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연합신문=안용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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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한글활자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
일제 강점기의 교육은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부터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독립 사이에 있었던 교육 현상과 교육 기관의 양상을 의미한다. 1910년 8월 29일, 일본 제국은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직후 종전의 통감부를 총독부로 승격 개편하고, 헌병과 비밀 경찰을 동원한 무단 통치를 실시했다.

▶ 일제 강점기 교과서 전시 모습 ◀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 정책과 달랐다. 서구의 식민지 정책은 기본적으로 식민지를 본국의 부강을 위해 식민지를 단순하게 이용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었으나, 일제는 식민지 주민의 민족의식과 민족문화를 말살하고, 식민지와 본국을 하나의 나라로 통합하려고 했다. 일제는 이를 위해 교육을 효과적으로 활용했으며 때와 목적에 따라 교육 기회를 억제하여 민족의식의 고취를 방지하기도 하고, 교육의 기회를 확대해 일제의 황국의식을 교육하기도 하는 양면적 교육 정책을 구사했다.
일제는 조선총독부의 교육령을 통해 조선의 교육 정책을 운용했다. 「조선교육령」은 1911년 공포된 이후 총 3차례(1922년, 1938년, 1943년)에 걸쳐 개정됐다. 「조선교육령」은 일본 군국주의의 교육 정신을 담고 있는 ‘교육에 대한 칙어’에 바탕을 두고 제정됐다. 이 때문에 「조선교육령」의 목표는 일본에 대해 충량한 국민을 양성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아울러 식민지 교육으로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조선 내에서의 교육을 보통 교육과 실업 교육·전문 교육으로 한정했으며, 고등 교육에 대한 규정은 아예 두지 않았다.
▮ 「조선교육령」에서는 차별적인 학제를 도입해 조선인과 일본인을 별도로 교육했다. 조선 내의 조선인과 일본인의 학교의 명칭은 서로 달랐으며, 수업 연한과 수업 내용에서도 두 학교는 다소간의 차이를 보였다. 또, 인구 비례상으로도 일본인 학교의 수가 조선인 학교의 수보다 훨씬 많았고, 교육 예산도 조선인에 대한 교육과 일본인에 대한 교육이 분리돼 편성됐고, 결과적으로 1인당 일본인에게 배당된 교육 예산은 1인당 조선인에게 배당된 교육 예산보다 월등히 많았다.
▮ 현재 대한민국의 중·등 교육과정에서는 이 「조선교육령」과 개정 사항을 제1차 「조선교육령」, 제2차 「조선교육령」, 제3차 「조선교육령」, 제4차 「조선교육령」으로 지칭하나, 학술 용어로는 「조선교육령」과 「개정(조선)교육령」이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일제 강점기의 주요 교육 목표로는 일제의 식민 지배에 따른 황국 신민 양성이었으며, 우리나라의 독립 운동의 입장에서는 민족정신,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민족 교육이 이뤄졌다.
▮ 교과서 발행의 특징으로는 사진 제판, 오프셋 인쇄 기술을 적용한 교과용 도서가 출판됐으며, 활자의 크기와 삽화 안배, 컬러 인쇄 방식이 적용됐다. 또, 판형(국판)과 분량을 통제하는 방법도 도입됐다. 조선 총독부에서 출판한 교과서를 주로 사용했으며, 국정 교과서는 주로 조선총독부의 관방 인쇄·출판 기관인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등에서 발행했다.
▮ 일제 강점기는 국어가 한글이 아닌 일본어로 사용됐던 암울했던 시기였다. 민족주의 사상가들과 애국지사들이 활발하게 교과서에 대한 저술 활동을 하고 한글 활자로 교과서를 펴내던 시절이 저물고 민족의 정기가 모두 죽어 버렸던 시기였다.
『국어독본』과 『조선어독본』 교과서의 비교를 통해 나라 잃은 설움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국어독본』은 우리의 말과 글이 아닌 일본어로 돼 있는 교과서이다. 우리의 말과 글은 『조선어독본』이라는 교과서로 배웠는데 이마저도 나중에는 선택 과목으로 지정돼 사실상 우리의 말과 글이 교실 밖으로 추방됐던 시기였다. 즉, 교과서는 일제의 통치 수단으로 사용됐던 것에 불과했다.



『조선어독본』



『국어독본』
▮ 이 당시의 교과 내용은 주로 조선인을 우민화, 신민화하는 작업의 하나었다. 일제 강점기 36년간의 교과용 도서에 나타난 가장 뚜렷한 특징은 우리의 말과 글을 부정하고 우리의 역사를 부정하면서 일본 제국주의 이념으로 무장시킨 것이다. 우리 민족의식과 우리 민족문화를 모두 말살하려 했다.
이 시기에 일어난 조선어학회 사건은 일제 강점기 때 조선어를 연구한 학자들을 탄압한 사건이다. 조선어학회는 1929년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했다. 조선어사전편찬회의 발기인은 모두 108명이며 일제의 방해로 내란죄 등의 명목으로 기소돼 옥중에서 사망하거나 해방 이후에 석방된다. 조선어학회는 해방 후 조직을 정비한 뒤 1949년 9월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꿨다.
참고로 『말모이』는 영화로도 유명한데, 1911년 주시경이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우리말 사전이다. 최남선(崔南善)이 설립한 조선광문회에서 주시경(周時經) 선생과 그의 제자들인 김두봉(金枓奉) · 권덕규(權悳奎) · 이규영(李奎榮) 선생 등이 민족주의적인 애국 계몽의 수단으로 편찬했다. 1911년부터 편찬이 시작돼 거의 원고가 마무리됐으나 안타깝께도 편찬자들의 사망·망명 등으로 출판되지 못하고 현재는 그 일부의 원고가 남아 있는 상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