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6-10(수)

기획·연재
Home >  기획·연재

실시간 기획·연재 기사

  • [오피니언리더스] 이현우 부산서구의원, “정치는 골목에서 시작됩니다”
    [교육연합신문=황오규 기자] 부산광역시 서구의 한 골목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의원님, 이제 밤길이 무섭지 않아요.” 짧은 한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는 오랫동안 쌓여온 불안과 안도의 감정이 함께 담겨 있었다. 그 골목은 오래된 주택가 사이에 있었다. 가로등은 희미했고, 계단 난간은 손으로 잡으면 흔들렸다. 비가 오는 날이면 물기가 마르지 않아 미끄러웠고, 어르신들은 늘 휴대전화 불빛에 의지해 한 발 한 발 집으로 향해야 했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시설 보수’일지 모르지만, 그곳을 매일 오르내리는 주민들에게는 하루의 안전이 달린 문제였다. 그날 한 어르신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기 좀 봐주세요. 넘어질까 무서워요.” 그 말을 듣고 멈춰 선 사람이 있다. 바로 이현우 의원이다. ■ "민원은 숫자가 아니라 얼굴입니다" 이 의원은 현장에서 사진을 찍고 돌아섰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다시 그 골목을 찾았다. 밤의 밝기와 그림자, 계단의 경사와 난간의 흔들림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담당 부서와 여러 차례 협의를 거쳤다. 단순 요청이 아니라 예산 반영 가능성과 공사 시기, 주민 불편 최소화 방안까지 꼼꼼히 챙겼다. 조명은 교체되었고, 난간은 보강되었다. 몇 주 뒤, 같은 어르신이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이제는 손주 손 잡고 다닐 수 있어요.” 그 순간, 그 골목은 단순히 밝아진 것이 아니라 ‘안심’이라는 감정을 되찾았다. 이 의원은 말한다. “민원은 숫자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한 사람의 일상이 바뀌면, 그게 정치의 이유입니다.” 기자는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정치는 언제부터 보고서와 통계가 되었는가. 정치는 원래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 아니었는가. ■ 지역일꾼의 자세 그는 자신을 ‘의원’보다 ‘지역 일꾼’이라 부른다. 큰 정책보다 주민 한 사람의 불편을 먼저 살핀다. 통학로의 균열, 경로당 냉난방 문제, 상인의 간판 조명, 폭우 뒤 배수로 정비…. 작은 민원 하나라도 가볍게 넘기지 않는다. 민원을 듣고, 현장을 걷고, 행정과 연결하고, 처리 과정을 점검하고, 다시 현장을 찾는다. 그 반복 속에서 신뢰가 쌓인다. 주민들은 말한다. “연락하면 끝까지 챙겨주는 사람이다.”, “결과를 꼭 알려준다.”, “해결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서구 해결사’다. 하지만 그가 해결하는 것은 단지 시설 문제가 아니다. 주민의 불안을 덜어주고, 일상의 안정을 되돌려 주는 일이다. ■ 봉사에서 배운 정치 겨울 부산연탄은행 나눔 봉사 현장에서,폭염 속 경로당을 점검하는 자리에서, 태풍이 지나간 뒤 파손된 시설을 살피는 골목에서. 그는 늘 먼저 와 있었다. 누군가는 묻는다.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그는 웃으며 말한다. “이웃이 불편하면 저도 편하지 않습니다.” 정치가 직업이 되기 전에, 그는 먼저 이웃이었다. 그래서 그의 정치는 따뜻하다.목소리를 높이기보다 손을 내민다. 성과를 자랑하기보다 주민의 말을 먼저 듣는다. ■ 정치의 본질을 다시 묻다 정치는 멀리 있지 않다. 골목에서 시작된다.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는 순간, 그곳이 정치의 자리다. 이현우 의원이 밝힌 골목은 어쩌면 작은 공간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곳에서 시작된 변화는 주민의 마음에 오래 남는다. 어두웠던 길이 밝아졌고, 흔들리던 난간이 단단해졌으며, 무섭던 밤길이 안심의 길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맙습니다”라는 한마디가 정치의 이유를 다시 일깨워 주었다. 부산 서구에는 오늘도 묵묵히 골목을 걷는 한 지역 일꾼이 있다. 화려하지 않지만 따뜻한 정치. 우리는 어쩌면 그런 정치인을 오래 기다려왔는지도 모른다.
    • 기획·연재
    • 오피니언리더스
    2026-02-12
  • [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문자에 새겨진 동이족의 삶(學, 孫, 布, 妻)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우리가 매일 쓰는 한자는 단순히 뜻을 전하는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고대인의 삶과 습속, 주술과 의례, 노동과 놀이가 응축된 문화의 기록이다. 특히 갑골문 속에서 네 글자-學(배울 학), 孫(손자 손), 布(펼 포), 妻(아내 처)-의 기원을 살펴보면, 동이족의 생활 풍습이 오늘날까지 어떻게 흔적으로 이어져 내려왔는지를 흥미롭게 발견할 수 있다. □ 學(학) - 윷판에서 시작된 학문 오늘날 ‘학교’의 ‘학(學)’은 배움, 교육을 뜻한다. 그러나 갑골문을 보면 그 뿌리는 의외로 점(卜), 그것도 윷점에서 비롯되었다. 자형을 보면 두 손이 막대기 네 개를 쥐고 있고, 그 위로 집(宀)이 얹혀 있다. 막대기 네 개는 오늘날의 윷과 꼭 닮았다.([그림 16] ‘學’ 참조) 즉, ‘학’이란 원래 ‘윷점을 배우는 집’이었다. 고대 동이족은 하늘의 뜻을 알기 위해 윷을 던지고 점을 치며 우주의 이치를 탐구했다. 점은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세상 이치를 해석하는 지적 훈련이었다. 은나라 시절, 이 글자는 학문을 닦는 관청의 이름으로 쓰였고, 한나라에 이르러 중앙 교육기관을 뜻하게 되었다. 오늘날 ‘학교’라는 개념의 원형이 바로 여기에 있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설날마다 즐기는 윷놀이가 수천 년 전의 윷점과 맥이 닿아 있다는 점이다. 놀이로 남은 윷이 사실은 학문의 출발점이었던 셈이다. ‘배운다(學)’는 말 속에 이미 동이족의 놀이와 점술, 그리고 학문의 기원이 함께 숨어 있는 것이다. □ 孫(손) - 탯줄과 새끼줄에 담긴 자손의 의미 ‘손자 손(孫)’의 갑골문을 보면, ‘아들(子)’과 더불어 배꼽에서 이어지는 선이 그려져 있다. 이는 다름 아닌 탯줄이다. 아이와 어머니를 잇는 생명의 끈이 바로 자손(子孫)의 연속성을 상징한 것이다.([그림 16] ‘孫’ 참조) 동이족은 출산 후 집 대문 앞에 새끼줄을 걸고, 고추나 솔가지를 달아 아이의 성별을 알렸다. 새끼줄은 부정을 막는 주술적 도구였고, 동시에 자손 번영을 기원하는 표식이었다. 지금도 설이나 장례 때 대문에 금줄을 치는 풍습이 남아 있다. ‘孫’의 변천을 보면, 처음에는 탯줄 모양이 강조되다가, 점차 ‘작을 소(小)’와 결합하며 ‘이어짐, 계승’이라는 의미가 굳어졌다. 그래서 손자는 단순히 자녀의 다음 세대가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혈맥과 삶의 연속성을 나타낸다. 문자 속 탯줄의 그림은 지금도 우리가 자손을 ‘대(代)를 잇는다’고 말할 때 그 깊은 뿌리를 전해주고 있다. □ 布(포) - 다듬이질 소리에 남은 기억 ‘펼 포(布)’는 오늘날 ‘배포하다, 보급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나 은자에서는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진다. 두 손에 방망이를 들고 천을 두드리는 모습, 곧 다듬이질이다.([그림 16] ‘布’ 참조) 고대 동이족 여성들은 짠 천을 두드려 반듯하게 펴고 매끈하게 만들었다. 그 리듬 있는 소리와 동작이 글자에 남아 ‘布’가 되었다. 다듬이질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공동체 여성들의 생활을 이끄는 리듬이자 노래였다.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포(布)’의 발음은 우리말 ‘배’와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고대에는 ‘괴 → 배’로 발음이 변해왔는데, 직물을 펴고 나누는 행위가 ‘배(포)’라는 말로 이어졌을 수 있다. 지금도 우리는 ‘포포하다’ 대신 ‘배포하다’라고 한다. 문자 속 다듬이질의 흔적이 오늘날까지 발음과 뜻에 남아 있는 것이다. □ 妻(처) - 머리를 올린 여인의 상징 마지막으로 ‘아내 처(妻)’를 보자. 갑골문에서 妻는 무릎 꿇은 여인 위에 손이 얹히고, 머리에 장식이 얹힌 모습이다. 이는 ‘머리를 올린 여성’을 가리킨다.([그림 16] ‘妻’ 참조) 동이족 사회에서 머리를 올리는 행위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소녀에서 성인 여성으로 넘어가는 성인식, 그리고 혼인 의례에서 여인은 머리를 올렸다. 머리를 올린다는 것은 곧 성숙, 결혼, 새로운 역할의 시작을 의미했다. 이 풍습은 오랫동안 이어져, 조선시대까지도 혼례 때 여인이 쪽을 찌는 관습으로 남았다. 문자 속에 담긴 상징이 수천 년 뒤의 생활까지도 영향을 준 셈이다. 그래서 妻라는 글자는 단순히 아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 여성의 인생 전환점을 기록한 문화적 표지였다. □ 문자 속에 남은 동이족의 삶 네 글자의 기원을 따라가 보면, 한자는 단순한 문자 체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고대인의 생활 풍습과 주술, 놀이와 노동이 굳어져 남은 문화의 화석이다. 學은 윷판에서 하늘의 뜻을 배우던 점술에서 출발해, 오늘날 ‘학교’로 이어졌다. 孫은 탯줄과 새끼줄에서 비롯되어, 자손 번영과 생명의 연속을 상징했다. 布는 다듬이질의 소리와 동작에서 나와, ‘펼치고 나누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妻는 머리를 올린 여인의 모습에서 시작해, 성인식과 혼례의 풍습을 문자에 새겼다. 이 글자들은 모두 동이족의 삶과 직결되어 있으며, 지금도 우리의 언어와 풍습 속에 숨은 흔적으로 남아 있다. □ 오늘의 우리에게 우리는 문자 속에서 과거를 읽는다. 學, 孫, 布, 妻라는 네 글자는 동이족의 놀이와 주술, 노동과 혼례가 어떻게 언어와 문화로 이어졌는지를 보여준다. 과거는 단절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언어와 풍습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설날 윷놀이를 하면서, 집 앞에 금줄을 보면서, 다듬이질 소리를 떠올리면서, 혼례 때 쪽진 머리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고대의 기억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는 죽은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흔적이며, 문화의 기억이고, 시간을 건너온 메시지다. 學, 孫, 布, 妻 네 글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너희가 쓰는 말과 글 속에는 이미 우리의 삶이 남아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 기획·연재
    • 기획
    2026-02-11
  • [오피니언리더스] 박수영 의원, 의정보고회 성료
    [교육연합신문=황오규 기자] 부산광역시 남구 국회의원 박수영 의원은 2월 7일(토) 오후 2시 부경대학교 컨벤션홀에서 2025년 의정보고회를 개최하고, 지난 1년간의 의정활동과 지역 발전 성과를 구민들에게 직접 보고했다. 이날 의정보고회에는 지역 주요 인사와 남구 구민 등 약 800여 명이 참석해 좌석을 가득 메우며 성황을 이뤘다. 행사장은 시작 전부터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며 박 의원의 의정활동에 대한 높은 관심과 기대를 보여줬다. □ 박형준 시장·지역 국회의원·당 지도부 총출동 의정보고회에는 박형준 부산시장을 비롯해 김민전 국민의힘 국회의원, 서지영 국회의원, 조승환 국회의원 등 지역과 중앙을 대표하는 주요 정치 인사들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또한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화상 축전을 통해 “박수영 의원은 민생과 국가 재정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해 온 정책통 정치인”이라고 평가했으며, 송언석 원내대표도 서면 축전을 통해 입법·예산 성과를 높이 평가했다. □ ‘국쫌만’ 264회… 현장에서 답을 찾다 박 의원은 보고를 통해 “국회의원 ‘국쫌만(국회의원 좀 만납시다)’을 총 264회 진행하며 주민 한 분 한 분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다”며, “정치는 책상이 아니라 현장에 답이 있다”고 강조했다. 참석자들 사이에서는 “이 정도면 기네스북감”이라는 반응도 나왔다. □ 대표발의 14건·본회의 통과 8건… 민생·기업 입법 성과 박 의원은 제22대 국회에서 대표발의 법안 14건 가운데 8건을 본회의 통과시키는 실질적인 입법 성과를 거뒀다(2025년 12월 기준) ▲중기협동조합법 개정 ▲항공기 부품 관세 면제 ▲저도주 세율 인하 ▲스트롱K칩스법, e스포츠 세액공제법 ▲배당소득 분리과세 ▲양도소득세 대주주 기준 100억 원 상향 및 동학개미 보호법 ▲공익법인 상속세 한도 상향 등은 ‘민생을 살리고 기업을 날게 하는 박수영표 법안’으로 평가받고 있다. □ 2026년도 남구 예산 416.7억 원 확보… 동별 국비 성과 구체화 박 의원은 2026년도 남구 관련 예산 총 416억 7천만 원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국비는 346억 6천만 원으로, 부산시 특별교부금과 행정안전부·교육부 특별교부금 등이 포함돼 생활 SOC 확충과 안전·교육 환경 개선에 활용될 예정이다. □ 동별 국비 확보 성과도 구체적으로 제시 부산 남구지역 대연동 101억 2천만 원, 용호동 7억 5천만 원, 문현동 114억 3천만 원, 우암·감만·용당동 98억 5천만 원의 국비가 각각 확보되며, 남구 전역에 걸친 균형 있는 재정 성과를 이뤄냈다. 이들 예산은 ▲생활 SOC 확충 ▲도시 기반시설 개선 ▲주거·안전 환경 정비 ▲교육·복지 인프라 강화 등에 투입돼, 특정 지역에 치우치지 않는 남구 전반의 체질 개선과 생활 여건 향상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 “우리아이들이 살아갈 대한민국 교육 1번지 남구로” 이날 의정보고회에서는 교육 성과가 핵심 성과로 강조됐다. 박 의원은 “우리아이들이 살아갈 대한민국의 미래는 교육에 달려 있다”며 최근 5년간 부산 남구 교육발전과 교육환경 개선을 위해 총 1,475억 원 규모의 교육 관련 예산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해당 예산은 ▲학교 교육환경 개선 ▲노후 시설 개보수 ▲미래형 교육 인프라 구축 ▲안전한 통학 환경 조성 ▲교육 격차 해소 등에 투입돼 남구를 ‘대한민국 교육 1번지’로 도약시키는 토대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 국정감사 종합 1위… “야성의 저격수, 송곳 질의” 박 의원은 2025년도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종합 1위를 기록하며 국정감사 우수의원으로 선정됐다. 마약 밀수, 가상자산 해외 유출, 외환시장 불안, 조세 형평성 문제 등을 집중 추궁하며 제도 개선 필요성을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 “1년을 4년처럼”… 일등 남구 향한 책임 정치 박 의원은 “지난 1년은 임기 4년에 버금가는 시간이었다”며, “앞으로도 현장에서 답을 찾는 정치로, 아이 키우기 좋고 살기 좋은 일등 남구를 반드시 만들어가겠다”고 밝혔다. 의정보고회에 참석한 주민들은 “성과로 말하는 정치”, “교육·민생·경제를 모두 챙긴 의정활동”이라며 큰 박수로 화답했다.
    • 기획·연재
    • 오피니언리더스
    2026-02-07
  • [김홍제의 목요칼럼] 정성스러운 한 걸음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딱히 믿는 종교는 없지만 주말에 1박 2일로 고창 선운사에서 하는 템플스테이를 다녀왔다. 눈도 오고 혹한 날씨에 볼이 따갑도록 추웠지만 마음은 충만함을 얻었다. 새벽 4시 새벽예불이나 캄캄한 밤길을 걸어서 가는 길이나 법당의 불빛이 사진처럼 가슴에 선명하게 저장되었다. 짧은 체험 중에 배운 것은 ‘지금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긍정적 실천이다. 미완성이고 부족한 인간이 욕망과 욕심으로 충돌하여 갈등을 만들고 아파하며 고통을 겪는다.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서 구름 밑에 보이는 도로와 집을 보면 그 많은 갈등이 개미 다리보다 작고 하찮은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런 하찮은 것들이 모여서 지지고 볶는 세상이 되고 그 안에서 금방 후회할 일로 싸우고 속이고 힘들어한다. 생명체의 우연과 필연으로 삶은 욕망의 연료로 하루를 시작한다. 만족과 불만족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면서 시간과 공간을 채우고 있다. 산다는 것이 별것 아니다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산다는 것처럼 놀라운 축복이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광활한 우주에서 이렇게 알맞은 온도와 햇살과 생명체들이 살 수 있는 이곳이 바로 기적 같은 천국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의 작품인가. 신문에서 ‘5,000일 기도해 보니 지금 이 순간, 한 걸음이 소중’(조선일보, 1월 30일)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었다. 5,000일이나 기도하고 무엇을 얻었을까. 호기심이 생기는 기사 제목이었다. 광주광역시 무각사 주지 청학 스님은 19년간 이어온 ‘5,000일 기도’를 2월 7일 마친다. 스님의 기도는 2007년 8월 13일 주지 부임한 날 시작됐다. 매일 새벽 4시, 오전 10시, 오후 6시 하루 세 차례 1시간 30분씩 108배하고 목탁 치며 금강경을 독송했다. 기도는 치열했다고 한다. 휴대전화와 자동차를 없앴고 바깥출입을 끊었다. 그렇게 기도하는 사이 목탁 3개가 깨져 나갔고 가사, 장삼, 방석은 얼마나 해지고 기웠는지 모른다. 50대 중반에 시작하여 5,000일 기도를 올리는 사이 70대 중반에 이른 청학 스님의 말이다. “5,000일 기도를 마치면 나한테 큰 깨달음이 오지 않을까 기대한 적도 있어요. 아니에요. 가장 큰 깨달음은 오직 한 걸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한 걸음이란 현실에 충실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오직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는 것이 5,000일을 수행하면서 얻는 거대한 깨달음이다. 생각과 말만 무성하면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 교육계에 ‘정치의 바람’이 불고 있다. 6월 3일로 예정된 교육감 선거 얘기다. 연일 출마를 준비하는 인사들의 출판기념회, 출마 선언 소식이 들려온다. 지인 얼굴도 현수막에 올라왔다. 진정으로 교육에 헌신하겠다는 교육감 후보의 얼굴이 지면에 올라온다. 교육은 진정성과 안목을 가진 지도자가 이끌어 가기를 바랄 뿐이다. 앞으로 많은 공약이 난무할 것이다. 공약은 많았지만 정작 교육은 과거의 정책을 재탕하거나 퇴행하는 일이 많았다. 정성스러운 한 걸음은 올바른 실천이다. 이번 교육감 선거를 통해 진정성 있는 교육 성장이 있기를 바란다. 우리의 올바른 선택도 의미 있는 한 걸음이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 중등교육과장
    • 기획·연재
    • 연재
    2026-02-05
  • [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은자가 들려주는 옛이야기(公, 私, 古, 今)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우리는 흔히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한다’, ‘고금을 막론하고’ 같은 말을 자연스럽게 쓴다. 하지만 정작 ‘공(公)’, ‘사(私)’, ‘고(古)’, ‘금(今)’이라는 단어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은 드물다. 고대 중국의 문자, 특히 갑골문을 들여다보면 이 네 글자가 단순한 추상 개념이 아니라, 사람들의 몸과 생활, 그리고 구체적 경험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글자는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담은 문화적 산물이었다. □ 공(公) - 남성 집단의 방귀에서 시작된 ‘공평’ 오늘날 ‘공(公)’은 공정하다, 공적인 일,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갑골문 속 ‘공’의 기원은 의외로 익살스럽다. 당시 모계 중심 사회에서 남성들은 한 공간에 모여 함께 지내야 했다. 개인의 방이나 물건은 따로 없었고, 모든 것을 공유하는 공동생활이 기본이었다. 이 집단적 생활 속에서 사람들은 피할 수 없는 현상, 바로 방귀 소리를 공유하게 된다. 갑골문 학자들에 따르면, 엉덩이와 입 모양을 결합한 그림이 ‘공’의 원형으로, 집단적 삶에서 울려 퍼진 소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다소 우스꽝스럽지만, 이는 ‘함께 나누는 삶’의 본질을 정확히 보여준다.([그림 15] ‘公’ 참조) 방귀 소리에서 출발한 ‘공’은 ‘공유하다’, ‘공개하다’로 확장되었고, 나아가 ‘공평하다’는 가치로 발전했다. 또한 남성 집단에서 존칭으로 쓰이다가 ‘공자(公子)’, ‘공짜’라는 호칭에도 스며들었다. ‘공’의 뿌리를 알고 보면, 오늘날 정치권에서 흔히 말하는 ‘공정’이라는 말도 가볍게 쓰기 어려워진다. 본래 ‘공’은 집단 속에서 모두가 나누는 경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 사(私) - 올가미에 걸린 짐승에서 개인 소유로 ‘공’의 반대말인 ‘사(私)’는 어디에서 왔을까. 갑골문은 그 답을 사냥 장면에서 찾는다. 글자의 원형은 올가미에 걸린 짐승 그림이었다. 짐승이 잡히면 누구의 것인지 구분해야 했고, 여기서 ‘사사로운 소유’라는 개념이 생겨났다.([그림 15] ‘私’ 참조) 이후 글자에는 ‘벼 이삭(禾)’이 더해졌다. 농경 사회에서는 곡식 한 알 한 알이 곧 개인의 재산이었기에, ‘사’는 점차 개인 소유, 사사로운 권리, 사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글자가 되었다. 오늘날 ‘사감(私感)’, ‘사견(私見)’, ‘공사(公私) 구분’ 같은 말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즉 ‘사’는 단순히 혼자만의 감정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 속에서 누구의 것인지, 어디까지가 내 몫인지를 가리키는 실질적 경험에서 출발한 것이다. □ 고(古) - 되돌릴 수 없는 말, 이미 지나간 시간 ‘고(古)’자는 흔히 ‘옛날’을 뜻한다. 갑골문을 보면 그 원형은 입(口)에서 나온 말이 잘려나가는 모습이다. 한 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으니, 이는 곧 이미 일어난 일,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상징한다.([그림 15] ‘古’ 참조) 그래서 ‘고’는 시간이 지나며 ‘옛날’, ‘전통’, ‘고문(古文)’, ‘고서(古書)’ 같은 의미로 확장되었다. ‘말은 곧 과거가 된다’는 직관이 문자의 근원이 된 셈이다. 현대 사회에서 전통과 과거를 존중한다는 것은 단순히 옛것을 보존하는 차원을 넘어, 한 번 지나간 시간의 무게를 인정하는 일과도 맞닿아 있다. □ 금(今) - 막 끝난 순간, 바로 지금 ‘금(今)’은 현재를 뜻한다. 갑골문 속 그림을 보면 다소 난해하지만, 남성의 생식기와 작대기 기호가 결합된 모습이다. 학자들은 이것을 ‘종결’이나 ‘끝남’을 상징하는 표시로 해석한다.([그림 15] ‘今’ 참조) 즉 ‘금’은 어떤 일이 막 끝난 순간, 완료된 상태를 나타냈다. 그 연장에서 ‘지금’, ‘오늘’, ‘올해’라는 시간 개념으로 발전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고금(古今)’이라는 말은 곧 ‘과거와 현재’를 아우른다. ‘금’의 뿌리를 알고 보면 ‘현재’란 그저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막 끝난 일 위에 서 있는 찰나라는 점이 흥미롭다. 순간순간이 과거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문자학은 우리에게 일깨운다. □ 공과 사, 고와 금 - 삶에서 비롯된 문자들 이처럼 ‘공과 사, 고와 금’은 단순한 철학적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고대인들의 생활, 신체적 경험, 사회적 질서에서 탄생한 구체적 산물이었다. ‘公’은 집단적 삶에서 비롯된 공유와 공평의 가치, ‘私’는 개인 소유와 사적인 감정의 표현, ‘古’는 되돌릴 수 없는 말과 과거, ‘今’은 막 끝난 순간, 곧 지금의 시간. 한자의 기원을 알면, 우리가 쓰는 말의 뿌리에 얼마나 생생한 삶의 흔적이 스며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지금 우리 사회에서 ‘공사(公私)의 구분’은 정치와 기업, 일상 곳곳에서 여전히 중요한 화두다. 공적 권한을 사적으로 이용하는 일이 반복될 때마다 사회적 분노가 커진다. 이는 고대인들이 이미 공과 사를 구분하려 애썼다는 사실과 맞닿아 있다. 또 ‘고금(古今)’이라는 말은 과거와 현재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언제나 과거 위에 서서 현재를 살고,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갑골문 속 글자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는 지금, 과거의 무게를 기억하며 공과 사를 분명히 하고 있느냐.” 글자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삶을 기록한 흔적이며, 역사를 담은 상징이다. ‘공과 사, 고와 금’ 속에 새겨진 고대인의 경험과 지혜는 오늘의 우리에게 여전히 살아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 기획·연재
    • 기획
    2026-02-04
  • [구본희 반려詩選] 약손
    [교육연합신문=구본희 詩選] 약손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우면 투박한 손마디가 마른 배를 더듬는다 “엄마 손은 약손” 낮은 주문에 통증은 잠들고 눈을 뜨면 아픔은 먼 데로 물러나 있다 지금 우리는 앓고 있다 서로의 상처를 할퀴는 시대 조건 없이 덮어 줄 그 손길이 유난히 그립다 그 손 끝에서 시작될 평온한 하루를 다시 기다려 본다 ▣ 구본희 ◇ 前인천국제고등학교 교장
    • 기획·연재
    • 연재
    2026-02-03
  • [오피니언리더스] 최종원 학교법인 건국학원 기획관리실장…교육 관점에서 본 지방의원의 역할
    [교육연합신문=황오규 기자] 교육은 교실 안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학교 주변의 안전, 통학로의 환경, 돌봄과 방과후 체계, 청소년의 문화·체육 공간, 평생교육 인프라까지 아이들의 성장은 지역의 선택과 행정의 방향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이 지점에서 지방의원의 역할은 단순한 예산 심의나 조례 제정을 넘어선다. 지방의원은 곧 지역 교육의 설계자이자 조정자다. 사하처럼 학교와 주거, 산업이 맞닿아 있는 지역일수록 그 책임은 더욱 무겁다. 학부모의 불안은 교문 앞에서 시작되고, 아이들의 하루는 학교 울타리를 넘어 지역으로 확장된다. 따라서 지방의원에게 요구되는 자질 역시 분명하다. 교육 현장을 이해하는 감수성, 행정 구조를 읽는 전문성, 그리고 사람의 성장을 우선에 두는 태도다. 교육 관점에서 본 지방의원상에는 세 가지 기준이 있다. 첫째, 현장을 아는 사람이다. 학교의 사정과 학부모의 목소리를 ‘자료’가 아닌 ‘경험’으로 이해해야 통학 안전, 교육 환경 개선, 돌봄 연계와 같은 생활 밀착형 정책이 가능하다. 둘째, 연결할 수 있는 사람이다. 교육청과 지자체, 학교와 지역 기관 사이의 칸막이를 낮추는 역할은 지방의원의 핵심 책무다. 제도와 예산을 아이들의 하루로 번역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지속성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교육은 단기간의 성과로 평가할 수 없는 영역이며, 꾸준히 책임지고 지켜보는 정치가 필요하다. 이러한 기준 속에서 지역에서 주목받는 인물 중 한 명이 최종원 시의원 출마예정자다. 그는 교육을 하나의 정책 분야로 보기보다, ‘사람을 키우는 과정’으로 인식하는 시각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교육과 행정, 국제 현장을 두루 경험했지만, 이를 앞세우기보다는 지역의 일상과 학교 주변의 작은 문제부터 살피는 태도가 눈에 띈다. 지방의원이 교육을 대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행사 중심의 접근’이다. 사진이 남는 정책보다 아이들의 생활이 실제로 바뀌는 정책이 중요하다. 학교 앞 안전한 횡단보도 하나, 방과후 공백을 메우는 작은 연계 하나가 아이와 학부모의 삶을 바꾼다. 이러한 변화는 현장을 존중하는 정치에서 비롯된다. 교육은 미래에 대한 투자이자, 현재에 대한 책임이다. 지방의원은 교육청의 일을 대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역이 교육을 제대로 품도록 만드는 역할을 해야 한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오가고, 배움이 지역으로 확장되며, 청년이 다시 지역으로 돌아올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 그 출발점에 지방의원의 역할이 있다. 다가오는 지방선거에서 교육연합신문 독자들이 주목해야 할 기준도 여기에 있다. 누가 더 많은 공약을 내놓는가가 아니라, 누가 교육의 언어로 지역을 이해하는가이다. 지방의원의 한 선택이 아이들의 10년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지역 정치는 비로소 교육이 된다. ▣ 최종원 ◇ 사동초·사하중학교 졸업(부산 사하구) ◇ 부산국제고등학교 졸업 ◇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졸업 ◇ 부산대학교 금융대학원 석사 졸업 ◇ 동아대학교 교육대학원 영어교육전공 석사과정 ◇ 학교법인 건국학원 법인 기획관리실장 ◇ 2026 사하구자원봉사센터 우수자원봉사자 ◇ 사단법인 사하구 당리동청년회 상임부회장 ◇ 사단법인 한국산림보호협회 사하구지회 지회장 ◇ 부산광역시 레슬링협회 이사 ◇ 사하구 아이파크 U12 유소녀 축구단 단장 ◇ 한미연합회(AKUS) 부산광역시지부 청년위원장
    • 기획·연재
    • 오피니언리더스
    2026-02-02
  • [국가유산지킴이기자단] Living Korean folk traditions: The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교육연합신문=이채원 학생기자] With the start of the new year, it is the perfect time to visit the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to mark the passage of time and new beginnings. Located on the grounds of Gyeongbokgung Palace in Seoul, the museum is one of Korea's many heritage sites, with its historical artifacts reflecting the lives of traditional Korean people. The museum was established to preserve and present the everyday lives of ordinary Koreans throughout history. Unlike other sites centered on royal courts or political events, the National Folk Museum focuses on folk traditions, customs, and market culture that shaped daily life across centuries. The museum was officially founded in 1945, following Korea’s liberation. It strived to reflect a broader effort to reclaim and protect national identity after years of colonial rule. It went through numerous changes in terms of name and location from 1945 to 1993, finally ending up as the museum it is today. Now, within the grounds of Gyeongbokgung Palace, the museum symbolically connects the lives of common people with Korea’s royal and political past. Its collections follow Korean society from prehistoric times through the Joseon Dynasty and even the modern days, highlighting development in traditions in agriculture, family life, religion, and seasonal rituals. Through its artifacts, reconstructions, and folk objects, the museum situates Korean heritage not only in historical events but also in lived experiences. The permanent exhibitions include: “History of the Korean People”, the “Korean Way of Life”, and the “Life Cycle of Koreans”. The “History of the Korean People” includes artifacts from daily life from prehistoric times all the way through the Joseon Dynasty. Moreover, the “Korean Way of Life” section highlights food, clothing, and tools, while the “Life Cycle of Koreans” exhibit features birth, coming of age, marriage, aging, and death throughout history. The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brings traditional Korean life vividly into the present. By preserving everyday customs, artifacts, and rituals, the museum itself celebrates the richness of Korea’s cultural heritage beyond royal history. For visitors all around, it is both an educational journey and a reminder of Korea’s enduring traditions. Whether exploring its exhibits or strolling through its outdoor replica of a folk village, the museum connects the past and present, making Korea’s folk heritage accessible for all generations.
    • 기획·연재
    • 청소년국가유산지킴이 기자단
    2026-01-30
  • [전재학의 교육칼럼] 실존주의 철학사상이 다시금 우리의 교실에 던지는 질문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이는 한때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으며 196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문학적 우수성을 놓고 등급을 매기는 방식에 반대해 수상을 거부한 적이 있는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인 장 폴 사르트르가 지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의 상징적인 문장이다. 이 문장은 철학사의 명제이자, 오늘의 교육을 향한 질문이다. 인간은 어떤 ‘정해진 틀’로 태어나는 존재가 아니라, 선택과 행동을 통해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존재라는 급진적인 자유의 철학은 성취와 효율을 중시해 온 대한민국 사회, 특히 교육 현장에 불편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 교육은 오랫동안 학생의 본질을 성적으로 규정해 왔다. 등수와 점수는 학생을 설명하는 가장 간편한 언어였고, 대학 서열은 가능성의 지도를 대신했다. 그 결과 학생은 ‘아직 무엇이 될 수 있는 존재’라기보다 ‘이미 평가된 존재’로 취급되곤 했다. 그러나 실존주의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교육이 가장 경계해야 할 오류라 할 수 있다. 왜냐면 학생은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형성해 가는 과정 속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을 “자유롭도록 단죄된 존재”라고 말했다. 이는 선택하지 않을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는 존재라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이 명제는 오늘의 우리 청소년들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그들은 진로를 선택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대신 정해 주고, 생각하지 않으면 사회가 요구하는 방향으로 밀려간다. 이를 반영하듯이 한때 우리의 청소년들은 대학에 진학하고서도 부모가 교수에게 학점을 따지며 관리하고, 심지어 군대에 가서도 지휘관에게 훈련 및 모든 과정을 밝히길 요구하며, 취업에도 일일이 나서 관여하는 등 매사 개입하고 지시하는 등 믿기지 않는 상황들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는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문제는 비록 일부라 하더라도 우리의 청소년들이 선택 그 자체보다, 선택의 책임을 배울 기회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육의 역할은 명확하다. 교육은 정답을 제시하는 일이 아니라, 학생이 자신의 선택을 사유하고 그 결과를 성찰하도록 돕는 일이어야 한다. 프로젝트 수업에서의 실패, 토론 수업에서의 소수 의견, 진로 탐색 과정에서의 흔들림은 제거해야 할 잡음이 아니라 교육의 핵심 장면이다. 그 경험 속에서 학생은 “나는 내가 한 선택의 결과를 감당할 수 있는 존재”라는 감각과 책임의식을 얻게 된다. 잠시 다른 사례를 살펴보자. 어느 고등학생이 안정적인 진학 경로 대신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의 탐구 활동을 선택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선택이 당장 높은 성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학생은 이미 중요한 배움을 얻었다. 즉, 타인의 기대가 아닌 자신의 판단으로 삶의 방향을 고민해 보았다는 사실이다. 실존주의적 교육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이를 지도해야 할 교사 역시 변화가 요구된다. 교사는 지식을 전달하는 전문가가 아니라, 학생이 스스로 질문하도록 돕는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왜 그렇게 생각했니?”, “다른 선택은 가능했을까?”라는 질문은 단순한 수업 기법을 넘어, 학생을 존재의 주체로 존중하는 태도다. 사르트르는 개인의 선택이 곧 인류 전체에 대한 책임이라고 보았다. 이는 우리 교육의 목표인 민주시민 양성의 본질과도 맞닿아 있다. 자신의 결정이 타인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고민하는 학생은 규칙에 의거 길들여진 존재가 아니라, 책임 있는 민주 시민으로 성장한다. 교육은 결국 인간을 다루는 일이다. 점수와 결과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존재를 대신할 수는 없다. 실존주의는 다시 오늘의 우리 교실에 이렇게 묻고 있다. “이 학생은 어떤 점수를 받았는가?”가 아니라, “이 학생은 어떤 선택을 통해 자기 자신이 되어 가고 있는가?” 이 질문을 외면하지 않을 때, 우리 교육은 다시 휴머니즘을 간직한 인간의 모습을 회복할 것이라 믿는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 기획·연재
    • 연재
    2026-01-30
  • [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정치, ‘정(正)’을 잃고 방황하다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정치 뉴스는 피곤하다. 규범은 무너지고, 도덕은 잊혔으며, 정직과 원칙은 자취를 감췄다. 정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상실했고, 정당은 권력을 쫓는 집단으로 전락했다. 시민들의 냉소가 깊어지는 이유다. 정치인은 마치 배가 산으로 가듯 제 갈 길을 잃었다. 비전도, 원칙도 없이 권력욕만 쫓는 현실은 참담하다. 대통령 후보에게 우리가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은 단 두 가지다. 첫째, “왜 대통령이 되려 하는가.” 둘째, “대통령이 되면 무엇을 하려 하는가.” 이 질문에 똑바로 대답하지 못한다면, 그가 내세우는 공약과 화려한 말은 공허한 수사에 불과하다. 정치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그 답을, 오래된 갑골문 속 글자들이 우리에게 들려준다. □ ‘정(正)’ - 똑바로 가는 발걸음 ‘정(正)’의 갑골문을 보면 놀랍게도 한 사람의 발자국 모양에서 출발한다. 목표를 향해 “곧게 나아가는 발걸음”이 바로 ‘정’의 원형이다. 여기에는 단순히 걷는 동작을 넘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가치가 담겼다. ([그림 14] ‘正’ 참조) 또 다른 맥락에서는 회초리를 든 모습도 함께 들어 있다. 길을 잘못 들어선 이를 바르게 돌려세우는 의미다. 따라서 ‘정’은 올곧음과 추진력을 동시에 품은 글자였다. 정치란 원래 그런 것이다. 방향을 바로 잡아주고, 추진력을 실어 사회를 앞으로 끌고 가는 것. 목표 없는 정치는 제자리만 맴돌 뿐이다. 추진력 없는 정치는 제도만 남기고 무너진다. □ ‘민(民)’ - 눈을 깔아야 했던 사람들 그렇다면 정치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갑골문에서 ‘민(民)’은 눈을 아래로 내리깐 사람의 모습으로 시작했다. ([그림 14] ‘民’ 참조) 고대 사회에서 신분이 낮은 백성은 권력자 앞에서 감히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그래서 ‘민’은 단순한 ‘사람(人)’이 아니라, 권력 앞에서 눈을 깔아야 했던 낮은 신분의 백성을 가리켰다. 그래서 우리는 ‘인민(人民)’이라는 표현을 쓴다. 권력자와 구별되는 보통 사람들, 즉 정치의 대상이자 동시에 정치의 주체가 되는 존재다. 정치가 바로 서려면, 권력자는 백성을 위하는 ‘인의(仁義)’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 ‘관(官)’ - 집 안의 엉덩이 ‘관(官)’의 기원은 조금 익살스럽다. 갑골문 속 관(官)은 집 모양 안에 놓인 엉덩이 그림에서 시작했다. 이는 우두머리가 집 안에 앉아 지방을 다스리던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그림 14 ]‘官’ 참조) 점차 ‘관’은 벼슬아치, 나아가 행정기관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본질은 여전히 같다. ‘관료’는 집 안에 앉아 명령만 내리는 존재가 아니라, 백성을 돌보고 질서를 유지하는 책임을 지닌 존재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관료제는 때때로 집 안에서만 권력을 행사하는, 폐쇄적 ‘엉덩이’로 변질되곤 한다. □ ‘군(軍)’ - 병거를 둘러싼 병사들의 집단 ‘군(軍)’은 병거를 중심으로 둘러선 병사의 무리에서 유래했다. 전쟁의 현장에서 집단적 힘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이후 군사, 군대라는 뜻으로 발전했다. ([그림 14] ‘軍’ 참조) 정치에서 군대는 언제나 양날의 검이었다. 백성을 보호하는 방패이자, 때로는 권력을 지키는 칼이 되었기 때문이다. ‘군’의 기원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군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백성을 위한 병사 집단이었는지, 권력자를 위한 무력 장치였는지. 정치가 ‘정(正)’을 잃으면 군대 또한 본래의 역할을 잊는다. □ 정치의 본질 - 목표, 추진력, 그리고 관계 이처럼 ‘정(正)’, ‘민(民)’, ‘관(官)’, ‘군(軍)’은 단순한 글자가 아니다. 정치의 뼈대를 구성하는 개념들이다. 정치란 목표를 향해 똑바로 가게 하고(正), 잘못된 길을 고쳐주는 추진력을 가져야 한다. 그 대상은 눈을 깔며 살아야 했던 보통 백성들(民)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집단은 행정을 맡은 관료(官)와 공동체를 지키는 군대(軍)다. 네 가지가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정치가 바로 선다. 오늘의 정치는 이 균형을 잃었다. 백성을 외면하고, 관료는 책임 대신 기득권을 지키며, 군은 정치화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정치 자체가 ‘정(正)’의 본질을 잃었다. 목표와 추진력이 없는 정치가 백성과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갈 수 있겠는가. □ 맺으며 - 다시, 정치를 묻다 결국 정치에서 우리가 요구해야 할 것은 복잡하지 않다. 대통령 후보, 국회의원, 정치인 누구에게나 던질 수 있는 두 가지 질문으로 귀결된다. “왜 권력을 잡으려 하는가?” “그 권력을 잡아 무엇을 하려 하는가?” 갑골문 속 오래된 글자들은 이렇게 속삭인다. 정치란 곧게 나아가는 발걸음이며, 잘못된 길을 고쳐주는 힘이다. 백성을 주인으로 삼고, 관료와 군대는 그 뒷받침이어야 한다. 정치가 이 본질을 잃는 순간, 사회는 방향을 잃고 흔들린다. 오늘 우리의 정치는 다시 ‘정(正)’을 배워야 한다. 똑바로 가는 발걸음, 회초리로 바로잡는 힘, 그리고 무엇보다 백성을 향한 마음. 고대 갑골문이 새겨진 글자 속에서, 정치가 되찾아야 할 길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 기획·연재
    • 기획
    2026-01-28
  • [오피니언리더스] 이상호 前대통령비서실 행정관, "부산진구의 다음 10년을 설계"
    [교육연합신문=정윤영 기자] 부산진구청장 출마를 결심한 이상호 前대통령비서실 행정관은 부산진구의 미래 해법으로 ‘교육 중심 도시 전략’을 제시했다. 그의 구정 비전은 교육을 행정의 한 분야로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관광과 문화, 지역경제를 함께 움직이는 도시 성장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구정 담론과 결을 달리한다. 부산진구는 국제중학교와 국제고등학교, 과학영재학교, 글로벌빌리지, 수학문화관 등 부산 최고 수준의 교육 인프라가 밀집된 지역이다. 이상호 前행정관은 이를 “부산진구가 가진 가장 강력한 도시 자산”으로 평가한다. 그는 “이 교육 시설들은 단순한 학교가 아니라 글로벌 인재와 과학 인재를 동시에 키울 수 있는 구조적 기반”이라며, “이제는 교육 인프라를 도시 전략의 핵심 축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구상하는 교육 중심 도시는 학교와 지역이 분리되지 않는 구조다. 국제고 학생들의 관광 통역 활동, 과학영재학교 학생들의 지역 환경 프로젝트 참여, 전통시장과 연계된 외국인 체험 프로그램 등 교육 활동이 교실을 넘어 도시 전체로 확장되는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교육이 곧 지역 참여와 도시 활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교육과 연계한 관광 전략도 주목된다. 서면 메디컬스트리트, 서면·부전시장, 부산시민공원, 삼광사, 전포 카페거리 등 부산진구는 이미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집중되는 도심이다. 이상호 前행정관은 “관광은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 자원을 하나의 이야기와 동선으로 연결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의료관광과 전통시장 체험, 시민공원 힐링 코스, 사찰 문화, 전포 카페거리 야간 관광을 하나로 묶은 ‘부산진구형 관광 루트’를 통해 교육·체험·관광이 결합된 도시 모델을 제시했다. 문화 정책 역시 교육과의 연계를 중심에 둔다. 부산국악원과 콘서트홀, 시민공원 등 기존 문화시설을 학생 체험형 문화교육, 외국인 대상 상설 전통문화 프로그램, 시민 참여형 거리 공연과 축제로 확장해 문화가 일상 속 배움과 경험으로 이어지도록 하겠다는 계획이다. 문화가 일부 계층의 소비 대상이 아니라 시민 모두의 삶 속에 스며들어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이상호 前행정관의 비전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부분은 ‘실행 가능한 행정’에 대한 강조다. 그는 중앙과 지방을 아우르는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정책은 선언이 아니라 현장에서 작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교육·관광·문화 정책을 부서별로 나누는 방식에서 벗어나, 통합 기획과 연계 예산, 성과 공유 체계로 운영하는 ‘구정 통합 설계 방식’을 통해 지속 가능한 정책 구조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또한, 그는 부산진구를 “배움이 곧 기회가 되는 도시”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제시한다. 학생과 청년들이 지역 활동과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그 경험이 진로와 취업, 창업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통해 교육 정책이 인구 정책이자 지역 지속성 전략이 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상호 前행정관은 자신을 ‘행정을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도시를 설계하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그는 “부산진구는 이미 충분한 교육 자산을 갖춘 도시”라며, “이제 필요한 것은 관리가 아니라 설계다. 교육을 중심으로 관광과 문화가 함께 성장하는 구조를 만들어 부산진구의 다음 10년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부산진구청장 선거는 단순한 인물 선택을 넘어, 교육을 도시 성장의 중심에 둘 것인지, 그리고 그 교육이 지역의 미래로 어떻게 이어질 것인지를 묻는 선택이 될 전망이다. ▣ 이상호 ◇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부의장 ◇ 前대통령비서실 행정관(경제수석실·일자리수석실) ◇ 前부산광역시 정무보좌관 ◇ 제22대 부산진구(을) 국회의원선거 예비후보 ◇ 前더불어민주당부산시당 시정평가대안특위 부위원장 ◇ 국립부경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 정치언론 석사 ◇ 부산 양정초·동의중·양정고 졸업 ◇ 경남 사천 출생·부산진구 43년 거주
    • 기획·연재
    • 오피니언리더스
    2026-01-26
  • [오피니언리더스] 부산연제구의회 차성민 의원, 생명 나눔으로 증명한 아름다운 열정
    [교육연합신문=황오규 기자] 우리 사회는 늘 ‘무엇을 얼마나 했는가’를 묻는다. 성과와 숫자는 판단의 기준이 되고, 말과 약속은 종종 행동보다 앞선다. 그러나 어떤 숫자는 결과가 아니라 사람의 태도와 삶의 방향을 말해준다. 136. 이 숫자는 단순한 횟수가 아니다. 설명보다 깊고, 말보다 분명한 메시지다. 차성민 의원이 또 한 번 헌혈의자에 앉았다. 지난 1월 21일 오전 9시 30분, 전혈 400cc. 혈액 비중 13.6, 소요 시간 4분 10초. 짧은 시간 안에 끝난 헌혈이었지만, 그 몇 분의 시간 안에는 수십 년 동안 반복해 온 선택과 결심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헌혈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몸 상태가 따라주지 않는 날도 있고, 일정이 겹치는 날도 있으며, 마음이 느슨해질 때도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그는 가능한 날이면 헌혈을 선택해 왔다. 특별한 각오를 다지기보다, 해야 할 일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왔다. 그래서 그의 헌혈은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이고,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이다. 그는 헌혈을 마친 뒤 담담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빵도 주고, 음료도 주니 좋네요. 쪼매 건강한 것 같기도 하고요.” 이 소박한 말 속에는 헌혈을 영웅적인 행동으로 포장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담겨 있다. 누군가의 박수를 기대하기보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바로 그 점에서 그의 헌혈은 더 깊은 울림을 갖는다. 차 의원의 헌혈에는 구의원다운 열정과 따뜻한 온정이 함께 스며 있다. 그 시간만큼은 직함도, 정치적 역할도 내려놓는다. 오직 한 명의 시민으로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또 다른 한 사람을 떠올린다. 혈액이 전달될 누군가의 오늘과 내일을 생각하며 팔을 내미는 이 행위는, 제도보다 앞서는 인간적인 연대이며 공동체를 향한 가장 직접적인 배려다. 정치는 종종 말의 영역으로 오해받는다. 그러나 지역을 위해 일하는 공직자의 신뢰는 결국 삶의 태도와 반복된 선택에서 쌓인다. 주민의 삶을 이야기하는 손이, 동시에 생명을 살리는 선택을 수십 년간 이어왔다는 사실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것은 정책 이전의 이야기이며, 정치 이전의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아름다운 열정은 요란하지 않다. 앞세우지 않고, 설명을 강요하지 않으며, 묵묵히 이어진다. 차성민 의원의 136번째 헌혈은 하나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조용한 메시지다. 이 사회는 아직 서로를 살피는 마음으로 버텨가고 있으며, 그 마음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말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 기획·연재
    • 오피니언리더스
    2026-01-23
  • [김홍제의 목요칼럼] 성심당 빵집이 던지는 질문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내 고향은 대전이다. 초,중,고 학교를 대전에서 다녔다. 대전은 유명한 ‘노잼 도시’였다. 그런데 새롭게 관광명소가 된 곳이 있다. 역사적인 사찰도 아니고 단풍이 고운 명산도 아니다. 빵집이다. 성심당 빵을 사려고 사람들이 줄을 서고 주변 칼국수 가게까지 사람이 늘더니 대전을 대표하는 명소가 되었다. 주말과 평일 가리지 않고 대전 중구 은행동 성심당 본점 앞에는 늘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쟁반 가득 빵을 골라 담는 사람들은 행복해 보인다. 빵집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궁금했다. 사람들을 이렇게까지 기다리게 하는 성심당의 힘은 무엇인가. 빵에 대한 진심, 합리적 가격, 약자를 위한 기부 등 성심당이 실천하는 '착한 기업'의 가치가 인기의 비결이라고 한다. 과연 성심당은 어떻게 70년 동안을 이어오고 있을까. 우리가 배울 점은 없는가. 학교도 이렇게 학생이 오고 싶은 곳이 되었으면 하는 욕심이 든다. 성심당은 빵집의 본질이 ‘빵의 맛’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본질에 대한 집요함이다. 교육도 다르지 않다. 교육의 본질은 입시 성과나 화려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배움이 실제로 일어나는 교실이다. 보여주기식 정책, 단기 성과, 수치화된 결과에 몰두하면 정작 수업의 질과 교사의 전문성이라는 핵심은 뒤로 미뤄진다. 성심당이 반죽과 오븐 앞을 떠나지 않듯 교육 역시 교실과 아이들 곁을 떠나면 안 된다. 성심당은 빵을 통해 말한다. 교육도 그래야 한다. 성심당은 전국 어디에나 있는 빵집이 되지 않았다. 대신 ‘대전에 가야만 만날 수 있는 빵집’으로 남았다. 모든 학교가 똑같은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똑같은 성취 기준만을 좇는 현실에서 학교는 특색이 없다. 학교는 지역의 역사와 삶, 아이들의 현실을 품을 때 비로소 살아 있는 배움의 공간이 된다. 과거에 학교는 지역사회의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성심당은 등록상표 43건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소비자의 입맛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부단한 연구와 상품개발을 통해 입맛을 선도하는 빵집이라는 말이다.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원칙이 있다는 말이다. 시대가 변했는데 과거의 틀을 고집하는 분야에서 성장은 없다. 성심당은 1956년 문을 연 이래 복지단체에 빵 기부, 수억 원 넘는 장학금, 미혼모와 신생아를 위한 병원 진료비 기탁 등을 해왔다고 한다. 법인 설립 뒤 20여 년 동안 펼쳐온 기부활동은 모두 120억 원에 이른다고 한다. 성심당의 인기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상승장만 가는 주식이 없듯이 언젠가는 내리막길을 갈 것이다. 하지만 빵을 만들어서 한 지역을 관광명소로 만드는 일은 드문 일이다. 거기에는 분명하게 배울 점이 있다. 성심당 임선 이사가 강연에서 밝힌 성심당 성공 공식은 ‘단기적 이익이 아니라 고객이 느끼는 가치에 집중한 게 성공 비결’이라고 한 적이 있다. 오늘 학교는 과연 본질에 충실하면서 따뜻한 가치를 존중하는가. 대전의 작은 빵집이 던지는 질문은 가볍지 않다. 성심당은 묻는다. “우리는 빵을 통해 더 따뜻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가치가 있다. 오늘날 학교는 과연 무슨 가치로 교육을 하고 있는가”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 중등교육과장
    • 기획·연재
    • 연재
    2026-01-22
  • [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은자가 들려주는 오래된 윤리학 - ‘인(仁)’과 ‘의(義)’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우리는 흔히 공자를 떠올리면 “인(仁)”이라는 글자를 함께 떠올린다. 공자가 평생토록 강조한 핵심 덕목이자, 동아시아 유교 전통의 근본 기둥이다. 맹자 역시 공자의 계보 위에서 ‘인의예지’ 네 가지를 세우며, 그 가운데 특히 ‘의(義)’를 인(仁)과 나란히 놓았다. 그래서 “어진 마음과 의로운 행동”이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윤리의 상징처럼 쓰인다. 하지만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 하나. 과연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인”과 “의”라는 글자의 의미는 본래부터 그랬을까? 대부분의 교과서 해설은 한자의 모양을 단순히 분석해 이렇게 설명한다. “인(仁)은 사람(人)과 둘(二)의 결합이다. 두 사람이 마주해 있는 모양이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어짊’이 생겼다.” 얼핏 그럴듯하다. “의(義)” 역시 ‘양(羊, 희생 제물)’과 ‘나(我)’가 합쳐져, 옳은 일을 위해 자신을 바친다는 뜻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이는 모두 지금의 한자 모양을 근거로 한 후대적 추측에 가깝다. 실제로 은자(殷字)를 들여다보면, 인(仁)과 의(義)의 뿌리는 훨씬 더 생생하고 구체적인 그림에서 시작한다. 글자가 태어나던 순간, 고대 동이족의 삶과 사유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 ‘인(仁)’ - 천 개의 마음을 가진 사람 은자에 나타난 ‘인’의 초기 형태를 보자. 얼핏 보면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듯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다. 사람의 정강이 부분에 난 다리털, 그리고 심장 모양이 결합된 형상이다. 다리털은 많음을 상징했다. 그래서 여기서는 ‘천(千)’, 곧 무수히 많다는 뜻으로 쓰였다. 심장은 말 그대로 마음, 정서, 동정심을 나타낸다. 이 두 요소를 합쳐 “천 개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개념이 탄생했다. 단순히 ‘사람 두 명’이 아니라, 무수한 마음으로 타인을 품는 너그러움과 연민, 곧 ‘어짐’이 글자의 기원인 셈이다.([그림 13] ‘仁’ 참조) 이후 갑골문 두 번째 단계에서는 의미가 더 확장된다. ‘천 개의 마음’ 대신에 ‘윗 상(上)’ 기호가 들어가, 윗사람이 백성을 향해 어진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으로 발전한다. 다시 말해, 임금이 여러 백성을 향해 자애로운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정치적 함의가 덧붙여진 것이다. 즉, 인(仁)은 공자보다 수천 년 앞서 이미 동이족 사회에서 윤리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공자가 새롭게 창안한 덕목이 아니라, 문자 속에서 오랫동안 숙성된 사유의 계승이었다. □ ‘의(義)’ - 정의를 세우는 무기 맹자가 강조한 또 다른 핵심은 ‘의’였다. 흔히 우리는 ‘의’를 추상적 개념으로만 이해한다. 하지만 은자 속 ‘의’는 매우 실천적이고 구체적이다. 은자를 보면, ‘의’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윗부분은 ‘수양’이라 불리는, 집단 내 권위와 리더십을 상징하는 도상이다. 아래는 ‘戈(과)’라는 창 모양, 당시 특수한 무기였다. 이 둘을 합쳐 ‘의’는 “집단 내 질서를 지키고 옳은 일을 위해 무력이나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뜻했다. 다시 말해, 의(義)는 단순히 마음속의 정의감이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무기를 들고라도 정의를 실천하는 행위였다. 사회 질서를 세우고 공동체를 보호하는 적극적 윤리의 실천이 바로 ‘의’의 뿌리였던 것이다.([그림 13] ‘義’ 참조) □ 동이족이 남긴 철학적 사유 이처럼 은자 속 ‘인(仁)’과 ‘의(義)’는 사람과 사회, 마음과 행동의 결합을 보여준다. ‘천 개의 마음을 가진 어진 사람’, ‘질서를 세우기 위해 무기까지 드는 정의’는 추상적 덕목을 단순한 도덕 규범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 장면 속에서 표현한 것이다. 이는 흥미롭게도 후대 서양 철학자들이 논한 사회계약론이나 정의론과도 맞닿아 있다. 인간과 사회의 관계, 권력과 정의의 균형, 개인의 도덕성과 집단 질서의 유지라는 질문은 이미 수천 년 전 문자 속에서 제기되고 있었던 셈이다. 공자와 맹자의 사유는 이러한 오랜 축적 위에서 다시 체계화된 것이다. □ 오늘의 의미 - 인의의 정신은 살아 있는가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삶에서 ‘인’과 ‘의’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인’은 여전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민과 배려를 가리킨다. 자연재해 때 서로 돕는 손길, 사회적 약자를 위한 연대, 나와 다른 존재를 향한 공감은 모두 ‘천 개의 마음’을 가진 인간의 실천이다. ‘의’는 억압과 불의에 맞서는 용기로 드러난다. 역사 속 의병 활동,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 현대 사회에서 불의한 제도에 맞서는 집단적 저항도 그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옳다고 믿는 가치를 위해 때로는 위험을 무릅쓰는 정신, 그것이 바로 의(義)다. 은자 연구는 단순히 글자의 원형을 복원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고대 동이족이 남긴 윤리학의 맥락을 오늘에 불러오는 일이다. 우리가 지금 “인의예지”라고 말하는 개념은 수천 년 전 문자 속에서 이미 실천적 윤리 개념으로 형상화돼 있었음을 보여준다. □ 맺으며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인(仁)과 의(義)의 해설은 대체로 지금의 글자 모양을 근거로 한 후대적 추측이다. 그러나 은자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仁)은 ‘천 개의 마음을 가진 어진 사람’, 의(義)는 ‘정의를 세우기 위해 무기와 권위를 동원하는 실천’이었다. 이 발견은 단순히 학문적 흥밋거리를 넘어선다. 그것은 동아시아 사상의 뿌리가 단순한 도덕 훈계가 아니라, 구체적 삶의 장면에서 출발했음을 일깨운다. 다시 말해, ‘인의예지’는 교과서의 추상적 표어가 아니라, 사람과 사회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실천 규범이었다. 오늘 우리가 겪는 불평등, 불공정, 분열의 문제 앞에서 “어진 마음”과 “의로운 실천”을 다시 생각하는 것은 결코 낡은 구호가 아니다. 은자가 전해주는 오래된 그림은 지금도 여전히 현재형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은 천 개의 마음으로 타인을 바라보고 있는가?, 당신은 옳음을 위해 무기를 들 용기를 지니고 있는가?”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 기획·연재
    • 기획
    2026-01-21
  • [오피니언리더스] 김광명 부산시의원이 보여주는 지방자치의 기준…"지역을 먼저 돌보는 정치"
    [교육연합신문=황오규 기자] 지방자치는 거창한 구호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주민의 일상에서 불편을 발견하고, 그 불편을 제도와 정책으로 해결하려는 책임감에서 출발한다. 그런 점에서 부산광역시의회 김광명 의원의 의정 활동은 지방정치가 지향해야 할 한 가지 분명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바로 ‘지역을 우선적으로 돌보는 정치’다. 김광명 의원은 의정 현장에서 줄곧 같은 원칙을 강조해 왔다. “정치는 멀리 보기 전에, 내가 맡은 지역의 삶부터 살펴야 합니다.” 이 발언은 단순한 신념의 표명이 아니라, 그의 의정 활동 전반을 관통하는 실천의 기준이다. 지역 민원을 피상적으로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문제의 구조를 짚고 행정과 예산, 조례로 연결하려는 접근 방식은 지방의원의 본래 역할에 충실하다. 특히 재난·안전 분야에서의 문제 제기는 김 의원 의정 활동의 중요한 축이다. 그는 본회의 5분 자유발언을 통해 화재 대응 역량 강화, 방연 물품 확충, 현장 대응 시스템 점검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제기해 왔다. “사고는 예고 없이 오지만, 대비는 선택의 문제”라는 그의 발언은 재난을 운에 맡기지 않겠다는 분명한 메시지다. 이는 통계와 보고서가 아닌, 주민의 생명과 직결된 현장에서 출발한 문제의식이다. 교육과 미래 산업에 대한 시선 또한 종합적이다. 김광명 의원은 “아이들이 살아갈 도시를 준비하지 않는 정치는 책임 있는 정치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교육의 기본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원칙과 함께, 인공지능과 신산업 기반 조성을 통한 지역 경쟁력 강화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역의 오늘을 돌보는 동시에,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는 광역의원의 책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정치에서 눈에 띄는 또 하나의 특징은 ‘속도’보다 ‘순서’를 중시한다는 점이다. 눈에 띄는 성과보다, 주민이 실제로 체감하는 변화를 먼저 생각한다. 화려한 수사보다 현장 점검을 택하고, 일회성 이벤트보다 제도 개선을 선택한다. 그는 이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정치는 기록에 남기기보다, 주민의 기억에 남아야 합니다.” 지방의회는 중앙정치의 그림자가 아니다. 지역의 문제를 가장 잘 알고, 가장 먼저 책임져야 할 곳이다. 김광명 시의원의 의정 활동은 이 당연한 사실을 다시 환기시킨다. 지역을 우선적으로 돌보는 정치, 생활 가까이에서 답을 찾는 정치가 결국 지방자치의 신뢰를 지탱한다는 점에서 그의 행보는 의미가 크다. 정치는 결국 평가의 대상이 된다. 그 평가는 말이 아니라 삶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삶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지역에서 시작된다.
    • 기획·연재
    • 오피니언리더스
    2026-01-20
  • [전재학의 교육칼럼] AI 시대, 우리는 무엇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
    [교육연합신문=전재학 칼럼] 인공지능(AI)은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저 멀리 미국의 미래 도시 라스베가스에서는 지난 1월 6일~9일까지 미국 소비자 가전협회에서 주관하는 ‘CES 2026’이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으며 진행되었다. 인간의 사고와 판단 영역까지 넘보는 AI 시대, 올해는 피지컬 AI인 휴머노이드 로봇과 자율주행 로봇의 진화된 모습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 여기에 당당히 도전장을 던진 우리의 자랑스런 스타트업 기업들의 AI 시대를 선도하는 모습에 진한 감동과 함께 힘찬 박수와 응원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학생들은 이미 생성형 AI와 함께 글을 쓰고, 문제를 풀며, 진로를 탐색한다. 그러나 정작 학교 교육은 “AI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만 머물러 있고, “AI와 함께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에는 충분히 답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드시 학생들에게 읽혀야 할 책이 있다. 바로 MIT 물리학자 맥스 테그마크(Max Tegmark)의 『라이프 3.0: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의 미래』이다. 이 책이 AI 시대의 필독서로 등장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라이프 3.0』은 기술 사용법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인공지능 이후의 인간 정체성, 윤리, 교육, 민주주의를 다룬 사유의 대표성을 가진 책이기 때문이다. 테그마크는 생명의 진화를 라이프 1.0(본능에 의해 결정되는 생명), 라이프 2.0(학습은 가능하지만 신체와 지능은 스스로 설계할 수 없는 인간), 그리고 라이프 3.0(스스로 지능과 목적을 재설계하는 존재)으로 구분한다. 인공지능은 인류를 라이프 3.0의 문턱에 세운 존재이며, 문제는 “가능한가”가 아니라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이다. 교육적으로 이 책을 강력히 권장하는 이유는 정답을 주지 않고 질문을 훈련시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저자는 묻는다. “AI가 인간보다 똑똑해진다면, 우리는 무엇을 목표로 설정해야 하는가?”, “효율이 최선의 가치가 될 때, 인간의 존엄은 어떻게 지켜지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단순한 철학 담론이 아니라, 교실에서 토론 수업과 프로젝트 학습으로 확장될 수 있다. 실제 사례를 들어 본다. 한 고등학교에서 『라이프 3.0』의 일부를 읽고 ‘AI가 교사가 되는 사회’라는 주제로 토론 수업을 진행했다. 학생들은 AI 튜터의 장점(개별 맞춤 학습, 공정성)과 한계(공감의 부재, 가치 판단의 문제)를 스스로 분석했다. 이후 한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AI는 답을 잘 주지만, 왜 살아야 하는지는 말해주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 깨달음이야말로 AI 시대 교육의 핵심 성취라 할 것이다. 『라이프 3.0』은 교사에게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지식을 전달하는 역할은 AI가 빠르게 대체할 수 있지만, 가치를 해석하고 책임을 가르치는 일은 인간 교사의 몫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학생뿐 아니라 예비 교사, 현직 교사, 교육 정책가 모두가 읽어야 할 책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교육은 더 많은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인간을 길러내는 일이 되어야 한다. 『라이프 3.0』은 그 방향을 잃지 않게 해주는 나침반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책을 교실로 들여와야 하는 이유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아이들이 AI를 두려워하지도, 맹목적으로 숭배하지도 않고, 책임 있게 설계할 수 있는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AI는 이미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있다. 학생들은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와 함께 글을 쓰고, 문제를 풀며, 진로를 탐색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학교 교육은 “AI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만 머물러 있고, “AI와 함께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에는 충분히 답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에게는 AI 시대에 반드시 읽고 이해할 필요성과 가치가 큰 서사에 눈길을 돌릴 계기가 필요하다. 따라서 각급 학교에서는 독서를 적극 권장하고 활용하여 혁명적인 AI 시대의 흐름과 진화하는 인공지능의 발전 모습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실용적인 교육을 실시할 것을 기대한다. ▣ 인곡(仁谷) 전재학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 前인천산곡남중학교 교장 ◇ 前제물포고·인천세원고 교감 ◇ [수능교과서 영어영역], [노스트라다무스] 공동저자 ◇ [월간교육평론], [교육과사색] 전문위원 및 교육칼럼니스트
    • 기획·연재
    • 연재
    2026-01-19
  • [김홍제의 목요칼럼] 새해에 내 안을 단순하고 깨끗하게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직원과 점심식사를 하는 시간에 전화가 왔다. 전에 같이 근무했던 지인이다. 전화하는 대부분은 부탁을 하는 내용이다. 간단하게 해결되는 일이 아니기에 부탁을 하는 것이다. 부탁을 듣고 나니 소화가 안 된다. 나도 쉽게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살다 보면 잡다한 고민이 많다. 선택은 곧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해 준다. 무엇을 내가 중요시하는지도 알려 준다.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만 나에게 문제를 던져 주는 상대방은 주로 내가 나쁜 사람 역할하기를 원한다. 사료를 먹고서 졸고 있는 개를 보면 행복해 보인다. 현재에 충실하고 미래에 대한 걱정도 없고 남에게 부탁을 받지도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반려동물을 키우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본능에 충실한 삶이 평안을 준다. 옛날보다 쌀밥과 고기반찬을 더 많이 먹는데도 행복감이 적다. 인간관계는 더욱 복잡해졌다. 얕고 넓은 모임이 많아지고 선택은 고민을 낳는다. 청렴하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비우는 것이다. 깨끗한 것이다. 욕심이 없는 사람. 가을 하늘처럼 맑은 사람이 되어보자. 매일 조금씩 버려보자. 법정의 ‘무소유’에서 비움의 철학을 살뜰히 말하지 않았던가. 물건을 버리면 집착이 없어진다. 삶이 불편할 정도로 비워내고 싶다. 현대는 적어서 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차고 넘쳐서 병이 되고 있다. 이발을 하고 손톱과 발톱을 깎고 샤워를 하고 거실에 누워 눈을 감으면 실구름처럼 몸은 가볍고 마음은 평안하다. 담담함은 얼마나 큰 기쁨인가. 형형색색의 간판이 있는 도시의 거리보다 조용한 오솔길을 걸을 때에 얼마나 영혼이 충만하고 좋았던가. 정리를 잘하는 사람은 차곡차곡 빈틈없이 쌓아놓은 것이 아니라 쓸모가 없어진 것을 과감하게 버리는 사람이다.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인식도 버리자.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의 가족들을 보라. 그들은 잠자가 죽자 모두 훌륭하게 자신들의 생활을 잘 꾸려 나갔다. 세상일에서 내가 아니면 망할 것 같은 망상을 버리자. 세상은 내가 아니어도 잘 돌아간다. 자유롭고 싶다면 비우자. 비우는 만큼 자유로워진다. 손에 움켜쥔 것을 놓으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짐승들은 몸이 아프면 단식을 한다. 자신의 몸을 비운다. 비우는 것이 자연이 가르치는 최상의 치유 방법이다. 일주일에 한 번은 잠자던 반려견처럼 자신에게 충실해 보자. 신이나 타인에게 주는 관심을 자기 내면으로 돌려보자. 새해가 되어 많은 성취를 꿈꾸고 체계적인 계획을 구상했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 겨울나무처럼 중요한 뼈대만 남기고 정리해야 한다. 너무 많은 계획도 욕심이다.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이라도 시간을 내서 내면을 깨끗이 하자. 새해맞이 집안 대청소도 필요하지만 내면의 묵은 때를 벗기는 시간도 필요하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것을 할 때 가장 행복하고 마음이 편안했는지 내 안을 들여다보자. 자기가 아닌 나머지는 버리자. 2026 병오년 말처럼 자유롭게 달리려면 먼저 안장 위 짐을 확 줄이자.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 중등교육과장
    • 기획·연재
    • 연재
    2026-01-15
  • [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법 속에서 사라진 짐승, 해치(獬豸)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어릴 적 나는 “법은 물처럼 흘러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물이 굽이쳐도 끝내 바다로 흘러가듯, 법도 억지로 틀을 짜 맞추기보다 자연스러운 흐름과 공평함을 지녀야 한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마주한 현실은 달랐다. 법은 종종 불공정했고, 정의와 거리가 멀었다. 법정의 판결이 “옳음”과 “그름”을 나눈다기보다 권력과 이해관계에 따라 기울어져 있다는 체험은 누구에게나 낯설지 않다. 그렇다면 법은 본디 무엇이었을까? 문자학의 눈으로 ‘법(法)’이라는 한자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놀랍게도 오늘의 법이 잃어버린 무언가가 보인다. 갑골문과 금문 속 ‘법’에는 신수(神獸), 곧 해치(獬)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 해치(獬), 옳고 그름을 가르는 짐승 해치는 전설 속 동물이다. 뿔이 하나 달린 짐승인데, 사람 사이에 시비가 벌어지면 반드시 그 가운데 옳은 사람을 알고, 그쪽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고 한다. 반대로 잘못한 자에게는 뿔로 들이받아 징벌을 가했다고도 전한다. 그래서 중국 고대의 재판 이야기를 담은 문헌들에는 해치가 법정 옆에 있었다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심지어 관복에 해치 무늬를 새겨 넣어 “나는 공정하게 판단하겠다”는 다짐을 상징하기도 했다. 갑골문 속의 ‘법’자는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물(水), 해치(獬), 그리고 거(去). 물은 평평히 흐르는 성질, 곧 공평함을 뜻했다. 거는 제거한다는 뜻, 곧 불의와 부정을 없앤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해치는 정의의 화신이었다. 세 요소가 함께 있을 때, 법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가리는 신성한 정의를 상징했다. 오늘날 법에 대한 회의적 인식과 달리, 고대의 법은 적어도 문자 속에서는 자연법적·정의론적 기초를 품고 있었던 셈이다. □ 사라진 해치, 남은 법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문자는 단순화되고 통일되었다. 진시황의 문자 정리 과정에서, ‘법’에서 해치가 빠져나갔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法자는 물(水)과 거(去)만 남아 있다.([그림 12] ‘法’ 참조) 이 변화는 단순히 글자의 획수가 줄어든 문제가 아니다. 법이라는 개념에서 정의의 상징이 지워진 것이다. 이제 법은 해치의 뿔 같은 초월적 기준이 아니라, 국가가 정한 규칙을 뜻하게 되었다. 법이 곧 정의라는 자연스러운 연상이 약해지고, ‘성문법’과 ‘실정법’이라는 제도적 의미가 강화된 것이다. 우리가 법정을 떠올릴 때, 판사 뒤에 앉아 있는 해치 대신 국가의 문장(紋章)이나 국기가 걸려 있는 모습은 이 전환의 문화적 결과다. □ ‘율(律)’이라는 또 다른 길 법과 짝을 이루는 글자로 ‘율(律)’이 있다. 이 글자 역시 흥미롭다. 갑골문을 보면, 손이 붓을 들고 길(道)에 무언가를 적는 형상이다. 곧 “길을 글로 적는다”, 다시 말해 사회의 질서와 규범을 문서로 기록한다는 의미에서 출발했다.([그림 12] ‘律’ 참조) 따라서 ‘율’은 처음부터 성문법, 제정된 규칙의 세계를 가리켰다. 반면 ‘법’은 본디 자연스러운 정의, 해치가 상징하는 옳고 그름의 감각을 담았다. 그렇다면 고대 사회에서 법과 율은 서로 보완적 관계였다. 하나는 정의의 원칙, 다른 하나는 그 원칙을 글로 고정하는 장치였다. 하지만 오늘날의 법 체계는 ‘율’, 곧 성문화된 규범 쪽으로 훨씬 기울어져 있다. 법조문이 두껍게 쌓이고, 조항이 무수히 늘어날수록, 해치의 자리는 더욱 희미해졌다. □ 이름의 흔적 - ‘해태’는 왜 해치인가 여기서 흥미로운 음운학적 문제도 나온다. 오늘날 우리는 흔히 해치를 ‘해태’라고 부른다. 마치 잘못된 이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고대의 운서(韻書)와 사전 기록을 보면, 獬(해)의 발음은 시대에 따라 [태], [해], [치] 등으로 달라졌다. 즉 [해태]라는 발음은 전승 과정에서 나온 오류가 아니라, 역사적 음운 변화의 산물이었다. 서울 광화문 앞의 돌짐승 ‘해태’는 그래서 결코 잘못된 이름이 아니다. 오히려 언어 변화를 품은 문화사의 흔적이라 할 만하다. □ 자연법과 실정법 사이에서 문자학적 분석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해치가 포함된 ‘법’은 자연법적 의미, 곧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초월적 기준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문자에서 해치가 제거되면서, 법은 점점 성문법과 실정법의 세계로만 기울게 되었다. 물론 문자의 단순화는 행정 효율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법이 정의의 상징을 잃어버린 것은 문화적 손실이기도 하다. 이제 법은 권력이 정한 규범을 집행하는 제도적 장치로만 이해되기 쉽다. 법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우리의 체감은, 어쩌면 갑골문 속 해치의 부재와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 오늘의 법, 그리고 잃어버린 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법치’를 강조하는 목소리는 크다. 그러나 그 ‘법치’가 과연 정의를 보장하는지는 늘 의문이다. 권력자에게 유리한 판결, 돈에 따라 달라지는 법의 무게를 보며 사람들은 법을 불신한다. 이럴 때 갑골문 속 해치의 그림을 떠올려 보면 어떨까. 법은 본래 물처럼 공평해야 하고, 불의를 제거해야 하며, 무엇보다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신성한 눈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말이다. 법의 제도적 개혁만이 아니라, 법에 내재된 정의의 상징을 복원하려는 문화적 성찰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법은 다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 맺으며 법(法)의 옛 그림은 단순하지 않았다. 물(水), 제거(去), 그리고 해치(獬). 그 셋이 함께 있을 때 법은 비로소 법다웠다. 해치가 사라진 뒤, 우리는 규칙만 남은 법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효율적일지 모르나, 때로는 정의를 잃은 빈 껍데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신문 지면마다 터져 나오는 법의 불공정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나는 다시 광화문 앞의 돌해태를 떠올린다. 거대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약간은 귀여운 그 모습. 하지만 그 뿔은 여전히 곧게 하늘을 향해 있다. 마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법은 단순한 규칙이 아니다.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눈과 뿔을 되찾을 때, 비로소 진정한 법이 된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 기획·연재
    • 기획
    2026-01-14
  • [김홍제의 목요칼럼] 학교의 위치와 한국 사회의 철학
    [교육연합신문=김홍제 칼럼] 학교는 언제인가부터 도시의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입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가 교육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대한 집단적 고백이다. 도시는 가장 비싼 땅에 무엇을 세우는지를 통해 사회의 우선순위를 보여준다. 백화점, 고급 주거지, 상업시설이 중심을 차지하는 동안 학교는 늘 외곽으로 밀려났다. 아이들의 미래보다 더 값진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학교는 가장 비싸고 좋은 땅에 있어야 한다. 나는 시골 지역에서 교장을 할 때 학생 화장실에 비데 있는 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행정실에서 돈이 없다고 했지만 우선 층마다 몇 개라도 만들자고 했다. 학교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공간이 아니다. 학생이 꿈을 꿈꾸고 미래를 설계하는 공간이며 한 사회의 철학이 형성되는 장소이다. 민주시민의 경험이 길러지는 공적 공간이다. 그렇기에 학교는 접근성이 가장 좋고 안전하며 문화, 자연, 공공 인프라를 누릴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 학교는 문화센터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교육 시설의 열악함은 무관심의 다른 이름이다. 아이들이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공간이 낡고 비좁으며 비인간적이라면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인가. 세계의 교육 선진국들은 학교를 도시의 자산으로 인식한다. 학교는 지역의 문화 거점이다. 공원과 도서관, 예술 공간과 연결되며, 주민과 함께 숨 쉬는 장소로 설계된다. 학교가 좋은 땅에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특권을 요구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아이들을 사회중심에 두겠다는 선언이며 교육을 투자로 보겠다는 사회적 약속이다. 가장 소중한 것은 가장 좋은 자리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가치를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있는가. 한국 사회는 분명하게 올바른 철학을 학생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 대답이 곧 우리 사회의 미래다. 학교는 미래에 대한 가장 확실한 투자이고 가장 멋진 투자이다. 공간을 같이 쓴다면 지역사회와의 연계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학교는 공공기관으로서 가장 많은 지역에 있다. 이 시설이 주민과 하나가 되는 체제가 되어야 한다. 가장 좋은 문화시설, 회의실, 영화관, 수영장, 도서관, 농구장, 공연장이 학교와 같이 한다면 학생과 주민이 모두 성장하는 모습이 될 것이다. 60년대 석탄이 이제 전기 난방으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학교 부지와 시설은 가난하다. 오죽하면 학생에게 학교를 생각하라고 하면 감옥을 연상하겠는가. 중고등학교도 강당만이 아닌 도서관과 동아리실, 수영장, 운동시설, 휴게실, 회의실을 모두 모아놓은 학생회관 건물이 있으면 좋겠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지역의 군수나 시장과 협의하여 주민시설을 학교 옆에 지어서 함께 이용하도록 했으면 좋겠다. 과감하고 놀라운 결단으로 학교 부지와 시설을 가장 좋은 곳으로 하는 법안을 만들어야 한다. 학생은 나라의 가장 귀한 보배이고 미래이다. ‘학교를 어느 곳에 세우고 어떤 대우를 하느냐’라는 문제는 한국 사회의 교육 철학을 보여준다. 반성해야 할 일이다. ▣ 김홍제 ◇ 충청남도교육청 중등교육과장
    • 기획·연재
    • 연재
    2026-01-08
  • [殷字·東夷·韓民族 이야기] 갑골문이 들려주는 ‘道德’의 뿌리
    [교육연합신문=육우균 칼럼] 오늘날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도덕(道德)’이라는 말을 쓴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도덕 교과서를 배우고, 정치인들은 늘 도덕성을 강조하며, 신문 지면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도덕적 해이가 문제라고 적힌다. 하지만 가만히 물어보자. ‘도덕’이라는 말은 원래 어디서 온 것일까? 길(道)은 어디서 왔고, 덕(德)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그리고 행(行)과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한자의 가장 원초적인 그림, 곧 갑골문이 우리를 맞이한다. 갑골문은 상나라 사람들이 점을 치며 거북 껍데기와 짐승 뼈에 새겨 넣은 글자다. 그곳에 새겨진 낯선 형상들은 오늘날 우리가 쓰는 추상적 개념이 사실은 매우 신체적이고 구체적인 이미지에서 출발했음을 보여준다. □ 사거리에서 시작된 ‘행(行)’ ‘행(行)’의 갑골문을 보면 의외로 단순하다. 네 갈래 길이 교차하는 사거리의 스케치다. 오늘날 우리가 ‘行’을 보면 길을 가는 사람, 행동하다, 행위라는 뜻을 떠올리지만, 본래의 출발점은 그냥 길 모양이었다.([그림 11] ‘行’ 참조) 여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이 그 길을 걸어간다’는 의미가 덧붙었다. 그렇게 ‘길 → 걷다 → 행동하다’라는 의미 확장이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행동’이란 본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저 길 위를 걷는 구체적인 몸짓이었다. □ 길이 철학이 되기까지 - ‘도(道)’ ‘도(道)’ 역시 갑골문에서 출발한다. ‘도’는 본래 ‘행(行)’과 거의 같은 그림, 즉 사거리 모양에 ‘사람이 걷는다’는 요소가 더해진 글자였다. 뜻은 단순하다. “사람이 다니는 길”.([그림 11] ‘道’ 참조) 그런데 후대에 이 ‘길’이라는 물리적 의미는 놀라운 확장을 겪는다. 삶을 살아가는 방법, 세상의 원칙, 마침내 노자에 이르러서는 우주 만물의 근본 법칙을 뜻하게 된다. ‘도’가 철학적·형이상학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문자학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애초에 들어 있던 뜻이 아니라, 후대 사상가들이 덧씌운 해석이었다. 처음의 ‘도’는 그저 네거리와 사람의 그림일 뿐이었다. □ 눈과 심장이 들어온 ‘덕(德)’ 그렇다면 ‘덕(德)’은 어떨까? 덕의 갑골문을 보면 ‘행(行)’, 즉 사거리의 모양에 눈(目)과 마음(心)이 덧붙는다. 앞을 똑바로 보며 걷는 마음, 곧 올곧게 나아가는 태도를 상징한 것이다.([그림 11] ‘德’ 참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덕의 의미가 단순히 개인의 미덕이나 인격적 성품이 아니라, 정치적 도구로서 재해석되었다는 점이다. 상(商) 왕조는 혈통을 통해 통치 정당성을 주장했지만, 주(周) 왕조는 달랐다. 그들은 혈통 대신 ‘덕’을 앞세웠다. 군주가 덕을 지니면 하늘이 그에게 천명을 내리고, 그렇지 않으면 정권은 다른 이에게 넘어간다는 식이었다. 공자 역시 이를 이어받았다. 그는 군자가 백성을 다스리려면 덕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 말은 동시에, 통치 질서를 정당화하는 사상적 장치였다. ‘덕’은 본디 사거리와 눈, 심장의 그림이었지만, 정치적 필요에 따라 ‘천하를 다스리는 근거’로 둔갑한 셈이다. □ 교육에서 ‘도덕’이 변한 길 이처럼 ‘도·덕·행’의 의미가 바뀌어 온 과정을 생각해 보면, 현대의 교육사도 그 연장선 위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제는 식민지 시절 ‘수신(修身)’이라는 과목을 통해 충성스러운 신민을 길러내려 했다. 해방 후에는 과목명이 ‘국민윤리’로 바뀌었고, 1960년대 이후에는 ‘도덕’이라는 이름이 굳어졌다. 최근에는 ‘윤리와 사상’, ‘생활과 윤리’ 같은 이름이 병용되고 있다. 과목명이 바뀔 때마다, 사회가 원하는 인간상도 달라졌다. 충성하는 신민, 국가에 헌신하는 국민, 도덕적인 시민, 혹은 합리적이고 사유할 줄 아는 주체. 도덕과 윤리라는 말은 단순한 학문적 개념이 아니라, 시대가 바라는 인간상을 만들기 위한 정치적·사회적 도구였다. □ 오늘의 사례 - 여전한 정치적 도덕 담론 이러한 맥락은 오늘날에도 계속된다. 강의에서 인용된 사례 하나를 보자. 2024년 중국의 대학입시, 곧 수능에서 고득점을 받은 한 학생의 글이 화제가 되었다. 그 글은 유려한 문장으로 가득했지만, 결국 핵심은 ‘개인은 덕을 지켜야 하고, 덕은 곧 국가와 민족을 위한 책임’이라는 메시지였다. 겉으로는 아름다운 말이지만, 그 이면에는 획일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담론의 흔적이 있다. ‘덕’을 강조하는 순간, 그것은 언제든 국가 권력이 원하는 방향으로 젊은 세대의 마음을 이끌 수 있는 장치가 된다. 3천 년 전 주 왕조가 그랬듯, 오늘의 국가들도 여전히 ‘덕’을 정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 갑골문이 전하는 비판의 눈 그렇다면 우리가 얻을 교훈은 무엇일까? 중요한 것은 문자학적 기원을 되짚는 일이 오늘의 도덕 논쟁에도 비판적 도구가 된다는 점이다. ‘행(行)’은 단순한 사거리 그림이었고, ‘도(道)’는 사람이 걷는 길이었으며, ‘덕(德)’은 눈과 심장이 더해진 올곧은 마음이었다. 그것이 정치와 사상의 필요에 따라 추상화되고, 정당화되고, 제도화된 것이다. 오늘날 도덕 교육이나 정치 담론 속의 ‘덕’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따질 때, 우리는 이 긴 역사를 함께 봐야 한다. 그래야만 논의가 단선적으로 흐르지 않고, 권력이 만든 규범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 마무리 - 길(道)에서 덕(德)으로 결국 갑골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도덕은 원래 길 위의 몸짓에서 출발했다. 네거리를 걷는 사람, 앞을 똑바로 보는 눈, 곧은 마음. 그것이 문자로 새겨졌고, 후대에 철학과 정치가 그 위에 층층이 의미를 덧입혔다. 오늘의 우리는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도덕’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우리 각자의 길을 비추는 마음인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충성을 강요하는 도구인가? 갑골문의 옛 그림은 우리에게 속삭인다. “도덕의 뿌리는 언제나 길 위의 사람과 마음에 있다.” 그 단순한 사실을 기억하는 순간, 도덕은 다시 권력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의 삶과 실천의 언어가 될 수 있다. ▣ 육우균 ◇ 교육연합신문 주필
    • 기획·연재
    • 기획
    2026-01-07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