■ Madlen Poguntke 음악교육에서 AI 활용의 기회와 위험, 그리고 균형 잡힌 접근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ㅁ 김춘식 교수 AI는 맞춤형 학습, 창의성 확장, 접근성 강화에 기여하지만, 저작권·윤리 문제, 인간 창의성 약화, 기술 의존 등 위험도 있습니다. 두 나라 모두 인간의 창의성과 예술적 가치를 지키는 균형이 필요하며, 지속적 교류와 협력이 중요합니다. ■ Madlen Poguntke AI가 교육에 미치는 본질적 영향과 앞으로 주목해야 할 핵심 과제는 무엇입니까? ㅁ 김춘식 교수 AI 도입 시 정보의 정확성, 저작권, 개인정보 보호, 비판적 사고 저하 방지, 윤리적 문제, 교사의 역할 변화 등 다양한 측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AI는 보조 도구에 머물러야 하며, 인간 중심 교육 가치가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 Madlen Poguntke AI와 창의성, 인간 고유의 개성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ㅁ 김춘식 교수 AI는 창의적 도구로 인간의 창의성과 개성을 확장할 수 있지만, 인간 고유의 감정과 실재적 경험, 진정한 창의성은 대체할 수 없습니다. 예술 교육에서는 AI와 인간의 협업을 통해 창작의 지평을 넓히되, 인간만의 독창성과 감수성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 Madlen Poguntke 실제 현장에서 AI가 창의적 과정을 지원하는 구체적 사례를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ㅁ 김춘식 교수 AI 작곡 프로그램, 음성 분석 도구 등으로 학생들이 곡을 만들거나, 즉흥 연주와 편곡에 AI의 도움을 받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2024년 대한민국 글로컬 미래교육박람회에서는 AI가 작곡한 곡이 공식 대회곡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다만, AI 결과물에만 의존하지 않고 학생 스스로 창의적 탐구와 비판적 성찰을 병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Madlen Poguntke AI가 교육 패러다임 변화에 미칠 영향과 교육의 본질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ㅁ 김춘식 교수 AI는 학습 환경의 디지털화, 맞춤형 학습, 데이터 기반 평가 등 변화를 가져오지만, 인간의 성장과 전인적 발달, 정서적 지지, 사회적 관계 형성 등은 대체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AI와 인간 교사의 협력적 관계와 인간적 가치 지키기가 중요합니다. ■ Madlen Poguntke AI를 교육과정, 특히 음악 교육에 통합할 때의 기회와 위험, 그리고 균형 있는 관리 방안은 무엇입니까? ㅁ 김춘식 교수 기회는 개인화된 학습, 창의성 확장, 접근성 강화 등이고, 위험은 과도한 기술 의존, 윤리 문제, 교육 격차 심화 등입니다. 이를 위해 교사 연수, 윤리 교육, 인프라 형평성, 인간적 소통과 정서 지원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 Madlen Poguntke 학령별 AI 활용 방향과 주의점은 무엇입니까? ㅁ 김춘식 교수 초등은 놀이와 감각적 경험, 사회적 상호작용에 중점, 중등·고등은 데이터 분석과 창의적 프로젝트, 모든 단계에서 윤리·비판적 사고 교육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 Madlen Poguntke AI와 교육 융합을 위해 필요한 학제 간 협력과 인문학적 관점의 핵심 요소는 무엇입니까? ㅁ 김춘식 교수 컴퓨터 과학, 수학, 음악,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 협력이 필요합니다. 인문학적 관점에서는 비판적 사고력, 윤리적 성찰, 사회적 책임감이 중요합니다. ■ Madlen Poguntke AI가 지원하는 미래 교육에서 인간 상호작용의 역할과 교육의 본질적 가치가 AI 시대에도 지켜지기 위한 고민점은 무엇입니까? ㅁ 김춘식 교수 AI 시대 교육의 핵심은 질문하는 창의성과 인간 고유의 상상력입니다. AI는 도구이자 동반자일 뿐, 인간 교사의 정서적 지지, 창의성·비판적 사고 촉진, 윤리 교육 등은 대체할 수 없습니다. 교육은 지식 전달이 아닌 문제 발견과 재정의, 상상력과 실행력의 협업, 윤리적 성찰을 중심으로 재설계되어야 하며, 인간의 질문과 창의성이 기술 발전을 주도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AI가 지원하는 미래 교육에서 인간의 상호작용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AI는 효율성과 맞춤화, 정보 제공 등에서 강점을 갖고 있지만, 정서적 지지, 창의성과 비판적 사고 촉진, 개별화 멘토링, 윤리 교육, 협력적 환경 조성 등은 AI가 대체할 수 없는 본질적 가치입니다. 앞으로의 교육은 AI와 인간 교사의 협력적 관계를 바탕으로, 학생의 전인적 성장과 정신적 건강, 사회적 책임의식을 함께 키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교육의 본질적 가치가 AI 시대에도 흔들림 없이 지켜지도록, 우리 모두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 기획·연재
    • 기획
    2025-06-28
  • [기획] 교과서박물관이 전하는 교과서 이야기㈑ – 제1차 교육과정기(1954~1963년)
    [교육연합신문=안용섭 기자] 1954년 4월부터는 그동안 준비해 왔던 교수요목에 의거해 제1차 교육과정이 시작된다. 이 제1차 교육과정 시기는 6.25 전쟁을 겪은 뒤에 4.19 혁명, 5.16 군사정변이 있었던 격동의 시대였다. ▮ 1954년 4월 20일 문교부령 제35호로 ‘교육과정 시간 배당 기준령’이 제정·공포됐으며 법령상의 명칭은 ‘교과과정’이었다. 제1차 교육과정은 교과중심 교육과정이었는데, 1947년 당시의 교수요목은 임시방편으로서의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교육법」이 제정됨에 따라 기존의 교과를 기본으로 하여 최초로 우리 손으로 만든 국가 수준 교육과정 체제를 확립했다. 이 교육과정에서는 학습자의 경험과 생활을 중요시하는 생활 중심 교육과정의 개념이 들어 있는데, 이러한 특색은 미국의 진보주의 교육 사조와 신교육 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생활 중심 단원으로 부르기도 했다. ▮ 제1차 교육과정은 전쟁으로 파괴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현실 생활을 개선하고 향상시킬 사회 개선의 의지를 강조했으며 정부 수립 후 제정하고 공포한 「교육법」의 교육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교육과정을 목표로 했다. 또, 반공 교육, 도의 교육, 실업 교육을 강조했고 특별활동 시간을 최초로 배정했다는 점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 학교급별 교육과정 편제는 교과 활동과 특별 활동의 2대 영역으로 편성돼 있으며, 교과별 교과 과정의 구성 체제는 교과별 목표와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고등학교 교육과정 편제에서 도덕 과목이 신설됐으며, 반공 교육, 도의 교육, 실업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 이 시기의 교과서의 특징은 종래의 4×6판을 국판(5×7판)으로 개선했고, 활자기 도입으로 활자를 개량해 인쇄를 선명하게 했다. 초등학교의 기본 교과서는 모두 국정으로 해 검정 교과서가 없어지게 됐고, 중·고등학교 교과용 도서는 국정과 검·인정 교과 사업이 병행됐다. ▮ 교과서의 판형은 주로 국판(5×7판), 4×6판, 5×6판, 4×6배판 등이 혼용됐으며, 지질은 본문의 경우에 마분지 갱지(45g/㎡), 표지는 모조지 또는 마분지를 사용했다. 컬러는 초등 1학년의 경우에는 원색을, 그 밖에는 단색을 사용했으며, 표지는 단색, 원색을 학교급에 따라 다르게 적용했다. ▮ 여기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철수’와 ‘영이’가 1960년대와 70년대를 대표하는 교과서 주인공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철수’와 ‘영이’는 1948년 『바둑이와 철수』에 처음 등장한 이래로 1964년(제1차)까지의 주인공이고, 1964년부터 1972년(제2차)까지는 ‘인수’와 ‘순이’였고, 1973년부터 1983년(제3차)까지는 ‘기영’이와 ‘순이’가 우리 초등학교 1학년 1학기 때의 국어 교과서 주인공이었다. 철수와 영이는 친구 사이가 아니라 남매 사이라는 점은 교과서를 보면 확인하실 수 있다. 두 주인공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구성은 오늘날의 스토리텔링 기법의 원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국어 1-1』 표지와 본문 ◀ 애니메이션 「검정 고무신」은 1960년대 후반 서울특별시 마포구에 살고 있는 대가족을 배경으로 기철(중학생), 기영(국민학생) 형제가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았고 있는데,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에 집 안에서 일어나는 가족 간의 갈등, 일상생활 등, 학교 교실에서 일어나는 코믹한 에피소드들, 동네 골목에서의 놀이 등 정겨운 시대에 대한 추억과 잔잔한 감동을 느끼게 한 애니메이션이다. 여기에서 주인공의 이름이 ‘기영’이라는 사실이 우연이 아닐 것이다. ▮ 제1차 교육과정기에 발행된 검정 교과서의 외형 체제에 대한 규정은 엄격했는데, 1955년 10월 6일 제정된 ‘검인정교과서 형식 사열 기준’과 1960년 11월 1일 제정된 ‘교과용도서체제 기준’을 엄격히 준수해야만 했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먼저 첫 번째로, 판종(판형)은 4×6판, 5×6판, 5×7판, 4×6판배 판으로 한다고 했다. 다만, 음악과 교과서, 미술과 교과서 및 지도첩은 5×7판 이상 5×7배판 이하로 하고, 기타 교과의 교과서는 5×7판을 원칙으로 하되 5×6판 또는 4×6판도 용인했다. ▸ 두 번째로, 활자다. 활자는 중등학교 교과서의 본문 활자의 크기는 5호(15Q) 이상으로 했으며, 고등학교 한문 및 중국어의 학생용 교과서의 본문은 4호(20Q) 이상이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또, 활자는 정확 명료해야 하며 자획이 선명해야 한다고 했다. ▸ 세 번째로, 행수, 자수, 자간, 여백과 관련된 사항이다. 행수는 판종(판형)과 활자 크기에 의거해 5×7판에 5호 활자를 사용하는 것을 기준으로 해 1면 본문을 750자 이내로 하되 단, 1면의 본문이 25행을 넘을 수 없으며 1행은 32자를 넘을 수 없다고 했다. 어간을 반각으로 하고, ‘, . ! ?’ 등 기호는 반각으로 간주해 이들 기호와 다음 글자 사이는 전각으로 했다. ▸ 네 번째로는 인쇄다. ①인쇄는 선명해야 한다. ②인쇄에 농담이 없어야 한다. ③글자 이외의 지면이 깨끗해야 한다. ④글줄이 바르게 돼 있어야 한다. ⑤삽화는 명료해야 한다. ▸ 다섯 번째로, 체제다. 표지는 120근 이상의 후지를 사용해야 하며, 교과용 도서 검인정을 받은 표시는 안표지에 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 여섯 번째로, 제본이다. 제본은 견고해야 하며, 책면은 고르게 제본이 돼야 한다고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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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4
  • [기획] 교과서박물관이 전하는 교과서 이야기 ㈐ – 미 군정기 및 교수요목기
    [교육연합신문=안용섭 기자] ▶ 최초의 한글활자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 1. 미 군정기(1945~1948년) 1945년 해방을 맞아 신조선의 조선인을 위한 교육으로 미 군정 시대가 시작됐다. 미 군정기에는 학교교육을 통해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이식하고 식민지 교육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했다. ‘교육에 대한 긴급 조치’를 통해 초등학교, 당시에는 국민학교였다. 수업이 시작돼 우리말과 글과 역사를 가르치게 됐다. 미군정청 학무국에 의한 교육 방침에 따라 교수 용어는 일본어 대신 한국어로, 또 조선의 이익에 반하는 교과목들, 특히 일제 황민화 교육을 주도했던 과목들이 일체 금지됐다. ▮ 미 군정기는 불과 3년밖에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때 현대 한국 교육의 기본 틀이 마련됐다. 미군은 반공 이념이 투철하고 자유민주주의적 성향을 지닌 한국인 미국 유학생들을 발탁해, 미군정 학무국과 한국교육위원회 및 조선교육심의회에 배치했다. ▮ 미 군정은 인문 학교와 실업 학교의 학제가 완전히 분리돼 있던 복선형 학제를 단선형 학제로 바꿈으로써, 종전의 인문 교육과 실업 교육의 제도적 분리에서 기인한 빈부에 의한 학교 진학의 차이를 없애려 했다. 또, 미국식 수업 연한을 도입해, 학제를 6·3·3·4제로 개편했다. 이들은 한국인의 높은 교육열과 38선 이남에 자유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목표를 고려해 국민학교를 의무교육화 했다. ▮ 이 시기의 주요 특징으로는 민주 시민을 양성하는 공민과를 신설했으며, 우리의 말과 글 중심의 국어 교육을 강화했다. 또, 우리의 국사 교육도 시행했다. 8월 15일 해방 후 미 군정이 시작되면서 국민학교는 9월 24일에, 중등학교는 10월 1일에 교과서 한 권도 없이 교실 문을 열게 된다. 교과서뿐만 아니라 교사들조차 턱없이 부족한 시기였기 때문에 교과서 대신 임시적으로 칠판에다 쓰고 공책에다 베끼고, 임시로 제작된 교과서를 사용하다가 11월에 가서야 미군정청 학무국에서 『한글 첫걸음』이라는 국어 교과서가 발행된다. 종이가 부족하고 활자도 없던 어수선한 시대인 관계로 3개월의 진통 끝에 만들어진 교과서였다. ▮ 『한글 첫걸음』을 비롯한 국어 교과서를 가장 먼저 편찬 발행한 미군정청 학무국은 계속해 『공민』, 『역사』, 『지리』, 『음악』, 『잇과』 등의 교과서를 발행했다. 『한글 첫걸음』은 국판(A5판) 크기의 50쪽으로 구성돼 있다. 말살됐던 국어 교육을 급속히 회복하기 위해 국민학교의 『초등 국어 교본』과 중학교의 『중등 국어 독본』을 각각 편찬했으나, 특수한 사정은 상급 학년일지라도 모두 한글을 배우지 못해 읽을 수 없었다. 따라서 국민학교 1·2학년은 『초등 국어 교본』 상권으로 한글을 가르치고, 3학년 이상과 중학교에서는 교과서에 들어가기에 앞서 『한글 첫걸음』으로 먼저 한글을 익히게 했다. 정인승(鄭寅承) 선생을 책임자로 해 장지영(張志暎)·윤재천(尹在天) 선생 3인의 기초 위원에 의해 편찬됐다. ▮ 이렇게 추진되어 온 교과서 편찬 사업은 미 군정이 끝날 무렵인 1948년 6월에는 『한글 첫걸음』, 『초등 국어』, 『공민』, 『중등 공민』, 『우리나라 발달』, 『국사 교본』, 『사회 생활』, 『중등 국어』, 『초등 셈본』, 『잇과』, 『노래책』, 『글씨본』, 『가사』, 『농사짓기』 등 54종의 교과서를 발행하게 됐다. ▮ 이 시기에 배웠던 교과목을 살펴보면, 국민(초등)학교는 모두 12교과로 공민, 국어, 역사, 지리, 산수, 잇과, 체조, 음악, 습자, 도화·공작, 요리·재봉, 실과이며 학년별 주당 수업 시간 수는 22~33시간이었다. 중등학교는 모두 14교과로 공민, 국어, 지리·역사, 수학, 물리·화학·생물, 가사, 재봉, 영어, 체육, 음악, 습자, 도화, 수예, 실업이 있었으며 학년별 주당 수업 시간 수는 32~36시간이었다. 그리고 이 시대의 교육은 무엇보다도 일제 강점기의 잃어버렸던 한글(국문)에 대한 교육이 최우선이었다. 『한글 첫걸음』을 비롯해서 『국문 독본』과 같은 한글 교육에 대한 교육 교재들이 많이 만들어졌던 시기였다. ▮ 체제 면으로 볼 때, 당시의 교과서는 4×6판과 국판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면수가 적고 지질이 아주 나빠 마분지 같은 용지를 썼다. 그리고 활자가 아주 나빴을 뿐만 아니라 자형도 가지각색 였다. 컬러 인쇄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흑백으로 인쇄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2. 교수요목기와 6.25 전쟁 시기(1946~1953년) 1946년 가을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미 군정청은 일부 교수요목이 포함된 각급 학교 교육과정을 공포했다. 그래서 1946년 9월 1일에는 ‘국민학교 교수요목’을 전달했고, 1946년 9월 20일에는 중학교의 학제 변경에 따른 교과목별 주당 수업 시간표를 정하고, 교과목별 교수요목을 전달했다. ▮ 이 교수요목에는 다음의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교과별 교수요목에는 교사가 학생에게 가르칠 교수 내용의 ‘주제’ 또는 ‘제목’을 열거했다. 둘째, 구성 체계는 교과별로 각론이 중심이 됐다. 셋째, 교과별로 각 교과의 지도 내용을 상세히 표시하고, 기초 능력을 배양하는 데 주력했다. 넷째, 교과는 분과주의를 채택해 체계적인 지도와 지력의 배양에 중점을 뒀다. 다섯째 홍익인간의 정신에 따라 애국 애족의 교육을 강조했으며 한글 전용과 우리말 도로 찾기 및 우리 말 용어 제정 등과 같이 일제 잔재를 없애려고 노력했다. ▮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교육과 관련해 획기적인 변화는 1949년 12월 31일 「교육법」의 제정·공포였다. ‘홍익인간’을 교육 이념으로 채택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바둑이와 철수』는 1948년 정부 수립 직후 문교부에서 최초로 편찬·발행해 첫 정규 교과서로 사용한 초등학교 1학년 1학기용 국어 교과서다. 이 교과서는 12개 단원을 하나의 이야기 학습 체제로 잇는 스토리텔링 방식을 도입했으며, 교과서 일부를 컬러로 인쇄한 것이 특징이다. ▶『바둑이와 철수』 표지와 본문◀ 『바둑이와 철수』가 발행된 1948년 10월 5일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교육과정·교과서연구회, 한국교과서연구재단, 한국교과서협 등은 매년 10월 5일을 ‘교과서의 날’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다. ▮ 교수요목은 정부 수립과 교육법의 제정에 따라 새롭게 개정될 예정이었으나, 6.25 전쟁으로 중단된다. 6.25 전쟁으로 인해 한 때 교육이 마비되자, 정부는 「전시 하 교육 특별 조치 요강」을 발표해 전쟁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계속 제공하고자 했는데, 이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었다. 문교부는 1951년에 학생들의 전시 생활을 지도하기 위한 임시 교재로서 초등학교용 『전시 생활』 9종과 중등학교용 『전시 독본』 3종 등 12종을 발행해 피난 학생들에게 무상으로 배부하며 교육을 이어갔다. ▮ ‘전시 생활’은 6.25 전쟁 시기에 편찬·발행된 초등용 교과서이다. 전시 상황에서의 생활을 지도하기 위한 임시 교과서로, 전쟁 시기이기 때문에 교과서명이 매우 특이했다. 초등학교 1~2학년용의 경우에 『비행기』, 『탕크』, 『군함』 등과 같이 전쟁 물자와 관련된 교과서명을 사용했고, 초등학교 3~4학년용인 『싸우는 우리나라』,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 『씩씩한 우리 겨레』 등과 초등학교 5~6학년용인 『우리나라와 국제연맹』, 『유엔군은 어떻게 싸웠나?』, 『우리도 싸운다』 등은 전쟁과 관련된 교과서명을 사용했다. ▶‘전시 생활’ 교과서들◀ ▮ ‘전시 독본’은 전쟁 시기에 편찬·발행된 중등학교용 전시 교과서이다. 즉, 전쟁 중에 임시로 교육하기 위한 조치로, 교과서다운 면모를 갖추지 못한 채 전시 생활을 지도하기 위한 임시 교과서이다. 이 중등학교용 ‘전시 독본’은 『침략자는 누구냐?』, 『자유와 투쟁』, 『겨레를 구원하는 정신』의 1종 3집 3책으로 편찬됐는데 공급이 가능한 수복 지역에 보급해 학습 자료로 활용됐다. ▮ 6.25 전쟁 시기에 (주)미래엔의 경우에 서울에 본사를 두고 있었는데 전쟁이 발발하자 공장을 부산으로 이전하게 된다. 직원 몇 명이 목숨을 걸고 공장 설비를 트럭도 아닌 우마차를 이용해 인천으로 옮기고 군함의 도움을 받아 부산으로 어렵게 이전하게 됐고, 부산 공장에서 전시 교과서를 출판해 학생들에게 나눠 줬다. 교육에 대한 사명과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없었더라면 목숨을 건 이러한 행동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전쟁 시기에는 물자가 부족해 책의 지질도 좋지 못하고 책의 두께도 얇고, 크기도 4×6판인 지금 교과서의 반절 크기로 발행한 특징이 있다. ▮ 운크라, 즉 국제연합 한국재건위원단과 자유아시아위원회, 샌프란시스코 등에서 원조한 종이와 지원금으로 교과서를 계속 인쇄할 수 있었는데, 『국어 6-3』과 『과학 공부 4-3』이라는 교과서는 학년, 학기(학제)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종이가 원조되는 대로 1학기와 2학기 교과서를 나눠서 인쇄한 순서를 표시한 것이다. 전쟁으로 인한 어려웠던 시기의 교육을 단편적으로 보여 주는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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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27
  • [기획] 교과서박물관이 전하는 교과서 이야기㈏ – 일제 강점기
    [교육연합신문=안용섭 기자] ▶ 최초의 한글활자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 일제 강점기의 교육은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부터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독립 사이에 있었던 교육 현상과 교육 기관의 양상을 의미한다. 1910년 8월 29일, 일본 제국은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직후 종전의 통감부를 총독부로 승격 개편하고, 헌병과 비밀 경찰을 동원한 무단 통치를 실시했다. ▶ 일제 강점기 교과서 전시 모습 ◀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 정책과 달랐다. 서구의 식민지 정책은 기본적으로 식민지를 본국의 부강을 위해 식민지를 단순하게 이용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었으나, 일제는 식민지 주민의 민족의식과 민족문화를 말살하고, 식민지와 본국을 하나의 나라로 통합하려고 했다. 일제는 이를 위해 교육을 효과적으로 활용했으며 때와 목적에 따라 교육 기회를 억제하여 민족의식의 고취를 방지하기도 하고, 교육의 기회를 확대해 일제의 황국의식을 교육하기도 하는 양면적 교육 정책을 구사했다. 일제는 조선총독부의 교육령을 통해 조선의 교육 정책을 운용했다. 「조선교육령」은 1911년 공포된 이후 총 3차례(1922년, 1938년, 1943년)에 걸쳐 개정됐다. 「조선교육령」은 일본 군국주의의 교육 정신을 담고 있는 ‘교육에 대한 칙어’에 바탕을 두고 제정됐다. 이 때문에 「조선교육령」의 목표는 일본에 대해 충량한 국민을 양성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아울러 식민지 교육으로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조선 내에서의 교육을 보통 교육과 실업 교육·전문 교육으로 한정했으며, 고등 교육에 대한 규정은 아예 두지 않았다. ▮ 「조선교육령」에서는 차별적인 학제를 도입해 조선인과 일본인을 별도로 교육했다. 조선 내의 조선인과 일본인의 학교의 명칭은 서로 달랐으며, 수업 연한과 수업 내용에서도 두 학교는 다소간의 차이를 보였다. 또, 인구 비례상으로도 일본인 학교의 수가 조선인 학교의 수보다 훨씬 많았고, 교육 예산도 조선인에 대한 교육과 일본인에 대한 교육이 분리돼 편성됐고, 결과적으로 1인당 일본인에게 배당된 교육 예산은 1인당 조선인에게 배당된 교육 예산보다 월등히 많았다. ▮ 현재 대한민국의 중·등 교육과정에서는 이 「조선교육령」과 개정 사항을 제1차 「조선교육령」, 제2차 「조선교육령」, 제3차 「조선교육령」, 제4차 「조선교육령」으로 지칭하나, 학술 용어로는 「조선교육령」과 「개정(조선)교육령」이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일제 강점기의 주요 교육 목표로는 일제의 식민 지배에 따른 황국 신민 양성이었으며, 우리나라의 독립 운동의 입장에서는 민족정신,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민족 교육이 이뤄졌다. ▮ 교과서 발행의 특징으로는 사진 제판, 오프셋 인쇄 기술을 적용한 교과용 도서가 출판됐으며, 활자의 크기와 삽화 안배, 컬러 인쇄 방식이 적용됐다. 또, 판형(국판)과 분량을 통제하는 방법도 도입됐다. 조선 총독부에서 출판한 교과서를 주로 사용했으며, 국정 교과서는 주로 조선총독부의 관방 인쇄·출판 기관인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등에서 발행했다. ▮ 일제 강점기는 국어가 한글이 아닌 일본어로 사용됐던 암울했던 시기였다. 민족주의 사상가들과 애국지사들이 활발하게 교과서에 대한 저술 활동을 하고 한글 활자로 교과서를 펴내던 시절이 저물고 민족의 정기가 모두 죽어 버렸던 시기였다. 『국어독본』과 『조선어독본』 교과서의 비교를 통해 나라 잃은 설움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국어독본』은 우리의 말과 글이 아닌 일본어로 돼 있는 교과서이다. 우리의 말과 글은 『조선어독본』이라는 교과서로 배웠는데 이마저도 나중에는 선택 과목으로 지정돼 사실상 우리의 말과 글이 교실 밖으로 추방됐던 시기였다. 즉, 교과서는 일제의 통치 수단으로 사용됐던 것에 불과했다. 『조선어독본』 『국어독본』 ▮ 이 당시의 교과 내용은 주로 조선인을 우민화, 신민화하는 작업의 하나었다. 일제 강점기 36년간의 교과용 도서에 나타난 가장 뚜렷한 특징은 우리의 말과 글을 부정하고 우리의 역사를 부정하면서 일본 제국주의 이념으로 무장시킨 것이다. 우리 민족의식과 우리 민족문화를 모두 말살하려 했다. 이 시기에 일어난 조선어학회 사건은 일제 강점기 때 조선어를 연구한 학자들을 탄압한 사건이다. 조선어학회는 1929년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했다. 조선어사전편찬회의 발기인은 모두 108명이며 일제의 방해로 내란죄 등의 명목으로 기소돼 옥중에서 사망하거나 해방 이후에 석방된다. 조선어학회는 해방 후 조직을 정비한 뒤 1949년 9월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꿨다. 참고로 『말모이』는 영화로도 유명한데, 1911년 주시경이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우리말 사전이다. 최남선(崔南善)이 설립한 조선광문회에서 주시경(周時經) 선생과 그의 제자들인 김두봉(金枓奉) · 권덕규(權悳奎) · 이규영(李奎榮) 선생 등이 민족주의적인 애국 계몽의 수단으로 편찬했다. 1911년부터 편찬이 시작돼 거의 원고가 마무리됐으나 안타깝께도 편찬자들의 사망·망명 등으로 출판되지 못하고 현재는 그 일부의 원고가 남아 있는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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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26
  • [기획] 교과서박물관이 전하는 교과서 이야기㈎ - 개화기
    [교육연합신문=안용섭 기자] 개항 이후 서양의 근대 문화에 접하게 된 조선 정부는 구래의 전통적 유교 교육을 청산하고 서구의 신문화를 섭취하기 위한 신식 교육을 실시했다. 한편,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맞서기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한 민간 유지들에 의해서도 일종의 민중 교육 운동이 추진됐고 조선에 진출한 기독교계 선교 단체들에 의해 선교 계통의 학교도 세워졌다. ▶ 개화기 교과서 전시 모습 ◀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고 한 이 시기 교육 운동가들의 구호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과 같이, 이 시기의 교육 운동은 국권의 수호를 위한 결의였으며, 생존을 위한 실력 배양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민중 교육 운동은 보통 교육 분야뿐만 아니라 중등 교육 내지 전문 교육의 영역으로 확대돼 가고 있었으며, 여성 교육과 기술 교육도 적극적으로 추진됐다. 근대 초기의 교육은 학교급이 나눠 시행된 것이 아니었으며,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세워진 학교가 대부분이었다. 근대 말기에 이르러서야 초등 교육 기관과 중등 교육 기관으로 학교급이 분별되게 됐다. 학교급의 분화와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소학교의 경우에 소학교령(小學校令)이 1895년 7월 19일부로 처음 초등 교육의 관제(官制)가 정해졌다. 이 영(令)은 본령 4장 29조로 돼 있다. 1장은 소학교의 목적 및 종류·경비로 돼 있고, 2장은 소학교 편제 및 취학, 3장은 학교 설치 및 감독, 4장은 직원에 대해 각각 규정하고 있다. ▮ 중학교는 1899년 4월 4일에 공포된 중학교 관제에 의해 처음 중등 교육에 대한 관제가 정해졌다. 전문 17조로 된 학규(學規)로 돼 있다. ▮ 외국어 학교의 경우에 1895년 5월 10일 전문 11조로 된 외국어 학교 관제가 공포됐다. 외국어 학교는 외국의 어학을 교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1조), 외국어의 종류는 필요에 따라 학부대신이 정하도록 했으며(2조), 학부대신은 필요에 따라 지방에 분교를 둘 수 있고(3조), 직원은 학교장 1인, 교관 4인 이하, 부교관 5인 이하, 서기 3인 이하를 두되(4조), 필요한 경우에는 교관·부교관 또는 외국인을 고용할 수 있으며, 그 인원수는 학부대신이 필요에 따라 정하도록 했다(11조). ▮ 실업학교에 대한 관제는 1889년 3월 24일 의(醫)학교 관제, 동년 6월 24일 농·상·공학교(農商工學校) 관제가 발표됐다. 설립된 학교는 1889년 2월 정부에 의해 경성의학교(京城醫學校:뒤에 경성의학전문학교로 발전됨.), 같은 해 5월 상공학교가 세워졌다. 이 학교는 예과·본과를 두고, 농·상·공업을 가르쳤다. 이후 5년 후에는 1904년 농공상학교로 개칭했다. 편제는 농과·상과로 나누고, 수업 연한을 예과 1년, 본과 3년으로 정했다. 그 뒤에 농과는 수원농과학교, 공과는 경성공업전습소, 상과는 선린상업학교로 발전했다. 또, 1900년 8월 광학(鑛學)·실업을 가르치는 광무학교(鑛務學校), 1897년 우무학당(郵務學堂)·전무학당(電務學堂)이 나타났으나 1910년의 경술국치 이후 둘 다 폐지됐다. 또, 1895년 3월 당시 법원이었던 평리원(平理院) 안에 새로 법관양성소가 생겼는데 이것이 경성법학전문학교의 전신(前身)에 해당한다. 이 시기의 교과서는 적용 면에서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 하나는 민간인 발행 교과서이고, 또 하나는 지금의 교육부라고 할 수 있는 학부에서 발행한 정부 주도의 교과서이다. 이 시대의 교과서의 특징은 민족주체성 확립과 애국애족의 정신을 강조한 것이었다. 특히, 민간 발행인 교과서가 더욱 그러했다. ▮ 1895년 정부 기관인 학부 발족과 함께 가장 주된 업무가 교과서 편찬 발행과 각급 학교의 설치 작업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정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국민소학독본』과 『조선역사』 등을 시작으로 학부를 중심으로 새로운 교과서들이 발행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학부대신 보좌원으로 일본인들을 고용하게 되며, 1905년 을사조약 이후에는 교육 행정의 실질적인 권한이 일본인들에게 넘어가게 됐다. ▮ 교과서 검정제가 1907년부터 일본인에 의해서 생겨남으로써, 이후 민간 발행인 국민 교육 도서가 사라지게 되고 서서히 일본인의 구미에 맞는 친일파적인 교과서로 변해 가게 됐다. 1909년에는 대부분의 우리 교과서들이 금지되고, 1910년에 20여만 권이 넘는 교과서가 일본인들에 의해 압수돼지고 불태워지게 된다. 이 시기 교육의 핵심은 외국어 교육, 교사 양성, 실업 교육에 비중을 뒀으며, 기회 균등 사상이 각성됐다. 교과서의 특징으로는 근대적인 인쇄술 및 장정술이 도입됐고 용지 등의 자재 사정이 개선됐다. 주로 정부의 학부에 의해 국정 교과서로 발행됐으며, 교과서에 처음으로 삽화가 도입됐다. ▮ 소학교용 교과서(심상과 3년)로는 『수신』, 『독서』, 『작문』, 『습자』, 『산술』, 『체조』, 『한국 지리』, 『국사』, 『도화』, 『외국어』 등이 있었다. 고등과(2년 또는 3년) 교과서로는 『수신』, 『독서』, 『작문』, 『습자』, 『산술』, 『본국 지리』, 『본국 역사』, 『외국 지리』, 『외국 역사』, 『이과』, 『도서』, 『체조』, 『제봉(여아)』, 『외국어』 등이 발행됐다. ▮ 중학교 교과서(심상과 4년)로는 『윤리』, 『도덕』, 『작문』, 『역사』, 『지리』, 『산술』, 『경제』, 『박물』, 『물리』, 『화학』, 『도화』, 『외국어』, 『체조』 등이 있었다. 개화기의 교육 기관으로는 경학교, 사범학교, 한성사범학교, 한성중학교, 중학교, 실업학교, 소학교, 서당, 사숙, 외숙, 강습소 등이 대표적이었다. 당시에 발행됐던 몇몇 교과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국민소학독본』은 1895년 7월에 간행된 최초의 관찬 교과서로서 신식 학교의 교과서로 처음으로 국문이 교과서에 정식으로 등장했다. 명현의 행덕을 중심으로 도덕 교육에 중점을 뒀으며 처음으로 국문이 교과서에 등장했다. 애국심에 관한 것, 교육(면학), 국제 이해, 역사, 지리, 기술, 동식물, 경제, 과학, 사회 윤리, 이렇게 열 개 분야로 내용이 편제돼 있다. ▶ 『국민소학독본』 ◀ ▮ 『신정 심상소학』은 3권 체제의 교과서로서, 학교와 학년 체제에 맞춰져 있고 비교적 언문일치에 가깝다. 농·공·상에 대한 것, 동식물에 관한 것, 자연 현상과 사회생활 등 여러 내용이 혼합돼 있다. 교과서 본문에 처음으로 삽화를 넣었다. ▶ 『신정 심상소학』 ◀ ▮ 『유년필독』은1907년 현채가 초등학교의 역사와 지리 교육을 위해 편찬한 교과서이다. 4권 2책으로 구성돼 있으며 휘문관(徽文館)에서 발행했다. 국한문 혼용체이며, 한자에는 한글토를 달아놓았으며 총 132과(課)로 구성돼 있다. 책머리의 범례를 통해 살펴본 이 책의 간행 목적은 애국사상의 고취를 위주로 해 역사·지리 교육을 통해 민족의 전통적 주체성을 확립시키고 나아가서는 새로운 세계 사정을 익혀 국제 경쟁에서 자립할 수 있는 국민을 교육함에 두고 있다. 이에 따라 책의 내용은 우리나라의 역사·지리와 세계 사정을 개괄, 설명, 소개한 글로 엮어져 있다. 유년용 교과서로서 그 대상이 아동에 한한 것으로 잘못 이해되기 쉬우나, 편찬자의 의도는 장년과 노년층까지를 포함한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유년필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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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26
  • [기획] 교과서박물관 둘러보기⑩ – 교육 자료 특별 기획전
    [교육연합신문=안용섭 기자] 미래엔교과서박물관(관장 김동래)은 2003년 9월 24일 개관해 2024년도에 20주년이 됐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오랜 기간 수집해 왔지만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보물들인 교육 자료를 공개하게 됐다.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우리나라의 교육 현장에서 직접 사용되거나 활용됐던 교육 자료를 주제별로 모아 선보인 것이다. 이번 기획 전시의 주제는 우리의 동요 제목인 <학교 종이 땡땡땡>으로, 동요의 가사에 맞춰 당시의 학교생활과 관련된 물건들을 보며 추억을 소환해 보는 소중한 시간을 가지고자 했다. ▶ 교육 자료 특별 기획전 전경 ◀ 전시의 목적은 첫 번째로, 우리 교과서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소장품 중에서 교과서 외의 교육 자료를 공개함으로써 관람객의 궁금증을 해소하고 만족도를 높이고자 함이었다. 두 번째로, 과거에 활용했던 교육 자료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나라 교육의 변천 과정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자 함이었다. 세 번째로, 관람객들에게 과거로의 여행을 통한 추억을 되새기는 계기를 마련하고 평온한 휴식의 시간을 함께 제공함으로써 관람객의 문화 향유권을 제고시키고자 함이었다. 기획 전시 <학교 종이 땡땡땡>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주제를 가지고 각 코너를 운영하고 있다. ▮ 첫 번째로, <제1부.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는 등굣길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들판에 봄가을로 피어 있는 아름다운 들꽃들을 바라보며 등교하는 모습, 학교 앞 문방구에서 각종 물건과 게임 기구에 현혹돼 한눈팔던 시절이 있었다. 전시된 소장품으로는 학생 가방, 명찰, 선도부(기율) 완장, 양은도시락 등이 있다. ▶ <제1부.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전시 모습 ◀ ▮ 두 번째로, <제2부. ‘사이좋게 오늘도 공부 잘하자’>는 학창 시절 수업 시간, 쉬는 시간, 점심시간 등 학교 내에서 하루 종일 친구들과 선생님이 즐겁게 생활하던 일들을 소환해 보고자 했다. 이 두 번째 주제는 학교 수업과 관련된 내용을 ‘수업 시간에는’라는 소주제와 운동회 등의 학교생활을 다룬 ‘우리들의 학교생활’이라는 소주제로 나눠 전시하고 있는데, 입학식에서부터 졸업식에 이르는 각종 학교 행사들도 추억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볼 수 있도록 했다. 첫 번째 소주제의 전시 소장품으로는 주요 전시 소장품은 교련 가방, 전과, 학생이 직접 그린 포스터 및 그림 등이 있다. ▶ <제2부. ‘사이좋게 오늘도 공부 잘하자’> 전시 모습(1) ◀ ▮ 두 번째 소주제의 전시 소장품으로는 출발총, 생활통지표, 건강기록부, 스케이트, 운동회 물품 등이 있다. ▶ <제2부. ‘사이좋게 오늘도 공부 잘하자’> 전시 모습(2) ◀ ▮ 세 번째로, <제3부.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선생님이 사용했던 물건들을 중심으로 선생님의 시각에서 얼마나 학생들을 사랑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가르쳤는지를 소개해 보고자 했다. 전시하고 있는 주요 소장품은 교사용 학습 지도안, 타자기, 철필, 순찰 시계, 교사용 지도서 등이다. ▶ <제3부.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전시 모습 ◀ - 흑백 사진으로 보는 ‘정겨웠던 순간들’ - 이러한 기획 전시 <학교 종이 땡땡땡>과 연계해 1960년대~70년대의 학교생활을 담은 흑백 사진전을 진행하고 있다. 대한민국사진대전 초대 작가이며, 전 교육부 초등교육정책과장, 서울성북교육장을 역임한 김완기 선생의 흑백 사진 작품 27점을 선정해 액자에 담아 전시하고 있는데, 김완기 선생은 교육 현장에서 교사, 교감, 교장, 교육장 등 교육 전문직으로 종사하시면서 다양한 교육 경험을 바탕으로 해 우리나라 최초로 교육 활동과 사진 촬영 활동을 접목시키신 선생님이다. 1960년대부터 70년대 어려웠던 시절,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당시 교육 현장의 생생한 모습을 여과 없이 사진에 담았다. 관람하는 관람객은 당시의 학교생활을 회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든다. ▶ 김완기 선생 사진전 <정겨웠던 순간들> ◀ 시간은 화살처럼 흘렀어도 추억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존재한다. 이번 기획 전시를 통해 세월이 흘러도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학창 시절로의 여행을 떠나 보기를 권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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