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9-14(월)
 

[교육연합신문=문덕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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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생각’이란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유하지 않는 존재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고, 타인이 만든 시스템과 정답의 부품으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선진국의 지식과 기술을 수입해 모방하던 ‘전술 국가’의 성장은 이제 명백한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모방의 시대를 끝내고, 스스로 지도를 그리는 ‘전략 국가’이자 사유하는 사회로 대전환하기 위한 본질적 화두를 시작합니다.


생각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교실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창의성, 상상력 등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왜, 방법은 그대로일까요? 교육자들 역시 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잘 알고 있으나 현장이 요지부동인 이유는 교육 내부가 아닌 외적 평가 시스템의 거대한 관성 때문이기도 합니다.


즉 평가의 편리성과 줄 세우기 입시 때문도 한몫합니다. 수십만 명의 학생을 신속하고 공정하게 서열화해야 하는 대입 상대평가 체제에서는 ‘하나의 정답’을 요구하는 객관식 시험이 가장 효율적입니다. 또한 오답에 대한 사회적 공포도 있습니다. 질문과 사유는 본질적으로 방황과 실패를 동반합니다. 그러나 한 번의 오답이 인생의 낙오로 이어지는 서열 사회의 공포가 교사와 학생 모두를 “안전하게 정답만 외우는 수동성”에 가두어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수입된 지식을 넘어 ‘생각하는 교실’을 만드는 근본 처방은 없는 것일까요? 남의 전략을 수입해 쓰는 종속적 삶을 독립적 삶으로 바꾸려면, 교실의 문법 자체를 ‘정답 확인’에서 ‘문제 발견’으로 전면 재설계해야 합니다. 교사의 역할 전환이 필요합니다. 교사는 지식을 전달하는 강의자에서 학생의 사유를 자극하는 ‘질문 촉진자(Facilitator)’로 물러서야 합니다. 수업의 평가를 “선생님의 설명을 얼마나 정확히 적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독창적이고 허를 찌르는 질문을 던졌는가?”, “자신의 삶과 연결하여 어떤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는가?”로 바꾸어야 합니다.


공자가 말한 참된 학문은 남의 시선에 맞추는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니라, 오롯이 나 자신의 영혼을 채우는 공부입니다. 그렇다면 내면의 소명 확인이 먼저입니다. “나는 무엇을 할 때 가장 생생하게 살아있는가?”, “죽기 전 세상에 남길 나의 과업은 무엇인가?”를 규정하지 못한 채 기술만 익힌 인재는 결코 문명의 개념 설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문명 건설의 설계도는 타인이 아닌 ‘나’를 깊이 응시할 때 비로소 그려집니다.


미국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의 ‘하크네스 테이블(Harkness Table)’의 사례입니다. 교탁을 없애고 12명의 학생과 교사가 타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아 교사의 강의 없이 오직 학생들의 질문과 토론으로만 50분 수업을 채웁니다. 교사는 발언권도 통제하지 않으며 오직 학생 간의 사유 연결만을 관찰합니다.


유대인의 ‘하브루타(Chavrusa)’도 참고할 만합니다. 두 사람이 짝을 지어 서로에게 끊임없이 반론을 제기하고 질문을 던지며 진리를 파헤칩니다. “질문하지 않는 것은 배움을 포기한 것”이라는 인식이 교실의 기본 규범으로 작동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경쟁과 불안입니다. 자연과 문명 어디에나 존재하는 경쟁과 불안은 회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삶의 실존적 조건입니다. 경쟁과 불안은 좋고 나쁨 이전의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비교에서 오는 열등감이 아닌, 주체적 성장의 동력으로 이를 전환하는 태도입니다. 불안과 경쟁에 어떻게 대처하고, 극복할 것인가가 우선돼야 합니다. 


‘부쟁(不爭)’과 ‘위기(爲己)’에 대해서 노자는 말합니다. “스스로 다투지 않기에 세상이 그와 더불어 다툴 수 없다(夫唯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고 했습니다. 타인과의 비교 경쟁(외적 투쟁)을 멈추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며 덕(德)을 닦는 내면의 성장에 집중할 때 불안은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스토아학파의 ‘통제의 이분법(Dichotomy of Control)’에서 에픽테토스는 세상사를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나의 생각, 판단, 행동)’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타인의 평가, 결과, 사회적 경쟁)’으로 나누었습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외부의 경쟁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나의 내면적 태도에만 집중할 때 절대적인 평정심(아타락시아)에 도달한다고 합니다. 즉 남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경쟁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Its True. Asians Cannot Think.”, 1999년 미국 타임지의 기사는 서구의 문화적 편견을 담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답 암기에는 능하나 원천 개념 설계와 비판적 사유에 취약했던 동아시아 주입식 교육의 한계를 정곡으로 찔렀습니다. 외국에서는 생각하는 학생을 기르기 위해 다음과 같은 수업을 실행합니다.


프랑스의 철학 수업(바칼로레아)에서는 “예술 작품은 반드시 아름다워야 하는가?”, “자유는 포기될 수 있는가?”와 같은 열린 질문을 두고 1년간 논리적 에세이 작성과 반박 토론을 훈련합니다.


독일의 보이텔스바흐 합의 기반 정치·사회 수업에서, 교사는 학생에게 특정한 정치적 결론을 주입해서는 안 되며(주입 금지), 실제 사회의 논쟁 상태를 교실에 그대로 재현하여(논쟁성 유지) 학생 스스로 입장을 세우게 합니다.

 

영국·미국의 P4C(Philosophy for Children, 어린이를 위한 철학)에서는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그림책을 읽고 “공평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같은 철학적 질문을 아이들이 직접 투표로 선정해 토론 서클을 엽니다.


핀란드의 현상 기반 학습(Phenomenon-Based Learning)에서는 교과서를 덮고 ‘우리 마을의 쓰레기 배출 문제’, ‘인공지능의 윤리’ 등 현실의 복합 현상을 주제로 잡아 학생들이 가설을 세우고 해법을 탐구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미래를 여는 방향보다는 과거 회귀, 즉 우리 사회의 담론이 끊임없이 과거사 논쟁과 원죄 찾기로 회귀하는 이유는, 교실에서 “이미 확정된 과거의 정답을 외우는 훈련”만 반복해 왔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기획하는 사유를 배운 적이 없으니 논쟁조차 과거로 향합니다.


‘과거 몰두’와 복고적 함정을 끊어내는 방법은 있는 것일까요? ‘온고지신(溫故知新)으로 방점 이동입니다. 과거의 사실을 ’정답‘으로 숭배하는 복고주의를 버리고, 과거를 단지 미래의 문제를 풀기 위한 하나의 ‘참조 데이터’로 상대화해야 합니다.


역사 및 사회 수업의 평가를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묻는 단답형에서, “당시의 결정을 오늘날의 조건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10년 뒤를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라는 미래 기획형 과제로 전면 교체해야 합니다.


“세상엔 당연함이 없다.”는 깨달음이 먼저입니다. 세상이 내 뜻대로 굴러가야 한다는 기대가 깨질 때 인간은 분노하고 좌절합니다. 세상이 나의 기대를 들어주어야 할 의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만물정관(萬物靜觀)과 연기(緣起)로 인식의 전환입니다. 내가 숨 쉬는 공기, 매일 먹는 밥 한 그릇도 수많은 자연의 운행과 타인의 보이지 않는 노동이 연결되어 도달한 기적입니다.


당연하다고 여기던 것들의 연결고리를 역 추적해 보는 격물(格物)의 성찰이 필요합니다. “내가 누리는 이 일상이 타인의 어떤 수고와 자연의 어떤 순환 덕분인가?”를 매일 저녁 자문하는 ‘감사 성찰’이 자리 잡을 때, 분노는 사라지고 깊은 겸손이 싹틉니다.


말은 허공으로 흩어지는 빈말이 아니라, 입 밖으로 나와 다시 내 귀를 거쳐 영혼의 밭에 떨어지는 가장 강력한 씨앗입니다. 아이들의 거친 혐오 언어를 바로잡기 위한 외국의 실천 사례입니다. 미국의 SEL(Social and Emotional Learning, 사회정서학습)에서는 분노나 혐오 표현을 무조건 처벌하지 않고, 그 언어 이면에 숨은 감정(외로움, 수치심, 불안)을 스스로 관찰하게 합니다. “짜증 나”, “극혐이야” 대신 “지금 내 의견이 존중받지 못해 속상해”처럼 사실과 감정을 정밀하게 분리해 말하는 ‘비폭력 대화(NVC)’를 정규 교과로 훈련합니다.


정답을 베껴 적는 손으로는 결코 새로운 문명의 지도를 그릴 수 없습니다. 대답에 익숙했던 교실의 문을 열고, 아이들의 가슴속에 스스로 질문할 수 있는 자유와 여백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질문이 살아 숨 쉬고 언어의 품격이 회복되는 교실, 그곳이 바로 닫혀 있던 대한민국이 비로소 참된 생각을 시작하는 진정한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한자를 ‘하늘 천’, ‘따 지’식으로 무조건 외우지 말고 ‘하늘을 왜 천이라 할까?’, ‘땅을 왜 지라고 할까?’라는 식으로 물어야 합니다. 한자를 이렇게 보는 순간, 한자는 음을 중심으로 엄정한 체계와 질서를 드러내게 됩니다. 한자 속에 한글이 녹아 있고, 한글을 알아야 한자를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한자를 쓰지 않으면 우리말인 한글을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한자와 한글을 분리해서 봐서는 문자의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한자와 한글이 만나야 우리말의 뜻을 다 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의 문해력 신장과 기초학력 향상을 도모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한자 교육을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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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덕근

◇ 한자한글연구원장

◇ 고전연구가

◇ 한자실력급수 사범급(공인)·한자한문지도사 특급(공인)

◇ 교육학박사

◇ 前전남강진교육지원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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